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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율비바사 제4권[3]
[스스로 앎으로써 법을 말씀한다]
‘스스로 앎으로써 법을 말씀한다’ 함은 스스로 방편을 써서 앎이니, 그러므로 안다고 합니다. 스스로 지혜 눈을 써서 아니, 이를 안다고 합니다.
또 앎이라 함은 앎이 걸림이 없기 때문에 앎이라 합니다.
‘말씀한다’ 함은 깨달아 알게 함이니 이를 말씀한다 합니다. 또 일체의 법을 열기 때문에 말씀한다고 합니다.”
물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중생들을 위하여 말씀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중생들에게 큰 자비를 내시기 때문입니다. 위없는 안락으로 제도하며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되, 혹은 한 구절이거나 혹은 한 게송이거나 혹은 많거나 혹은 적거나 하는 이것을 말씀한다 합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다’ 함은 그 뜻이 교묘하여 순일하고 섞임이 없으며, 일체가 두루 갖추어 모두 같은 맛이라는 뜻입니다.
또 초품(初品)은 처음이 좋음이요, 중품은 중간이 좋음이요, 후품은 나중이 좋음이라 합니다.
또 계율은 처음이 좋음이요, 삼매로 도를 얻음은 중간이 좋음이요, 열반은 나중이 좋음이라 합니다.
또 계율과 삼매는 처음이 좋음이요, 선정과 도는 중간이 좋음이요, 과와 열반은 나중이 좋음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잘 깨달았으므로 처음이 좋음이라 하고 법은 선한 법이므로 중간이 좋음이라 하며, 상가는 잘 따르므로 나중이 좋음이라 합니다.”
물었다.
“무엇 때문에 상가를 나중이 좋음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만약 듣고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않으면 거룩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니, 이를 나중이 좋음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보리는 처음이 좋음이라 하고, 벽지불의 보리는 중간이 좋음이라 하고, 성문의 보리는 나중이 좋음이라 합니다.
처음에 말씀하면 듣고서 곧 5개(蓋)를 여의고 온갖 것에 모두 착하니 이를 처음이 좋음이라 하고, 듣고서 따르니 이를 중간이 좋음이라 하고, 따른 뒤에는 점차로 도를 얻으니 이를 나중이 좋음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여래는 혹은 많고 혹은 적게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니, 많거나 적거나 간에 또한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 좋음이 있습니다.
‘좋은 뜻[善義]과 좋은 문자[善文字]’라고 함은 왜냐하면 여래의 설법은 맑은 행의 법과 맑은 행의 도를 갖가지의 방편으로써 열어 보이어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뜻이 있으므로 이를 뜻이 좋음이라 합니다.
또 ‘좋은 뜻’이란 구절을 말하며, 또 열어 보임을 말하며, 또 분별을 말하며, 또한 덮어 감추지 않음을 말하니, 잇닿은 구절이 서로 이어서 끊어지지 않으므로 이를 좋은 뜻이라 합니다.
‘좋은 문자’란 깊은 뜻을 잘 지니며 깊은 뜻을 지시하니, 이를 좋은 문자라 합니다.
법변(法辯)ㆍ의변(義辯)ㆍ사변(辭辯)ㆍ요설변(樂說辯)은 오직 총명한 사람만이 이 이치를 알 수 있으며, 어리석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은 깊숙하고 멀어서 오직 지혜 있는 이만이 분별할 수 있으므로 이를 좋은 문자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이 가득하고 두루 갖추었다’ 함은 뜻이 이미 아름답고 가득 찼음이요, 두루 갖추었다 함은 뜻이 이미 아름답고 가득하여 더할 것 없이 모두 만족하므로 두루 갖추었다고 합니다.”
맑은 행[梵行]을 열어 보인다 함을 물었다.
“무엇을 맑은 행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범천 사람들이 이 법을 행하므로 맑은 행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맑은 행을 열어 보임은 처음이 좋음이요,
인연이 있는 까닭은 중간이 좋음이요,
뜻이 뒤바뀌지 않음은 나중이 좋음이니,
듣는 이는 기뻐하며 따르기 때문에 맑은 행을 열어 보임이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아름답고 가득하다고 합니까?”
“계율을 처음으로 하여 다섯 가지 법 무더기[五法聚]이니, 이를 아름답고 가득하다고 합니다.
뜻이 뒤섞이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깨끗하다[淨]고 하며, 여래는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심이 공양을 탐해서가 아니니 이를 깨끗하고 맑은 행이라 합니다.
부처님ㆍ벽지불ㆍ성문들의 행하는 바는 이를 맑은 행이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이와 같은 행(行)과 모습[相]이여. 가서 문안하리라.’
물었다.
“무엇을 좋습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여러 만 가지의 선을 지녔으므로 좋습니다고 합니다. 또 안락을 지녔기 때문에 이를 좋습니다고 합니다. 이와 같다 함은 채운 글귀입니다.
‘행과 모습’에서 행이란 행하는 바가 사람들보다 뛰어남이요, 모습이란 모양이 두루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가서 문안하리라 함은 가서 부처님을 뵈옵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뵈옵는다고 합니까?”
“두 눈으로 보는 것을 뵈옵는다고 합니다.”
이에 비란야 바라문은 이렇게 생각하고서 부처님에게 가서 서로 위문하였다.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4대가 괜찮습니까? 성문 제자들은 병도 적고 괴로움도 적으며 4대가 가쁜합니까? 편안히 잘 계셨습니까?’라고 하는 이것을 위문이라 한다.
바라문과 서로 문답하시는 의미가 순조로우니, 마음속에 기뻐하여 기억하고 지녀 잊지 않으면서 문안드리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았다.
“물러남이란 마치 해가 구르는 것과 같음이요, 앉음이란 신체가 땅에 댐이요, 한 쪽이란 한 갓[邊]에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대덕(大德)에게 가서 앉음에 여섯 가지 법을 피한 뒤에 앉아야 하니,
무엇이 여섯 가지 법인가?
첫째 아주 멀음이요, 둘째 아주 가까움이요, 셋째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上風]이요, 넷째 높은 곳이요, 다섯째 눈앞에 맞닿음이요, 여섯째 뒤에 있는 것입니다.”
물었다.
“멀리 앉음이 어째서 잘못입니까?”
대답하였다.
“혹시 함께 말을 하려 하여도 소리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가까움이 어째서 잘못입니까?”
“대덕을 거슬러서 성을 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이 어째서 잘못입니까?”
“몸과 호흡의 더러운 냄새 때문입니다.”
“높은 곳이 어째서 잘못입니까?”
“공경함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앞에 맞닿음이 어째서 잘못입니까?”
“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뒤에 앉음이 어째서 잘못입니까?”
“대덕(大德)이 같이 말할 적에 돌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라문은 이 여섯 가지가 법을 여의고서 앉았으므로 율에서 ‘물러나 한 쪽에 앉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문이란 번뇌를 굴복시킴입니다. 또 번뇌를 물리침이라 하며, 또 마음을 쉬게 함이라고 합니다. 바라문이란 세간의 참다운 바라문은 부모가 순수합니다.
‘장자’란 몸의 키가 크고 나이도 많은 이입니다. 또 위엄과 덕망이 있는 이를 장자라고 하며, 재산이 풍부한 이도 장자라고 합니다.
‘대로(大老)’라 함은 머리카락이 빠진 이나 또 낳음[生]이라고 하니 자손들이 차츰차츰 이어서 태어난 이를 늙은이라고 합니다.
‘늙어서 기력이 쇠함[朽邁]’이란 피부가 말라 주름이 지고 언어가 잘못이 있는 이를 늙어서 기력이 쇠함이라고 합니다.
‘세월을 지낸 이[年過者]’란 살아오면서 이미 두셋 임금의 대에 직책을 지났으면서도 오히려 오래 생존하고 있음이니, 이를 세월을 지낸 이라고 합니다.
‘오래 삶(延壽)’이란 나이가 백 살을 넘은 것을 오래 삶이라고 합니다.
‘더할 나위 없는 나이[至年]’란 바로 맨 끝의 나이이니, 이를 더할 나위 없는 나이라 합니다.
[에끼, 구담 사문은 무엇을 하시오]
‘에끼, 구담 사문은 무엇을 하시오’라고 함은 바라문의 말입니다.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도달하여 부처님을 만났는데도 일어나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고 평상 자리도 베풀지 않았으므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듣던 바대로구나. 지금 바로 여래를 만나보니 자신의 몸은 추켜세우고 딴 사람을 업신여기려 하는구나.’
부처님은 자비스런 마음으로써 바라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보지 못하였노라. 부처는 숲 속에서 태어날 적에 땅에 떨어지자 북쪽을 향하여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스스로 백억만의 하늘사람ㆍ범ㆍ악마ㆍ사문ㆍ바라문을 자세히 살폈지마는 나의 절을 받을 만한 이가 없었으므로 살펴서 보기를 마치고 스스로 소리 높여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높노라≻고 하였느니라.’
범천이 보살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곧 합장하고는,
‘보살께서는 삼계에 홀로 높으시며, 뛰어난 이가 없습니다’고 하였으므로,
보살은 듣고 사자후(獅子吼)로 외쳤습니다.
‘오직 나만이 홀로 높도다.’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말씀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아직 도를 얻지 못했을 때에도 삼계에서 이미 스스로 홀로 높았는데, 하물며 지금 여러 가지 좋은 공덕으로 나를 제수하여 부처로 삼았거늘 어떻게 그대에게 예배하겠는가.
만약 사람으로서 나의 예배를 받으면 머리가 곧 땅에 떨어지리니, 그러므로 그대는 부처에게서 예배 받기를 희망하지 말라’
이 바라문은 멍히 보면서 지각없이 있다가 부처님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빛깔에 맛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깔만이 있고 실제로는 맛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바라문을 조복하려고 하여 대답하셨습니다.
‘그대는 맛이 없으리라고 말하는데 진실로 맛이 없다.
왜냐하면 세간 사람 같으면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맛으로 삼겠지마는 여래는 이것을 이미 끊었으니,
비유컨대 다라수를 끊으면 영영 다시는 살아나지 않음과 같기 때문이다.’
바라문이 말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곧 높이 떠받듦이 되리이다.’
부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대의 말을 인하면 곧 높이 떠받듦이 있지마는 어째서 내가 높이 떠받든다고 하는가.
과거 세 세상의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배하시지 않으셨으므로 나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높이 떠받듦이로다.’
바라문이 말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곧 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대의 말한 바와 같도다. 나는 참으로 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지 않는가?
나는 도둑질ㆍ거짓말ㆍ속임수ㆍ음욕인 모든 나쁜 업 등 몸ㆍ입ㆍ뜻의 업을 짓지 않는다.
나는 다 행하지 않으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바라문이 말하였습니다.
‘이 분은 곧 스스로 그 종자를 끊는구나.’
부처님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그러하니라. 왜냐하면 삼계 중의 온갖 가지가지의 번뇌들을 내가 다 끊으므로 종자를 끊음이라 하느니라.’
바라문은 망연하여 무슨 답을 할 줄 모르다가 다시 말을 바꾸었습니다.
‘이 사람은 천박하고 깨끗하지 못하구나.’
부처님이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뜻대로라면 참으로 깨끗하지 못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든지 마음과 입을 제멋대로 하여 악을 행하는 이가 바로 천박하고 깨끗하지 못하느니라.’
바라문이 곧 성을 내며 말하였습니다.
‘이분이 또한 내 말을 들으며 일마다 결단을 내는구나.’
부처님이 또 대답하였습니다.
‘삼계의 모든 번뇌 중에 나는 참으로 이미 결단을 내었노라.’
바라문이 또 말하였습니다.
‘이 분은 걱정스럽다. 함께 말할 만하지 못하구나.’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참으로 그렇다면 나도 걱정스럽도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정말 가엾도다.
한결같이 나쁜 업만을 행하고 선을 닦기를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다.’
바라문이 곧 성을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분은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문장이나 생각하고 찾으면서 세간 사람들을 괴롭히는구나.’
부처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참으로 그와 같도다. 왜냐하면 나는 태에 들어가서 잠을 자지도 않았기 때문이요, 하늘에 들어가서도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잠자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바라문은 여덟 가지 일로써 부처님을 비방하기를 마치니,
여래 법왕은 가엾은 마음으로써 바라문의 눈을 보며 단 이슬 법의 맛을 먹게 하려고 그를 위하여 설법하셨습니다.
이때 바라문의 마음 속이 청정하여졌습니다.
비유컨대 허공이 구름들에게 가리움이 없는 것과 같았고,
또한 해와 달이 모든 어두움을 비추는 것과 같았습니다.
여래는 갖가지의 방편으로써 교화하여 알게 하시고,
여래 스스로 ‘나는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지혜를 얻어서 항상 열반에 머무른다’고 하시고,
바라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의 늙음과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느니라. 나에게 오라. 그대는 실로 얻을 것이 있으리라. 왜냐하면 마치 달걀이 혹은 여덟 개, 혹은 열 개, 혹은 열두 개와 같으리라.’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세 가지로 수를 분별하셨습니까?’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글귀를 채움이요, 또한 문자를 아름답게 채우는 것이다.
이 어미 닭이 알에 엎드려서 때때로 돌리고 굴리니, 엎드린다 함은 두 날개로써 덮는 것이다.
나오려 할 때가 되면 눈으로 광명을 보고 부리로써 알을 쪼고 나온 뒤에는 날개를 두드리며 울며 부르니, 앞에 나온 것이 크겠는가 작겠는가?’
바라문이 대답하였습니다.
‘앞에 것이 큼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그와 같느니라. 왜냐하면 무명의 알 껍질이 삼계를 덮고 가렸는데 나는 지혜의 부리로써 무명의 알 껍질을 쪼아 앞서 삼계를 나왔느니라.
이는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겠는가?’
대답하였습니다.
‘구담이 곧 크리이다.’
나머지 뒤에 글귀는 뜻이 없으니,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세간 중의 하나[一]’에서 하나란 둘이 없는 것입니다. 삼먁삼보리란 위없는 보리입니다.
물었습니다.
‘무엇을 위없는 보리라고 합니까?’
대답하였습니다.
‘만약 사람이 수다원의 도에 있으면서 수다원의 과위를 물으면 곧 그를 위하여 말하며,
나아가 아라한의 도에 있으면서 아라한의 과위를 물으면 곧 그를 위하여 말하니,
성문ㆍ벽지불ㆍ부처님의 도와 같은 것도 물음에 따라 대답하기 때문에 위없는 보리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가장 크니라.
어미 닭이 알에 엎드려 때때로 돌리면서 굴리니 부처는 보리수 아래서 4제의 법과 고(苦)ㆍ공(空)ㆍ무상을 자세히 살폈느니라.’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바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위없고 가장 큰 것을 얻었다. 게으르고 방일한 마음이 아니라 나는 용맹과 정근과 정진으로써 보리나무 아래서 네 가지로 정진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바르고[正], 둘째는 서두르지 아니하고[不急], 셋째는 느슨하지 아니하고[不寬], 넷째는 놓아두지 아니함[不置]이니, 이 법을 써서 위없는 도를 얻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부드럽지 않음[不柔]이란 머무르지 않음이요, 마음을 일으킴[起心]이란 자세히 살핀 곳에서 행함이요, 물러나지 않는다 함은 피로하지 않음이요, 삼매의 마음이란 일심(一心)입니다.
잘 마음에 간직한 삼매 때문에 곧 일심을 이루니, 지나치지도 않고 잃지 않는 이것이 처음이 좋은 법이라 합니다. 이 법 때문에 초선정(初禪定)을 얻고, 초선정으로부터 차례로 3달지에 이르러 극(極)이 되니, 부처님은 위없는 법에 뛰어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욕(欲) 가운데서 청정하다]
율문 중에 말씀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라문이여, 나는 욕(欲) 가운데서 청정하며 악에도 다시 청정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물었다.
“무엇을 욕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탐욕의 욕ㆍ욕탐(欲貪)의 욕ㆍ욕사(欲思)의 욕이니, 이것이 욕의 이름입니다.”
“무엇을 모든 악한 법이라고 합니까?”
“욕에 대한 의심이 악한 법이라고 합니다. 여래는 이 두 곳에서 고요함을 얻었습니다.”
또 물었다.
“무엇을 욕 가운데서 청정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욕을 여읨이며 또한 욕을 버림을 말하니, 왜냐하면 처음 제1선정에 들면 무명은 욕의 편이요, 욕은 선정의 원수이므로 이미 욕을 버렸기 때문에 선정을 얻으니, 이것을 원수라고 합니다.
욕과 악을 여의면 선정이 오며, 욕과 악이 멸한 뒤에는 선정이 일어나니, 이와 같은 두 글귀의 뜻을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세 가지 고요함[三靜]이 있는데 몸의 고요함[身靜]ㆍ마음의 고요함[心靜]ㆍ덮어 숨김의 고요함[覆靜]이니, 이것이 세 가지 고요함입니다. 이 세 가지 고요함도 앞의 두 글귀의 고요함에 포함됩니다.”
“무엇을 욕이라 합니까?”
“욕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처욕(處欲)이요, 둘째는 번뇌욕(煩惱欲)입니다.”
“무엇을 처욕이라 하며, 무엇을 번뇌욕이라 합니까?”
“처욕이란 마음이 색처(色處)에 집착함이요, 번뇌욕이란 사람을 욕에 이르게 함입니다. 이 뒤의 두 글귀는 바로 해탈하는 바에 집착하니, 앞의 글귀는 낙(樂)과 욕을 버리기 위해서요, 뒤의 글귀는 번뇌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처욕과 번뇌욕의 그 두 가지 가운데서 마음은 극히 청정합니다.
또 앞의 글귀는 처욕을 없애고, 뒤의 글귀는 번뇌욕을 없앤다고 하며, 앞의 글귀는 인연의 동요를 없애고, 뒤의 글귀는 어리석은 모양을 없앤다고 합니다. 앞의 글귀는 깨끗함에 집착하고, 뒤의 글귀는 욕을 그친다고 하니, 이와 같이 차례로 스스로 아십시오.”
물었다.
“탐욕에서 탐이 곧 욕입니까, 탐 따로 욕 따로 입니까?”
대답하였다.
“하나에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악한 법은 이치가 하나에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별이면 각각 다릅니다.
또 율문에서 ‘탐이란 번뇌요, 욕이란 처욕이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삼매와 같은 것은 탐욕의 원수요, 기쁨은 성냄의 원수요, 생각(思)은 잠의 원수요, 안락은 흔들리며 불안함의 원수요, 재고 헤아림은 의심의 원수입니다.
또한 초선(初禪)과 같은 것은 탐욕이 원수이니, 탐욕이란 5개(蓋)를 포함해 들이며, 모든 악한 법이란 모든 개(蓋)를 포함해 취합니다.”
“무엇을 모든 개라고 합니까?”
“삼독의 뿌리ㆍ5욕ㆍ5진(塵)ㆍ사탐(邪貪)입니다. 뒤의 글귀는 처(處)ㆍ분별ㆍ모든 티끌ㆍ성냄ㆍ어리석음들의 법에 따르며, 앞의 글귀는 욕류(欲流)ㆍ욕착(欲著)ㆍ욕천(欲泉)ㆍ욕수(欲受)ㆍ살심결욕(殺心結欲)입니다.
뒤의 글귀는 여러 유(流)ㆍ천(泉)ㆍ수(受)ㆍ착(著)이며, 앞의 글귀는 모든 사랑[愛] 등입니다. 뒤의 글귀는 무명 등이며, 앞의 글귀는 탐 등 여덟 가지 마음의 수(受)입니다. 뒤의 글귀는 네 가지 착하지 못한 마음[四不善心]이 일어남이니, 이와 같이 욕 가운데서 청정하며, 악에도 청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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