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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바새계경 제2권
10. 자리이타품(自利利他品)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보리(菩提)이고, 어떠한 것이 보리도(菩提道)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약 보리를 여의면 보리도라는 것이 없고, 보리도를 여의면 보리가 없나니,
보리의 도가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보리의 도인데,
모든 성문ㆍ연각이 얻는 도과(道果)보다 훨씬 뛰어난 것으로 이를 보리요, 보리의 도라고 하느니라.”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성문ㆍ연각이 얻는 깨달음의 결과가 곧 보리요 곧 보리도 이온데, 어찌하여 훨씬 뛰어난 것이라고 하십니까?”
“선남자여, 성문ㆍ연각의 도는 넓고 크지 않아서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니,
그러므로 보리와 보리의 도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니라.
마치 저 세간의 모든 경서에서 십이부경이 최고인 것과 같나니, 왜 그런가?
설하는 것에 오류가 없고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2승(乘)의 도도 보리도에 견주면 역시 이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보리의 도라는 것은,
곧 학이며 학과이니,
학이란 어떠한 것인가?
보리도를 행하되 아직 불퇴전심을 갖추지 못한 것을 학이라고 하고,
불퇴전을 얻은 것은 학과라 하며,
아직 정유(定有)를 얻지 못하였으면 학이요,
제3겁(劫) 중에 이미 정유를 얻었으면 학과이니라.
첫 아승기겁에는 일체혜시(一切惠施)와 일체시시(一切時施)와 일체중생시(一切衆生施)를 못하고, 제2 아승기겁에 능히 비록 일체시를 하지만,
아직 일체시시와 일체 중생시를 하면, 이와 같은 두 경우를 학과라고 한다.
제3 아승기겁에 능히 일체시와 일체시시와 일체 중생시를 하면 학과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닦을 때는 학이라고 하고,
피안(彼岸)에 이르면 학과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혜시(惠施)이면서 바라밀이 아닌 것이 있고,
바라밀이면서 보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혜시이기도 하고 바라밀이기도 한 것이 있고,
혜시도 아니고 바라밀도 아닌 것이 있느니라.
선남자야, 혜시이면서 바라밀이 아니라는 것은 성문ㆍ연각과 모든 범부 외도의 이견(異見)이며 보살이 처음 두 아승기겁에 행하는 보시오,
바라밀이면서 혜시가 아니라는 것은 시바라밀(尸波羅密)에서 반야바라밀까지이니라.
혜시이기도 하고 바라밀이기도 한 것은 보살이 제3 아승기겁에 행하는 보시가 이것이고,
보시도 아니고 바라밀도 아닌 것은 성문이나 연각의 지계(持戒)와 수정(修定)과 인욕과 자비가 이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시도 아니요 바라밀도 아닌 것은 학이고,
보시이기도 하고 바라밀이기도 한 것은 학과이니라.
선남자여, 대체로 보리라는 것은 곧 진지(盡智)며 무생지(無生智)이니,
이 두 지혜를 위하여 부지런한 마음으로 37품을 닦으면 이것이 학이요,
보리를 얻고 나면 이것이 학과이며,
스스로 모든 근(根)을 조복하고, 다음에 중생을 조복하는 것이 학이요,
스스로 해탈을 얻고 중생으로 하여금 얻게 하는 것이 학과이니라.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대비(大悲)ㆍ3념(念)을 닦는 것이 학이요,
18불공법(不共法)을 갖추어 얻는 것이 학과이며,
자기와 남을 위하여 모든 업을 짓는 것이 학이요,
남과 나를 능히 이롭게 하면 이것이 학과이니라.
세속의 법을 학습하는 것이 학이요,
출세간법을 배우는 것이 학과이며,
모든 중생을 위하여 몸과 재물을 아끼지 않는 것이 학이요,
또한 모든 중생을 위하여 몸과 재물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 학과이니라.
능히 중생을 교화하여 인천업(人天業)을 짓는 것이 학이요.
무루업(無漏業)을 짓는 것이 학과이며,
능히 중생에게 온갖 재물을 보시하는 것이 학이요,
능히 법으로 보시하는 것이 학과이니라.
능히 스스로 인색함과 탐욕과 질투를 파괴하는 것이 학이요,
남의 인색함과 탐욕과 질투하는 마음을 부수는 것이 학과이며,
5근(根)을 받아서 수행하고 억념(憶念)을 하는 것이 학이요,
남에게 가르치고 닦아서 갖추어 성취하게 하는 것이 학과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의 신근(信根)이란 이미 자기를 이롭게 하고, 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스스로의 이익이란 것은 참된 것이 아니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리(自利)이니, 왜 그런가?
보살마하살은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과 재물을 아끼고 인색하게 하지 않는 것이 자리이니라.
보살은 틀림없이 안다. 만약 성문ㆍ연각의 보리로 중생을 교화하여서 중생이 받지 않으면 천상ㆍ인간의 세속 낙으로 가르치나니,
이것이 이타(利他)인데,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자리이니라.
보살이 능히 나와 남의 이익을 함께 하지 못하고 오직 자리만을 구한다면 이것은 하품(下品)이니, 왜 그런가?
이러한 보살은 법재(法財) 가운데에 탐착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스스로도 이익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라.
수행하는 자가 만약 남은 괴로움을 받게 하고 스스로는 안락에 머무른다면,
이러한 보살은 능히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하느니라.
만약 스스로 보시와 지계와 다문(多聞)을 닦지 않으면 비록 남을 가르치더라도,
이것은 이타라고는 하여도 자리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믿음 등 5근(根)을 갖춘 연후에 다시 가르치면,
이것은 보살의 자리이타이니라.
선남자여, 이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현세(現世)의 이익이요. 두 번째는 후세(後世)의 이익인데,
보살이 만약 현재의 이익만을 짓는다면 참다운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만약 후세의 이익을 짓는다면 능히 두 가지를 함께 하는 이익이 되느니라.
선남자여, 낙(樂)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세속의 낙이요, 두 번째는 출세간의 낙이니라.
복덕도 역시 그러한데, 보살이 만약 능히 이러한 두 가지의 낙과 두 가지의 복을 스스로 갖추고 중생을 교화한다면 이것이 곧 자리(自利)ㆍ이타(利他)이니라.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한 법을 갖추면 능히 이익을 함께 갖추나니,
방일(放逸)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라.
또 두 가지 법이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나니,
첫 번째는 다문(多聞)이요,
두 번째는 사유(思惟)이니라.
또 세 가지 법이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나니,
첫 번째는 중생을 가엾게 여기는 것이요,
두 번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염심(念心)을 갖추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나니,
4위의(威儀)를 말하는 것이니라.
또 다섯 가지 법이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나니,
첫 번째는 신근(信根)이요,
두 번째는 지계(持戒)요,
세 번째는 다문(多聞)이요,
네 번째는 보시(布施)요,
다섯 번째는 지혜니라.
또 여섯 가지 법이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나니, 6념을 말하는 것이니라.
또 일곱 가지 법이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나니, 7만(慢)을 없애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약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장자(長者)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혹 대중 가운데에 여러 가지 과실이 있으면 보살이 먼저 그 의도를 따라 보고 나서 법을 설하여 조복되게 하느니라.
만약 먼저 그 의도에 따라 법을 설할 수 없다면 이는 곧 하품(下品) 보살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착한 벗과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는 이요,
두 번째는 좋아하지 않은 것이니라.
착한 벗을 좋아하는 자는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나와 남에게 모두 이익되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착한 벗을 가까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공양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공양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공양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는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공양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자는 모두를 이롭게 하지 못하느니라.
공양을 좋아하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능히 법을 듣는 것이요,
두 번째는 듣지 않는 것이라.
지성으로 듣는 자는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듣지 않는 자는 모두를 이롭게 하지 못하느니라.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능히 묻는 것이요,
두 번째는 묻지 않는 것이라,
능히 묻는 자는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묻지 않는 자는 자리와 이타를 얻지 못하느니라.
능히 뜻을 묻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지극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요,
두 번째는 가지지 않는 것이라.
지극한 마음을 가지는 자는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지극한 마음을 갖지 않은 자는 자리와 이타를 얻지 못하느니라.
지극한 마음을 가지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사유(思惟)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능히 사유하는 자는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사유하지 않는 자는 자리와 이타를 얻지 못하느니라.
능히 사유하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뜻을 이해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능히 뜻을 아는 자는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뜻을 알지 못하는 자는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하느니라.
뜻을 이해하는 사람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여법하게 머무는 것이요,
두 번째는 여법하게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여법하게 머무는 자는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여법하게 머물지 못하는 자는 자리와 이타를 얻지 못하느니라.
여법하게 머무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8지(智)를 갖추는 것이요,
두 번째는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8지란, 어떤 것인가?
첫 번째는 법지(法智)요, 두 번째는 의지(義智)요,
세 번째는 시지(時智)요, 네 번째는 지족지(知足智)요,
다섯 번째는 자타지(自他智)요, 여섯 번째는 중지(衆智)요,
일곱 번째는 근지(根智)요, 여덟 번째는 상하지(上下智)이니라.
이 사람이 이와 같이 8지를 갖추면, 무릇 16가지를 갖춘다고 하니,
첫 번째는 시설(時說)이요, 두 번째는 지심설(至心說)이요,
세 번째는 차제설(次第說)이요, 네 번째는 화합설(和合說)이요,
다섯 번째는 수의설(隨意說)이요, 여섯 번째는 희락설(喜樂說)이요,
일곱 번째는 수의설(隨意說)이요, 여덟 번째는 불경중설(不輕衆說)이요,
아홉 번째는 불가중설(不呵衆說)이요, 열 번째는 여법설(如法說)이요,
열한 번째는 자타리설(自他利說)이요, 열두 번째는 불산란설(不散亂說)이요,
열세 번째는 합의설(合意說)이요, 열네 번째는 진정설(眞正說)이요,
열다섯 번째는 말을 한 다음에 교만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며,
열여섯 번째는 말을 한 다음에 세상의 과보(果報)를 구하지 않는 것이니라.
이러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듣나니 남의 말을 들을 때에는 열여섯 가지를 갖추나니,
첫 번째는 때에 알맞게 듣는 것이요,
두 번째는 즐겁게 듣는 것이요,
세 번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네 번째는 공경하며 듣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허물을 구하지 않고 듣는 것이요,
여섯 번째는 논의를 하지 않고 듣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이기려고 하지 않고 듣는 것이요,
여덟 번째는 들을 때 말을 가볍게 보지 않는 것이요,
아홉 번째는 들을 때 법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요,
열 번째는 들을 때 항상 자신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요,
열한 번째는 들을 때 5개(蓋)를 멀리 여의는 것이요,
열두 번째는 들을 때 수지하고 읽는 것이요,
열세 번째는 들을 때 5욕(欲)을 없애는 것이요,
열네 번째는 들을 때 신심을 갖추는 것이요,
열다섯 번째는 들을 때 중생을 조복하는 것이요,
열여섯 번째는 들을 때 문근(聞根)을 끊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팔지를 갖추면 잘 말하고 잘 듣나니,
이러한 사람은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지만,
이를 갖추지 못한 자는 자리와 이타를 얻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야, 능히 설법하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청정한 것이요,
두 번째는 청정하지 못한 것이다.
청정하지 못한 것에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이익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과보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남을 이기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요,
네 번째는 세상의 보답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요,
다섯 번째는 의심하는 말이니라.
청정하게 설하는 것에 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먼저 음식을 베푼 연후에 설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삼보를 증장(增長)하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나와 남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요,
네 번째는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가리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요,
다섯 번째는 듣는 자가 가장 뛰어난 것을 얻게 하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청정하지 않게 설하는 것은 더럽다고 하고, 법을 어겼다고 하며, 모욕하는 것이라고 하며, 잘못하는 것이라고 하며 뜻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청정하게 설하는 것은 정결(淨潔)하다고 하고, 또 바르게 설한다고 하고, 또 참된 말이라고 하고 또 법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만약 12부경과 어의론과 논리학에 정통하고, 이유와 비유와 자신과 남의 성향을 알면 이것을 정설이라고 한다.
듣는 것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조금 듣지만 많이 이해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원래의 의도에 맞게 이해하는 것이요,
네 번째는 하나하나의 자구를 이해하는 것이다.
여래의 설법은 바로 앞 세 사람을 위한 것이요.
네 번째를 위한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네 가지의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면,
첫 번째는 성숙한 사람이요,
두 번째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인데,
성숙한 사람은 현재에 조복하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미래에 조복하느니라.
선남자여, 비유하면 숲에는 무릇 네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벌채는 쉬우나 반출하기가 어렵고,
두 번째는 벌채는 어려우나 반출하기가 쉬우며,
세 번째는 벌채도 쉽고 반출도 쉬우며,
네 번째는 벌채도 어렵고 반출도 어려운 것이 있는 것과 같다.
재가자도 또한 네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조복시키기는 쉬우나 출가시키기는 어렵고,
두 번째는 조복시키기는 어려우나 출가시키기는 쉬우며,
세 번째는 조복시키기도 쉽고 출가시키기도 쉬우며,
네 번째는 조복시키기도 어렵고 출가시키기도 어려운 사람이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사람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 번째는 꾸짖어 조복시키는 것이요,
두 번째는 부드러운 말로 조복시키는 것이며,
세 번째는 꾸짖음과 좋은 말을 써서 조복시키는 것이니라.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스스로 능히 조복하여 남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이며,
두 번째는 스스로 만약 할 수 없으면 남에게 청하여서 조복하게 하는 것이니라.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베풀어서 조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주력(呪力)으로 조복하는 것이니라.
이 조복하는 법에 또 두 때가 있으니,
첫 번째는 기쁠 때요,
두 번째는 괴로울 때이니라.
이 네 가지의 사람을 위하여 바른 법을 설할 때, 두 가지 방편이 있으니,
첫 번째는 세상일을 잘 아는 것이요,
두 번째는 그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이 두 가지 방편을 알면 능히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요, 알지 못하면 자리이타를 얻지 못하리라.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먼저 외도의 전적(典籍)을 익히고, 그런 뒤에 십이부경을 들으면 외도의 전적에 대하여 싫증과 천박한 생각을 내게 되느니라.
또 중생을 위하여 번뇌의 허물과 번뇌의 해탈을 말하고,
착한 이의 덕을 찬탄하고 나쁜 사람의 허물을 질책하며,
보시의 공덕을 기리고 인색한 과실을 나무라느니라.
보살은 항상 고요히 하면서 고요한 공덕을 찬탄하고,
항상 법행(法行)을 닦으면서 법행의 공덕을 찬탄하나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을 일러 모두를 이롭게 한다고 하느니라.
재가 보살은 먼저 스스로 조복할 것이니, 만약 조복하지 못하면, 출가하지 못하느니라.
재가 보살은 능히 많은 사람을 제도하나 출가 보살은 이와 같지 않으니, 왜 그런가?
만약 재가자가 없으면, 3승(乘)에 출가한 사람이 없으리니, 삼승에 출가하여 수도ㆍ지계ㆍ송경ㆍ좌선하는 것이 모두 재가자로 말미암아 장엄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도(道)가 있고 도장엄(道莊嚴)이 있으니, 도라는 것은 법행(法行)을 말하는 것이요, 도장엄이라는 것은 재가를 말하는 것이니라.
출가한 보살은 재가자를 위하여 도를 수행하고, 재가자는 출가한 자를 위하여 법행을 짓느니라.
재가자는 두 가지 법을 많이 닦나니,
첫 번째는 받는 것이요,
두 번째는 주는 것이다.
출가한 이도 또한 두 가지 법을 닦나니,
첫 번째는 (경을) 외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법을 아울러 갖추어야 하는데,
받는 것[受], 주는 것[施], (경을) 외우는 것[誦]과 가르치는 것[教]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자리와 이타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아야만 자리와 이타라고 하느니라.
보살이 만약 중생을 위하여 법계의 깊은 뜻을 설하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세간의 법을 설한 연후에 깊은 법계를 설해야 하나니, 왜 그런가?
교화하기 쉽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일체 중생의 마음을 보호하여야 하나니,
만약 보호하지 않는다면 능히 일체 중생을 조복시키지 못하느니라.
보살은 또 마땅히 자신을 보호하여야 하나니,
만약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역시 중생을 조복시킬 수 없느니라.
보살은 몸과 목숨과 재물을 탐해서가 아니라, 몸과 목숨과 재물을 지키는 것이 모두 중생들을 조복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먼저 스스로의 악을 없앤 연후에 남에게도 없애도록 가르쳐야 하나니,
만약 제가 없애지 않고 남에게 없애라고 가르친다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먼저 마땅히 스스로 보시하고 지계하고, 만족함을 알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한 연후에 사람을 교화하나니,
보살이 만약 스스로 보시하고 지계하고, 만족함을 알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한 연후에 사람을 교화하나니,
보살이 만약 스스로 법행을 하지 않는다면 능히 중생을 교화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중생들의 근기에 대체로 세 가지가 있는데 보살들의 근기도 역시 세 가지이니,
하와 중과 상을 말하는 것이니라,
하근 보살은 능히 하근을 교화하나 중근과 상근에는 미치지 못하고,
중근 보살은 능히 중근과 하근은 교화하나 상근에는 미치지 못하며,
상근 보살은 능히 세 가지를 다 교화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재가보살이요,
두 번째는 출가보살인데,
출가 보살은 자리와 이타를 하는데 어렵지 않으나,
재가 보살은 이 두 가지 이로움을 닦는 것이 어려우니, 왜 그런가?
재가 보살은 악연에 얽힌 것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