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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책소개]
“시간에 관한 우주의 거대한 이야기가 이 책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가 이끄는 ‘시간의 신비’에 관한 지적 탐험
양자중력 이론의 선구자, 카를로 로벨리의 세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 이은 이번 책은 양자중력 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간’에 관한 이야기.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이곳에서 경험하는 시간과 우주의 시간은 다른 것일까?’ ‘왜 과거는 떠올릴 수 있고 미래는 떠올릴 수 없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카를로 로벨리의 충실한 답변서이다.
로벨리는 신비스러운 시간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가 가진 통상적인 시간관념을 모조리 깨트린다. 즉, 우주에는 단 하나의 유일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며, 규칙성을 가지고 일정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 모든 것은 시간에 관한 우리의 지각 오류가 만든 산물이자 지구라는 환경의 특수성, 근사성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시간에 관한 우주의 거대한 이야기가 온전히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인류의 역사에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알게 되고, 나아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의 시간, 아니 우주의 시간 그리고 시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물리학과 철학, 그리고 문학이 한데 어우러진 문장마다 깃든 아름다움은 과학책에서는 발견하기 드문 쏠쏠한 행운이기도 하다.
[목차]
들어가는 말
1부 시간 파헤치기
01 유일함의 상실
02 방향의 상실
03 현재의 끝
04 독립성의 상실
05 시간의 양자
2부 시간이 없는 세상
06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
07 문법의 부적당함
08 관계의 동역학
3부 시간의 원천
09 시간은 무지
10 관점
11 특수성에서 나오는 것
12 마들렌의 향기
13 시간의 원천
14 이것이 시간이다
옮긴이의 말
주석
[저자 소개 (1명)]
저 : 카를로 로벨리 (Carlo Rovelli)
이탈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양자이론과 중력이론을 결합한 ‘루프양자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로, ‘제2의 스티븐 호킹’이라 평가받는다. 1981년 볼로냐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1986년 파도바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교 이론 물리학센터 교수이자 프랑스 대학연구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 Sette brevi lezioni di fisica』,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La realta non e come ci appare』,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Et si le temps n’existait pas?』 등이 있다. 2014년 이탈리아에서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첫 출간된 이후 그의 책들은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번역되어 13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바 있다. 이는 과학책으로 유례없는 기록이다.
[책 속으로]
우리는 보통 시간이 단순하게, 기본적으로 어디서든 동일하게, 세상 모든 사람의 무관심 속에 과거에서 미래로, 시계가 측정한 대로 똑같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주의 사건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순서대로 벌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는 정해졌고, 미래는 열려 있고……. 하지만 이 모두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시간의 특징적인 양상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시각이 만든 오류와 근사치들의 결과물이다. 앞서 언급한 지구가 평평해 보이는 것이나 태양의 회전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면서 시간에 대한 개념은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었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조들, 즉 층들이 복잡하게 모인 것이다. 점점 더 깊이 연구가 진행되면서, 시간은 이 층을 하나둘씩 한 조각, 한 조각 잃어왔다.
--- p.10~11
시간이 흐르는 속도보다 이 점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핵심이다. 시간의 비밀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맥박의 진동 속에, 기억의 수수께끼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있다.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은 정확히 무엇일까? 세상의 문법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메커니즘 중에서 이미 존재해왔던 과거와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와 미래가 그토록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와 20세기의 물리학은 이런 질문들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예상치 못한 사실과 마주하며 당혹스러워했다. 세상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기본 법칙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원인과 결과, 기억과 희망, 후회와 의지의 차이 )없기 때문이다.
--- p.29
프록시마b에서 여동생의 삶 중 어떤 순간이 ‘지금’에 해당하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것은 어떤 축구팀이 농구 챔피언 대회에서 우승했는지, 혹은 제비가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혹은 음표 하나의 무게는 얼마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축구팀은 농구가 아닌 축구를 하고, 제비는 돈벌이를 하지 않으며, 소리는 무게가 없으므로 모두 잘못된 질문이다. 농구 챔피언 대회는 농구팀을 대상으로 해야지 축구팀을 대상으로 하면 안 된다. 돈 버는 일은 사회 속의 인간을 대상으로 해야지 제비를 대상으로 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개념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해야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면 안 된다.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p.52
세상은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질로, ‘실체’로, ‘현재에 있는’ 무엇인가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 혹은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연적 발생으로, 과정으로, ‘발생하는’ 그 무엇인가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무엇은 지속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영속적이지 않다. 기초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의 파괴는 두 가지 관점 중 첫 번째 관점이 붕괴된 것이지 두 번째는 아니다. 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의 안정성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일시성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 p.105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허상이 아니다. 이 세상의 일시적 시간 구조다. 그러나 세상의 일시적 시간 구조가 현재주의의 시간 구조는 아니다. 사건들의 시간적 관계는 우리가 예전에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지만, 복잡하지 않다고 해서 시간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친밀 관계가 세계의 질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허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가 한 줄로 놓여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그 어떤 관계도 없는 게 아니다. 변화와 사건은 허상이 아니다. 우리가 알아낸 것은 하나의 세계적인 질서에 따라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p.118
우리가 시계로 기간을 측정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기간은 서로 다른 두 순간에 시계를 봐야 측정할 수 있는데,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순간에 있지, 두 순간에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현재만 본다. 과거의 ‘흔적’이라고 해석되는 것들은 볼 수 있지만, 과거의 흔적을 보는 것과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차이의 근원이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일이 내면적이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그것은 내면의 일부이며, 뇌에 남은 과거의 흔적들이다.
--- p.187~188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아닌, 우리가 경험한 균등하고 범세계적이고 순서가 있는 시간, 이 단일한 시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엔트로피의 성장에 의존하여 시간의 흐름에 정착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특별한 관점에서 기술한, 세상에 대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이다. 성서의 [전도서]128에 따르면, 탄생을 위한 시간과 죽음을 위한 시간이 있다.
서로 다른 다양한 근사치들에서 파생된 확연히 구분되는 수많은 특성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 구조의 복잡한 개념, 이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시간의 개념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고 다층적인 측면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제각각의 다양한 층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평생 시간의 주위를 맴돌고 나서 알게 된 시간의 물리적 구조이다.
--- p.203~204
[출판사 리뷰]
카를로 로벨리가 이끄는
‘시간이 없는’ 우주를 향한 여행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양자중력 이론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세 번째 책이다. 앞서 출간된 『모든 순간의 물리학』,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서는 양자중력 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공간에 대해 다뤘다면, 이 책에서는 ‘시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고 알고 있는 시간은 대체 무엇일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왜 과거는 떠올릴 수 있고 미래는 떠올릴 수 없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은 같은 것일까? … 카를로 로벨리는 이 책에서 시간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답한다. 그는 “시간에 어떤 순서나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 세계에서 바라본 우주의 특수한 양상일 뿐, 보편적인 본질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인간 지각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주의 원초적 시간에는 순서나 질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흐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이루어졌다. 1부에서는 ‘지금까지’ 현대 물리학이 시간에 대해 알아낸 것을 요약했다.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면서 시간에 대한 개념은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는데, 이로 인해 복잡한 층들로 이루어져 있던 시간은 이 층을 하나둘씩 잃었다. 기본적으로 어디서든 동일하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순서로 벌어진다고 생각하는 사건들, 과거는 이미 정해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상식…. 이런 것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낱낱이 드러낸다. 2부에서는 ‘시간이 없는 세상’으로 떠난다.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 인간의 문법에만 존재하는 과거-현재-미래, 시간이라는 변수가 없는 세상…. 이제 공간과 시간은 세상을 담는 틀이나 용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게 된다.
3부에서는 1부와 2부에서 파괴한 시간을 되돌려 그 원천을 다시 찾고 이 긴 여행의 도착점을 우리 자신, 나라는 존재로 하여 돌아온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하늘의 운동에 대해 연구하다 우리 발밑의 지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함으로써 끝을 맺게 된 것처럼. 이러한 존재론적 회귀는 카를로 로벨리의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물리학과 철학의 아름다운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
인간의 관점으로 시간을 바라볼 뿐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신비스러운 시간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익숙한 ‘틀’부터 하나씩 깨트린다. 우리가 시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은 ‘유일성’, ‘방향성’, ‘독립성’으로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우주에 유일한 단 하나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또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시간은 다른 어떤 존재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규칙적이고 일정하게 흐르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틀렸다. 시간의 특징적인 양상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시각이 만든 오류이고, 근사치들의 결과물이다.
유일하다고 생각한 ‘시간’이라는 양은 시간들의 거미줄 속에서 산산조각 난다. 이 책에서는 세상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여러 지역의 시간 속에서 사물이 어떻게 진화하는지와 여러 지역의 시간이 ‘서로 어떤 차이를 가지고’ 진화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세상은 사령관의 구령에 맞춰 움직이는 군부대의 대형처럼 균일한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p.25
세상일은 아주 복잡하다. 현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 태양이 도는 것 같은데 사실은 지구가 돌고 있고, 지구가 평평한 것 같은데 사실은 공 모양인 것처럼. 온 우주에 공통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 모든 사건들이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우리 주위에는 현재가 있지만 멀리 있는 은하에는 그것이 ‘현재’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관점, 세상의 작은 일부인 인간의 관점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세상을 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아닌, 우리가 경험한 균등하고 범세계적이고 순서가 있는 시간,이 단일한 시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엔트로피의 성장에 의존하여 시간의 흐름에 정착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특별한 관점에서 기술한, 세상에 대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이다. 서로 다른 다양한 근사치들에서 파생된 확연히 구분되는 수많은 특성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 구조의 복잡한 개념, 이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pp.203-204
세상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신비,
‘시간’에 관한 전우주적 이야기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출발하여 인간이 시간을 이해해온 역사가 녹아 있다. 뉴턴에 의해 근대 물리학이 등장한 이래로 물리학의 발전이 우리의 시간관념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종의 ‘시간 역사서’이기도 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카를로 로벨리는 새로운 양자중력 이론의 도입을 통해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확장시켰다.
시간(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의미의)이 없는 우주, 그럼에도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우주, 사물 대신 사건으로 가득 찬 우주, 사건들 간의 복잡한 관계로 인해 변화하는 우주.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과거에서 미래로 질서 있게 흐르는 시간을 경험하고 이에 의존해 살아간다. 인간의 세계는 우주에게 ‘보편’이 아니라 ‘특수’의 경우인 것이다.
이 책은 시간에 관한 이 우주의 거대한 이야기를 온전히 담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인류 역사에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알게 될 것이고 나아가 지구의 시간 아니, 우주의 시간 즉 ‘시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한 발짝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공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카를로 로벨리 (Carlo Rovelli)
https://cafe.daum.net/vandalism/KL02/1159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Carlo Rovelli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개개인에 맞는 고유한 시간의 리듬이 있다"
들어가는 말: 이 세상의 가장 거대한 신비는 시간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우리 존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의 哀歌는 우리의 영양분이 되고, 우리에게 세상을 열어주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한편, 편안한 요람이 되어주기도 한다.
세상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시가인 이끌어가는 일들을 펼쳐나간다. 시간의 특성은 세상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신비일 것 같다.
게다가 사물의 본성이나 우주의 기원, 블랙홀들의 운명, 생명의
작용처럼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신비들은 묘하게 시간의 신비와 엮여 있다.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우리를 계속해서 시간의 본성으로 이끌고 있다.
시간의 경이로움은 ‘알고자 하는’ 우리 욕구의 원천이 되었다.
1부 시간 파헤치기
우리는 보통 시간이 단순하게, 기본적으로 어디서든 동일하게,
세상 모든 사람의 무관심 속에 과거에서 미래로, 시계가 측정한
대로 똑같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주의 사건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순서대로 벌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는 정해졌고, 미래는 열려 있고…….
하지만 이 모두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시간에 특징적인 양상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시각이 만든 오류와 근사치들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면서 시간에 대한 개념은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었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조들,
즉 층들이 복잡하게 모인 것이다.
점점 더 깊이 연구가 진행되면서,
시간은 이 층을 하나둘씩 한 조각, 한 조각 잃어왔다.
광활한 우주에 우리가 합리적으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의 간격을 결정하는 토대는 세상을 이루는
다른 실체들과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역동적인 장의 한 양상이다. 이 역동적인 장은 도약하고
요동치며 상호 작용할 때만 구체화되며, 최소 크기 아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01 유일함의 상실
시간 늦추기: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평지에서는 더 느리게 흐른다.
어떤 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어떤 곳에서는 빨리 흐른다.
이처럼 시간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미세한 시간의 차이를 측정할 수 있는 시계가 나오지 전에 시간이 균일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아낸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연구할 때, 자신에게 던진 질문
태양과 지구가 서로 접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데 서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태양과 지구가 직접 서로 끌어당기지는 않지만, 양쪽 모두 둘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인가에 서서히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공간과 시간만 있으므로 태양과 지구가 각자 주위의 공간과 시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떤 물체가 물속에 잠기면 주변의 물이 흐트려지듯이,
시간의 구조가 변경되면 모든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끼치고,
그들이 서로를 향해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간의 구조를 변경한다’는 것은 바로 시간의 지연을 뜻한다.
모든 물체는 자기 주위의 시간을 더디게 한다.
지구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주위의 시간을 늦춘다.
산에서 시간이 덜 지연되는 것은 산이 지구의 중심과 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도 이런 시간의 지연 때문이다.
행성 사이의 공간처럼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곳에서는 물체가
추락하지 않고 떠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구 표면에서는 사물이 자연스럽게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는 쪽으로 향한다.
두 발이 바닥에 붙어 있다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으로 온몸이 이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때 발 쪽의 시간은 머리 쪽의 시간보다 더 천천히 흐른다.
이상한가? 우리 인간은 석양이 질 무렵 태양이 황홀한 모습으로 가라앉기 시작해 저 먼 구름 뒤로 서서히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지구라는 것을 알아냈다.
춤추는 만 명의 여신:
사물은 필요에 따라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화하고,
그것들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당화된다.
- 아낙시만드로스
천문학과 물리학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해하라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지침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고대 천문학은 ‘시간 속;에서의 별들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했고,
물리학 방정식들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바뀌는지를 설명한다. 방정식들은 시계로 측정된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사물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설명해 준다.
하지만 여러 다른 시계가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면 어느 시간이 t를 가리킬까?
화폐의 경우, 정확한 가치란 없다. 두 화폐는 서로 상대에게 비교되는 가치를 지닐뿐이다. 마찬가지로 더 진짜에 가까운 시간도 없다.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시간들일 뿐이다.
두 개의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공간 속의 모든 지점마다 다른 시간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모든 시계에는 각자의 ‘고유 시간’이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도 고유한 시간, 고유의 리듬이 있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그려진 시간의 모습이다.
물리학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
‘시간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즉, 시간은 첫 번째 층인 유일함을 상실했다.
모든 장소의 시간은 다른 리듬과 속도를 갖는다.
다양한 리듬의 춤 속에서 세계의 사건들이 얽힌다.
세상이 춤추는 생명의 여신으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면 최소한 만 명의 여신이 있어야 할 테고, 그 여신들의 춤은 마티스의 그림처럼 거대한 군무로 펼쳐질 것이다.
Henry Matisse 1869-1954(Dance II)
02 방향의 상실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릴케는 “영원한 흐름은 언제나 양쪽 영역을 통해
그 안에서 모두를 압도하면서 모든 시대를 이끌고 간다"라고 읊었다.
과거는 미래와 다르다. 원인은 결과에 선행한다.
과거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
후회와 회한, 행복한 기억 같은 것만 간직할 수 있다.
반면 미래는 불확실하고 욕망과 불안이 교차하며,
어쩌면 미래 자체를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살 수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다. 미래에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시간은 양쪽영역으로 똑같이 뻗은 선이 아니다.
끝부분이 서로 다른 화살표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보다 이 점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핵심이다.
열:
모든 아담의 후예는 한 몸을 형성하며
동일한 존재다.
시간이 고통으로 그 몸의 일부를
괴롭게 할 때
다른 부분들도 고통스러워한다.
그대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 카르노
물체는 반동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열은 그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의 화살표는 열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
이처럼 시간과 열은 아주 깊은 관계에 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때마다 열이 관여한다. 만일 거꾸로 진행한다면
터무니 없어지는 모든 현상에는 열과 관련된 것이 있다.
열은 뒤섞음에 의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이동할 뿐
그 반대로 이동하지 않는다. 자연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게 일어난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구성이다.
그런데 ‘특수성’의 개념은 세상을 대략적으로,
희미하게 바라볼 때만 만들어진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이 희미함과 깊이 연결돼 있다.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에서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물리 법칙들에
의해 표현되는 규칙성이 있는데, 여기서 미래와 과거는 서로 대칭적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특징짓는 모든 현상은 이 세상의 과거에서 ‘특정한’ 상태로 환원되며, 그 ‘특정성’은 우리의 희미한 시각에서 기인한다는 증거가 있다. 볼츠만이 알아낸 엔트로피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시각이 식별하지 못한 미시적인 상태들의 수일뿐이다. 볼츠만은 시간의 흐름에는 본질적인 어떤 것도 없으며, 과거의 한 시점에서 우주의 불가사의한 불가능성이 희미하게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위에 인용한 릴케의 《비가》에 나오는 영원한 흐름의 원천이다.
영원한 흐름은 언제나
양쪽 영역을 통해
그 안에서 모두를 압도하면서
모든 시대를 이끌고 간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나의 느낌이 이렇게 생생하고 명확하고 실존적인데,
내가 이 세상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가? 나의 근시안 때문에 오류 같은 것이 생긴다는 것인가?
내가 정말 수십억 분자들이 어떻게 춤을 추는지 정확하게 관찰하고 이것을 염두해 둔다면, 미래가 과거와 '똑같이' 펼쳐지는 것인가?
과거의 지식을 미래의 지시고가 똑같이 소유할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틀릴 때가 많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의 직관과 그토록 크게 다를 수 있을까? p43
03 현재의 끝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질량에 의해 늦춰진다는 것을 깨닫기 10년 전에, 시간이 속도 때문에 늦춰진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로서 ‘지금’을 따지기는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여기서 현재와 지금이라 여기는 것에
대응되는 특별한 순간이 없다.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 있는 거품과 같다.
이 거품의 적용 범위는 얼마나 정확하게 시간을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은 고작해야 10분의 1초 정도를 간신히 구분할 수 있으므로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하나의 거품에 비유하고, 그 속에서의 현재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의 범위다.
그곳엔 우리가 볼 수 있는 사건 이전에 일어난 일들인 과거와 지금 여기서 불 수 있는 순간 이후에 일어나게 될 일들인 미래도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은 화성은 15분, 프록시마b는 8년, 안드로메다 은하는 수백만 년에 이른다. 이 간격은 현재의 확장이다.
우주 곳곳에 잘 정의된 ‘지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이자
우리 경험의 부적절한 外揷이다. 우주에는 같은 순간이라고 규정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행성에서 벌어진 사건이 ‘같은 순간’에 발생했는지 묻는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우주의 현재’는 의미가 없다.
현재가 없는 시간 구조:
친자 관계로 설정된 순서와 같은 ‘부분 순서’는 몇 가지 요소들
간의 선후 관계는 정할 수 있지만, 모든 서열을 정리할 수는 없다.
이는 우주의 시간 구조와 흡사하다.
‘시간적인 선행’ 관계도 원뿔형으로 이루어진 부분의 순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완전’하지 않고 ‘부분’적인 우주의 사건들 간의 순서를 정의하는 특수상대성 이론이 우주의 시간 구조가 조상도 자손도 아닌 사람들이 존재하는 친척 관계와 같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확장된 현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사건들 전체를 뜻한다.
우주의 모든 사건과 그 사건들의 시간 관계에 대한 표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하는 단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는 불가능하다. 공통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장소에 따라 달라 시공간의 구조는 정리된 상태가 아니라 혼란스러울 수 있다.
블랙홀에서 벗어나려면 현재로 이동해야 하는 데 이는 불가능하다. 블랙홀은 주위의 모든 것을 미래 속의 공간 영역에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04 독립성의 상실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시간을 탄력적이다.
인간은 수 세기 전에 시간을 하루 단위로 ‘나누었다’.
또한 인간은 수 세기 전에 하루를 시간 단위로 나누었다.
고대 세계에도 해시계나 모래시계, 물시계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상생활을 계획할 때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13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기계식 시계를 통해 조율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간은 서서히 수학자들의 손으로 옮겨간다.
시계의 유용함은 모두에게 같은 시간을 표시해 준다는 것이다.
전신이 나오고 이동 수단이 발달하면서,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할 때 시계를 맞추는 일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런 불편의 해소를 위해 시간을 표준화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해, 1883년에 전 세계에 ‘시간대’를 설정하고 각 시간대 내에서만 동일한 시간을 표준화하기로 타협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계의 동기화를 받아들인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 특허사무소에서 기차역들의 시계 조율과 관련한 특허 업무를 담당했던 아인슈타인은 시간의 정확한 동기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시간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문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
변화의 척도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그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이고, 시간은 변화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우리 내면에서 흐른다고 인지한 시간도 움직임의 척도라고 하였다. 하지만 뉴턴은 이와 정반대로 상대적이고 명백하며 통속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뿐 아니라 사물이나 사물의 변화와 상관없이 ‘진짜’ 시간은 흐르고, 모든 사물이 멈추고 우리 영혼의 움직임마저 얼어붙어도 ‘진짜’ 시간은 냉정하고 동일하게 계속 흐른다고 보았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에서도 뉴턴은 다른 방식의 개념을 제안했다.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위에 있는 것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 공간이 “상대적이고 겉보기이며 통속적이다”라고 주장하고, 공간 그 자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공간이 “절대적이고 참되며 수학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공기와
양자와 같은 물리적 존재자의 존재는 헤아리지 않고 자신들이 믿음대로 공간을 정의해버렸다.
세 거인의 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과 뉴턴의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연구로
통합되었다. 뉴턴의 시간과 공간이 실재하지만, 뉴턴의 생각과는 달리 모든 사물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중력의 근원인 중력장과 같이 모든 장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시공간은 이러한 장들 중 하나인 것이다.
뉴턴은 완벽한 평면인 중력장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이 적용되는데, 중력장은 탄력성이 뛰어난 거대한 종이와 같다. 이 중력장 캔버스가 펼쳐지거나 굽는 것은 중력의 기원이자 사물 낙하의 원인이 되는데, 이는 뉴턴의 고전 중력 이론에 비해 중력과 낙하 현상을 훨씬 더 잘 설명해 준다.
이를 확장하면 시공간이 뒤틀린 ‘휜’ 시공간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시간은 공간 기하학과 함께 구성된 복합적인 기하학의 일부가 된다.
이 세 거인들 덕분에 우리는 중력장이라는 실제적인 구조가 존재하고 이것이 다른 물리학과 동떨어지지 않으며, 세상이 그냥 한번
흘러 지나가는 무대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중력장은 다른 것들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우리가 미터기나
시계라 부르는 것들의 리듬과 모든 물리적 현상의 리듬을 정하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요소다. 그런데 한 가지 남은 문제가 있었으니, 중력장도 다른 모든 사물들처럼 양자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05 시간의 양자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확실해진 것은 일반상대성 이론의 나머지 시간 구조도 양자를 개입시키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양자역학 덕분에 얻은 발견은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과 미결정성, 관계적 양상이다. 이 세 가지 모두 우리에게 남아 있던 시간에 대한 개념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렸다.
입자성:
시계로 측정한 시간은 ‘양자화’ 되어, 특정한 값만 취하고 다른 값들은 없는 것이다. 모든 현상에는 최소 규모가 존재하는데, 중력장에서는 이 규모를 ‘플랑크 규모’라고 부르고, 최소 시간은 ‘플랑크 시간’라 한다. 10-44초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시간의 양자 효과가 나타난다. 시간의 ‘양자화’는 시간 t의 거의 모든 값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간의 ‘최소’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 간격 이하로 내려가면,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간으로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자성은 자연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플랑크 시간’의 공간적 자매는 ‘프랑크 길이’로 약 10-33센티미터이고, 이 최소 한계 이하의 길이는 의미가 없다.
시간의 양자중첩:
양자역학의 두 번째 발견은 불확정성이다. 이는 전문 용어로 위치의 ‘중첩’이다. 시공간은 전자와 같은 물리적 물체다.
시공간도 파동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형태로 ‘중첩’될 수 있다.
시공간이 중첩되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과 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관계들:
‘요동’이란 아무것도 결코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순간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다. 이런 미결정성은 하나의 양이 다른 양과 상호 작용할 때는 해소된다.
2부 시간이 없는 세상
바람이 부는 텅 빈, 속세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듯한 풍경,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다.
이상하고 멀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우리 세상이다.
이 세상을 보면 마치 눈과 바위, 하늘만 있는 높은 산을 오르는
느낌일 것이다.
달에서 움직임이 전혀 없는 모래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어쨌든 마지막에 남은 세상은 무미건조하고 황량한 불모지가 오히려 아름답게 빛나는, 원초적인 곳이다.
양자중력을 연구하는 물리학은 이 극단적이지만 너무 아름다운
풍경, 즉 시간이 없는 세상을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06.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
-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 :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p.105)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다.
예컨대 사물의 전형은 '돌' 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p.106)
세상이 사건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하면 작동한다.
아주 간단한 사건이든 복잡한 사건이든 더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
폭풍우도 사물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산 위의 구름도 사물이 아니다.
공기 중의 습기가 응결된 것을 바람이 산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파도도 사물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 물은 언제나 다른 모양을 만든다.
가족도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 느낌의 총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당연히 사물이 아니다.
산 위에 걸린 구름처럼 음식, 정보, 빛,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 속에, 자신과 비슷한 타인들과 교환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수많은 매듭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사물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연구하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p.107-108)
-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원자의 형태는 결국 전자들이 원자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에서 나온 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방정식 역시 사물이 아닌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p.110)
뉴턴 역학과 맥스웰 방정식, 양자역학 등도 사물이 어떠한지가
아니라 사건이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설명한다.
우리는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하고 살아가는지 연구하면서 생물학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연구하면서 심리학을 이해하고,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세상을 이해한다. 이렇듯 사물 자체도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다. 이후에는 먼지로 돌아간다(p.111)
- 시간이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뿐이라면,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만 존재한다.(p.112)
07 문법의 부적당함
20세기 물리학은 우리 세상이 ‘현재주의’라는 방식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객관적이고 범세계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움직이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보는 현재다.
그런데 이 경우 나에게 실제인 것과 다른 사람에게 실제인 것이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집요하게 계속되는 착시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라는 말은, 우주의 역사는 모두 다 똑같이 실재하는 하나의 블록처럼
생각될 필요가 있고,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의 흐름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의 ‘블록 우주’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우주를 통일된 단 하나의 시간 순으로 정리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러 변화들이 단일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리되지 않을 뿐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허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일시적 시간 구조다. 그렇다고 현재주의의 시간 구조는 아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 현재 언어의 문법은 대부분 동사를 현재와 과거, 미래 시제 형태로 변화시킨다 :
이는 매우 복잡한 세상의 실제 시간 구조에 대해 말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문법은 우리의 한정된 경험에 의해 만들어졌고,
점점 거대한 이 세상의 풍부한 구조를 포착하면서 이러한 문법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혼란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오는데, 이는 우리 언어 문법이 부분적으로만 적절한 ‘과거-현재-미래’의 절대적 구분으로 조직되는 데서 기인한다.
현실의 구조는 이러한 문법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다’ 라거나 ‘있었다’, 혹은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건이 나와 관련돼 ‘있었지만’ 지금은 너와 관련돼 ‘있다’ 라고 말하기에 적합한 문법을 갖고 있지 않다.
문법이 부적절하다고 해서 혼란에 빠지면 안 된다.
위에 언급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세상의 구조에 대한 위엄을 보여주려 쓴 게 아니라, 형제를 잃고 슬픔에 빠진 마켈레의 누이를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깊은 정이 담긴 편지는 환상과 무상함을 암시하고 있지만 물리학자들의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편지의 내용은 삶을 그대로 닮고 있다. 약하고 짧고, 환상으로 가득 찬 인생, 그 구절은 시간의 물리적 본질보다 더 깊은 것을 말하고 있다.
08 관계의 동역학
세상을 설명할 대 시간 변수는 없이 우리가 인지하고 관찰하여
결국에는 측정할 수도 있는 양이다. 하지만 사물의 양과 특성은
계속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따라서 상당한 변수들이 서로서로 충분히 동기화돼 있다면,
‘언제’를 표현할 때 사용하면 편리하다. 양자중력의 기본 방정식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휘러-다윗 방정식’으로 공식화가 잘 되어 있다. 즉, 시간 변수 없이 변량들 간에 성립하는 가능한 관계들을 나타내면서 세상을 설명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대한 설명 없이, 사물들이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서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상의 사물들이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기초 양자 사건과 스핀 네트워크:
저자의 루프 양자중력 방정식에도 시간 변수가 없다.
이 이론의 변수들은 물질, 광자, 전자, 원자의 기타 구성 요소들을 형성하는 장들과 중력장을 모두 같은 수준으로 기술한다.
‘그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세상에 대한 ‘일관성 있는’ 설명일 뿐이다.
- 세상의 공간성은 입자들 간에 성립하는 상호 작용들의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 :
장(fields) 들은 소립자와 광자, 중력 양자와 같은 입자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입자들은 공간 속에 담겨 있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공간을 형성한다. 세상에 공간성은 입자들 간에 성립하는 네트워크에 다름없다. 입자들은 시간 속에 살지 않는다.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며 그런 상호 작용에 의거해서만 입자들은 진실로 존재한다.
이 상호 작용이 세상의 사건이고, 방향도 없고 선형적이지도 않은 시간의 최고 기본 형태다.
그것은 양자들이 다른 양자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호혜적 상호 작용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의 동역학은 확률적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시간의 경과는 언제나 상호 작용하는 그리고 상호 작용과 관련된 물리적 체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건들에 대한 완벽한 지도를 그릴 수도, 완벽한 기하학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세상은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관점들의 총체와 같다.
‘외부에서 본 세상’은 난센스다. 세상에서 ‘벗어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루프 양자중력은 기본적인 공간과 시간 없이 일관성 있는 이론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이론에서 이제 공간과 시간은 세상을 담는 틀이나 용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한 형태는 양자 동역학의 근사치일 뿐이며, 그 자체만으로는 공간도 시간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오직 사건들과 관계들만이 존재한다. 기초 물리학의 시간은 세상에 없다.
3부 시간의 원천
시간이 없는 세상에는 시간의 순서, 미래와 다른 과거, 유연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했던 시간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 우리의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위해, 우리 주위에, 우리의 척도에 맞게 나타나야 한다.
세상의 기본적인 문법에 따라, 1부에서 언급한 잃어버린 시간을
향하는 회귀 여행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을 발생시키는 용의자와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을 구성하는 조각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조각들은 실재하는 구조물이 아니며 어설프고 서투른, 그리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이 관점이나 양상에 따라 근사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왜냐하면 결국,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주보다는
우리와 더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발생시킬 범인은 결국
수사관인 우리 인간일지 모른다.
09 시간은 무지
이 세상의 기본 동역학에서 모든 변수가 동등하다면 ‘시간’이러고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은 시간이 없는 세상에서 등장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시간의 비밀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