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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제법본무경 하권
[만수사리의 과거의 업장]
이때 부처님께서 만수시리동진에게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너는 과거 세상 초업지(初業地)에서 이와 같은 법도(法道)에 미처 들어가지 못했을 때에는 어떤 업장(業障)을 지었느냐?
너는 이제 말해 보라. 미래 세상에 있을 이름만 보살인 자[假名菩薩]들이 그와 같은 업장의 악을 듣고는 분명 스스로를 수호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만수시리동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들은 이와 같은 업장의 악을 듣고 나서는 비록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는 하겠지만 업장을 깨끗이 하게 될 것이며, 또한 온갖 법에 걸림 없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과거로 수없는 겁을 지나고, 다시 수없이 넓고 헤아릴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는 시간을 지나고, 다시 그만큼을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절에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께서 계셨으니, 그 명호는 사자고음왕(師子鼓音王) 여래ㆍ응공[應]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구족(明行具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無上)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천인교사(天人敎師)ㆍ불바가바(佛婆伽婆)이셨습니다.
그 여래의 수명은 60구지 나유타 백천 세이셨고, 항가하의 모래처럼 많은 중생들에게 설법하며 조복시키셨고, 또한 3승(乘)으로 중생을 성숙시키셨습니다.
그 세계의 이름은 대광(大光)이었으며, 그곳에 있는 나무나 기둥은 칠보로 만들어졌으며, 그 나무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리들이 났습니다.
말하자면 공의 소리[空聲]와, 모습이 없는 소리[無相聲]와, 원이 없는 소리[無願聲]와, 태어남이 없는 소리[無生聲]와, 멸함이 없는 소리[無滅聲]와, 가진 것이 없는 소리[無所有聲]와, 모양과 상태가 없는 소리[無狀貌聲]였으니,
항상 이와 같은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날 때 그곳의 모든 중생들은 법을 보고 증득하였습니다.
이때 여래의 첫 번째 집회에는 성문(聲聞)이 99구지만큼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었으며 평등한 지혜로 마음을 잘 해탈한 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집회에는 96구지의 비구가 있었고, 세 번째 집회에는 93구지의 비구가 있었으며, 네 번째 집회에는 90구지의 비구가 있었습니다. 역시 모두들 아라한이었으며 평등한 지혜로 마음을 잘 해탈한 자들이었습니다.
저 보살들도 또한 그만큼의 수가 모였으니, 그들은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다 갖추었고 온갖 법도(法道)를 잘 낼 수 있었으며, 백천 구지 나유타의 부처님을 공양했고, 이름[名稱]이 백천 구지 나유타의 불국토에 자자했으며, 많은 백천 구지 나유타의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켰고, 무변문다라니(無邊門陀羅尼)를 얻어 백천 구지 나유타의 삼마지(三摩地)를 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밖의 시업초승발행(始業初乘發行) 보살마하살 역시 한량없고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 여래의 국토는 공덕과 장엄을 모두 갖추었으니, 말로 한다면 끝내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여래가 멸도하신 후 바른 법은 990만 년을 머물렀으며, 그곳 모든 나무의 소리도 다시는 나지 않았습니다.
[희근보살]
세존이시여, 그때 희근(喜根)이라는 어떤 보살비구(菩薩比丘)가 있었는데 설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희근보살은 과거의 행이 순박하고 곧았고 위의를 분별하지 않았으며,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세상의 법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중생들은 모든 근(根)이 다 예리하였으므로 조금만 들어도 금방 알아 깊이 믿고 이해하였기에
그 중생들에게는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을 찬탄해 말하지 않았고,
만족할 줄 아는 것과 덜고 줄이는 것과 홀로 지냄을 기뻐하는 것도 찬탄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럿이 함께 머물지 않는 것을 찬탄해 말하지 않았고,
또한 발기(發起)하여 정진하는 것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으며,
몸소 잡된 행을 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법을 포섭하게 하였습니다.
곧 탐욕의 자성에서 모든 법을 포섭하였고, 곧 성냄의 자성에서 모든 법을 포섭하였으며, 곧 어리석음의 자성에서 모든 법을 포섭하며 장애가 없었습니다.
그는 방편으로 그들로 하여금 모든 행(行)이 하나의 모습[一相]임을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 중생들은 그가 방편으로 거두어들이게 한 뒤에는 어떤 행이나 어떤 위의 때문에 성냄의 장애가 있게 되는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내지 않는 마음이 된 뒤에 곧 인지(忍地)를 얻었으며, 여래의 가르침 속에서 확고하고 무너지지 않는 깊은 마음을 얻었습니다.
[숭의보살]
세존이시여, 그때 또 승의(勝意)라고 하는 어떤 보살비구가 있었는데, 역시 설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승의 설법자는 4제야나(第耶那:善)와 4무색입수(無色入受:無色定)를 얻었고, 12두타(頭多)의 공덕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승의보살은 조복시킬 때 남의 허물을 취하였고, 그 지혜는 동요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승의보살은 촌락에서 음식을 얻다가 모르고 희근보살이 걸식하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집주인을 보고서 곧 집주인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이르자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므로 앉은 후에
그 집주인을 위해 욕심을 적게 가지라고 말하고, 만족할 것을 말하였으며,
덜고 줄이라고 말하고, 여럿이 함께 머무는 허물을 말하였으며,
홀로 지냄을 즐거워하는 것을 찬탄하여 말하고, 여럿이 함께 머물지 않는 것을 찬탄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집주인 앞에서 희근보살을 나쁘게 말하였습니다.
‘그 비구라는 자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전도됨을 취하게 하고, 저 비구라는 자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삿된 견해를 취하게 한다.
저 비구라는 자는 바로 잡된 행위를 하는 자로서 탐욕을 취하며 걸림이 없고, 성냄을 취하며 걸림이 없으며, 어리석음을 취하며 걸림이 없고, 온갖 법을 취하며 걸림이 없다.’
그 집주인은 근기가 예리하고 인(忍)을 얻은 사람이었고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대덕(大德)께서는 탐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탐욕이란 곧 번뇌라고 하겠다.’
집주인이 말하였습니다.
‘대덕이시여, 탐욕이란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비구는 말하였습니다.
‘탐욕이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집주인이 말하였습니다.
‘탐욕은 어디에서 와서 어느 곳으로 가며, 또 어느 곳에 머뭅니까?’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탐욕이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다.’
집주인이 말하였습니다.
‘대덕이시여, 탐욕이 만일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동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남쪽과 서쪽과 북쪽과 위와 아래와 네 간방[四維]에 있는 것도 아니며, 머무는 곳이 없고 또 머묾이 없는 것도 아니라면
그런 탐욕이 어찌 생김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생김이 없다면 어찌 번뇌가 있을 것이며 또 청정하게 하겠습니까?’
이때 승의 비구가 화를 내며 불쾌하게 일어나 가버리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비구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되지 못한 것을 취하게 하는구나.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불타(佛陀)의 소리는 기뻐하고 외도의 소리에는 성을 내며,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범행(梵行)의 소리는 기뻐하고 범행이 아닌 소리에는 성을 낸다.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청정한 소리는 기뻐하고 더럽게 물든 소리에는 성을 내며,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성과(聖果)의 소리는 기뻐하고 범부(凡夫)의 소리에는 성을 낸다.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즐거운 소리는 기뻐하고 괴로운 소리에는 성을 내며,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출가(出家)의 소리는 기뻐하고 재가(在家)의 소리에는 성을 낸다.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세간을 벗어난 소리는 기뻐하고 세간의 소리에는 성을 내며,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보시의 소리에는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아까워하는 소리에는 장애된다는 생각을 한다.
부처님 법 가운데에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계를 지킨다는 소리에는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계를 무너뜨린다는 소리에는 장애된다는 생각을 한다.’
걸식한 집에서 나온 뒤 아란나(阿蘭拏)로 돌아가 거처하던 곳에 이른 다음 다른 비구들도 역시 그와 같이 취하게 하였으며,
곧 대중 가운데서 희근보살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 비구는 많은 사람들을 전도되게 하고, 이 비구는 많은 사람들을 삿된 견해를 갖게 한다.
이 비구는 바로 잡된 행위를 하는 자로서 탐욕을 취하면서도 걸림이 없고, 이와 같이 성냄과 어리석음을 취하면서도 걸림이 없으며, 온갖 법을 취하면서도 걸림이 없다.
[희근보살의 설법]
희근(喜根)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이 비구는 분명 업장(業障)을 짓겠구나.
내가 다음과 같은 심오한 말을 해주어 보리를 돕는 법의 인(因)을 닦도록 해야겠다.’
그때 희근보살은 대중들이 믿게 하려고 곧 모든 비구승 앞에서 가타(伽陀:게송)로 말하였습니다.
탐욕을 열반이라 말하리니
성냄과 어리석음도 이와 같다.
그 가운데 도를 깨달아야 하니
부처님의 보리는 사유할 수 없다.
탐욕을 분별하고
모든 성냄과 어리석음 분별한다면
부처님의 보리와 멀어지리라
비유한다면 저 하늘과 땅만큼.
만일 탐욕과 성냄을 파괴하지 않고서
어리석음에 들어가는 이는 보리를 볼 것이니
그는 곧 훌륭한 보리에 가까워져
인(忍)을 얻는 것도 멀지 않을 것이다.
탐욕과 보리, 이 둘은 둘이 아니니
하나로 평등하게 들어가 함께 상응한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수순하지 않는다면
그는 부처님의 보리와 멀고 또 멀어지리라.
탐욕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번뇌를 일으키고 마음을 물들인 적도 없다.
만일 아상(我想)있고 얻었다는 견해 있다면
저 탐욕의 니리(泥犁)에 들어가게 되리라.
모든 탐욕의 법[欲法]이 곧 불법(佛法)이며
모든 부처님 법이 곧 탐욕의 법이다.
이 둘은 한 글자이며 모습이 없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 도사(導師)가 될 것이다.
계를 지킴과 무너뜨림을 분별한 후에
계로써 스스로를 높이고 취(醉)하여 방일하면
그는 천상에도 나지 못하는데 하물며 보리일까?
얻었다는 견해에 스스로 안주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번뇌를 분별한 후에
성내는 견해에 의지하기 항상 좋아한다면
이러한 도는 훌륭한 보리가 아니니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범부의 얽매임이다.
만일 아란나에 머묾을 분별한 후에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긴다면
그에게는 보리도 없고 불법도 없으리니
아란나라는 견해에 스스로 안주하는 것일 뿐이다.
아란나의 법도 보지 않았으면서
촌락에서 위의를 짓는다면
하늘과 수라(修羅)에게도 그가 바로 적(賊)인데
어찌 보리와 불법이 있겠는가.
나는 부처가 되리라고 분별한다면
그는 범부의 무지의 힘에 끌리는 것이니
모든 불법은 허공과 같아서
그 가운덴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견행(見行)과 보리(菩提) 본래 둘이 아니거늘
이름[名字]과 수(數)와 음(音)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니
만일 이 법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보리와는 멀고 또 멀어질 것이다.
보리를 구한다면 보리는 없으며
보리를 보았다면 보리와 멀어질 것이니
이 가르침에서는 멸도에 이르는 것 아니니
이 법을 분별하면 진실이 없다.
불법(佛法) 가운데서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마음 낸다면
그는 부처님의 보리와 멀어질 것이니
진실이 없는 법에서 부러움을 내었으므로
곧 다시 고뇌를 받게 될 것이다.
공양하고서 공양하지 않은 것과 다르다고 한다면
공양의 법 가운데 집착하는 것이니
이 경계[界]가 같고 평등하단 것을 안다면
그는 사람 가운데 존귀하신 부처님이 될 것이다.
부처님도 부처님의 법도 보지 않고
온갖 종류와 온갖 처소도 본 적 없다면
그는 온갖 법에 물들지 않으리니
보리를 깨닫고 마라(摩羅:악마)를 쳐부수리라.
모든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키려고 하지만
그는 중생계를 생각한 적 없으니
모든 법은 열반과 같고 평등한 것
그가 이것을 본다면 사람 중 존귀한 자가 되리라.
외도(外道)는 나쁜 마음을 가졌다 말하고
모든 부처님은 인승자(人勝者)라고 말하지만
이 둘 사이에 차별은 없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 도사(導師)가 되리라.
보리를 깨달았더라도 깨달은 것은 없고
이와 같이 알았다면 안 것도 없다.
부처님과 부처님 아닌 것, 부처님과 평등하지 않은 것
이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사람 가운데 최상이 되리라.
부처님께선 보리를 깨달으신 적 없고
해탈한 중생도 있은 적 없건만
범부들은 있지도 않은 법을 분별하니
그들은 부처님의 법에서 더욱더 멀어지리라.
유위법(有爲法)은 유위가 아니며
그 모든 수(數)도 있었던 적이 없다.
만일 수가 없다면 셈도 없으리니
이 모든 방편을 둘이라 말하지 않는다.
중생이 없다면 성취함도 없고
불법은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중생 역시 그러하니
이와 같이 안다면 보리에 닿으리라.
훌륭한 보리를 꼭 깨닫고 싶다면
저 탐욕의 법[欲法]을 분별하지 말라.
모든 탐욕의 법의 자성(自性)과 자상(自相)
그것이 바로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덕이다.
부처님의 법 가운데 일으킨 적 없고
부처님의 보리에 마음을 내지 않으며
별다른 보리도 없고 별다른 마음도 없다면
이와 같이 아는 자 도사(導師)가 되리라.
보리심 가졌다고 범부들 스스로 높이고
나는 부처 되리라고 분별한다면
그에게는 보리도 없고 부처님 법도 없으리니
곧 이 법의 자성인(自性印)을 버리는 것이다.
중생을 내가 해탈시키리라 생각한다면
어리석게 중생이란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니
중생이라 말하지만 중생은 없는 것
보리는 중생에게 머물지 않는다.
중생은 이와 같이 두려운 것이라 본다면
그에게는 끝없는 공포가 생기리라.
모든 중생들의 말은 산울림과 같으니
이같이 아는 자 사람 가운데 최상[人中上]이 되리라.
중생은 끝끝내 해탈했고
항상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이 없으며
중생은 적정하여 항상 고요하다고 본다면
이와 같이 아는 자 도사가 되리라.
탐욕은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탐욕은 어떠한 방위에도 의지함이 없거늘
참됨이 없는 온갖 법을 분별한 뒤에
이와 같은 나라는 생각에 범부들 미혹된다.
메아리 같고 허깨비 같고 불꽃 등과 같으며
석녀(石女)의 아이 같고 또한 꿈과 같아서
저 온갖 번뇌 볼 수 없는 것인데도
범부들 끊임없이 행하니 어리석음 때문이다.
번뇌를 구한다면 번뇌가 있을 것이니
바른 생각으로 선택하고 게으르지 말라.
도와 번뇌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분별없는 보리의 땅[菩提地]에 닿으리라.
공법(空法)을 범부가 두려워한다면
부처님의 법에서 그는 멀어질 것이며
만일 공법에 의심이 없다면
가장 훌륭한 보리를 그가 얻으리라.
말로써 경계를 분별하지만
말과 이치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름과 이로운 과보에 물들어 집착하면서도
도를 생각하며 의혹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구나.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한 것을 생각하며
아란나를 보고 머물 곳이 있다고 하니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안다고 분별한 뒤에
다시 탐욕의 힘에 끌려가는구나.
누군가 탐욕의 법을 피해 도망간다면
그는 탐욕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탐욕이란 법의 실체를 수순하여 깨달을 수 있다면
그는 곧 법을 보고 탐욕도 벗어나리라.
비록 오랜 세월 금계(禁戒)를 보호하고
끝없는 겁 동안 선정의 마음 일으켰더라도
이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그는 해탈하지 못하리니
이 진실제(眞實際)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이 법이 무소유(無所有)임을 깨닫는다면
모든 법 가운데서 그는 집착이 없으리니
계와 파계(破戒)를 분별하지 않으므로
범부들의 견해 있는 경계를 벗어날 것이다.
계를 지키지만 항상 계가 없는 것임을 보고
계의 뜻이 파계하는 법임을 깨닫는다면
그는 파계를 얻을 수 없고
계를 행하는 모습도 이와 같음을 그는 깨달으리라.
법왕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법을 가지고
구지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시며
하나의 방편으로 거기에 들게 하시니
이 보리 가운데는 고요하고 번뇌가 없다.
범부들 큰 지옥에 떨어졌더라도
훌륭한 법 설하는 곳에서 법을 듣고 나면
지음도 없고, 물질도 없고, 모습도 없으리니
한 가지 도리의 방편으로 자성이 공하리라.
차라리 훌륭한 집에서 탐욕의 즐거움을 기뻐하며
법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지언정
이 가르침에 출가한 뒤에
두타(頭多)로서 스스로를 높이고 유견(有見)을 얻지는 말라.
모든 시방의 불세존들
세상에 머물며 이익을 주는 대선주(大仙主)
모두들 온갖 법이 공(空)인 줄 아신 뒤에
법의 일어남 없어 보리에 닿으셨다.
어리석어 깨끗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이 진실한 법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한다면
그는 구지 겁 동안 많은 고통을 겪으며
항상 쉼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숭의보살과 희근보살의 업]
이 가타를 말했을 때 3만 명의 천자가 무생법인을 얻었고, 1만 8천 명의 비구가 받아들이지 않게 된 까닭에 번뇌의 마음에서 모두 해탈하였으며, 곧 땅이 갈라지면서 승의보살은 죽어 대제규(大啼叫)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업장 때문에 백천 구지 겁 동안 대니리(大泥犁:대지옥)에서 온갖 극심한 고통을 받았으며, 그런 뒤에 7백만 생(生) 동안 항상 비방을 받았습니다.
많은 백천 구지겁 동안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이름도 듣지 못하였고, 그 후에 여래를 만나 그 가르침 가운데 출가하였으나 기뻐하지 않았으며, 6백만 생 동안 출가한 뒤에 계를 파하고 환속하였습니다.
그는 남은 업장 때문에 많은 백천 생 동안 어둡고 둔한 근기로 지냈습니다.
그 시절의 희근 비구 보살마하살이라는 설법자는 지금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고 깨달아 현재 머물며 설법하고 계십니다.
동쪽으로 백천 구지의 불국토를 지나 보화세계(寶畵世界)에 계신 밀무구폐일광복덕위치왕(密無垢蔽日光福德威熾王)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이시며, 현재도 설법하고 계십니다.
그 시절 승의 비구라던 설법자는 바로 저입니다. 그때 설법하는 사람이 되어 이름을 승의 비구라고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미처 이 법도(法道)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고통을 받고, 고통이 없는 가운데 고통을 분별하고 고통에 전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승을 일으킨 자이건 독각승을 일으킨 자이건 성문승을 일으킨 자이건 이와 같은 업장을 짓고 이와 같은 고통을 받지 않으려면
어떤 종류의 법도 헐뜯거나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저 바른 법도 역시 헐뜯거나 버려서는 안 되며, 또한 어느 한 곳에서도 성냄의 장애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만수시리동진에게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그때 너는 그 가타를 듣고 어떠한 훌륭한 일이 있었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가타를 들은 인연으로 저 업장에서 일어나 곳곳으로 치달리며 두루 유전(流轉)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모든 곳에서 매우 깊은 인(忍)을 얻고 확고한 인을 얻어서 심오한 법을 잘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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