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요경 제8권
6. 염품(念品)
1
즐거운 마음에 근심이 생기고
즐거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니
즐거워할 것이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리.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한 외도 범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본래 자식이 귀해서 아들 하나 만을 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는 밤낮으로 아들만을 생각하여서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고, 옷을 풀어 헤친 채 살을 드러내고 무덤 앞에서 곡을 하며, 아들의 지나다니던 곳과 머무르던 곳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사위성을 나서서 기원정사(祇洹精舍)로 갔다. 그는 부처님께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물으셨다.
“범지여, 그대는 지금 모든 감관이 안정되지 못하고, 마음이 매우 산란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가?”
범지가 말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저를 버려 두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 애를 따라 죽지 못해 구차히 살고 있을 뿐이온데, 어떻게 모든 감관이 안정되겠으며, 마음이 산란하지 않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기르면서 장래에 힘이 될까 바랐지만, 이제 갑자기 저를 버려 두고 죽으니, 고민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 애가 죽은 뒤로는 밤낮 그 애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옷을 풀어 헤친 채 몸을 드러내고 무덤 앞에서 곡을 하며, 그 애가 지나다니던 곳과 머무르던 곳을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렇다, 범지여. 네 말과 같다. 그런 슬픔과 고뇌는 모두 깊은 은혜와 애정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범지가 말했다.
“구담(瞿曇)의 말씀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깊은 은혜와 애정이 다 즐거움을 낳습니다.”
그 범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수긍하지 않았다. 그래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치켜들고 떠났다.
그런데 그는 도박촌을 지나가다가 어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도박을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대개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재주와 지혜가 많고, 고금(古今)의 일에 박식하며 심오한 이치를 펼쳐 보이는 이로서 저 도박꾼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저 구담 사문이 했던 말을 저들에게 말해 보리라.’
그는 곧 그들에게 가서 구담 사문의 말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범지에게 말하였다.
“그렇소. 당신의 말과 같소. 깊은 은혜와 애정이 모여서 다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오.”
범지는 생각하였다.
‘내 생각과 다르지 않다.’
그는 곧 뛸 듯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떠났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문이 널리 퍼져서 바사닉왕에게까지 들렸다.
왕이 말리(末利) 부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혹 저 구담 사문이 이르길,
‘깊은 은혜와 애정이 모여서 다 슬픔과 고뇌가 생긴다.’라고 한 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가?”
부인이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깊은 은혜와 애정이 모여서 다 슬픔과 고뇌가 생기는 것입니다.”
왕은 말하였다.
“그대는 구담의 제자이고 구담은 그대의 스승이니,
‘깊은 은혜와 애정이 모여서 다 슬픔과 고뇌가 생긴다.’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리여, 깊은 은혜와 애정이 모여서 다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다.
기쁜 마음이 자연히 안에서 우러나와 서로 즐기는 것인데, 어찌하여 슬픔과 고뇌가 생긴다고 하는가?”
그때 부인이 다가와 말하였다.
“제 하찮은 말을 들어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들어 주신다면 감히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마음대로 말해 보시오.”
부인이 말하였다.
“어떻습니까? 대왕께서는 과연 저 바기리(婆耆利) 왕녀를 사랑하십니까? 또 저 유리(流離) 대장군을 사랑하십니까? 또 저 우시찰리(禹翅刹利) 부인을 사랑하십니까?”
왕은 말하였다.
“나는 저 바기리 왕녀와 유리 대장군과 우시찰리 부인을 매우 사랑하오. 그들은 잠시도 내 마음을 떠나지 않소.”
“어떻습니까? 대왕이시여, 만일 그들이 죽은 뒤 각기 다음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면 대왕께서는 슬픔과 고뇌에 잠기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들이 죽는다면 내 마음의 슬픔과 고뇌는 말할 수 없을 것이오.”
부인은 다시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저를 사랑하십니까?”
왕은 말하였다.
“나는 그대도 매우 사랑하오.”
“만일 제가 죽어서 이 세상에 있지 않다면 대왕께서는 근심하고 걱정하시겠습니까?”
“그 근심과 걱정은 너무도 간절하여서 잠시도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오. 마음이 산란해져서 혹 미치게 될지도 모르오.”
부인은 말하였다.
“어떻습니까? 대왕께서는 이 가시국(迦尸國)과 구살라국(拘薩羅國)과 그리고 백성들을 사랑하십니까?”
왕이 대답하였다.
“나는 그들을 매우 사랑하오. 왜냐 하면, 내가 오늘날 5락(樂)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다 구살라국의 백성들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오.”
“어떻습니까? 대왕이시여, 만일 이 구살라국 백성들이 다 죽는다면, 대왕께 슬픔과 고뇌가 생기겠습니까?”
“만일 저 백성들이 없어지면 곧 내 몸이 없어지는 것이니, 어떻게 슬픔과 고뇌가 생기지 않겠는가?”
부인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대왕께서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과 원수를 만나는 괴로움을 스스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부처님도 바로 이 이치를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그러자 바사닉왕은 마음이 열리고 뜻을 깨달아서 곧 부인에게 말하였다.
“지금부터 나는 구담 사문의 제자가 되어 구담 사문을 나의 스승으로 삼겠소. 말리여, 나는 지금 멀리서 구담 사문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비구에게 귀의하여서 목숨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살생하지 않겠소.”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에 근심이 생기고 즐거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니, 즐거워할 것이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즐거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니”란 무슨 뜻인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 그를 간호하는 사람은 항상 걱정하면서 그의 병이 낫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또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왕의 심부름을 떠나거나 혹은 보물을 캐기 위해서 바다로 나아갈 때에, 집안 사람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우리집에도 재산이 남아돌아 한평생 살아가기에 넉넉한데, 또 무엇하러 먼길을 떠나 고생하면서 귀한 재물을 얻으려 하십니까? 만일 당신이 떠나신다면 양쪽이 다 망하는 것입니다. 혹 편안하게 길을 떠났다가도 망하게 될 것이니, 길을 떠나게 되면 망하고 집에 있으면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즐거워할 것이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리”란 무슨 뜻인가?
만일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 없으면 능히 욕계의 애욕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욕계의 뿌리는 견고하여 뽑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즐거워할 것이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근심이 있으면 두려움이 있지만 근심이 없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근심이 없어지면 두려움도 없어지니, 5멸(滅)이나 18멸(滅)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즐거운 마음에 근심이 생기고
즐거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니
즐거운 마음이 이미 떠나면
마침내 혼미하지 않게 된다.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에 한 범지가 있었다. 그는 논에 벼를 많이 심고 있었고, 그 외아들은 논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큰 우박이 내려서 벼를 못쓰게 만들었고 또 그 아들까지 죽여 버렸다. 범지는 마음이 몹시 괴로워서 성안을 뛰어다녔고, 벌거벗은 몸에 맨발로 걸으면서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만나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니다가 이윽고 그는 기원정사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범지는 교화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처님께서는 깊이 관찰하셔서 그가 제도될 수 있음을 아시고, 기원정사의 문밖을 모두 논으로 만드신 다음 다시 그의 아들과 같은 사람을 허깨비로 만드셨다. 범지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논과 내 아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데 공연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고생만 하였구나.’
그는 마음이 안정되어 다시는 혼미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앉은 것을 보시고, 여러 부처님께서 언제나 설법하시는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의 4제(諦)를 그를 위해 하나하나 설명하셨다. 그리고 다시 공(空)ㆍ무상(無想)ㆍ무원(無願)의 3삼매를 역(逆)으로 하나하나 분별해 주셔서, 그로 하여금 확연히 크게 깨닫고 번뇌가 없어져 깨끗한 법안(法眼)을 얻게 하셨다.
그는 이미 법을 얻고 성취하였으므로, 허망한 법이 없고 의심하는 법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과 대중 앞에서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말씀드렸다.
“저는 지금부터 비로소 3귀의(歸依)를 하여 부처님과 법과 비구께 귀의하고 목숨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살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이 이미 떠나면, 마침내 혼미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가 정신이 바로 돌아온 것은 다 부처님의 위신력 때문이었으니, 만일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그렇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3
사람들은 근심 걱정 속에 있고
세상의 괴로움은 끝이 없어라.
은혜와 애정을 품기 때문이니
그 생각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으리.
“사람들은 근심 걱정 속에 있고”란 무슨 뜻인가?
중생들은 밤낮으로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서로 마주 보고 울부짖는다. 때로는 본심을 잃고 결국에는 미치게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다 은혜와 애정을 품기 때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근심 걱정 속에 있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의 괴로움은 끝이 없어라”란 무슨 뜻인가?
옷으로 몸을 가리지 못하고 음식으로는 배를 채우지 못하여 얼굴에는 부황기가 있고, 몸에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으며, 친척들은 모두 흩어지고 갖가지 기술은 쓸모가 없어지니, 이런 재앙은 모두 은혜와 애정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갖가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도 다 이 은혜와 애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괴로움은 끝이 없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은혜와 애정을 품기 때문이니”란 무슨 뜻인가?
생사는 아득하고 고통의 근본은 찾을 길이 없지만, 무지한 사람은 그 속에 있으면서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연모하는 것은 단지 한 가지만이 아니다.
혹 부모, 형제, 친척, 벗들을 생각하되,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생각하고, 연모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울부짖는다.
그러므로 “은혜와 애정을 품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생각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으리”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상념을 버리고 연모하는 것이 없으면 곧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즉, 집이 있으면 집을 걱정하고, 재물이 있으면 재물을 걱정하며, 수레와 말이 있으면 수레와 말을 걱정한다. 그러나 집도 재물도 수레도 말도 없으면 다시는 연모할 것이 없다.
상념이 없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른바 애욕을 남김없이 영원히 끊은 사람이다.
애욕을 끊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른바 아나함(阿那含)을 얻어서 두 가지 길을 밟지 않는 사람이다.
곧 애욕을 끊은 사람이란, 상념이 없이 영원히 구경(究竟)에 머무르면서 다시는 욕계(欲界)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다.
범부들은 애욕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5신통(神通)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3유(有)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일 신통을 잃으면 성내는 마음이 왕성하기 때문에 잠깐 사이에 다시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겁이 지난 뒤에라야 본래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그 생각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그러므로 상념을 내지 말라.
상념이란, 바로 죄악의 쌓임이다.
그는 곧 어떠한 속박도 없으므로
상념도 없고 상념하지 않음도 없다.
“그러므로 상념을 내지 말라”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세상에 살게 되면, 상념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애정이 생기고 상념으로 말미암아 변하게 된다. 모든 근심 걱정은 다 상념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상념을 내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상념이란, 바로 죄악의 쌓임이다”란 무슨 뜻인가?
마치 세상의 어떤 미친 사람이 중병을 앓고 있을 때, 그 중병에 다섯 생명을 죽이거나 혹은 1백 생명을 죽여서 치료하게 되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병자는 무수한 죄를 받을 줄은 알지 못한다. 또 어떤 병자는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신에게 제사함으로써 목숨을 구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가령 그 병든 사람을 백 겹으로 된 철롱(鐵籠) 속에 감추어 두고, 그 한 겹 사이마다 지키는 사람을 두어서 서로 지키게 하더라도 사명(司命)이 와서 죽을 사람을 기록하는 것을 못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도 다 은혜와 애정으로 말미암아 이런 재난을 겪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던 친한 벗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에 셀 수 없이 많은 짐승을 죽여서 잔치를 벌이지만, 그것은 다만 재앙의 근본만을 쌓을 뿐이다.
그러므로 “상념이란, 바로 죄악의 쌓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곧 어떠한 속박도 없으므로”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속박이란, 사람에게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신이 무위(無爲)에 이르지 못하니, 경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대개 애욕에 집착하는 마음이 다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연(緣)과 어떤 인(因)으로 말미암아 여러 곳에 태어나는데, 혹 저기서 죽어 여기에 나기도 한다. 또 어떤 인과 어떤 연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얽매임과 속박을 당하기도 한다.
마치 지혜로운 사람과 지혜로운 제자는 화만(華鬘)을 만들 때, 먼저 긴 노끈을 만들어 근본 인(因)으로 삼은 다음 그것에다가 꽃을 꿰는데, 꽃은 연(緣)이 되어 화만이 되는 것과 같다.
애욕에 집착하는 마음이 다하지 않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어떤 연과 어떤 인으로 말미암아 여러 곳에 태어나는데, 혹 저기서 죽어 여기에 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연과 어떤 인으로 말미암아 도의 과(果)를 얻은 사람은 다시는 이러한 속박의 재난을 겪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곧 어떠한 속박도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상념도 없고 상념하지 않음도 없다”란 무슨 뜻인가?
그는 이미 타오르는 번뇌를 여의었기 때문에 상념을 하더라도 은혜와 애정이 없다. 그래서 무위(無爲)의 즐거움이 유희(遊戱)의 제일의 이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념도 없고 상념하지 않음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5
잘 생각하여 방편을 구하되
이치가 아니면 방편의 지혜를 쓰지 말라.
방편의 지혜는 큰 이치를 성취하니
스스로 가장 존귀한 자가 된다.
“잘 생각하여 방편을 구하되”란 무슨 뜻인가?
위없는 지혜를 닦으려고 하면 깊은 이치를 분별하여서 거짓이 없어야 한다. 이 지혜를 성취한 뒤에는 끝내 산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잘 생각하여 방편을 구하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치가 아니면 방편의 지혜를 쓰지 말라”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치가 아닌 것은 이 깊은 이치와 서로 맞지 않으므로 사람을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하고, 선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의 비웃음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면 그것은 장래에 복을 짓는 것이니, 천인(天人)의 사람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방편의 지혜는 현세의 허물을 없애고 내세의 선근을 심는다.
그러므로 “이치가 아니면 방편의 지혜를 쓰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방편의 지혜는 큰 이치를 성취하니”란 무슨 뜻인가?
선지식(善知識)과 사귀어 사람들에게 바른 견해를 가르치고 삿된 업을 따르지 않게 하며, 또 외도의 기이한 도술을 배워 그 이치를 받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큰 이치라는 것은 번뇌가 없는 지혜의 이치이고, 선정의 이치이며, 관(觀)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방편의 지혜는 큰 이치를 성취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스스로 가장 존귀한 자가 된다”란 무슨 뜻인가?
모든 부처님의 계율을 받들어 지니는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다잡아 굳게 하여서 삿된 무리에 들어가지 않으며, 항상 그 계율로써 중생들을 훈계하여서 세 가지 바른 업을 구하게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가장 존귀한 자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6
사랑하는 이와도 만나지 말고
사랑하지 않는 이와도 어울리지 말라.
사랑하는 이와 만나지 못하면 괴롭고
사랑하지 않는 이와 만나면 근심스러우니
그러한 가운데 근심과 슬픔이 생겨서
사람의 근원을 닳게 하여 없앤다.
“사랑하는 이와도 만나지 말고”란 무슨 뜻인가?
옛날 어떤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좋아하여서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닐 때에도 같이 다니고 밥을 먹을 때도 같이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서로 떨어져서 각기 다른 곳에 있게 되었다. 이후에 그들은 서로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 친구가 거듭 사람을 보내어 말하길,
“만일 그대가 오지 않으면, 내 시름은 더욱 더할 것이다.”라고 하며 같이 지내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 친구와 원수지간인 어떤 사람이 이 사람과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사람이 오라고 부르는데 같이 가자.”
원수는 드디어 그 사람과 같이 가게 되었다. 그들은 오랫만에 만나서 매우 기뻤지만 그 원수를 본 친구는 갑자기 몹시 화가 나서 반가워하지도 않으며, 조용한 곳에서 그 친구에게 말하였다.
“왜 나의 원수와 같이 다니느냐? 나는 보기 싫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도 이 사람은 그에 대한 애착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돌아갔다.
그 뒤에 친구는 다시 이 친구가 보고 싶어져서 두번 세번 사람을 보내어 불렀다.
그러나 또 그 친구에게 거듭 말하게 되었다.
“왜 저 사람과 같이 다니느냐?”
그 사람은 대답하였다.
“저 사람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강하여 돌아가서는 그만 그대가 한 말을 잊어버렸네.”
이 사람이 말하였다.
“서로 만나 즐겁게 지내려고 하였지만 다시 나쁜 인연을 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어쩌면 좋은가? 우리 둘이 서로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맞지 않나보다.”
그는 곧 집과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어 도를 닦았다.
또 어떤 사람은 단 하나인 외아들을 나찰(羅刹) 귀신에게 빼앗기고 밤낮으로 근심 걱정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 귀신은 그 어린애를 달랑 들고 귀신이 사는 곳으로 가서 열흘을 지냈다. 그 사이에 그는 아들을 보지 못해서 밤낮으로 걱정하였는데 혼절하였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자 나찰 귀신이 아이를 데리고 그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들을 보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루 종일 안고 귀여워하였는데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일 나찰이 보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 근심 걱정으로 온몸의 털이 일어섰다.
또 열흘이 지나자, 나찰이 다시 어린애를 데리고 귀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는 또 아들 생각을 잠깐도 버리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풀이하는 동안에 그는 그만 마음의 병을 얻고 말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인생의 근심과 고통은 끝이 없으니, 당장 집을 버리고 도를 닦자.’
그는 곧 출가하여 도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제도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방편의 지혜를 나타내고 무위(無爲)에 안락하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사랑하는 이와도 만나지 말고
사랑하지 않는 이와도 어울리지 말라.
사랑하는 이와 만나지 못하면 괴롭고
사랑하지 않는 이와 만나면 근심스러우니
그러한 가운데 근심과 슬픔이 생겨서
사람의 근원을 닳게 하여 없앤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은혜와 애정도 품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은혜와 애정이 아닌 것을 가까이하겠는가?”
그때에 그들 두 비구는 가만히 생각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근신하여 위없는 범행을 닦아야겠다. ’
그래서 그들은 낮에는 걸어다니고 밤에는 좌선을 하였는데, 열흘이 채 되지 않아서 도의 자취를 얻게 되었다. 몸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눈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등 6신통이 맑게 트여서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
또한 부처님의 법을 되풀이하여 생각하다가,
‘아아, 은혜와 사랑은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된다.’라고 깨달았으며,
모든 번뇌가 없어져서 아라한의 과(果)를 얻었다.
훌륭하도다. 복의 과보는 형체를 따르는 그림자와 같고, 복된 업의 은근한 과보는 옷을 적시는 기름과 같으니, 몸은 비록 죽어 없어지더라도 그 죄와 복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7
사랑하는 이와는 다음 생에도 이어지니
그 많은 벗들과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긴 밤을 근심하고 걱정하니
사랑하는 이를 떠나는 것은 매우 괴롭다.
“사랑하는 이와는 다음 생에도 이어지니”란 무슨 뜻인가?
부모, 형제, 자매, 안팎의 친ㆍ인척들과 안면이 있는 남녀노소들은 지금의 생에서 다음 생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유전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와는 다음 생에도 이어지니, 그 많은 벗들과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긴 밤을 근심하고 걱정하니”란 무슨 뜻인가?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쑥대머리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치며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긴 밤을 근심하고 걱정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떠나는 것은 매우 괴롭다”란 무슨 뜻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미 떠나보내거나, 다른 지방에 살게 되거나, 목숨을 마치게 되거나,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와 떠나는 것은 매우 괴롭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색(色)과 뛰어난 용모에 애착하여
천인의 몸을 받고 천상에 살더라도
즐거움이 다하면 해가 닥치니
염라왕의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된다.
“색과 뛰어난 용모에 애착하여”란 무슨 뜻인가?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저 허공 세계에 환락(歡樂)이라는 천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한데 어울려서 풍악을 울리며 종일 즐겨도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환락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그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마친 후에는 이 세상에 나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희소(喜笑)라는 천인들이 있었다. 그들도 서로 한 곳에서 어울리며 종일토록 소리를 높여 크게 웃고 놀면서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웃음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그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마친 후에는 이 세상에 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색(色)과 뛰어난 용모에 애착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천인의 몸을 받고 천상에 살더라도”란 무슨 뜻인가?
밤낮으로 즐겁게 웃으면서 죽음이 닥쳐 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다함이 없는 하늘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즐거움이 다하면 해가 닥치니”란 무슨 뜻인가?
그들은 풍악을 울리며 환호하지만, 그것은 바로 괴로움의 근본으로서 모두 버려야 할 것들이다. 수명은 오래 보존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곧 염라왕의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된다.
그래서 그 생김새에 따라 구별한 다음 죄와 복을 헤아리고 선과 악을 분별하여서 중죄를 지은 경우는 확탕(鑊湯)으로 보내고 가벼운 죄를 지은 경우는 격자(鬲子)로 보내는데, 그의 공명정대함은 물과 같고 고르기는 평미레[槪]와 같다.
그러므로 “염라왕의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9
만일 사람이 밤낮으로
색(色)에 애착하는 마음을 없애고
그 깊은 뿌리를 스스로 파내면
어떻게 죽음의 길을 넘지 못하겠는가?
“만일 사람이 밤낮으로”란 무슨 뜻인가?
그 뜻을 오로지 한가지로 하여 욕계의 애욕을 남김없이 영원히 끊되, 낮에는 선정에 힘쓰고 밤에는 경전을 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밤낮으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색(色)에 애착하는 마음을 없애고”란 무슨 뜻인가?
애욕을 영원히 끊고 유(有)를 넘어 무(無)에 이르러 다시는 성내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色)에 애착하는 마음을 없애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깊은 뿌리를 스스로 파내면”이란 무슨 뜻인가?
혹 어떤 때는 상념의 뿌리를 파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애욕의 뿌리를 파내기도 하며, 혈육을 그리워하는 속박의 뿌리를 파내기도 하고, 갑옷을 입고 지혜의 삽을 들고서 3독(毒)의 뿌리를 파내어 다시는 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깊은 뿌리를 스스로 파내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떻게 죽음의 길을 넘지 못하겠는가”란 무슨 뜻인가?
농사나 재산이나 7보에 애착하는 것은 다 죽음의 길이다. 또한 마음으로 그것을 연모하고 집착하여 조금도 버리지 못하면, 이것 역시 죽음의 길이다.
그러므로 방편을 구하여 죽음의 길을 넘어서 죽지 않는 곳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죽음의 길을 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이라 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스럽지 않다고 하며
괴로운 생각을 즐겁다고 하면
그것은 방일이 시킨 것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이라 하고”란 무슨 뜻인가?
좋은 것[善者]이란 무엇인가?
마음으로 탐하고 즐기되, 온종일 즐기더라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힐난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온갖 선을 버리고 멀리 떠나게 되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의 힐난을 받고, 지혜로운 사람의 버림을 당하며,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이라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스럽지 않다고 하며”란 무슨 뜻인가?
사랑스러운 것[愛者]이란 무엇인가?
속임도 없고 거짓도 없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서, 뜻한 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애련(哀戀)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스럽지 않다고 하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괴로운 생각을 즐겁다고 하면”이란 무슨 뜻인가?
즐거움[樂者]이란 무엇인가?
온몸의 모든 감관이 아주 고요하여 산란하지 않은 것이며, 그 뜻이 편하고 부드러워서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또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괴로움을 가지게 하고, 처음에는 기뻤다가 뒤에는 근심하게 한다.
그러므로 “괴로운 생각을 즐겁다고 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방일이 시킨 것이다”란 무슨 뜻인가?
방일한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일정하지 않아서 친척들과 서로 어울려 즐기면서도 기쁜 마음이나 성난 마음을 제멋대로 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방일이 시킨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1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악한 사람과 같이 지내지 말라.
이것은 진실로 얻기 어려우니
쾌락은 죄악의 근본이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면”이란 무슨 뜻인가?
자기 몸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 이 사랑에 의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목숨도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면”이라고 말한 것이다.
“악한 사람과 같이 지내지 말라”란 무슨 뜻인가?
이 세상에는 온갖 두려움이 많다. 만약 악한 사람과 같이 지내면 마침내 중죄를 쌓게 되지만, 악한 사람과 같이 지내지 않으면 신(身)ㆍ구(口)ㆍ의(意)의 행이 항상 청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과 같이 지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얻기 어려우니”란 무슨 뜻인가?
선의 근본을 닦지 않고 모든 중생들을 가르치지 않으며, 다만 감관의 문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널리 교화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실로 얻기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쾌락은 죄악의 근본이 된다”란 무슨 뜻인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쾌락이 없는 것이니,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선하지 않은 근본을 닦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쾌락은 죄악의 근본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를 잘 보호해야 한다.
마치 국경의 성을 지킬 때
해자[塹]를 깊이 파야 튼튼한 것처럼.
세 가지 일을 잊지 않도록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면”이란 무슨 뜻인가?
마치 국경의 성을 언제나 잘 지켜야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그와 같이 하여야 한다. 혹은 외적이 국경을 침범해 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혹은 자기 부하가 몰래 반역을 꾀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혹은 자기 쪽 사람이 외적과 내통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마음의 성(城)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세 가지 일을 항상 지켜야 한다. 바깥에서 번뇌의 적이 마음의 경계 안으로 쳐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혹은 심소(心所)의 법이 바깥 경계와 동화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야 한다. 또한 마음으로 생각하여 헤아리지 않으면 마음의 성은 위험해질 것이니, 지키기도 어렵고 보호하기도 어려워서 온갖 두려움이 많을 것이다. 국경의 성을 튼튼하게 지키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마음의 성도 그와 같아서 튼튼히 지키고 단속하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를 잘 보호해야 한다.
마치 국경의 성을 지킬 때
해자를 깊이 파야 튼튼한 것처럼.
세 가지 일을 잊지 않도록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 알아야 한다.
13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모든 감관을 잘 단속하여야 한다.
마치 국경의 성을 지킬 때에
안팎을 모두 튼튼히 하는 것처럼.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국경의 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일곱 가지 일을 하고, 네 가지 음식이 충실하면, 쉽게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풍족하게 지낼 것이다. 그래서 외적이 쳐들어오려고 하여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자기쪽 사람이 외적과 내통하는 것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국경의 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일곱 가지 일을 하고’란 어떤 것인가?
국경을 녹각(鹿角)의 울타리로 튼튼히 막아서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첫 번째 일로서 외적이 부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밖에 깊고 넓은 해자를 파서 교묘하게 위장하는 것이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두 번째 일로서 외적이 부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에서 적을 무찌를 계획을 세운 다음 싸움을 기다리는 것이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세 번째 일로서 외적이 부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에 궁노(弓弩)ㆍ기관(機關)ㆍ비륜(飛輪)ㆍ수도(水道)ㆍ융철(融鐵)ㆍ뇌석(雷石)ㆍ과모(戈矛)ㆍ이삭(利矟) 등의 무기를 충분히 갖추되, 한편으로는 퇴로를 마련하는 것이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네 번째 일로서 외적이 부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에 사방으로 네 종류의 군사, 즉 코끼리, 말, 수레, 보병을 배치하고, 외적과 서로 내통하는 자기쪽 사람을 없애는 것이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다섯 번째 일로서 외적이 부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문에 보초를 세워서 새벽과 밤의 때를 알리는 호령을 하게 하여 곧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아는 사람만을 들이고 모르는 사람은 들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여섯 번째의 일로서 외적이 부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을 높고 험하게 한 다음 안팎을 편편하게 깎아서 자기 쪽 사람이 외적과 서로 내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일곱 번째의 일로서 외적이 부술 수 없는 것이다.
‘국경의 성안에 네 가지 음식이 풍족하면 외적이 쳐들어 올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국경의 성에 섶나무와 물이 많으면 외적과 서로 내통하는 자기쪽 사람을 없앨 수 있으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첫 번째 음식으로서 외적이 그 틈을 엿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에 미곡이 풍족하여 창고가 가득 차면 외적과 서로 내통하는 자기쪽 사람을 없앨 수 있으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두 번째 음식으로서, 외적이 그 틈을 엿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에 벼와 보리와 콩이 많으면 외적과 서로 내통하는 자기쪽 사람을 없앨 수 있으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세 번째 음식으로서 외적이 그 틈을 엿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국경의 성에 익힌 음식, 즉 소(酥), 기름, 생선포, 마른 고기 등이 풍족하면, 외적과 내통하는 자기쪽 사람을 없앨 수 있으니, 이것이 국경의 성을 지키는 네 번째 음식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안팎이 튼튼하면
간사한 도적들이
그 틈을 엿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치 국경의 성을 지킬 때에 안팎을 모두 튼튼히 하는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언제나 뜻을 한가지로 하여서 안의 색상(色想)을 없애고 밖의 색(色)을 없애며, 밖의 색상을 없애고 안의 색을 없애며, 안팎의 색상을 없애고 안팎의 색을 없애야 한다.
14
부디 스스로 잘 지켜 보호하라.
때로는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때가 지나가면 근심이 생겨서
마침내 지옥에 떨어지리라.
“부디 스스로 잘 지켜 보호하라”란 무슨 뜻인가?
마음을 다잡아서 어지럽지 않고 모든 감관이 지극히 고요하며, 눈으로는 생사와 재해의 왕성함을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선법을 닦고, 청량한 무위(無爲)열반의 성(城)을 알고는 더럽고 탁한 마음의 번뇌를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디 스스로 잘 지켜 보호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로는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란 무슨 뜻인가?
억천만겁이 지나야 비로소 좋은 때를 한 번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때를 만나더라도 부처님께서 먼저 나시거나 뒤에 나시기도 한다.
혹은 한가운데에 있는 나라[中國]에 태어나서 현성들을 만나고 모든 감관이 원만한 것은 전생에 공덕을 심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지금 부처님 세상을 만났으니, 이것은 전생의 인연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자유로이 속박을 끊고 차례를 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번뇌를 없애고 번뇌가 없는 행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가 지나가면 근심이 생겨서”란 무슨 뜻인가?
무수한 겁 동안 선을 쌓아서 좋은 때를 만나더라도 그 좋은 때가 지나가게 되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간에 왕을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없는 여덟 가지 경우와 같은 것이다.
그 여덟 가지란 어떤 경우인가?
첫째는 왕이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만날 수 없고,
둘째는 왕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만날 수 없으며,
셋째는 왕이 먹지 못해 굶주려 있을 때에는 만날 수 없고,
넷째는 왕이 궁전의 깊숙한 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는 만날 수 없으며,
다섯째는 왕이 창고에 들어갔거나 다른 나라를 칠 때에는 만날 수 없고,
여섯째는 왕이 대신들과 회의할 때에는 만날 수 없으며,
일곱째는 어떤 사람이 음모한 일을 어떤 이가 왕에게 고해 바칠 때에는 만날 수 없고,
여덟째는 왕이 홀로 앉아서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는 만날 수 없다.
세속의 이런 여덟 가지 경우에는 사람과 만나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왕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내법(內法)도 이와 같아서 여덟 가지 나쁜 경우에는 선심(善心)을 일으킬 수 없다.
그 여덟 가지란 어떤 경우인가?
첫째는 친족이 죽어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선심을 일으킬 수 없다.
둘째는 여덟 가지 지옥과 열여섯 가지 작은 지옥에서 도산(刀山), 검수(劍樹), 화거(火車), 노회(爐灰) 등의 온갖 고통을 받고 몸과 마음이 탈 때에는 선심으로 도를 생각할 수 없다.
셋째는 배는 태산과 같아서 높이와 너비가 수십 유연(由延)이 되고, 목은 가는 바늘과 같아서 길이가 수십 길[丈], 1치[寸], 천 격(鬲)이 되는 아귀로 있을 때에는 생각이 거칠고 음식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가운데에서는 선심으로 도를 생각할 수 없다.
넷째는 혹 여섯 하늘[六天]에 남자로 태어나게 되면, 백억의 장엄물로 장엄한 옷을 입고 단이슬을 먹으며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있게 된다. 그러나 동쪽을 보면 서쪽을 잊어버리고 오른쪽을 보면 왼쪽을 잊어버리니, 빠르게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세는 것과 같아서 그 끝이 없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는 선심으로 도를 생각할 수 없다.
다섯째는 변방의 족속으로 태어나게 되어서 부처님과 법과 스님이 없기 때문에 3법(法)에 대해 들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지도 진실하지도 못하고, 독실한 믿음이 없으며, 나면서부터 삿된 소견을 지니게 된다. 혹 장수천(長壽天)에 나더라도 이러한 가운데서는 선심으로 도를 생각할 수 없다.
여섯째는 한가운데에 있는 나라에 태어나더라도 손발을 갖추지 못하고 여섯 가지 감관이 완전하지 못하여서 혹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벙어리가 되면, 이러한 가운데에서는 선심으로 도를 생각할 수 없다.
일곱째는 혹은 부처님의 뒤에 태어나서 5무간(無間)지옥에 나게 되면 이러한 가운데에서는 선심으로 도를 생각할 수 없다.
여덟째는 혹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더라도 삿된 소견을 지닌 집안에 살면서 삼보를 믿지 않고 전도된 소견과 어울리면, 이러한 가운데에서는 선심으로 도를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이른바 8불한처(不閑處)이니, 선은 악과 짝하지 않고 악은 선과 짝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나와서 여래(如來)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의 10호(號)를 두루 갖추었고, 도의 이치를 연설하였다. 그것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모두 좋은 것이니, 오직 열반을 목적으로 제도되지 못한 중생들을 제도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지나가면 근심이 생겨서 마침내 지옥에 떨어지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5
두루 시방세계를 찾아보아서
중생들의 마음을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이러한 무리들도 있다.
자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고
자신의 목숨으로써 남을 깨우치니
그는 남을 해치지 않는 자이다.
“두루 시방세계를 찾아보아서”란 무슨 뜻인가?
마음으로 시방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중생이라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는 생각이 없겠는가?
또 어떤 중생이라서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고 괴로움을 근심하지 않겠는가?
또 어떤 중생이라서 온갖 행을 갖추어 스스로 즐기겠는가?’
그러므로 “두루 시방세계를 찾아보아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을 관찰해 보면”이란 무슨 뜻인가?
항상 마음으로 행업(行業)의 근본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행업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관(淨觀)이고,
둘째는 부정관(不淨觀)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정관을 행하고, 지혜롭지 않은 사람은 부정관을 행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마음을 관찰해 보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기에는 이러한 무리들도 있다”란 무슨 뜻인가?
크거나 작거나 굽었거나 추하거나 각기의 성질이 있지만, 이들 무리는 서로 자신의 몸을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없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이러한 무리들도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고”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한번 몸을 받으면 4대(大)가 모두 서로 같고 목숨도 한가지여서 높고 낮음이 없다. 그래서 저 목숨이나 이 목숨이나 결국에는 다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고, 자신의 목숨으로써 남을 깨우치니 그는 남을 해치지 않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6
모두들 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매맞는 고통을 겁내지 않는 이 없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을 생각하여서
남을 죽이거나 때리지 말라.
“모두들 다 죽음을 두려워하고”란 무슨 뜻인가?
5도(道)의 중생들은 4류(流)를 떠돌아다니지만, 그들은 다 고초를 겪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기 몸을 보호하려고 하는 사람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미친 사람들은 함부로 죄업을 지으니, 칼이나 몽둥이로 서로를 해친다. 그들은 장난으로 웃으면서 죄를 짓지만, 울부짖으며 받는 고통으로 인해 원한을 품게 되니, 그 재앙은 친척에까지 미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재앙이 자라기 전에 그것을 끊고 무형(無形)의 복을 짓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들 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매맞는 고통을 겁내지 않는 이 없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을 생각하여서
남을 죽이거나 때리지 말라.
대개 살생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수명이 짧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살생을 피해야 한다.
17
어떤 사람이 멀리 떠나 있다가
성공하여 돌아오니
친척들도 모두 다 편안하고
그의 귀향을 기뻐한다.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에 사위성 안에는 종경(鐘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친척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나 그는 매우 가난하여 재산이 없었으므로, 옷으로 몸을 가리지 못하였고, 음식으로 배를 채우지 못하였다. 그래서 친척들도 그를 보면 모두 머리를 돌리고 지나갔다.
종경은 생각하였다.
‘나는 전생에 복이 적었고 또 태어나서도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 내가 빈곤한 줄 알기 때문에 친척들마저 멀리하고 박대한다.
밖에 나가서는 남의 웃음을 사고,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와 아이들의 원망을 듣는다. 차라리 이 나라를 떠나서 다른 지방으로 가자.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매였거늘, 그 나머지 일이야 알 것이 있겠는가? 차라리 다른 나라에 가서 죽을지언정, 여기서 살기를 구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종경은 곧 자기 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나그네로 부지런히 품을 팔아 살아가면서도, 찢어지게 가난하여 친척들에게 박대받은 것을 생각하고는, 밤낮으로 더욱 부지런히 힘써서 잠깐도 쉬지 않았다. 그래서 차츰 헤아릴 수 없는 재물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는 금ㆍ은ㆍ진보(珍寶)ㆍ차거(車渠)ㆍ마노(瑪瑙)ㆍ산호(珊瑚)ㆍ호박(虎珀) 등의 보물을 낙타ㆍ나귀ㆍ노새 및 수레에다 싣고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친척들은 종경이 많은 보물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그는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수염은 길게 자랐으며, 옷은 때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그가 재물을 지고 걸어오자, 친척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종경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종경은 대답하였다.
“바로 이 뒤에 있는데 지금 곧 도착할 것입니다.”
친척들은 거기서 기다리가다 다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물었다.
“종경은 어디에 있느냐?”
뒷사람이 대답하였다.
“종경은 맨 앞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종경은 보이지 않았다. 종경은, 종경이 뒤에 있다고 말하고, 뒤의 사람은 앞에 있다고 하여서 마침내 집에까지 다 갔지만 그들은 종경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친척들은 종경의 종을 붙들고 물었다. 종이 종경을 가리키자, 그때서야 친척들이 종경을 알아보고 말하였다.
“너와 떨어져 지낸 지 오래되어서 알아보지 못하였다. 사람은 그 사람인데, 어찌하여 그처럼 모습이 변하였는가? 지금 우리는 일부러 너를 맞이하러 나왔는데, 왜 우리들을 속여서 뒤에 있다고 하였느냐?”
종경은 대답하였다.
“나는 종경이 아닙니다. 저 뒤쪽의 수레에 실린 보물이 종경입니다. 내가 전날 빈곤할 때에 친척들은 나를 업신여겨서 나를 보기만 하면 머리를 돌리고 지나갔습니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지금에서야 이 종경을 찾습니까?”
친척들은 대답하였다.
“우리가 지금 너를 맞이하는 것은 네가 어떻게 하여 이런 재물을 얻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전처럼 친척이 많지 않지만, 그것을 다 나눌 필요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성 밖으로 나가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누었다. 종경은 곧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성안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는 친척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러 갔다. 그가 부처님을 뵌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예배하고 문안하러 가려 하자, 친척들이 말하였다.
“우리도 같이 따라가고 싶네.”
그래서 그들은 일행이 되어 부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보시고 곧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어떤 사람이 멀리 떠나 있다가
성공하여 돌아오니
친척들도 모두 다 편안하고
그의 귀향을 기뻐한다.
그때에 종경과 친척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들은 선심(善心)이 생겨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꿇어앉은 다음 부처님과 스님들을 집으로 청하여 공양하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없이 그 청을 받으셨다.
이튿날 공양할 때가 되자, 부처님께서는 가사를 두르고 발우를 지니신 채, 스님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여 종경의 집으로 가셨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 앉자, 종경은 직접 음식을 차리고 맛있는 음식을 돌렸다. 공양을 마치자 그는 물을 돌리고, 조그만 자리를 가지고 와서 부처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축원을 받았는데,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복 짓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 이르고
지은 그 복을 자기가 받으니
친한 이가 왔을 때 기쁜 것과 같다.
일어나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며
선하지 않은 일을 막아야 할 것이다.
도를 가까이하는 사람과 벗하고
도를 떠난 사람과는 친하지 말라.
도를 가까이하고, 가까이하지 않는 이들
그들의 가는 곳은 제각기 다르니
도를 가까이하면 천상에 올라가고
가까이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때에 종경과 친척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뜻이 트여서 바로 그 자리에서 지극한 믿음의 법을 얻었다.
18
법을 좋아하여 계율을 성취하고
지성과 믿음으로 즐겁게 익히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남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법을 좋아하여 계율을 성취하고”란 무슨 뜻인가?
중생들이 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온갖 선법을 닦는 것이다.
‘계율의 성취’란 무슨 뜻인가?
어떤 중생이 계율을 받들어 지니되,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면, 그는 이 계율을 지닌 복으로 말미암아 다시 범천(梵天)에 태어나서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계율을 훼손하는 것이지, 계율을 받드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늘의 복을 더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혹 어떤 사람이 계율을 받들어 지니되,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면, 그 계율을 지닌 복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나기를 구하지 않더라도 범천이나 제석천이 될 것이다.
또한 마왕(魔王)이나 전륜왕(轉輪王)이 되기를 구하지 않더라도 네 천하를 맡아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계율을 지닌 복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등정각을 구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계율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법을 좋아하여 계율을 성취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성과 믿음으로 즐겁게 익히며”란 무슨 뜻인가?
믿음을 굳건히 지니고 항상 좋아하여 익히면,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또 어지러운 생각도 없다. 하나하나를 돈독하게 믿으면 그 행하는 것이 진실하여서 언제나 선에 살고 악에는 살지 않으며, 그의 말도 진실하여서 두 가지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과 믿음으로 즐겁게 익히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란 무슨 뜻인가?
대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기 때문에 물질로 보시하여서 스스로 그 복을 받는다. 또한 계율을 받들어 지녀서 방일한 뜻을 버리고, 정신을 제도하기를 구하며, 후세 사람들을 위해 다리[橋梁]를 놓고 경전을 강론하고 이치를 설명하여서 널리 그 같고 다름을 간파하니, 이것 역시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남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란 무슨 뜻인가?
계행을 지니는 사람은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남의 존경을 받으며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한다. 이에 복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커지고 명예는 사방으로 퍼진다.
그러므로 “남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9
남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
그것은 다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
지금의 생(生)에서는 명예를 얻고
다음 생에서는 천상에 태어난다.
“남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이란 무슨 뜻인가?
사람은 그 행이 온전하면 이름이 밖으로 드러나서 수천만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그대로 좇으므로 그는 모든 사람의 우두머리가 되니, 그것은 그가 선행을 닦되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다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란 무슨 뜻인가?
선행을 닦음으로써 재앙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면, 한편으로 의복, 음식, 침구, 의약 등의 남의 보시를 받더라도, 그것은 법에 있어서 조금도 손상됨이 없는 것이니, 안으로는 진실과 정성이 있고, 밖으로는 그것을 잘 소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의 생(生)에서는 명예를 얻고”란 무슨 뜻인가?
그는 하늘과 사람들이 그 덕을 찬탄하고 또 존경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어디로 가나 아무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의 생에서는 명예를 얻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음 생에서는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도 좋은 곳에 나는데, 천상의 7보 궁전에서 저절로 그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다음 생에서는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0
바른 가르침을 받게 하고
법답지 않은 행을 못하게 하면
선한 사람은 그를 사랑하지만
악한 사람은 멀리 떠나간다.
“바른 가르침을 받게 하고”란 무슨 뜻인가?
법의 공덕 가운데서 바른 법을 가르치되, 그의 요구에 따라 그 이치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른 가르침을 받게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법답지 않은 행을 못하게 하면”이란 무슨 뜻인가?
법답지 않은 행은 사람들의 미움의 대상이고, 어지러운 생각을 많이 일으키며 온갖 악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의 세계에 떨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법답지 않은 행을 못하게 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한 사람은 그를 사랑하지만”이란 무슨 뜻인가?
선을 닦는 사람은 선이 덕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결국 선한 사람을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그를 사랑하지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악한 사람은 멀리 떠나간다”란 말은 무슨 뜻인가?
나쁜 벗이란 바로 악이다. 행이 지극히 정묘하지 못하여 악과 더불어 동(動)하게 되니, 마음속 생각 중에서 악이 그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은 멀리 떠나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1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
그 둘은 다른 것 아니다.
선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고
선한 사람은 천상에 난다.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각기 다른 것이다.
첫째는 묘한 것이고, 둘째는 묘하지 않은 것이며,
첫째는 고요한 것이고, 둘째는 산란한 것이며,
첫째는 선도(善道)에 나는 것이고, 둘째는 악도에 나는 것이며,
첫째는 칭찬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비방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것과 또 선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둘은 다른 것 아니다”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세상을 마치는 것도 그 행적에 따라서 죽는 것이니, 그 지은 업에 따라 과보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둘은 다른 것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고”란 무슨 뜻인가?
나쁜 벗은 선하지 않은 행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한 사람은 천상에 난다”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네 쌍(雙)과 여덟 무리의 열두 현사(賢士)는 선의 근본을 닦아서 공허하게 지내면서 세상의 번거로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천상에 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