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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선계경 제4권
1.10. 시품(施品)
[6바라밀]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여 육바라밀을 구족하게 장엄(莊嚴)하니, 단(檀)바라밀ㆍ시(尸)바라밀ㆍ찬제(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을 말한다.
[단(檀)바라밀]
어떤 것을 보살의 단바라밀이라 하는가?
보살의 보시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성시(性施)이고, 둘째는 일체시(一切施)이며, 셋째는 난시(難施)이고, 넷째는 일체자시(一切自施)이며, 다섯째는 선인시(善人施)이고, 여섯째는 일체행시(一切行施)이며, 일곱째는 위제시(爲除施)이고, 여덟째는 자리이타시(自利利他施)이며,
아홉째는 적정시(寂靜施)이다.
1) 성시
성시란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여 나와 남이 함께 이로운 것이다.
안으로 착한 마음과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내며, 재물에 대해 선량하여 마음속에 탐착이 없다.
이것을 보시라 한다. 보살이 보시를 행하는 데는 금계(禁戒)를 받아 지녀 정진해서 십이부경을 믿고, 인(因)을 믿고 과(果)를 믿으며, 중생들이 재물을 구하는 바에 따르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 없다.
이와 같은 신업ㆍ의업ㆍ구업으로 마음과 재물을 보시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사(事)가 곧 오음(五陰)이니,
이것을 성시라 한다.
2) 일체시
어떤 것을 일체시라 하는가?
[내시와 외시]
일체시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내물(內物)이고, 둘째는 외물(外物)이다.
보살마하살이 무량세에 중생에게 보시하기 위하여 음신(陰身)을 받았으니, 이것을 내물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음식을 토해 귀신에게 먹이기 위해서 스스로 식사를 하고 나면 저들에게 토시(吐施)한다. 이것이 내물이다.
이 두 가지 일에서 떠나는 것을 외시(外施)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몸을 버리면서 보시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살이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속타(屬他)이다.
구하는 자가 있는데도 보시하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취할 수 없는 바, 이것을 보살이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속타란 보살마하살이 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몸이 중생에게 속한 것이 마치 세간인과 같으며, 의복과 음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남에게 부림당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자신에게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나, 모든 중생은 보살의 몸에 대해서 머리ㆍ눈ㆍ골수ㆍ뇌에서 나아가 손발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취용(取用)해서 자재함을 얻는다.
외시(外施)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마음에 탐착과 인색함이 없는 것이다.
[보시와 불시]
보살마하살은 이 내외(內外)에 대하여 보시하거나 보시하지 않거나 한다.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이 보시를 받은 뒤 이락(利樂)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면 보시를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시를 받은 뒤에 반드시 이락을 얻으면 곧 보시를 행한다.
보살이 만일 자신의 보시로 해서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선법을 행하는데 방해를 받는 것을 알게 되거나, 또는 비법(非法)으로 구하는 경우에도 보시하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이 만일 백천만억의 중생들이 비법의 인연으로 얻지 못할 것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신명을 잃게 되더라도 끝내 이들을 위하여 혜시(惠施)를 행하지 않는다.
비법으로 구한다 함은 이른바 살생ㆍ속임ㆍ도둑질ㆍ해침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불시(不施)라 한다.
또 다른 불시가 있으니,
보살마하살은 만일 자신에게 이익이 많다는 것을 알고 무량한 중생이 와서 구할 경우 당연히 보시하지 않는데, 이 또한 보시라 한다.
어째서인가? 정심(淨心)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악마거나 악마의 권속이라는 것을 알면 당연히 보시하지 않으며,
만일 악마에게 미혹되어 혼란스러워진 자가 와서 구할 때에도 역시 보시하지 않는다.
만일 광치(狂癡)하거나 뇌란(惱亂)하려는 자가 있을 경우 이런 구걸자에 대해서도 역시 보시하지 않는다.
이것을 내불시(內不施)라 한다.
외불시(外不施)란 불ㆍ독ㆍ칼ㆍ술 등이 능히 중생에게 악연을 짓기 때문에 보살은 끝내 이런 것으로 남에게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익을 짓는 것이라면 보시한다. 보살마하살은 결코 남이 악업을 짓도록 하지 않으며,
만일 보시를 받은 자가 받은 뒤에 반드시 악업을 행할 것을 안다면 역시 보시하지 않는데 이 또한 보시라 한다.
어째서인가? 정심(淨心) 때문이니 손으로 비록 보시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이미 버린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보살은 보시를 받은 사람이 받은 뒤에는 반드시 무량한 악업을 지어서 삼악도에 떨어질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베풀지 않는다.
보살이 비록 보시를 받는 자가 그 재물을 받고 마음에 기뻐하리란 것은 알지만, 그러나 삼악도의 고통을 면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베풀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결코 남들에게 그물을 쳐서 사냥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또한 남들에게 바수천(婆藪天)을 섬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스스로 짐승을 잡아 천신(天神)에게 제시하지 않으며, 남에게도 짐승을 잡아 하늘에 제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물로써는 와서 구하는 자에게 베풀지 않으며, 모든 원악(怨惡)ㆍ타매(打罵)ㆍ계박(繫縛) 같은 것으로도 절대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
만일 고통스럽고 가난과 근심으로 인해 자살하려는 자가 칼ㆍ창 같은 것을 구하더라도 역시 베풀지 않으며,
또한 남에게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못물에 빠지거나 불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만일 병에 걸린 자가 찾는 물건이 있을 경우 의원이 금하는 것은 절대 베풀어 주지 않는다.
음식을 탐하는 자가 밥을 먹었을 경우 밥을 찾더라도 주지 않는다.
이것을 불시(不施)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부모나 사장(師長)이라 하여 보시하지 않으며,
설사 국왕[國主]을 위하더라도 남의 아내가 자식을 멋대로 취하여 남에게 보시하지 않는다.
다만 성읍ㆍ취락ㆍ국토는 제외한다.
만일에 자신의 아내나 자식, 그리고 동복(僮僕)ㆍ권속(眷屬)ㆍ종족일 경우, 먼저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여 타일러 달래고, 그래도 마음에 내켜 하지 않으면 당연히 보시하지 않는다.
설사 달가워하는 자라도 원가(怨家)ㆍ악인(惡人)ㆍ나찰(羅刹)ㆍ악귀(惡鬼)ㆍ전다라(旃陀羅) 같은 종류에게는 절대로 베풀어 주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성읍ㆍ국토ㆍ취락을 남에게 혜시(惠施)한다 하더라도 결코 포악한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또한 부모ㆍ사장(師長)ㆍ형제ㆍ처자ㆍ동복ㆍ노비 등이 소유한 재물을 사사로이 남에게 보시하지 않는다.
보살은 비법(非法)으로 재물을 구해서 보시하지 않으며,
보시를 할 때도 자신의 권속에 대해서 성내거나 때리거나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고 좋은 말로 교도(敎導)해서 기뻐하도록 하는데,
‘이와 같은 보시의 복보(福報)가 너에게도 몫이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보살이 보시를 할 때]
보살은 보시를 할 때 그 마음이 평등하여 이것이 복전(福田)인가 비복전(非福田)인가를 살피지 않고, 원(怨)과 친(親), 종성(種姓)의 존비 등을 따지지도 않는다.
이미 승락한 물건에 대해서는 결코 다시 후회하지 않으며,
많이 주기로 한 것을 결코 적게 주지 않는다.
먼저 좋은 것을 주기로 하고서 나중에 나쁜 것을 주는 일이 없으며,
비록 나쁜 것을 주기로 했더라도 좋은 것을 주고, 조금 주기로 했더라도 많이 준다.
보살이 보시를 할 때, 기쁘지 않은 마음이나 성난 마음이나 어지러운 마음으로 하는 일이 없으며, 보시를 한 뒤에 결코 받은 자에 대하여 보답을 생각하는 일이 없다.
보시를 할 때에는 받는 자가 존귀하다고 해서 공경하고 받들어 올리지 않으며, 받는 자가 비천하다고 해서 집어던지며 주지 않는다.
혹시 받는 자가 주먹질하고 욕지거리하면서 빼앗아가도 보살은 그런 것에 대해 결코 성내지 않는다.
다만 번뇌를 꾸짖을 뿐이지 사람을 나무라지 않으며, 이런 자에 대해서는 깊이 연민을 일으킬 뿐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런 보시로 인해 자신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취하게 되고, 이런 보시가 또한 능히 보리를 장엄하지만,
과보를 구하기 위해 보시를 행한 것이 아니라서 모든 베풀어준 보시를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廻向)한다.
또 남을 가르치기 위해 보시한 것이 아니며, 보시의 과보가 있다는 것을 들어서 보시하는 것이 아니니,
경(經)에서
“음식을 베풀면 힘을 얻고, 의복을 베풀면 색(色)을 얻고, 탈 것을 베풀면 낙(樂)을 얻고, 등불을 베풀면 호안(好眼)을 얻고, 방사(房舍)를 베풀면 수의물(隨意物)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결코 이와 같은 과보를 바라고 보시를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연민 때문에 보시를 하는 것이며,
가난을 없애고자 보시를 하는 것이며,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나아가게 하고자 보시를 하는 것이다.
비시(非施)로 보시하지 않는다.
비시란 잔식(殘食)으로써 성인(聖人)에게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성인이 아닌 자는 구하지 않으며, 베풀지 않는 것이다.
잔식으로 부모ㆍ사장(師長)ㆍ장로ㆍ유덕인(有德人)에게 베풀지 않으며,
구하는 자에게는 당연히 보시하되, 결코 토한 것이나 고름ㆍ땀ㆍ콧물ㆍ가래ㆍ분토(糞土) 등이 섞인 밥을 남에게 보시하지 않으며, 더러운 음식으로도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
무릇 음식을 베풀 때는 많든 적든 간에 먼저 말을 한 후에 베풀며, 말하지 않고는 베풀지 않는다.
파를 먹지 않는 자에게는 파가 섞인 밥을 주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는 자에게는 고기 섞인 밥을 주지 않으며,
술을 못 먹는 자에게는 술을 곁들인 밥을 주지 않는다.
혹시 술 냄새가 나더라도 역시 안 준다.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물건을 보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은 와서 구걸하는 이를 보면 그 즉시 보시하며, 결코 보시를 이유로 남을 채근질하여 요구해서는 안 된다.
천락(天樂)을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이름을 날리기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보답을 바라고 보시하지 않으며, 전륜성왕을 봄이라 하여 보시하지 않으며, 마천(魔天)이나 범천(梵天)의 몸이라 하여 보시하지 않으며, 국왕이나 장자(長者)라 하여 공경하고 공양하고 존중하면서 보시하지 않는다.
적은 물건이라도 오히려 보시하는데 더구나 많은 것이겠는가?
속이기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남의 권속을 깨뜨려 자기 권속을 만들어가 나아가 남의 취락ㆍ성읍ㆍ국토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보시하지 않는다.
보살이 보시할 때 상좌(上座)에게 손으로 받들어 올리며, 사미(沙彌)ㆍ지계(持戒)ㆍ훼계(毁戒)에 이르기까지 귀찮고 싫어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보살이 보시할 때는 결코 걸구(乞求)하는 이를 꾸짖거나 헐뜯어서는 안 되며, 교만하다 하여 보시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재물에 대하여 언제나 버릴 생각을 가지며, 항상 중생을 위하여 재물을 저축한다.
만일 보살이 자기 몫을 이미 버린 것을 확실히 알면, 자기 몫을 취해도 죄가 없다.
보살마하살이 구하는 이를 보았을 때,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이 마치 중병이 든 자가 훌륭한 양의(良醫)를 만난 것 같아서 필요한 바에 따라 한껏 들어주고, 삼시(三時)로 기뻐하니, 이른바 베풀기 전과 베풀 때와 베푼 다음이 그것이다.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언제나 이와 같은 마음을 내며,
설사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와서 걸구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해 보아서 재물이 많은 경우에는 고르게 나누어 주고,
만일 재물이 부족하다면 먼저 가난한 이를 구호한다.
이런 발원(發願)을 하면 이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인(因)이 되는 것이다.
인색함에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를 말한다.
보살마하살은 먼저 하의 인색함을 깨뜨린다. 하의 것을 깨뜨리면 능히 중의 인색함과 상의 인색함, 둘도 깨뜨릴 수 있다.
만일 스스로 자신의 인색함을 깨뜨렸으면 다시 중생을 위하여 그 인색함을 깨뜨리는 법을 말한다. 설법을 하면 중생들이 이익을 받는다.
그리고 보살은 구하지 않는 이에 대해서도 힘껏 재물로 보시하며,
만일 재물이 없으면 반드시 방편의 역력(役力)으로 찾아내서 혜시(惠施)하며,
만일 재시(財施)가 없으면 당연히 법시(法施)를 해서 중생을 교화한다.
너는 지금 어째서 혜시를 행하지 않는가?
앞 사람이 만일 따라서 보시를 하면, 깊이 기뻐하면서 신력(身力)으로 도와 그 부추김을 대신한다.
또 재물이 없는 이는 마땅히 지혜로써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선과 악을 열어 보인다.
그리고 보살이 정전(正典)으로 사견(邪見)을 베풀지 않는 것은 목숨을 살리려고 경률(經律)을 팔아먹지 않는 것이니, 독송(讀誦)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베풀어야 함에도 아끼고 주지 않는 것을 법의 인색함이라 한다.
능히 설법할 수 있음에도 설법하지 않는 것도 또한 법의 인색함이라 한다.
만일 자신이 남들에게 법으로써 보시할 수 없다면 어떻게 중생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다고 하겠는가?
보살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재물이 없어 보시할 수 없으며, 또한 진뇌(瞋惱)하여 스스로 마음을 태우지 않는다.
그리하여 선방편(善方便)으로써 걸구하는 이를 위로하여 타일러 달래면서도 나는 아직까지 찾아오려는 뜻을 부르지 않은 적이 없다.
어째서인가? 처음 발심할 때에 모든 중생에게 보시하겠다고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살이 걸구하는 자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면, 곧장 나가서 맞이해 들이면서 좌석을 내어 준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는 먼저 이야기를 꺼내어 부드러운 말로 물어보고, 필요한 물건은 빠짐없이 베풀어 준다.
보살마하살이 처음 발심(發心)할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을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 및 모든 중생에게 보시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제자가 옷과 발우와 물건을 스승에게 드리면 스승이 비록 취하지 않더라도 그 제자는 무량한 복을 받게 되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그러하다.
자신이 가진 재물을 여러 부처님과 보살에게 드리면 여러 부처님과 보살이 비록 받지 않더라도 이를 베푼 자는 역시 무량한 복을 받게 해서 마치 항하사(恒河沙)처럼 항상 보살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자기 재물을 마치 시방의 여러 부처님과 보살이 맡겨 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부처님과 보살이 이런 재물에 대하여 아까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이 뜻에 따라 자유롭게 중생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또한 보시해서는 안 될 자를 깊이 통찰해서 이렇게 타이른다.
“이런 물건들은 사실 나의 소유가 아니라 바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소유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드러운 말로 걸구하는 자를 깨우쳐서 성내고 원망하지 않도록 하니, 이 때문에 보살이 재(財)와 법(法)의 두 보시를 성취하여 구족하는 것이다.
이 두 보시를 구족하면 성(性)을 알고, 인(因)을 알고, 과(果)를 알고, 분별을 안다.
보살이 원증(怨憎)하는 이에게 보시하는 것은 자인연(慈因緣) 때문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비인연(悲因緣) 때문이며,
덕이 있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희인연(喜因緣) 때문이며,
권속(眷屬)ㆍ형제ㆍ동복(僮僕)에게 보시하는 것은 사인연(捨因緣)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의 인지혜시(因智慧施)라 한다.
그리고 보살은 해시심(害施心)을 안다.
해시심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량세를 지나오면서 보시를 익히지 않은 때문이며,
둘째는 재물이 적기 때문이며,
셋째는 탐착하여 재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후세의 선과보(善果報)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찾아와 걸구하는 자를 보고서 보시할 마음을 즉시 내지 않는 것은 곧 보살이 무량세를 지나오면서 보시하는 마음을 익히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에 보살은 응당 지혜의 힘으로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옛날 무량세 이래로 보시를 익히지 않아서 즉시 발심하지 못한다. 지
금 나에게 많은 재물이 있고 이를 걸구하는 자가 있는데도 만일 혜시(惠施)하지 않는다면, 미래세(未來世)에 다시 인색한 마음을 증장(增長)해서 끝내 이에 수순(隨順)하지 못해 보시의 마음을 닦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보살이 찾아와 걸구하는 이를 보고도 재물이 적다고 하여 시심(施心)을 곧장 내지 못할 경우, 보살은 다시 지혜의 힘을 빌려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무량한 악업의 인연 때문에 무량세 중에 몸이 타자(他者)에 속해 커다란 고뇌와 굶주림ㆍ갈증ㆍ추위ㆍ더위를 받아서 무량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업연(業緣) 때문에 자신의 재물이 적게 된 것이니,
지금 또한 보시하지 않는다면 다시 미래세의 가난과 곤고(困苦)를 증장할 것이요,
지금 만일 이 적은 재물이라도 남에게 보시한다면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곤고하겠지만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능히 얼마 없는 재물이라 하여 아까워하는 마음을 깨뜨릴 수 있다.
그리고 보살이 걸구하는 이를 보고도 좋은 재물에 대해서 탐착하는 마음이 생겨 베풀려는 마음을 곧장 낼 수 없으면, 이럴 때에 보살은 당연히 지혜로써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무상(無常)을 보고 상(常)이라고 생각하고, 아소(我所)가 없는데도 아소가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만일 보시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탐착할 것이니 이는 나의 전도(顚倒)이다.’
이렇게 하면 보살이 능히 좋아하는 물건에 탐착하는 마음을 깨뜨릴 수 있다.
그리고 보살이 과보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보시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럴 때 보살은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모든 법은 상(常)이 없으며 정(定)이 없다. 만일 상과 정이 있다면 보시가 필요 없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인과가 없기 때문이다. 상이 없기 때문에 인과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 보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리의 도과(道果)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면 보살이 능히 과보를 구하지 않는 마음을 깨뜨리고 과보를 구하지 않는 마음을 깨뜨리고 혜시(惠施)를 행할 수 있다.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전도(顚倒)를 알아서 법이 결정함이 없고 상상(常相)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능히 네 가지 원악심(怨惡心)을 깨뜨린다.
그리고 보살은 내신(內身)이 적정(寂靜)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사유하여 항상 이렇게 염(念)한다.
‘내게 만일 재물이 있다면 당연히 모든 부처님과 보살에게 공양하게 하겠으며 법보와 승보에 보시하겠다.’
이것을 보살의 혜시라 한다.
재물이 있든 없든 간에 언제나 이와 같이 하면서 마음을 다짐하여 사유한다.
법시(法施) 또한 마찬가지이니, 이것을 일체시(一切施)라 한다.
3) 난시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능히 난시(難施)를 보시한다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만일 적은 재물을 가지고도 항상 혜시하면 이것을 난시라 한다.
마음으로 애지중지하여 탐착하는 재물이나, 무량세 중에게 열심히 추구하여 얻은 것이나, 큰 방편의 역력(役力)으로 얻은 것과 같은 것들을 남에게 혜시하는 것을 난시라 한다.
4) 일체자시
어떤 것을 일체자시(一切自施)라 하느냐?
보살마하살이 만일 스스로 보시를 행하고, 부모ㆍ형제ㆍ처자ㆍ권속ㆍ노비로 하여금 보시를 하게 하면 이를 일체자시라 한다.
5) 선인시
어떤 것을 선인시(善人施)라 하는가?
만일 선남자가 선심(善心)으로 보시하며, 신심(信心)으로 보시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며, 자신의 손으로 보시하며, 때에 맞게 보시하며, 법에 따라 재물을 얻는 대로 보시한다면, 이것을 선인시라 한다.
6) 일체행시
어떤 것을 보살의 일체행시(一切行施)라 하는가?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을 일체행시라 하며, 항상 보시하는 것을 일체행시라 하며, 복전시(福田施)를 일체행시라 하며, 복전과 비복전(非福田)을 살피지 않는 보시를 일체행시라 하며 때와 때 아닌 것을 살피지 않는 것을 일체행시라 하며, 재물이 보시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살피지 않는 것을 일체행시라 한다.
7) 위제시
어떤 것을 보살이 없애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고 하는가?
만일 중생이 배고프고 목마르고 고통스럽고 번뇌하면 이런 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보시를 하되, 추운 이에게는 옷을 베풀고, 탈 것을 찾는 이에게는 탈 것을 주고, 영락(瓔珞)을 구하는 이에게는 영락을 주고, 도향(塗香)ㆍ말향(末香)ㆍ잡화(雜華)ㆍ등명(燈明)과 방사(房舍)ㆍ와구(臥具)ㆍ병에 따른 의약의 경우에도 역시 모두 이와 같이 한다. 이것을 없애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 한다.
8) 자리이타시
어떤 것을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보시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만일 재물과 법(法)을 그들에게 베풀면 능히 자신과 중생을 위하여 이세(二世)의 낙(樂)을 지으며, 항상 중생에게 무외(無畏)의 낙을 베풀어서, 이른바 호랑이ㆍ사자ㆍ물ㆍ불ㆍ왕난(王難)ㆍ원적(怨賊)을 능히 구제한다.
이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보살마하살의 법시(法施)는 무릇 말하는 것이 애초부터 전도(顚倒)함이 없는 것으로 이를 법시라 하며, 모든 중생을 잘 가르쳐서 경계하는 것을 정법시(淨法施)라 한다.
보살의 재시(財施)는 현재를 이익되게 하지만, 법시를 행하면 능히 현재와 타세(他世)를 이익되게 한다.
재시는 또 중생에게 현세의 고통을 짓는 일도 있지만, 법시는 그러하지 아니하여 능히 현재와 타세의 즐거운 일을 짓는다.
재시는 청정하지 않지만 법시는 청정하다.
재시를 행하는 이는 무변(無邊)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법시의 보시는 무변시(無邊施)라 이름한다.
재시는 얻기 쉽지만 법시는 만나기 어렵다.
이것을 자타(自他)가 이익이 되는 보시라 한다.
9) 적정시
어떤 것을 적정시(寂靜施)라 하는가?
적정시에는 열 가지가 있다.
이 열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는 무애시(無礙施)이고, 둘째는 무착류시(無錯謬施)이며, 셋째는 비장엄시(非莊嚴施)이고, 넷째는 무고심시(無高心施)이며, 다섯째는 무착심시(無箚心施)이고, 여섯째는 무수시(無羞時)이며, 일곱째는 무수시(無愁施)이고, 여덟째는 무비면시(無面施)이며, 아홉째는 무구은보시(無求恩報施)이고, 열째는 불구과보시(不求果報施)이다.
무애시란 보살마하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 모든 바쁜 일[劇務]이나 세사(世事)의 장애를 받지 않는 것이니, 비록 걸구하는 자의 마음에 답답하거나 지체함이 없음을 알더라도 능히 신속하게 희사하여 그 구하는 바에 맞추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무애시라 한다.
무착류시란 보살마하살이 결코 보시에 과보가 없다거나 선악의 과보가 없다고 언념(言念)하지 않고, 또한 바수(婆藪)가 말한 것처럼 살생을 해서 하는 보시가 좋은 과보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탐착함이 없는 보시의 인연으로써 세간의 즐거움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果)를 얻는 것이다.
이것을 무착류시라 한다.
비장엄시란 보살마하살이 결단코 재물을 모아 좋게 장엄하는 것으로 보시를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얻으면 얻는 대로 보시해서 결코 쌓아두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보살이 재(財)와 명(命)의 두 법이 상(常)이 없으며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깊이 알기 때문이다.
찾아와 걸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보시를 하고, 결코 내가 장엄하게 한 다음에 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장엄하여 하는 보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장엄한다는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만일 장엄함을 기다려서 보시한다면 곧 중생으로 하여금 크게 고통과 번뇌를 당하게 할 것이다.
이것을 비장엄시라 한다.
무고심시는 보살마하살이 찾아와서 걸구하는 이를 보면 스스로 낮추는 마음이 생겨서 자신이 시주(施主)라고 자랑하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남보다 뛰어난 보시를 행한다는 명칭을 위해서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무고심시라 한다.
무착심시는 보살마하살이 명칭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이러한 명칭을 잘 관찰하는 일은 공(空)과 같고 바람[風]과 같으며 연뿌리[藕根] 속의 실과 같다.
내가 만일 명칭을 위한 보시를 구한다면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니, 이 때문에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 명칭을 구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무착심시라 한다.
무수시(無羞施)는 보시를 행할 때에 삼시(三時)를 기뻐한다.
이것을 무수시라 한다.
무수시(無愁施)는 보살마하살이 소중히 여기는 재물을 보시하고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근심이 없다.
이것을 무수시라 한다.
무비면시는 보살이 모든 중생을 두루 관찰할 때 그 마음이 평등하여 기쁘게 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무비면시라 한다.
불구은보시는 연민하고 자비를 수집(修集)하며, 안락을 베풀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불구은보시라 한다.
불구과보시는 보살마하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 전륜성왕의 몸과 삼십삼천(三十三天)ㆍ마천(魔天)ㆍ범천(梵天)의 재물의 자재함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보살은 유위법(有爲法)이 파초(芭蕉)나무처럼 무상함을 깊이 보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보시할 때 과보를 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구과보시라 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가 능히 보살로 하여금 단(檀)바라밀을 구족하게 성취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