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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을 때도 자주 서신왕래로 아버지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한국을 떠난 후 바로 경남 양산의 개운(開雲)중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재직하며 민족교육사업을 시작하셨다고 하였다. 나는 농담으로 숯구이사업보다 훨씬 낫다고 격려를 해 드렸는데 실상 교육사업만큼 중요한 사업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억지로 교도소에는 계실 수는 있지만 밖에 나와서도 가만히 집에 계신다는 건 아버지에겐 거의 불가능하신 것 같아 참 잘 되었다 싶었다. 교도소 안에서조차 아버지는 잠시도 쉬기않고 글을 쓰시고 책을 읽으셨고 그로부터 7년 후 뇌졸증으로 쓰러지신 후에도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써 두셨던 원고와 누워서 구술로 받아적게 한 것을 합해 책을 두 권이나 내셨으니 평생 아버지의 그 활동성은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그 때 동아대 가정과를 졸업한 동생 우기(雨紀)는 그 개운중학에 가정과선생으로 부임하고 막내 옥토(雨州)는 그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그 다음해 봄엔 서울서 한 친구가 왔다. 대학 동창인 바이올린 전공의 강효원(姜孝遠)으로, 외롭던 차에 어찌나 기쁘던지 실상 학교 다닐 때는 별로 같이 얘기할 기회도 없었던 사이였는데도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만나 수다를 떨며 공자의 삼락(三樂)중 하나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유명한 금융인으로 탄탄한 재력의 집안이었는데 그녀가 미국간다하자 미국에 있는 아들들이 마땅한 규수가 없어 늘 걱정이던 엄마들이 모두 달려와 '좋은집안의 규수'를 며느리 삼고자 미국 가거든 제발 자기 아들 좀 만나 달라고 부탁을 했다한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 유학가기가 정말 힘들어 거의 남자들만 가고 여자들은 가뭄에 콩나듯 가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중에 추리고 추려서 네명의 명단을 들고 왔는데 전부 한번씩 만나보려 한 것이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있던 동네에 살고 있어 그곳으로 왔고 그만 그 남자에게 붙잡혀 버린 것이다.
그 남자는 한국에서 연세대를 나와 미국에 와서 우리 학교에서 컴퓨터 전공을 하여 졸업 후 한 컴퓨터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리하여 속성으로 그 다음 달 그와 결혼 계획을 잡아 놓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는 법대출신의 강기원(姜基遠 변호사)인데 그 몇해 전 김학준(전 인천대 총장)과 결혼하여 은수라는 딸을 낳았다. 김학준은 강기원언니보다 두해 후배로 최무수와 같은 정치과 동창인데 그 한 해전에 미국에 와서 박사학위 공부한다고 한창 고생 중이었다. 강기원언니가 결혼한 계기는 효원이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한 남자친구가 커피마시러 나오라고 전화가 왔는데 마침 샤워 중이라 언니보고 자기가 나갈 때 까지 언니가 대신 나가 접대 좀 해달라 했다 한다. 언니가 나가는 길에 그 다방에 들렸더니 그 남자가 같이 데리고 나온 사람이 바로 김학준이었고 머리가 두째가라면 서러워할 수재들인 김학준과 강기원은 금방 말이 잘 통해버려 효원이가 잠시 후 나갔을때는 이미 두사람은 친해져 있었다 한다.
김학준은 문리대 삼대 천재에 드는 학생이었다. 조화유(사회학과졸업 영어회화신문칼럼 고정연재인), 김학준 그리고 한사람이름은 잊었다. 중요한것은 김학준이 학생 때 어느날 문리대 앞 길가게 돗자리를 펴고 사주를 봐주는 한 영감에게서 재미삼아 사주를 보았는데 그 영감이 '학생은 나중에 총리가 될 사람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학준은 인천에서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온 가난한 집의 수재였는데 그 영감의 말을 꼭 믿고 자기는 앞으로 총리가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한다.
요즘 유행하는 씨크릿 이론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꼭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믿는다면 운명은 그렇게 그의 인생을 그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겠는가. 그는 그렇게 부잣집 맏사위가 되어 미국유학을 갔으니 어찌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효원이 결혼식에 형부로서 아버지 대신 보호자역할을 하러 멀리 동부에서 날아 온 그를 보니 키는 작지 않은데 어찌나 살이 없던지 50키로도 안되어 보일 정도로 약해 보이면서도 깨끗한 학구적 분위기의 미남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 교수를 하고 국회의원이 되어 TV에 나오는 걸 보니 몸이 두배는 늘어 있어서 딴 사람처럼 보여 놀라웠다. 그는 총리라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계속 열심히 전진하고 있었을 것이고 89년엔 드디어 대통령 보좌역과 청와대 대변인(노태우대통령시절)까지 올라간다.
서울대 제자들이 그런 그의 변신에 대해 반대시위를 많이 했다 하나 그의 집념때문이었는지 그는 결국 교수직에 사표를 낸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학생들의 충정어린 간원대로 그대로 학교에 남아 있었다면 나중에 총장정도는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안철수에 버금가는 대통령감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아닌 총리감 주변에 머무르는 운명이었는지 그 후 단국대교수와 인천대 총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단국대 이사장으로 있다.
386세대라는 한 네티즌의 글 중 한 부분을 소개하자면,
<무산대중은 단결하라>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갈망한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류근일이 서울대 재학시절 학교신문에 발표했던 <모색 -무산대중체로의 지향>이라는 글의 일부 표현이다. 이 글로 인해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젊은 날 이토록 좌파적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던 류근일이 광신적 반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극악스런 수구반동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조선일보 극우 헤게모니에게 빌붙어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노년의 류근일과 변혁을 꿈꾸던 청년 류근일 사이의 간극이 너무도 크다.
<러시아혁명사> 라는 책을 통해 운동권 학생들의 붉은학습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학준은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정권의 부역자로 활약하다가 지금은 동아일보에서 꼴보수들의 광신적 헛소리를 부채질하고 있다. 극과 극을 치닫게 하는 이 극악스런 세월의 반역을 나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효원이 결혼식엔 그 지방의 한국인 교포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거의 30 전후의 결혼한 젊은 사람들이었고 내가 그 남자들에게 느낀 첫 인상은 한국에 사는 남자들에 비해 모두 어딘가 피로에 지친 어두운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대학공부와 졸업후 직장생활 그 모든것에 지쳐있는 안스러운 모습이 가슴 아팠는데 그때 주위에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엽전들은 할수없어"하는 말이 내 귀에 화살처럼 꽂히었다.
그 어두운 모습은 그렇게 자기비하적인 자신감없는 그늘이었구나, 그런 부모들이 한국의 자랑스런 문화를 가르칠리가 없을테니 그 아이들이 한결같이 우리 말을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음이다. 다인종의 미국사회에서 당당하게 자신감있게 언동을 한다면 그런 대우를 받을 텐데 자신이 먼저 그런 열등감에 젖어 있으니 누가 그들을 대접할 것인가. 다시 한번 곳간에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가난한 행세를 한다는 말이 스쳐 가슴이 아팠다. 이제 한국이 성장하고 세계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붐이 일어나고 있는데 현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 2세들이 그나라 말만 알고 정작 우리말을 몰라 선생으로 활동할수 없다는 서글픈 현실이라, 할수없이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어선생들을 대거 수출을 해야 할 판이다.
실지로 미국내에 한국과의 교역을 위해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하는 한국인을 고용하려는 회사들이 많아도 그런 교포들이 거의 없어 미국회사에서 사람 구하기에 애를 먹고있다 한다.
'엽전'과 '핫바지' 비하는 둘다 앞뒤가 확실치 않고 같다고 일본인들이 고의로 조선인들을 두리뭉실 흐릿하다는 비유로 비하하여 만들어낸 단어들이다. 사실은 그 앞뒤 둘이 서로 다름이 아니고 하나로 서로 통한다는 철학이야말로 우리 한 철학의 훌륭한 정수(精粹) 아닌가. '핫바지'라 하면 멍청도니 뭐니 하는 구설수로 홍사덕(洪思德)이 생각나는데, 충청도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도(道)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충청도는 한용운, 이순신, 윤봉길, 이상재, 김좌진, 유관순, 신채호 등등 수많은 애국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방으로서 일신의 영달에 매달리지 않고 조국을 위해 한몸을 바치는 이들, 즉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 조국을 배신하는 친일파 입장에서 보면 멍청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멍창함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자기 희생인가. 홍사덕은 앞으로의 진로와 처신함에 있어 그 멍청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신랑이 캐톨릭 교인이라 성당에서 미국 신부님 집전(주례)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어 김학준이 효원이를 끌고 미스터 최(이름은 잊었음)에게 넘겨 주었다. 사실 남녀평등관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이 신부아버지가 신부를 물건처럼 남자에게 넘겨주는 이 서양식 야만적인 형식은 하루 빨리 개선되어야 할 것이지만 어쨋든 그렇게 결혼식은 끝났고 그 두사람은 빈 깡통을 매달고 온갖 낙서로 황칠한 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누가 짖꿎게 낙서를 해두었는지 차에는 미리 스프레이의 큰 글씨로 "FROM HONEYMOON TO MATERNITY" (신혼여행에서 임신으로)라고 쓰여 있었다. 그날이 토요일이라 그 글씨를 지우려면 특수 주유소에 가야하는것을 주말이라 가는곳마다 그런 주유소는 문을 닫아 그냥 그 차를 타고 주말 내내 다니느라고 창피해 혼 났다고 효원이는 나중에 말하였다.
우리는 남의 자식이고 내자식이고 너 나의 구별없이 총각 처녀들을 보면 애인이 있느냐 결혼은 안 하느냐 하는 관심을 보인다. 일단 결혼하고 나면 2세는 언제 생기느냐 하는 호의의 질문을 해 대는데 당사자들은 그것이 부담스러워 명절날 친척들 집에 가는것이 여간 곤란하지 않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또 극도의 개인주의가 발달하여 결혼이나 2세 갖는 것은 자신들 만의 결정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지도 않는데 그런 사회에서 백주에 그런 글씨를 써서 하이웨이를 달렸으니 모두 좀 의아하게 생각 했을 것이다. 어쨋든 그 후 그 부부는 연달아 남자아이를 둘이나 낳고 잘 살고 있다.
효원이는 결혼하자 신혼생활에 빠져 더 이상 내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지게 된다. 나는 다시 외톨이가 돼 버려 이상하게도 갑자기 더 외롭다는것을 실감하게 된다. 결혼이라는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나도 누군가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현실적으로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내 주위에 도대체 그런 사랑을 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현지에 있는 한국남자들은 왠지 내게 미국사람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닌 정체성이 없는 '미국인화된 한국인'같이 이상한 존재로만 보여 별로 관심이 안가고 있었다. 주위에 미국학생들의 데이트 신청을 자주 받긴 했지만 나는 '군자는 위험을 멀리 한다'는 생각으로 절대로 그 신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매력에 빠진다던지 하여 불가항력으로 못 헤어나는 불상사가 생기면 큰일일테니.
어느 날 캠퍼스 길을 걷다가 불현듯 혹시 최무수가 아직 혼자라면 하는 생각이 떠 올랐고 한번 편지라도 보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년이 지난 그 때까지 그가 그 집에 살고 있는지, 혹시 다른 사람이 생겼는지, 또는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옛날 그 명륜동 145번지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 보았다. 얼마 후 그에게서 답장이 왔는데 첫 머리에 '오랫동안 불이 꺼져있던 내 어두운 가슴속에 이제야 작은 불이 켜졌습니다...' 라고 씌여 있었다.
닥터 월터즈의 제안대로 그 학교에 남아 한국음악을 가르칠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반드시 나의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원을 마친 후 69년 9월에 한국으로 가서 그 다음 달 10월에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안양교도소에서 나오신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음대 동창들과 후배들은 현악사중주로 웨딩마치를 연주해주어 모두 작은 음악회에 온듯 좋은 분위기라고 하였다. 나의 특별 주문으로 모경옥은 축가로 창부타령을 불러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당명화의 양귀비요
(이도령에는 춘향인데 대신)
최서방에는 우인인데
일년 열두달 삼백육십오일을
하루만 못봐도 못 살겠네
라 불러 서양 가곡만을 부르던 식장 분위기를 파격적으로 흥취를 돋구게 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요즘처럼 누구나 피아노 학원엘 다니던 시절이 아니라 결혼식에 웨딩마치를 연주할 피아니스트 구하기가 힘들어 음대 애들은 주위에 그 연주와 축가불러주러 다니느라 바쁘던 시절, 우리는 하도 많이 다니다 보니 결혼식이란 상품을 찍어내듯 너무나 상업적이라 우리는 나중에 절대로 결혼식장에서 식을 올리지 말자고 늘 말했었다.
허지만 닥치고 보니 할수 없이 우리도 그렇게 식장을 이용할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야만적인 풍습이라 매도했던 친정아버지가 신부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나도 따라했던 것이다. 나는 그냥 아버지는 앞에 앉아 계시게 하고 신랑신부가 같이 걸어 들어가는 식으로 할까 하다가 그 날 식장에 모이신 많은 아버지 동지들 앞에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한번 크게 부각시켜 드리고 싶었다.
그 때 한창 고시공부로 친정에서 목숨걸어 놓고 공부하고 있던 강기원 언니도 그 귀한 시간을 내어 어머니와 함께 결혼식에 와 주었다. 강기원(姜基遠)은 그 다음해인 70년 한국최초 법조인 이태영박사에 이어 두번째로 사법고시 12회에 합격하여 여성법조인 맥을 이었고 그 후 여성변호사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하다 지금은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다.
내 친구들 말이 그동안 수많은 결혼식엘 가 봤지만 그렇게 깨끗하고 인상적인 식은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대개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혼잡한 분위기와는 달리 점잖고 지적인 분위기의 노 신사분들이 대부분이라 모두 아카데믹한 분위기의 현악 사중주와 함께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격조있는 분위기였다고 하였다. 그 종로4가에서 비원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던 동원예식장은 그 후 없어졌지만 그 예식장은 분위기가 조용하여 내가 걱정하던 적어도 그 '상업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첫댓글 우연이군요. 저는 강기원님 막내동생 강윤원을 알고 있습니다. 군시절 교관 잠시 했는데 교육생으로 가르쳤습니다. 교관-생도지만 한기수 그리고 나이는 한살 차입니다. 같은 소위 때 같은 특기생이었지요. 우연히 가족 이야기 하다 자기 큰 누님이 강기원이라고 하더군요. 이 친구 연대 물리과 졸업했는데 누님들 모두 서울대 나오고 자기가 가장 공부 못했다고 웃더군요. 공군 마치고 미국동부쪽으로 유학갔습니다. 십여년전 우연히 학회에서 만나 저녁 같이 했습니다. 박사 공부 마치고 시카고 제법 큰 국립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더군요. 지금도 미국에서 살고 있겠지요.
당시 매부인 김학준에 대한 대화는 없었지만 김학준은 전두환시절 조선인가 동아일보 신년사에 전두환 어천가를 쓴것 보고 정떨어졌습니다. 어찌 아부도 저 정도일까? 서울대 정치과 나온 어느 친구 말이 떠오르더군요. 정치과 교수 대부분 어용교수로일하다 정계진출해 존경할만한 사람 한 사람도 없다고..
왜 우리나라는 공부잘한 대부분사람들 나중에 오직 권세만 탐할까요? 결론은 공부 잘했다고 인간이 바른것은 아니다.
효원이가 집안얘기를 하여 나는 그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중 연대다닌다던 남동생의 얘기가 가슴아프더군요.
단 한명있는 귀한 아들이 대학갈때 긴급가족회의에서 누나 매형 모두 극구 대학은 서울대 지원해야 한다는걸 어머니가 '내아들 내가 잘 안다'며 연대를 고집해 주었다더군요. 자신의 대학문제에 자신은 아무 발언권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그는 학창시절 내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서울대 망국병에 찌들은 사람들 많지요.
어용교수아니면 교수임용에 탈락되기 쉬운 이상한 세상, 이완용 후손이 총장을 해먹는 세상.. 김학준얘기는 본문 상반부에
몇 줄 더 첨부하겠습니다.
댓글을 달아주시어 고맙습니다.
서울대 망국병은 중증을 넘어 환자를 거의 가사상태에 몰아넣었지요. 저의 한 친구는 광학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성공했지만 (은퇴나이에 이정도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친구) 한국학계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오직 이유는 항공대학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조선 망할때까지 오직 성리학만 학문으로 알고 세계를 몰랐던 유생, 양반들을 연상시킴니다. 조일전쟁, 조청전쟁( 왜란 호란은 자신들 과오를 숨기려는 위정자들의 속임수지요) 후에도 세계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던, 알고 싶지 않았던 수구의 조상들 .. 성리학을 좀 읽어보니(주로 우주론, 존재론) 당시 서구의 사상을 훨씬 뛰어넘는 위대한 사상인것 같아요.
학문적으로는.. 다만 국가 경영, 경제등 응용분야는 성리학 이외에도 많은 대안을 고려 하지 않고 나라 망할때까지 수백년을 매달렸던게 아쉽습니다. 나라망한 원인을 들면 많겠지만 그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게 자꾸 조선말의 역사가 연상되어 한 글 남김니다.
최교수께서는 해외에서 오래 교직에 계셔 그런 것이 이상하시겠지만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현상입니다. 나는 도올이 서울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을 적극 지지하는 편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필시 서울대 출신들이, 그의 뜻을 외면하고 자신이 서울대를 못가서 (시기심으로)그런다고 매도하고 있으니 참 답답합니다. 모든 것은 자기 그릇만큼 해석하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