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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자량론 제4권
[수도(修道)의 수승한 의미]
【문】
이미 보살이 자신의 선근을 보호하는 것을 이미 설명하였다.
어떠한 것이 수도(修道)의 수승한 의미인가?
【답】
세 가지 해탈문[三解脫門]에 대하여
마땅히 잘 수습해야 한다.
처음은 공(空), 다음은 무상(無相),
세 번째는 무원(無願)이다.
이 중에서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마땅히 세 가지 해탈문을 수행해야 한다.
최초에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을 수행해야 하니, 모든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로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온갖 분별로 반연하는 뜻을 취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세 번째로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뛰어넘기 위해서이다.
[해탈문]
【문】
어찌하여 이들을 해탈문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공(空)하고
이미 공하다면 어찌 모습을 지으리오.
모든 모습이 이미 적멸하니
지혜로운 자가 무엇을 소원하리오.
연기하여 생하기 때문에 법은 자성이 없다. 이것을 공(空)이라고 이름한다. 그것이 공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반연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무상(無相)이다. 모습을 여의기 때문에 곧 소원(所願)이 없다. 또 만약 법이 연(緣)으로부터 생한다면 그 자성은 생함이 없고, 자성이 생함이 없기 때문에 그 법은 공하다. 만약 법이 공하다면 그 중에는 모습[相]이 없고, 모습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무상(無相)이다.
만약 모습이 있지 않다면 그 중에서 마음이 의지하는 바가 없고, 의지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계(界) 속에서 마음이 원하는 바가 없다.
이를 수행하고 염(念)할 때에
열반의 도[涅槃道]에 가까이 다가서니,
불체(佛體)가 아닌 것을 염하지 말고,
그것에 대하여 방일하지 말라.
이 세 가지 해탈문을 수행할 때 만약 방편에 포섭되지 않는다면 곧 열반에 가까이 다가선다.
비록 닦아 익히더라도 그 밖의 보리처(菩提處)에 떨어지지 말지니, 마땅히 무소득의 인[無所得忍]을 구해야 하고 또한 선교방편(善巧方便)에 머물러야 한다.
나는 열반 중에서
응당 증득을 짓지 말아야 하나니,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발생해서
또한 지도(智度)를 성숙시켜야 한다.
다음과 같은 마음을 발해야 한다.
‘나는 마땅히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켜야 한다.
비록 세 가지 해탈문을 수행하여도 마땅히 열반에 대하여 증득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 가지 해탈문 속에서 오로지 성숙해야 한다.
나는 마땅히 공을 닦아야 하지만 공을 증득하지 말아야 하고,
나는 무상을 닦아야 하지만 무상을 증득하지 말아야 하며,
나는 무원을 닦아야 하지만 무원을 증득하지 말아야 한다.’
활 쏘는 사람[射師]이 화살을 쏘아
각각 서로 유지시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처럼,
큰 보살도 또한 그러하다.
비유하면 활 쏘는 사람이 활 쏘는 것을 잘 배우고 나서 화살을 공중으로 쏠 때 계속 쏘아서 나중의 화살이 각각 서로 맞추어 그 화살이 마침내 많아져도 공중에서 서로 유지시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해탈문의 공중에
마음의 화살을 잘 쏘아서
교묘한 방편의 화살이 계속 유지되어
열반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처럼 위대한 화살을 쏘는 이 보살은 공ㆍ무상ㆍ무원이라는 활을 배우고 닦음으로써 세 가지 해탈문의 공중(空中)에 마음의 화살을 쏘고,
또 중생을 자비롭게 연민하는 선교방편이라는 화살로써 더욱더 상속시켜서 삼계(三界)라는 허공 중에 그 마음의 화살을 유지시켜서 열반의 성[涅槃城]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보살의 열반]
【문】
어떻게 다시 그 마음으로 하여금 열반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가?
【답】
나는 중생을 버리지 않으니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고
다음으로 익혀서 상응해야 한다.
나는 세 가지 해탈문에서 잘 성숙하고 나면 열반을 손 안에 있는 것처럼 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젖 먹는 어린아이 같은 범부라서 스스로 열반의 성으로 향할 수 없다면, 아직 열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열반에 응당 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나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정진을 일으켜야 한다.
‘내가 짓는 바에 따라서 오직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중생이 열반을 얻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먼저 마땅히 이와 같은 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다음으로 곧 마음과 세 가지 해탈문에 수순하여 상응한다. 수순(隨順)이란 뒤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그 마음의 화살은 선교방편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해탈문을 행할 때 곧 성문의 해탈이나 혹은 독각의 해탈 중에 떨어지고 만다.
지금 다시 선교방편이 있다.
집착 있는 중생들이
긴 밤과 현재에 행하는
전도(顚倒)와 모든 모습은
모두 어리석은 미혹 때문이다.
어린아이 같은 범부인 모든 중생들은 어리석은 미혹 때문에 무시(無始) 이래로 유전하여 긴 밤 동안 네 가지의 전도[四顚倒]에 집착한다.
소위 항상하지 않은 것을 항상하다고 말하고, 괴로움을 즐겁다고 말하고, 청정하지 못한 것을 청정하다고 말하고,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안팎의 중(衆)ㆍ계(界)ㆍ입(入) 속에서 나와 내 것을 헤아리기 때문에 이른바 얻을 바가 있어서 긴 밤 동안 행하고 나서 또 현재에도 행한다.
모습에 집착하여 전도된 자는
법을 설해서 끊어 없애게 해야 한다.
먼저 이와 같은 마음을 발생하고
다음으로 익혀서 상응해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은 어리석은 미혹 때문에 나와 내 것이라는 두 가지 계교(計較)의 집착을 일으킨다.
또 색(色) 등의 존재하지 않는 것 중에서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켜 모습을 취하고 네 가지 삿된 전도를 생한다. 나는 법을 설해서 그로 하여금 끊어 없애게 해야 한다.”
먼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고 난 뒤에 세 가지 해탈문 중에서 수습하여 상응한다.
만약 이것과 다르게 세 가지 해탈문을 수습하는 자는 곧 열반의 도(涅槃道)에 나아가 다가간다.
보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중생을 보지 않는다.
이것이 또한 가장 난해한 일로서
희유(希有)하여 사량할 수 없다.
보살이 중생에 대한 생각[衆生想]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또한 가장 난해하여 사량할 수 없고 일찍이 없는 일로서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가장 수승한 의미[最勝義]에서는 본래 중생이 없으니, 이 보살은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하지만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고자 부지런히 정진한다.
오직 대비(大悲)를 제외하고 어디에 다시 이와 같은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비록 올바로 확정된 지위[正定位]에 들어가서
해탈문을 수습하여 상응하지만
아직 본원(本願)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다.
이것을 마땅히 사량(思量)해야 한다.
만약 올바로 확정된 지위[正定位]에 도달하려는 보살이 서른두 가지 법 때문에 올바로 확정된 지위에 들어가서 해탈문과 상응할 때 그 중간에 아직 본래의 서원[本願]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면, 열반을 증득해야 하는가, 증득하지 말아야 하는가?
세존께서 경전 가운데 말씀하셨다.
“사대(四大)는 달리 바꾸게 할 수 있어도 올바로 확정된 지위에 들어간 보살이 중간에 아직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키기 못하고서 열반을 증득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올바로 확정된 지위에 도달한 보살은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다.
만약 아직 확정된 지위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선교방편의 힘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니,
아직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키지 못했기에
또한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다.
만약 처음 발심한 보살로서 아직 올바로 확정된 지위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선교방편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해탈문을 수행할 때 중간에 아직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또한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다.
지극히 유전(流轉)을 싫어하면서도
또한 유전으로 향하고
열반을 믿고 좋아하면서도
또한 열반을 등진다.
유전 속에 있는 이 보살은 세 가지 치열한 불길 때문에 반드시 유전을 지극히 싫어해서 여의어야 하지만, 또한 유전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유전으로 향해야 한다.
또 사택(舍宅)을 덮어 보호하는 것처럼 반드시 열반을 믿고 좋아해야 하지만, 다시 또한 열반을 등져야 한다.
일체지지(一切智智)를 구족하려고 하기 때문에 유전 속에서 싫어해서 여의는 일이 있다면, 곧 열반에 대해서도 또한 믿고 좋아하는 일이 있게 된다.
가령 유전을 향하지 않고 열반을 등지지 않으면서 아직 본래의 서원을 채우지 못한 채 해탈문을 닦아 익힐 때에는 곧 열반을 증득하고 만다.
마땅히 번뇌를 두려워해야 하지만
또한 번뇌를 다하지도 말아야 한다.
마땅히 뭇 선함을 모으기 위하여
가림[遮]으로써 번뇌를 가려야 한다.
유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번뇌를 두려워해야 하지만 필경에는 번뇌를 다 없애지 말아야 한다. 만약 번뇌를 다 단절하면 곧 보리의 자량을 모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가리고 제어하는 법[遮制法]으로써 모든 번뇌를 가린다. 번뇌를 가려서 그것을 무력(無力)하게 하기 때문에 보리의 자량인 선근을 모으게 된다.
선근을 모으기 때문에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켜서 능히 보리에 도달하게 된다.
[보살과 번뇌]
【문】
어찌하여 단절하여 소멸시킴으로써 모든 번뇌를 소멸시키지 않는가?
【답】
보살은 번뇌를 성품으로 삼으며
열반을 성품으로 삼지 않는다.
모든 번뇌를 태워버리지 말아야
보리의 종자를 생한다.
가령 모든 성문의 성자들은 열반을 성품으로 삼으니, 열반을 반연하여 사문(沙門)의 과보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은 열반을 성품으로 삼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은 번뇌를 성품으로 삼으니, 보리심이 이로 말미암아 생하기 때문이다.
성문과 독각은 모든 번뇌를 태워버려서 보리심의 종자를 생할 수 없으니, 이승(二乘)의 마음 종자는 유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여래의 성품으로 삼는다.
번뇌가 있음으로써 중생은 보리심을 발생하고 불체(佛體)를 출생하기 때문에 번뇌를 여의지 말아야 한다.
【문】
만약 번뇌를 태워버려서 보리심의 종자를 생할 수 없다면,
어찌하여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번뇌를 태워버린 모든 성문들에게 수기(授記)하였는가?
【답】
그 모든 중생에게 수기하는 것은
이 수기[記]에 인연이 있어서이니,
오직 부처님의 선교방편으로써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하려 함이다.
어떠한 중생들이 성취할지 그 속의 인연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조복(調伏)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 그 밖의 중생과 더불어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보리심의 종자를 생하지 못하는 자라면 무위(無爲)의 올바로 확정된 지위[正定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허공[空] 및 연꽃[蓮華]과 같고
험준한 단애[峻崖]와 깊은 구덩이[深坑]와
계(界)와 남자가 아닌 자[不男]와 가자(迦柘)와
또한 타버린 종자[燒種子]와 같다.
허공 가운데 종자를 낳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무위(無爲)에서는 부처님 법을 낳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낳지 못한다.
고원(高原)의 광야(曠野)에서는 연꽃을 피우지 못하듯이, 성문과 독각이 들어가는 무위(無爲)의 올바로 확정된 지위[正定位]에서는 부처님 법을 생하지 못한다.
‘험준한 단애[峻崖]’라는 것을 말해 보자.
일체지지(一切智智)의 성(城)으로 가는 도중에는 두 가지 험준한 단애가 있으니, 소위 성문지(聲聞地)의 험준한 단애와 독각지(獨覺地)의 험준한 단애이다.
성문과 독각으로서 만약 일체지(一切智)가 있다면 곧 보살에게 두 가지의 험준한 단애가 되지 않는다.
‘깊은 구덩이[深坑]’라는 것을 말해 보자.
가령 장부(丈夫)가 뛰어올라 내치는 것[跳擲]을 잘 배우면 비록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더라도 안온하게 머물지만, 만약 잘 배우지 못해서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면 곧 구덩이 안에서 죽는 것처럼,
보살은 무위(無爲)를 수습하여 잘 상응하기 때문에 비록 무위를 수습하더라도 무위 속으로 떨어지지 않지만,
성문 등은 무위를 수습하여 잘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무위 속에서 떨어진다.
‘계(界)’라는 것을 말해 보자.
성문은 무위의 세계[無爲界]에 계박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다시 유위(有爲) 속에서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중에서 보리의 마음을 생하지 못한다.
‘남자가 아닌 자[不男]’라는 것을 말해 보자.
가령 남근의 기능이 소실된[根敗] 장부가 다섯 가지 욕망[五欲]에 대하여 다시는 탐닉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성문은 무위법(無爲法)을 구족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또한 탐닉하는 일이 없다.
‘가자(迦柘)’라는 것을 말해 보자.
가령 모든 하늘나라와 세간이 비록 저 가자 구슬을 잘 수리하려고 해도 끝내 비유리보(鞞琉璃寶)로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성문은 비록 다시 여러 계학(戒學)ㆍ두타[頭多]의 공덕ㆍ삼마제(三摩提) 등을 구족하여도 끝내 깨달음의 도량에 앉아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할 수 없다.
‘또한 타버린 종자[燒種子]와 같다’라는 것을 말해 보자.
가령 타버린 종자는 비록 땅 속에 묻고 물을 뿌리며 햇볕을 따뜻하게 쬐어 주어도 끝내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성문은 번뇌의 종자를 태워버리고 나면 삼계 속에서 역시 생겨나는 뜻이 없다.
이와 같은 경전의 말씀 때문에 성문은 무위법을 획득하고 나서 보리심을 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