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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범천소문경 제3권
10. 지대승품(志大乘品)
이에 보행보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위대한 성인이시여,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대승에 뜻을 낸 것이라고 합니까?
그리고 마땅히 무엇으로 관찰해야 합니까?”
세존께서 게송으로 보행에게 답하여 말씀하셨다.
부처님 도에 뜻을 두고 구한다면
일찍이 색을 그리워하지 말고
색과 같이 도에서 그러하라.
이것이 도에 뜻을 두고 구하는 것이다.
색과 도에는 차이가 없으니
수행자가 또한 그렇게 하면
기원하는 바에 부서지는 것이 없어
이것이 곧 도이며 제일의 지혜이다.
부서짐 없는 의미가 도의 의미이나
도라는 것에는 이익 되는 의미란 없으니
그것이 제일의(第一義)를 닦는 것이며
도에 뜻을 두고 구하는 것이다.
5음(陰)에서 부처님의 도를 구하고
온갖 계(界)와 여러 입처(入處)에서도 구하나니
이것이 도와 차별이 없다는 것을
환히 아는 것이 바른 깨달음이라.
법을 수용하지 않게 하는 것처럼
위와 아래와 중간도 없고
버리고 손상시키는 바도 없다면
이것이 도에 뜻을 두고 구하는 것이다.
법과 법 아닌 것
이 두 가지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두 가지 인연을 얻지 않으니
이것이 도에 뜻을 두고 구하는 것이다.
유위란 곧 두 상대적인 일이며
무위는 곧 두 상대적인 것이 없다.
분별하는 일을 버리고 없애니
이것이 도를 닦고 행하는 것이다.
범부의 경지를 초월하고
고요한 것에 머물러 선 채
현자와 성인의 과보를 얻지 않고
세간의 온갖 존경에도 집착함이 없다.
세간의 법을 관찰하여
세속에 처하되 연꽃과 같으며
존귀하고 미묘한 행을 준수하고 수행하면
이것이 도에 뜻을 두고 구하는 것이다.
세간에서 머물고 노닐며
그곳에서 행하는 바가 있어도
세속 사람의 속박과 집착을
명철히 밝히면 바로 이것이 해탈이다.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보살의 뜻과 성품은 강하며
겁이 없이 견고하니
부처님 도를 수행하는 것이다.
만일 환히 아는 자라면
법의 성품을 분별하나니
법이든 법이 아니든
일체에 상념하는 바가 없다.
제법을 떠나서 밝히지 않으니
이것이 오로지 부처님 도를 닦는 것이라
일찍이 타락한 적이 없으며
그 도에서 상념을 두지 않는다.
제법은 모습을 지니지 않아
비유하면 허공과 같나니
모습이 없으며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라
밝은 자는 그것에 괘념하지 않는다.
행에 있어 용맹한 방편을 써서
바라밀[度無極]을 훌륭하게 권하니
이것은 곧 다른 중생으로 하여금
뜻한 바의 즐거움을 구족하게 한 것이다.
항상 바른 법을 모두 간직하고
평등한 것에서 머물고 건립하니
이것이 곧 바른 법이라
전적[典]에 있어서도 온갖 상념이 없다.
여러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신다 해도
그것에 흔들리는 바가 없고
항상 바른 법에 머무니
그것이 능히 경전을 받드는 것이다.
일체 법은 현재에
법과 같든지 법 아닌 것과 같으며
설한 바도 역시 그와 같으니
곧 근본 없는 것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미묘한 도를 준수하고 수행하여도
악마의 일을 요지하지 못하고
제법에서 역시 그러하다면
도의 가르침을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 도에 뜻을 두고 원하여도
그것으로 교만함을 일으켜 행한다면
그것은 지혜 있는 가르침이 아니니
그리하여 설한 바에는 얻는 것이 없다.
여러 부처님의 지혜는 한량없고
법에 있어 집착하지 않아서
그것에는 기댈 바가 없으니
이 도가 바로 도피안(度彼岸)이다.
도에 뜻을 두고 보시하니
베풀고 주는 데서 마음이 즐거우며
일체의 존재를 항복시키니
부처님 도마저 집착하지 않는다.
법에서는 얻거나 이길 수도 없고
받들거나 수용할 수도 없으니
제법이 또한 그러하고
마음에서도 형상을 얻지 못한다.
궁극적인 해탈에 이르러
일체법을 환히 알며
그는 애민하는 구절을 수행하니
이것이 곧 여러 견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동등하게 나의 자아를 헤아리니
두 가지 일이란 없어서
교만함에 처하지 않고
온갖 존재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행에서 보시하고
부처님 도를 권하고 도우니
보시와 도덕에 대해서
둘이라고 헤아리는 데 처하지 않는다.
행하는 바가 없는 금기와 계율로
항상 바른 도에 서 있지만
또한 나는 금기와 계율에 서 있노라고
상념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무위에는 생하는 바가 없으니
성자는 금기와 계율을 통달해 알아
그런 까닭에 계율은 청정하니
결박을 풀어서 벗어남이 허공과 같다.
몸은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고
말은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와 같으며
마음은 환상과 같다고 요지하고
계율을 지킨다는 생각을 교만하게 갖지 않는다.
이것이 곧 스승의 가르침을 준수하는 것이니
그는 고요함을 즐기게 되며
일체의 악을 멸진하고 제거하여
담백한 것이 바로 바라밀[度無極]이다.
이른바 금기와 계율이라는 것에는
두 가지 일이 없으며
빠짐없이 법의 성품을 분별하니
이 계율은 곧 무루이다.
인욕의 바라밀은
일체의 근심을 감당해 내며
중생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니
온갖 생각에 대해 평등하게 확립된다.
허공에 기대지 않으니
제법에서 머무는 바가 없고
그에게는 비방하는 말이 없으니
그것이 또한 무소유이다.
만일 몸을 마디마디 나눈다 해도
마음이 분노와 원한을 품지 않으며
그 마음은 머무는 바가 없으니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다.
스스로 4대(大)로부터 세워진 것임을 보아
능히 원수에 대해 참고 견뎌서
끝내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니
인욕이란 땅과 같은 것이다.
현재에 돌아와 여기에 이른다면
이를 이름하여 인욕이라 하며
이 일체 중생에 대하여
능히 화내지 못하게 한다.
대승을 즐기도록 권하고 도와주며
세력이 강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없고
그 마음과 뜻으로 행하는 바에
일찍이 집착하는 바가 없다.
태초로부터 시작되었던
생사를 알 수 없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큰 정진의 갑옷을 서원하여 입는다.
저 법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부서지는 일이 있겠는가?
전도된 것에 있는 세력으로
본래의 끝을 알지 못한다.
여러 종류의 천안(天眼)을 세워도
법의 성품에는 사유하고 논의할 것이 없으니
그와 같은 것을 환히 아는 자라면
일으키지도 않고 다할 바도 없다.
중생은 여러 법 또는 법 아닌 것에서
그것을 요지하지 못하니
항상 이런 의미에서 정진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것이며 방일하는 것이다.
여러 부처님은 궁극적인 무소유에
들어가는 것을 얻지 않으며
행하는 바가 없이 항상 갑옷을 입고서
정진이 차이 나고 특별함을 관찰한다.
일체 법을 선택하되
환상과 같고 아지랑이 같아서
그가 획득하는 것에는 견고하고 요긴한 것이란 없으니
마치 허공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허위(虛僞)를 사유하고 생각하는 것은
이익 없는 것에 기대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평등을 설하여
멸도(滅度)에 도달하고 얻게 한다.
이러한 정진의 의미에 입각하여
준수하고 수행하면 부서지는 것이 없어
행한 바를 행하면서 또한 행을 떠나니
정진의 가장 높은 경지이다.
도의 행은 고요하니
공의 의미를 준수하고 수행한 것이라.
허위를 믿지 말고
그 뜻으로 생사를 두려워 말라.
용맹스럽게 한가한 거처를 즐기고
무상함은 빈 것과 같음을 밝히며
지혜로운 자가 즐기는 것은
선정과 신통의 바라밀이다.
한가한 취락에 거주하는 것처럼
머무는 바의 뜻은 평등하여
위의를 갖추되 상념은 없으니
있는 곳마다 뜻이 항상 선정에 든다.
법에 대해 본래 청정하고 동등하니
고요하여 여러 번뇌가 없으며
해탈과 득도를 믿고 즐기며
항상 평등한 선정에 든다.
그는 균등하게 품고 오며
항상 평등한 것에 서 있으며
평등한 것과 다투거나 어지럽히지 않으니
그러므로 평균이라고 일컫는다.
마음으로 미혹한 것을 보지 않으니
도의 마음이 일체에 두루 하여
중생을 열어 교화하여
평등이라고 일컫는다.
항상 여러 부처님을 억념하니
여래는 곧 법신(法身)이라
색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
그러므로 평등이라고 일컫는다.
뜻으로 경전을 억념하고 행하니
법이든 법 아닌 것이든
그 마음이 억념하는 것이 없어서
평등이라고 일컫는다.
마음으로 거룩한 대중을 억념하니
말하자면 대중은 곧 무위라
셀 수 있거나 셀 수 없는 수를 떠나
선정에 대해 밝게 통달한다.
두루 여러 부처님 국토와
시방의 여러 중생을 보지만
눈으로는 색을 두지 않고
둘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또는 모든 부처님께 설하신
경의 법을 듣지만
귀와 음성에 입각하지 않고
두 가지 생각으로 퇴전(退轉)하지 않는다.
일체 중생의 마음을
한마음으로 모두 아는데
사람도 없고 뜻도 없으니
온갖 생각도 없는 것이다.
억만해(億萬垓)를 식별하고 억념하니
마치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이라
또한 앞뒤가 없으니
아는 바가 그와 같다.
억천의 국토에서 노닐고 도달하니
한량없는 신족(神足)을 드러내지만
그때 명철한 자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혼란스럽지 않다.
능히 경전을 분별하고
변재를 갖추고 홀로 걸으며
억천 겁을 강설해도
법의 성품에 잃는 것은 없다.
지혜의 바라밀은
방편으로 5음(陰)을 요지하고
희론 없는 것을 준수하고 수행하며
사람들을 위해 경의 법을 설한다.
인연과 방편을 환히 알고
분별되는 것을 버리고 없애니
번뇌[塵勞]로 말미암아
여러 청정함을 요지한다.
인연으로 해탈을 얻으니
여러 견해란 없는 것임을 믿으며
그와 같이 온갖 일과
제법은 형상이 없음을 환히 안다.
스스로 부처님의 몸을 보고
공을 관찰하되 모두 능히 참으며
생사윤회든 멸도(滅度)든
일체가 무소유임을 본다.
세간의 그물에서 괘념한 바에 대해
지혜로 본래의 청정함을 요지하고
그것으로써 멀고 어두운 무리를 떠나니
이것이 도를 닦고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탈것[乘]을 대승(大乘)이라고 하니
부처님의 지혜는 불가사의한 것인데
중생을 위로하고 비추면서
이 위없는 탈것을 권유한다.
일체의 여러 도를 헤아려 봐도
이 탈것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것이라
그와 같이 저 탈것에서
일체의 학문을 다 요지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탈것을 제한하지 않으니
우리들 대승인 자는
여러 중생에 대해 경청하고 성찰하고 제도한다.
뜻을 대승에 건립하되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결코 탐착과 음욕이 없으며
중생에 대해 집착이 없다.
허공이 끝이 없고 한계가 없으며
무색이고 보이지 않듯이
대승도 역시 그러하여
한계가 없고 번뇌도 없다.
만일 일체의 사람들이
이 탈것에서 배우려고 뜻한다면
배우는 자나 배우게 하는 자나 같으니
이 탈것은 수승하고 특이하다.
이 탈것을 준수하고 행하는 자에 대해
설령 백천 겁 동안을
그 덕을 찬탄한다 해도
대승의 공덕을 다할 수 없다.
곧 버리고 없애도 걸림이 없으니
예지를 갖춘 자가 자재함을 얻어 통달하며
만일 이 존귀한 경을
어떤 사람이 잡아서 독송한다면
끝내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 뒤에 자유를 얻으니
천상과 인간에 있으면서
이 경전을 공경해도 역시 그러하다.
나는 마땅히 그에게 수기하여
빠짐없이 부처님의 도를 얻게 하니
만일 이 경전을 듣는 자는
최후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바른 법을 지닌 자이며
고상하고 바른 것에 서 있는 것이라
문득 법륜을 굴리니
이 경에 머무는 것은 그와 같다.
일체에서 그것을 사유하여
생사에서 물러나면
곧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에 접근하니
이 경을 간직하면 그러하다.
이 경을 잡아 간직한다면
거대한 용맹력을 지닌 것이라
온갖 악마의 병사에게 항복받고
끝없는 지혜로 크게 나아간다.
마치 정광(錠光)부처님과 같아서
수기하여 법인(法忍)을 얻게 하니
이 경을 공경하는 자는
마땅히 내가 수기하리라.
여러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 난다 해도
세상을 구호하고 사자후로 인도하니
만일 이 경을 강설하는 자는
곧 부처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설하셨을 때 음성과 행의 거취를 분별하여 십천(十千)의 천자가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마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2천 보살이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고, 천 명의 비구가 번뇌를 다하여 뜻으로 해탈을 얻었으며,
3만 2천 사람이 티끌을 멀리하고 더러움을 여의어 제법 가운데에서 법안(法眼)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