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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신사의 연대기3 [162.10]
신인간 ・ 2021. 10. 26. 11:19
특집
해월신사의 연대기3
지일기념 특집으로 삼암 표영삼 종법사가 정리한 ‘해월신사의 연대기’를 세 차례 나누어 싣는다. /편집실
10. 동학혁명운동
신사는 5월에는 칠곡군 율림리 곽우원의 집에, 7월에는 인동 배성범의 집과 금능군 어모면 다남리 오청계 편겸언(사언)의 집을 전전하다가 황간 김선달의 집을 거쳐 7월 그믐께 왕실 본가로 돌아왔다. 8월에는 조재벽의 주선으로 청산군 문암리 김성원의 집으로 이사했다. 덕기의 병세는 악화되어 10월 15일에 19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시천교력사에는 11월에 이르자 신사는 각포에 법소 즉 도소를 설치하라 명령을 내렸다. 김연국은 충주 황산리에, 청주에는 손천민, 옥천에는 박석규, 보은에는 임규호, 예산에는 박희인, 문의에는 임정준, 청산에는 박태현, 부안에는 김낙철, 무장에는 손화중, 남원에는 김개남, 청풍에는 성두환, 홍천에는 차기석, 인제에는 김치운 등이 각기 도소를 설치했다 한다.
1893년 말에 이르러 전라도 고부와 경기도 이천에서 동학도들이 관에 항의하는 집회가 있었다. 전라도 고부에서도 11월과 12월에 전봉준이 앞장서서 관에 항의하는 운동이 있었다. 군수 조병갑은 오히려 농민들을 더욱 괴롭히자 참다못한 동학도와 농민들은 1894년 1월 10일 고부 관아를 습격하는 민란을 일으켰다. 정부는 조병갑을 두둔하여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보복하게 했다. 집에 불을 지르고 전 재산을 약탈하며 무고한 백성을 살해까지 했다.
전봉준은 손화중 대접주가 있는 무장 동음치면 구시내 당산으로 가서 기포를 준비했다. 3월초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대접주와 전봉준, 정익서, 김도삼, 최경선 등은 혁명의 기치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날자는 각지에서 기포하여 백산으로 모여 3월 21일에 깃발을 올리기로 했다. 3월 18일경에 전봉준과 손화중은 당산에서 기포하여 출발했으며, 김덕명은 원평에서, 김개남은 태인에서 각각 기포하여 백산으로 향했다.
백산 창의비
백산에 모인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대접주는 전봉준을 동학대장으로 추대하고 혁명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4대강령과 11개 군율을 공포하고 격문도 발표했다. 강령은 ①사람을 살상하지 말며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②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케 한다. ③왜와 오랑캐를 몰아내어 이 나라의 국기와 사회정의를 확립한다. ④서울로 군대를 진격시켜 권귀權貴를 진멸시킨다 는 것이다. 격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게 됨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들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들 밑에서 굴욕을 당하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앓으면 후회하여도 믿지 못하리라”
동학군이 처음 출동한 것은 3월 28일(음력)이며 태인과 금구를 공격하고 4월 1일에는 보국안민이라 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부안현을 쳐들어갔다. 급보를 받은 전주감영은 1천명의 감영군을 출동시켜 4월 7일에 고부 황토재에서 동학군과 전투를 벌이게 됐다. 동학군은 4월 6일에 추적해 오는 감영군을 황토재로 유인하여 7일(5월11일) 새벽에 기습을 감행 대승을 거두었다. 감영군과의 첫 번째 전투는 동학군이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여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했고 8일에는 흥덕과 고창을, 9일에는 무장현을, 4월 10일에는 여시매(호산)로 이동하였고 11일에는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 세분의 공동명의로 창의문을 반포했다. 창의문의 요지는 “… 앉아서 국가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팔로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億兆가 의논하여 이제 창의의 깃발을 들고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을 같이할 맹세를 하였으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이나 절대로 겁내어 망동하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편안하여 한가지로 태평세월이 되기를 빌자”고 했다.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출동시켰다. 인천을 출발한 이들은 4월 5일에 군산항을 거쳐 11일에 전주성으로 입성했다. 동학군이 의외로 강한 것을 알자 추가 병력을 요청하고 전주성에 계속 머물고만 있었다. 동학군은 4월 12일 여시매에서 출발 12일에 영광으로 갔다가 함평과 무안을 점령했다. 증원군이 법성포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4월 18일에야 출동했다.
함평에 있던 전봉준 장군은 21일 저녁에 정부군이 영광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자 전 동학군을 밤사이에 나산(나루뫼)으로 이동시켰다. 22일 새벽에는 장성으로 출동시켜 비어 있는 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신속히 행군했다. 이를 알게 된 홍계훈은 4월 23일에 이학승 부대를 장성으로 급파하여 저지시키려 했다. 점심때 월평까지 진격한 관군은 동학군이 식사하고 있는 곳을 공경했다. 당황한 동학군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역습으로 신효리까지 진격하여 포위 작전으로 관군 대장 이학승을 사살하는 등 궤멸시켜 대승을 거두었다.
전주풍남문
동학군은 24일 새벽에 출동하여 정읍, 태인, 원평을 거쳐 27일에 비어 있는 전주성을 무난히 점령했다. 홍계훈은 동학군을 급히 뒤따라 왔으나 하루 늦은 28일에 완산에 당도하여 진을 칠 수 있었다. 전주성이 함락되자 정부는 4월 30일에 원병을 청국에 요청하는 실수를 범했다. 5월 5일에 청국군 900명이 아산에 상륙하자 5월 7일에는 일본군 400명이 인천에 상륙했다. 당황한 정부는 5월 7일에 동학군과 화약을 맺고 5월 8일에 동학군이 전주성을 철수하자 일본군에 철수를 요구했으나 때는 늦었다. 결국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고 6월 21일(양7.23)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김홍집 내각을 조직했다.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은 동학군이 장악한 민정 통치를 견제하기 위해 6월 3일 동학군에게 집강소 설치를 약속했다. 면․리 단위의 집강소 활동은 생각했으나 동학군의 요구로 군현 단위 집강소를 허용하게 했다. 동학사에 실린 12개 폐정개혁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을 협력한다.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③ 횡폭한 부호를 엄징한다. ④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⑤노비문서를 소각한다. ⑥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⑦청춘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⑧무명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⑪공사채는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⑫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나주 영금문. 사적제337호. 1894년7월1일(음) 동학군이 나주를 공격할 때 영금문(서성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 8월13일(음)에는 전봉준이 영금문을 찾아 나주목사 민종렬과 협상했던 곳.
집강소 활동은 전라도 53개 군현에서 거의 실시됐으나 나주목사 민종렬의 완강한 반항으로 이곳만은 어려움이 있었다. 나주의 오권선과 태인에서 내려간 최경선은 수만 병력을 동원하여 7월 5일에 나주성 공격했다. 노안면 금안리에서 금성산을 타고 넘어와 서문을 맹렬히 공격하여 거의 점령하는 듯 했다. 그러나 동학군의 뒷심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8월에는 전봉준 장군이 직접 민종렬을 찾아가 설득해 보았으나 거절당해 나주성은 동학군 활동에 여러모로 장애가 되었다.
8월 18일에 평양성 전투에서 청국군을 물리친 일본군은 거침없이 압록강을 건너가 대륙침략에 나섰다. 그리고 후방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동학군 토벌에 나섰다. 후비보병독립제19연대라는 특별 병력을 조직하여 10월부터 동학군 토벌에 투입했다. 용산에서 세 갈레로 남하한 이들은 월등한 무기로 동학군을 공격했다..
왕궁 침입에 격분한 동학군은 8월초부터 재기포를 서둘렀다. 신사도 9월 18일(양10.16)에 보은 도소에서 모든 동학군에게 기포령을 내렸다. 백범일지에는 신사께서 “호랑이가 물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자”며 기포령을 내렸다 한다. 충청 경기 동학군들은 9월 하순부터 기포 했으며 10월 6~7일경에는 장내리로 모였다. 며칠 후 청산으로 이동하여 호남군과 합세할 준비에 들어갔다.
1.문바위골 김성원 집으로 해월신사 은거지(옥천군 청산면 한곡1길 105-1)
2. 문바위골 기념탑
10월 11일 신사는 “친히 대통령 기호旗號를 손병희에게 사賜하시고 정경수 포로 선진을 삼고 전규석 포로 후진을 삼고 이종훈 포로 좌익을 삼고 손병희로 중앙진에 거하여 각포 지휘케 하시었다” 한다. 1894년 10월초에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신정희를 순무사로, 선봉장에는 이규태를 임명했다. 이들은 월등한 화력으로 일본군과 합동으로 동학군을 공격했다.
10월 21일의 세성산 전투를 위시하여 10월 14일 하동 고성산 전투, 10월 22일의 홍천 서석 풍암리 전투, 10월 28일의 홍성 전투, 11월 6일의 해주 철수, 11월 7일의 해미성 전투, 11월 11일 공주 우금티 전투, 11월 13일의 김개남 청주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연속 밀리고 말았다.
공주전투에서 패한 전봉준 손병희 연합 동학군은 원평까지 후퇴하여 재기를 도모했으나 11월 25일 원평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자 동학군의 주력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나주 인근 지역의 전투, 장흥 석대벌 전투를 마지막으로 서남부 지역의 동학군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 김덕명 장군 손화중 장군, 최경선 장군 등은 모두 관에 체포되는 몸이 되어 재기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 수백 명은 정읍 내장산 갈재를 넘어 순창 복흥을 거쳐 11월 19일에 임실 갈담(강진)에 이르렀다. 여기서 임실 새목터에 있던 신사를 모시고 장수 장계와 무주를 거쳐 영동 용산까지 진출했다. 여러 날 유진하자 청주병과 옥천병의 공격을 물리쳤다. 얼마 후에는 상주 소모영군 200명이 공격해 오자 이들도 단숨에 물리쳤다.
동학군은 다시 북상하여 12월 12일에 청산현을 점령하고 16일에 보은 북실(보은읍 종곡)로 후퇴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12월 17일 밥 10시경에 불을 피우고 있는 동학군을 기습했다. 본격적인 공방전은 18일(양1895.1.13) 아침에 시작됐다. 동학군은 무모하게 공격하다가 300여명***을 희생당하고 계속 후퇴하여 12월 20일경에 음성군 금왕읍 되자니에 이르렀다. 12월 24일(양력1895.1.30)에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최후의 전투를 벌였으나 완전히 패하고 말았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桑原榮次郞 報告. “東學軍 戰死者 300餘名, 負傷者 未詳”이라 했고 天道敎會史草稿에는 “死傷이 甚衆이라” 했다./‘손병희 통령과 동학혁명’:“여기서 전사한 동학군은 대략 일본기록 대로 3백 명 정도라고 여겨진다. ‘소모사실’에는 395명으로 기록하였고, ‘토비대략’에는 야간전투에서 393명, 주간전투에서 2, 200명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과장해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300명의 전사자도 80m까지 다가갔던 동학군이 탄약이 떨어져 등을 돌리고 후퇴하자 역공을 당하면서 후방 진영이 혼란해지자 많은 이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황해도에서는 1895년 4월까지 동학군 활동이 계속되었다. 시천교역사에 의하면 강령, 문화, 재령 등지에서는 임종현, 김유영, 원용일, 한화석, 최유현, 오응선, 김응종, 성재석, 방찬두 등이 수십만의 도인들을 모아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수십 차례나 전투를 벌이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용강, 강서에서는 김사영 등이, 함흥에서는 김학수 등이, 강계에서는 이백초 등이 기포 하여 활동했다 한다.
동학혁명의 실패로 돌아가자 많은 동학지도자들은 무참하게 살상 당했다. 전라도에서는 이도재가 관찰사로 부임하자 무죄로 방면됐던 장흥의 이방언, 금구의 김방서 등 다수의 동학접주들을 색출해서 처형했다. 전봉준 장군을 비롯하여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 호남의 많은 지도자들은 자기 고향에 숨어들었다가 체포당했다. 전봉준, 김덕명,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5명의 지도자는 1895년 3월 30일 새벽에 종로에서 교형으로 순도 순국했다. 다행히 신사와 북접 지도자들은 강원도 산중으로 피신하여 무사했다.
11. 집단지도체제
신사 일행은 1894년 12월 30일(그믐)에 인제로 들어가 남면 느릅정이 최영서의 집에 피신했다. 1년 뒤인 1895년 12월 5일에 원주 수레너미로 이주하여 1896년 2월까지 있었다. 수레너미는 횡성군 안흥면 강림리에 있다. 천도교서에는 “정월 5일에 신사 손병희의 의절을 심찬하사 도호를 의암義菴이라 사하시고…, 11일에 신사 손천민을 송암松菴이라 김연국은 구암龜菴이라 도호를 사賜하셨다”했다. 이때 전라도에서 박치경, 허진, 장경하, 조동현), 양기용 등 여러 도인들이 찾아오면서 왕래가 트이기 시작했다.
2월에 날이 풀리자 신사는 충주 외서촌 마르택으로 나왔으며 3월부터 의․구․송 삼암의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다. 6월에는 청주 산막 신경진 집에, 7월에는 상주 하북면 송내(송천리) 깊은 산중 높은터로 올라가 이자성의 집에 머물렀다. 1897년 2월경에는 다시 이천군 설성면 수상1리로 이주했다. 4월 5일의 득도기념일을 맞아 향아설위법을 창제했다. 벽을 향해 차리던 제례를 나를 향해 차리도록 바꾼 것이다. “앞으로 모든 의례는 벽을 향해 차리지 말고 나를 향해 차리도록 하라. 한울님이 내 몸 안에 모셔져 있거늘 어찌 나를 버리고 다른 곳을 향해 차리겠는가”라고 하며 “자신을 향해 작은 상을 하나씩 놓고 음식물을 골고루 놓으라”라고 했다.
7월에는 북접법헌의 명의로 발행하던 교임 첩지를 용담연원으로 바꾸어 발행했다. 손병희는 연로하신 신사를 편히 지낼 수 있게 하기 위해 임순호와 의론하여 원주 전거론(강천면 도전리)에 지어 놓은 새집을 쓰도록 했다. 9월 10일에 신사를 이곳으로 모셔 왔으며 9월 14일에는 아들 성봉을 낳았다. 고령인 신사는 8월부터 설사가 심해 고생하고 있었다. 임순호는 “학질같이 알았으며 … 몇 시간씩 고통스러워했다”고 하며 대소변을 받아 냈다 한다.
전거론 사진 ⓒ최인경
몸이 극도로 불편해지자 12월 24일에 신사는 의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이 때 충주 외서촌(음성지역) 지방에서 불길한 일이 생겼다. 이상옥(용구)과, 음죽군 앵산동 신택우, 이천 보통리 권성좌가 이천에게 체포됐다. 이상옥과 신택우는 1월 1일에 체포되었고 권성좌는 2일에 체포되었다. 권성좌로부터 자백을 받고 20여명의 병졸을 출동시켜 1월 4일 새벽에 전거론으로 돌입했다.
“나는 곧 신사 댁으로 달려가니 성사와 구암에게 일의 급한 것을 전하니 일동은 침묵할 뿐이었다. … 강암이 신사께 피신하도록 말씀하였으나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천명을 기다릴 따름이다’ 하시었다.”
당시 신사댁에는 의암․구암․강암(손병흠)․염창순․임순호 등이 있었다. 병정들이 “최법헌이 누구냐”하자 의암이 나서서 “팔십 노인이 몇 달째 누워 계신데 무도할 수 있는가”고 꾸짖었다. 병정들은 의암을 불러내어 권성좌와 대질시켰다. 의암은 목침으로 문지방을 치면서 “자세히 봐라. 알거든 안다고 해라” 하며 호통을 쳤다. 권성좌는 “저 분이 최법헌이고 이 분이 손응구요” 할 수 없었다.
횡설수설하다가 사깟봉(입산)에 있다고 했다. 병정들은 달려가 글방 훈장 김상률을 포박하여 끌어냈다. 동리 사람들은 “우리 훈장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잡아가느냐”고 항의했다. 또 한차례 곤욕을 치른 권성좌는 “은진서 왔다는 이가 법헌이라”고 했다. 되돌아 온 병정들은 김낙철을 무조건 결박하여 이천으로 끌고 갔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했다.
12. 72세에 순도
신사가 아님이 밝혀지면 다시 올 것이 뻔하자 저녁 때 신사를 모시고 산길로 올라갔다. 의암성사와 구암․강암․임순호 등이 앞뒤로 호위하여 지평 갈현 이강수의 집으로 갔다. 다시 홍천 서면 제일동 오문화의 집에 가서 10여일을 지냈다. 1월 22일에는 방아재리 용여수의 집으로 옮겼다가 1월 30일에 원주 호저면 고산리 송골 원진여의 집에 도착했다. 의암은 섬배 즉 둔둔리에, 김구암은 옥직에서 왕래하며 신사를 모셨다.
건강도 다소 회복되어 가던 4월초에 충청도 옥천에서 송경인이 이끄는 옥천 보은 관졸에 의해 신사의 소재가 드러났다. 4월 5일(음) 불행하게도 송경인이 이끄는 병졸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송경인은 옥천 지방에 사는 박가라는 문객을 통해 정보를 입수, 신사를 체포하게 됐다. 여기서 박윤경(윤대)을 앞세우고 전거론으로 와서 이치경으로부터 소재지를 알아 이튿날 정오 경에 송골로 들어왔다.
신사는 결박된 채 문막까지 와서 배편으로 여주를 거처 서울로 압상됐다. 다행히 신사는 득도기념에 참석했던 인사들을 미리 돌려보냈다. 임순호는 “4월 4일은 의암성사․구암․강암․신현경․나(임순호) 다섯 사람이 선생을 모시고 있었는데 해월신사께서는 다 돌려보내시었다.”고 했다. 의암성사와 송암․구암은 곧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 김모의 집에 유하고 송암은 추후에 상경하여 서문밖에 유하고, 이종훈은 동소문안 참욋다리에 밥집을 차리고 있었다. 이종훈은 활동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신사께서 잡히사 곧 서울로 오시어 광화문 경무청(창덕궁 시위대 있는 곳)에 갇히시었다. 광화문 경무청에 10여 일이나 계시다가 서소문 감옥으로 옮겨졌다.” “정암은 … 신사께서 서소문 감옥으로 옮기게 되자 … 서소문 감옥 청사(옥졸 두목) 김준식을 찾아가 …결의 형제를 맺었다.”
어느 날 이종훈은 김준식을 통하여 신사가 병환 중임을 알게 됐다. 옥살이로 병환은 중태였다. 신사로부터 “… 내게 관한 일은 조금도 염려 말라. 천명이니 마음 편안하게 최후를 기다리노라. 도의 장내는 탕탕蕩蕩할 것이다. … 긴요히 쓸 곳이 있으니 엽전 50량을 넣어 달라.”고 했다. 이 돈으로 떡을 사서 굶주리는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다. 신사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정부는 재판을 서둘렀다. 6월 30일(음5.11)에 개정한 재판은 7월 18일(음 5.30)에 교형 선고로 마쳤다. 평리원까지 왕래하며 재판을 받을 때 큰칼을 쓰고 걸어가다 기운이 달려 수없이 주저앉는 광경을 본 이종훈은 눈물을 흘렸다.
해월신사 묘소
신사의 죄명은 ‘금지사무사술죄조禁止師巫邪術條’에 적용시켜 교형에 처했다. 이튿날 19일에 형집행 승낙을 얻어 7월 21일(음6.2)에 교형을 집행했다. 이종훈은 하오 5시에 처형했다 한다. 신사의 시신은 육군법원 교형장 뒤뜰에 3일간 내버려두었다가 광희문 밖에 내다 묻었다. 이종훈은 저녁에 신사의 시신을 파다가 새벽에 나루를 건너 송파의 이상하의 산에 안장했다.
2년 후인 포덕 41년(1900)에 이상하는 신사의 묘소를 이장해 달라고 간청해 왔다.
상사(춘암 박인호)와 이종훈은 신사의 시신(유골)을 수습하여 광주를 거쳐 천덕산에 모시었다.
1900년 3월 12일 성사와 많은 두령들이 참례하여 천덕산 기슭에 안장했다.(완)
[출처] 해월신사의 연대기3 [162.10]|작성자 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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