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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후손 예수의 사역
(10) 하나님은 예수를 살리심
[마가복음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이것의 역사적인 배경은 이사야서 26장 19절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도 이사야서 26장 19절에 있는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탄은 인류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은 종교적인 대표자이고 정치적인 대표자로서는 로마인을 들어서 예수를 죽였다. 그 당시 세계에서 유대인과 로마인은 전 인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이 힘을 협력해서 예수를 죽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권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총독에게 고발하고 로마총독을 그것을 받아서 사형을 집행했다. 합력해서 예수를 죽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기득권에 관한 문제이다. 기득권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새로운 세력을 말살시킨 것이다. 이것의 근원으로 올라가면 아담의 결국 기득권이다. 아담은 자기 세계를 이미 가지고 있는데 아담의 세계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면 아담의 세계는 무너지게 되니까 아담의 세계는 결사적으로 방어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아담이 예수를 죽인 것이다. 그 뒤에는 사탄이 있다. 로마인인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아담이다. 이 아담이 자기세계를 잃지 않으려고 예수를 죽인 것이다.
이것이 드러난 것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다. 가인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러 갔는데 열납되지 않았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이 되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이것은 형인 가인이 자기의 기득권을 동생인 아벨에게 뺏기게 되니까 동생을 죽인 것이다.
오늘날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은 어찌하든지 그것을 보호하려고 한다. 뺏기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리비아의 대통령 카다피가 40년 동안 독재를 하다가 민중이 반기를 들게 되었는데 UN도 그렇고 국제사회가 물러나라고 하는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동원해서 끝까지 진압을 하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카다피는 지금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전 세계를 상대해서 투장을 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이것이 아담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기득권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기득권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주장할 필요가 없는데 아담은 이미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의 기득권을 빼앗기면 갈 데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아담이 그럴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득권을 가진 자가 기득권을 갖지 못한 자를 계속 축출해 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계속해서 몰아냈다. 가인과 아벨의 역사가 계속하고 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모양만 다를 뿐이지 똑같은 일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세상이라고 알면 된다. 가인과 아벨이 세상이구나. 그것이 바로 아담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구나. 그리고 아담의 세계라는 그것이 바로 아담에게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했던 그것이 지금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세계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전부 가인과 아벨의 일이다. 어느 누구 아무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문제가 아니고 가인과 아벨의 문제다. 세상은 어느 날은 가인이 되었다가 아벨이 되었다가 늘 그렇게 한다. 어느 때는 야당이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여당이 되었다고 하니까 어느 때는 강자가 되었다가 약자가 됐다가 한다. 그렇지만 근원은 언제든지 똑같다. 이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죽인 것이다.
유대인 회당에 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우리 교회 형제가 불쑥 얘기를 했다. 당신들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아니냐고 하니까 유대인 회당에 있던 사람이 아니라며 우리는 예수를 죽인 일이 없다고 했다. 자기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 배경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 사람이 유대인일 수가 있고, 내가 유대인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로마인인일 수가 있고, 내가 로마인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안 죽였다는 말도 맞는 말이고, 당신들이 죽였지 않느냐는 말도 맞는 말이다.
이렇게 됐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했는가? 이것은 분명히 합당하지 않은 질서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삐뚤어지고 부당한 질서를 바르게 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부당한 질서를 하나님이 옳게 만들어주어야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옛것을 끝냈다. 이것은 아주 다른 방법이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인과 아벨로 해서 쭉 내려온 이 거대한 역사를 똑 같은 힘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끝냈다. 왜냐하면 강자가 약자가 되고, 약자가 강자가 되는 일은 끝이 없다. 언젠가는 커지게 되고 언젠가는 또 약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통일되어 강대국이 되어서 만주를 침략하고 또 일본을 침략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서 폭삭 무너졌다고 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안 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언제든지 계속 있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들이 예수를 죽였지만 예수님의 통해서 모든 옛것을 끝내버리셨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이 끝내신 세계를 봐야 된다. 무엇을 끝냈는가? 가인은 가인대로 그냥 있고, 악인은 악인대로 그냥 있고, 강대국은 여전히 강대국이고, 약소국은 여전히 약소국이다. 고구려 때는 조금 컸었지만 중국에 비하면 조그만 나라 밖에 안 되었다. 이렇게 하고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생각으로는 그것이 바꿔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있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신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환경을 다 바꿔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끝도 없다. 못한다. 지금 있는 것을 이용해서 잘 살아야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육신으로 반 건강 상태로 일생을 산다고 하면, 다른 사람보다 삼분의 일인지 십분의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을 그것밖에 못쓴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환골탈퇴해서 자이언트가 돼서 살기를 바란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지옥에 가도 안 되고 천당에 가도 안 되고 안 될 일이다. 있는 것을 가지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취하려고 하면 없다. 자기에게 있는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야 한다. 무와 배추밖에 없으면 그것만 가지고 요리를 해야 되는 것이다. 무와 배추만 가지고 나는 요리를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요리사가 아니다. 무와 배추만 있으면 그것으로 하고, 무밖에 없으면 무만 가지고 요리를 해야 된다. 그래도 맛있게 하는 사람이 진짜 요리사다. 나는 이것 때문에 못한다는 것은 아주 하급이다. 무는 배추가 있어야 하는데 배추가 없으니까 나는 못한다면 이것은 아주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지푸라기에도 양념만 하면 먹는다는데, 오죽 모르면 그렇게 하겠는가.
보름에 나물 먹는 것을 서양 사람이 보면 완전히 여물일 것이다. 거기다 간을 맞춰서 어떻게 해놓으니까 먹게 된다. 다른 것이 아니고 간 맛이다. 그런데 보름에 찰밥을 먹을 때는 딱 그런 나물이 필요하다. 찰밥이 끈끈하기 때문에 금방 질려버려 먹기 어려운데 여물 같은 것을 섞어 먹어야 제격이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많이 해보고 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무슨 나물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도 여물 같은 나물인데 이것을 먹어서 뭐 되겠나 생각했는데 마침 누가 찰밥을 가져왔다. 찰밥을 먹으려니까 그것이 있어야 된다. 있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인생이다. 있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가 기술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것은 세상으로 말하면 완전히 끝장이다. 유대인만도 아니고 로마인만도 아니고 정치와 종교가 합하면 이것은 무서운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중세가 그런 때다.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합해서 하나가 되었던 시대이다. 그러니까 천하무적이다. 그랬으니까 세상에서는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업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은 그대로 놔두시고, 예수님의 죽음을 그냥 놔두시고, 우리가 보면 답답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뛰어내리게 하든지 획기적인 방법을 써서 가인과 아벨의 세계에 일침을 가하면 될 것인데 그것을 끝까지 보고 있어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말까지 듣고 앉아서 그렇게 답답하게 하고 계시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참 답답하신 분이다. 마지막에 왜 그 말을 듣느냐는 것이다. 좀 잘했으면 그 말을 안 들을 수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다. 그러면 거기서 뭔가 했으면 하나님 이름이 영락없이 높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데까지 가버리니까 하나님도 정말 안됐다. 왜 그러고 계시는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옛것을 끝내셨다. 우리 옛것이 끝나려면 그래야 끝난다. 우리 옛것은 겟세마네 동산까지 와서도 안 끝나는 것이다. 안 끝나고 예를 들어 하나님이 거기서 무엇을 도와줘서 뛰어내리게 한다든지 하면 되는가 하면 그러면 안 끝나는 것이다. 우리 것을 끝내려니까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지혜다.
여기서 옛것을 끝내고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새 창조를 일으키게 되었다. 건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옛날 집을 뜯어버리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건축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새로 지을 수 없으니까 뜯어버리고는 할 수가 없다. 돈이 많은 사람은 또 뜯어버리고 새로 지을 수 있다.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은 뜯어버리고 새로 지을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까 자꾸 땜질을 하는 것이다. 땜질하다보면 돈이 더 많이 들어갈 수 있다. 헌집 고치다보면 잘못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내가 해 봐도 돈이 엄청나게 많으면 싹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새로 해버리면 좋겠는데 항상 돈이 그렇게 안 된다. 싹 쓸어버리고는 못하겠고 이것을 어떻게 살려서 해보자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이 잘 안 된다. 그런 것을 재다 보니까 나는 일을 잘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릴 수가 있으시니까 끝내버리고 다시 시작하셨다. 그래서 새 창조가 일어난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니까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그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그냥 놔두고 있었다. 만일 거기서 뛰어내렸으면 보라, 새것이 안 되는 것이다. 뭔가 있어가지고 된 것이니까 보라 새것이 안 된다.
예수님이 살아났는가? 아니면 살림을 받았는가? 이 문제를 가지고도 논란이 있다. 스스로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능력이 있으니까 스스로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능력이 없었으면 나 스스로는 못산다. 누가 살려줘야 살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는데도 있고, 하나님이 그를 살리신지라 하는 데도 있다. 그런데 히랍어를 찾아보면 다 수동태를 사용했다. 살아나셨다 하는데도, 우리말로는 살아나셨다 번역을 했지만, 원문에는 수동태를 썼다. 피동태다. 그러니까 누가 살려줘서 산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스스로 살아난다. 그러면 신이다. 신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살아났다를 주장한다. 예수님께서 살아났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죽을 때도 자기가 스스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아까 말한 대로 모든 인류가 동원되어서 예수를 죽였다. 살 때도 누군가 살려줘야 사는 것이다. 나 혼자 죽은 사람은 나 혼자 살아날지 몰라도 내가 누구에 의해서 죽게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나 혼자 살아나겠는가. 그것은 이치에 안 맞는 일이다. 예수는 분명히 누구에 의해서 죽었다. 그러므로 살아나실 때도 누구에 의해서 살아나는 것이 맞다.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행13:30))라고 번역했다. ‘그가 살아나셨다’고도 하고, ‘그를 살리셨다’고도 했는데 문맥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살림을 받은 것’이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 스스로 살아났다면 의미가 없다. 우리 생각에는 그가 스스로 살아났으면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스스로 살아났으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살림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나도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사람인데 예수님은 혼자 스스로 살아났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사람은 우리 주님이 될 수가 없고 내 앞에 갈 수가 없다. 스스로 살아났으니까. 그런데 나는 스스로 살아나지 못한다. 스스로 살아났으면 너도 스스로 살아나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를 못 따라간다.
그가 누구에 의해 살림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살림을 받아서 살아났으니까 나도 살림을 받으면 되는구나. 죽은 지 사흘된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려서 살았다고 하니까 희망이 있는 것이지 저절로 일어났다면 참 신기한 인간이네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하나님이 살리셨기 때문에 의미가 있지 자기가 스스로 살았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스스로 섰다면 의미가 없다. 내가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절에 가면 필요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누구로 인해서, 무엇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깨닫게 하심으로, 그것이 의미가 있다. 이것이 쪼끄마한 차이 같지만 엄청난 차이다. 내가 스스로 산 것과 누군가 살려줘서 산 것은 하늘과 땅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스스로 산 것이 아니라 살려주셔서 산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살렸다. 온 인류가 합해서 사탄의 조정을 받아서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렸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도 아담 안에서 아담처럼 속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고, 우리는 아담처럼 바벨을 건설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고, 우리 속에 가인과 아벨이 다 들어있다. 우리는 불가능한 사람인데 이 사람에게 누군가가 와서 구원의 손길을 펼쳐서 살아나야만 희망이 있지 나 스스로 살아난다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부처님은 살아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부처님은 스스로 살아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석굴암에서 미소를 띄고 앉아있을 수 있다. 혼자 살았으니까 딱 미소를 띄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한테는 그런 미소가 없다. 죽는데 어떻게 미소를 짓겠는가.
하나님의 지혜는 참 놀랍다.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 자기는 그렇게 스스로 하는 것이 똑똑하고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대단한 사람이다.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다면 대단한 사람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 슈퍼맨이다. 그렇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나를 살릴 수가 없다. 그런데 누가 살려서 살렸다면 이것은 자존심도 없고 그냥 그런 것인데 나를 살린다. 누가 살려서 산 사람은 나를 살리지만 자기 스스로 산 사람은 나를 살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지혜는 참 놀라운 것이다.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오늘 우리는 지금 살리는 세계를 얘기하려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옛사람을 끝내심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옛사람을 끝냈다. 어떻게 끝냈는가?
1-1. 능력이 있어도,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하나님이 되지는 못 함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라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한 말이 맞았는가?
그러므로 이제 사탄으로 인해 들어 온 모든 것은 끝이 났음
능력이 있고, 얼마만큼, 신과 같은, 나사로도 살리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기도 한 신적인 능력이 있고, 선악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같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을 어디서 봤는가? 십자가에서 보면 그것이 보인다. 예수님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 같은 분이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저것이 사람인지 하나님인지 모르겠다. 저가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고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이지만 십자가에서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아니네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어쩌고 하더니 이제 보니까 아니네가 되지 않았겠는가.
직접 우리가 십자가에 가서 죽어가는 예수를 봤다고 생각해보라. 내가 예수를 보고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고백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지만 내가 만일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예수를 봤으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겠는가? 하나님이 죽는구나. 이렇게 생각했겠는가? 아니면 역시 사람이었네. 이렇게 생각하겠는가?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다. 누구든지 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말에 속고 있고 속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수를 보니까 아니네가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라! 그 사람을 보라!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 같으면 저 사람을 보라! 네가 능력으로든지 지혜로든지 하나님 같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을 봐라. 이 사람을 보고 네 마음을 돌려라는 말이다.
우리 속에는 깊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들어있다. 네가 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너는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무의식중에 다 들어있다. 어딘가에 가서 그런 장소가 되면 딱 튀어나와서 내가 재판관이 되기도 한다. 딱 보면 내가 재판장이 되어 있다. 재판장이 되었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이 되었다는 말이다. 재판장이라는 말이나 하나님이라는 말이나 다 같은 동의어이다. 능력이 있고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하나님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니 여기서 이상하게 인간이 끝난다. 총칼로 끝나는 것과 다르다. 강대국이 약소국이 되고 약소국이 강대국이 되는 것과 다르다. 내가 바닥부터 끝난 것이다. 다시 더 이상의 여지가 없이 끝난 것이다.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이 완전히 거짓말이다. 우리가 속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그냥 십자가에 두었는가. 왜 “하나님, 어찌하여 버리셨습니까?”할 때까지 그냥 놔두고 있었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거기서 만일 뛰어내렸으면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네가 될 것 아닌가.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네. 이것을 보고도 또 내가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은 그런 사람이다.
물론 오늘 당장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안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건 보듯이 그렇게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이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을 해 두면 그 사람을 보니까 아니네, 그 사람을 보니까 거짓말이네, 그 사람을 보니까 틀렸네. 어느 날인가 그렇게 알게 될 것이다.
사탄으로 인해서 들어온 것. 이 한마디 때문에 들어온 것이 세상이다. “네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창3:22)라는 그 한마디에 의해서 우리 인생에 들어와서 인생에 의해서 전개된 것이 세상이다. 우리 인간 세계에 엄청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다. 물질적이 세계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고 스마트폰이 끝났다는 이런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어서 헛된 가능성이 다 끝났다는 말이다.
1-2. 사탄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인생의 헛된 욕망은 끝이 났음
사탄의 말은 완전히 거짓말로 드러났고 인생의 헛된 욕망은 끝이 났다. 헛생각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도 보면 이것은 작은 것이지만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하고 좀 나대는 사람을 보면 우리가 주제파악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나대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 그 사람을 보고 지혜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리석다고 한다. 또 그런 사람은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 성공을 못한다. 항상 그 물에 들어가면 빠져 죽을지 안 빠져 죽을지를 모르고 수영을 하는 이런 사람이 된다.
헛된 욕망을 끝내면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야 우리가 하나님 말씀도 정상적으로 들리게 된다. 그 자리에 오지 않고는 말씀을 들어도 제대로 안 들린다. 구약시대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들었는가. 들었는데도 이것이 안 되니까 안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아직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 속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율법을 통해서 가능성이 있었다. 율법을 통해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선악을 아는 일에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는 이 말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율법을 보면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것이 없으면 그런 생각이 안 든다.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었는가? 그것을 끝내기 위해서 주었다. 율법을 보면 덤벼들 것이라는 것이다. 됐다하면서 덤벼들 것이다. 덤벼들면 죽는다.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고 바울이 그랬다. “너희가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율법을 보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면 나는 관계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내 양심으로 그것을 보면 옳다. 옳으니까 내가 덤벼들 것이다. 그런데 해보면 절망이다.
여기서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속 깊이 들어있던 것이 율법을 통해서 드러난다. 하나님 같이 되는가, 안되는가가 드러난다. 인생의 헛된 욕망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1-3.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으면 예수님 안에서 구속이 되고, 죄 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 감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거기서 나온 모든 욕망이 헛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하신 분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다. 이것을 믿으면 성경 말씀대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 말이 이래서 나온 말이다. 구속되고 죄사함 되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약속한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열린다. 여기서 시작해야 이 기초에서 시작해야만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것이 다 열린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외워야 한다. 이루어져도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 모르면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을 외우고 있어야 이거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다 외우시길 바란다. 거기 다 들어있다. 그냥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 그냥 예수를 건성으로 믿어서는 효과가 없다. 이걸 확실히 믿어야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끝내고 예수를 통해서 모든 인간을 다 끝냈다.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을 끝냈다. 한 사람 안에서. 자기가 또 다시 끝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를 끝내 보려고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이래도 보고 저래도 보고 기도도 해보고 무엇도 해보고 막 해본다. 그런데 자기를 끝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냐면 자기 성질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성질이 좋은 사람은 끝내려고 안 한다. 성질이 못된 사람이 끝내려고 한다.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이놈의 성질 때문에 곤란하다. 이래서 그 성질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끝내신 이것이 아니다. 이것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끝내도 똑같다. 다 끝난 사람도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것이 남아 있다. 모든 것이 다 끝나도 수양을 해서 완전히 다 맑은 물로 씻어 버려도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이것은 더 명백하게 남아 있다. 그럴수록 더욱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될수록 더욱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아예 차라리 개차반 같으면 나는 안 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제 갈고 닦으면 될 것 같지 않겠는가. 그래서 선한 사람이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고 선한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 어렵다. 기초가 어렵다.
이것이 참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끝난 줄 알면 내 주제, 내 정체성이 드러난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인생은 이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조용해진다. 내 생각이 조용해지고 시끄러웠던 모든 것이 잔잔해진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것이 사람들이 생각할 때 꼭 절망인 것처럼 생각을 한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절에 가니까 아주 자존심을 높여서 네가 부처다. 네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오니까 너는 십자가 안에서 죽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흙이다. 이러니까 절망적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살렸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예수를 살렸다.
2-1. 죽으심은 새 창조의 기반이 되고 (구속, 속죄) 부활은 영생의 출발이 되었음 (교회, 연합, 영생)
죽으심은 새 창조의 기반이 됐다. 새집을 지으려면 집을 닦아야 된다. 구속과 속죄라는 것은 기반이다. 구속과 속죄가 목표가 아니다. 이것은 집을 짓기 위한 기반이다. 구속과 속죄는 인프라(infra)를 구축하는 것이다.
부활은 영생의 출발이다. 교회!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로 되는 것이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연합!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로 되는 것이다. 영생!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로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세계다. 구속과 속죄는 수단이지만 교회나 연합이나 영생은 목표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살렸다. 이것은 그냥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리는가? 이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살리신 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고 연합을 위한 것이고 영생을 위한 것이다. 교회도 있고 연합도 있고 영생도 있다. 부활을 했는지 안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예수님이 부활한데를 안 가봤으니까 모르지만 부활로 인한 교회, 부활이 아니면 교회가 안 된다. 부활 아니면 연합이 안 되고 부활 아니면 영생이 안 된다. 그런데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시인하는 것이다.
2-2. 한 새사람이 탄생 됨
여기서 한 사람이, 한 새사람이 탄생된 것이다. 이 한 새사람이란 말은 단체적인 사람을 얘기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해서 하나의 새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말한다. 한 새사람, 다른 하나의 인류가 태어났다는 말이다. 새로운 인류가 태어났다. 사탄의 죽이는 세계가 끝나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는 세계가 열렸다는 뜻이다. 하나는 우리를 속여서 죽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고 속여서 우리가 사망에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사망이다. 갈수록 더 사망이다. 열심히 하면 더 깊은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끝없이 사망의 세계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마찬가지로 사탄의 세계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세계는 죽이는 세계이다.
개에게 어느 예언자가 가서 너는 인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면 얼마나 듣기가 좋겠는가. 개가 오늘 참 복음을 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날부터 사망이다. 왜? 해보면 해 볼수록 사람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갈수록 사망이 아니겠는가. 더 열심히 노력할수록 더 사망이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은 하나님처럼 될 수 없는 사람에게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참 좋았다. 그때는 너무너무 희망에 찾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사망이다. 그래서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라고 했다.
2-3. 사탄의 죽이는 세계가 끝나고 하나님의 다시 살리는 세계가 열림(요11:25)
이제는 반대로 죽이는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이 살리는 세계가 열렸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고 했다. 이것은 살린다는 말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우리가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예수 믿는다고 죽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라는 말은 자기는 살리는 자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는 살리는 것만 있다는 말이다. 죽이는 것이 있지 않고 살리는 것만 있다.
그러나 아담 안에는 죽이는 것밖에는 없다. 뭐든지 다 죽이는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하는 말과 동시에 거기에 속하여 있는 모든 말들은 전부 죽이는 말들이다. 해보고 내가 안 되니까 이거 안 되더라고 하면 이렇게 해봐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해보라는 것도 죽이는 말이다. 그래서 또 안 된다고 하니까 저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모든 말이 다 죽이는 말이다. 아담의 말은 다 죽이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은 다 살리는 말이다. 예수님은 다 살리는 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 안에 오면 모든 것이 다 살아난다. 죽었던 것은 살아나고 안 죽었던 것은 죽을 필요가 없다. 죽었던 것도 살아나는데 안 죽은 것은 죽을 필요가 없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니까.
이것은 다른 세계이다. 사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모든 것이 살리는 것이다. 살리는 길로 들어서면 모든 것이 살리는 것만 있고, 죽이는 길로 들어서면 모든 것이 죽이는 것만 있다. 죽음의 길로 가면 하나하나가 다 죽음의 길이다. 밥 먹는 것도 죽음의 길이다. 죽으려고 먹는 거니까. 사형언도를 받고 살고 있는 사람은 밥 먹는 것도 죽는 것, 오줌 누는 것도 죽는 것, 잠자는 것도 죽는 것, 죽는 나를 위해서 지금 가는 것이다. 사형언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죽을 수가 없다. 스스로 못 죽게 해놓은 것이다. 그 사람한테 칼 주면 자기가 죽을 것이니까 칼을 안 준다. 가둬 놓고 법에 따라서 정해진 날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날까지 먹어야 한다. 죽을 것을 뭣 하러 먹나, 안 먹어야 되겠다고 하지만 배고프니까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배고파서 먹는 것은 죽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정해진 날 죽기 위해서.
사탄의 모든 말은 모든 것이 다 죽는 것이다. 하나도 살리는 것은 없다. 새 옷을 갈아 입혀도 그것은 죽이는 것이고, 헌 옷을 입어도 죽이는 것이고, 방을 따뜻하게 해주어도 죽이는 것이고, 춥게 해주어도 죽이는 것이고 다 죽이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선이 그 안에 있으니까 죽기로 정해진 사람이니까.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생명이다. 모든 것이 다 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을 이제 알 것이다. 그럼 사탄은 무엇인가? “나는 사망이요, 죽음이니.”라는 말이다. 그런 말은 듣기 싫은 말이니까 안 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3.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행2:32,33,3:15)
이제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를 보자. 하나님이 살린 사람은 어떻게 되었냐는 것이다.
3-1.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심(행224) ⇒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이 풀어짐
사도행전 2장24절에 보면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사망의 고통이라는 말은 단절의 고통을 말한다. 무슨 단절인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우리는 그것을 못 느꼈다.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을 우리는 못 느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들을 보면 그것을 느끼고 있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고통으로 느끼고 있다.
고통을 느끼는 것도 종류가 다르다. 껌을 못 씹어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극장을 못 가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 교회에 못 와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고통을 느끼는 것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어떻게 고통을 느끼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어떠함을 말한다. 뭘 가지고 고통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사람한테 고통이 없겠는가? 다 있다. 누구든지 다 있는데 무엇으로 고통하는가가 중요하다.
시편의 기자들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다윗 같은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단절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내가 내 백성과 함께 성전에 올라 갈 때의 일을 생각합니다.” 지금 도망쳐서 외로움에 처해 있다. 거기서 무엇을 호소하는가? 백성과 함께 성전에 올라가면서 찬양하던 그때의 기쁨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류가 다 다르다.
3-2. 오른 손으로 높이심(행2:33) ⇒ 하나님의 권능이 회복 됨
“오른손으로 그를 높이셨다.”고 했다. 오른손은 권능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인격적 권능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신적 권능은 그냥 있다. 그것은 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으니까 인격적 권능이 행사되지 못한다.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야할 하나님의 권세가 안 나타난다. 이것이 높아졌다는 말이다. 이것이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3-3.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행2:35) ⇒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회복 됨
하나님 우편에 앉히셨다는 말은 하나님 모양과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3-4.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심(행2:36) ⇒ 새 창조의 주로 위임 받으심
또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 주(主)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쓰던 말로써 구약에서 여호와에게만 쓰던 말인데 주가 되었다는 것은 새 창조의 주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되게 되었다는 것은 새 창조의 주로써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3-5. 영화롭게 하심(행3:13) ⇒ 하나님의 표현으로 서게 되심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표현이 되었다. 하나님의 표현으로 서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살린 사람은 이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린 사람을 수건을 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만 생각하지 말고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아난 사람이구나. 오른손으로 그가 높여진 사람이구나. 하나님 우편에 앉은 사람이구나. 주와 그리스도가 된 사람이구나. 영화롭게 된 사람이구나.
3-6.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이 되게 하심 ⇒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대표 되는 인류를 연합시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축이 되심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이 되었다. 집 모퉁이라고 할 때의 집은 성전이다. 하나님의 전을 짓는 모퉁이의 요긴한 돌이 되었다. 이것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해서 교회를 만드는데 있어서 요긴한 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류를 연합시키는 요긴한 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류를 다 연합시키는 요긴한 돌이 되었다.
석가모니는 잘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석가모니가 온 인류를 연합시키기에는 좀 부족한 것 같다. 모든 것이 다 연기라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다 인연에 의해서 된 것이니까 그냥 다 인연으로 알자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해소 시키는 방법은 된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때렸다고 하면 내가 저놈한테 맞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저놈과 나는 인연이다. 내가 어디서 어떤 일을 저질렀기에 그 인연이 이리로 와서 나를 때린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문제가 좀 해소가 되기는 하지만, 술에 물을 탄 것처럼 좀 해소가 되기는 하지만 근원적인 해결이 되지는 않는다. 연합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예수 안에, 십자가 안에 와야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분은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데 있어서 축이 되신 것이다. 증산도에서는 천지공사라고 하는데, 천지공사의 축은 예수다. 강증산이 어떻게 그 축이 되겠는가? 될 수가 없다. 좋은 말씀을 가르쳤을지는 몰라도 축이 되지는 못한다. 예수만 축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와서는 다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기에 와서 다 헤쳐 모여가 된다. 다 똑같은 것이 되기에 다시 가면 된다.
주인의 뜻에 따라서 서까래로 쓸 수도 있고 기둥으로 쓸 수도 있고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된다. 십자가 안에 온 사람은 주인이 쓰고 싶은 대로 쓸 수가 있다. 서까래로 쓴다고 해도 이의가 없고 기둥으로 쓴다고 해도 이의가 없다. 한 번제 안으로 우리를 이끌기 들이기 때문에, 한 목적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만 우리가 하나가 될 수가 있다. 예수 이외에서는 하나가 될 곳이 없는 것 같다. 공자님을 통해서도 좋은 말씀을 배울 수는 있지만 하나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석가모니를 통해서도 문제를 해소 할 수는 있지만 하나 될 수는 없다.
술에 물을 탄다고 술이 아니겠는가? 술에 물을 타더라도 술은 술이다. 조금 독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덜 취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어차피 그 알코올을 먹으면 그 만큼 취한다. 맥주 먹어도 취한다. 맥주는 도수가 약하지만 소주보다 많이 마신다. 소주는 조그마한 잔으로 먹는데 맥주는 커다란 컵으로 마시기에 안 취할 수가 없다. 심심하니까 많이 먹게 되어 어차피 알코올 양은 같이 들어가게 된다. 술이라는 것은 취하려고 먹는 것이니까 결국 취하게 된다. 물 타기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살린 사람은 이렇게 살린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이 살린 사람을 여러분들이 볼 수가 있다. 아이고 난 부활한 예수를 본 일이 없는데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린 사람이 지금 우리에게 있으니 그것을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린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오늘도 하나님이 살린 사람을 볼 수 있다. 부활한 예수를 본 일이 없네가 아니고 하나님을 살린 사람이 지금 우리에게도 있다. 그것을 보라는 것이다.
4. 어떻게 이 사실을 믿는가?
4-1. 예수로 인하여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음으로(행2:38,골1:14)
어떻게 이 사실을 우리가 믿을 것인가? 지금까지 말만 했어도 여러분들이 다 믿을 것이지만 그래도 좀 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예수로 인하여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을 보고 나의 헛된 욕망이 없어지니까 나는 저절로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원한이 없게 되어 죄가 저절로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효과, 결과에 대해서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이것은 남의 말이 아니고 우리말이다.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앞으로 받을 것이 아니고 지금 받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 그렇게 죽으신 것 속에, 내가 구속을 받은 것이다. 내가 따로 또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신이 죽었으니 이제 나를 구속해 주십시오. 이 말이 아니고 그분이 죽으신 자리가 곧 우리의 구속이다. 그는 우리의 구속이신지라. 그는 우리의 구속이라는 말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구속이다.
4-2. 성령을 받았음으로(요14:16-17,행2:38)
(생명을 위한 내재적 본질로서, 능력을 위한 외적 요소로서)
성령을 받았으므로! 여기서 좀 헷갈릴 수 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다고 하면 번쩍 번쩍 뛰어야 된다고 다 생각한다. 뛰는 것도 있고 안 뛰는 것도 있고 두 가지다. 우리 안에 내재적으로 생명이 된 성령도 있고, 우리를 밖으로 움직이고 춤추게 하는 성령도 있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성령은 보통 밖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은사에 속한다.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리고 했다. 이것은 생명의 내재적인 본질을 말한다.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능력으로써 이것은 영원토록이 아니고, 있다가도 없을 수 도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했다. 이것은 외부적인 것이다. 이것은 능력을 위한 외적인 요소다. 그러니까 있다가도 없을 수 있다.
어떤 때는 충만해서 만지기만 해도 불이 나가고 만지기만해도 병이 낫는데 항상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때 가면 이것이 안 될 수 도 있다. 그것은 외적인 요소다. 둘 다 있으면 좋겠지만 밖에 것만 있고 안에 것이 없으면 이것은 좀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안에 것만 있고 밖에 것이 없으면 조금 부족하긴 해도 살 수는 있다. 우리는 생명의 내재적인 본질로써의 성령이 더 필요하다. 우리 안에 성령의 내재적인 본질이 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안 그러면 미쳤다고 여기를 오겠는가? 안 온다.
4-3.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음으로(행2:40)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패역이란 말은 삐뚤어 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세대라는 말은 원래 가족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패역한 세대라는 말은 삐뚤어진 족속들, 삐뚤어진 혈통, 삐뚤어진 민족이라는 뜻이다. 얼른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너희 삐뚤어진 유대인 속에서 나오너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삐뚤어진 너희 혈통에서 나와야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 속에 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안 들리겠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들렸을 가능성이 많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바로 그런 세대에서 나와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나와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까 나와서 세례를 받고 그날에 3천 명이나 회개를 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모두 유태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유태교에서 나오면 구원이다. 더 이상 천당까지 안 가도 유태교에서 나온 것 자체가 구원이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다.
오늘 우리는 또 어떤가? 삐뚤어진 아담의 세계에서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빼딱한 사람이 아니고 제대로 돌아온 사람이 되었다. 옛날 일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 빼딱한 사람이었다. 보는 것이 다 빼딱했었다. 이제는 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서 빼딱하지 않게 되었다.
4-4. 한 새사람(교회)을 보고 이룸으로(엡2:15)
한 새사람을 보고 우리가 이루게 되었다. 한 새사람은 교회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 유대인과 이방인은 전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전 인류를 대표한 이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인 이유로 서로 원수 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종교적인 이유로 원수가 되고 양심적인 이유로 원수가 된다.
이 사람이 결국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화목 되어서 합해서 한 집이 되었기 때문에 화평하게 되었다. 먼데 있는 너희에게 가까이 있는 너희에게 이것을 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도행전이나 이런 곳에 나오는 복음은 전 세계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해진 것만 해도 복음이다. 왜냐하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화평이 없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 지금도 모슬렘과 기독교인이 합해졌다면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모슬렘과 기독교인이 합해지지 못한다. 서로 아니라고 하니까. 기독교인들이 선교한다고 들어가서 작년인가 두 명 죽었다. 모슬렘한테 그냥 총살당했다. 그렇게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 이렇게 적대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딱 허물어져서 대구에 다 와 버렸다면 복음이다. 대구교회에 오면 모슬렘이나 기독교나 다 없다. 모슬렘도 없고 기독교도 없이 교회가 건축된 곳은 대구교회 밖에 없다. 옛날에 모슬렘에서 온 형제가 있었다. 자기는 알라라고 하고 우리는 여호와라 해도 상관이 없다. 그 이름이 그 이름이니까 아무 지장 없었다. 우리도 지장 없고 자기도 지장 없고 아무도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데 가면 그렇지 않다. 모슬렘이 어떻게 기독교에 가서 예배를 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섯 번을 절하나 열 번을 절하나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 교회에 오면 통일이 된다.
한 새사람! 우리는 이것을 봤다. 누구도 다 하나가 될 수 있는 한 새사람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부활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그 사람들을 볼 때 하나로 봐지는 것은 부활의 세계 안에서다. 부활하기 전에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곱게 볼 수가 없다. 성격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다 다른데 그것을 같이 볼 수가 없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것이 허물어진 다음에야 그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한 새사람을 보고 있는데 이것이 어디에서 근원이 되어서 왔는가? 예수로 말미암아 왔다는 것이다. 그분이 죽고 다시 살았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다. 이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계속해서 살리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한번 죽고 나서 다시 살았기 때문에 다시는 죽을 필요가 없다. 성경에는 “한번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죽지 않는다.”(롬6:9)고 말한다. 그 말이 무엇인가? 다시는 죽음의 길이 없다, 계속 살리는 길만 있다. 사는 길만 계속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은 사는 길만 놓여 있다.
하나님의 길은 생명의 길이다. 예수의 길이 바로 생명의 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 주러 왔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 죽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죽어야 된다. 안 죽어도 매일이 사망이다. 내가 살려고 발버둥 쳐도 매일 사망이다. 이제는 우리가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살아난다. 왜냐하면 죽음의 요소가 가 버렸다. 죽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끝나 버렸다. 예수를 보면서 저것이 거짓말인 것을 딱 알고 나니까 죽음의 요소가 끝나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연습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더 이상 사망을 연습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더 이상 사망을 시험해 볼 필요가 없게 됐다. 이제는 우리가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을 알았다. 죽음을 길을 알고서 누가 죽음의 길을 가겠는가? 생명의 길을 간다. 이것을 알고도 죽음의 길을 간다면 그것은 자기 마음이니까 할 수 없다.
예수 안에 있는 길! 이것은 생명의 길이고, 사탄에 있는 아담 안에 있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사망으로 가는 길이다. 모든 것이 사망이다. 자도 사망 일어나도 사망 먹어도 사망 앉아도 사망 모두가 사망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렸다. 온 인류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렸다. 이것이 너무 너무 중요하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 십자가가 중요한가? 그것은 하나님이 살리셨기 때문에 중요하고, 하나님이 이 십자가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다른 사람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 옆에도 십자가를 지고 두 사람이나 죽었다. 그 외에도 로마에서 극형은 십자가니까 강력범은 다 거기서 죽었다. 얼마나 많이 죽었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지 못할 십자가다. 예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십자가였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는 효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죽어도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도록 죽으면 참 복이다. 우리도 죽을 때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도록 죽으면 좋겠다. 죽을 때도 쓸모없이 죽는다면 참 비참한 것 같다. 너무 욕심이지만 죽는 것이라도 좀 유용하게 효과 있게 죽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죽었는데 하나님이 쓰실 수 있게 죽었다. 그러니까 살리는 것도 하나님이 살리시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살리신 세계에 왔다. 하나님이 살리는 세계에 왔다. 죽이는 세계는 끝났다. 십자가를 보기만 하면 죽이는 세계는 끝났다. 내가 죽음을 실험하고 있던 것은 그 자리는 끝났다. 더 이상 내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도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이미 결정을 해 놓았는데 예수 안에 결정해 놓았는데 또 거기 갈 필요가 없다.
생명의 길로! 살리는 길로! 우리를 부르신 주님을 찬양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옛것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까지 아들을 십자가에 두신 것을 감사하고 그를 다시 살리셔서 우리의 소망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살리시고 하나님이 쓰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이렇게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으니 이제 우리의 길은 소망 밖에 없고 이제 우리의 갈 길은 사망과는 무관한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보내신 것을 감사합니다. 영원한 길로 보내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