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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280랠리, 62km에서 산산조각 난 나의 완주 로망
접수는 홧김에, 준비는 텅 빈 채로
지난 5월 중순. 올해 280랠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개최지가 멀어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는 2시간 거리의 장수에서 열린다고 했다.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그때부터 머릿속은 이미 출발선에 서 있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열심히 준비하자고 마음먹은 것과 실제 훈련은 달랐다. 얼렁뚱땅 6월이 지나갔다.
제대로 된 훈련 라이딩 한 번 없이 시간이 흘렀다. 7월에는 열심히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올해 여름은 인류에게 폭염을, 나에게는 완벽한 핑곗거리를 함께 선물했다. 그래도 나름 서천임도와 함라산임도를 라이딩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8월이 되었다. 근육 경련이 일어나는 몸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이러다 마음까지 변하겠다.' 싶어서 일단 접수부터 했다. 그런데 접수한 바로 다음 날, 기존 280랠리 방식이 바뀌었다는 공지가 떴다.
원래 280랠리는 이름 그대로 280km를 36시간 안에 달리는 방식이었다.
먹고 자는 것도 참가자가 알아서 해결한다. 밤새 달려도 되고, 쉬어도 되고, 잠을 자도 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최종 골인 지점에 도착하면 된다. 말 그대로 전통적인 무박 장거리 랠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라졌다. 야간 라이딩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랠리 방식이 바뀌다
참가자들이 넓은 구간에 걸쳐 분산되는 랠리 특성상 야간에 사고가 발생하면 경찰이나 구조 인력의 지원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기존의 36시간 연속 무박 방식이 변경됐다.
거리도 줄었다. 280km → 약 244km
시간도 줄었다. 36시간 → 32시간 30분
스테이지 1 — 토요일 약 132km(03:30 출발 22:00 컷오프) 총 18시간 30분.
그리고 공식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토요일 22:00 ~ 일요일 03:00
스테이지 2 — 일요일 약 112km(03:00 출발 17:00 컷오프) 14시간 동안 달려야 한다.
거리와 시간만 놓고 보면 얼핏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평균속도를 계산해서 ‘244km니까 이 정도 속도로 달리면 되겠네.’라고 접근할 수 있는 코스가 아닐 것이다.
MTB 랠리는 산을 넘고 또 넘는다.
오르막이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 없고, 내리막에서는 낙차와 노면에 주의해야 한다.
때로는 거친 길을 통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체력도 계속 소모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평균속도가 아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내 몸을 무너지지 않게 관리하면서 달릴 수 있느냐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사전 답사는커녕 GPX 파일도 제대로 열어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믿는 구석은 있었다.
전통적인 방식의 280랠리라면, 예상보다 뒤처지더라도 밤잠을 쫓아가며 한 발 한 발 페달을 밟으면 된다. 지친 몸을 달래가며 어떻게든 정해진 시간 안에 골인한다. 몸으로 때워서라도 시간을 붙잡겠다는, 그 믿는 구석마저 사라진 것이다.
변경된 랠리 방식에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는 한동안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밤잠을 쫓아가며 달리고, 대낮에 졸음을 못 이겨 길가에 널브러져 쪽잠을 자는 것쯤은 체험하는게 280랠리의 추억인데, 그것을 없애버렸다는 불만도 있었다.
반면 안전을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280랠리가 앞으로도 계속되기 위해서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변화였다.
사실 하루만 더 일찍 이 소식을 알았다면 접수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접수부터 해놓고 다음 날 랠리 방식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접수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바뀐 280랠리를 직접 경험해보는 것.
그리고 나는 그렇게 바뀐 280랠리의 출발선에 서게 됐다.
랠리를 준비하면서
그렇다고 준비를 아주 안 한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손보고 필요한 장비도 하나씩 준비했다.
신발을 사고,
튜브리스 관련 부품을 사고,
브레이크 패드와 로터를 준비하고,
져지를 사고,
가방을 사고,
전투식량까지 챙겼다.
하나씩 보면 큰돈이 아닌 것 같았는데 모아놓고 보니 제법 됐다.
사실 랠리를 준비하던 6월의 주식시장도 폭염만큼이나 뜨거웠다.
나도 그 열기에 올라탔다. 삼전닉스에 300만 원을 대출받아 투자했다. 주식이 잘되면 조금 더 가볍고 마음에 쏙 드는 MTB를 한 대 새로 장만할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주식시장은 역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8월에 약 5% 손실을 보고 결국 정리했다.
MTB를 새로 장만하겠다는 꿈도 그렇게 함께 정리됐다.
무거운 자전거는 그대로이고, 지갑만 더 가벼워졌다.
금요일 밤
금요일 퇴근 후에는 장수로 서둘러 내려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해서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그러다 신호위반 카메라에 찍힌 것 같다.
정확히 찍혔는지는 모르겠다.
‘280랠리 한번 참가하려다가 별일을 다 겪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장수에 도착했다.
별일을 하나 더 소개하고 싶다.
280랠리를 준비하면서 별일을 하나 더 겪었다.
토요일 정기 라이딩을 다녀온 뒤 앞브레이크 패드를 교체하려고 했다.
신품 브레이크 패드를 끼우려면 브레이크 캘리퍼의 피스톤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런데 이놈의 세라믹 피스톤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에어건으로 불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은파공원으로 나가 먼지를 털 때 사용하는 에어건이 있는 곳을 찾아가 피스톤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에어건의 부리가 넓어서 그런지 공기의 힘이 약했다.
실패.
이판사판이었다.
이번에는 월명산공원에 있는, 빨대처럼 가느다란 부리가 달린 에어건을 찾아갔다. 브레이크 캘리퍼에 에어건을 갖다 대고 힘껏 공기를 불어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퍽!
세라믹 피스톤이 총알처럼 튀어나오더니 제한구역 펜스 안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안 돼!” 폭염에 지친 머리 꼭대기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제한구역 관리자에게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피스톤이 날아간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브레이크 캘리퍼를 쇼핑몰에서 주문했다.
며칠을 기다린 끝에 수요일에 도착했고, 드디어 교체에 성공했다.
야호!
이렇게 280랠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전거보다 내 멘탈이 먼저 몇 번이나 시험을 받았다.
스테이지 1
새벽 2시 넘어 장수 종합운동장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운동장. 하지만 분위기는 뜨거웠다.
자전거를 점검하는 사람. 배낭을 정리하는 사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각자의 방식으로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산홍엽님과 기념 촬영을 하고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카운트다운.
새벽 3시 30분.
280랠리가 시작됐다.
동틀 무렵부터 가늘게 내리던 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굵어졌다.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달렸다.
전략은 하나였다. "30km까지는 살살, 그다음부터 서서히."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리에 경련 올까 봐 그냥 살살"에 가까웠다. 그래도 전략은 전략이니 붙잡고 갔다.
같이 달리던 만산홍엽님과는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겉으로는 "라이딩 스타일이 달라서"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혹시 갑자기 경련으로 다리 붙잡고 주저앉으면 민폐일까 봐" 슬쩍 거리를 둔 것도 있었다. 배려인지 도망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45km, 뜻밖의 지원
45km 지점에 다다랐을 때 아침을 같이 먹자는 전화를 받았다.
농협 팔각정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뜻밖의 반가운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산홍엽님 제수씨께서 아침을 차려주셨다.
무지원으로 참가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지원을 받은 셈이다.
배는 분명 허전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조금씩 먹었다.
커피까지 단번에 마신 뒤 다시 출발했다.
낙석 사고 발생. 대회 중단. 전원 운동장으로 복귀.
폭우에 휴대전화의 길 안내 화면은 노면의 충격을 받을 때마다 다른 화면으로 변경된다.
봉화산 정상으로 오르는 임도는 가파른 경사에다 끝없이 길었다.
올라오는 경련을 끌바로 누그러뜨렸다.
비가 오지 않는 폭염의 날씨에 업힐이었다면 상상하기가 싫다.
정상을 찍고 내려가려는데 먼저 도착한 만산홍엽님이 불러 세웠다.
낙석 사고가 발생하여 랠리가 중단됐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참가자들은 모두 출발점인 종합운동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스테이지 1은 그렇게 중단됐다.
아직 절반도 달리지 못했다.
랠리 전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종합운동장으로 복귀하는 길은 유난히 길었다. 내 몸이 무거운 건지, 종합운동장이 멀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DNF
244km 중 62km. 전체의 4분의 1도 못 채웠는데, 대회가 먼저 손을 들어버렸다. 내가 그만두려던 게 아니라 대회가 먼저 포기 선언을 한 셈이라, 억울하면서도 묘하게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스테이지 2는 다음 날 그대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른쪽 종아리는 이미 경련으로 시위 중이었고, 밤에 제대로 잠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끝나고 나면 장거리 운전까지 해야 한다는 계산이 머릿속에 좌르륵 떠올랐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조용히 속삭였다.
"집에 가자."
그렇게 나는 두 번째 스테이지 문턱에서 셀프 DNF를 선언했다.
힘들어서 그만둔 게 아니라, 전략이 없어서 그만뒀다
집으로 오는 내내 곱씹었다. "나 힘들어서 포기한 거 맞나?"
돌이켜보니 아니었다. 몸이 완전히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280km 완주하면 끝"이라는 너무 단순한 계획, 딱 그거 하나였다.
언제 먹을지 → 몰랐음
언제 쉴지 → 몰랐음
오르막 강도 조절 → 몰랐음
경련 예방 → 몰랐음
내 몸 상태 체크 → 안 함
한마디로 "완주 의지 100%, 완주 전략 0%"로 산에 들어간 셈이다. MTB 랠리를 로드 라이딩처럼 생각한 대가를 제대로 치렀다.
MTB로 280랠리를 어떻게 즐길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 부족했다.
힘들어서 포기한 것이 아니다. 전략이 부족했다.
졸음운전과 전투식량의 이상한 콜라보
집으로 오는 길, 운전대를 잡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랠리에서는 살아 돌아왔는데 운전이 더 위험할 뻔한 상황. 설상가상 차량 사고방지 시스템까지 오류를 일으켰다. 결국 졸음쉼터에 비상 정차. 그런데 이번엔 배가 고팠다. 원래 라이딩 중에 먹으려고 챙겨온 전투식량을, 산이 아니라 주차장에서 조리해 먹었다.
라이딩용 비상식량을 드라이브용 야식으로 소비하는 완벽한 용도 변경.
조리 시간만 20분.
산길 한복판에서 20분간 쭈그리고 앉아 물 붓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이것도 "준비는 했지만 전략은 없었다" 목록에 조용히 한 줄 추가됐다.
280랠리에서 배운 것
이번 280랠리는 62km에서 멈췄다.
완주라는 결과만 놓고 보면 실패다.
하지만 나는 이번 랠리를 실패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무엇을 준비하지 않았는지 아주 정확하게 알게 됐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보고 싶다.
더 좋은 자전거가 아니라,
더 좋은 장비가 아니라,
280랠리를 운영하는 방법부터 제대로 준비해서.
그리고 그때는 전투식량도 라이딩하면서 먹어야겠다.
"이번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다시 도전할 이유는 충분하니까.

첫댓글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산홍엽님 3회 완주 축하드려요.
폭우만 아니였다면
충분히 완주가능했을 겁니다
그렇게 많은 비를 맞으며
라이딩은 처음이라서ㅠ
아마 혼자였다면 라이딩을 포기했겠지만
임도, 싱글, 도로에 350여명이
함께하고 있으니 무념으로 페달질을 했었나 봅니다
첫 도전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후기를 보니 내가 참석한거 같아요
수고 많으셨습니다.짝짝짝
고생하셨습니다! 돌아 오시는 길에 내년을 기약 하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