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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중국 이야기
6. 중국의 4대 악녀(惡女)
<1> 달기(妲己) ◇ 상(商/殷)왕조 말기/ BC 11세기 경/ 주왕(紂王)의 비(妃)
주왕과 달기 / 요녀 달기 / 경국지색 포사
달기(妲己)는 중국 상(商/殷)나라 유소(有蘇) 출신의 여인으로, 훗날 중국 역사상 폭군으로 악명 높은 주왕(紂王)의 애첩이 되는데 중국 역사상 절색(絶色)의 여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인이며, 아울러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도 손꼽히는 여인이다. 상(商)나라 말기의 주왕은 달기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달기는 정실 황후인 강황후의 질투를 받았고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자객 강환이 주왕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달기는 이를 강황후에게 덮어씌우고 자백하라고 눈을 파내는 등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강황후는 사망하게 된다.
은주달기조(殷紂妲己條)에 보면 달기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기름을 바른 구리(銅)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수가 벌겋게 달구어진 기둥위로 맨발로 건너게 하여 미끄러져 떨어져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또 돈분(躉盆)이란 형을 만들었는데 구덩이에 죄수들과 독사와 전갈을 함께 집어넣고 그들이 물려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고도 한다. 주왕은 달기에게 완전 빠져 달기가 하자는 대로 하여 악행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멀쩡한 신하(진상위)의 눈알빼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보기, 한 여름에 뼈가 시려 강을 못 건넌다는 노인의 다리뼈를 잘라 골수보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또, 술을 채운 연못 주변에 고기를 걸어둔 숲(酒池肉林)을 만들어서 술에 취한 나체의 남녀가 서로 뒤쫓아 혼음(混淫)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등 날마다 음탕한 밤을 보냈다.
충신 구후(九候)는 달기의 악행을 보다 못해 천하절색인 딸을 주왕에게 바쳤는데 달기는 그 딸을 모함으로 죽이고 아버지인 충신 구후 또한 참살한다.
또, 주왕의 숙부이기도 한 재상 비간(比干)이 “선왕(先王)의 전법(典法)을 따르지 않고 아녀자의 말만 따르시니 재앙이 가까울 날이 머지않았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칠규:七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고 하면서 주왕을 부추겨 숙부(叔父) 비간을 죽여 심장을 도려내서 드려다 보았다고도 한다. 충신 비간의 죽음으로 백성들은 상(商/殷)나라에 손톱만큼의 애정도 없어졌고, 주(周)를 중심으로 팔백 제후가 일어나 중국의 두 번째 나라였던 상(商/殷)나라는 31대 주왕(紂王)을 끝으로 왕조의 문을 닫고 마는데 결국 달기라는 여인으로 인해 망했다고 할 것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몰아 쳐들어와 패색이 짙어지자 주왕은 보물이 저장되어 있는 녹대(鹿台)로 올라가 불을 지르고 불에 뛰어내려 자결하는데 주왕(紂王)이 죽은 뒤, 달기도 무왕(武王)에 의해 참수된다. 무왕(武王)은 타버린 주왕의 시체를 가져다 관례대로 목을 치고 주왕의 몸에 화살을 세대 쏘았다고 한다. 첫 화살은 하늘의 명을 거역한 죄로 금 화살, 두 번째는 나라를 망하게 한 죄로 은 화살, 세 번째는 백성을 힘들게 한 죄로 동화살 이렇게 세대를 타버린 주왕의 몸에 꽂았다. 주왕의 애첩 달기도 잡혀 끌려 나왔는데 달기 또한 목이 잘려 역시 화살 세대를 맞고, 주왕의 목과 함께 백기에 걸렸다고 한다.
달기의 처형 때 달기의 미모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묶여 끌려 나오는 그 모습, 눈물까지 흘리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목을 쳐야 할 망나니들이 넋이 빠졌다고 한다. 망나니는 달기의 촉촉한 눈망울을 보면 칼을 든 팔을 부들부들 떨며 끝내 칼을 못 올렸다고 하고 다른 망나니로 교체해도 마찬가지였다. 90세 할아버지 망나니를 내 세웠으나 그 마저 차마 못 쳐서 할 수 없이 달기 머리 위에 비단을 덮어 못 보게 한 후 간신히 목을 쳤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주나라 군대가 조정(朝庭)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주 무왕)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옛날이야기를 즐겨 들려 주셨는데 달기를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九尾狐/여우)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포락지형을 받고 죽은 시체를 공동묘지에 내다 묻으면 밤에 달기가 몰래 궁궐 담을 넘어 나와서는 하늘에 한번 공중제비를 돌면 여우로 둔갑하는데 무덤을 헤치고 불에 그슬린 시체를 파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꺼내 먹는다는....
<말희(末喜)> 하(夏)나라 말기/ BC 17세기 경/ 걸(桀)왕의 비(妃). 일명 매희(妹嬉)
중국 신화에서 최초의 제국인 하(夏)나라의 마지막(17대) 황제 걸(桀)왕은 요녀 말희에 의하여 망한다.
말희는 걸왕이 정복한 오랑캐 나라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바쳐진 여인인데 첫눈에 빠지고 말았다.
포악하고 사치스러움의 대명사로 불리던 걸(桀)왕은 미녀 말희에 빠져서 요대(瑤臺)라는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그 안에 술로 채워진 연못을 만들었으며 그 주변으로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고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최초로 만든 장본인이다.
전국에서 미소녀 3천 명을 뽑아다 알몸으로 숲에서 춤추며 놀다가 북소리에 맞춰 일제히 연못의 술을 마시고 숲의 고기(脯肉)를 탐식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결국 하(夏)나라는 제후들의 반란으로 나라가 망하며 걸왕도 죽는데 이어지는 왕조(王朝)가 곧 은(殷/商)나라의 탕왕(湯王)이다.
<포사(褒姒)> 주(周) 왕조 말기/ BC 8세기 경/ 유왕(幽王)의 비(妃)
은(殷/商)을 멸망시킨 주(周)나라 역시 포사(褒姒)라는 여인에 의해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포사는 주(周)의 마지막 임금 유(幽)의 왕후였는데 포사는 궁에 들어온 후 한 번도 웃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실수로 적군이 쳐들어오지도 않는데 봉화(烽火)를 올린 일이 있었다. 제후들이 사방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포사가 깔깔 웃었다고 한다. 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자 이따금 거짓으로 봉화를 올렸고 포사는 그때마다 깔깔 웃고....
남자들이 여자가 웃는 모습을 한 번 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쓴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사자성어가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중국 고대사에서 신화시대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뒤를 이어 하(夏)-은(殷)-주(周)로 이어지는데 은(殷)나라는 사실 상(商)나라로 그 수도가 은(殷墟)이었기 때문에 ‘은(殷)나라’ 라고도 불렸다.
<2> 여태후(呂太后)
◇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비(妃)/BC 240년 전후/ 아명 여치(呂雉)
한고조 유방(劉邦) / 유방의 부인 여태후(呂雉)1,2
여태후의 아버지 여문(呂文)은 산동(山東) 출신의 유지로, 가족들을 데리고 유방(劉邦)의 고향인 패현(沛縣)으로 이사를 하여 딸(아명 呂雉)을 낳는데 이 딸이 장성하여 유방과 결혼하게 되고 훗날 유방이 한(漢)나라의 왕이 되자 태후(太后)가 된다. 여태후는 두 아이를 낳는데 첫째가 후일 노원공주(盧元公主)로 불리게 될 딸이고, 둘째가 황제를 계승하게 될 유영(劉盈)이었다. 유방과 여치는 결혼 후 평범한 농민들의 삶을 살았는데 젊은 날 유방은 가정에 헌신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람기가 많고 주색잡기에 능한 한량(閑良)풍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진(秦)나라 말기,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항우(項羽)와 손을 잡은 유방(劉邦)은 진나라를 멸하고 다시 항우와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게 되는데(楚漢戰) 전쟁 초기에 항우의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여치는 이 기간 내내 초나라의 군영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이때에 받은 심리적인 타격이 훗날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한다.
유방(劉邦/漢)이 항우(項羽/楚)를 물리치고 한왕(漢王)이 되자 황후가 된 여치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유방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제2부인 척희(戚姬)라는 여인이었다.
척희는 대단한 미인이었으며 혁명과 전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8년간이나 유방과 함께 전선을 누빈 혁명동지이기도 했다. 척희에게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인 여치 소생의 유영(劉盈)이 선량하지만 나약한 성품인데 반해 척희 소생의 여의(如意)는 제왕으로서 필요한 품성을 모두 타고난 왕자였다고 한다. 유방은 나약한 태자 영(盈)을 폐하고 여의를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중신들의 반발로 일단 보류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여태후(呂太后)에게 척희 모자는 목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여태후는 이미 정계를 은퇴한 장량(長良)을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태자의 폐위를 막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한나라(劉邦)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세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방(劉邦/漢高祖)의 고향 친구인 소하(簫何)는 재상을 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재사(才士) 장량(張良)은 최종적인 승리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명장(名將) 한신(韓信)이 있었다.
천하가 평정되자 장량은 스스로 은퇴하고 소하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한신(韓信)은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그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일등공신이었지만 후일 한왕(韓王)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권력욕이 강했다. 한신은 물러날 때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항상 불평불만이 많았으나 유방은 차마 탓하지 못했다. 유방을 위해 껄끄러운 한신을 제거한 사람은 여황후였다. 그녀는 유방이 출타한 동안 한신에게 모반죄를 씌워 그의 일가친척, 친구들과 함께 그를 처형했다.
유방과 한신은 혁명 중에 서로에게 맹세하기를 “하늘과 땅을 보며 죽게 하지 않고 쇠붙이 무기를 보며 죽게 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맹세였지만, 여황후는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다. 한신을 죽일 때 자루를 씌우고 대나무 창으로 찔러 ‘하늘과 땅을 보지 않게, 쇠붙이 무기를 보지 않게’ 죽인 것이다.
다음은 전쟁영웅인 양왕(梁王) 팽월(彭越)의 차례였다. 여후는 팽월의 측근들을 협박해서 그를 반역죄로 모함하도록 한 다음 그를 처형했다. 그녀는 팽월을 하나의 시범 케이스로 삼았다. 그의 뼈와 살로 육젓을 만들어 각 제후들에게 보내어 엄중하게 경고한 것이다.
유방이 죽고 열여섯 살의 아들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여치는 태후의 신분으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연적인 척부인에게 오랫동안 칼날을 갈아왔던 그녀는 유방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그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여태후는 척부인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팔다리에 수갑을 채워 죄수복을 입혀 감옥에 가두고 곡식을 찧는 고된 노동을 시켰다. 당시 여의(如意/척부인의 아들) 왕자는 조왕(趙王)으로 봉해져 임지인 하북(河北) 지방에 나가 있었다. 여태후는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여의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심성이 착했던 황제(劉盈/여태후의 아들)는 자신이 아예 성 밖으로 나가 어린 동생을 맞이하고 항상 그를 곁에 두면서 어머니의 음모로부터 보호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태후가 아니었다. 여러 달이 지난 어느 겨울날 새벽, 황제가 잠시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 태후는 여의(呂意)를 독살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여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듣고 척부인이 원망하자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파냈으며 독한 증기를 쐬게 해서 귀를 멀게 하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척부인을 “인간돼지”라고 부르도록 했다.
척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본 어린 황제(惠帝) 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황제 영은 자신의 친누나인 노원공주가 낳은 딸 장씨를 왕후로 맞이해야 했다. 즉 자신의 조카와 결혼한 셈이었다. 또한 황제의 후궁들이 낳은 아들들을 황후가 데려와 키우게 하고 생모들은 모두 죽였다. 혜제의 뒤를 이어 그가 후궁으로부터 얻은 두 아들(척부인의 손자)이 차례로 허수아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첫째가 유공(劉恭)이었는데, 4년째 재위하던 어느 날 자신의 친어머니가 태후 장씨가 아니라 할머니인 여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어느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한을 품었다. 이 사실이 여태후의 귀에 들어가자 그녀는 소년 황제를 가두어 놓고 굶겨 죽였다.
기원전 180년 어느 날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갔던 여태후에게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덤벼들어 그녀의 겨드랑이를 물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녀는 병에 걸렸으며, 여태후는 그녀가 독살했던 유여의(劉呂意/척부인의 아들)의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지르며 두려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데 향년 62세였다.
<3> 측천무후(測天武后)
◇ 당(唐)/ 고종(高宗)의 비(妃)/ 훗날 여황제(女皇帝)/ AD 624~705/ 아명 무조(武照)
노년의 측천무후 / 당태종 이세민 / 용문석굴 봉선사 대불 / 무자비(無字碑)`
측천무후는 당나라 개국공신 무사확(武士彠)의 둘째 딸로 어릴 때 이름은 조(照)였다. 무사확은 사천 지역의 절도사로 있을 때 둘째 딸 조(照)를 낳았는데, 그녀에게는 언니 이외에도 원상(元爽)과 원경(元慶)이라는 전처소생의 두 이복 오빠가 있었다. 무사확은 14인의 개국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나 출신이 미천해서 다른 공신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당고조 이연(唐 高祖 李淵)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그가 상처(喪妻) 하자 수나라의 재상을 지냈던 양달(楊達)의 딸을 그의 후처로 중매했다.
조(照)는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출중한 미모와 총명함으로 소문이 났다. 아버지 무사확은 그녀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공부를 시켜 말 타기와 활쏘기, 춤과 노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특히 시를 짓고 글을 쓰는 데 대단히 능했다고 한다.
당시는 당 태종 이세민이 통치하던 정관의 치(貞觀之治) 말엽으로 황제는 사랑하던 황후 장손씨(長孫氏)를 잃고 그 후유증으로 어린 소녀들을 탐닉하던 때였다. 아름답고 총명하다는 조의 소문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의 나이로 황궁에 들어갔는데, 황궁에서 미랑(媚娘)이라고 불리게 된 조가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책읽기를 좋아하고 시(詩)와 서(書)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 이세민은 그녀를 황실의 서가를 관리하는 직책에 임명하였다. 그것도 비빈(妃嬪)이 아니라 아주 품계가 낮은 단순한 재인(才人)의 지위였다. 그것은 아버지가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명문귀족에 끼지 못하는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미랑은 독서와 학문을 즐길 수는 있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2년 동안이나 황제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도 성은(聖恩)을 입지 못했으며, 품계도 궁에 들어올 때의 재인 그대로였다
그러나 기회가 된 것은 태자 이치(李治)였다. 당시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다 처참하게 실패한 후 깊은 병이 들었고, 무미랑은 병석에 누운 이세민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러 온 태자 이치(李治)가 무미랑에게 반했던 것이다. 이세민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쉰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황제의 여인이었던 무미랑은 법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했다.
태종(太宗)으로 불리게 된 이세민의 첫 번째 기일(忌日)이 돌아오자 황제가 된 이치는 예불을 올리기 위해 감업사를 찾았고, 그곳에서 비구니 노릇을 하던 무미랑과 일 년 만에 재회한다. 그녀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필사적인 노력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 이치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두 사람은 감업사에서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으며, 태자 이치는 그녀보다 세 살 아래였다.
황제위에 오른 이치(高宗)는 연인과의 밀회를 위해 감업사 행차가 잦아지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실에서는 무미랑의 환속과 재입궁을 추진했는데 당시 고종의 황후인 왕(王)씨는 개국공신 왕인우(王仁佑)의 딸로 이치의 네 부인 중 하나인 숙비 소(蘇)씨로 인해서 골치를 썩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무미랑은 황제와의 밀회 일 년 만에 다시 입궁했는데 이번에는 소의(昭儀)라는 지위였고, 황제의 공식적인 여인 121명 중 6번째 서열이었다.
고종은 이미 무소의(武昭儀)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는데 입궁 바로 다음해에 아들 이홍(李弘)이 태어나자 숙비 소(蘇)씨는 황제의 총애를 잃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황후 왕씨의 입장에서는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형상이었지만, 무소의가 워낙 노련하게 처신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무소의가 얻고자 한 것은 황제의 은총이 아니라 무한한 권력이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황후의 자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황제(高宗)와 황후 소씨(蘇)씨는 태자 시절 일찌감치 결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 무소의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필요했다. 무소의가 낳은 두 번째 아이는 딸이었는데 공주는 매우 예쁘고 귀여워서 황후를 비롯한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황후가 이 아이를 보고 간 다음 갑자기 이 아이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황후가 다녀간 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황제의 분노가 폭발했으며, 황후 폐위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일설에는 무소의가 황후를 모함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이불로 덮어 질식해 죽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진위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후일 그녀가 보여준 잔인함이나 포악함으로 판단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일례로 고종이 자신을 두고 다른 후궁 처소로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노하여 그 후궁의 손발을 자른 다음 술 항아리 안에 가둬 죽였다고 한다. 서른네 살에 비로소 황후의 자리에 오른 무소의는 황제 이치가 정신적으로 나약했고 몸까지 허약했기 때문에 많은 권한을 황후에게 위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무후는 아이들을 연이어 낳아, 어려서 죽은 딸을 제외하고도 슬하에 모두 4남 1녀를 두었다. 네 아들은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이단(李旦)이며, 딸 하나는 태평공주(太平公主)였다.
무태후는 태자인 소황후의 아들 이충(李忠)을 폐하고 자신의 큰아들 이홍(李弘)을 새로운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태자 이홍은 장성하면서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어머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권력에 눈이 먼 무후는 자신의 아들 태자 이홍에게 독주를 마시게 하여 살해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뒤이어 둘째인 이현(李賢)을 태자로 임명하지만 또다시 대립하게 되자 모함(반역죄)하여 파주로 귀양을 보냈다가 살해한다. 이현의 세 아들(자신의 손자)도 유폐시킨다. 그녀의 권력욕은 끝이 없어 아들이고, 손자고 가차 없이 죽이고 권력을 움켜쥐는데 혈안이 된다.
마침내 고종(李治)이 죽자 측천무후는 어머니에게 순종적이었던 셋째아들 이현(李顯)에게 황위를 계승(中宗)하지만 즉위 55일 만에 이현이 장인을 재상에 임명하려하다가 어머니에게 미움 받아 유폐되고, 넷째아들 이단(李旦)을 황제(睿宗)로 삼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측천무후는 65세가 되던 해(AD 690), 아들 예종 이단(李旦) 마저 황제위에서 폐하고 자신을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라 칭하며 황제위(皇帝位)에 올라 국호(國號)를 당(唐)에서 주(周)로 바꾸니 중국 역사상 유일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황제가 되는 것이다. 훗날 역사가들은 중국 고대 주(周)나라와 측천무후의 주(周)나라를 구별하기 위해 무씨(武氏)집안의 주나라라 하여 ‘무주(武周)’라고 불렀다.
측천무후는 말년에 황궁 내에 공학부(控鶴府)라는 기관을 두고 스무 살 안팎의 미소년 일흔두 명을 모아 자신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공학부는 무후가 색을 밝혔다기보다 그들의 기운을 빌어 젊음을 유지하고자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역대 남자 황제들은 채음보양(採陰補陽)을 위하여 어린 여인들을 안고 잤는데 그 상대개념인 채양보음(採陽補陰)의 비법이었다. 이러한 비법이 실제로 효험이 있었는지 무후는 일흔이 넘었을 때에도 그녀의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싱싱한 외모가 시들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피부가 일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십 대 소녀와 같은 탱탱함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녀는 노쇠하여 임종이 가까워오자 AD 705년 11월, 셋째아들 이현(李顯)에게 황제 위를 물려주는데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李旦),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側天大聖皇后)로 부를 것과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에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임종하니 향년 82세로, 황후의 자리에 오른 지 50년, 황제로 즉위한지 16년이었다.
측천무후는 임종을 앞두고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은 폐황후 왕씨의 일가, 소 숙비의 일족들, 자신이 처단했던 고종조(高宗朝)의 신하들인 저수량, 한원, 유상 등의 일족들을 모두 사면(赦免)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또,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현재까지 우뚝 서있는 아무것도 적어 넣지 않은 거대한 비석(無字碑) 만큼 중국의 사학자들을 당혹케 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자신의 업적과 과실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에게 맡긴다는 의미였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측천무후의 정권 후기, 불교에 심취한 그녀는 많은 사찰 건립과 불사에 힘썼는데 낙양 인근의 용문석굴 봉선사에 바위벽을 깎아 거대한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석불의 모습을 부처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합쳐서 조각하도록 했다고 한다.
<4> 서태후(西太后)
◇ 청(淸)나라/ 함풍제(咸豊帝)의 비(妃)/ 아명 난아(蘭兒)/ 자희(慈喜)
함풍제 / 서태후 표준영정 / 서태후 사진 / 동태후
만약 인생의 목표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맛보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곳에 살면서 모든 사치를 다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을 받는 것이라면 청나라 서태후는 최고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권력을 잡고 있던 기간은 48년이었으며, 권력을 독점했던 기간도 무려 28년이나 되었다.
1835년생인 서태후는 만족(滿族) 출신으로 그녀의 성은 에호하라(葉赫那拉)이며 어릴 적에는 난아(蘭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가 이때부터는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함풍제(咸豊帝)로 자희는 우연한 기회에 황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지 4년 만에 마침내 황제의 성은을 입는 행운을 잡는다. 그리고 스물 한 살에 왕자 재순(載淳)을 낳으니 재순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다. 함풍제는 밀려드는 서구열강의 압박(아편전쟁)에 이복동생인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에게 수도의 방위를 위임하고 황후인 자안(慈安), 그리고 자희와 재순 모자만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피한다.
북경에서 황후 자안의 처소가 자금성(紫金城)의 동쪽에 위치하고 자희의 처소가 서쪽에 위치하여 사람들은 황후 자안을 동태후(東太后/慈安皇太后), 자희(慈喜)를 서태후(西太后)로 불렀는데 동태후 자안(慈安)은 영리하고 단호한 성격인데 반해 서태후 자희는 권력욕과 탐욕이 강한 성격이었다.
심약한 함풍제는 도피처인 열하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죽으니 청의 권력구도는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 황후인 자안(慈安), 제2황후인 자희(慈喜)와 조정의 대소사를 처리하던 팔대신(八大臣)의 4대 세력으로 압축되지만 공친왕을 필두로 동태후와 서태후는 팔대신(八大臣)을 숙청하고 향후 20년 간 삼두체제를 지속하게 된다.
공친왕이 죽자 서태후는 자신의 아들 재순(6세)을 황제(同治帝)로 앉히나 18세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다시 3세인 조카를 황제(光緖帝)로 앉히고 국가의 실권은 두 태후가 거머쥐는데 광서 7년에 동태후 마저 급사하자 서태후가 청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게 된다. 동태후의 죽음은 소문에 의하면, 서태후가 남몰래 남자를 황궁에 불러들여 즐기다 임신을 하는 바람에 동태후가 예부(禮部)와 서태후의 폐후(廢后)를 논의했고, 이를 눈치 챈 서태후가 독이 든 떡을 보내 독살했다고 한다.
광서 24년인 1898년, 광서제는 대대적인 개혁운동(變法自疆運動)을 벌이나 100일 만에 실패하자 서태후는 야심가인 원세개(遠世凱)를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를 모두 숙청하고, 광서제를 조그마한 섬 영대(瀛臺)에 감금하는데 광서제는 4년 후에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서태후는 곧바로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 재풍의 세 살 먹은 아들 푸이(溥儀)를 선통제(宣統帝)로 세우니 청의 12대, 대청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서태후는 세 번째의 수렴청정을 시도하지만 선통제가 즉위하던 다음날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향년 74세였다.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와 40여 년 동안 정권을 휘둘렀던 철의 여인 서태후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이질(痢疾)’ 이라는 병에 속절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광서제가 죽고 푸이(溥儀)가 정권을 이어받던 다음날 서태후가 숨을 거두었는데 광서제도 결국 서태후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서태후는 끼니마다 100가지의 요리를 차리도록 했는데 그녀의 한 끼 식비로만 은화 200냥이 지출되었다고 하는데 이 금액은 당시 서민들 100명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와의 전쟁이 클라이맥스에 있을 때, 서태후는 거금을 들여 자신의 거처인 저수궁(儲秀宮)을 신축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환갑잔치를 위해서 2년 전부터 거국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해에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일본군이 대련 항에 상륙해서 대대적인 민간인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 동안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3일 동안이나 계속된 연회였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서구 열강침략자들에 의지하고자 광서 26년인 1900년, 서구열강이 12개 조의 요구사항을 제출하자 그녀는 별다른 협상절차도 없이 모두 수용했다. 그 결과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보장하기 위해서 주요 재정 수입원인 관세와 염세(鹽稅)는 모두 차압당했으며, 외국군이 주요 도시에 진주하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는 서구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을 탄압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중국사의 가장 큰 굴욕인 신축조약(辛丑條約)이다. 이 와중에도 서안(西安/長安)에 머물던 서태후는 북경에서와 같은 호화판 생활을 계속했다. 하루에 200냥씩 지출되는 식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웃지 못 할 이야기로 내시(內侍)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이 한 올만 떨어져도 죽였다고 한다. 머리를 빗겨주는 내시는 빠진 황후 머리카락을 몰래 옷소매에 감추기 위하여 머리를 빗길 때에는 옷소매가 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한 내시의 일기에 따르면 한번은 늙은 내시가 실수를 하자 그에게 강제로 사람의 똥을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의 술(酒) 이야기
①마오타이주(茅台酒) ②펀지우(汾酒) ③우량예(五粮液) ④양허따취(洋河大曲) ⑤지우꾸이지우(酒鬼酒)
⑥슈이찡팡(水井坊) ⑦동지우(董酒) ⑧검남춘(劍南春) ⑨죽엽청주(竹葉淸酒) ⑩노주특곡(蘆酒特曲)
⑪고정공주(古井貢酒) ⑫공부가주(孔府家酒) ⑬이과두주(二鍋頭酒)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는 후한(後漢)시대 유비(劉備)가 촉한(蜀漢)의 수도를 세운 고도(古都)로, 중국 제일의 바이주(白酒:곡물로 밑술을 빚거나 발효해 만든 중국 전통 증류주) 생산지로 유명하다. 우리가 흔히 배갈이라고 부르는 술... 쓰촨은 연중 흐리고 습한 날이 많아 효모(酵母)를 증식시키기 쉽고, 물도 깨끗해서 술을 빚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고 한다.
쓰촨에서 생산되는 술은 우량예(五粮液/오량액), 슈이찡팡(水井坊/수정방), 찌엔난춘(劍南春/검남춘), 루주트취(蘆酒特曲/노주특곡) 등이 있는데 모두 중국의 명주(名酒)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마오타이주(茅台酒/귀주), 우량예(五粮液/쓰촨), 검남춘(劍南春/쓰촨)을 중국 3대 명주로 꼽고 여기에 슈이찡팡(水井坊/쓰촨)을 더하여 4대 명주로 꼽기도 하는데 이중 세 가지가 쓰촨에서 생산되니 쓰촨성은 과연 명주의 고장이라고 할 만 하다.
중국에는 4천 5백 여 종의 술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에 따라 꼽는 것이 조금 다르지만 명주(名酒)로 이름 붙여진 술들을 알아보고, 또 명주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사랑을 받아온 서민주(庶民酒)인 공부가주(孔府家酒)와 이과두주(二鍋頭酒)도 포함시켜 이야기해본다.
<1> 마오타이주(茅台酒)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마오타이주는 구이저우성(貴州省) 마오타이촌(茅台村)의 맑은 물로 빚은 술이다.
7번 증류하고 3년 숙성하여 내 놓는다고 하는 명주로, 모향(茅香/풀 냄새), 혹은 장향(醬香/간장의 향기)이 풍기는 독특한 풍미를 자랑한다. 알코올 도수 53도로,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에서 스카치위스키(영국), 꼬냑(프랑스)과 함께 세계 3대 명주로 꼽히며 금상을 차지하여 명성을 얻었다.
<2> 펀지우(汾酒)
산시성(山西省)에서 생산되는 펀지우는 4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주로 알코올 도수는 61도이다.
원료는 수수이고 완두와 밀로 누룩을 만든다고 한다. 청향형(淸香型) 백주로 맑고 투명하며, 1952년 전국 주류평가대회에서 금장을 딴 것을 시작으로 연속 5회 수상한 명주로 마오타이주, 노주특곡과 함께 5년 연속 금장수상의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3> 우량예(五粮液)
쓰촨성(四川省)에서 생산되는 우량예는 3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수수, 찹쌀 보리, 옥수수, 쌀의 다섯 가지 곡물(五粮)이 주원료이다. 원래는 여러 가지 곡식을 섞어서 만든다하여 잡량주(雜粮酒)로 불렸으나 5백 년 쯤 전에 다섯 가지 곡식으로 고정되어 이름도 우량예(五粮液)로 바꾸었다고 한다. 1956년 중국 전국곡주 질량 품평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4> 양허따취(洋河大曲)
장쑤성(江蘇省)에서 생산되는 4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주로, 알코올 도수 48도이다. 수수가 주원료이며, 1979, 84, 89년 중국에서 실시한 시음대회에서 백주 중 중국 최고의 명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5> 지우꾸이지우(酒鬼酒/湘西湘泉酒)
후난성(湖南省)에서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발굴하던 중 술과 효모(酵母)를 함께 발견하였는데 기막힌 풍미가 있어서 놀랐고 곧 진시황이 즐기던 술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조법은 후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같은 맛을 내는 오늘날의 주귀주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귀(酒鬼/술 귀신)의 술이라는 것은 술 귀신이 좋아하는 술, 다시 말하면 ‘주신(酒神)의 술’, ‘주정뱅이의 술’, ‘술고래의 술’ 이라고나 할까? 즉, 매니아(Mania)들의 술, 진정한 술맛을 아는 이들의 술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6> 슈이찡팡(水井坊)
쓰촨성(四川省)에서 생산되는 6백 년 전통의 수정방은 원나라 이후 명맥이 끊겼다가 1998년 양조장 유적이 발굴되면서 옛 방식 그대로 다시 양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 세계 증류주대회에서 수상했고, 알코올 도수는 38~52도 다양하다고 한다. 색깔은 수정같이 투명하고 그윽하며 강한 향이 일품이고, 맛은 순하고 부드러우며 높은 격조를 품고 있다고 한다.
<7> 동지우(董酒)
구이저우성(貴州省)에서 생산되는 술로 130여 가지의 약초가 들어가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명주이다. 명나라 때 불교 사찰 동공사(董公寺)에서 담그기 시작하였다는 이 술은 사찰 주변에 10여 개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이 중 정(程)씨 집안의 양조기술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정씨의 후손 정명곤(程明坤)은 선대의 기술과 장점들을 모으고 현지의 기후와 풍토, 원료 등을 결합하여 품격이 남다른 동공사 교주(董公寺窖酒)를 양조하는데 성공하였다. 동공사 교주는 1920년 초에 명주로 지정되었고, 1940년 초,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동주라 명명되었다. 물은 동공사 서쪽 8km의 우물 광천수를 사용한다고 한다. *窖(움집 교)
<8> 검남춘(劍南春)
쓰촨성(四川省) 면죽시(綿竹市)에서 생산되는 술로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알코올 도수 52도.
면죽시가 검산(劍山)의 남쪽에 위치해 있고 당조(唐朝)시기에 ‘춘(春)’ 자가 명주(名酒)를 뜻했기에 검남춘이라고 명명되었다. 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검남춘은 당나라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일한 명주로, 중국 8대 명주 중 하나로 꼽힌다. 검남춘 제조에 사용되는 물은 중국의 명천(名泉)인 옥비천(玉妃泉) 지하수에서 나오는 물을 사용한다. 옥비천의 지하수는 저(低) 나트륨 수질에 규소, 스트론튬 등 인체에 이로운 천연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9> 죽엽청주(竹葉淸酒)
산시성(山西省)에서 생산되는 명주로 10여 가지의 약재를 첨가하여 빚는다고 한다. 찹쌀, 누룩, 솔잎, 대나무 잎이 주원료인 죽엽청주는 알코올 도수가 40도로 맛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인데 향을 좋게 하기 위하여 저온에서 6개월 이상 숙성시킨 후 여과하여 시장에 낸다고 한다.
죽엽청주는 술이 순하면서도 마시면 은근하게 취하고 빨리 깨는 것이 여느 민속주와 다른 특징이라고 있다.
<10> 노주특곡(蘆酒特曲)
쓰촨성(四川省) 루저우(蘆酒)에서 생산되는 노주특곡은 400년 역사를 자랑하며, 알코올 도수는 45도이다. 노주특곡(瀘州特曲)은 중국의 백주 중에서도 발효기간이 긴 것으로 유명한데 발효기간이 길어 색이 투명하며 향이 농후하고 독특하면서도 순수한 것이 특징이다. 수수를 양조한 뒤 오랫동안 숙성시켜 빚는 노주특곡은 가격이 비싸지 않아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명주로 유명하다.
<11> 고정공주(古井貢酒)
안후이성(安徽省)에서 생산되는 명주로 ‘술의 모란꽃’으로 불린다. 조조(曹操)가 신의(神醫)로 칭송받던 화타(華陀)의 고향 안후이성(安徽省) 고정(古井) 지방의 물로 빚은 술로 한제(漢帝)에게 올려 칭찬을 받았다고 하여 유명해졌다고 하며, 조공(朝貢)으로 올렸다하여 공주(貢酒)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12> 공부가주(孔府家酒)
공자의 고향곡부(曲阜)에서 생산되는 술로 2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일찍이 명나라 때부터 제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쓰였으나 곡부를 방문하는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늘어나면서 연회용 술로 사용되며 유명해졌다. 1984년 곡부주창(曲阜酒廠)은 공부가(孔府家)의 양조기술을 발굴하여 현대양조 과학기술과 결합, 지금의 술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공부가주는 시장에 나온 후 호평을 받았으며 가격이 저렴하여 외국으로 가장 많이 팔려나가는 백주의 하나로 손꼽힌다.
<13> 이과두주(二鍋頭酒)
얼궈터우지우(二鍋頭酒)는 수수로 빚은 고량주로 곡물을 발효시킨 증류주로 우리가 중국집에서 즐겨마시던 배갈이다. 이과두주란 이름은 두 번 솥으로 걸렀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보통 증류할 때 세 개의 솥을 쓰는데 이과두주는 그 중 두 번째 솥에 거른 것만을 쓴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가격이 저렴하고 뒤끝이 깨끗한 이 술은 중국 서민들이 가장 애용하는 술로 중국인들은 이 술을 마시면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서민 술로 알코올 도수는 56도로 상당히 독한 술이다.
♠ 중국 술의 향(香)에 따른 분류
◎농향형(濃香型/蘆香型) - 노주특곡(蘆酒特曲) 향
- 향이 짙고 향기가 입 안에 감돌아 술 맛이 달고 부드러우며 끝 맛이 오래가는 것이 특징
◎장향형(醬香型/茅香型) - 마오타이주(茅台酒) 향
- 향이 진하고, 뒷맛이 오래 남고, 간장 종류 복합적인 향이 나는 특징
◎청향형(淸香型/汾香型) - 펀지우(汾酒) 향
- 술이 맑고 투명하며, 감미롭고 상쾌하게 어우러지는 특징
◎겸향형(兼香型/複香型) - 혼합된 향
- 술 하나에 청향형, 농향형, 장향형의 여러 가지 향이 나는 특징
◎미향형(米香型/桂香型) - 쌀 맛의 계림삼화주(桂林三花酒) 향
- 향이 진하고, 그윽하고 깨끗하고,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듯 한 특징
♠ 묘족(苗族)의 ‘술 노래’ /1100년을 이어온 노래
묘족 다이파(黛帕)라는 소녀는 어느 날 밭에 나가 일하는 가족의 점심을 가지고 가다가 다이추이(黛崔)라는 소년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반하여 오동잎으로 싼 밥을 난초가 피어있는 풀숲에 덮어놓고 소년과 같이 노래를 부르다가 점심 가져가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점심때가 지나도록 점심을 가져오지 않자 화가 난 오빠는 동생을 때려 죽였는데 장사를 지내고 얼마 후 가족들은 밭 근처 난초꽃 사이에서 소녀가 덮어 놓은 밥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 밥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한 향기가 나는 술로 변해 있었다. 그런 방법으로 밥을 발효시켜 생겨난 술이 샹취안주(湘泉酒/酒鬼酒)로 소녀를 술 양조법의 시조이자 주신(酒神)으로 주낭낭(酒娘娘)으로 부르며 모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다이파가 죽어 하늘나라 술의 여신이 되었고, 이 술의 여신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남긴 술이 바로 샹취안주라고 하는 내용의 묘족 노래이다.
♠ 술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 한 가지
중국 어느 고을에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애주가가 있었는데 좋은 술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천릿길을 마다않고 가서 꼭 마셔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먼 장삿길을 다녀온 친구가 어느 곳에 가면 기가 막힌 술이 있는데 그 주루(酒樓) 벽에 ‘한 잔을 마시면 천국이요, 두 잔을 마시면 비몽사몽이요, 석 잔을 마시면 반드시 죽으리라’ 라는 족자가 걸려 있는데 아무리 술이 센 사람도 석 잔을 마시지 못한다더라고 하였다.
이 애주가는 죽기 전에 꼭 그 술맛을 보기로 작정을 하고 그 날부터 돈을 모아 기어이 그 주가(酒家)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술집에 도착한 그는 우선 술 한 잔을 시켜 맛을 음미하는데 그 향기로움이 골수까지 스며드는 느낌으로 황홀경에 빠졌다.
한 잔을 더 시켜 희희낙낙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데 과연 지금까지 맛본 술중에서 가장 뛰어난 맛이었다. 주인을 불러 다시 한 잔을 더 시키니 주인은 손사래를 저으며 석 잔을 마시면 죽을 것이라며 벽의 족자를 가리킨다. 이 애주가는 주머니를 털어 미리 석 잔 값을 지불하며 자기는 주량이 절대로 석 잔을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고, 이런 맛이라면 설령 죽는다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 잔 더 줄 것을 간청하였다. 주인은 할 수 없이 한 잔을 더 가져다주었는데 석 잔째를 마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사내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혼절하였다.
사람들이 덤벼들어 백방으로 소생시키려 애를 썼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주인은 연고자를 수소문했지만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아무도 몰라 할 수 없이 뒤뜰에 묻어주었다.
고향에 있던 아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술을 맛보러 간다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수소문 끝에 일 년이 지난 후에야 그 술집을 찾아갔다. 술집 주인의 안내를 받고 뒤뜰의 아버지 묘 앞에 간 아들은 고향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분향을 한 후 산소를 파헤치고 관 뚜껑을 열었다. 관 뚜껑을 열자 향기로운 술 냄새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발그레한 볼의 사내가 아직 취기가 남은 모습으로 ‘아~, 잘 잤다.’ 하며 일어났다고 한다. 사내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자 그 입에서 향기로운 술 냄새가 뒤뜰 가득 풍겼다고 하는....
<예전에 들은 이야기임/ 그 술 이름을 잊어버렸다. 필경 저 위의 술 중 한 가지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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