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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4권
10. 성도품(成道品)
이때에 최승(最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10주(住) 보살이 10지 가운데서 그의 행을 청정하게 하나이까?”
[10주 보살의 행]
이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보살은 신령하고 미묘한 법을 닦아서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니,
성품이 공한 법으로써 문자를 펴 연설하고 금계를 정진 수행하면,
그 덕은 한량없어서 불가사의하고 또한 한이 없어서 온갖 세간 사람이 미칠 수 없는 바요,
천ㆍ용ㆍ귀신과 신령하게 높은 이[神尊者]도 그 정도에 이를 수 없으며,
그 덕을 찬탄할 때는 성현은 잠잠하여 처음부터 말하는 바가 없고,
만일 펴는 바가 있으면 모두 다 장구(章句)를 이루며 신족을 나타내 보여,
시방의 국토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 세존을 직접 뵙고 예배하며 공경하느니라.
또 정의(定意)와 해탈과 정수(正受)에 들어가 항상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국토를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정각(正覺)을 뵈옵고 기이한 법요를 들으며 모두 다 삿된 부류의 업[邪部之業]을 초월하며 뜻도 편안하고 밝느니라.
또한 동요하지 않으며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생각하거나 기억하는 바가 없고 법계가 생기고 소멸하는 것을 환히 분별하여 알며,
그 연설한 바의 법은 모두가 성인의 인[聖印]에 상응하고 모든 정수(正受)에 노닐되 처음부터 틀리거나 어김이 없느니라.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언교는 거룩한 법과 율과는 서로 위배되지 않고 내신 음성은 미묘하여 특수하게 뛰어나며,
모든 세계는 평등하여 허공과 같다고 관하고 뜻과 생각은 해탈의 문에 가득 차 있는데,
보처(補處) 보살은 변재가 통달하여 뜻이 식(識)과 근기[機]에 상응하고 마음과 도혜(道慧)가 함께하면서 같이 상응하느니라.
[마음과 도의 지혜]
무엇을 마음이라 하고 무엇을 도의 지혜라 하는가?
세전(世典)에 두루 흘러 삿된 업을 나타내고 들어가나니, 이것을 바로 마음이라 하느니라.
정신을 한 가지 뜻에 쏟아 세간을 제도하는 법에 두나니, 이것을 바로 도의 지혜라 하느니라.
간탐을 버리고 보시하되 보답받을 생각이 없게 하고 뜻을 조화롭게 하여 수순하고 진실을 살펴 자상하게 하나니, 이것을 바로 마음이라 하느니라.
바르게 고요한 데 들어가서 모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담박하여 스스로 지키되 성전(聖典)을 여의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도의 지혜라 하느니라.
만일 생사(生死)에 있으나 힘써 그 법을 닦고 비록 그 가운데 처하되 역시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도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니라.
만일 다시 보살이 8난 가운데 불한(不閑)의 처소에 있으면서 뒤바뀜[顚倒]을 일으키거나 두 가지 견해[二見]의 마음이 있지 않고 모두 다 처음부터 끝까지 드는 병(病)에서 능히 건너나니, 이것을 바로 도의 지혜라 하느니라.
세속의 법에서 열반과 무위의 법을 찬탄하고 지은바 공덕은 끝내 헛되이 버려지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마음이라 하느니라.
보살이 모든 법의 공(空)에 놀면서 청정하고 아무것도 없음을 통달하여 환히 아나니, 이것이 바로 도의 지혜라 하느니라.
앞 사람을 관찰하되 그 본래의 뜻을 따르고 그를 위하여 알맞는 법을 분별하나니, 이것을 바로 마음이라 하느니라.
보살이 정(定)에 들어가 한 법의 지혜[一法慧]를 관하되 백천의 모든 법과 모양을 같이하나니, 이것을 바로 도의 지혜라 하느니라.
지닌 것을 아끼지 않고 은혜롭게 베풀되 나라나 재물이나 아내나 아들까지도 아까워하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바로 마음이라 하느니라.
평등한 데 처하여 있으되 삼승의 도는 없고 도량을 청정하게 하되 모두 다 부처님의 도에 돌아가느니라. 이것이 바로 도의 지혜이며,
이것이 바로 10주 보살 대사(大士)의 도(道)와 마음이 들어가는 것으로 두루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몸과 입을 수호하여 방일하지 않고,
여덟 가지 대인의 생각[八大人念]을 칭찬하여 완전히 갖추며,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아는 행을 생각하여야 하고,
금계를 받들어 닦아서 결점이 없으며 중생을 위하여 티끌과 때[塵垢]를 청정하게 하고,
만일 중생이 매양 자기 자신을 찬탄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스스로 높은 체 뽐내어 교만하고 호귀(豪貴)하게 굴며,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착하지 않은 법을 품은 이러한 무리를 보면 곧 그를 위하여 인욕의 덕을 말하여 주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때에 따라 스스로 좇아 생긴 것이 없는 법인[無所從生法忍]에 이르게 하여 그 가운데서 힘을 쓰되 곤액(困厄)하고 도에 미치지 못한 이를 가엾이 여기느니라.
용맹스럽게 정진할 것을 뜻하여 마음이 물러나지 않으면 온갖 덕의 근본이 되는 업을 분별하되 모이고 쌓여 함께 짝을 짓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또한 다시 흩어져서 약간의 차별이 있는 것도 보지 않으며,
복된 일이 일어나는 데 머무르는 바가 없고 머무름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모두 다 함께 상응하나 상응하는 바가 없고 상응함이 있는 것을 보지도 않으나 상응함이 없는 것도 보지 않으며 상응하거나 상응하지 않음이 없나니,
이것을 바로 진리를 깨달아 환히 안다고 하느니라.
마음은 언제나 선사(禪思)와 해탈문을 즐기고 네 가지 밥[食]을 사유하여 염착을 제거하며,
다하여 없어짐에 정의(定意)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관찰하고 들은 바는 잊지 않고 잘 기억하여 곧 읊고 외우느니라.
지혜에 산란한 바가 없고 근원은 처소가 없는 줄 분별하고 그 근본을 찾으려 하여도 역시 얻을 수 없느니라.
중생을 위하여 널리 37품(品)을 설하고 공ㆍ무상ㆍ무원의 행을 알며,
언제나 받들어 지니면서 부처님의 도를 숭앙하고 모든 보응에 따라 도과를 얻게 하며,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연설하신 바의 것도 역시 약간도 없고 그로 인하여 일어나는 바,
이것은 바로 진실한 이치[眞諦]요, 더 나아가 멸도도 역시 그와 같으며 다른 생각이나 잡념의 마음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최승아, 10주 보살이 선권방편으로 폐단이나 걸리는 바가 없는 도로써 등각(等覺)을 닦은 다음 중생들을 위하여 그 법륜을 굴리되 견고한 자리[地]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라.
10주 보살은 견고한 서원을 세워 중생을 접(接)하고 제도하되 어려움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인장(印章)을 파는 기술 있는 사람이 사람의 성씨와 이름을 알고 곧 새겨서 종류에 따라 찍고 알게 하되 착오가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성현의 도장으로써 생사에다 도장을 찍어 그 부류에 따라 이루게 하되 끝내 잘못되지 않느니라.
또 진리를 살피되 이런 뜻을 사유하느니라.
도장은 인주의 근본이 아니고 인주는 도장의 근본이 아니다.
그러나 이름과 성씨를 능히 나타내고 보이느니라.
보살의 거룩한 지혜도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 보배의 도장[慧寶印]을 가지고 중생을 인가(印可)하나니,
그 부류에 따라 펴고 나타내어 이름을 이루게 하고 곧 삼승의 도의 가르침이 나오게 하느니라.
마치 좋은 밭에다 곡식의 씨를 심으면 줄기나 마디나 싹이 차츰차츰 자라게 되는데 곡식의 씨는 썩고 싹이 나와 다시는 그 본래의 몸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스스로 깊이 사유하여도 싹은 본래의 씨가 아니지만 또한 본래의 것을 여의지도 않는 것처럼,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인(因)과 연(緣)이 합해지고 모여져야 비로소 법과 율에 상응하느니라.
모든 중생들이 일으킨 3환(患)ㆍ6애(碍)와 12인연과 삿된 의심[邪疑]과 신견(身見)의 뒤바뀐 생각 등 하자를 관찰하되, 곧 그를 위하여 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ㆍ무상(無常)의 법을 연설하느니라.
그런 뒤에야 이러한 법성을 연설하되 고제(苦諦)ㆍ습제(習諦)ㆍ진제(盡諦)ㆍ도제(道諦)를 분별하여 무거운 짐을 여의고 영원히 적멸(寂滅)을 얻느니라.
또 근본과 지말이 그로 인하여 생기는 바를 찾고 궁구하면 이에 이런 환난이 있되,
모두 다 무명(無明)과 슬기[黠慧]가 없는 법으로 말미암아 늙고 병들고 나고 죽고 하는 고뇌에 이르게 되니,
나는 마땅히 방편으로 그 병(病)을 끓고 녹여 점차로 성현의 법과 율에 들어가게 해야 하며,
무명과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이 소멸함으로써 영원히 남음이 없게 하느니라.
공관(空觀)의 고요한 법을 강의하고 연설하여 모두 돌아가는 데가 있게 하고 믿는 데를 얻게 하며,
그 지혜 광명을 넓혀 해탈에 이르게 하고 모두 다 함께 미묘한 지혜를 숭앙하여 익히느니라.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은 차등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그 근원을 찾아도 역시 분별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소멸시킴으로써 끝내 원한을 품거나 더하고 덜하는 마음이 나지 않게 하며,
온갖 종류의 음개(陰蓋)와 박착(縛着)과 결사(結使)를 여의게 되어 다시는 걸림이 없고 마음이 언제나 해탈의 문에서 놀며,
3보의 공덕의 업을 찬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느니라.
언제나 탐욕의 과환을 멀리 여읠 것을 생각하고 중생을 위하여 공훈을 널리 펼 수 있으며,
보살은 정진하면서 그것에 대하여 의심이 없고 공혜(空慧)를 나타내 보여 깨우치고 인도하며,
무릇 배우는 바의 법에서는 모두 집착하는 바가 없고,
다음에는 불퇴전을 성취하며 경전의 도를 널리 펴 부처님 자리를 깨끗이 닦고 중생을 이끌어 와서 부처님 경계에 들어가고 멸도를 얻어 영원히 생기거나 멸함이 없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위없는 중우(衆祐)의 요전(要典)이니라.
이와 같이 보살이 10주에 들어가는 바는 불가사의하나니,
평등하여 둘이 아닌[不二] 법문을 닦고 삼세를 통달하여 3보를 끊지 않으며 3구(垢)를 제거하면 3탈문(脫門)을 이루느니라.
보살은 그에 대하여 부사의를 나타내 보이되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10주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개사(開士)가 닦는 금계와 덕의 향훈(香熏)은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고 찬탄하며,
손가락을 튀기는 동안에도 모두 다 음향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모든 통혜(通慧)를 성취하게 되며,
한량없는 법요를 다 강연할 수 있고 모든 문자에 대하여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과 식의 생각[識想]이 없는 것을 이해하여 그 처소는 찾아도 소굴이 없는 줄 환히 아느니라.
만일 어떤 배우는 사람이 식(識)을 매어 색(色)에 두되 마음이 어기지도 않고 언제나 희망을 품으며,
속박과 집착도 버리지 않으며 생사에서 놀되 갔다왔다하며 돌아다니고,
뜻은 언제나 미혹하고 거칠어 스스로 구제되지 못하나니,
이런 번뇌의 그물이 있으면 생사에 떨어져 5도(道)에 바퀴 돌 듯하며 다시는 잠시도 쉬지 못하느니라.
보살은 바르게 붙잡아 모든 산란한 생각을 억누르고 5음에 내닫게 되지 않으며,
모든 음개(陰蓋)를 끊어 또한 색ㆍ통ㆍ상ㆍ행ㆍ식에 부림을 당하거나 생기고 소멸함이 있게 하지도 않고,
안반(安般)의 들숨ㆍ날숨에 대하여 사유하며,
다시 4대의 물질을 만드는[造色] 지ㆍ수ㆍ화ㆍ풍은 저마다 그 성품이 있음을 분별해야 하느니라.
만일 그 식(識)으로 하여금 다섯 가지 처소[五處]에 있지 않게 하면 곧 능히 법계를 무너뜨리지 않음을 성취하고,
식(識)이 12진로(塵勞)인 눈과 빛깔ㆍ귀와 소리ㆍ코와 냄새ㆍ혀와 맛ㆍ몸과 닿임ㆍ뜻과 법에 내닫지 않나니,
이것은 무루 혜근(無漏慧根)의 식이요, 생사에 오염되는 식이 아니니라.
만일 능히 소멸시키면 밖으로 내닫지도 않고 온갖 법에 대하여 바라는 것도 없거니와,
가령 의지하는 바가 있으면 곧 식의 생각을 요행(僥倖)하는 바가 있나니, 역시 식(識)이라 하느니라.
보살은 배움을 일으키되 받아들이는 바가 없고 마음에 생각을 내지 않아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바도 없으며,
베푼 바의 공로에서도 그 보답을 바라지도 않나니,
유위(有爲)와 유루(有漏)는 바로 식의 종자가 되거니와 무위의 행을 닦아야 비로소 식이 없다[無識] 하느니라.
보살은 지혜 광명의 등불을 켜 드날리고 무위의 횃불을 세워 큰 광명을 비추어 수승하고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을 나타내 보이며,
질박과 정직을 구하고 문식(文飾)을 구하지 않고 도업(道業)에 머무르되 그 몸은 자연히 미치는 이가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능히 드러내고 그 중에서 홀로 거닐되 두려움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느니라.
다시 모든 법에 대하여 영원히 얻는 바가 없고 또한 선택하되 높낮이가 있다고 보지도 않으며,
마음은 알맞게 자재하며 겁을 내지도 않고 그 음성에 따라 그들을 교화하며,
만일 중생을 위하여 깊은 법요를 설하면 온갖 일으킨 바 인연을 버리고 여의며,
중생들의 마음속으로 생각한 바를 모두 다 환히 알고,
뜻하는 성품에 나아갈 바 선악(善惡)의 법은 모두가 모든 부처님 국토에 두루하며,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닦은 평등으로 중생과 부처님 국토의 청정함을 보지도 않으며,
만일 행이 있는 것을 보면 곧 법계를 무너뜨린 것이니,
이 때문에 보살은 마음에 머무르는 바가 없느니라.
만일 중생이 일으키는 분한[起分]에 머무는 것을 보면 곧 법성에 대하여 자신의 식(識)은 누(累)를 스스로 내므로 일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식은 머무르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바로 청정한 무위의 도혜(道慧)라 하느니라.
가령 도의 지혜와 평등한 법이 없으면 모든 부처님 세존은 끝내 가엾이 여겨서 세간에 출현하시지 않느니라.
보살의 큰 서원인 행업(行業)은 근본이 없고 또한 근본에 머무르지도 않고 자연(自然)임을 통달하며,
부지런히 힘씀이 있지 않아도 이룩하는 바가 있고 고달픔이나 게으름이 있는 것도 보지 않으며,
평등한 관(觀)에 대하여 생김도 없고 소멸함도 없으며,
용맹하게 정진하면서 보살의 기별(記莂)을 받고 경전의 본말을 모두 분별하며,
요긴한 지혜를 채취하여 진로(塵勞)를 제거하고 생사와 멸도를 관찰하되 다른 것이라 여기지도 않으며,
항시 스스로 깊은 경전의 뜻을 마음 속에 품고서 멀고 가까운 것을 더듬어 채취하되 고요하여 자취가 없느니라.
비록 중생을 제도한다 하더라도 역시 생각하는 식[想識]이 없고,
선지식을 친근히 하면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나[吾我]와 수명(壽命)을 헤아리지 않고 공ㆍ무상ㆍ무원은 일어나지도 않으며 소멸하지도 않음을 분별하고 사유하며,
만일 욕계에 있을 때는 욕애(欲愛)로 더러워져 청정하지 않다고 사유하고,
색계나 무색계에서 형상을 받는 곳이면 청정하지 않음을 통달하여 알며,
그로 인하여 미혹된 무리를 깨우치고 교화하려 하나니,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이 진실한 이치의 뜻을 연설하느니라.
공하고 없어서 모두 다 처소가 없다고 분별하고 만들어진 형질이 있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짓거나 짓지 않은 것도 없고 의지하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머무르되 머무르는 바가 없고 또한 근본이 없으며,
또한 세 가지 악취(惡趣) 받는 것을 보지도 않고,
천상에 나서 음식이 저절로 받들어지는 것도 보지 않으며,
지름길을 드러내 보여 도의(道義)에 들게 하고 바라는 바가 없으며 어떠한 행하는 바도 없고,
모든 법의 관(觀)에 대하여 스스로 자연에 이르고,
모든 법의 모양[相]은 마칠 수도 없으며 또한 허공과 같아서, 가장자리도 없느니라.
10주 보살은 사람을 가르쳐서 보시하게 하되 생각의 장애를 일으키지 않고,
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一心)ㆍ지혜와 선권방편(善權方便)을 널리 펴며,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로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포섭하여 큰 도[大道]를 세우느니라.
10주 보살은 비록 아직은 여래의 바른 자리[正座]에 오르지 못했으나 이미 지혜 바다의 근원을 환히 궁구하였고 토지를 장엄하고 청정한 국토를 닦았으며,
큰 광명을 놓아 두루 중생에게 이르게 하고 바른 법으로써 가르쳐서 모두 다 도(道)에 돌아가게 하였으며,
지혜의 업을 건립하여 대승을 획득하였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항시 도우면서 언제나 위신(威神)으로써 그의 덕을 돕고 드날리며,
이에 부처님이 되어 일체지를 이루고 위없는 도가 되기까지는 악마들로 하여금 그 짬[便]을 얻게 하지 않느니라.
10주 보살은 스스로가 공덕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음을 깨달아 알고는 부처를 이루려고 수왕(樹王) 아래 앉아 먼저 네 가지 의지[四意止]를 닦아 익히나니,
몸과 뜻에는 저마다 성품이 있음을 분별하며,
곧 스스로 몸이 생기고 소멸하고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하며,
마음은 스스로 경하하며 영원히 고뇌를 여의고 몸의 인연을 관하여 정진과 정(定)을 이루며,
‘이 몸은 보응의 대갚음[對]으로써 인연이 합하면 성립하고 흩어지면 닳아 없어진다’고 사유하므로,
몸에는 주인이 없고 또한 탐할 만한 것도 없음을 알게 되거늘,
무엇 때문에 뜻을 내어 이 색신(色身)에 집착하겠느냐?
5음과 4대가 모든 입(入)의 미혹하는 바가 없나니, 이것은 몸이 공한 것이니라.
4대가 나[吾我]의 법임을 보지 않고, 오랜 겁 동안 행을 쌓아 이제야 비로소 얻은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 견고함이 없는 몸이요 위태하고 무른 물건에 집착하겠느냐?
‘나는 이제 마땅히 여래의 색신과 부처님의 법신을 받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색신이란 공덕의 무더기로 마치 금강(金剛)과 같아 무너뜨릴 수 없고, 시방 세계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그 가운데에 세속의 유루(有漏)의 몸이 가득 찼다 하여도 여래 색신의 한 터럭의 공덕만은 못하느니라.
보살은 스스로,
‘한량없는 공덕으로 이 색신이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이 형상으로 인하여 장차 여래 불법(佛法)의 몸을 받아야 한다.
비록 생사를 겪으면서 5도를 갔다왔다하며 고통을 받음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이제는 여래 색신의 몸을 받아 옛날에 겪었던 고뇌와 우환을 생각하지도 않나니,
지금부터는 영원히 진로(塵勞)와는 이별하고 다시는 5욕(欲) 가운데에 탐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몸을 관한 뒤에는 다른 이의 몸도 모두 처소가 없는 줄 관하며 그 청정한 행을 닦아 하자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자기 몸의 의지(意止)의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라.
[느낌을 사유하고 관하다]
어떻게 보살은 다시 느낌[痛]의 의지의 법을 사유하여야 하는가?
이때에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부처를 이루기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겪었던 고통이 한량없으며,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세워 부처님의 도(道) 구하기를 그리워하며,
고통을 겪는다 해도 마음에 품지도 않았고,
만일 고통 받는 사람이 악한 곳[惡處]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곧 구제하여 주어 고통을 받지 않게 하며,
항상 중생들이 스스로 깨치지 못한 것을 염려하고 끝내 욕심에 따라 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나는 예로부터 겪었던 아픔[痛痒]은 진실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며 모두 다 생긴 바가 없다’라고 하느니라.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痛]을 만나게 되면 이것은 무기(無記)요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고 하느니라.
그리고 사람들이 가까이 익히면서 즐거운 느낌[樂痛]에 집착한다면 곧 스스로 여래의 자리[座]를 멀리 여의는 것이요,
여래와 성현의 계율에 상응하지 않고 지금으로부터는 영원히 쉬면서 다시는 느낌을 내지 않는 것이니,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느낌은 주인이 없다고 관하게 하느니라.
만일 그 중생이 색(色)에 대하여 느낌을 일으키면,
좋거나 추하거나, 좋은 색이거나 나쁜 색이거나,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로 만들어진 색이거나 간에,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통달하여 알며,
혹은 어떤 중생이 먼저는 고통을 받고 나중에 즐겁거나, 혹은 어떤 이는 먼저는 즐거웠다가 나중에 고통이 있거나 간에, 마땅히 깊은 경전을 말하여 그 통양(痛痒)을 보호하게 하고,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으로 일으키는 바와,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의 법은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일어났다가 인과 연으로부터 소멸하는 것이므로,
괴로움이나 즐거움에는 모두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없는 줄 사유하는 것이니라.
다시 안팎의 느낌도 분별해야 하나니,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현재에 생기기도 하고,
혹은 이미 과거나 혹은 장래의 세상에 생기는 것이 있기도 하며,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애결(愛結)에서 생겨나 식을 더욱 더하여 집착하되 버리지 못하며,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치애(癡愛)로부터 생기기도 하므로 정관(正觀)을 사유하여야 비로소 소멸하게 되며,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삿된 의심이나 미혹으로 인하여 차츰차츰 더욱 자라기도 하므로,
네 가지 비상(非常)의 깊고 먼 지혜로써 제거하여 나지 않게 하느니라.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4수(受)로부터 생기기도 하므로 무상정(無想定)으로써 모든 느낌을 제거하고,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5개(蓋)로부터 생기기도 하므로 곧 7각의(覺意)의 법을 사유하여야 영원히 남음이 없게 되며,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6신(身)의 법으로 인하여 생기기도 하므로 공ㆍ무상ㆍ무원을 분별하고,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7식(識)으로부터 생기기도 하므로 마땅히 정진을 세워 그 인연을 짓지 않아야 하느니라.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세간의 8법(法)으로 인하여 생기기도 하므로 언제나 뜻을 낮추어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아야 하고,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9뇌(惱)로부터 생기기도 하므로 스스로 힘쓰면서 영원히 아홉 처소를 여의어야 하며,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10환(患)으로부터 생기기도 하므로 바라고 구하는 일을 없애면서 횡재하기를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7란(瀾)과 4사(使)로부터 생기기도 하므로 곧 지혜의 큰 광명을 사유하여야 하느니라.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9중생거(衆生居)와 3관(觀)으로부터 생기기도 하므로 곧 뜻을 붙잡아 공하고 고요한 정[空寂定]에 들어가야 하고,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의 애(愛)를 인하여 생기기도 하고 미래나 현재가 아닌 과거의 애를 인하여 생기기도 하며,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애를 인하여 생기기도 하고,
혹은 과거가 아닌 미래나 현재의 애를 인하여 생기기도 하며,
혹은 미래가 아닌 과거나 현재의 애를 인하여 생기기도 하고,
혹은 현재가 아닌 미래나 과거의 애를 인하여 생기기도 하나니,
보살은 그에 대하여 7처와 3관의 법을 사유하면서 이 열세 가지 융성한 독(毒)을 소멸시키나니,
이에 보살은 다시 즐거운 느낌[樂痛]이 일어나는 바를 사유해야 하느니라.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8사견(邪見)과 6식신(識身)을 말미암아 같이 서로 받아들여 곧 즐거운 느낌이 생기기도 하므로 드디어 음(陰)ㆍ쇠(衰)와 모든 입(入)의 종류를 늘리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보살이 해탈관(解脫觀)으로써 이 느낌을 분별하여 영원히 남음이 없게 하는 것이니라.
혹은 어떤 즐거운 느낌은 10불선(不善)의 더러운 법과 함께 서로 인연이 되는지라,
지혜의 업[慧業]으로 끊을 다섯 가지 의심의 그물은,
현재에 생기는 것이면 곧 현재에 소멸시키고,
만일 미래에 생길 것도 역시 현재에 소멸시키며,
또 과거에 생겼던 것도 역시 현재에 소멸시키나니,
이것은 곧 보살이 해탈관으로써 곧 15가지 의심의 그물[疑網]을 물리쳐 없애는 것이니라.
[마음을 사유하고 관하다]
어떻게 보살은 다시 의지(意止)의 법을 사유하여야 하는가?
이때에 보살은 뜻을 붙잡아 어지러움을 제어하면 마음이 내닫지 않으며,
조작(造作)한 바가 있을 적에는 반드시 반연하는 바가 있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의 뜻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관하며,
그 뜻은 바르고 평등하여 더하거나 덜하는 생각을 품지도 않고 자신이 있는 지방에서 걸어다니거나 출입할 때는 거동이 안정하고 자상하며 언제나 스스로 오로지 힘써 그 마음을 수호하고,
인연 있는 중생은 연기(緣起)의 소멸이 없거니와 인연 없는 중생은 연기의 소멸이 있으며,
자기의 연기에서는 스스로 인연이 소멸하거니와 다른 연기의 소멸에는 다른 인연으로 말미암아 소멸하느니라.
혹은 연기가 소멸할 때는 또한 안에 있지도 않고 다시 밖에도 있지 않고 또한 다시 양쪽의 중간에 머물러 있지도 않으며,
그 가운데서 출생할 때는 연기의 소멸도 있고 연기의 소멸이 아닌 것도 있느니라.
혹은 탐욕[貪淫]ㆍ성냄[瞋恚]ㆍ어리석음[愚癡]과 7사(使)와 7만(慢)과 7식(識)이 머무르는 곳과 7해(解)와 7관(觀)과 7인혜업(忍慧業)을 인하며,
만일 이런 곳을 인하게 되면 연기의 소멸이 있고 연기의 소멸이 아닌 것도 있나니,
이 모두는 마음을 말미암고 마음을 인하여 생기며,
이 45가지의 눈멀고 어두운 법[盲闇法]은 의식(意識)으로 짓는 것인데도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느니라.
뜻이 뜻을 알지 못하거늘 그 무엇이 뜻의 근본이 되며, 이미 근본이 없다면 어찌하여 뜻이 있겠느냐?
보살은 마음ㆍ뜻ㆍ식의 법을 분별하여 통달하고 오가지만 그러나 처소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해탈관으로써 마음이 반연하는 근본을 알면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또한 마음과 선악(善惡)이 합하는 것도 보지 못하며 합하거나 합하지 않은 것도 없지만 해탈관에 상응하느니라.
[법을 사유하고 관하다]
또 다시 12인연을 사유하되 매우 깊고 멀어서 궁구하여 다할 수도 없고 심은 결과는 보응을 잃지 않으며,
모든 법계에 대하여 마음이 물들거나 집착이 없고 설령 법계를 관찰한다 하여도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며,
모든 법에는 진실한 이치[眞諦]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자연이요 고요하고 청정하여 장차 스스로 돕고 기르고 지키며,
마음으로 지어 변화시킨 바도 형질이 없는지라 볼 수 없고 그 모습을 찾아보아도 역시 색상(色像)이 없으며,
거룩한 지혜로 통달하였으나 곧 일어나지도 않고 생기는 바도 없는 법에 들어가며,
성문이나 연각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 뜻을 붙잡아 모든 부처님의 법에 놀며,
속으로 스스로 사유하고 뛰노는 것이 한량없으며,
‘나는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항복할 수 있게 되어 생사의 집착을 버리고 지혜의 바다에 들어갔구나’라고 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그 마음은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얻어 최정각(最正覺)을 이룬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의지의 법[意止法]에서 자재를 얻은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이 법(法)의 의지(意止)에 대하여 분별하고 관하는가?
이때에 보살은 바른 법을 닦아 익히되 처음부터 망실하지 않고 불도를 이루기에 이르기까지 놓아 버리지 않으며,
안으로는 스스로 법을 관하고 밖으로는 사람의 법[人法]을 관하며,
보살은 모든 법의 모양은 하나요 둘이 아니며 또한 약간의 것도 아닌 줄 모두 다 알며,
모두가 공과 무상과 무원으로 돌아가서 사견(邪見)을 멀리 여의고 모든 법을 평등하게 여기고 12연기의 근본을 분별하며,
언제나 법계의 성패(成敗)ㆍ흥쇠(興衰)와 유루ㆍ무루ㆍ유위ㆍ무위와 선법ㆍ악법과 유기(有記)ㆍ무기(無記)를 생각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사유하고 관찰하되 법계를 따르나 스스로 식의 생각[識想]을 내지도 않고, 법이 아닌 데서 내가 있다고 보지도 않으며,
또한 생각을 일으켜 사람의 수명(壽命)을 헤아리지도 않느니라.
혹은 어떤 보살은 스스로 법이라는 생각[法想]을 일으켜 나[吾我]를 익혀 집착하고 그 수명을 양육하며 아주 없다[斷滅]고 사유하나니,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함이 있다[有常]고 여기고 천하의 만물이 모두 다 언제나 존재한다 하고 무상한 것 가운데서는 합하거나 흩어지는 것이 없다고 헤아리며,
혹은 법 가운데서 뒤바뀐 생각[顚倒想]을 내어,
없는[無] 것은 스스로 언제나 없고 있는[有] 것은 스스로 언제나 있으며,
없는 것은 있는 것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을 내지 못하며,
없는 것이 저절로 생기고 없는 것이 저절로 소멸하며,
있는 것이 저절로 생기고 있는 것이 저절로 소멸하며,
없는 것은 볼 수 없지만 나[我]는 저절로 있어도 있는 것은 볼 수 없나니, 나는 저절로 없다 하느니라.
10주 보살은 밝은 지혜로 통달하고 관찰하는지라,
있고 없다는 것과, 아주 없다는 것과, 항상 있다고 헤아리는 것과, 아ㆍ인ㆍ수명에 대하여 평등하고 공하여 없어서 아무것도 없다고 분별하며, 가장 미묘하고 첫째가는 공관(空觀)으로 그것을 자세히 살피나니,
제일의 성품은 공하여 또한 있는 것을 내지도 않으며,
있는 것은 스스로 언제나 있어서 없는 것에 대하여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없는 것은 스스로 언제나 없어서 있는 것의 있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보살은 사유하되 지혜로써 있는 성품은 스스로 공(空)하고 없는 것도 또한 스스로 공하며,
없는 것은 있는 것을 짓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을 짓지도 못한다고 분별하나니,
있다거나 없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생사의 법이라 가장 으뜸가는 열반의 요의(要義)가 아니니라.
없는 것은 스스로 없어서 공한지라, 없는 것은 없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없는 것은 스스로 성품이 공하며,
있는 것은 스스로 있으면서 공한지라 있는 것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성품이 공하며 있다면 곧 이것은 없는 것이요, 없다면 곧 이것은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보살이 모든 법성을 낱낱이 분별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항상하다[常]거나 항상함이 아니라[非常]거나, 생긴다[生]거나 없어진다[滅]거나, 집착한다[着]거나 아주 없다[斷]거나, 유위ㆍ무위ㆍ유루ㆍ무루ㆍ선법ㆍ악법ㆍ유기(有記)ㆍ무기(無記) 등 모든 법을 사유하고 헤아리는 것이니라.
이름이 있는 것이나 이름이 없는 것이나, 모두 다 텅 비고 고요하며 역시 생기거나 소멸하는 것이 없고, 스스로 법을 관하면서 다른 이의 법을 관하는 것이며,
모든 생각이나 집착에는 역시 사상(思想)이 없고 공ㆍ무상ㆍ무원의 법을 알며,
법계 가운데서 부처님 법과 금계를 추구하여도 모두 다 처소가 없고 또한 지름길도 없으며,
사람을 제도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는 이도 없고,
또한 다시 생사에 빠져 있는 이를 보지도 못하며,
그 가운데서 온갖 중생을 깨우치고 인도하되, 곧 번뇌 없는[無蓋] 대애(大哀)를 일으켜 모든 진로(塵勞)를 치료하고, 모든 전(纏)과 결(結)은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줄 분명히 알며,
5취(趣)를 분별하되 평등으로써 가르치고, 비록 진욕(塵欲)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겁이 많거나 마음이 약하지 않으며, 3독(毒)을 분명히 알아 걸리는 바가 없나니,
이런 곳에 이른 이를 바로 대사(大士)라 하느니라.
부사의한 권현(權現)의 도에 머무르면서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로 널리 자연에 돌아가고 그 자연 가운데서 생기거나 소멸하는 것을 보지 않으며,
뜻을 다하여 공(空)과 같이 아무것도 없으며 머무르는 곳도 생각하지 않고,
법계와 허공계(虛空界)를 추구하되 중생의 처소는 모두 머무르는 데가 없으며, 모든 법은 평등하여 마치 허공계와 같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때에 따라 돕고 인도하며 도법(道法)에 수순하고 비록 중생을 제도한다 하더라도 또한 제도하는 것을 보지도 않는 것이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스스로 몸의 법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법을 관하여 스스로 뜻을 제어하여 지혜에 노닐며,
모든 법은 다 해탈에 돌아가는 줄 능히 이해하면 곧 온갖 중생을 돕고 인도하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일으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법을 얻게 할 수 있으며,
생기는 바와 또한 생기지 않는 바도 아닌 것을 보지도 않고,
비록 생기는 바에 처하여 생기는 바를 사유한다 하더라도 생김이 없는 것과 생기거나 소멸이 없는 법을 버리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법의 의지[法意止]에서 자재를 얻은 것이니라.”
[4의단을 사유하다]
부처님께서 다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10주 보살은 다시 4의단(意斷)의 법을 사유하느니라.
언제나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법은 제어하여 생기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악(惡)은 방편을 써서 그것을 소멸시키며,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은 구하여 그것을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선법은 거듭 더 많이 늘어나게 하느니라.
언제나 마땅히 닦아 익히고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가다듬어 내닫지 않게 하며,
옛날부터 쌓았던 공덕으로 위의와 예절의 법을 잃지 않고 행한 일은 평등하나니,
그로써 능히 마음을 점검하고 바른 진리를 사유하느니라.
재앙[禍] 가운데서도 중한 것은 3불선근(不善根)으로 떨어져 악취(惡趣)에 들어가고 5도를 바퀴 돌 듯하되 잠시도 쉼이 없느니라.
이 때문에 보살은 정진을 부지런히 닦아 곧 악한 불선근을 소멸시키고 다시 거듭하여 오면서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언제나 스스로 불선(不善)의 보응을 관하되, 이것은 더러운 행[穢行]이요 이것은 진실한 길이 아니니라.
‘나는 이제 그릇된 법[非法]의 행을 여의고 첫째가는 이치[第一義]를 익힘으로써 진로(塵勞)를 다하고 영원히 성냄을 제거하며,
12인연의 근본을 분별하고 아직 있지 못한 착한 법은 공덕을 세워 싹이 나게 하여 썩지 않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그 마음은 청정하고 또한 하자가 없으며 삼계에서 얽히거나 집착하는 모든 장애가 붙지 않나니,
집착할 것을 여의었으므로 영원히 집착할 것이 없느니라.
언제나 권하고 좇으면서 일체지에 이르며 모든 깊은 지혜에 대하여 손감이 있지 않나니,
그런 까닭에 공덕의 근본에 이르게 되고 모두 부지런히 힘씀을 말미암아 도과를 이루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4의단에서 자재를 얻은 것이니라.
[신족을 사유하다]
이에 보살은 다시 신족을 사유하고 분별하느니라.
보살은 비록 신족의 정의(定意)를 얻었다 하더라도 도를 이루려고 하는 제10지에서는 반드시 정(定)을 익히되 마치 처음 배우는 이가 뜻을 오로지 하여 쓰면서 정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하며,
4등(等)을 사유하여 더욱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스스로 몸에도 알맞고 또한 마음과 뜻에 알맞게 차츰 1선(禪)에 들어가고 다음에는 2선에 들어가며,
다시 뜻을 가다듬어 초선(初禪)으로부터 일어나서 제3선으로 들어가고,
그 중에서 사유하여 뜻을 오로지 하여 3선으로부터 일어나 다시 초선으로 들어가며,
그 선(禪)에서 변화를 나타내어 신족을 나타내고 제1선으로부터 일어나 제4선으로 들어가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4선 가운데서 곧 신족을 시험하고 몸으로써 마음을 들어 올리고 마음으로써 몸을 들어 올려 보되,
처음에는 마치 겨자씨만큼 하고 차츰차츰 깨나 콩만큼씩 하다가 점점 높이고 크게 하면서 호도만큼 하며,
이와 같이 하여 차츰차츰 힘써 다하여 삼칠일에 이르면 몸과 마음이 가뿐하여 장애되는 것이 없어지느니라.
그런 까닭에 보살은 거듭 정의(定意)에 들어가 신족을 시험하며 이 신족에 의지하여 1억의 사람을 변화할 수 있으며 불퇴전에 서서 신족의 정(定)을 이루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다시 스스로 나타내 보이고 신족을 널리 펴 끝이 없나니,
염부지(閻浮地)로부터 제1천(天)에 이르고 제2ㆍ제3, 나아가 6천에까지 이르며,
모든 하늘들은 그것을 보자마자 저마다 이러한 마음을 내느니라.
‘지금 이 보살은 스스로 신족을 나타내어 광명이 비추지 않는 데가 없구나.
우리들 모든 하늘들은 저마다 서로 권하고 알리어 보살을 옹호하여 불도를 이루게 하자’라고 하고,
혹은 하늘의 꽃과 여러 가지 향과 하늘의 의복이며 저절로의 감로로써 공양올리느니라.
그 가운데서 모든 하늘과 인민들은 깨우치고 교화되어 반드시 신족에 뜻하되 더욱 이익이 있게 하느니라.
과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보살들은 10주를 닦고 익혀 그 행을 청정하게 하나니,
모두가 이 곳에서 신족을 시험하였고 한 마음으로 관찰하며 방편을 구하여 온갖 변화를 능히 나타냈으며,
정진하는 힘으로써 곧 도를 성취하였고 하는 일이 자재하여 거역하는 일이 없었으며,
교화하려 한 이면 가서 곧 항복시켰고 근원을 끝마쳐 모두 충족하게 하였으며,
과보를 얻게 하였으니, 악마나 악마 천(天)으로서는 기울이거나 움직이지 못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천안(天眼)으로써,
삼천대천세계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있는 이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는 이와,
청정한 행이 있는 이와, 청정한 행이 없는 이와,
정의(定意)가 있는 이와 정의가 없는 이와,
산란한 뜻이 있는 이와 산란한 뜻이 없는 이를 자세히 관하여,
보살은 모두 다 알고 그들을 위하여 모든 근(根)이 나아갈 바를 분별하느니라.
다시 천이(天耳)로써 중생의 음성을 듣고 모두 다 차례대로 그 음향을 알고 통달하여 그들을 교화하며,
신족의 힘으로써 선정 삼매에 들어가고 온갖 사람들의 뜻하는 성품과 나아갈 바를 보며 스스로 그 근원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를 보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신족을 행하는 것이니라.
[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와 모든 신통과 지혜을 사유하다]
이에 보살은 다시 근(根)과 역(力)과 7각의법(覺意法)과 8현성도(賢聖道)와 신근(信根)ㆍ염근(念根)ㆍ정진근(精進根)ㆍ정근(定根)ㆍ의근(意根)ㆍ혜근(慧根)을 사유하고 분별하며,
보살은 언제나 현묘하게 통달한 지혜로써 중생을 관찰하는지라,
자못 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와 모든 신통과 지혜[通慧]를 성취함이 있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타심혜(他心慧)로써 앞의 중생을 관찰하되,
혹 어떤 이는 신근(信根)을 구족하게 성취하여 언제나 여덟 가지 도(道)의 평등한 법을 익히고,
마음에 정견(正見)을 품고서 악마의 경계에 처하지 않으며, 생사의 고통이 한량없음을 믿고 아느니라.
다시 열반은 쾌락이며 무위임을 알며,
3존(尊)은 세간의 큰 광명임을 믿고 외도의 96경(徑)을 믿지 않으며,
모든 통혜(通慧)에 대하여 의심이 없고 공을 쌓고 덕을 포개어 정법(正法)을 훨훨 타게 하며,
그 가운데 곧은 믿음을 세움은 어려움이 없느니라.
또 현묘하게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지혜로써 그 중생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면서 정진근(精進根)을 닦고 앉거나 눕거나 거닐거나 간에 마음에 게으름이 없으며 정진을 얻음으로써 모든 근(根)을 갖추는 것이,
마치 하늘옷[天衣]이 사방 둘레와 위아래가 똑같아서 틀림이 없는 것과 같다고 관하느니라.
때에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쪽으로부터 와서 옷의 한 귀[一角]를 잡아 들어 옮기면 나머지 세 귀[三角]도 모두 다 따르는 것처럼,
정진근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어떤 이라도 정진근을 닦아 익히면 모든 법을 완전히 갖추게 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정진근이 있음으로써 곧 염근(念根)을 이루고 마음이 뒤섞여서 어수선하지 않으면 정근(定根)이라 하며,
언제나 방편으로써 뜻을 가다듬어 하나를 지켜 선악을 분별하되 마음이 허공과 같으면 이것은 바로 혜근(慧根)이라 하느니라.
10주 보살은 현묘하게 통한 정(定)에 들어가 미리 중생이 태를 받은 모양을 알고 남자와 여자의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을 분별하며,
일 생(生)ㆍ십 생ㆍ백 생ㆍ천 생에서 수없는 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환히 깨달아 알되 끝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문(道門)을 완전히 갖추고 모든 주(住)를 사유하되 지혜와 변재가 미치기 어려우며, 그 생각을 할 적에 시방의 국토를 감동시키는 것이니라.
또 모든 부처님 국토에 노닐며 광명을 나타내 보이고, 어떤 이라도 광명을 보는 이는 모두가 제도되고, 다시 모든 국토에서 법과 율을 일으키고 세워서 널리 성현의 경전을 좇고 받들게 하며,
또한 국토의 인민들을 편안하고 이롭게 하고 법의 맛[法味]에 인도하여 듣되 만족할 줄 모르게 하며,
언제나 국토와 인민을 환히 알아 종성(種姓)을 성취하고 권속끼리 이별하지 않게 하며,
또한 중생의 마음과 뜻을 관하여 알고 그들을 위하여 6도무극을 연설하느니라.
다시 중생들의 산란한 생각을 금지하고 제어하여 점차로 뻗어나가 온갖 중생에 이르게 하고,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어서 중생을 이끌어 착한 법의 지혜에 들게 하며,
언제나 정(定)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여 신족을 잃지 않고 이미 신통을 닦아 삼세를 분별하며 과거ㆍ미래ㆍ현재를 아느니라.
다시 사유하여 부처님께서 깊이 갈무리 하신 끝없는 지혜를 배워야 하며,
또한 배우고 익히어 모든 부처님 법을 갖추며, 모든 법을 배워 환히 알면 물들거나 집착이 없나니,
배워 펴는 것이 밑이 없어 7보의 창고[藏]를 열며,
배워서 신령한 지혜로써 그 세계를 이루고 광명을 배우고 익혀 널리 시방을 비추며,
부처님의 정의(定意)를 얻어서 국토를 감동시키고 권방편을 배워 모든 외도들을 교화하며,
금계를 배워서 도과를 성취하고 배우고는 모임에서 법륜을 굴리며,
자기 자신이 배운 바로 일체지를 이루나니, 이미 배운 바를 이루었으나 배운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10주의 행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데에 나아가고 국토를 엄정하게 다스리며,
도솔천에 강신(降神)하여 방편으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특수하게 다르고 기이한 법을 나타내 보이며,
종성(種姓)과 어느 나라에 의탁하여 태어날 것인가를 관찰하여 도솔천으로부터 세간으로 내려오고 36번을 왔다갔다 돌아다니며 하늘과 인민을 교화하였고, 그 가운데서 수없는 중생을 제도 해탈하였고, 권방편으로써 홀로 삼계를 거닐면서도 두려움이 없었으며,
최후에는 내려와 6년 동안 고행하되 오로지 마음을 고행에 쏟은지라 그 몸이 마른 나무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니라.
내가 비록 시현(示現)으로 이런 고행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름도 없는 불국토에 있으면서 거기에서 84억 나술(那術)의 하늘 사람을 교화하여 모두 불퇴전의 자리[不退轉地]에 서게 하였으며,
이 국토의 중생으로서 나의 형상을 본 이는 목숨이 끝나고 명근(命根)이 성립되지 않아도 행은 중생보다 뛰어나서 나무를 쌓아 놓고 불에 태웠으나 타지 않았다.
선권(善權)의 한 마음으로 차츰 거룩한 지혜에 나아가 중생들의 모든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바를 버리지 않았으며,
모든 요긴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미치지 못한 이[不及]들을 가엾이 여기니,
이 때문에 보살은 고행을 나타내는 것이니라.
10주 보살은 10지 가운데서 중생을 깨우치고 교화하되 생사를 구별하지 않고 제도할 인민들과 부처님이 된 이를 똑같이 하며,
만일 그 보살로 하여금 뜻에 빨리 위없는 도를 이루려 하면,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몸은 황금빛이 되고 10력과 4무소외와 18불공 등의 특수한 법을 완전히 갖추느니라.
보살의 권속은 하루 동안에 성취하고 국토의 종류와 좋고 나쁜 것을 구하지 않으나,
중생들의 마음은 높은 체 뽐내며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만을 높이며 스스로 위대한 체함을 버리지 않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포태(胞胎)함을 받는 것을 나타내어 세간의 권화(權化)를 따라 이르게 된 곳에서마다 이롭게 하는 바가 많느니라.
10주 보살은 보살이란 이름이 없어지고 곧 일컫되 명호를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명행성위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ㆍ천인사ㆍ불세존이라 해야 하느니라.
한량없는 복이 모이고 모든 부처님들이 보호하게 되며 모든 하늘들이 호위하고 강설한 법은 반드시 연의 근본[緣本]에 있으며 때에 따라 알맞게 하고 끝내 헛되이 일으키지 않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명호가 없는 불국토[無號佛國土]라 하는 까닭은, 여기서 동남방으로 77억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국토를 지나 거기에 세계가 있나니, 이름은 인현(仁賢)이라 하고 부처님의 명호는 선안(善眼)이시며 거기에는 성문이나 연각의 도가 없느니라.
이름이 없는지라 나고 없어지는 법[生滅法]도 없고 서로서로 가르쳐 주어 해탈의 공(空)을 알지만 해탈이라 헤아리지 않느니라.
공을 들으면 곧 이해하여 환히 알므로 환난이 없으며,
또한 3독인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병도 없고,
총지로 오래도록 잘 기억하되 또한 다할 수도 없었느니라.
나는 그 국토에서 불사를 시행하였거니와 여기나 거기의 중생들은 역시 나의 몸이 머물러 있던 데를 몰랐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은혜로이 미치는 바가 많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최승아, 10주 보살이 10지에서 그 행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