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영락본업경 하권
5. 불모품(佛母品)
이때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와 보살, 둘은 최초에 비추는 지혜가 무엇으로부터 생깁니까?
적조(寂照)와 조적(照寂)의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제(二諦)의 법성(法性)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유(有)입니까, 무(無)입니까? 제일의제는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유제(有諦)ㆍ무제(無諦)ㆍ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란 이것이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이니라.
나아가 일체법도 또한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이니라.
그 까닭은 모든 불보살은 법에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이제(二諦)에서 세제(世諦)는 유(有)이므로 불공(不空)이며, 무제(無諦)는 공(空)이므로 불유(不有)이니라.
이제는 항상 그러하기 때문에 불일(不一)이며, 성스럽게 비추면 공이므로 불이(不二)이니라.
부처가 있거나 부처가 없어도 법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이며, 제일(第一)은 둘이 아니므로 불유이며,
부처가 없음과 부처가 있음이 법계의 두 가지 모습이므로 불일이며, 제법은 항상 청정하므로 불이이며,
제불은 도리어 범부를 위하여 존재하므로 불공이며, 무가 없기 때문에 불유이니라.
공은 실재하기 때문에 불일이며, 본제(本際)가 불생(不生)이기 때문에 불이이며,
제법의 모습은 거짓 이름[假名]에 불과해 파괴되지 않으므로 불공이며, 제법은 곧 제법이 아니므로 불유이며,
법이 법이 아니므로 불이이며, 비법이 아니므로 불일이니라.
불자여, 이제(二諦)의 뜻은 하나가 아니면서 또한 둘도 아니며, 항상 하지도 않고 또한 단멸하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은 곧 성스러운 지혜란 둘이 없다는 것이니, 둘이 없기 때문에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가 되느니라.
불자여, 시방의 무극찰토(無極刹土)에 있는 모든 부처님께서도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나니, 내 이제 이 대중을 위하여 간략히 명월영락경(明月瓔珞經) 가운데 이제(二諦)의 중요한 뜻을 설하리라.”
그때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모든 불보살의 대방편과 평등한 지혜로써 모든 법계를 비추는 것은 돈등각(頓等覺)입니까? 점점각(漸漸覺)입니까?
무명장(無明藏)과 마음은 하나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겁량(劫量)의 멀고 가까움은 다시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그대는 과거 칠불(七佛)의 법 중에서 이미 하나하나 물었기 때문에, 이제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 대중 십사억 사람을 위하여 이들이 이 법 중에서 다시금 결정요의(決定了義)를 습득하기를 원하는 까닭에 이와 같이 물었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제 십사억 대중을 위하여 금강의 입으로써 결정요의를 설하리라.
불자여, 나의 옛날 모임 중에 일억 팔천의 무구(無垢) 대사가 있었느니라.
앉은 자리에서 곧 법성의 근원을 통달하고 당장에 둘이 없는 일체법의 일합상(一合相)을 깨닫고, 법회에서 나와서 각각 시방 세계에 앉아 보살영락대장(菩薩瓔珞大藏)을 설하였느니라.
그때에 앉아 있던 대중 일억 팔천은 세존을 뵈었는데 돈각여래(頓覺如來)라고 이름 했느니라.
각각 백보(百寶)로 장엄한 사자후(獅子吼)의 자리에 앉으시니, 그때 무량한 대중들도 또한 한 자리에 앉아서 등각여래(等覺如來)께서 영락법장(瓔珞法藏)을 설하심을 들었느니라.
따라서 점각(漸覺)의 세존은 없고 다만 돈각여래만이 있나니, 삼세의 제불이 설하시는 바와 다름이 없이 지금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설하느니라.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무명과 마음이 하나인가?’라고 말한 그것은 그렇지 않느니라.
만약 명료히 이해하는 것과 무명의 모든 견해가 하나의 모습[一相]이라면 마땅히 얽매임이나 풀려남이 없고, 범부와 부처가 둘이 아니리라.
왜냐 하면 번뇌가 동일한 체상(體相)이기 때문이며,
한 마음에서 공동으로 생하고 멸하는 것은 동시로서 별개가 아니고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만약 얽매임과 풀려남이 하나의 모습이라면 사대(四大)가 하나일 것이고, 육미(六味)가 마땅히 다르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나 크기가 다르고 맛이 다르기 때문에 얽매임과 풀려남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니라.
불자여, 일체 보살이 범부일 때에 일체의 번뇌를 갖고 있었으나, 끊을 때는 거친 부분이 먼저 없어지고 미세한 부분이 뒤에 없어지느니라.
만약 일심과 번뇌가 하나라면 응당 밝고 어두움에 둘이 있을 수 없나니,
불자여, 다시 가까운 것으로써 먼 것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범부의 착한 마음속에도 오히려 불선(不善)이 없거늘, 하물며 무상(無相)한 마음 가운데 무명이 있겠느냐?
불자여, 또한 선악이 일심이라고 하는 이것은 병사왕(沙王)의 나라에 있던 외도(外道) 안타사(安陀師)의 게송에서
‘밝음과 어둠은 하나의 모습이며, 선과 악이 일심이다’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일 뿐이니라.
불자여, 내 법의 바른 뜻은
‘선악을 동일하게 행하면 속박이 있고 해탈이 있으며, 범부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느니라.
억 겁 동안에 상속하고 동일하게 행하더라도 선악이 동일한 마음이 될 수 없느니라.
옛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무상(無相)의 지화(智火)가 무명의 어둠을 소멸한다’고 하셨느니라.
또한 선악의 둘은 별개인데 동일한 과보를 말하는 것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이니라.
일체의 선은 불과(佛果)를 받고, 무명은 유위 생멸의 과를 받느니라.
그러므로 선과(善果)는 선인(善因)에서 생기고 악과(惡果)는 악인(惡因)에서 생기므로, 선은 생멸의 과를 받지 않고 오직 항상 부처님의 과를 받는다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만약 범부와 성인의 일체 선(善)은 모두 무루(無漏)라고 이름 한다면 누과(漏果)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
런데 누과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등지게 하기 위한 것이니라.
원인[因]을 연하여 유위의 과보를 일으키는 것이지 무루가 되는 것이 아니니라.
인(因)이란 무명과 업의 과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삼수삼고(三受三苦)라 하나니, 고고(苦苦)ㆍ행고(行苦)ㆍ괴고(壞苦)와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사수(捨受)이니라. 두 가지 수는 선의 원인을 조건으로 하는 과이고, 고수는 악의 원인을 조건으로 하는 과이니 일체개고(一切皆苦)이며, 무명을 근본으로 하느니라.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일체 보살이 도를 행하는 겁 수에 멀고 가까움’이라고 말한 것은,
비유하면 일 리(里)ㆍ가 리 나아가 십 리까지의 돌에 방광(方廣)도 또한 그러하니라.
범천(梵天)의 옷의 무게가 삼 수(銖)인데 인간계의 일월의 햇수로 삼 년에 한 번씩 스쳐서 이 돌이 곧 다 없어지는 것을 일 소겁(小劫)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또는 일 리, 이 리 나아가 사십 리까지도 소겁이라 하느니라.
팔십 리의 돌에 방광도 또한 그와 같은데 범천의 옷의 무게가 삼 수인 것을 가지고 곧 범천계의 백보광명주(百寶光明珠)를 일월의 햇수로 하여 삼 년에 한 번 스치는데 이 돌이 곧 없어지는 것을 중겁(中劫)이라 하느니라.
또 팔백 리의 돌에 방광도 또한 그와 같은데, 정거천(淨居天)의 옷의 무게가 삼 수인 것을 가지고 곧 정거천의 천보광명(千寶光明)의 거울을 일월의 햇수로 하여 삼 년에 한 번 스쳐서 이 돌이 곧 없어지는 것을 일대아승기겁(一大阿僧祇劫)이라 하느니라.
불자여, 겁 수(數)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일 리, 이 리 나아가 십 리까지의 돌이 다함을 일 리 겁(劫), 이 리 겁이라 하고, 오십 리의 돌이 다함을 오십 리 겁이라 하고, 백 리의 돌이 다함을 백 리 겁이라 하느니라.
천 리의 돌이 다함을 천 리 겁이라 하고, 만 리의 돌이 다함을 이름 하여 만 리 겁이라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 현성이 이 수량에 들어가 일체 법문을 닦고 시간이 오래고 가까움에 따라 불과(佛果)를 얻고 그 수가 백 겁이 되면 곧 등각(等覺)을 얻느니라.
만약 일체 중생이 이 수에 들어간다면 불과를 얻는 것이 멀지 않을 것이며, 만약 들어가지 않은 이는 보살이라 이름 하지 않느니라.
불자여, 법문이란 이른바 십신심(十信心)이니, 이것이 일체 행의 근본이니라.
그러므로 십신심 중에 하나의 신심에 십품(十品)의 신심이 있으면 백법명문(百法明門)이 되며, 또 이 백법명심(百法明心) 중에서 일심에 백심이 있으므로 천법 명문이 되고, 또 천법 명심 중에서 일심에 천심이 있으므로 만법 명문이 되느니라.
이와 같이 늘여 나가다 보면 무량한 명(明)에 이르며, 더욱 전전하여 상상(上上)의 법에 승진(勝進)하므로 명명법문(明明法門)이 되느니라.
백만 아승기 공덕과 일체 행은 다 이 명문(明門)에 들어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