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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10권
3. 분별세품 ③
1) 유정의 연기
[무명]
무명(無明)은 어떠한 뜻인가?
이를테면 그 자체 ‘명(明)이 아닌 것[非明]’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명은 마땅히 안(眼) 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의 뜻은 ‘명이 없는 것[無明]’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명의 본질은 마땅히 비유(非有)라고 해야 할 것이다.2)
[무명은] 그 자체로서 실재한다는 뜻과, 그 밖의 다른 뜻으로 변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明)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니
마치 친구 아닌 이[非親]ㆍ비진실[非實] 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친구에 반대되는 온갖 원적으로서 친구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친구 아닌 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친구와는 다른 [모든]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친구의 부재라는 말도 아니다.3)
또한 진리의 말씀[諦語]을 ‘진실’이라고 이름할 때, 이것에 반대되는 거짓[虛誑]의 언어를 일컬어 ‘비진실’이라고 하니, 이는 진실과는 다른 [그 밖의 일체의 법]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진실의 부재라는 말도 역시 아니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 이라고 말한 것은, 비법(非法), 비의(非義), 비사(非事:불선을 말함) 등은 [법이나 의(義)ㆍ사(事)와] 그 성질이 다른 [모든] 것도 아니며 그것의 부재도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4)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도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니, 바로 명(明)에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명과 다른 [모든] 것도 아니며, 명의 부재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무명이 개별적으로 실체로서 존재함)을 아는 것인가?5)
‘[무명은] 행(行)의 연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진실된 논거[證,경증과 이증]가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결(結) 등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악혜(惡慧)는 [무명이] 아니니, 견(見)이기 때문이며
[무명은] 견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능히 혜를 오염시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 무명을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누(漏)ㆍ액(軛)ㆍ폭류(瀑流) 등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6) 즉 그 밖의 다른 안(眼) 등이나 그 자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을 ‘결’이나 ‘박’ 등의 사(事)가 된다고는 설할 수 없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법[有別法]을 설하여 무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7)
만약 그렇다면 악처자(惡妻子) 즉 아내가 사악할 경우 아내가 없는 것[無妻子]과 같다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악혜(惡慧)도 마땅히 무명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명은 아니니, 그것은 바로 견(見)을 갖기 때문이다.
즉 온갖 염오혜를 일컬어 악혜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명이 아니다.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견’이 아닌 [염오]혜(이를테면 탐ㆍ진ㆍ치와 상응하는 혜)를 바로 무명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무명은 ‘견’과 상응하기 때문에 [혜가 아니다].
무명이 만약 혜(즉 5견 이외의 악혜)라고 한다면, ‘견’과 상응하지 않을 것이니, 두 가지의 혜와 함께 상응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즉 심ㆍ심소의 事平等에 위배됨)
또한 무명은 능히 혜를 오염시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탐욕은 마음을 오염시켜 해탈하지 못하게 하며, 무명은 혜를 오염시켜 청정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9)
즉 혜가 능히 혜 자체를 오염시킬 수는 없으니, 마치 마음과는 다른 존재인 ‘탐’이 능히 마음을 오염시키듯이 무명 역시 그것과는 다른 존재인 혜를 능히 오염시킨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온갖 염오혜가 선혜(善慧)와 뒤섞여 청정하지 않게 하는 것을 설하여 ‘능히 오염시킨다’고 해야 함에도 어찌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바로 탐이 마음을 오염시켜 (즉 탐이 마음과 뒤섞여)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어찌 반드시 [개별적으로] 현기(現起)하여 마음과 상응해야만 비로소 ‘능히 오염시킨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탐의 힘에 의해 마음이 손박(損縛)되어 해탈하지 못하게 될지라도 후에 그러한 탐의 훈습이 전멸(轉滅)할 때 마음은 바로 해탈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은 혜를 오염시켜 청정하지 않게 할지라도 혜와는 상응하지 않으니, 다만 무명에 의해 혜를 손탁(損濁)하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이 분별하면 이치상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10)
스스로 분별한 바를 누가 능히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탐이 마음과 다른 것처럼 혜와는 다른 별도의 무명이 존재하니, 이러한 설이 뛰어난 설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번뇌는 모두 무명이다”고 하였다.11)
이것도 역시 앞에서와 동일한 이치로써 비판 부정되어야 할 것이니,
만약 온갖 번뇌가 모두 무명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결(結) 등의 번뇌 중에 [무명을] 별도로 설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고,
또한 역시 ‘견’ 등과도 상응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12)
또한 역시 ‘무명이 마음을 오염시킨다’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13)
만약 그러한 경에서 차별시켜 설하였다고 한다면, 혜를 오염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차별시켜 설해야지] 총명(總名)으로 설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14)
무명은 개별적인 존재[別法]를 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인정하였으니,
[개별적 존재의 본질]
이제 마땅히 이러한 개별적 존재의 본질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존재의 상]
그러한 존재의 상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4]제(諦)와 [3]보(寶)와 업과 그 과보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不了知]’을 말한다.
아직 잘 헤아리지 못하겠으니, 어떠한 법을 일컬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그것은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같이 ‘아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 두 가지에는 다 같이 허물이 있으니, 무명을 논설하면서 설한 바와 같다. 이것(알지 못하는 것)은 이를테면 ‘아는 것’에 반대[對治]되는 개별적 존재이다.
이것도 아직 잘 헤아리지 못하겠으니, 그것의 상은 어떠한 것인가?
이 같은 종류의 존재는 법이(法爾)로서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한다.
예컨대 다른 어떤 곳에서,
“무엇을 일컬어 안(眼)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청정한 색으로서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고 설한 것처럼,
무명도 역시 그러하니, 오로지 그 작용만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15)
대덕(大德) 법구(法救)는 설하기를,
“이러한 무명은 바로 온갖 유정의 시아(恃我, asmīti) 즉 자신을 믿어 으스대는 종류의 존재[類性, myatā]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아만과는 다른 존재인가, 어떤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와 같이 이미 알았고, 이와 같이 이미 보았기에 존재하는 모든 애(愛)와 존재하는 모든 견(見)과, 존재하는 모든 유성(類性)과 모든 아ㆍ아소에 대한 집착과 아만에 대한 집착과 수면을 단변지(斷遍知)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이 적멸(寂滅)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존재는 바로 아만과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16)
그러한 존재[類性]가 바로 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안 것인가?
그 밖의 다른 번뇌라고는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그 밖의 다른 만(慢) 등으로는 설할 수 없는 것인가?17)
만약 여기서 더 이상 자세하게 추구할 경우 말이 번잡해지기 때문에 바야흐로 그만 마치기로 한다.
[명색]
명색(名色)은 무슨 뜻인가?
색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본론 권제1) 분별하였으니, 여기서는 오로지 ‘명(名, nāma)’에 대해서만 분별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名)이란 무색의 4온(蘊)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색(無色)의 4온을 어떠한 까닭에서 ‘명’이라 일컬은 것인가?
설정된 명(名)과 근과 경의 세력에 따라 [소연의] 뜻을 전변시키기(일으키기) 때문에 ‘명’이라고 하였다.18)
무엇을 일러 ‘명’의 세력에 따라 뜻을 전변시킨다고 함인가?
이를테면 [겁초에] 여러 가지 법에 대해 세간에서 함께 그 명칭을 설정함에 따라 그러한 각각의 뜻을 전변시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하니, 예컨대 소ㆍ말ㆍ색ㆍ향 따위의 말과 같다.
이것(무색의 4온)은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명’이라고 일컫게 된 것인가?
[무색의 4온은]
그러한 각각의 경계를 전변시켜(일으켜) [‘명’의] 소연이 되기 때문에,
또한 ‘명’과 유사하기 때문에,
‘명’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이다.19)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네 가지 무색온은 이러한 몸을 버리고 다른 생으로 옮겨 나아가니, 전변하는 것이 ‘명’과 같기 때문에 ‘명’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내게 되었다”고 하였다.20)
[촉]
‘촉(觸)’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촉은 여섯 가지로서,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촉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안촉(眼觸) 내지 의촉(意觸)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다시 무슨 뜻인가?
세 가지의 화합으로 생겨나는 것이니,
말하자면 근(根)ㆍ경(境)ㆍ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촉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앞의] 다섯 촉은 세 가지 화합에 의해 생겨날 수 있으니, 근ㆍ경ㆍ식이 구시(俱時)에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근은 과거이고, 법경은 어떤 경우 미래이기도 하며, 의식은 현재인데,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촉)을 바로 화합이라 이름한 것은 이를테면 그 사이에 인과의 뜻이 성립하기 때문에, 혹은 동일한 결과이기 때문에 화합이라고 일컬을 수 있으니, 이를테면 근ㆍ경ㆍ식 세 가지는 다 같이 촉을 낳는데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여러 논사들의 각혜(覺慧)가 동일하지 않다.21)
어떤 이(경부사)는 설하기를,
“세 가지의 화합을 바로 ‘촉’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즉 그들은 다음의 경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세 가지 법의 취집 화합을 일컬어 촉이라 한다’고 하였다.”22)
그러나 어떤 이(유부 비바사사)는 설하기를,
“마음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나는 개별적인 법을 설하여 촉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들도 다음의 경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다.
“경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육육(六六)의 법문이라고 하는가?
첫 번째는 6내처(內處)이며,
두 번째는 6외처(外處)이며,
세 번째는 6식신(識身)이며,
네 번째는 6촉신(觸身)이며,
다섯 번째는 6수신(受身)이며,
여섯 번째는 6애신(愛身)이다’고 하였다.23)
즉 이 계경 중에서 근ㆍ경ㆍ식 이외에 별도로 6촉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촉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세 가지의 화합을 일컬어 촉이라 한다’고 주장하는 자(경부)는 뒤에 인용한 『육육법경』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수(受)와 애(愛)가 법처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24)
그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애’와 ‘수’와 ‘촉’을 떠나 그 밖의 다른 법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종의에서는 촉을 떠나 별도로 세 가지가 존재하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촉과 세 가지를 차별하여 설할 수 있는 것인가?25)
비록 근과 경이 식을 낳지 않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근과 경에 의탁하지 않고 존재하는 식은 없기 때문에 이미 세 가지를 설하고서 다시 별도로 촉을 설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 되는 것이다.26)
어떤 다른 논사가 [경부를] 구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온갖 안(眼)과 색(色)이 모두 온갖 안식(眼識)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온갖 안식이 모두 온갖 안과 색의 결과인 것도 아니다.
즉 [양자가] 인과관계에 있지 않을 경우에는 별도로 설하여 세 가지라고 하였지만, 인과관계에 놓이게 될 경우에는 총괄하여 촉이라 하였다.”27)
‘세 가지의 화합을 떠나 별도의 촉이 존재한다’고 설한 자(유부)는 앞에서 인용한,
“이와 같이 세 가지 법의 취집 화합을 일컬어 촉이라 한다”는 경문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부파에서 외워 전승하는 경문은 이와 다르다.
혹은 제불(諸佛)의 출현을 즐거움 등이라고 설하는 것처럼, 원인 상에 일시 결과의 명칭을 설한 것일 뿐이다.”28)
이와 같이 논의를 계속 전개하여 서로 힐난하고 해석하면 말이 번잡하고 많아지기 때문에 마땅히 여기서 그만 마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대법자(對法者)는 설하기를,
“촉은 [삼사와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논설한 6촉은 다시 종합되어 두 가지가 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와 상응하는 것은 유대(有對)이며
여섯 번째와 구기하는 것은 증어(增語)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眼) 등의 5촉(觸)을 설하여 유대촉(有對觸)이라 이름하니, 유대의 근(공간적 점유성을 갖는 5근)을 소의로 삼았기 때문이다.
제6 의촉(意觸)을 설하여 증어촉(增語觸)이라고 이름한다.29) 여기서 ‘증어’란 이를테면 명(名)을 말하는데,
‘명’은 바로 의촉이 소연으로 삼는 장경(長境)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따로이 설하여 증어촉이라고 이름한 것이다.30)
이를테면 마치,
“안식은 단지 푸르다는 사실만을 능히 인식할 뿐 ‘푸른 것’[이라는 명 즉 개념]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의식은 푸르다는 사실도 인식할 뿐더러 ‘푸른 것’[이라는 명]도 역시 인식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31)
그래서 [증어촉의 소연을] ‘장경’이라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유대촉의 명칭이 소의에 따라 설정된 것이라면 증어촉의 명칭은 소연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의식은 말을 증상(增上:즉 표준이 되는 근거)으로 삼아 비로소 경계로 전전(展轉)하지만 5식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만을 유독 ‘증어’라고 이름하였으며, 이것과 상응하는 촉을 ‘증어촉’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유대촉이라는 명칭은 소의에 따른 것이라면, 증어촉이라는 명칭은 상응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논설한 6촉은 개별적인 상응관계에 따라 다시 여덟 가지의 종류가 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明)과 무명과 두 가지가 아닌 촉은
무루와 염오와 그 밖의 것과 [상응한 것이고]
애(愛)와 에촉(恚觸)은 그 두 가지와 상응한 것이며
낙(樂) 등의 촉은 3수(受)에 따른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촉은 명ㆍ무명 등과 상응하여 세 가지 종류가 되는데,
첫 번째가 명촉(明觸)이며,
둘째가 무명촉(無明觸)이며,
셋째가 비명비무명촉(非明非無明觸)이다.
이 세 가지는 차례대로 무루와 염오와 그 밖의 것과 상응하는 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밖의 것’이란 이를테면 무루와 아울러 염오를 제외한 나머지, 즉 유루의 선과 무부무기를 말한다.
그리고 무명촉 중의 일부는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다시 애(愛)와 에(恚)의 두 가지 촉을 설정하였으니, 애탐과 진에의 수면(隨眠)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일체의 촉을 모두 다 포섭하여 다시 세 가지 촉이 되는데,
첫 번째는 순락수촉(順樂受觸)이며,
둘째는 순고수촉(順苦受觸)이며,
셋째는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이다.32)
즉 이러한 세 가지 촉은 능히 낙 등의 수(受)를 인기하기 때문에,
혹은 낙 등의 수에 의해 영납(領納)되기 때문에,
혹은 수의 행상(行相)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순수(順受)’라고 이름한 것이다.
어떻게 촉이 수에 의해 영납되고, 그 행상의 근거가 되는 것인가?
수의 행상은 촉의 그것과 지극히 유사할 뿐더러 촉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곧 이와 같은 촉을 모두 합하면 열 여섯 가지의 종류가 된다.33)
[수]
‘수(受)’는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즉 觸)으로부터 6수(受)가 생겨나니,
다섯은 신(身)에 속하고, 나머지는 심(心)에 속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6촉으로부터 6수가 생겨나니, 말하자면 안촉에서 생겨난 수[眼觸所生受] 내지 의촉에서 생겨난 수[意觸所生受]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수’ 중에서 앞의 다섯 가지를 설하여 신수(身受)라고 하는데, 색근(色根)을 소의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의촉에서 생겨난 ‘수’를 설하여 심수(心受)라고 하는데, 단지 마음만을 소의로 삼았기 때문이다.
‘수’는 ‘촉’보다 뒤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구시(俱時, 즉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34)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구시에 생기하니, 촉과 수는 전전 상속하며 서로에 대해 구유인(俱有因)이 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두 가지 법이 구시에 생겨난다면 어떻게 능생(能生)과 소생(所生)이라는 [차별의] 뜻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여 성립하지 않는 것인가?
공능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해 그 밖의 다른 법(즉 능생법)은 어떠한 공능도 갖지 않는 것이다.35)
이것과 입종(立宗,즉 주장명제) 사이에는 의미상 어떠한 차별도 없다.
즉 ‘두 가지 법이 구시에 생겨날 때 능생과 소생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서,
[그 이유로써]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해 그 밖의 다른 법은 공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하였지만,
이것의 의미는 앞의 주장과 같으니, 거듭하여 설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3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낳는 과실을 갖게 될 것이다.37)
인정하였기 때문에 과실이 아니다. 즉 우리(有部)의 종의에서는 이 두 가지(‘촉’과 ‘수’)는 구유인이 되며,
역시 또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결과(즉 사용과)가 된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비록 그렇다고 인정하였을지라도 계경 중에서는 이 두 가지 법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가 된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계경에서는 단지,
‘안촉(眼觸)을 연으로 삼아 안촉소생(眼觸所生)의 수(受)를 낳는다’고 만 설하고 있을 뿐으로,
일찍이 경에서,
‘안수(眼受)를 연으로 하여 안수소생(眼受所生)의 촉(觸)을 낳는다’고 설한 일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뜻(즉 구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능생의 법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어떤 법이 상식적으로 능히 그러한 법을 낳았다고 한다면, 이 법과 그 법이 시간을 달리한다는 것은 상식[極成]으로서,
이를테면 먼저 씨앗이 있고 나서 뒤에 싹이 있으며,
먼저 우유가 있고 나서 뒤에 낙(酪)이 있으며,
먼저 타격이 있고 나서 뒤에 소리가 있으며,
먼저 의근이 있고 나서 뒤에 의식이 있다는 등의 사실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먼저 원인이 있고, 뒤에 결과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식이지만,
상식적으로 동시인과 또한 존재하니,
마치 안식 등은 안ㆍ색과 동시에 존재[俱有]하며,
4대종은 소조색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우리(경부)는] 여기서도 역시 먼저 근과 경이 연이 되고서 능히 뒤에 식을 낳으며, 먼저 대종이 조합 취집하고 나서 뒤의 소조색을 낳는다고 인정하니, 어떠한 이치로 이를 능히 부정할 것인가?
그림자와 싹과 같은 것은 어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38)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39)
“촉이 생겨난 뒤에 비로소 수가 생겨난다.
즉 근과 경이 먼저 있고 나서 다음에 식이 일어나며,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촉’이라 한 것으로,
제3찰나에 이러한 촉을 연으로 하여 수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4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식에는 모두 수가 존재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온갖 식 또한 마땅히 모두 촉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41)
그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선행된 단계의 촉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뒤의 촉의 단계에서 수를 낳게 된다.
따라서 온갖 촉의 순간에는 모두 수가 존재하는 것이다.42)
그리고 존재하는 식으로서 촉을 본질[體]로 하지 않는 것은 없다.43)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떠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인가?
이를테면 혹 어느 때 대상을 달리하는 두 가지 촉이 있을 경우,
‘앞의 수의 단계[前位]의 촉’을 원인으로 삼아 ‘뒤의 촉의 단계[後位]의 수’를 낳는다고 할 때,
어떻게 대상을 달리하는 수가 대상을 달리하는 촉으로부터 낳아질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수가 이러한 마음과 상응한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마음과 함께 동일한 대상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44)
이미 그렇다고 할 경우,
만약 촉을 성립시키는 식은 바로 촉으로서 수를 갖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단계 이전에는 식으로서 수를 갖지만 그 자체 촉은 아니니,
연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4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열 가지 대지법(大地法)을 파괴하는 것이 되니, 그것은 결정코 일체의 마음의 품류와 항상 구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정코 [일체의 마음의 품류와] 항상 구기한다고 하는 사실은 어떠한 교의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인가?
본론(本論,즉 아비달마)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다.46)
우리들은 다만 계경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을 뿐 본론은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으니, 그것(觸ㆍ受俱起說)을 파괴한다 한들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그래서 세존께서도,
“마땅히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47)
혹은 대지법의 뜻이 반드시 온갖 마음에 두루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을 대지법의 뜻이라고 할 것인가?
이를테면 세 가지의 지(地)가 있으니,
첫 번째는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이며, 둘째는 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이며, 셋째는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이다.
다시 세 가지의 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선지(善地)이며, 둘째는 불선지(不善地)이며, 셋째는 무기지(無記地)이다.
다시 세 가지의 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학지(學地)이며, 둘째는 무학지(無學地)이며, 셋째는 비학비무학지(非學非無學地)이다.
만약 어떤 법이 앞의 온갖 지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면 그것을 ‘대지법’이라 이름하며,
만약 어떤 법이 오로지 선지 중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대선지법’이라고 이름하며,
만약 어떤 법이 오로지 염오지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대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한다.
즉 이와 같은 따위의 법은 각기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번갈아가며 생기니, 그것이 다 함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떤 이(經部 上座 室利羅多)의 설은 이상과 같다.
그리고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의 경우는 외워 전승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요즈음 더해진 것이지 본론(本論)에서 외워 전승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48)
만약 ‘촉’이 생겨나고 난 후에 비로소 ‘수’가 생겨난다고 한다면 다음의 경문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안과 색을 연으로 삼아 안식과, 세 가지의 화합인 촉(觸)과, 구기(俱起)하는 수(受)ㆍ상(想)ㆍ사(思)를 낳는다”고 하였다.49)
[경에서는] 다만 ‘구기하는’이라고만 말하였지 ‘촉과 구기하는’이라고는 설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우리(경부)의 종의와 어떻게 어긋나기에 반드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무간(無間)에 대해서도 역시 ‘함께[俱]’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자(慈)와 구행(俱行)하는 염각지(念覺支)를 닦는다”고 설한 것과 같다.50)
따라서 그것은 경증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 중에서,
“이러한 수(受), 이러한 상(想), 이러한 사(思), 이러한 식(識), 이와 같은 제법은 서로 뒤섞이어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였겠는가?51)
그러므로 식은 결코 수 등을 떠나 존재하는 일이 없다.
지금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서로 뒤섞인다[相雜]’고 함은 무슨 뜻인가?
그 경에서는 또한 설하기를,
“온갖 소수(所受)가 바로 소사(所思)이며, 온갖 소사가 바로 소상(所想)이며, 온갖 소상이 바로 소식(所識)이다”고 하였다.
즉 그대는 소연에 근거하여 그와 같이 [서로 뒤섞였다고] 말한 것인지 찰나에 근거하여 그와 같이 말한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구나!
‘목숨[壽]과 체온[煖]이 구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그와 같이 ‘서로 뒤섞인다’는 말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예증으로 볼 때 이 설도 결정코 찰나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계경에서, “세 가지 화합이 촉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식이 있으면서 세 가지가 화합하지 않을 것인가?
혹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같이 세 가지가 화합하더라도 ‘촉’이라 이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식(識)과 구기하는 법은 모두 촉을 가져야 하며,
존재하는 온갖 촉으로서 ‘수’ 등과 구생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결정코 마땅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방론(傍論)을 이미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본의(本義)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18의근행]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러한 심수는 다시 열여덟 가지가 되는데
의근행(意近行)이 다르기 때문이다.52)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간략히 설한 하나의 심수(心受) 중에는 의근행(意近行)의 차이로 말미암아 다시 나누어져 열여덟 가지가 된다.
그리고 게송에서 ‘다시’라고 하는 말은 앞의 논설에 편승하여 이후의 논설을 제기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53)
무엇을 일러 열여덟 가지 의근행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희(喜)ㆍ우(憂)ㆍ사(捨) 각각에 대한 여섯 가지의 근행을 말한다.
이것은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열여덟 가지로 설정된 것인가?
만약 자성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마땅히 오로지 세 가지만 있어야 할 것이니, 희ㆍ우ㆍ사의 세 가지는 각기 자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상응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마땅히 오로지 한 가지만 있어야 할 것이니, 일체의 수는 모두 의근(意根)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소연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마땅히 단지 여섯 가지만이 있어야 할 것이니, 색 등의 6경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이 열여덟 가지가 된 것은 세 가지 모두를 갖추었기 때문이다.54)
여기서 열다섯 가지의 색 등의 근행을 부잡연(不雜緣)이라 이름하는데, 경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가지 법근행은 모두 두 가지(잡연과 부잡연)와 통한다.55)
의근행이란 명칭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희 등이 의근을 근연(近緣)으로 삼아 온갖 경계로 자주 유행(遊行)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 하였다]”고 하였다.56)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희 등이 능히 근연이 되어 의근으로 하여금 경계로 자주 유행하게 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신수(身受)는 의근행이라고 하지 않는 것인가?
오로지 의식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近)’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며,
무분별이기 때문에 역시 ‘행(行)’이라고도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57)
그렇다면 제3정려의 의지(意地)의 낙근(樂根)은 [역시 의식에만 의지하는데] 어찌하여 의근행 중에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초계(初界:즉 욕계)에는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58) 또한 [낙근과] 대응하는 고근에 포섭되는 의근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59)
만약 오로지 의지에 속한 것(즉 의식상응)만이 [의근행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경에서,
“안근이 색을 보고 나서 희수(喜受)에 따르는 색에 대해 ‘희’의 근행을 일으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것인가?
5식신(識身)에 의해 인기된 의지(意地)의 ‘희’ 등의 근행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마치 부정관(不淨觀)은 안식에 의해 인기되지만 이렇게 인기된 부정관은 오로지 의지에 포섭되는 것과 같다.60)
또한 그 경에서는 ‘안근이 색을 보고 나서[已]……(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앞의 물음은] 마땅히 힐난의 물음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비록 [색을] 보지 않았거나 내지는 [촉을] 느끼지 않았다 할지라도 희ㆍ우ㆍ사를 일으킬 경우 이것도 역시 의근행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욕계 중에서는 마땅히 색계의 색 등을 연으로 하여 의근행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색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향ㆍ미ㆍ촉의 경계를 연으로 하는 온갖 의근행을 일으키는 일도 마땅히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색을 보고서……’라는 따위 말은 보다 명료함에 따르는 설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색 등을 보고 나서 소리 등에 대해 희ㆍ우ㆍ사를 일으켰을 경우 그것도 역시 의근행이지만 뒤섞임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같이 설한 것이니, 거기서는 근과 경을 확정하여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색 등은 ‘희’ 등의 3수(受)에서 오로지 능히 한 가지 근행에 따라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 근행에 따라 생겨나는 일이] 있으니, 상속에 근거할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소연에 근거할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61)
온갖 의근행 중의 몇 가지가 욕계계(繫)이며, 욕계 의근행에는 몇 가지 소연이 있는 것인가?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물음도 역시 이와 같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계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여덟 가지이며
색계와 상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두 가지와 세 가지이다.
[색계의] 두 정(定)의 계(繫)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두 가지이고
여덟 가지는 자계(自界)를, 두 가지는 무색계를 소연으로 하며
뒤의 두 정의 계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여섯 가지이고
네 가지는 자계를, 한 가지는 상계를 소연으로 한다.
무색계의 첫 번째 근분(近分)의 계와
색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네 가지이며, 자계는 한 가지를
네 가지 근본지와 [위의] 세 변지(邊地)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경계 한 가지만을 소연으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의근행은 모두 열여덟 가지 모두이며,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의 수도 역시 그러하다.
[몸은 욕계에 있으면서] 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은 오로지 열두 가지로서, 향ㆍ미의 여섯 가지를 제외한 그것이니, 거기에는 그러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62)
무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은 오로지 세 가지만이 있을 수 있으니, 거기에는 색 등의 다섯 가지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63)
욕계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색계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초정려와 제2정려에는 오로지 열두 가지 의근행만이 있으니, 이를테면 여섯 가지 우수(憂受)을 제외한 그것이다.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의근행도 역시 열두 가지가 있다.64)
그리고 향ㆍ미의 네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자계(自界, 즉 색계)를 소연으로 삼으며,
두 가지는 무색계를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65)
제3정려와 제4정려에서는 오로지 여섯 가지의 의근행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사수(捨受)의 그것이다.
그리고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에도 역시 여섯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향ㆍ미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는 자계(즉 색계)의 소연이 되며,
한 가지는 무색계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 색계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무색계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공무변처(空無邊處)의 근분(近分)에는 오로지 네 가지 종류 의근행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사수의 그것이 단지 색ㆍ성ㆍ촉ㆍ법을 소연으로 삼을 뿐이다.66)
그리고 제4정려를 소연으로 삼는 경우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소연이 있다고 인정하는 자에 따라 설한 경우이다.67) 그
러나 만약 그러한 지에서는 오로지 하지를 총괄하여 소연으로 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다만 그것이 뒤섞인 것을 소연[雜緣]으로 하는 법근행 한 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무색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도 오로지 한 가지 뿐이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무색계의] 네 가지 근본지와 위의 세 변지(邊地:식무변처 이상의 3지의 근분)에는 오로지 한 가지 의근행뿐이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다만 자지의 경계만을 소연으로 삼으니,
무색계의 근본지에서는 하지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한 위의 세 변지에서는 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지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뒤(즉 「정품(定品)」,본론 권제28)에서 마땅히 분별할 것이다.68)
이러한 의근행은 무루와도 통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여덟 가지는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의근행으로서 무루와 통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는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고 말한 것인다.
누가 몇 가지의 의근행을 성취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색계 선심을 획득하지 않았다면, 욕계의 일체의 근행과, 초ㆍ제2 정려의 여덟 가지(미ㆍ향을 제외한 네 가지 경계의 喜와 捨)와, 제3ㆍ제4 정려의 네 가지(捨)와, 무색계의 한 가지(法)를 성취하는데, 성취한 상계(上界)의 의근행은 모두 하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으니, 오로지 염오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미 색계의 선심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았다면,69) 욕계의 일체 의근행과 초정려의 열 가지 의근행을 성취하며, 그 밖의 경우는 앞에서와 같다.
즉 이러한 초정려 중에서는 오로지 네 가지의 희(喜)만을 성취하니 그것은 염오하여 하지의 향ㆍ미경을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捨)의 의근행은 여섯 가지를 전부 성취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경우(이미 욕탐을 떠난 경우)에 대해서도 이러한 이치에 따라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0)
만약 색계에 태어났다면 오로지 욕계의 사(捨)의 법근행(法近行) 한 가지 만을 성취할 것이니, 이를테면 바로 통과심(通果心)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71)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온갖 의근행의 뜻은 비바사사(毘婆沙師)에 따라 설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기에 경의 뜻은 이와는 다르다.
왜냐 하면 어떤 이가 이러한 지(地)에서 이미 이염(離染)을 획득하였다면 이러한 경계를 소연으로 삼아 의근행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루의 희ㆍ우ㆍ사의 세 가지는 모두 근행에 포섭되지 않는다.
오로지 잡염(雜染)이 의(意)와 더불어 소연으로 서로를 이끌어 자주자주 행하게 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이 바로 의근행이다.”72)
어떻게 의(意)와 서로를 이끌어 자주자주 행하는 것인가?
혹은 애착[愛]하고 혹은 증오[憎]하고 혹은 사택(思擇)하지 않고 멍청한 것[不擇捨]이다.73) 곧 그것을 대치하기 위해 [경에서는] 6항주(恒住)를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색을 보고 나서 기뻐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며, 마음은 항상 평정[捨]에 머물러 염정지(念正知)를 갖추어라. 내지는 법을 알고 나서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74)
그리고 아라한에게도 세간의 선법을 연으로 하는 ‘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잡염의 희는 아니기 때문에] 이 같은 설(6항주설)은 다만 잡염의 근행을 막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또한 ‘희’ 등의 의근행은 탐기(耽嗜)와 출리(出離)의 소의로서 차별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것을,
“서른 여섯 가지의 사구(師句)가 된다”고 하였는데,75)
즉 이러한 말씀[句]의 차별은 대사(大師)가 설하였기 때문이다.76)
여기서 탐기의 소의란 이를테면 온갖 염오함의 수(受)를 말하며, 출리의 소의란 이를테면 온갖 선(善)의 수를 말한다.
이와 같이 논설한 수(受)의 유지(有支) 중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뜻의 차별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7)
어떠한 까닭에서 그 밖의 나머지 유지(有支)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 밖의 지(支)는 이미 설하였거나 마땅히 설할 것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그 밖의 나머지 유지에 대해서는 이미 설한 것도 있고, 혹은 앞으로 마땅히 설할 것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논설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이 중에서 식지(識支)는 앞(본론 권제1, p.30)에서 이미 ‘식이란 말하자면 각기 요별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의처(意處)로 일컬어진다’는 등으로 논설한 바와 같으며,
6처의 지(支)도 역시 앞(본론 권제1, p.14)에서 이미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정색(淨色)을 이름하여 안(眼) 등의 5근이라고 한다’는 등으로 논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행(行)과 유(有)의 두 가지 지에 대해서는 「업품」에서 마땅히 논설할 것이며,
애(愛)와 취(取)의 두 가지 지에 대해서는 「수면품」에서 마땅히 논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온갖 연기를 간략하게 설정하면 세 가지가 된다고 하였으니(본론 권제9), 이를테면 번뇌와 업과 이숙과의 사(事)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외물(外物)의 비유로써 각기 차별되는 공능을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여기서 번뇌를 설하자면, 그것은
종자와 같고, 또한 용과 같으며
풀의 뿌리나 나무의 줄기와 같고
아울러 겨가 쌀을 싸고 있는 것과 같다.
업은 겨에 싸여 있는 쌀과 같고
약초와 같고 꽃과 같으며
온갖 이숙의 결과인 사(事)는
익은 음식물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어찌하여 이 세 가지를 종자 등과 서로 유사하다고 한 것인가?78)
이를테면 종자로부터 싹과 잎 등이 생겨나는 것처럼, 번뇌로부터 번뇌와 ‘업’과 ‘사’가 생겨난다.
용이 못을 지키면 물이 항상 마르지 않는 것처럼, 번뇌가 업을 지키면 생의 상속은 무궁하다.
풀의 뿌리를 아직 뽑지 않았으면 싹은 베어도 베어도 다시 생겨나는 것처럼, 취(趣)도 멸하고 멸하여도 다시 일어나게 된다.79)
나무의 줄기로부터 빈번히 가지와 꽃과 열매가 생겨나는 것처럼, 온갖 번뇌로부터 ‘혹’과 ‘업’과 ‘사’가 자꾸자꾸 일어난다.
겨가 쌀을 싸고 있어 능히 싹 등을 낳을 수 있지만, 쌀 자체로서는 능히 싹 등을 낳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과 혹의 득(得)이 업을 싸고 있어 능히 다른 생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니, 업 자체로서는 능히 초래하지 못한다.
‘혹’이 종자 따위와 같다고 한 사실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쌀이 겨에 싸여 있어 능히 싹 등을 낳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업도 번뇌에 싸여 있어 능히 이숙을 초래한다.
온갖 약초가 결과로 성숙하는 것을 후변(後邊:병의 최후)이라고 하듯이, 업도 결과를 맺으면 다시 이숙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
꽃은 과실에 대해 그 생기의 직접적인 원인[近因]이 되듯이, 업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능히 이숙의 결과를 낳는다.
‘업’이 쌀 등과 같다고 한 사실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익은 음식물은 마땅히 수용되는 것일 뿐 전생(轉生)하여 또 다른 음식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숙의 결과인 ‘사’도 이미 성숙되었으면 능히 또 다른 생의 이숙을 초래할 수 없다.
만약 온갖 이숙과로서 다시 또 다른 생을 초래한다면, 또 다른 생은 다시 또 다른 생을 초래하게 되어 마땅히 해탈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사’가 음식물과 같다고 한 사실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번뇌’와 ‘업’과 ‘사’는 생(生)에서 생으로 상속하지만,
결코 4유(有)를 벗어나지 않으니, 중(中)ㆍ생(生)ㆍ본(本)ㆍ사유(死有)가 바로 그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본론 권제9, p.408)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염ㆍ불염의 뜻과 3계에서의 존재유무]
여기에서는 마땅히 그것의 염(染)ㆍ불염의 뜻과 3계에서의 존재유무에 대해 간략히 분별해 보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종류의 유(有) 가운데
생유는 오로지 염오성이니
자지(自地)의 번뇌 때문이며
나머지는 3성이고, 무색계에는 3유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4유(有) 가운데 생유는 오로지 염오성일 뿐이다.
어떠한 혹(惑:번뇌)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인가?
자지(自地)의 온갖 혹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지(地)에 태어날 경우 이러한 지의 일체 번뇌는 이러한 지의 생유를 염오하게 한다.
그래서 대법자(對法者)는 모두,
“온갖 번뇌 중에서 결생위(結生位)에서 [생을] 윤택(潤澤)시키는 공능을 갖지 않는 번뇌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결생은 오로지 번뇌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뿐 스스로의 힘으로 현기하는 전(纏)과 구(垢)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80)
그리고 비록 이러한 결생위 중에서는 신심(身心)이 어둡고 저열할지라도 자주 일어났었고, 혹은 [전생을] 근인(近因)으로 하여 현행한 인발력(引發力)으로 말미암아 [근본]번뇌는 현기하[여 생을 윤택시키게 되]는 것이다.81)
그리고 중유의 첫 찰나의 상속 역시 필시 염오성으로서, 생유와 같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생유 이외] 그 밖의 나머지 3유는 각각 3성(性)과 통하니, 이를테면 본유와 사유와 중유(제2찰나 이후)의 세 가지는 각기 선성이기도 하고 염오성이기도 하며 무기성이기도 한 것이다.
나아가 무색계는 중유를 제외한 세 가지의 유(有)만 있을 뿐이니, 무색계 중에는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별도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유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본송 중에서 욕계와 색계[에서의 4유의 존재유무]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거기에 4유가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유정의 연기에 대해 이미 널리 분별하였다.
2) 유정이 4식 중에 머무는 까닭
그렇다면 이와 같은 유정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4유 중에] 머물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는 것이니
단식(段食)은 욕계계이며, 그 본질은 오직 3처(處)로서
색처(色處)는 그것의 본질이 아니니
자신의 근(根)과 해탈에 능히 이익되지 않기 때문이다.
촉(觸)ㆍ사(思)ㆍ식(識)의 세 가지 식(食)은
유루로서, 3계와 통하는 것이며
의성(意成)과 구생(求生)ㆍ식향(食香)ㆍ
중유(中有)ㆍ기(起)는 [중유의 다섯 이름이다.]
앞의 두 가지 식(段ㆍ觸食)은 현세의
소의와 능의(能依)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뒤의 두 가지 식(思ㆍ識食)은 당유(當有)를
각기 순서대로 이끌어내고 일으키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 설하기를,
“세존께서는 어떤 일법을 스스로 깨달았는데, 올바로 깨닫고 올바로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온갖 유정으로서 일체의 식(食)으로 말미암아 머물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82)
어떠한 것을 ‘식(食, āhāra)’이라고 한 것인가?
식(食)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단식(段食)이며,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사식(思食)이며,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단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미세한 것[細]과 거친 것[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미세한 단식이란 중유의 ‘식’을 말하니, 그것은 향(香)을 먹기 때문이다.
또한 천(天)과 겁초(劫初:세계가 이루어지던 태초) 유정의 ‘식’을 말하니, 배설의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며83)
마치 기름이 모래에 스며들듯이 4지(支)에 흩어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혹은 더러움에서 생겨난 미세한 벌레[細汚蟲:이를테면 이나 벼룩 따위]나 어린 아기 등이 먹는 것을 일컬어 미세한 단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거친 단식이다.
이와 같은 단식은 오로지 욕계에만 있는 것으로, 단식에 대한 탐을 떠나야 상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오로지 욕계계이다.84)
향ㆍ미ㆍ촉의 세 가지는 일체가 모두 단식 그 자체이니, 조각으로 나누어야 마시고 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입이나 코로써 이리 저리 나누어 그것을 섭취하는 것이다.
광선이나 그림자, 덥거나 시원함 따위를 어떻게 ‘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이러한 말은 다수에 따라 논한 것이다”고 하였다.85)
또한 비록 씹어 삼켜 먹는 것은 아닐지라도 능히 몸을 유지하게 하는 것도 역시 미세한 ‘식’에 포섭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바르고 씻는 것 따위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색처도 역시 조각으로 나누어야 마시고 삼킬 수 있는데, 어째서 단식이라 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은 자신과 대응하는 근(즉 안근)과 해탈자에게 능히 [섭취되어] 이익 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저 ‘먹는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근과 대종(이를테면 생리조직)에 섭취되어 이익 되게 하고, 그런 후 그 밖의 다른 근이나 대종에도 그러한 이익을 미쳐야 한다.
그러나 색처를 마시거나 삼킬 때에는 자신의 근이나 대종에 대해서도 이익 되게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능히 다른 근이나 대종에까지 미칠 것인가? 즉 그러한 온갖 근의 경계는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86)
그리고 혹 어느 때 색을 보고서 희락(喜樂)이 생겨날 경우, 이는 색을 연으로 하여 촉이 생겨났기 때문에 바로 ‘식(즉 촉식)’이지 색이 아니다.87)
또한 불환자(不還者)나 아라한은 식의 탐욕[食貪]으로부터 해탈하였으므로 비록 여러 가지 지극히 좋은 음식을 보더라도 어떠한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촉식(觸食)이란 이를테면 [근ㆍ경ㆍ식]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난 촉을 말한다.88)
사식(思食)이란 이를테면 의업(意業)을 말한다.89)
식식(識食)이란 이를테면 식온(識蘊)을 말한다.90)
즉 이러한 세 가지는 오로지 유루로서, 3계를 통하여 모두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째서 식(食) 자체는 무루와 통하지 않는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온갖 유(有)를 능히 돕는 것, 이것이 바로 ‘식’의 뜻이다. 그러나 무루는 온갖 유를 소멸하기 위해 닦아서 생겨나는 것[修生]이다.”
또한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바와 같다.
“식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부다(部多)의 유정을 안주(安住)하게 하고, 아울러 생을 구하는 자[求生者]를 도와 이익되게 한다.
그러나 무루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식의 체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부다(bhūta)’라는 말은 이생(已生)의 뜻을 나타내는데, 온갖 취(趣)로서 이미 생겨난 것을 모두 ‘이생’이라고 하는 것이다.91)
다시 ‘생을 구하는 자’라고 설한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이는 중유(中有)를 가리키는 말이니, 불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의 명칭으로서 중유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 번째는 의성(意成, mano-maya)이니,
의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으로, 정혈(精血) 등의 외적인 존재가 인연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구생(求生, saṃbhavaiṣin)이니,
항상 기뻐하며 당래 태어날 곳을 찾아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92)
셋째는 식향신(食香身, gandharva-kāya)이니,
향식(香食)에 힘입어 태어날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중유(中有, antarābhāva)이니,
두 가지 취(趣) 중간에 존재하는 온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起, abhinirvṛtti)라고 이름하니,
당래의 생에 대향하여 잠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으로,93) 계경에서,
“유괴(有壞) 자체가 일어나고 유괴의 세간이 생겨난다”고 설한 바와 같다.94)
즉 여기서 ‘일어난 것[起]’은 말하자면 중유인 것이다.
또한 경에서 설하기를,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어 기(起)의 결(結)을 끊었지만 아직 생(生)의 결을 끊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즉 이 경에서는 널리 4구(句)를 설하였으니, 두 가지 계의 탐을 떠난 여러 상류반(上流般)을 제1구로 삼았으며, 중반열반(中般涅槃)을 제2구로 삼았으며, 여러 아라한을 제3구로 삼았으며, 앞의 여러 행상(行相)을 제외한 나머지를 제4구로 삼았던 것이다.95)
또한 ‘부다(部多)’란 아라한을 말하며, 그 밖의 유애자(有愛者)를 설하여 ‘생을 구하는 자’라고 하였다.96)
몇 가지의 ‘식’이 능히 부다(즉 이미 태어난 본유)로 하여금 안주하게 하고, 몇 가지의 ‘식’이 구생(求生, 즉 중유)의 유정을 도와 이익되게 하는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두 가지 모두가 4식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즉 [단식에 대해] 애탐을 갖는 모든 이[有愛者]도 역시 단식을 소연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으로 인해 자조(資助)되어 후유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니, 세존께서
“4식은 모두 병(病)과 등창과 화살의 뿌리가 되고, 늙음과 죽음의 원인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97)
사식(思食)도 역시 현신(現身)을 안주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98)
다음과 같은 세간에 전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옛날 어떤 한 아비가 있었는데, 때마침 기근을 만나 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자신이 이미 굶주리고 여위어 감당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길을 떠나기 전에] 자루에다 재를 가득 담아 벽에 걸어놓고 두 아들을 위로하여
“이것은 보릿가루를 담은 자루이다”고 말하였더니,
두 아들은 희망을 갖고서 오랜 시간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런데 그 후 어떤 사람이 와서 자루를 열어 보여 주자 아들은 그것이 바로 재인 것을 보고 절망하여 바로 죽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큰 바다에서 많은 상인들이 조난을 당하여 배는 부서지고 음식물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물거품이 쌓인 것을 보고 해안인가 의심하여 그곳에 속히 이르기를 희망하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러 해안이 아닌 것을 알고는 절망하여 바로 죽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에서는 다음의 이야기를 설하고 있다.
“큰 바다에 어떤 큰 중생이 있었는데, 해안 위로 올라가 알을 낳고서는 모래로 파묻어 놓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어미가 만약 항상 생각하면 그 알은 깨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잊어버리게 되면 알은 바로 깨어져 버렸다.”99)
이것은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식(食)’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즉 어찌 다른 이(어미)의 사식(思食)이 능히 자신(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치 상으로 볼 때 마땅히,
‘알이 항상 어미를 생각하면 썩어 문드러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잊어버리는 즉시 목숨을 마치게 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촉의 상태(즉 따뜻하게 품고 있을 때의 촉감)에 있을 때를 생각하여 어미에 대한 기억을 일으키는 것이다.
온갖 유루법이 모두 유(有)를 북돋우어 증장[滋長]시키거늘,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식(食)’으로서 오로지 네 가지만을 설한 것인가?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네 가지를 설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이를테면 앞의 두 가지 ‘식’(단식ㆍ촉식)은 능히 이러한 신체의 소의(所依)와 능의(能依)를 증익하고, 뒤의 두 가지 ‘식’(사식ㆍ식식)은 능히 당유(當有)를 인기하며, 능히 당유를 일으키는 것이다.100)
여기서 ‘소의’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유근신(有根身)으로, 단식이 능히 그것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며, ‘능의’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심ㆍ심소로서, 촉식이 능히 그것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한다.
즉 이와 같은 두 가지 식은 이미 생겨난 존재[已生有, 즉 현재생의 유정]를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는 공능이 가장 수승한 것이다.
또한 ‘당유’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미래의 생유로서, 그러한 당래의 생유를 사식이 능히 인기하며, 사식이 인기하고 나서 업에 의해 훈습(熏習)된 식(識)의 종자(種子)에 따라 후유(後有)가 일어날 수 있다.101)
즉 이와 같은 두 가지 식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未生有]를 인기하는 공능이 가장 수승하다.
그래서 비록 유루법이 모두 유(有)를 북돋우어 증장시킬지라도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오로지 4식만을 설한 것으로,
앞의 두 가지는 이미 생겨난 것을 기르기 때문에 길러준 어머니[養母]와 같고,
뒤의 두 가지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낳아준 어머니[生母]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단(段)은 바로 식(食)인가?
‘단’이면서 ‘식’이 아닌 것도 있으니,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102)
제1구는 이를테면 마시거나 씹는 것을 인연으로 하는 것(즉 ‘단’)이면서 온갖 근과 대종을 손괴(損壞)하는 것이다.
제2구는 이를테면 그 밖의 다른 세 가지 식이다.
제3구는 이를테면 마시거나 씹는 것을 인연으로 하는 것이면서 온갖 근과 대종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제4구는 앞에서 언급한 여러 행상을 제외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촉 등의 식에 대해서도 그것이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4구를 갖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혹 촉 등을 인연으로 하여 온갖 근과 대종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는 것이면서도 ‘식’이 아닌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지(地)를 달리하는 촉 등과 무루의 촉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먹고 나서 먹은 자의 신체를 손상시키는 온갖 것도 역시 ‘식(食)’이라고 이름하니, 처음에는 신체를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즉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식은 능히 두 때에 걸쳐 식의 작용을 행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식’이라 이름하니,
첫 번째는 처음 먹을 때로서 능히 허기짐과 목마름을 해소하는 때이고,
둘째는 소화가 되고 나서 근과 대종을 북돋우는 때이다”고 하였다.
어떤 취(趣), 어떤 생(生)에는 각기 몇 가지의 ‘식’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5취ㆍ4생은 모두 4식을 갖추고 있다.
어떻게 지옥에 단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뜨거운] 쇠구슬이나 끓는 구리쇳물이 어찌 단식이 아니겠는가?
만약 능히 해를 가하는 것임에도 역시 ‘식’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설한 4구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103)
또한 『품류족론』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일러 단식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능히 온갖 근과 대종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식식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104)
그 같은 설은 바야흐로 능히 북돋우어 이익되게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것을 설하여 ‘식’이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에 [앞의 4구와] 어긋나지 않는다.
즉 지옥 중의 뜨거운 쇠구슬 따위는 먹고 나서 능히 손해가 되는 것일지라도 능히 잠시 동안이나마 기갈을 해소하여 ‘식’의 특징[相]을 획득하기 때문에 역시 ‘식’이라 이름한 것이다.
또한 고지옥(孤地獄)의 단식은 인간의 그것과 같기 때문에 5취 중에는 모두 4식이 존재하는 것이다.105)
세존께서 설하신 바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욕탐을 떠난 백 명의 외도선인(仙人)에게 능히 먹을 것을 베푼다 할지라도 섬부림(贍部林, 남섬부주를 말함)의 이생(異生) 한 명에게 능히 먹을 것을 베풀면, 이것의 과보는 그것(전자)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는데,
섬부림 중의 어떤 이생을 말한 것인가?106)
어떤 이는,
“섬부주(贍部洲)에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유복자(有腹者)이다”고 해석하였다.
그의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경에서는] ‘한명에게’라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에서 만약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생에게 먹을 것을 베풀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치상으로 당연히 소수의 욕탐을 떠난 외도선인에게 먹을 것을 베푼 것보다 뛰어날 것인데 ,어찌 기이하게 서로를 비교하여 [이생에게 베푼 것이] 뛰어나다고 찬탄하였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는 바로 깨달음에 가까이 이른[近佛] 보살이다”고 하였다.
이치상으로 볼 때 역시 또한 그렇지 않으니,
그에게 베풀면 구지(俱胝,koṭi,수의 단위로서 천만)의 아라한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난 복덕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여기서의 이생은 바로 이미 순결택분(順決擇分)을 획득한 자이다”고 하였다.107)
이러한 말[名]도 역시 뜻에 맞지 않으니,
일찍이 계경이나 본론(本論, 아비달마)에서 ‘순결택분을 획득하고서 섬부림 중에 머문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로지 그들(비바사사) 스스로가 분별한 것일 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최후신(最後身)의 보살로서 섬부림 중에 머물고 있는 자를 일컬어 바로 그 이생이라고 이름하였다.108)
이러한 설이 이치에 맞으니, 그 때 보살은 욕탐을 떠난 선인과 동등하기 때문에 그들 선인과 서로 비교하여 뛰어나다고 찬탄한 것이다.
비록 보살에게 보시하는 복덕이 수승하고 가이없다 할지라도 앞의 것과 비교하여 바야흐로 백 배가 뛰어나다고 말한 것일 뿐으로, 이치상 필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109)
즉 후에 세존께서 그 이생(즉 최후신의 보살)을 제외하고서 다시 외도와 예류향의 승열(勝劣)을 비교한 일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 때의 이생은 최후신의 보살이 아니라 순결택분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그 이생(즉 순결택분)을 예류향에 대비시켜야 하였을 것이다.
이상 유정의 연기와 머무름에 대해 논설하였다.
3) 목숨을 마침
이제 마땅히 앞(본론 권제5, p.235)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목숨을 다하여 죽을 때 등에 대해 바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 때는 어떠한 식(識)이 현전하며 어떠한 수(受)와 상응하여 사유와 생유가 존재하는 것인가?110)
게송으로 말하겠다.
단선근(斷善根)과 속(續)선근과
이염(離染)과 거기서 물러나는 것과, 죽고 태어나는 것은
오로지 의식 중에서만 그럴 수 있다고 인정되며
사유(死有)와 생유는 오로지 사수(捨受)일 뿐이다.
선정심과 무심에는 두 가지(死와 生)가 있지 않고
두 가지 무기에서 열반에 드는 것이며
서서히 죽을 때[漸死]에는 발과 배꼽과 마음에서
최후의 의식이 소멸하는 것이니,
하계(下界:악취)와 인ㆍ천과 불생(不生)이 그러하며,
말마(末摩)가 끊어지는 것은 수(水) 등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선근을 끊을 때와 선근을 상속할 때,
3계 9지[界地]의 염오함을 떠날 때와 그러한 이염(離染)으로부터 물러날 때,
목숨을 마칠 때와 생을 받을 때,
이러한 여섯 가지 상태 중에서는 법이(法爾)로서 오로지 의식만이 현전한다고 인정할 뿐 다른 것(전5식)은 현전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본송 중에서] 설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는 최초로 결생하는 중유까지도 함께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11)
또한 사유와 생유의 의식은 오로지 사수와 상응할 뿐이라고 인정하니, 사수와 상응하는 마음은 명리(明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밖의 수(고ㆍ낙수)는 명리하여 사유와 생유에 따르지 않는다.112)
또한 이러한 두 때(죽을 때와 태어날 때)는 오로지 산심(散心)으로서 정심(定心)이 아니니, 요컨대 유심의 상태여야 하지 필시 무심의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정심에 있을 때에는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니,
계지(界地)가 다르기 때문이며, 가행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며, 능히 [소의신을] 섭익(攝益)하기 때문이다.113)
그리고 무심(無心)에 있을 때에도 역시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니, 무심의 상태에서는 필시 목숨[命]이 손상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114)
만약 소의신이 장차 변괴(變壞)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결정적으로 소의신에 속한 마음을 다시 일으키고, 그런 후에 비로소 [변괴하여] 목숨을 마치는 것이니, 그 밖의 달리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무심의 상태에 있는 자는 능히 생을 받을 수 없으니,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즉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생을 받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사유(死有)는 3성(性)의 마음과 통할지라도 열반에 드는 것은 오로지 두 가지 무기뿐이다.115)
그리고 만약 욕계에 사수(捨受)와 상응하는 이숙이 있다고 설하는 경우라면 그는,
‘열반에 드는 마음도 역시 위의로와 이숙과의 무기를 갖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만약 욕계에 사수와 상응하는 이숙이 없다고 설하는 경우라면 그는,
‘열반에 드는 마음에는 단지 위의로만 있고 이숙과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오로지 무기심만이 열반에 들 수 있는 것인가?
무기는 세력이 미약하여 마음의 끊어짐에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목숨을 마치는 단계에서 의식은 어떠한 신체부위에서 최후로 소멸하는 것인가?116)
갑작스레 목숨을 마치는 자는 의식과 신근이 문득 함께 소멸한다.117)
그러나 만약 서서히 죽는 자로서 하계와 인(人)과 천(天)으로 가는 이는 각기 순서대로 발과 배꼽과 마음(즉 심장)에서 의식이 소멸한다.
즉 말하자면 악취에 떨어지는 자를 설하여 하계로 가는 이라고 일컬은 것이니, 그러한 이의 의식은 최후로 발에서 소멸한다.
만약 인취로 나아가는 이라면 의식은 배꼽에서 소멸하며,
만약 하늘로 왕생하는 자라면 의식은 마음 즉 심장에서 소멸한다.
그리고 모든 아라한을 설하여 ‘불생(不生)’이라 이름하니, 그들의 최후심 역시 심장에서 소멸한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그들의 의식이 멸하는 곳은 정수리이다”고 하였다.
즉 올바로 목숨을 마칠 때에는 신근은 발 등의 처소에서 소멸하므로 의식도 따라서 그곳에서 소멸하는 것이니, 목숨을 마칠 때가 되면 신근은 점차 소멸하여 발 등의 처소에 이르러 문득 모두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약간의 물을 뜨거운 돌 위에 두게 되면 점차 줄어들고 점차 소실되어 마침내 어떠한 곳에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서서히 목숨을 마치는 자는 목숨을 마칠 때를 당하여 다수의 말마(末摩)가 끊어지는 고수(苦受)에 핍박되는데,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것[別物]을 일컬어 ‘말마’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118)
그렇지만 몸 가운데 별도의 마디[支節]가 있어 그것을 건드리면 바로 죽음에 이르게 되니, 이것을 ‘말마’라고 한다.
즉 만약 수(水)ㆍ화(火)ㆍ풍(風) 중의 어느 하나가 증성하게 되면 [다시 말해 평등하게 인연화합하지 않게 되면]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말마를 건드리게 되고, 이로 인해 극심한 고수가 생겨나 그로부터 머지않아 마침내 목숨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단말마(斷末摩) 즉 ‘말마가 끊어졌다’고 하지만] 이는 이를테면 장작이 잘라지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끊어졌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끊어져 지각이 없는 것과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단’이라고 하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계(地界)는 어떠한 연유에서 말마를 끊지 않는 것인가?
내적인 재앙과 환란[災患]으로서 제4의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내적인 세 가지 재앙과 환란이란 풍(風)ㆍ열(熱)ㆍ담(痰)으로서, 그것들은 각기 [역순으로] 수ㆍ화ㆍ풍이 증가함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119)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것은 외적인 기세간[外器]의 3재(災)와 유사하다”고 하였다.120)
그런데 온갖 천취의 유정[天子]이 장차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는,
먼저 다섯 종류의 소소한 쇠퇴의 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니,121)
첫 번째로는 의복과 장엄구에서 듣기에 좋지 않은 소리가 나는 것이며,
둘째로는 자신의 광명이 갑자기 어둡고 저열해지는 것이며,
셋째로는 목욕할 적에 물방울이 몸에 달라붙는 것이며,
넷째로는 그 전의 본성은 시끄럽게 치달리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경계에만 머무르는 것이며,
다섯째로는 본래의 눈은 고요한 한 곳을 응시하였지만 지금은 자주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 가지의 상이 나타나더라도 결정코 목숨을 마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다섯 가지 커다란 쇠퇴의 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니,
첫 번째로는 옷이 티끌과 먼지에 더럽혀지는 것이며,
둘째로는 꽃다발이 시들고 마르는 것이며,
셋째로는 양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는 것이며,
넷째로는 악취가 몸에 배는 것이며,
다섯째로는 본래의 자리[本座]를 즐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섯 가지의 상이 나타나면 결정코 죽게 되는 것이다.
[3취]
세존께서는 이러한 유정세간이 태어나고, 머무르고, 몰하는 것을 논의하면서 3취(聚)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무엇을 3취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성(正性)과 사성(邪性)과 부정(不定)의 취(聚)는
성자와 무간업을 지은 이와 그 밖의 유정들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즉 첫 번째는 정성정취(正性定聚)이며,
둘째는 사성정취(邪性定聚)이며,
셋째는 부정성취(不定性聚)이다.
무엇을 ‘정성’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탐(貪)을 남김없이 끊고, 진(瞋)을 남김없이 끊고, 치(癡)를 남김없이 끊었으며, 일체의 번뇌를 모두 남김없이 끊은 자, 이를 일컬어 ‘정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定)’이란 이를테면 성자를 말한다.
성자란 이미 무루의 도가 생겨난 이로서, 온갖 악법을 멀리하였기 때문에 성자라고 이름한 것이다.
곧 물러남이 없는 필경(畢竟)의 이계(離繫)의 득(得)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결정코 번뇌를 다하였기 때문에 ‘정정(正定)’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이미 순해탈분(順解脫分)을 획득한 모든 이도 역시 ‘정(定)’으로 열반을 획득하는데, 어째서 ‘정정’이 아닌 것인가?122)
그들은 후에 혹 사정취(邪定聚)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또한 예류자(預流者)의 극칠반유(極七返有) 등과 같지 않아서 열반을 획득하는 때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123)
또한 그들은 아직 능히 사성(邪性)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정’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사성(邪性)’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지옥과 아귀와 방생, 이것을 일컬어 ‘사성’이라 한다.
그리고 ‘정(定)’이란 이를테면 5무간업(無間業)을 말하니, 무간업을 지은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사정(邪定)’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정성정과 사성정 이외의 유정을 부정성(不定性)이라고 이름하니,
그들은 이러한 두 인연(즉 正ㆍ邪)과 관계하여 둘 중 어느 것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정적으로 어느 한 가지에 소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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