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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3권[1]
[우두 화상] 牛頭
4조祖의 법을 이었다. 휘諱는 법융法融이요, 윤주潤州의 연릉延陵 사람이며, 성은 문文씨이다.
4조祖가 쌍봉산雙峯山에 있을 적에 대중에게 말했다.
“내가 이 산에 오기 전 무덕武德 7년 가을에 여산廬山 꼭대기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니, 기주蘄州의 쌍봉산 봉우리에 자줏빛 구름이 마치 일산같이 서리었고, 그 밑에는 흰 기운 여섯 가닥이 가로 퍼져 있었다.”
이때 4조가 5조祖에게 물었다.
“그대는 저 상서祥瑞를 알겠는가?”
5조가 대답했다.
“스님 문하에서 옆으로 한 가닥의 불법이 나타날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4조가 말했다.
“그대는 내 뜻을 잘 알았다. 잘 있어라. 나는 강동江東으로 가리라.”
바로 떠나 우두산牛頭山 유서사幽捿寺에 이르니, 스님이 수백 명 앉았는데 아무도 도기道氣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떤 스님을 보고 물었다.
“대중이 모두 몇이나 되는가? 그리고 그 가운데는 도인이 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스님은 사람을 너무나 얕보시는군요. 출가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도인이 아니겠습니까?”
4조가 물었다.
“그러면 누가 도인인가?”
스님이 대답이 없더니, 이어 말했다.
“산꼭대기에 나융嬾融이라는 이가 있는데, 몸에는 베옷 한 벌만 걸쳤으며, 스님을 보아도 합장도 할 줄 모르는 특이한 사람이니, 선사께서 가 보십시오.”
4조가 암자 앞으로 가서 왔다갔다하면서 말했다.
“선남자善男子야, 심심삼매甚深三昧에만 들어 있지 말라.”
이에 나융이 눈을 뜨니, 4조가 물었다.
“그대의 배움은 구함이 있어서인가, 구함이 없어서인가?”
나융이 대답했다.
“저는 『법화경』에서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게 한다’고 한 말에 의해 도를 닦습니다.”
4조가 말했다.
“연다 함은 누구를 연다는 것이며, 깨닫는다 함은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나융이 대답이 없으니, 4조가 말했다.
“서천西天에서는 28조사께서 부처님의 심인[佛心印]을 전하셨고, 달마達摩 대사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서로 전하여 4조에 이르렀는데, 그대는 모르는가?”
나융이 언뜻 이 말을 듣고 이내 말했다.
“저는 항상 쌍봉산을 바라보고 정례하면서 직접 가서 뵙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중입니다.”
4조가 말했다.
“4조를 알고자 하느냐? 바로 내가 4조니라.”
나융이 벌떡 일어나 발에 머리를 대며 절하고 말했다.
“스님께서 무슨 인연으로 여기까지 왕림하셨습니까?”
4조가 말했다.
“특별히 방문차 왔노라.”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여기 말고 다른 거처가 따로 있는가?”
나융이 손으로 암자 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다른 암자가 더 있습니다.”
그리고는 조사를 인도해서 암자 앞으로 가니, 범과 이리가 암자 앞뒤로 둘러 있었고, 사슴 떼가 사방에 뛰고 있었다.
4조가 두 손으로 두려운 시늉을 하면서,
“으악” 했더니,
나융이 말했다.
“스님에게는 아직 그런 것이 남아 있습니까?”
조사가 물었다.
“아까 무엇을 보았는가?”
나융이 이 말씀에 의해 현묘한 이치를 깨달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조사가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해주었다.
“무릇 백천 가지 묘한 법문은 모두가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의 모래같이 수많은 묘한 공덕은 모두가 마음자리에 있다. 일체 선정과 온갖 지혜가 모두 본래부터 구족하고 신통과 묘한 작용이 모두 그대의 마음에 있다. 번뇌와 업장이 본래부터 비었고, 온갖 과보가본래부터 갖추어 있다. 벗어날 삼계도 없고 구할 보리菩提도 없으며,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非人]의 성품은 같은 것이다.
대도大道는 비고 넓어서 생각과 분별이 끊겼나니, 이러한 법을 그대가 이제 이미 얻어서 더는 모자람이 없으므로, 부처와 다름이 없고, 더 이상 성불할 다른 법 따위는 없다. 그대는 다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재하되 관행觀行도 짓지 말고, 마음을 모으지도 말고, 탐貪ㆍ진瞋ㆍ치癡를 일으키지도 말고, 근심을 품지도 말라.
완전히 텅 비어 걸림이 없고 뜻에 맡겨 자재하니, 온갖 선을 지으려 하지도 말고, 온갖 악을 지으려 하지도 말라. 다니고, 서고, 앉고, 누울 때와 눈에 띄고 만나는 인연이 모두가 부처의 묘한 작용이어서 즐겁고 근심 없는 까닭에 부처라 하느니라.”
나융이 물었다.
“마음에 이미 모두가 구족하다면 어떤 것이 마음이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4조가 대답했다.
“마음이 아니면 마음을 묻지 못할 것이요, 마음을 물으면 마음이 아닌 것이 아니니라.”
또 물었다.
“관행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경계가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대치對治하리까?”
조사가 말했다.
“경계의 반연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좋고 나쁨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에 굳이 이름 짓지 않으면 망정妄情이 어디서 일어나랴?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참마음이 마음껏 두루 알아서 마음을 따라 자유자재할 것이요, 더 이상 처음도 끝도 없으므로 상주법신常住法身은 아무런 변역變易도 없다 하느니라.
내가 나의 스승 승찬僧璨 화상에게서 이 돈오법문頓悟法門을 받았는데 이제 그대에게 전하나니, 그대는 잘 받아 지녀서 나의 도를 실현시켜라. 이 산에서 살기만 하면 뒷날엔 다섯 사람이 그대의 뒤를 이어 끊이지 않게 되리니, 잘 간직하라. 나는 떠나리라.”
이 말씀에 선사(나융)는 옥의 티 같은 번뇌가 갑자기 몽땅 없어지고, 모든 상이 영원히 없어지니, 이로부터는 신령스런 귀신이 공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것으로써 살피건대 여래의 비밀한 뜻이 어찌 닦아 증득함으로써 능히 조사의 뒤를 이어 나란히 하겠으며, 현묘한 문에 어찌 고요함만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말을 여의고 이치에 계합하여 현요玄要에 집중한다는 것도 하늘과 땅[雲泥]의 차이고, 고요한 생각으로 근원으로 돌아가 선추禪樞를 바람도 초楚와 월越과 같이 멀기만 하다.
나융이 다시 여쭈었다.
“무릇 성인은 어떤 법을 끊었으며, 어떤 법을 얻었기에 성인이라 불립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한 법도 끊지 않고 한 법도 얻지 않나니, 이것을 성인이라 하느니라.”
다시 여쭈었다.
“끊지도 않고 얻지도 않으면 범부와 무엇이 다릅니까?”
“다름이 있느니라. 왜냐하면 범부는 모두가 끊어야 할 허망한 계교[妄計]가 있다고 여기고, 얻어야 할 참마음이 있다고 여기지만, 성인은 본래 끊을 것도 없고, 또 얻을 것도 없다고 여기니, 그러므로 다르니라.”
또 여쭈었다.
“어째서 범부는 얻을 것이 있다 하고, 성인은 얻을 것이 없다 하십니까?
얻음과 얻지 않음에 어떠한 차별이 있습니까?”
“차이가 있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범부는 얻을 것이 있으니 허망함이 있고, 성인은 얻을 것이 없으니 허망함이 없다. 허망함이 있으면 차별이 있고, 허망함이 없으면 차별이 없느니라.”
다시 여쭈었다.
“차별이 없다면 성인이란 이름이 어찌하여 생겼습니까?”
조사가 말했다.
“범부와 성인 둘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 거짓 이름에 둘이 없다면 차별이 없는 것이니라. 마치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이라 하는 것과 같으니라.”
또 여쭈었다.
“성인이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 같다면 마땅히 없는 것이리니,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배우게 합니까?”
조사가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은 거북의 털이지 거북까지 없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대는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가?”
나융이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거북은 무엇에 견주었고, 털은 무엇에 견주었습니까?”
조사가 말했다.
“거북은 도에 견주었고, 털은 나[我]에 견주었느니라. 그러므로 성인은 나가 없고 도만 있으며, 범부는 도는 없고 나만 있다. 나에 집착하는 자는 마치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으니라.”
이어 지엄智嚴에게 법을 전하니, 현경現慶 원년元年이었다. 사공司空인 소무선蕭無善이 건초사建初寺로 나오시기를 청했는데, 조사가 사양하다가 못하여 대중에게 말했다.
“지금 떠나면 다시는 이 땅을 밟지 못할 것이니라.”
산문을 지나자마자 짐승들이 슬피 울며 한 달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고, 산골의 못, 개울, 우물에는 자갈과 모래가 솟아서 일시에 메워졌고, 뜰 앞의 오동나무 네 그루가 5월에 번성하더니 하루아침에 모두 말랐다.
조사가 현경 2년 정사丁巳 윤 정월 23일에 건초사에서 입적하니, 춘추는 64세요, 법랍은 41세였다. 27일에 장례를 지냈다. 탑은 금릉金陵 뒤 호수의 계롱산溪籠山에 있으니, 곧 기사산耆闍山이다.
이로부터 우두종의 여섯 가지가 생겼으니,
첫째는 융融 선사요,
둘째는 지암智巖이요,
셋째는 혜방慧方이요,
넷째는 법지法持요,
다섯째는 지위智威요,
여섯째는 혜충惠忠이다.
[학림 화상] 鶴林
우두牛頭 지위智威 선사의 법을 이었다. 선사의 휘諱는 마소馬素인데, 행장行狀을 보지 못해 그 생애의 내용과 시종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시호[諡]는 대율大律 선사요, 탑호塔號는 보항寶航인 것만 전한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아는 것이 곧 모르는 것이요, 의심하는 것이 곧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라.”
이어 선사가 말했다.
“알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의심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스님이 와서 문을 두드리니,
선사가 물었다.
“누구냐?”
대답하였다.
“중입니다.”
선사가 말했다.
“중뿐이 아니라 부처가 왔더라도 만날 일이 없다.”
“어째서 부처님이 오셔도 만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공公이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선경산 화상] 先徑山
학림鶴林의 법을 이었다. 선사의 휘諱는 도흠道欽이며, 대력大歷 때에 대종代宗이 서울로 청해 모셔다가 국일國一 선사라 호를 내렸다.
숙종肅宗 황제가 선사에게 예배하러 왔는데, 선사가 황제가 오는 것을 보고 이내 일어나니,
황제가 물었다.
“대사께서는 짐이 오는 것을 보시고 어째서 일어나십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단월檀越께서는 어찌하여 네 가지 위의威儀 가운데서 빈도貧道만을 보십니까?”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의 물음이 온당하지 못하니라.”
“어찌하여야 온당하겠습니까?”
“내가 죽은 뒤에야 그대에게 말하리라.”
강서江西의 마 대사가 서당西堂으로 하여금 선사에게 묻게 하였다.
“12시 가운데 무엇으로 경계를 삼습니까?”
선사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대가 먼저 돌아가면 편지로써 대사께 올리겠다.”
서당이 말했다.
“지금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대사께 ‘조계曹溪에게 물어야 되겠다’고 말씀드려라.”
[조과 화상] 鳥窠
경산徑山 국일國一 선사의 법을 이었고, 항주杭州에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행장을 보지 못해 그의 생애와 시종을 알 수 없다.
어느 날 시자侍者가 하직을 고하니,
선사가 물었다.
“너는 어디로 가려느냐?”
시자가 대답했다.
“제방으로 불법을 배우러 갑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래? 불법이라면 나에게도 조금은 있느니라.”
시자가 이어서 물었다.
“어떤 것이 여기의 불법입니까?”
선사가 한 토막의 베올을 뽑아서 시자에게 보이니, 곧 깨달았다.
또 백白 사인舍人이 친히 심계心戒를 받았는데, 어느 때 마주 앉았어도 전혀 한마디도 없으매, 사인舍人의 셋째 아우가 이를 보고 시를 지었다.
백두白頭 거사가 선사와 마주 앉으니
바로 그것이 능엄삼매의 때로다.
한 물건도 없지만 온갖 맛 구족한 줄을
항하의 모래 같은 세계에서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까?
백 사인이 물었다.
“하루 12시 동안에 어떻게 수행하여야 도道와 상응相應하리까?”
선사가 대답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사인舍人이 말했다.
“그런 것이야 세 살 먹은 아이라도 알겠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세 살 먹은 아이라도 알기는 쉬우나, 백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매우 어려우니라.”
사인이 이 말씀에 절을 하고 스승으로 섬기고, 찬讚을 하였다.
모습은 야위고 뼈가 앙상하도록 오래 수행했건만
한 벌의 베옷만으로 도의 뜻에 맞도다.
일찍이 띠집 짓고, 푸른 나무에 기대더니
천하에는 조과 선사의 이름이 있음을 아노라.
선사가 백 사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백씨 댁 자손이 아닌가?”
사인이 대답했다.
“예, 성은 백씨이고, 이름은 거이居易입니다.”
“그대 아버지 성이 무엇인고?”
사인이 대답이 없었다.
사인이 서울로 돌아가서 어느 절에 갔다가 스님이 경 읽는 것을 보고 물었다.
“나이가 몇이나 되셨습니까?”
대답하였다.
“85세외다.”
또 물었다.
“경을 외운 지는 몇 해나 됩니까?”
“60년쯤 됩니다.”
이에 사인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매우 이상하다, 매우 이상하다.
아무리 그렇지만 출가한 이에게는 으레 본분의 일[本分事]이 있을 터인데,
어떤 것이 화상和尙의 본분입니까?”
스님이 대답이 없거늘 이로 인해 사인이 시를 읊었다.
빈 문[空門]에 길이 있건만 방향을 몰라서
머리가 희고, 이가 누렇게 되도록 경만 읽고 있도다.
어느 해에 성문의 술을 마시었기에
아직껏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가?이상은 공종空宗이다.
5조 홍인 대사의 방계傍系로 한 가닥이 뻗어 나오니, 신수神秀 화상ㆍ노안老安 국사國師ㆍ도명道明 화상이다. 신수의 문하에서 보적普寂이 나오고, 보적의 문하에서 나찬懶瓚이 나왔다.
[나찬 화상] 懶瓚
남악南岳에 있었으며, 선사에게 다음과 같은 낙도가樂道歌가 있다.
우두커니 일없어 바꾸고 고칠 일 없나니
일없는데 한 토막의 이야기가 어찌 필요하리오.
참마음은 산란散亂함이 없으니
다른 일 끊을 필요가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이루 셀 수 없다.
우두커니 일없이 앉았으니
누가 언제 부른 적이 있던가?
밖을 향해 공부를 찾으려 하나니
모두가 어리석은 무리로다.
양식이란 한 알도 모으지 못하면서
밥을 보면 먹을 줄만은 안다.
세상의 일 많은 사람들은
서로 뒤쫓아도 전혀 따르지 못한다.
나는 하늘에 나기도 좋아하지 않고
복밭도 사랑하지 않는다.
시장하면 밥을 먹고
고단하면 잠을 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지만
지혜로운 이라야 현자를 알 수 있으리.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근본체가 본래 그러하니
가려면 가고
멈추려면 멈춘다.
몸에는 해진 누더기 한 벌 입었고
다리에는 엄마가 만들어 준 바지를 걸쳤다.
말이 많고 또 말이 많은 것은
원래부터 오히려 잘못된 것이니
중생을 건지려 하면
우선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만한 것 없다네.
참 부처를 부질없이 구하지 말라.
참 부처는 볼 수가 없느니라.
묘한 성품과 신령한 마음 바탕에
어찌 닦아서 길들임이 있으랴.
마음은 일없는 마음이요
얼굴은 엄마가 낳아 준 얼굴이다.
겁석劫石은 옮길 수 있으나
그 속의 소식은 고치기 어렵다.
일없음이란 본래 일없음이니
글을 읽을 필요가 무엇 있으랴.
너와 나의 근본을 깎아 버리면
이 안의 소식에 명합冥合하리라.
갖가지로 육신을 힘들게 하는 짓
차라리 숲 속에서 조는 것만 못하니
오뚝이 고개를 들어 높은 해를 보거든
밥을 빌어다가 모조리 먹여 준다.
공부를 가지고 공부를 하면
점점 더 어두워지나니
취하고자 하면 얻지 못하고
취하지 않으면 저절로 통한다.
나에게 한마디 말이 있어
생각과 반연 잊었으니
교묘한 말로도 얻을 수 없고
다만 마음으로만 전해야 한다.
또 한마디 말이 있는데
바로 주는 것만 못하다.
가늘기가 털끝 같아서
본래 일정함이 없다네.
본래 원만히 이루어졌으니
베틀을 쓸 필요가 없다.
세상의 일은 끝없는 것
산과 구릉만 못하니
푸른 잎이 해를 가리고
푸른 시냇물이 끊임없이 흐르거든
등 넝쿨 밑에 누워서
돌덩이로 베개를 삼고
뜬구름으로 휘장을 삼고
초승달로 갈고리를 삼아라.
천자에게 조회하지 않으니,
어찌 왕후王侯를 부러워하며
죽고 삶을 근심하지 않거니
무엇을 더 걱정하리오.
물속의 달이 그림자 없는지라
내 항상 이러할 뿐이요,
만 가지 법이 다 그러한지라
본래부터 태어남이 없도다.
우두커니 일없이 앉으니
봄이 오면 풀이 저절로 푸르러진다.
노안 국사] 老安
5조 홍인弘忍 대사의 법을 잇고, 숭산嵩山에 있었다.
탄연坦然이라는 선사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자기의 뜻은 묻지 않고 남의 뜻만 물어서 무엇 하려는고?”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탄연坦然의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비밀한 작용이 필요하니라.”
“어떤 것이 비밀한 작용입니까?”
이에 선사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니, 탄연이 곧바로 깨달았다.
[등등 화상] 騰騰
안安 국사의 법을 이었다. 선사가 지은 낙도가樂道歌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도를 물으나 도는 닦을 수 없고
법을 물으나 법은 물을 수 없다.
미혹한 사람은 성품의 공함을 모르지만
지혜로운 이는 본래 어김도 순함도 없다.
8만 4천 법문이지만
지극한 이치는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을 필요 없고
말 재주와 총명에도 있지 않다.
자기네 성곽을 알아볼지언정
부질없이 남의 고을 쏘다니지 말라.
언어는 성품의 공함을 여의지 않았고,
광채를 융화함은 먼지와 함께하지 않는다.
번뇌가 곧 보리菩提요
청정한 꽃은 진흙에서 난다.
누군가가 문답하기를 요한다면
누가 그와 토론을 하랴.
달이 크고 작음도 알 수 없고
해와 윤달의 있고 없음도 모른다.
새벽에는 죽으로 배를 채우고
낮에는 다시 한 끼를 때운다.
오늘도 마음대로 자유로이 늦장 부리고
내일도 느릿느릿 자유로이 마음대로 한다.
마음속에 또렷또렷 모두 알건만
다만 어리석은 속박에 빠진 척할 뿐이다.
[파조타 화상] 破竈墮
안安 국사의 법을 이었고, 북방에서 살 때 어떤 선사가 조왕신[竈神]만을 잘 섬겨서 조왕신이 나타나는 감응을 자주 얻으니, 그 지방에서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기를 부처님보다 더하였다.
이때 화상이 그곳에 가서 조왕신에게 설법을 하니, 조왕신이 법을 듣고 곧 하늘에 태어나게 되어 본래의 몸을 나투어 화상에게 하직을 고하러 와서 말했다.
“화상의 지중하신 설법을 듣고 다시금 하늘에 태어나게 되었으므로 일부러 하직을 고하러 왔습니다. 곧 하늘나라로 갑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홀연히 사라지더니 조왕신의 상이 저절로 와르르 무너졌다.
화상은 본래부터 이름이 없이 살았는데, 이로 인해 파조타破竈墮 화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이상은 북종北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