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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경 제5권
대반열반경_4. 여래성품②
비밀한 장, 여래는 감추는 것이 없다/
무상, 그리고 항상/ 대열반의 뜻/
치료할 수 있는 것과 치료할 수 없는 것/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색인가 색이 아닌가/
참 해탈은 여래이다/
[비밀한 장, 여래는 감추는 것이 없다]
그때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존에게 비밀한 장(藏)이 있다’ 하였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들께서는 비밀한 말만 있고 비밀한 장은 없으니,
마치 환술쟁이가 기관(機關)으로 만든 나무 사람과 같아서,
구부리고 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만 속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은 그렇지 않아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 알게 하시니, 어찌하여 부처님들의 비밀한 장이 있다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을 칭찬해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는 실로 비밀한 장이 없다.
왜냐하면 가을의 보름달이 허공에 떴을 때에 깨끗하게 드러나 그늘이 없음을 사람들이 모두 보는 것처럼,
여래의 말도 그와 같아서, 환하게 드러나고 깨끗하여 그늘이 없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여 비밀한 장이라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분명히 알고 비밀장이라 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마치 사람이 한량없는 금은보배를 쌓아 두고도 아끼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에게 보시하여 구제할 줄을 모른다면 그것은 비밀한 장이라 하겠지만,
여래는 그렇지 않아 그지없는 오랜 세월에 한량없는 법의 보배를 쌓아 놓고 아끼는 마음이 없이 모든 중생에게 항상 보시하니,
어떻게 여래의 비밀한 장이라고 말하겠느냐?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몸이 불구가 되어 눈이 없거나 손이나 발이 없으면 부끄러워서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여 사람이 보지 못하므로 비밀하게 감춘다고 한다.
여래는 그렇지 않아 가지고 있는 법을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데,
어찌하여 여래의 비밀한 장이라 하겠느냐?
선남자야, 어떤 가난한 사람이 남의 빚을 많이 지고 빚쟁이가 무서워서 숨고 나오지 않기 때문에 비밀히 숨었다고 한다.
여래는 그렇지 않아 모든 중생의 세간법에 빚지지 않았고, 중생의 출세간법에 빚졌다 하더라도 숨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생을 대하여 항상 외아들이란 생각을 가지고 위없는 법을 연설하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마치 장자가 재물이 많은데 외아들을 두고는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잠시도 떠나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보배를 모두 보이니,
여래도 그러하여 중생을 외아들같이 여기는 것이다.
선남자야, 세상 사람들은 남근(男根)과 여근이 흉하고 부끄럽다 하여 옷으로 가리므로 감춘다고 하지만,
여래는 그렇지 않아 영원히 이러한 근(根)이 없으므로 감추지 않는다.
선남자야, 바라문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論理)는 찰리나 비사나 수타에게 듣게 하지 않으니, 그 까닭은 그 논리에는 허물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여래의 바른 법은 그렇지 않으니,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훌륭하므로 비밀한 장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야, 어떤 장자가 외아들을 두고 항상 마음으로 떠올리고 사랑하고 그리워하였다. 장자는 아들을 스승에게 보내 공부하게 하려다가 빨리 성취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도로 데려왔다.
그런데 사랑하는 까닭에 밤낮으로 부지런히 반쪽 글자[半字]만 가르치고 비가라론[毗伽羅論:문법]은 가르치지 못했다.
나이가 어려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선남자야, 그 장자가 반쪽 글자만 가르쳐도 그 아들이 능히 비가라론을 알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장자가 아들에게 비밀히 감추는 것이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나이가 어려서 말하지 않았지, 아끼느라고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만일 아끼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으면 감춘다고 하겠지만, 여래는 그렇지 않으니 어찌 여래의 비밀한 장이라 말하겠습니까?”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야, 너의 말과 같이 미워하고 질투하며 아끼는 마음이 있으면 감춘다 하겠지만, 여래는 그런 마음이 없으니 어찌 감춘다고 하겠느냐?
선남자야, 장자는 여래를 비유한 것이고 외아들은 모든 중생을 비유한 것이니, 여래는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생각한다.
외아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성문 제자를 말하며, 반쪽 글자는 아홉 종류 경전을 말하고, 비가라론이란 것은 방등(方等) 대승경전을 말하는 것이다.
성문들이 지혜가 없으므로 여래가 반쪽 글자인 아홉 종류 경전만을 말하고, 비가라론인 방등 대승경전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저 장자의 아들이 자라서 글을 배울 만하여도 비가라론을 가르치지 않으면 장(藏)이라 할 수 있다.
성문들이 대승비가라론을 배울 만한 힘이 있어도 여래가 아끼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여래가 비밀한 장[祕密藏]이 있다고 말하겠지만,
여래는 그렇지 않으므로 여래는 비밀한 장이 없는 것이다.
그 장자가 반쪽 글자를 가르치고 다음에 비가라론을 말하듯이,
나도 그와 같이 제자들에게 반쪽 글자인 아홉 종류 경전을 말하고 다음에 비가라론을 연설한다.
그것이 여래가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또 선남자야, 마치 여름철에 큰 구름과 우레가 일어나고 큰비가 오면, 농부들 가운데 씨를 심은 이는 열매를 많이 거두고, 씨를 심지 않은 이는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거둘 것이 없는 것은 용왕의 허물이 아니며, 그 용왕도 감추는 것이 없다.
나도 그와 같아서, 『대열반경』인 큰 법의 비를 내리니, 중생들로서 선근의 씨를 심은 이는 지혜의 열매를 거두고, 선근의 씨가 없는 이는 거둘 것이 없을 것이다.
거둘 것이 없음은 여래의 허물이 아니며 부처님 여래는 감추는 것이 없다.”
[무상, 그리고 항상]
가섭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지금 여래 세존께서는 비밀한 장이 없음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비가라론에서와 같이,
부처님 여래께서는 항상 머물며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적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 연각들과
여러 성문 제자들도
무상한 몸 버리는데
하물며 범부들이랴.
그랬는데 지금에는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않는다 하시니, 무슨 이치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나는 모든 성문 제자들에게 반쪽 글자를 가르치느라고 그런 게송을 말하였다.
또 선남자야, 바사닉왕이 어머니가 죽은 뒤에 슬프게 울고 부르짖으며 나에게 왔기에 내가 말하였다.
‘대왕은 어찌하여 이렇듯이 서러워합니까?’
왕은 대답하였다.
‘나라의 태후가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머니의 명을 다시 살릴 자가 있다면, 나는 나라와 코끼리와 7보와 목숨까지 버려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다.
‘대왕은 그렇게 서러워하고 통곡하지 마시오.
모든 중생의 목숨이 다한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오.
부처님이나 연각이나 성문 제자들도 이 몸을 버리는데 하물며 범부이겠소?’
선남자야, 나는 바사닉왕에게 반쪽 글자를 가르치느라고 이 게송을 말하였다.
지금은 성문 제자들에게 비가라론을 말하는 것이므로 여래는 항상 머물러서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무상하다’고 말하면,
어찌 그 사람의 혀가 빠지지 않겠느냐?”
[대열반의 뜻]
가섭보살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 쌓아 두지 말고
음식에 만족할 줄 알아라.
새들이 허공에 날아도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세존이시여, 이 대중 가운데 누가 쌓아 둠이 없다고 할 만하며,
누가 음식에 만족한다고 할 만하며,
누가 허공에 날아도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할 만하며,
이렇게 가는 이는 어느 곳에 이르겠습니까?”
“가섭아, 쌓아 두는 것은 재물이다.
선남자야, 쌓아 두는 일은 두 가지이니,
하나는 함이 있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함이 없는 것이다.
함이 있게 쌓아 두는 것은 성문의 행이며, 함이 없게 쌓아 두는 것은 여래의 행이다.
선남자야, 승려도 두 가지이니,
함이 있는 승려와 함이 없는 승려이다.
함이 있는 승려는 성문이라 하며, 성문 승려는 쌓아 두는 일이 없으니, 종이나 법답지 않은 물건이나 광이나 미곡이나 소금ㆍ메주ㆍ참깨ㆍ콩ㆍ팥 따위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래가 종이나 하인 따위의 물건들을 쌓아 두도록 허락하셨다’ 하면,
혀가 말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성문 제자들은 쌓아 두는 일이 없다 할 것이다.
또한 음식에도 만족할 줄을 안다 할 것이니, 음식을 탐하는 이는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이며,
음식을 탐하지 않는 이라야 만족할 줄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자취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위없는 보리에 가까운 것이니, 이 사람은 비록 가더라도 이를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함이 있는 스님도 쌓아 두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함이 없는 스님이겠습니까?
함이 없는 스님은 여래이니 여래가 무슨 쌓아 둠이 있으며, 쌓아 두는 것은 감춘다는 것이니, 여래의 말씀하심은 감추거나 아낌이 없는데, 어찌하여 장이라 하십니까?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열반이니, 열반 가운데는 해ㆍ달ㆍ별, 차고 더움, 바람과 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의 25유가 없으며 모든 근심과 번뇌를 떠났습니다.
이러한 열반이야말로 여래의 머무는 곳이며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이니,
이런 인연으로 여래께서 이 사라나무 밑에 이르러 대열반에 드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가섭아, 대(大)라는 것은 성품이 넓고 넓음을 말하니,
사람이 한량없이 오래 사는 것을 대장부라 하고,
이런 사람이 바른 법에 머물면 사람 중에 훌륭한 이라고 한다.
내가 말한 큰 사람이 깨닫는 여덟 가지[八大人覺]는, 한 사람이 가질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가질 수도 있으니, 만일 한 사람이 여덟 가지를 모두 갖춘다면 가장 훌륭한 것이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헌 데[瘡疣]가 없다는 뜻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고 고통을 받을 때에 좋은 의사를 만나 독화살을 빼고 약을 발라서 고통을 여의고 낙을 받는다.
그 의사는 다시 다른 도시나 시골로 다니면서 병환이 있고 부스럼을 앓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병을 치료한다.
여래도 그와 같아서, 등정각을 이루고 훌륭한 의사가 되어 염부제에서 괴로움 받는 중생들이 한량없는 세월동안 음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은 번뇌의 화살을 맞고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이런 이를 위하여 대승 경전의 감로 법약을 말씀하셔서 병을 치료하여 마치고,
다시 다른 곳으로 다니면서 번뇌의 화살이 있는 곳에서 부처가 되어 병을 치료하신다.
그러므로 대반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대반열반은 해탈하는 곳이니, 조복 받을 중생이 있는 곳을 따라서 여래가 그곳에 나타나는 것이며,
이런 진실하고 깊은 뜻으로써 대열반이라 이르는 것이다.”
[치료할 수 있는 것과 치료할 수 없는 것]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 의사들이 모든 중생의 상처 난 곳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선남자야, 이 세상의 상처 난 곳이 두 종류인데,
하나는 치료할 수 있고 하나는 치료할 수 없다.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의사가 치료할 것이며, 치료할 수 없는 것은 의사가 고치지 못한다.”
“부처님의 말씀에 여래께서 염부제에서 중생의 병을 치료하셨다고 하시니,
만일 치료하셨다면 모든 중생들 가운데 어찌하여 열반을 얻지 못한 이가 있습니까?
만일 다 열반을 얻지 못하였으면 여래께서 어찌하여 치료하여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십니까?”
“선남자야, 염부제의 중생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신심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신심이 없다.
신심이 있는 이는 치료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반드시 열반을 얻어 상처 난 곳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염부제의 중생들을 치료하여 마쳤다는 것이다.
신심이 없는 중생은 일천제라 하여, 일천제는 치료할 수 없다. 일천제를 제하고는 모두 치료하였으므로 열반에는 상처 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색인가 색이 아닌가]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열반이라 합니까?”
“선남자야, 열반은 해탈이라 한다.”
가섭이 다시 여쭈었다.
“해탈이라고 말하는 것은 색(色)입니까, 색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혹은 색이기도 하고 혹은 색이 아니기도 하다.
색이 아니라고 함은 성문과 연각의 해탈이며, 색이라 함은 부처님의 해탈이다.
선남자야, 그러므로 해탈은 색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한데,
여래는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색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이 만일 색이 아니라면 어떻게 머뭅니까?”
“선남자야,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이 색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한데, 나는 색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이가 묻기를,
‘비상비비상천이 색이 아니라면 어떻게 머물며 가고 오고 행동하느냐?’라고 하면,
이런 이치는 부처님들의 경계이며,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알 바가 아니다.
해탈도 그러하여 색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하므로 색이 아니라 말하고,
생각이기도 하고 생각이 아니기도 하므로 생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부처님들의 경계이며,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알 바가 아니다.”
[참 해탈은 여래이다]
그때에 가섭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저희를 가엾이 여기셔서 대반열반의 행과 해탈의 뜻을 거듭 자세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가섭보살을 찬탄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야, 참 해탈은 모든 속박을 여의었으니, 참으로 해탈하여 모든 속박을 여의었으면 남[生]도 없고 화합함도 없다.
비유하면 부모가 화합하여 자식을 낳는데, 참 해탈은 그렇지 않으므로 남이 없다 고 한다.
가섭아, 마치 제호의 성품이 청정함같이 여래도 그러하여 부모의 화합으로 난 것이 아니며, 성품이 청정하다.
그러나 일부러 부모가 있는 것을 보인 것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함이다.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여래와 해탈은 둘이 아니며 다름도 없다.
비유컨대 봄철에 심은 씨는 따뜻하고 축축한 기운을 얻어야 나오게 되는데, 참 해탈은 그렇지 않다.
또 해탈은 텅 비어 없음[虛無]이라고 한다.
텅 비어 없음은 곧 해탈이며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가 곧 텅 비어 없음이다. 그러므로 짓는 것도 지어진 것도 아니다.
짓는 것은 성곽이나 누각에서 적이 달아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지만, 참 해탈은 그렇지 않으므로 해탈이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함이 없는 법이다.
비유컨대 옹기장이는 만들었다 도로 부수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다.
참 해탈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므로 해탈이 곧 여래이며,
여래도 그러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깨어지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아, 함이 있는 법이 아니다.
이런 뜻으로 여래라 한다.
대열반에 들어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
늙는 것은 변천하는 것이라고 하여, 머리카락이 세고 낯이 쭈그러지는 것이다.
죽는 것은 몸이 식고 목숨이 끊어짐이니,
해탈한 가운데는 이런 일이 없으며, 이런 일이 없으므로 해탈이라 한다.
여래도 머리카락이 세고 낯이 쭈그러지는 함이 있는 법이 아니므로 늙지 않으며, 늙지 않으므로 죽지도 않는다.
또 해탈은 병이 없다고 한다.
병이라 함은 404병과 밖으로부터 와서 내 몸을 침해하는 것인데, 이런 일이 없으므로 해탈이라 한다.
병이 없는 것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여래는 병이 없으므로 법신도 병이 없으니, 이렇게 병이 없는 것이 곧 여래이다.
죽는 것은 몸이 식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니, 여기에는 죽음이 없다.
그러므로 곧 감로이며, 감로는 참 해탈이다.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니 여래는 이런 공덕을 성취하였는데, 어찌하여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하겠느냐?
무상하다는 말은 옳지 못한 것이니, 금강 같은 몸이 어찌하여 무상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래는 목숨을 마친다고 이르지 않는 것이다.
여래는 청정하여 때가 없으며 여래의 몸은 태(胎)에 더럽혀진 것이 아니어서 백련화의 성품이 청정한 것과도 같다.
여래의 해탈도 그와 같아서, 해탈이 곧 여래이며, 그러므로 여래는 청정하여 때가 없다.
또 해탈은 번뇌의 상처가 영원히 남아 있지 않으니,
여래도 그와 같아서, 온갖 번뇌의 상처가 없다.
또 해탈은 다툼이 없으니, 굶주린 사람은 남의 음식을 보고는 빼앗을 생각을 내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다.
또 해탈은 안정(安靜)이라고 한다.
범부들은 안정이라 하면 마혜수라를 말하지만 그런 말은 허망한 것이다.
참된 안정은 끝까지 해탈함이니, 끝까지 해탈한 것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안온(安穩)이라 한다.
마치 도둑이 많은 데는 안온하지 않다 하고 맑고 온화한[淸夷] 데를 안온하다고 하는 것같이, 해탈 가운데는 공포가 없으므로 안온이라 한다.
그래서 안온한 것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법이다.
또 해탈은 반려가 없는 것이다.
반려가 있다는 것은 마치 나라 임금에게 이웃 나라가 있다는 것과 같다.
참 해탈은 그렇지 않아, 반려가 없음이 마치 전륜왕에게는 대등한 이가 없는 것과 같다.
해탈도 그와 같아서, 반려가 없으며, 반려가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한 이는 곧 여래인 전법륜왕(轉法輪王)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반려가 없으며 반려가 있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것이다.
또 해탈은 근심 걱정이 없는 것이다.
근심이 있는 것은 어떤 임금이 강한 이웃 나라가 무서워서 근심하는 것과 같지만, 해탈은 그런 일이 없다.
마치 원수를 없애 버리면 두려움이 없는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두려움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는 이는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근심과 기쁨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여인이 외아들을 부역으로 멀리 보냈을 때에 중도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걱정하다가, 다시 살았단 말을 들으면 한없이 기뻐하는 것처럼,
해탈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다.
근심과 기쁨이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티끌이 없으니,
마치 봄철 해가 진 뒤에 흔히 바람이 티끌을 일으키는데, 해탈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다.
티끌이 없는 것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마치 임금의 상투에 꽂는 진주 동곳에는 때가 없는 것과 같이,
해탈의 본성에도 그와 같이 때가 없다.
때가 없다는 것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순금에는 돌이 섞이지 않았으므로 참 보배라 하며, 순금을 얻은 사람은 훌륭한 재물이라 생각한다.
해탈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참 보배라 하며, 참 보배는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비유컨대 흙으로 만든 병은 깨지면 젱그렁 소리가 나는데, 금강으로 만든 보배 병은 그렇지 않아 깨지지 않는다.
금강 병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니,
그러므로 여래의 몸은 깨뜨릴 수 없다.
젱그렁 소리가 나는 것은 피마자를 뜨거운 데 넣으면 튀면서 폭발하는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데, 해탈은 이런 일이 없다.
마치 금강으로 만든 보배 병은 젱그렁 하고 깨지는 소리가 없는 것과 같으며, 설사 백천 명 사람들이 한꺼번에 쏘더라도 깨뜨리지 못한다.
젱그렁 소리가 없음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가난한 사람이 남의 빚을 지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얽매이거나 매를 맞거나 하여 무수한 괴로움을 받는다.
해탈한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고 빚을 지지 않으니,
마치 장자는 억만의 보배가 있고 세력이 자재하여 남의 빚을 지지 않는 것처럼,
해탈도 그와 같아서, 한량없는 법의 보배가 있고 세력이 자재하여 빚진 것이 없다.
빚진 것이 없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그리고, 해탈이란 핍박이 없음을 말한다.
봄에 더위의 겪음과, 여름에 달콤한 여름 음식, 겨울의 차가운 촉감처럼, 참해탈 가운데에는 이렇게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다.
핍박이 없는 것이 진정한 해탈이니, 진정한 해탈자는 여래이다.
또한 핍박이 없는 자는 비유하면 물고기를 먹고도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니 머지않아서 죽음에 이르를 것이다.
진정 해탈한 이는 이러한 일이 없다.
이러한 자는 감로의 좋은약을 얻어 근심을 떠나 여유를 얻는다.
진정한 해탈자도 이와 같으니 감로의 좋은 약이 깨달음을 준다. 진정한 해탈자는 여래이니라.
어떤 것을 핍박이라고도 하고 핍박이 아니라고도 하는가?
비유컨대 범부가 교만한 마음으로 내가 제일인 체하면서 생각하기를,
‘온갖 물건 중에는 나를 해칠 것이 없다’ 하면서,
독사나 호랑이나 독한 벌레를 손으로 잡는다면, 이 사람은 명이 다하기 전에 횡사할 줄을 알아야 한다.
참 해탈에는 이런 일이 없다.
핍박이 아니라고 함은 마치 전륜왕이 가진 신주(神珠)가 말똥구리 따위의 아흔여섯 종류의 독한 벌레들을 항복시키는 것과 같으니, 이 신주의 향기를 맡으면 모든 독기가 소멸된다.
참 해탈도 그와 같아서, 25유를 모두 멀리 떠난다.
독기가 소멸되는 것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핍박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공과 같다.
해탈도 그러하며 허공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핍박이라 함은 마른 풀 곁에서 불을 켜는 것 같아서, 가까이하면 곧 타겠지만 참 해탈에는 그런 일이 없다.
또 핍박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해와 달이 중생을 핍박하지 않는 것같이,
해탈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핍박하지 않는다.
핍박이 없음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움직이지 않는 법이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원수 또는 친구와 같은 것이니 참 해탈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다.
또 움직이지 않음은 마치 전륜왕이 다른 왕을 친구로 삼는 일이 없고, 친한 이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해탈도 그와 같아서, 친한 이가 없으며, 만일 친한 이가 있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전륜왕이 친한 이가 없다는 것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법이다.
또 움직임이 없다 함은 비유컨대 흰 옷은 물들기가 쉽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
또 움직임이 없음은 마치 바사꽃[婆師花]을 냄새가 있게 하거나 푸른빛이 있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해탈도 그러하여 냄새가 있게 하거나 여러 빛이 있게 할 수는 결코 없다.
그러므로 해탈이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희유한 것이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물속에서 연꽃이 나는 것은 희유한 일이 아니지만, 불 속에서 연꽃이 나는 것은 희유한 일이어서 사람들이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
참 해탈도 그와 같아서, 보는 이는 기쁜 마음을 낸다.
희유한 것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법신이다.
또 희유한 것은 비유컨대 아기가 이가 나지 않았다가 점점 자라서야 나는 것과 같다.
해탈은 그렇지 않아 나고 나지 않음이 없다.
또 해탈은 비고 고요함이라 이르며 결정되지 않음이 없다.
결정되지 않은 것은 마치 일천제는 끝까지 변하지 못한다거나 중대한 계를 범한 이는 불도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과 같아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깨끗한 신심을 내면 곧 일천제를 소멸할 것이며,
또 우바새가 되더라도 일천제를 없앨 것이며, 중대한 계를 범한 이도 그 죄를 멸하면 불도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변하지 못한다거나 불도를 이루지 못한다 함은 옳지 않으며,
참 해탈 가운데는 이렇게 사라져 없어지는 일이 없다.
또 비고 고요함은 법계에 떨어지니 법계의 성품과 같은 것이 곧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일천제가 만일 사라져 없어지면 일천제라 할 수 없다.
무엇을 일천제라 하는가?
일천제는 온갖 선근이 아주 끊어져서 마음에 모든 선한 법을 반연하지 않으며, 한 생각도 선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
참 해탈에는 그런 일이 없으므로 곧 참 해탈이니,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한다.
비유컨대 곡식 더미는 그 수량을 알 수 있지만 참 해탈은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
마치 바닷물은 헤아릴 수 없는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고,
헤아릴 수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한량없는 법이라 한다.
마치 한 중생에게 업보가 많은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한량없는 과보가 있으며, 한량없는 과보는 곧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넓고 큼을 말한다.
마치 큰 바다는 견줄 데가 없듯이,
해탈도 그와 같아서, 견줄 데가 없다. 같은 것이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가장 높은 것이다.
마치 허공이 가장 높아서 견줄 수 없는 것같이 높아서 견줄 수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지나갈[過] 수 없음을 말한다.
마치 사자가 있는 데는 모든 짐승이 지나갈 수 없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지나갈 수 없다.
지나갈 수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위가 없음[無上]을 이른다.
마치 북쪽이 여러 방위에서 가장 위가 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위가 없으며,
위가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위가 없는 위[無上上]를 말한다.
마치 북쪽이 동쪽에 대하여 위가 없는 위가 되듯이,
해탈도 그와 같아서, 위가 없는 위가 되며 위가 없는 위는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항상한 법이라 말한다.
비유하자면 인간이나 천상에서 몸이 부서지고 목숨을 마쳐도 항상하다고 하며,
항상하지 못한 것이 아닌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항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항상하지 못한 것이 아님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견실(堅實)이라 이른다.
거타라(佉陀羅) 나무와 전단나무와 항수(沆水)의 성질이 견실한 것같이
해탈도 그와 같아서, 성품이 견실하다.
성품이 견실함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비지 않음을 말한다.
비유컨대 대와 갈대는 속이 비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으니,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더럽힐 수 없음을 말한다.
비유컨대 담벼락에 색칠을 하기 전에는 파리ㆍ모기 따위가 붙어 유희하여 더럽혀지지만,
색칠을 하고 단청을 한 뒤에는 벌레가 단청 냄새를 맡고 붙어 있지 않은 것처럼,
이렇게 붙어 있지 않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끝[邊]이 없음을 이른다.
비유컨대 촌락은 끝이 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다.
마치 허공은 끝이 없는 것과 같이,
해탈도 그와 같이 끝이 없으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볼 수 없음을 이른다.
마치 공중에 새 발자국을 보기 어려운 것처럼,
그렇듯 보기 어려움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한 참 해탈은 매우 깊음을 이른다.
왜냐하면 성문과 연각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들어갈 수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매우 깊은 것은 부처님과 보살들께서 공경하는 것이며,
마치 효자가 부모에게 공양하면 공덕이 매우 깊은 것과 같으니,
공덕이 깊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보지 못함을 이른다.
마치 사람이 자기의 정수리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성문이나 연각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집이 없는 것이라 한다.
마치 허공에는 집이 없는 것과 같이 해탈도 그러하다.
집이라 함은 25유(有)에 비유한 것이고, 집이 없다 함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니,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아마륵 열매는 사람이 가질 수 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아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없음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환으로 된 물건은 잡을 수 없는 것 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잡을 수 없다.
잡을 수 없음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몸이라 할 것이 없다.
마치 사람은 몸에 옴이 오르고 대풍창과 등창이 나고 미치고 조갈병이 들고 마르는 병이 있지만,
참 해탈 중에는 그런 병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런 병이 없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한맛이라고 한다.
마치 젖이 한맛인 것처럼,
해탈도 그와 같아서, 오직 한맛이니, 한맛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청정이라고 한다.
마치 물에 진흙이 없으면 고요하고 청정한 것처럼,
해탈도 그러하여 고요하고 청정하다.
고요하고 청정함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한결같은 맛이다.
마치 공중에서 내리는 비가 한결같이 깨끗한 것처럼,
한결같이 깨끗함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없애버림[除卻]이다.
마치 보름달은 구름이 가리지 않는 것처럼,
해탈도 그러하여 가린 구름이 없다.
가린 구름이 없음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고요함[寂靜]이다.
마치 사람에게 앓던 열병이 나으면 몸이 고요하여지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몸이 고요하다.
몸이 고요함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평등이니,
마치 벌판에 있는 독사나 쥐나 이리는 모두 죽이려는 마음이 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아 죽이려는 마음이 없다.
죽이려는 마음이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평등이라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가지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마음이 평등하다.
마음이 평등함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다른 곳[異處]이 없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고 깨끗한 집에만 살고 다시 다른 데가 없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다른 곳이 없다.
다른 곳이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만족한 줄 앎이다.
굶주린 사람이 맛난 음식을 만나면 싫은 줄 모르고 먹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아 우유죽을 먹은 이에게는 다른 음식이 필요하지 않다.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끊음[斷絶]이다.
결박을 당한 사람이 결박한 것을 끊고 벗어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의심의 결박을 끊는다.
의심을 끊음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 간 것이다.
큰 강에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이 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아 이 언덕은 없으나 저 언덕은 있다.
저 언덕이 있는 것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잠잠한 것[黙然]이다.
큰 바다는 물이 출렁거리며 요란한 소리가 나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아름답고 묘하다.
모든 약에 하리륵(呵梨勒)을 섞은 것은 맛이 쓰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아 맛이 감로 같다.
맛이 감로 같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번뇌를 없앰이다.
마치 좋은 의사는 신기한 약으로 모든 병을 잘 치료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를 없애는 것이다.
번뇌를 없앤 것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비좁지 않음[無迮]이다.
작은 집에는 많은 사람을 용납할 수 없으나,
해탈은 그렇지 않으며 얼마든지 용납하는 것이다.
얼마든지 용납함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여러 가지 애욕을 멸하여 음욕이 없다.
여인들은 애욕이 많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과 교만 따위의 번뇌가 없다.
또 해탈은 사랑이 없음[無愛]이다.
사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아귀 같은 사랑이며, 하나는 법에 대한 사랑이다.
참 해탈은 아귀 같은 사랑을 여의고 중생을 불쌍히 여기므로 법에 대한 사랑이 있다.
법에 대한 사랑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나와 내 것을 여의었다.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법이다.
또 해탈은 다 멸한 것이니,
모든 탐욕을 떠나는 것이므로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법이다.
또 해탈은 구호(救護)이다.
모든 두려워하는 이를 구호하는 것이므로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법이다.
또 해탈은 귀의할 곳이다.
만일 귀의할 데가 있으면 이와 같은 해탈은 다른 귀의할 데를 구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임금에게 의지하면 다른 의지할 데를 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임금에게 의지한 것은 흔들림이 있지만 해탈에 의지하면 흔들림이 없다.
흔들림이 없는 것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법이다.
또 해탈은 집[屋宅]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거친 벌판을 다니면 험난한 일이 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아 험난이 없다.
험난이 없는 것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두려움이 없다[無所畏]. 사자가 모든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마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협소하지 않은 것[迮狹]이다.
비유하면 협착한 길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갈 수 없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좁지 않다는 것은,
비유컨대 사람이 범이 무서워서 우물에 떨어질 수 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좁지 않다는 것은,
마치 큰 바다에서 낡은 배를 버리고 견고한 배를 얻어 타면 바다를 건너 편안한 곳에 이르러 마음이 쾌락함 같으니,
해탈도 그와 같아서, 마음이 쾌락하다.
쾌락함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모든 인연을 뽑아 버림이다.
비유컨대 젖에서 타락을 얻고 타락에서 소(酥)를 얻고 소에서 제호를 얻는 것과 같다.
참 해탈에는 이런 인연이 없고 인연이 없음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교만을 항복받음이다.
비유하면 큰 임금은 작은 임금을 업신여기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법이다.
또 해탈은 방일을 굴복함이다.
방일하면 탐욕이 많지만 참 해탈에는 그런 말이 없다.
그런 말이 없음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무명을 없앰이다.
가장 좋은 생소에서 찌꺼기를 없앤 것을 제호라 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무명의 찌꺼기를 없애면 참 밝음[眞明]이 나타난다.
참 밝은 것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고요하며 순일(純一)하고 둘이 없음[無二]이다.
마치 빈 들판에 코끼리가 하나뿐이고 짝이 없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하나뿐이고 짝이 없다.
하나뿐이고 짝이 없음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견실(堅實)이라고 한다.
마치 대나 갈대나 피마자가 줄기는 속이 비었지만 씨는 견실함과 같다.
부처님을 제하고는 모든 인간ㆍ천상 사람들이 다 견실하지 못하다.
참 해탈은 온갖 번뇌와 생사를 멀리 떠났으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잘 깨달아 나를 더욱 이익 되게 함이다.
참 해탈도 그와 같으며 이와 같은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모든 것을 버림이다.
마치 사람이 먹고는 토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것[諸有]을 버린다.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결정을 말한다.
마치 바사꽃의 향기가 칠엽수(七葉樹)에는 없는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이름을 수대(水大)라고 한다.
수대는 다른 대(大)보다 훨씬 뛰어나서 온갖 초목의 씨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생류(生類)들을 윤택하게 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들어감[入]이라 한다.
문이 있으면 들어갈 수가 있고 금의 성질이 있는 데서는 금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다.
해탈도 그러하여 그 문으로는 나가 없음[無我]을 닦은 이가 들어갈 수 있으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선(善)한 것이다.
마치 제자가 스승을 따라다니며 가르치는 말을 잘 받들면 선이라 하듯이,
해탈도 그와 같으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세상을 벗어난 법[出世法]이다.
모든 법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니, 여러 가지 맛 가운데 소(酥)의 맛이 가장 훌륭한 것과 같다.
해탈도 그러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흔들리지 않음[不動]을 이른 것이다.
마치 문턱을 바람이 흔들지 못하듯이,
참 해탈도 그러하며 이러한 해탈이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파도가 없음이라 한다.
저 바다에는 파도가 요란하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으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마치 궁전과 같다.
해탈도 그러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쓸 데가 많은 것[所用]이다.
염부단금은 쓰이는 데가 많으며, 그 금에 나쁜 허물 이 있다고 말할 사람이 없는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허물이 없다.
허물이 없는 것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어린애의 버릇을 버림이다.
마치 어른이 어린애의 버릇을 버리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5음(陰)을 없애 버렸다.
5음을 버린 것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이름하여 구경(究竟)이라 한다.
마치 결박되었던 사람이 결박에서 풀려나면 목욕하고 깨끗이 하고 집에 돌아가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필경까지 깨끗한 것이다.
끝까지 깨끗함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함이 없는 즐거움이다.
함이 없는 즐거움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토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잘못하여 독약을 먹고 독을 없애기 위하여 토할 약을 먹으며, 토하고 나면 독이 없어지고 몸이 편안해짐과 같다.
해탈도 그러하여 번뇌에 속박된 독을 토하고 몸이 안락하여짐을 함이 없는 즐거움이라 한다.
함이 없는 즐거움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네 가지 독사의 번뇌를 끊음이다.
번뇌를 끊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모든 생사를 여의고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온갖 즐거움을 얻으며,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영원히 끊고 모든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다.
번뇌의 뿌리를 뽑은 것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모든 함이 있는 법을 끊고, 온갖 무루(無漏)의 선근을 내며 여러 갈래를 막음이라 한다.
이른바 나[我]다, 내가 없다[無我], 내가 아니고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는 데서, 다만 집착만 끊고 나란 소견을 끊지 않는 것이다.
나란 소견은 불성이며 불성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공하지 않은 공[不空空]이다.
공한 공[空空]은 있는 것이 없음이며, 있는 것이 없음은 니건자 외도들이 헤아리는 해탈이다.
니건자는 해탈이 없으므로 공한 공이라 한다.
참 해탈은 그렇지 않으므로 공하지 않은 공이라 하며,
공하지 않은 공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공하고 공하지 않은[空不空] 것이다.
마치 물병ㆍ술병ㆍ우유병ㆍ타락병ㆍ꿀병 따위에 물이나 술이나 우유나 타락이나 꿀이 없더라도, 물병 내지 꿀병이라 하는 것과 같이,
이 병들은 공하였다고도 할 수 없고 공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다.
만일 공하다면 빛과 냄새와 맛과 촉(觸)이 없어야 할 것이고,
공하지 않다면 물이나 나아가 꿀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해탈도 그와 같아서, 빛이라고도 빛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공하다고도 공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공하다고 말한다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常樂我淨]이 없을 것이며,
공하지 않다면 누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받겠느냐?
이런 이치로 말미암아 공하다고도 공하지 않다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공하다 함은 25유와 모든 번뇌와 온갖 괴로움과 온갖 모양새와 온갖 함이 있는 행법(行法)이 없다는 것이니,
마치 병에 타락이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함과 같다.
공하지 않다 함은 진실한 참 빛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여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니,
마치 병의 빛깔과 냄새와 맛과 촉감이 있으므로 공하지 않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을 병에 비유하건대,
병은 인연을 만나면 깨질 수 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아서 깨뜨릴 수 없다.
깨뜨릴 수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
또 해탈은 사랑[愛]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석천왕이나 대범천왕이나 자재천왕을 희망하지만,
해탈은 그렇지 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사랑도 없고 의심도 없다.
사랑도 없고 의심도 없음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니,
만일 해탈에 사랑과 의심이 있다면 옳지 않다.
또 해탈은 모든 탐욕을 끊고,
온갖 모양새, 온갖 속박, 온갖 번뇌, 온갖 생사, 온갖 인연, 온갖 과보를 끊음이다.
이런 해탈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열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