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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이나 녹아버린 세월 속에
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모르시나요! (제3부)
초등학교 졸업 후 같은 중학교 출신자로는 늘 인상이 좋았던 김재욱 군에 이어
한창호 강원도 서영돈 박 복 전상로 전운섭 홍진우 박종희 노쌍식 군 등 일부의
동기들이 생각납니다
또 다른 기억으로는 6학년 가을 즈음 우연히 복도에서 홀로 후문 쪽으로 종이
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는데 하염없이 날아가더니 아마 빨래터를 너머 대구은행
연수원 옆인 애기 공동묘지까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주 훨훨 날아가버리더군요
그때 전혀 추락하지 않고 도도히 저의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날아가던 그 종이
비행기에 넋을 잃었고 지금까지도 느낄 수 없는 희열과 감동을 거대하게 느꼈습니다
순간 신이하게도 웅장하게만 비행하던 종이비행기를 끝없이 바라보며 당시에
두 손 모아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내 일생에 가장 사람다운 가치를 부여해주시길 비행기가 추락할 때까지 기원했지만
그 어설픈 종이비행기는 더더욱 하늘위로 솟구쳐 오르면서 저의 시야에서 그렇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참으로 신기했던 그날은 수업을 마친 뒤 청소를 끝내던 어느 오후였습니다
이제 대덕은 그야말로 제 1회였던 우리 동기들로부터 웅대한 트림을 거대하게
시작하였습니다
대덕 초등학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운동회는 청군백군과 나뉘어서 남학생들은
차전놀이와 덤블링을 했었는데 특히 덤블링에 가장 중앙에 높은 탑을 만들었고 동기들
중에서 몸집이 가장 작았던 6 - 2반의 허경식 군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여학생은 부채춤을 선보였고 어느 가을 즈음에 6학년 전체 학생들이
시민운동장에서 부채로 대덕이란 글자를 펼쳤다 접었다 하는 매스게임도 했었지요
매일을 청소하랴 운동회하랴 매스게임하랴 수업하랴 일 년간은 참으로 바빴던
시간이었고 추억의 산물이 되어버린 시간들이었습니다
곁가지로 대명 초등학교 재학시절이 문득 생각나는데 제가 5학년 즈음 2 ~ 3학년
정도의 백인 소녀가 함께 대명 초등에 재학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그녀가 그네에 앉아 놀고 있었는데 제자들에게는 다소 인색하시던 담임 선생님이
10원짜리 동전을 그녀에게 건네 주더군요
지금과 달리 당시만 해도 미국이란 존재가 어른들의 의식에는 어느 정도 기대치를
예상하게 했으며 미제라 하면 무조건 최상급으로 쳐주던 시기였었지요
그때 그녀의 신발주머니에 씌어진 이름이 이릴라였는데 고릴라라고 하면 좋을 텐데
하며 제 혼자서 피식 웃던 기억도 납니다
5학년 때 대명시장 근처에 살던 차성철 군도 생각나며 비슷한 학년 때 학교 정문에
가깝게 살며 공부도 썩 잘했던 권재희 양도 문득 떠오릅니다
더구나 학교 정문 부근에서 오른팔을 잃어버린 상이용사 아저씨가 갈고리 손에 학습용
칼을 끼워놓고 10원짜리 연필을 팔면서 어린이 고객들을 정성껏 맞기도 했었지요
12자루 한 다스를 100원에 팔았고 깎은 연필로 다소 두꺼운 판자를 푹 찔러서 좋은
연필이라고 시청각교육까지 시켰습니다
불량식품 상인들도 북적했고 늘 꽝이어서 번데기 몇 알로 어린마음을 달래던 기억도
납니다
시간을 거슬러 대명 초등 1학년 때는 동급생의 어머니들까지 소풍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보물찾기 등 놀이를 하였는데 즐겁다기보다 김밥 먹으러 간 것밖엔 기억이 없군요
당시만 해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귀해서 글자나 구구단을 알고 입학했던 학생이
드물다보니 1학년 때 시험 볼 때는 선생님이 직접 읽어주고 학생들이 답안을 작성
하는 멋쩍은 시험이었는데 학반 전체가 시작과 끝이 동일하여 일사불란하게 시험이
끝나기도 했었습니다
1학년 입학 얼마지 않아 각 가정마다 전자제품 보유란을 정확히 작성해서 가져오라는
통지문을 받았는데 지금이야 아주 유치하지만 TV는 물론 전화기 라디오 전축 선풍기
이런 따위에 20여개 품목을 표시토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형편상 달랑 세 개만 체크하여 제출하는 어린 마음이 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당시만 해도 어느 집이건 누구나 대동소이 했으며 지금이야 그저 주어도 잘 먹지
않는 자장면이 왜 그리도 귀했던지 이해가 되다가 말다가입니다
칼라TV는 6학년 여름 즈음 합기도 도장에 수련 후 바로 옆 약국에서 보았는데 신선한
문화적 충격과 함께 눈알이 시원하더군요
다음날 학교에서 짝지였던 권영경 양과 주변에 자랑을 했더니 세세하게 물어 보길래
잠시 말이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말투가 약간 더듬거리던 최성영 군이 사람의 살색이 정말 똑같이 방영되는지
화면이 모두 제각기 색색마다 정확한지 등의 질문이었습니다
70년대 당시 명절에는 동네 소년들이 딱총을 만든다고 야단들이 났었지요
나이가 좀있는 중고등 형들은 우산대를 톱으로 잘라 총모양의 나무에 끼우고 납덩이를
녹여 총알을 만들어서 촛농으로 밀봉한 후 화약을 재워 폭파시키는 무시무시한 권총도
만들었습니다
용돈이 좀 있으면 폭음탄 콩알탄 화약 등을 구비해서 온 동네 개구쟁이들이밤새도록
전쟁놀이를 해대었습니다
특히 야트막한 화장실이나 남의 집 창문에 하나씩 던져두고 도망가며 낄낄대기도 했었지요
그러다가 주인이 화를 내면 더욱 신이나 온 동네 꼬마들이 연합을 해서
그날 밤새도록 그 집 앞에서 폭약 터지는 소리로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참 이상 야릇한 행복을 느낀 작은 악마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보건소에서 학교로 출장 나오신 분이 주사 바늘 하나로 알코올램프에 바늘
끝을 달구어 놓고 일명 불주사란 걸 반 친구들에게 한방씩 모두 놓아주기도 했습니다
좀 불결했던 건 가방 하나에 도시락과 채변봉투를 사이좋게 나누어 놓고 기생충
검사를 받았는데 3학년 즈음 제 딴에 머리를 쓴다고 10원하는 라면땅 (또는 별사탕이
들어 있는 20원짜리 자야)을 씹어서 넣어두었더니 얼마 후 선생님이 기생충 약을
주더군요
그저 아연실색이었고 해명했다간 선생님께 곤혹을 치룰 것 같아 입을 다물기로 했지만
짝이었던 백숙희 양이 오해로 빚어진 저를 며칠간 피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아도 침의 아밀라제에 섞인 과자가 부패되었던지 양심불량으로 그 약을
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2학년 때 남부 초등에서 대명 초등으로 다시 전학을 왔었는데 강아지처럼
귀여웠던 송지민 양도 기억이 나고 제가 전학 온지 또 얼마지 않아 전학을 왔던
성씨가 불분명한 공군대위 아들이었던 우석 군도 생각이 납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이든가
김 값이 급작스레 폭등하여 그해 소풍 때는 만두를 준비해간 걸로 기억하며 반에는
김모 군 딱 한명만 김밥을 준비해왔더군요
그 친구 부모님이 건어물 장사를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요즈음이야 아주 흔해 빠진 게 온 동네마다 산재한 김밥집인데 당시는 김밥도
왜 그렇게 구경하기 힘들었는지 도통 이해조차 어렵습니다
또 4 ~ 5학년 때는 고추가격이 폭등하여 고추 한 근이 금값보다 높아서 그해 겨울은
인도네시아 산의 검은 빛이 감도는 한 뼘 이상 길이에 묘상한 내음을 풍기던 고춧
가루로 김장을 했었지요
당시 김장 맛이 아주 고약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것은 5학년 여름방학 때 대덕 초등학교에서도 가까운 곳에
위치한 빨래터의 연못에서 우리 또래의 형제가 한꺼번에 익사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건져낸 시체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경찰들이 어린 애들은 보면 아니 된다며 극구 말렸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은
그들의 의지를 넘어 서버렸고 주검을 본 그 댓가로 저는 한 달 이상을 정체모를
고독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그 형제의 어머니마저 정신줄을 놓고 밤이나 낮이나 초라한 행색으로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걸 보고 제 홀로 많이도 슬피 울었습니다
제가 8살쯤 승마장 옆에 당시 매자골이란 동네 ( 현재 송현 1동 삼두 아파트 근처 )
에 코끼리 네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정신지체 장애인 어머니와 두 아들이
매일 아침 저녁마다 밥을 구걸하러 다녔습니다
왜 코끼리 가족으로 불리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가 앞서 걸으면 나와 비슷한
또래의 큰아들에 이어 작은 아들이 꾀죄죄한 박바가지를 하나씩 들고 매일을 일렬로
걸어 다녔으며 특히 석양이 질 때 세모자의 등 뒤를 바라보던 내 마음은 쨘하다 못해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습니다
그들은 일 년 내내 검은색 옷을 입었으며 코끼리 어머니는 항상 멍하게 웃고만 다녔지요
당시 빨래터 옆 예전 대구은행 연수원 쪽에 작은 공동묘지가 30여기 정도 있었는데
주변에서 애기 무덤이라 하여 무척이나 마음이 무거웠던 걸 기억합니다
문득 가슴 깊이에 슬픔 하나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1학년 때 이웃에 살던 동기생 최무룡 군이 생각납니다
그는 1학년 겨울방학 때 앞산 승마장 근처 백련사 옆 ( 송현1동 삼두 아파트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사고지역에 현재는 교회가 들어서 있음 )에 있던 작은 연못에 썰매를
타다가 물에 빠진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는데 당시 사고발생 지점에서 썰매를
타던 여러 명이 도우려다 또래 어린이들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익사하는 대형사고가
발생되어 그해 겨울 그는 차디찬 바람과 함께 소리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8살 때 이호성 군과 최무룡 군 최마루는 동네 산야를 뛰어다니며 한때 즐겁게 지낸
사이였으니 한동안 그를 잊지 못했고 아직도 그는 제 마음 깊이에 순백했던 벗으로
살아있습니다
그때 백련사에는 왕씨 성을 가진 두 공주가 살고 있었는데 대덕 초등학교 2회와 5회
졸업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최무룡 군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으로 애환과 비련의 기억을
무겁게 안고 있어야 했던 그때의 8살이 지금까지도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소재를 돌려 서술하자면 당시만 해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군것질은 앙꼬없는 누런
삼립 빵과 삼각형 우유를 급식 받았고 그조차 형편 때문에 못 먹는 학생들도 있었지요
허나 3학년 때 동급생이던 김모 군은 형과 함께 고아원에 거주하던 고아여서
담임 선생님께서 특별히 챙겨 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유일하게 그 친구만 빡빡 머리였으며 항상 빨간 셔츠를 입고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더러 이가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옮는 경우도 있었지만 시골의 경우는
남학생은 거의 머리를 빡빡 밀었으며 여학생은 단발로 고정했지요
우리가 초등학교 재학 시절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기라 밀가루와 혼식을 장려했고
점심시간에는 보리밥을 섞은 도시락을 선생님이 일일이 검사하기도 했었지요
또 공책 껍질에도 줄을 그어서 활용하기도 했으며 폐품수집이란 명목아래 폐품이
없으면 가게에 병을 사와서 제출하는 해프닝도 있었지요
공산당이 싫다던 이승복 어린이부터 때려잡자 쳐부수자 공산당 등등 간첩신고는
기본이었고 즐겨보던 프로그램으로는 113 수사본부 최불암 씨의 수사반장 라신찬의
전우 명랑 운동회 배달의 기수 타잔 등도 있었군요
학교 운동장에는 자주 가곡을 틀어놓고 학생들에게 조국사랑을 되뇌이게도 했습니다
대명 초등학교 당시는 교실이 부족해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는데 한주가
지난 뒤 착각으로 오전반인줄 알고 등교했다가 오후반이어서 점심을 굶은 채로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학교와 집까지의 거리는 무려 어린이 걸음으로 30분이상은 족히 걸어야했기에
그냥 오후까지 버티다가 하교 중 배가 너무 고파서 애를 먹은 적도 있었지요
요즈음처럼 용돈을 잘 챙겨주는 시대도 아니었고 하교 시는 동무들과 장난도 치다가
메뚜기나 잠자리도 쫓다가 어느 노인께서 짐을 들어달라면 들어주다가 대충 그렇게
보낸 세월들이었습니다
또 우표수집이 취미여서 우표 발행날 이른 새벽에 남대구 우체국에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줄을 서서 구입한 적도 더러 있었습니다
당시 8 ~ 9살 경에는 라디오청취에 정신이 없었으며 밤 10시쯤 전설따라 삼천리란
프로를 듣고 잠을 청했었고 12시 통행금지와 민방위훈련 때 등화관재가 있어서
동생들과 밤에는 숨바꼭질도 하였었지요
가끔 대구 서부정류장에 위치한 관문시장 중간쯤 낙동식당에서 아버지가 막걸리라도
한잔 하시어 모시러 가면 둥근 철판테이블에 젓가락으로 박자를 두드리며 대중가요를
한복 입은 여자와 함께 부르던 걸 본적도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녀의 못생긴 얼굴에 입술은 빨갛고 머리는 쪽을 졌으며 헤롱거리는
눈을 보고 안타까웠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거의 대구 북성로 우동과 찌개 및 뒷고기 수준으로 왕대포 한잔에
50원정도 잔치국수 한 그릇이 80원 막걸리 반되가 아마 100원 정도였을 겁니다
1학년 때는 어머니가 전기세를 낼 때 은빛색의 1원짜리를 사용하였고 마당에 위치한
낡은 수도 시설에 마중물을 부어서 펌프질을 하며 물을 길어 쓰던 환경도 겪어었지요
또 생각나는 것은 하교 시에 노란 병아리도 몇 십 원에 거래되었고 하도 귀여워서
두어 마리를 사왔더니 며칠 새 모두 죽는 바람에 땅속에 묻고는 한동안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이별의 아픔을 배워간 세월이기도 했습니다
여름철 팥빙수도 대명 초등학교 앞의 문방구에서 얼음을 대충 쓱쓱 갈고는 나무
젓가락과 함께 꾹 누른 후 빨갛고 노란 식용 색소를 뿌린 다음에 10원에 팔았지요
하드란 것도 어느 정도 조그마한 나무통에 소부랄처럼 생긴 고무통을 들어내면 사카린
덩어리 얼음 과자를 10원에 사먹기도 했습니다
10원에 두개짜리 얼음과자는 친구와 사이좋게 나누어 먹고 난 후 조둥이 빨갛게 되어
서로 웃기도 했지요
당시만 해도 불량식품에 대한 위생관념이 다소 부족 했었습니다
때로 늦가을 쯤 동네 친구들과 연도 만들어서 기분 좋게 날리면 얼마 후 전깃줄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애가 탓었고 지금 생각하면 무언가 엉성하고도 다소 동떨어진
시대에 살아온 것 같은 허접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컴퓨터조차 고등학교 공업시간에 그림으로 보아왔지만 20대 후반에서야 보편화되었지만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삼륜차가 털털거리며 굴러 다녔으니 차량 역시
20대 중반 군에 제대할 무렵 디자인이 심플해지면서 지금은 도로자체가
예쁜 차량 전시관이 되어버렸습니다
더구나 1970년대 중후반만 해도 연탄가스 중독으로 하루 아침에 망자가 되는 뉴스가
거의 매일 보도되었고 강원도 탄광촌에 광부들을 전사라고까지 칭하면서 독려하였지만
가끔 매몰되어 안타깝게 죽어가던 가여운 목숨들도 있었습니다
시내외버스에는 안내양 일명 차장이라 부르던 누나들이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오라이오라이하며 버스 차체를 손바닥으로 탕탕 치며 열정적으로 활동하였고 대구가
섬유도시다 보니 시골이나 어려운 환경의 집에서는 중학교를 졸업한 누나들이 대거
섬유공장에 취업하면서 야학에 불탔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초등학교 생활로 돌아가 보면 매 학년마다 선생님의 가정방문도 있었고 한반에
60 ~ 70명씩 수업을 받다보니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거의 습관적으로 조금 모난
제자들의 뺨이나 손바닥 엉덩이 등을 자주 혹독하게 체벌 했었지요
아마도 당시 선생님들은 일제치하에 수업을 받아 오셨기에 일본식 잔재가 조금은 남아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명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든가
당시 나이가 50대를 훌쩍 넘기신 어느 선생님은 사범고등학교 5년제를 졸업하신 후
갓 20세가 되기 전에 아주 젊은 나이부터 교직생활을 오래하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풍금을 치지 못하셔서 음악수업은 아예 없었다고 하던 어느 친구의 말이 생각납니다
또 대덕 초등학교는 타학교와 달리 양궁에서도 일가견이 있어서 앞산 승마장에서
훈련을 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 역시 초 중 고 대학을 각각 졸업했지만 유일하게도 유년기의 참기름같은 고소한
기억들은 제 가슴 깊이에 화사한 정원이 되어 그윽한 추억들로 싱그러이 피어있습니다
이러한 기쁨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지치지도 않으며 오히려 진국같은 향기들로 건강한
하루를 맞아줍니다
한참 기억이 나는 대로 서술하고 보니 후줄근한 잔기억들은 지면상 이만 줄일까합니다
1981년 졸업으로
시인 최 마루와 추억을 함께 한 대구 대명 남부 대덕 초등학교 동기생 여러분!
귀댁에 늘 건안과 다복에 행운과 사랑이 넘쳐나시고 동기생들의 풍요로운 삶이 언제나
그윽하시길 진심을 다하여 기도해봅니다
< 제3부 >
대한민국 시인 文明 최 마루의 유년기 추억 셋
시인 최 마루의 ~
이채로운 추억 속을 따라 꽃잎처럼 아려버린 아름다운 생각들 중에 ~
이제 이승의 끝에서 한 자락의 꽃바람이 되어 날아가는 날
또 다시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는 고혹한 시각들을 찾아봅니다
☆ 글쓴이 소개 ☆
*대한민국 시인 文明 최마루님의 글입니다.<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음>
*<주의*주의!!동의 없이 무단전재, 표절 및 재배포, 복사등 절대금지>
choe33281004@nate.com *여러분의 즐거운 감상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