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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발지론 제2권
1.8. 사(思)납식
사(思)와 심(尋)과 도(掉) 등의 차별
우지(愚知)와 만(慢)과 해(害)
큰[多] 것과 행(行)과 〈보호되는〉 근(根)과 〈범부의〉 성품과 사(邪)
원한다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하겠다.
[문] 무엇을 사(思)라고 하는가?
[답] 모든 사(思)ㆍ등사(等思)ㆍ증사(增思)ㆍ사성(思性)ㆍ사류(思類)ㆍ심행(心行)ㆍ의업(意業), 이것을 사라고 한다.
[문] 무엇을 여(慮)라고 하는가?
[답] 모든 여(慮)ㆍ등려(等慮)ㆍ증려(增慮)ㆍ칭량(稱量)ㆍ주탁(籌度)ㆍ관찰, 이것을 여라고 한다.
[문] 사와 여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사는 업이고, 여는 혜(慧)이다. 이것이 둘의 차별이다.
[문] 무엇을 심(尋)이라고 하는가?
[답] 모든 마음의 심구(尋求)ㆍ변료(辨了)ㆍ현시(顯示)ㆍ추탁(推度)ㆍ구획(搆畫)ㆍ분별성(分別性)ㆍ분별류(分別類), 이것을 심이라고 한다.
[문] 무엇을 사(何)라고 하는가?
[답] 모든 마음의 사찰(伺察)ㆍ수행(隨行)ㆍ수전(隨轉)ㆍ수류(隨流)ㆍ수속(隨屬), 이것을 사라고 한다.
[문] 심과 사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마음의 거친 성질[麤性]을 심이라 하고,
마음의 세밀한 성질[細性]을 사라고 한다.
이것이 둘의 차별이다.
[문] 무엇을 도거(掉擧)라고 하는가?
[답] 모든 마음에 고요함이 없고 지식(止息)됨이 없으며, 조급하고 망령스럽게 움직이는 마음의 조동성(操動性), 이것을 도거라고 한다.
[문] 무엇을 심란(心亂)이라고 하는가?
[답] 모든 마음이 산란되어 떠돌아다니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비일경성(非一境性), 이것을 심란이라고 한다.
[문] 도거와 심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고요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 도거이며,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않음을 특정으로 하는 것이 심란이다.
이것이 둘의 차별이다.
[문] 무엇을 무명(無明)이라고 하는가?
[답] 삼계의 무지(無智)이다.
[문] 무엇을 부정지(不正知)라고 하는가?
[답] 비리(非理)가 인기한 혜(慧)이다.
[문] 그대는 부정지를 비리가 인기한 혜라고 주장하는 것인가?(분별론자의 난문)
[답] 그렇다.
[문] 그대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정지(正知)를 가졌으면서 망어하는 것, 그것은 모두 실념부정지(失念不正知)이기 때문에 망어하는 것인가?
[답] 그렇다.
[문] 또한 그대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망어하는 일은 없는가?
[답] 그렇지 않다. 정지로서 망어하는 경우가 있다. 내 말을 들어 보라.
만약 부정지는 바로 비리가 인기한 혜라고 하면서, 모든 정지를 가졌으면서 망어하는 것, 그것은 모두 실념부정지이기 때문에 망어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즉 정지로서 망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정지로서 망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부정지는 바로 비리가 인기한 혜로서 모든 정지를 가졌으면서 망어하는 것, 그것은 모두 실념부정지이기 때문에 망어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주장한다면 양자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문] 힐문하여 말할 것이니라. 모든 무명은 모두 부정지와 상응하는 것인가?(응리론자인 논주의 재난)
[답] 그렇다.
[문] 그대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정지를 가졌으면서도 망어하는 것, 그것은 모두 무명으로 나아가고 무명에 얽매인 실념부정지이기 때문에 망어하는 것인가?
[답] 그렇다.
[문] 또한 그대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망어하는 일은 없는가?
[답] 그렇지 않다. 내 말을 들어보라. 만약 모든 무명은 모두 부정지와 상응한다고 하면서, 모든 정지를 가졌으면서 망어하는 것은 모두 무명으로 나아가고 무명에 얽매인 실념부정지이기 때문에 망어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즉 정지로서 망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정지로서 망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즉 모든 무명은 모두 부정지와 상응한다고 하면서, 모든 정지를 가졌으면서 망어하는 것은 모두 무명으로 나아가고 무명에 얽매인 실념부정지이기 때문에 망어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주장한다면 양자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문] 무엇을 교(憍)라고 하는가?
[답] 모든 방자함ㆍ침혹함[醉]ㆍ지극한 침혹ㆍ번민[悶]ㆍ지극한 번민ㆍ마음의 거만ㆍ방종함[傲逸]ㆍ마음의 자취(自取), 이것을 교라고 한다.
[문] 무엇을 만(慢)이라고 하는가?
[답] 모든 만ㆍ과거의 만[已慢]ㆍ미래의 만[當慢]ㆍ마음의 거시(擧恃)ㆍ마음의 자취(自取), 이것을 만이라고 한다.
[문] 교와 만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다른 것에 견주어 자신의 법에 염착하는 마음의 거만, 방종함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교라면, 다른 것에 견주어 스스로 거시하는 것을 특정으로 하는 것이 만이다. 이것이 둘의 차별이다.
[문] 만약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고(苦)를 바로 고라고 본다.’ 혹은 ‘집(集)을 바로 집으로 본다.’고 하면, 이는 무엇을 소연으로 삼은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선사(善士)를 가까이 해 정법을 청문하여 참답게 작의하는 것[如理作意]과 같다.
즉 이러한 인연에 따라 제순인(諦順忍:煖頂忍의 忍位를 말함)을 획득하여 고현관변(苦現觀邊)에 이른 자는 고에 대해 바로 고라고 인가하고 즐거이 현료(顯了)하며,
집현관변에 이른 자는 집에 대해 바로 집이라고 인가하고 즐거이 현료한다.
그는 이러한 인(忍)과 작의를 지님에 따라,
혹은 출정과 입정 중간의 부작의에 따르기 때문에 견(見)과 의(疑)가 나타나지 않는다.
설사 나타난다 할지라도 느끼지[覺] 않으며, 바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고를 바로 고라고 보며, 집을 바로 집이라고 본다.’
이에 따라 만ㆍ과거의 만ㆍ미래의 만을 일으켜 마음이 거시하고 마음이 자취해지는 것을 증상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고를 소연으로 삼고, 혹은 집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문] 만약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멸(滅)을 바로 멸이라고 본다.’ 혹은 ‘도(道)를 바로 도라고 본다.’고 하면, 이는 무엇을 소연으로 삼은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선사를 가까이 해 정법을 청문하여 참답게 작의하는 것과 같다.
즉 이러한 인연에 따라 제순인을 획득하여 멸현관변(滅現觀邊)에 이른 자는 멸에 대해 바로 멸이라고 인가하고 즐거이 현료하며, 도현관변에 이른 자는 도에 대해 바로 도라고 인가하고 즐거이 현료한다.
그는 이러한 인과 작의를 지님에 따라,
혹은 중간의 부작의에 따르기 때문에 견(見)과 의(疑)를 행하지 않는다.
설사 행해진다 할지라도 느끼지 않으며, 바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멸을 바로 멸이라고 보며, 도를 바로 도라고 본다.’
이에 따라 만ㆍ과거의 만ㆍ미래의 만을 일으켜 마음이 거시하고 마음이 자취해지는 것을 증상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그의 심ㆍ섭소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문] 만약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이미 생이 다하였다.’고 하면,
이는 무엇을 소연으로 삼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이것은,
‘바로 도(道)이다. 이것은 바로 행(行)이다. 나는 이러한 도와 이러한 행에 의해 이미 고를 널리 알고, 이미 집을 영원히 끊었으며, 이미 멸을 작증하고, 이미 도를 닦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다.’고 생각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따라 만ㆍ과거의 만ㆍ미래의 만을 일으켜 마음이 거시하고 마음이 자취해지는 것을 증상만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생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문] 만약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범행을 이미 수립하였다.’고 하면,
이는 무엇을 소연으로 삼는 것인가?
[답] 이를테면 어떤 한 존재가,
‘이것은 바로 도이고, 이것은 바로 행이다. 나는 이러한 도와 이러한 행에 의해 이미 고를 널리 알고, 이미 집을 영원히 끊었으며, 이미 멸을 작증하고, 이미 도를 닦았으니, 나는 범행을 이미 수립하였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따라 만ㆍ과거의 만ㆍ미래의 만을 일으켜 마음이 거시하고 마음이 자취해지는 것을 증상만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그의 섬ㆍ심소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문] 만약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지은 바를 이미 변별하였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무엇을 소연으로 삼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도이고, 이것은 바로 행이다.
나는 이러한 도와 이러한 행에 의해 이미 고를 널리 알고, 이미 집을 영원히 끊었으며, 이미 멸을 작증하고, 이미 도를 닦았으니,
나는 이미 수면을 끊고, 이미 번뇌를 해쳤으며, 이미 결(結)을 드러내고, 누(漏)를 다하여 행한 것을 이미 변별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에 따라 만ㆍ과거의 만ㆍ미래의 만을 일으켜 마음이 거시하고 마음이 자취해지는 것을 증상만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그의 심ㆍ심소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문] 만약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더 이상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무엇을 소연으로 삼는 것인가?
[답] 이를테면 어떤 한 존재가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도이고, 이것은 바로 행이다.
나는 이러한 도와 이러한 행에 의해 이미 고를 널리 알고, 이미 집을 영원히 끊었으며, 이미 멸을 작증하고, 이미 도들 닦았으니,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수립되었으며, 행한 것을 이미 변별하여 더 이상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따라 만ㆍ과거의 만ㆍ미래의 만을 일으켜 마음이 거시하고 마음이 자취해지는 것을 증상만이라고 하니,
이는 바로 유(有)들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문] 무엇을 스스로 비속하다 하여 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있어 다른 이가 자신의 종족ㆍ종성ㆍ가족ㆍ흑ㆍ백 등의 인종[類]ㆍ재산ㆍ지위ㆍ기예, 그리고 발이나 집 등에 비해 뛰어난 것을 보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보다 조금 뛰어나다. 나는 그보다 조금 열등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이보다 백천 배나 더 열등해지면, 이에 따라 만ㆍ과거의 만ㆍ미래의 만을 일으켜 마음이 거시하고 마음이 자취해지니,
이것을 스스로 비속하다 하여 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문] 계경에서 설명하기를,
“만약 욕심(欲尋)ㆍ에섬(恚尋)ㆍ해심(害尋)을 일으킨다면, 혹은 스스로를 해치고, 혹은 남을 해치며, 혹은 양자 모두를 해친다.”고 하였다.
욕심으로 스스로를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있어 탐전(食纏)을 일으키기 때문에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고단하며, 몽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마르고 마음이 마르는 것,
또한 이러한 인연에 따라 기나긴 밤 비애(非愛)ㆍ비락(非樂)ㆍ비희(非喜)ㆍ비열(非悅)의 이숙과를 받는 것과 같은 것, 이와 같은 것이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문] 욕심으로 남을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탐전을 일으키기 때문에 남의 아내를 바라보니, 그의 남편이 이를 보고 마음에 분을 품고 한을 맺으며, 근심하여 어지럽혀지는 것과 같은 것, 이와 같은 것이 남을 해치는 것이다.
[문] 욕심으로 나와 남 모두를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탐전을 일으키기 때문에 남의 아내를 욕되게 겁탈하니, 그의 남편이 이를 알고 마침내 그의 아내를, 그리고 그 사람을 몽둥이로 치고 묶어 죽여서 재보를 빼앗는 것과 같은 것, 이와 같은 것이 나와 남 모두를 해치는 것이다.
[문] 에심으로 스스로를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진전(瞋纏)을 일으키기 때문에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고단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마르고 마음이 마르는 것, 또한 이러한 인연에 따라 기나긴 밤 비애ㆍ비락ㆍ비희ㆍ비열의 이숙과를 받는 것과 같은 것, 이와 같은 것이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문] 에심으로 남을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진전을 일으키기 때문에 남의 목숨을 끊고 해치는 것과 같은 것, 이와 같은 것이 남을 해치는 것이다.
[문] 에심으로 나와 남 모두를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진전을 일으키기 때문에 남의 목숨을 끊고 해치며, 또한 남에게 그 자신의 목숨을 단절당하고 해침을 당하는 것과 같은 것, 이와 같은 것이 나와 남 모두를 해치는 것이다.
[문] 해심으로 스스로를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해전(害纏)을 일으키기 때문에 봄이 고단하고 마음이 고단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마르고 마음이 마르는 것, 또한 이러한 인연에 따라 기나긴 밤 비애ㆍ비락ㆍ비희ㆍ비열의 이숙과를 받는 것, 이와 같은 것이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문] 해심으로 남을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해전을 일으키기 때문에 남을 때리고 묶는 것, 이와 같은 것이 납을 해치는 것이다.
[문] 해심으로 나와 남 모두를 해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한 존재가 해전을 일으키기 때문에 남을 때리고 묶으며, 또한 남에게 맞고 묶이는 것, 이와 같은 것이 나와 남 모두를 해치는 것이다.
[문] 지식[智]의 외연이 큰 것인가, 대상[境]의 외연이 큰 것인가?
[답] 대상이 크며, 지식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지식 역시 대상이기 때문이다.
[문] 지식의 외연이 큰 것인가, 의식[識]의 외연이 큰 것인가?
[답] 의식이 크며, 지식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모든 지식은 모든 의식과 상응해도 모든 의식은 모든 지식과 상응하지 않는다.
즉 인(忍)과 상응하는 의식은 지식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유루행의 외연이 큰 것인가, 무루행이 큰 것인가?
[답] 유루행이 크며, 무루행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유루행은 10처(處)와 2처의 일부를 포섭하지만 무루행은 오로지 2처 일부만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을 행원만(行圓滿)이라고 하는가?
[답] 무학의 신율의(身律儀)ㆍ어율의(語律儀)ㆍ명청정(命淸淨)이다.
[문] 무엇을 호원만(護圓滿)이라고 하는가?
[답] 무학의 근율의(根律儀)이다.
[문] 무엇을 이생성(異生性)이라고 하는가?
[답] 만약 성법(聖法)ㆍ성난(聖暖)ㆍ성견(聖見)ㆍ성인(聖忍)ㆍ성욕(聖欲)ㆍ성혜(聖慧)를 모두 획득하지 못하며, 과거에 획득하지 못하였고, 미래에 획득하지 못하는 것, 이것을 이생성이라고 한다.
[문] 이러한 이생성은 선하다고 해야 하는가, 불선 혹은 무기라고 해야 하는가?
[답] 무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 어째서 이생성을 선하다고 해서는 안 되는가?
[답] 선법은 어떤 경우에는 가행(加行)으로 말미암아 획득되고, 혹은 여타의 다른 인연으로 말미암아 획득되지만 가행으로써 이생을 구하여 행위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선근을 끊을 때는 선법을 모두 버리며, 선법의 불성취성을 획득하는데,
만약 이생성이 바로 선성이라고 한다면 선근을 끊은 자는 이생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문] 어째서 이생성을 불선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가?
[답] 욕염을 떠날[離欲染] 때 불선을 모두 버리며 불선법의 불성취성을 획득하는데,
만약 이생성을 바로 불선이라고 한다면, 모든 이생이 욕염을 떠날 경우 이생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문] 이러한 이생은 욕계계(欲界繫)라고 해야 하는가, 색계계 혹은 무색계의 계라고 해야 하는가?
[답] 혹은 욕계계이고, 혹은 색계계 혹은 무색계의 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 어째서 이생성은 오로지 욕계계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답] 욕계에서 죽어 색계에 태어날 때는 욕계의 법을 모두 버리고 욕계법의 불성취성을 획득하는데,
만약 이생성을 오로지 욕계계라고 한다면, 모든 이생이 욕계에서 죽어 무색계에 태어날 경우 더 이상 이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어째서 이생성은 오로지 색계계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답] 색계에서 죽어 무색계에 태어날 때는 색계의 법을 모두 버리고 색계법의 불성취성을 획득하는데,
만약 이생성을 오로지 색계계라고 한다면, 모든 이생이 색계에서 죽어 무색계에 태어날 경우 더 이상 이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어째서 이생성은 무색계의 계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답] 정성이생에 들 때 먼저 욕계의 고(苦)를 현관한 후에 색ㆍ무색계의 고를 함께 현관한다.
성도를 일으킬 때는 먼저 욕계의 본질[事]을 변별한 후에 색ㆍ무색계의 본질을 함께 변별한다.
그래서 이생성은 오로지 무색계의 계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문] 이러한 이생성은 견소단이라고 해야 하는가, 수소단이라고 해야 하는가?
[답] 수소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 어째서 이생성을 견소단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답] 견소단의 법은 모두 염오하지만 이생성은 불염오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제 일법이 바로 멸하고 고법지인이 바로 생겨나면, 그때 삼계의 이생성을 버리고 그것의 불성취성을 획득하지만, 그러나 그때는 아직 견소단법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문] 이생성이란 어떠한 법인가?
[답] 삼계의 불염오한 심불상응행이다.
[문] 모든 법으로서 사견(邪見)과 상응하는 것, 그 법은 사사유(邪思惟)와 상응하는가?
[답] 네구(句)로 분별할 수 있다.
법으로서 사견과 상응해도 사사유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견과 상응하는 사사유와, 그리고 여타의 사사유와 상응하지 않는 사견상응의 법이다.
법으로서 사사유와 상응해도 사견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사유와 상응하는 사견과, 그리고 여타의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사유상응의 법이다.
법으로서 사견과 상응하고 사사유와도 역시 상응하는 것이 있다.
사견과 상응하는 사사유를 제외한, 그리고 사사유와 상응하는 사견을 제외한 여타의 다른 모든 사견ㆍ사사유상응의 법이다.
법으로서 사견과 상응하지도 않고 사사유와도 역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사유와 사사유와 상응하지 않는 사견, 그리고 여타의 다른 모든 심ㆍ심소법과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다.
[문] 모든 법으로서 사견과 상응하는 것, 그 법은 사정진(邪精進)과 상응하는 것인가?
[답] 네 구로 분별할 수 있다.
법으로서 사견과 상응해도 사정진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견과 상응하는 사정진이다.
법으로서 사정진과 상응해도 사견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견과, 그리고 여타의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정진상응의 법이다.
법으로서 사견과 상응하고 사정진과도 역시 상응하는 것이 있다.
사견과 상응하는 사정진을 제외한, 여타의 다른 사건상응의 법이다.
법무로서 사견과 상응하지도 않고 사정진과도 역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정진과, 그리고 여타의 다른 모든 심ㆍ심소법과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다.
사견이 사정진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견이 사념(邪念)ㆍ사정(邪定)에 대한 것도 역시 그러하다.
나아가 사견이 사정진ㆍ사념ㆍ사정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사유가 사정진ㆍ사념ㆍ사정에 대한 것도 역시 그러하다.
[문] 모든 법으로서 사정진과 상응하는 것, 그 법은 사념과 상응하는 것인가?
[답] 네 구로 분별할 수 있다.
법으로서 사정진과 상응해도 사념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바로 사념이다.
법으로서 사념과 상응해도 사정진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사정진이다.
법으로서 사정진과 상응하고 사념과도 역시 상응하는 것이 있다.
사정진과 사념에 상응하는 법이다.
법으로서 사정진과 상응하지도 않고 사념과도 역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여타의 모든 심ㆍ심소법과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다.
사정진이 사념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정진이 사정에 대한 것도 역시 그러 하다.
나아가 사정진이 사념ㆍ사정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념이 사정에 대한 것도 역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