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 파취착불괴가명론 상권
10. 네 가지 성현의 과
또다시 의심하는 자는 말한다.
“만약 증득한 법에 아무 성품이 없다고 한다면, 네 가지 성현의 과(果)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세간에서는 왜 물질은 없고 과만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須陀洹)이 나는 수다원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겠느냐,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는 등의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수다원이라고 부르는가?
생사의 흐름이 없는 것에 참예하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가?
색(色) 등의 경계에 대하여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념(念)이 견도위(見道位)가 되는데, 이를 타고 과(果)로 향하므로 저것을 이름하여 과향(果向)이라고 부른다.
제16념(第十六念)은 주과(住果)가 되는데 인간 세상과 천상 두 곳을 일곱 번 오간다고 설한다.
무슨 까닭에 일곱 번 태어나야 하는가?
일곱 가지 번뇌[七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번뇌’란 무엇인가?
욕탐(欲貪)ㆍ진색(瞋色)ㆍ무색(無色)ㆍ애(愛)ㆍ도(掉)ㆍ만(慢)ㆍ무명(無明)을 말한다.
이로부터 다시 욕계 가운데 수도(修道)에서 끊어야 할 의혹을 끊고 마침내 5품(品)에 이르게 되면 그 이름을 사다함향(斯陀含向)이라고 한다.
[사다함(斯陀含): 범어 sakṛd-āgāmin, 파리어 sakad-āgāmin의 번역이다. 또는 사갈리다가미(沙羯利陀伽彌)라고도 음역한다. 의역하면 일래(一來)ㆍ일왕래(一往來)가 된다. 사문의 4과(果)의 두 번째이다. 사다함향(斯陀含向)과 사다함과(斯陀含果)로 나누는데, 예류과(預流果)의 성자가 나아가 욕계의 1품(品)에서 5품(品)까지의 수혹(修惑)을 끊는 것을 사다함향이라고 한다. 혹은 일래과향(一來果向)이라고도 한다.
만약 여기에 다시 욕계 6품(品)의 수혹을 끊고 천상에서 인간으로 와서 반열반에 이를 수 있는 한 번의 생을 기다리고 있어서, 이 이후에는 다시 생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을 사다함과라고 칭한다. 혹은 일래과(一來果)라고도 한다.]
이 가운데 다시 두 가지 가가(家家)를 설하였으니 하늘과 인간 세계를 말한다.
‘천가가(天家家)’란 천상 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혹 일천(一天), 혹은 이삼천(二三天), 이렇게 여러 가(家)를 유전(流轉)하면서 반열반(般涅槃)에 이른다.
‘인가가(人家家)’란 인간 세계를 말하는데 혹은 이 주(洲)에, 혹은 다른 주의 여러 가를 유전하면서 반열반에 이르게 된다. 제6품(第六品)이 다하면 이 과에 머무른다고 말하니, 다시 한 번 이 세간에 와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례대로 2품(品)을 끊고 한 번 세간에 태어나야 반열반을 증득하는데, 이것을 곧 아나함향(阿那含向)이라고 부르며, 9품(品)을 영원히 여의면 이 과에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아나함(阿那含): 범어 anāgāmin의 번역으로, 구역에서는 아나가미(阿那伽彌)ㆍ아나가미(阿那伽迷)라고 하였다. 나함(那含)이라고 약칭한다. 의역하면 불환(不還)ㆍ불래(不來)ㆍ불래상(不來相)이 된다.]
다시는 욕계에 환생(還生)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다시 초선(初禪)의 경지에 있는 욕심을 끊고 나아가 유정(有頂)의 제9품 무간도(無間道)에 이르렀을 때를 모두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무간도라는 것은 또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이름하니, 이 선정으로써 모든 의혹[惑]과 수면(隨眠)을 영원히 무너뜨리고 해탈도(解脫道)에 이르게 되면 진지(盡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누진(漏盡)을 증득하여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을 아라한과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니,
마땅히 자기 자신은 물론 남에게까지 이익이 되는 일을 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탐착(貪着)이 있는 일체 중생들에게 공양을 받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사람은 모두 ‘나는 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증득하였을 때에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기 때문이니, 경에서도
“실제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수다원이라 이름하며 나아가 실제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만약 이런 생각이 생기면 ‘나’ 등에 대하여 집착이 있게 되는데 신견(身見)을 여읜 사람은 저러한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무위(無爲)의 상(相)을 성인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다.
여기에서 ‘무위의 상’이란 성품과 모습이 공(空)하다는 뜻이다.
수보리는 자기 자신이 증득한 것을 서술하면서 이런 생각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무쟁행(無諍行)이고 제일가는 사람이며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등의 말을 하였다.
이러한 말은 무슨 뜻인가?
만약 수보리가 무쟁삼매를 수행하여 곧 공(空)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여래께서 제일가는 사람이라고 찬탄하여 말씀하셨겠는가?
여기에서 ‘제일’이라고 말한 것은 곧 공하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니 경에서
“수보리가 실제로 수행한 것이 없다”고 한 것과 같은 말이다.
‘쟁(諍)’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번뇌(煩惱)이니 그 번뇌를 여읜 것을 무쟁의 선정[無諍定]이라고 말한다.
수보리는 이 선정에 머물면서 장애와 번뇌로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속언(俗言)을 따라 ‘무쟁행(無諍行), 무쟁행’이라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