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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도론 제4권
8. 행문품(行門品) ⓵[1]
[지일체법, 땅]
[문] 무엇이 지일체입(地一切入)이며, 무엇을 닦음[修]으로 삼고, 무엇을 상(相)으로 삼고, 무엇을 맛[味]으로 삼고, 무엇을 처(處)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功德)인가?
일체입이란 무슨 뜻인가?
또 몇 종의 지(地)가 있으며, 어떤 흙에서 상을 취하는가?
무엇이 만다라를 만드는 법인가?
무엇이 수지법(修地法)인가?
[답] 지(地)를 의지해 이 마음에 상(相)이 생기는 것을 지일체입이라 한다.
마음이 산란됨이 없이 머무는 것을 수(修)라 한다.
지상(地想)에 잘 낙착(樂著)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고,
버리지 않는 것을 맛[味]이라 하고,
의식[意]에 다른 생각[異念]이 없는 것을 처(處)라 한다.
무엇이 공덕인가?
열두 가지 공덕이 있어 지일체입으로부터 그 상(相)이 쉽게 얻어진다.
일체시ㆍ일체행에서 마음의 움직임[行]에 장애가 없고, 뜻대로 하는 신통으로 땅위를 걷듯 물위를 걷고 허공을 노닐며, 갖가지 색변ㆍ초념숙명변 및 천이계변(天耳界辯)을 얻어 따라서 훌륭한 세계로 가고 감로를 변(邊)으로 한다.
[문] 일체입이란 무슨 뜻인가?
[답] 두루 보편한 것[周普]을 일체입이라 한다.
부처님이 게송으로 설한 바와 같다.
만약 사람이 부처님의 덕을 생각하면
기쁨이 생겨 온 몸에 충만하고
지일체입을 관하면
염부제를 가득 채우나니
이 관은 흙을 인연해 생기며
마음의 기쁨 또한 그와 같다.
이와 같은 관을 닦으면 만다라가 일체입에 변재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문] 지에는 몇 종류가 있는가?
어떤 지에서 상을 취해야 수행할 수 있는가?
[답] 지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상지(自相地)요, 둘째는 조작지(造作地)이다.
딱딱함[堅]이 자상지계(自相地界)가 되니, 이것을 자상지라 한다.
만약 손으로 직접 파거나 남을 시켜 파게 해서 만든 것이라면 이것을 작지(作地)라 한다.
(지는) 네 가지 색을 이루니, 소위 백색ㆍ흑색ㆍ적색 및 여명색(如明色)이다.
여기에서 좌선인은 자상지를 의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백색ㆍ흑색ㆍ적색은 제외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만약 자상지를 관하면 이것으로부터는 피분상(彼分相)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백색ㆍ흑색ㆍ적색을 취하면 색일체입을 닦는 것이 된다.
무엇 때문인가?
자상지를 관찰하더라도 백색ㆍ흑색ㆍ적색을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수행대상을 손으로) 만들었건 만들지 않았건 마땅히 그 상을 취해야 하며,
새벽빛과 같은 상[如明相]이 나타나면 마땅히 그 상을 취해야 한다.
[문] 무엇을 만들지 않은 지[不作地]라 하는가?
[답] 곳곳이 평탄하고, 풀이나 돌이 없고, 각종 그루터기도 없는 것이다.
그런 눈의 경계에서 마땅히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을 지상(地想)이라 하고, 이것을 만들지 않은 지라 한다.
만약 오랫동안 좌선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좋아하는 것이건 좋아하지 않는 것이건 곧 거기에 있는 지(地)의 상(相)을 보고, 불퇴에 머무른다.
처음 배우는 초선의 사람은 지의 상을 만들어 취하고 만다라를 만들며, 만들지 않은 지는 관하지 않는다.
[문] 어떻게 만다라를 만드는가?
[답] 만약 좌선인이 땅에 만다라를 만들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마땅히 적적한지 살펴야 한다.
절의 방사나 석실에서 지내거나 혹은 나무아래에 머물러야지, 햇빛이 들지 않아 캄캄한 곳이나 비인(非人)이 다니는 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곳에서 사방으로 1심(尋)만큼 물을 뿌려 청결히 하고, 그 땅을 말려 쓸어야 한다.
그곳에서 새벽빛과 같은 상이 나타날 때,
흙의 색깔을 지성(地性)과 서로 발기시키고, 적당한 양을 잘 헤아려 위의를 공경히 하고는,
기물(器物)을 가져다 흙을 물에 개어 풀이나 나무토막을 집어내고,
분뇨나 씨앗을 제거하고, 천을 이용해 앙금을 거른다.
그리고는 정결한 땅에 앉을 자리를 깔고, 빛을 차단하고, 선좌(禪座)를 놓는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자[規]로 원을 만들고, 원 안에는 평평하게 하여 어떠한 흔적도 없게 한다.
그런 뒤에 진흙을 땅에 발라 나머지 색과 섞이지 않게 하고, 다른 색과 섞이지 않게 하여 땅을 편안케 한다.
아직 마르지 않았으면 잘 덮어 보호하고, 만약 말랐으면 다른 색으로 그 밖을 두른다.
혹은 미사(米篩) 크기로, 혹은 소뢰(搔牢) 크기로, 혹은 원(圓)ㆍ방(方)ㆍ삼각ㆍ사각으로 마땅히 분별하여야 한다.
우리 스승의 말씀에 따르면 가장 뛰어난 것은 원이고, 만다라를 만듦에 있어서도 천[衣]이나, 판(板)이나 벽(壁)에 모두 만다라를 만들지만 땅[地]에 만든 것이 가장 뛰어나다.
이와 같은 것이 선사(先師)가 설한 바이다.
[수지법, 땅을 닦는 법]
[문] 무엇이 수지법(修地法)인가?
[답] 만약 좌선인이 지일체입을 수행하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마땅히 욕의 과환을 관해야 하고, 또 출리(出離)의 공덕을 관해야 한다.
[문] 왜 욕의 과환을 관해야 하는가?
[답] 욕이란 기미(氣味)가 적은 까닭에 우고(憂苦)가 많으니, 이곳에는 과환이 많다.
욕이란 뼈다귀의 비유와 같나니 기미가 적기 때문이고,
욕이란 고깃덩어리의 비유와 같나니 많은 것이 들러붙기 때문이다.
욕이란 바람을 거슬러 횃불을 잡는 비유와 같나니 따라서 태우기 때문이고,
욕이란 염(炎)과 탄(炭)의 비유와 같나니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이다.
욕이란 꿈의 비유와 같나니 갑작스레 없어지기 때문이고,
욕이란 빌린 물건의 비유와 같나니 그 힘이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욕이란 나무 과일의 비유와 같나니 사람에 의해 꺾기기 때문이고,
욕이란 칼의 비유와 같나니 자르기 때문이다.
욕이란 창의 비유와 같나니 찌르기 때문이고,
욕이란 독사 머리의 비유와 같나니 가히 두렵기 때문이다.
욕이란 바람에 날리는 솜털의 비유와 같나니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며,
욕이란 환상의 비유와 같나니 사람을 미혹시키기 때문이다.
욕이란 어둠이니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욕이란 장애이니 모든 선법을 방해하기 때문이며,
욕이란 어리석음이니 올바른 생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욕이란 열과 같나니 문드러지기 때문이며,
욕이란 형틀이니 묶어놓기 때문이며,
욕이란 도둑이니 공덕의 물건을 훔치기 때문이고,
욕이란 원한이 있는 집이니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욕이란 괴로움이니 모든 과환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욕의 과환을 관한 뒤에 마땅히 출리의 공덕을 관해야 한다.
처음 선을 닦고 처음 출가하고부터 모든 선(善)을 닦는 것을 출리라 한다.
[문] 무엇이 출리의 공덕인가?
[답] 번뇌에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 적적한 즐거움에 자재하게 머물고,
고를 견뎌내고 즐거움에 머물면서 잃지 않으며,
여러 가지 일을 널리 구제하여 대과지(大果地)를 얻고,
공양을 받아 2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지혜이고, 이것은 일체선처(一切善處)이니, 이를 삼계를 초월한 것이라 한다.
또 출리라 하는 것은 그 음욕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개(蓋)가 적적한 것이며, 이것은 허물이 없는 즐거움이며, 이 처(處)는 최승의 지(地)이며, 이 도(道)로 최승을 얻게 된다.
이것은 마음의 때를 청정케 하며, 이 공덕은 수행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즐거움은 안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욕은 거칠고, 출리는 수승하고 오묘하다.
욕은 번뇌가 있고, 출리는 번뇌가 없다.
욕은 하(下)이고, 출리는 상(上)이다.
욕은 진에가 있고, 출리는 진에가 없다.
욕은 과보가 좋지 않지만 출리는 그 과보가 좋다.
욕은 두려움이 있지만 출리는 두려움이 없다.
이와 같이 음욕의 과환을 관하고 출리의 공덕을 관한 뒤, 출리에 의지해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고, 믿음을 일으키고, 공경을 일으킨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관하고, 절량식에 의지하고, 의발을 안치하고, 몸에는 게으름이 없고 마음에는 태만이 없게 하여 잠시 행각한다.
잠시 행각한 뒤에는 앉아서 손과 발을 씻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염하고, 법을 염하고, 승을 염한다. 선행을 닦아 염한 뒤에는 환의하도록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능히 이와 같이 구족을 얻었다. 만약 내가 출리를 얻지 못하면 또 오랫동안 편히 정진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용맹스럽게 해야 한다.”
만다라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멍에[軛]나 심(尋)의 길이만큼 떨어져 좌구를 안치해야 하고,
만다라를 마주해 결가부좌를 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안에서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고는 잠시 눈을 감고 몸과 마음의 산란함을 없애며,
모든 마음을 거두어 일심을 이룬다.
그리고 약간 어렴풋하게 눈을 떠 만다라를 관해야 한다.
그 좌선인은 현재 만다라형(曼陀羅形)을 관하는데 3행 즉 등관(等觀)으로써, 방편으로써, 이난(離亂)으로써 상을 취해야 한다.
[문] 무엇이 등관으로써 취하는 것인가?
[답] 좌선인은 현재에서 만다라를 관할 때, 크게 뜬 눈도 아니고 꼭 감은 눈도 아닌 상태로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눈을 크게 뜨면 그 눈이 피로를 느껴 만다라의 자성ㆍ현견의 자성ㆍ피분상(彼分想)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눈을 꼭 감고 만다라를 보면 암혹을 이루고 그 상도 보지 못하게 되어 곧 게으름이 생긴다.
이런 까닭에 크게 뜨거나 꼭 감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기울여 만다라에 머물러야 한다.
마음이 머무는 까닭에 마땅히 사람이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얼굴을 보듯 해야 한다.
거울을 의지해 얼굴을 보면 얼굴 모습이 거울로부터 생기듯,
그 좌선인이 만다라를 관해 그 정상(定相)을 보면 (정상이) 만다라를 의지해 생긴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등관으로써 관해 상을 취해야 하니, 마음을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등관으로써 상을 취하는 것이다.
[문] 무엇이 방편으로써 취하는 것인가?
[답] 소위 네 가지 작의방편(作意方便)이 있다.
첫째는 내격(內隔), 둘째는 만방(滿方), 셋째는 전(轉), 넷째는 편만(遍滿)이다.
이때 보이던 상이 밖으로 흩어져 간격이 없으면, 이럴 때는 간격 안으로 들어오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이때 상이 작게 보이거나 만다라의 반만 보이면, 이럴 때는 만다라가 온전하도록 한 다음에 사방에 가득하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이때 마음이 산란하거나 마음이 게을러지면, 이럴 때는 도공의 물레처럼 일과를 정해 채찍질해야 한다.
이때 마음이 머묾을 얻으면, 이럴 때는 보이는 만다라가 두루 가득해 이지러짐이 없게 하고 마땅히 사(捨)를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방편으로써 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문] 무엇이 이난(離亂)으로써 취하는 것인가?
[답] 이난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너무 급하게 정진하는 것이요, 둘째는 너무 더디게 정진하는 것이요, 셋째는 최고요, 넷째는 최하이다.
[문] 무엇이 급하게 정진하는 것인가?
[답] 급하게 마음을 쓰고, 시절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아침에 앉아 저녁에 그만두는 등, 몸을 피로하게 하는 것을 급하게 정진하는 것이라 한다.
[문] 무엇이 더디게 정진하는 것인가?
[답] 작의방편을 벗어나 만다라를 보고는 있지만 공경하는 마음을 쓰지 않고, 자주 일어나고, 자주 조는 것이다.
만약 급하게 정진하면 곧 몸이 나태해지고 마음이 퇴보하며, 마음이 외연을 만나면 각종 유희를 일으킨다.
만약 더디게 정진하면 몸과 마음이 나태하고 게을러져 각종 수면을 일으킨다.
최고란 그 마음이 퇴보하고 갖가지 산란심을 일으켜 행처에 대해 즐겁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 처음의 웃고 장난치는 언어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이로 인해 욕심이 높아지게 된다.
또한 만약 모든 상이 변화하게 되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해 욕심이 높아지게 된다.
최하란 물러남과 유희를 인연한 까닭에 업처에 대해 즐겁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 처음의 행처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자기가 한 것에 대해 성을 내게 되고,
그 성냄으로 인해 마음이 낮아지게 된다.
또한 오랫동안 각관에 싫증을 내어 승(勝)으로부터 그 마음이 퇴락하면 근심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낮아지게 된다.
이 좌선인은 만약 마음이 급히 서둘러 유희하는 곳에 퇴락한 경우에는 염근(念根)과 정근(定根)으로써 거두고 제압해 유희를 버리게 하고,
만약 마음이 지어나가다 게으른 곳에 빠진 경우에는 염근과 정진근으로써 거두고 제압해 그 게으름을 버리게 하며,
만약 교만한 사람이 탐욕에 빠진 경우에는 현지(現知)를 이루어 욕심을 버리게 하고,
낙심한 사람이 성냄에 빠진 경우에는 현지를 이루어 성냄을 버리게 한다.
그러면 이 4처에서 청정심을 이루고, 전일(專一)한 마음을 이룬다.
이것은 3행으로 인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면 뜻에 따라 만다라형을 보게 된다는 것을 밝혔다.
만약 전일한 마음이면 상(想)이 일어나게 된다.
무엇을 취상이라 하는가?
만약 좌선인이 산란하지 않은 마음으로 현재에서 만다라를 관한다면 만다라로부터 상(想)이 생긴다.
마치 허공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떤 때는 멀게, 어떤 때는 가깝게, 어떤 때는 왼쪽에, 어떤 때는 오른쪽에, 어떤 때는 크게, 어떤 때는 작게, 어떤 때는 추하게, 어떤 때는 멋있게, 어떤 때는 많게, 어떤 때는 적게 보인다.
눈으로 만다라를 관하지 않고 작의방편으로 취하면 상이 일어나니, 이것을 취상이라 한다.
그로부터 여러 차례 자의하기 때문에 피분상이 일어난다.
피분상이라 하는 것은 작의할 때 마음을 따라 곧 나타나는 것이지,
만다라를 보고난 후에 생긴 마음 속 생각이 아니다.
그저 마음을 쓰기만 하면 눈을 감아도 앞에서 관한 바와 같이 나타나고,
만약 멀다고 작의하면 곧 멀리 보이고,
만약 가깝다거나 왼쪽ㆍ오른쪽ㆍ전ㆍ후ㆍ내ㆍ외ㆍ상ㆍ하라고 작의해도 또한 마찬가지로 마음을 따라 곧 나타난다.
이것을 피분상이라 한다.
상(相)이란 무슨 뜻인가?
인(因)의 뜻이 상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그 모든 악과 불선법에는 상의 일어남이 있다”라고 가르친 것과 같다. 이것이 인연의 뜻이다.
또 말하자면 지(智)의 뜻이 상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상(想)을 지어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지의 뜻이라 한다.
또 상(像)의 뜻이 상의 뜻이니, 스스로 그 얼굴의 영상을 보고 형상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피분(彼分)은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때 상을 얻은 좌선인은 그 스승의 처소에서 공경심을 일으켜 승상(勝相)을 취해 마땅히 수호하여야 한다.
만약 수호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린다.
[문] 무엇이 마땅히 지키는 것인가?
[답] 세 종류의 행으로 마땅히 상을 지켜야 하나니, 이와 같이 악을 떠남으로써, 선(善)을 수행함으로써, 항상 닦음으로써 수호해야 한다.
무엇이 불선(不善)을 떠나는 것인가?
작무(作務)를 즐기고, 갖가지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잠을 즐기고, 모임을 즐기고, 속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고, 모든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를 절제하지 않고, 초야와 후야에 일어나 선을 닦지 않고, 배운 것을 공경하지 않고, 악한 친구가 많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닦는 것은 마땅히 떠나야 한다.
좋지 않은 시절에 먹고, 자고, 누워서는 안 되나니, 그것들을 대치하는 그런 선을 항상 닦아야 한다.
[문] 무엇이 항상 닦는 것인가?
[답] 그 좌선인은 이런 상을 잘 취해 보배를 생각하듯이 항상 그 공덕을 관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며 행하고, 항상 닦고, 많이 닦고, 낮이건 밤이건 많이 수행하고, 기대건 눕건 마음으로 기꺼이 반연하고, 처처에 마음을 놓아 상을 취하고, 이미 취했으면 취하고 나서는 일으키며, 일으키고 나서는 그에 따라 관하고, 관하고 나서는 닦고, 닦음에 있어 때때로 만다라를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항상 닦음으로써 상을 보면, 그는 이와 같이 현재에서 상을 수호하고 혹 자재함을 얻기도 한다.
만약 상이 마음을 따르면 선(禪)의 외행(外行)을 얻고,
만약 외행이 마음을 따르면 그로부터 안(安)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