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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법집경 제4권
[심념처]
이때에 분신혜보살이 무소발보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무엇이 이 보살마하살의 심념처지(心念處智)이며 무엇이 이 염(念)이며 무엇이 심념처(心念處)인가?”
이때에 무소발 보살마하살이 분신혜보살에게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 중의 무생지(無生智)를 심념처지라 하고 무생지를 가장 뛰어나다고 하느니라.
모든 보살의 저 무생지는 ‘무생지업(無生智業)으로써 모든 처소에서 산란하지 않고, 모든 처소에서 정직하며, 모든 처소에서 동요하지 않는다’는 이름을 얻느니라.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아서 헤아릴 수 없으니 모든 성문과 벽지불은 알 수 없느니라.
어떠한 심념(心念)으로써 능히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듣고 보호하여 유지하며 흩뜨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가?
이 보살의 심념처는 모든 부처님 여래의 눈앞에서 아는 것이니, 이것은 보살의 심념이니라.
보살의 심념처에는 열 가지 심념처가 있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신념처(身念處)ㆍ수념처(受念處)ㆍ심념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ㆍ염불념처(念佛念處)ㆍ염법처(念法處)ㆍ염승처(念僧處)ㆍ염계(念戒)ㆍ염사(念捨)ㆍ염천(念天)이 심념처인데,
이것을 열 가지 염처라고 하느니라.
[신념처]
선남자여, 무엇이 이 보살의 신념처인가?
보살은 이와 같이 마음을 안정시키느니라.
이 몸이 왔지만 본제(本際)를 좇음이 아니고 가도 후제(後際)에 이르지 못하며
본제나 미래제(未來際)에 머물지 못하고 오직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을 따라서 생겨나며,
지을 것도 없고 목숨이랄 것도 없고 전제ㆍ중제ㆍ후제가 없으며,머물지 않으니 근본도 없고 가르칠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어서 다만 객진(客塵)이란 말로써 설명하느니라.
만약 몸의 형상이라면 질(質)이나 입(入)인데 만약 이와 같이 몸을 관찰하면 이 몸은 견고한 것이 아니니라.
오직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화합하여 부정하게 생긴 것으로, 냄새 나고 더러운데도 몸이라 여겨서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고 두려워하여 적란(賊亂)이라 하며, 파괴되어 머물지 않고, 여러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 가지 병이 집을 삼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은 몸 가운데서는 이와 같이 편안하게 생각하느니라.
이 몸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많은 부분이 모인 것으로 발ㆍ발가락ㆍ발꿈치ㆍ복사뼈ㆍ발뒤꿈치ㆍ정강이ㆍ넓적다리ㆍ무릎ㆍ관골ㆍ요추ㆍ가슴의 갈비ㆍ배의 갈비와, 손ㆍ손가락ㆍ팔꿈치ㆍ팔뚝ㆍ어깨ㆍ팔ㆍ뺨ㆍ턱ㆍ목ㆍ해골과 눈ㆍ귀와 같은 사물이 쌓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몸이니, 업으로써 생멸 변화하게 만들어진 것이니라.
여러 가지 번뇌와 수번뇌로써 허망하게 분별하여 백천만 가지의 집이 되었느니라. 이 몸은 여러 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이 많으니 터럭ㆍ손발톱ㆍ이빨ㆍ피ㆍ살ㆍ가죽ㆍ골ㆍ간ㆍ쓸개ㆍ창자ㆍ위ㆍ생장ㆍ숙장ㆍ비장ㆍ신장ㆍ심장ㆍ폐ㆍ지방ㆍ고황ㆍ뇌막ㆍ누렇고 흰 담ㆍ생식기ㆍ눈물ㆍ침ㆍ눈꼽ㆍ대소변은 냄새나고 더러워 싫어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깨끗하지 못한 사물이 모여서 된 것인데 이 가운데 어떠한 것이 이 몸인가?
보살은 이와 같이 몸을 관찰하고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이 몸은 실제가 없어 허공과 같으니라.’
이것을 보살의 허공과 같은 염처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마음을 안정하면 모든 법을 모두 허공과 같이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몸을 이와 같이 알면 모든 법에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음을 머물게 하지도 않으니, 이 보살이 움직이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주념처라고 하느니라.
생각을 머문 가운데 이와 같이 아나니, 보리와 같은 몸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러한 가운데서는 싫은 마음을 낼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두가 그릇된 생각이며, 바른 생각이 아닌데 어찌 법 가운데 싫은 마음을 내겠는가?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신념처라 하느니라.
[수념처]
또 선남자여, 무엇이 이 보살의 수념처(受念處)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이와 같은 마음을 내느니라.
수(受)라고 말하는 것은 각(覺)이라 하는데 저 각에는 세 가지가 있느니라.
뒤바뀜ㆍ뒤바뀌지 아니함ㆍ이 둘을 여읜 것 등이니라.
또 뒤바뀌게 받는 것은 모든 범부의 산란한 마음과 뒤바뀐 마음을 말하느니라.
저 모든 범부는 무상(無常)으로써 항상함을 받고, 괴로움으로써 즐거움을 받고, 내[我]가 없음으로써 나라고 하는 것을 받고, 깨끗하지 못함으로써 깨끗함을 받으니,
이것을 뒤바뀐 받음이라고 하느니라.
뒤바뀌지 않고 받는 것은 항상함이 없음을 받으면 항상함이 없게 되고, 괴로움을 받으면 괴롭게 되며, 내가 없음을 받으면 내가 없게 되고, 깨끗하지 못함을 받으면 깨끗하지 못하게 되나니,
이것을 성문과 벽지불의 받음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이름하여 뒤바뀌지 않는 받음이라고 하느니라.
저 두 가지 받음을 여읜다는 것은 무상과 항상하지 아니함과 무상하지 아니한 것을 받고, 괴로움과 괴롭지 아니함과 괴로움이 없지 아니함을 받고, 내가 없음과 내가 아님과 내가 없지 아니함을 받고, 깨끗하지 못함과 깨끗하지 아니함과 깨끗하지 못하지 아니함을 받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수념처라고 하느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받되 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능히 받을 수 있는 것도 보지 못하며 받을 것도 보지 못하느니라.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여래께서 항상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법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 이 가운데 어떠한 법을 받는 것인가?
받을 것이 아닌 것을 받는다고 생각하느니라.
저 받을 것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위법이 아니면 유위법을 받으며, 무위법과 유위법을 여의면 받을 것이 없느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저 받을 것을 받음을 보지 못하느니라.
다시 받을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능히 저 받을 것을 가르치는 것이니라.
이 보살은 보리와 같이 보며, 능히 받을 수 있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수념처라고 하느니라.
[심념처]
또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심념처(心念處)인가?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생각하느니라.
‘저 받음은 오직 마음이지만 마음은 머물지도 않고 취할 수도 없으며 형체도 없구나.’
어떠한 법이 취할 수도 없으며 형체도 없는 것인가?
저 받은 바 법은 무엇을 위한 까닭인가?
마음도 아니며 마음으로 아는 것도 아니며, 마음도 아니며 마음으로 보는 것도 아니니라.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어떠한 마음을 따르고 어떠한 인연을 좇아서 나는가?’
저 모든 마음은 모두 다른 힘을 말미암아서 있음을 보느니라.
이 보살은 마음을 여의었지만 보리가 있음을 보지 않으니 이 마음의 법이 곧 보리임을 아느니라.
보살은 이때에 곧 마음이 자재함을 얻고 마음이 자재함을 얻었으므로 대승(大乘)에 자재하니라.
이때에 모든 중생은 평등한 마음을 얻으며, 보살은 이때에 대승 가운데 머물러 다른 힘에 의지하지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심념처라고 하느니라.
[법념처]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법념처(法念處)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어떠한 법을 따라 바른 생각을 내는가?
선법(善法)ㆍ불선법(不善法)ㆍ꾸짖을 수 있는 법ㆍ꾸짖을 수 없는 법ㆍ유루법ㆍ무루법ㆍ세간법ㆍ출세간법ㆍ성문법ㆍ벽지불법ㆍ범부법ㆍ범부 아닌 법에 상관없이
보살은 법에 바른 생각을 내고, 선교(善巧)로 능히 알고, 선업(善業)으로 유연해지며, 능히 잘 닦아 익히고, 필경(畢竟)을 잘 닦고 자력(自力)을 잘 닦고 자재를 잘 닦아서 평등한 법은 생멸하지 않음을 아느니라.
이러한 보살은 한 법도 생멸하지 아니함을 여의는 것은 보지 못하며, 한 법도 공하고 상(相)이 없고 원이 없음을 여의는 것은 보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모든 법에는 수자(壽者)가 없으니 자성이 적정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에는 내가 없으니 자성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장애가 없으니 자성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분별이 없으니, 심의식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적정하니 번뇌의 성질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말[言語]이 없으니 자성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다하지 않으니 무위(無爲)의 성품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헤아릴 수 없으니 모든 수량을 초과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바르고 곧으니 모든 희론(戱論)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근본이 없으니 종자(種子)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과실(過失)이 없으니 근본이 스스로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오는 것이 아니니 형상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가는 것이 아니니 머묾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빛나고 밝으니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공하나니 인연을 좇아 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다툼[諍]이 없으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스스로 지혜의 힘에 의지하니 생각하는 것을 따라서 깨닫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보리이니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오직 이름과 글자뿐이니 실제로 물질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모든 견해를 여의었으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속박하지도 아니하고 벗어나지도 아니하였으니 형상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가는 것이 아니니 진여로써 몸을 삼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한 세계이니 진실한 법계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차별이 없으니 실제적인 진리는 평등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하고 모든 법을 수행하여,
중생이 차별되다고 보지 않으며,
법이 차별되다고 보지 않으며,
승(乘)이 차별되다고 보지 않으며,
부처님의 국토가 차별된다고 보지 않으며,
법이 차별된다고 보지 않으며, 묘한 법이 차별되다고 보지 않으며,
속박한다고 보지 않으며, 벗어난다고 보지 않으며,
세간을 보지 않으며, 열반을 보지 않으며,
버리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받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적정에 머물고 움직이지 않음에 머무느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능히 이와 같은 적정한 해탈을 보시고, 보살이 저 모든 부처님 국토에 있으면 즉시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보살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기별(記莂)을 주시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법념처라고 하느니라.
[염불념처]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의 염불념처(念佛念處)인가?
선남자여, 염불을 수행하면서 모든 중생을 생각하고
‘나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겠다’고 하느니라.
이 보살은 이와 같은 염처에 편안하게 머물러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소유하신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과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부처님 법[十八不共法]과 저 모든 부처님의 법을 나는 반드시 성취하겠다’고 생각하느니라.
다시 저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소유하신 것을 생각하고 이와 같이 생각하느니라.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넓고 크며 청정하고 때 묻지 않은 광명은 모든 번뇌에 부림을 당하는 것을 여의고 번뇌의 습기를 끊어 지혜로써 으뜸을 삼고 지혜로 증상(增上)을 삼아 모든 부처님의 무위의 증상으로써 모든 증득한 증상법에 이르러 모든 소지장(所智障)과 번뇌장(煩惱障)을 멀리 여의면 모든 성문과 벽지불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분별이 없는 것으로써 몸을 삼으니 자연히 장애가 없고 행함도 없고 걸림도 없고 머묾도 없게 되어 모든 중생의 마음을 비추니 허공과 같이 분별이 없느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도 이와 같이 생각하시느니라.
‘보살과 저 모든 부처님은 생각하는 보배요, 모든 부처님 여래는 재보(財寶)요, 모든 부처님은 곳간이다.’
이와 같은 법을 생각하면 염불념처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생각하시지 아니하고 또한 생각하시지 않음도 아니며, 모든 처소에서도 자연히 분별이 없으시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시느니라.
‘보살은 저 생각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염불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과 모든 법에도 차별상(差別相)을 두지 않으시니, 저 생각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염불이라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분별이 없으시되 또한 분별이 없지도 않고, 취하지 않으시되 또한 취하지 않음도 아니며, 가지 않으시되 또한 가지 않으심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으시되 없어지시는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생각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염불이라고 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큰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하시고,
대자대비로써 실천을 삼아 중생의 무리를 제도함으로써 구원하시는 분이 되시며,
큰 의사가 되어 번뇌를 베어 뽑아 버리시며,
모든 중생이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시며,
항상 적정한 삼매의 경계에서 세간의 열반을 여의고 머물지 아니하며,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고 저 언덕에 도착하여 대중생(大衆生)으로 머물러 유지하고 대중생으로 의지하며,
모든 태어난 몸을 없애고 법신을 얻어 법의 경계에 머물며,
모든 처소에서 마음이 장애가 없으며,
일시에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며 몸과 입으로 실수가 없어 기별(記莂) 주는 것이 허망하지 않게 하며,
모든 일에서 몸ㆍ입ㆍ뜻의 업에 혐의할 것이 없으며,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 따위와 모든 번뇌를 영원히 여의어 모든 마군과 외도를 항복시키며,
모든 세간과 다투지 않느니라.
모든 세간의 깊은 바다보다 깊고,
모든 수미산보다 더 무거우며,
흔들리지 않기는 대지보다 더하며,
물보다 유연하고 불보다 빛나며,
집착하지 않기는 바람보다 더하고,
때가 없기로는 허공보다 더하고,
가는 것의 빠르기는 생각보다 빠르고,
뜻과 같기는 마니보(摩尼寶)보다 뛰어나느니라.
일체종지(一切種智)는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모든 중생은 모든 집착하는 처소를 영원히 여의며,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정진은 쉬지 않느니라.
헤아릴 수 없는 색신(色身), 헤아릴 수 없는 음성, 헤아릴 수 없는 공덕, 헤아릴 수 없는 경계는 생각이나 토의를 할 수 없으며, 마침내 생각이나 토의하지 못할 법신을 얻어 마음과 의식의 경계를 초월하느니라.
밝게 행하는 마음으로써 3취(聚)의 나쁜 법을 끊어 없애고, 대비(大悲)를 강성하게 해서 소유한 공덕으로 모든 중생과 함께하며, 모든 중생을 부모와 같이 여기고, 원수거나 친한 이거나 평등하며, 모든 중생이 향을 발라주거나 칼로 베어도 근심하거나 기쁜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모든 처소에 머물러 큰 광명이 있어 한량없으며, 마침내 저 언덕에 이르느니라.
큰 보리심의 중생[大心衆生]은 큰 법의 좋은 재물로 크게 밝은 행[大明行]을 성취하고, 큰 법사가 되어 능히 큰 법을 말하며, 대장부가 되어 마침내 대장부의 상(相)을 성취하면 모든 세간은 항복시키지 못하느니라.
모든 세간을 비추는 광명이 되어 큰 방편으로 큰 선의 경계를 실천하며 마침내 크게 해탈하고 마침내 큰 몸이 되어 큰 중생으로써 권속을 삼고 큰 중생들에게 둘러싸임에 장애가 없느니라.
보고 듣는 사람이 공양을 올리고 수행하며 친근히 하느니라.
스스로의 즐거움을 멀리 여의고 다른 이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느니라.
바른 법을 사랑하고 좋아하여 법으로써 재산을 삼고, 법으로써 식량을 삼으며, 법으로써 옷을 삼으며, 법으로써 근본을 삼으며, 법으로써 자재하여 대법왕(大法王)이 되고, 법시주(法施主)가 되어 항상 법을 희사하기를 즐기며, 항상 방일하지 아니하며, 항상 적정을 좋아하느니라.
모든 중생에게 교량이 되니 대왕의 길이 평탄하여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해의 광명이 모든 어두움을 깨뜨림은 대범왕(大梵王)과 대지금강(大智金剛)의 큰 법 화살과 같고, 맑고 깨끗한 색신(色身)은 아무리 보아도 싫거나 만족함이 없으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보살은 저 모든 공덕을 생각하고저 공덕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하느니라.
저 공덕을 성취하기 위하여 바르게 생각하니,
이런 까닭으로 염불이라고 하며,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염불념처라고 하느니라.
[염법처]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염법처(念法處)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이와 같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은 모두 법에서 생긴다.
법에서 변화하고 법을 좇아 얻고 법을 좇아 강성해지고 법을 좇아 있고 법을 좇아 경계 짓고 법을 좇아 의지하고 법을 좇아 성취하셨다.’
또 이렇게 생각하느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께 있는 상호의 장엄, 저것도 또한 법에서 생겼고 법에서 변화했고 법에서 얻고 법에서 성취하였으며,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소유하신 열 가지 힘, 네 가지 두려움 없음,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부처님 법도 또한 법에서 생기고 법에서 변화했고 법에서 얻었고 법에서 성취했으며,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소유하신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법, 저 법도 역시 법에서 생기고 법에서 변화했고 법에서 얻었고 법에서 성취했다.
세간과 출세간에 있는 즐거움, 저 모든 즐거운 일들도 또한 법에서 생기고 법에서 변화했고 법에서 얻었고 법에서 성취했다.’
이런 까닭으로 나도 모든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며 당연히 법을 존중하며, 법의 경계에 의지하며, 법에 의지해 수행하며, 법의 끝마침[畢竟]에 의지하며, 법에 의지하여 견고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법념처라고 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법은 평등하게 모든 중생에 머물러 높고 낮은 중생을 보고 차별하지 않는다.
나도 또한 법과 같이 마음에 분별함이 없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법은 얼굴을 보고 작업(作業)을 하지 않으니 법은 붕당(朋黨)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법과 같이 마음이 평등하다.
법은 때[時]를 보고 작업을 하지 않으니 법은 정한 때가 없이 와서 속마음을 스스로 밝혀 알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법과 같이 마음이 평등하다.
법은 큰 중생[大衆生]에게 작업을 하지 않으며, 하열한 중생에게도 작업을 하지 않으니 법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법과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법은 맑고 깨끗한 중생에게 이익을 짓지 않으며, 청정하지 않은 중생에게도 이익을 짓지 않으니 법은 높다거나 낮다거나 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법과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법은 성인에게 이익을 짓지 않으며, 성인이 아니어도 이익을 짓지 않으니 복밭이니 복밭이 아니니 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법은 낮이라고 이익을 짓는 것도 아니며 밤이라고 이익을 짓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낮이라고 이익을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 밤이라고 이익을 짓는 것도 아니니라.
법은 항상 쉬지 않고 이익을 짓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법은 교화할 수 있는 중생이면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법은 성내는 중생에게 이익을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내지 않는 중생에게 이익을 짓고자 하니 모든 처소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법은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으며, 법은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허공과 같아서 다하지 않고 증장하지 않는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중생이 법을 보호하지 않으면 법도 중생을 보호하지 않는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법은 모든 세간에게 귀의(歸依)를 지어 준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법은 성내거나 해롭게 할 마음을 낼 처소가 없으니, 해롭게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법은 번뇌에 머물지 않으니 번뇌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법은 세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반을 구하니 법은 항상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평등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보살은 이와 같이 법 가운데에서 바르게 생각하니 이런 까닭으로 염법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염법처라고 하느니라.
[염승]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염승(念僧)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스님이란 분은 법답게 말하는 분이며, 법답게 실천하는 분이며, 법을 생각하는 분이며, 복밭의 법이 되는 분이며, 법에 머물러 유지하는 분이며, 법에 의지하는 분이며, 공양을 법답게 하는 분이며, 행동이 법다운 분이며, 경계의 법과 같은 분이며, 수행하여 법을 성취하려는 분이며, 법을 실천하는 분이며, 법에 정직한 분이며, 맑고 깨끗한 법을 실천하는 분이며, 중생을 구제하시는 분이며, 크게 자비한 분이며, 항상 경계에 적정한 분이며, 항상 법에 귀의하는 분이며, 항상 스스로 청정하게 법을 행하는 분이다.’
다시 선남자여,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스님은 오직 한 부류만은 아니다. 세제(世諦) 스님ㆍ제일의제(第一義諦) 스님ㆍ부끄러워할 스님ㆍ부끄러울 것이 없는 스님ㆍ성인의 경지에 있는 스님ㆍ조복 받은 스님ㆍ물러나지 않는 스님이다.’
또 선남자여, 보살은 세제 스님께는 모든 중생을 보호하도록 수행하게 하고,
제일의제 스님께는 공양을 올려 수행하게 하고,
양심에 부끄러운 스님께는 해탈을 얻도록 수행하게 하고,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스님께는 수행을 독려하고,
성인 같은 스님께는 공양을 올리고 공경하며 친근히 하여 수행하게 하고,
조복한 스님께는 부처님같이 수행하게 하고,
물러나지 않는 스님께는 설법하여 수행하게 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스님은 부처님의 씨앗을 끊지 않으니 부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즐거운 과보를 주니 복밭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번뇌를 여의었으니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모든 집착을 버렸으니 해탈을 얻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적정함을 이루었으니 마음을 조복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잡스럽지 않으니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나쁜 법을 멀리 여의었으니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수순하는 말을 하니 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신을 아니 교만함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적정하니 젠체하는 마음[高心]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만족한 줄 아니 뒤바뀐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분별을 끊었으니 병폐가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묘한 곳[妙洲渚]에 이르렀으니 두려움이 없는 처소를 얻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실상을 보았으니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저 언덕을 이루었으니 묘한 곳인 저 언덕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악한 실천을 하지 않으니 아란야(阿蘭若)의 실천을 행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쾌활하니 마침내 도량(道場)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스님은 계(戒)ㆍ정(定)ㆍ혜(慧) 3학(學)을 아니 제자의 실천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네 가지 생각하는 경계를 행하니 모든 생각과 수행함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스님은 네 가지 바르고 부지런한 경계를 행하니 수행하고 정진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네 가지 여의족(如意足)의 경계를 수행하니 피로하거나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다섯 가지 근(根)의 경계를 수행하니 깨어지거나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다섯 가지 힘의 경계를 수행하니 모든 번뇌의 자극을 항복 받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행[七覺行]을 수행하니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여덟 가지 거룩한 진리[八聖道]의 경계를 수행하니 바르게 보기 때문이다.
스님은 진실한 진리의 경계를 수행하니 귀의할 곳을 얻기 때문이다.
스님은 모든 선(禪)의 경계를 수행하니 안정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인연이 모인 경계를 수행하니 법륜을 굴리기 때문이다.
스님은 크게 자비하니 물러나지 않는 처소에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모든 공덕을 모았으니 한 생애에 큰 보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 선남자여, 보살은 이와 같이 스님들을 생각하고 나서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스님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가졌으니 내가 다 얻게 하고자 하고 또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마침내 성취하게 하리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염승념처라고 하느니라.
[염계]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염계(念戒)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세간과 출세간에 있는 모든 뛰어나고 묘한 저 모든 과보는 다 계율을 지킴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끗하게 계율을 지킨 근본 힘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모든 초목과 빽빽한 숲은 땅에 의지하여 근본으로 삼은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모든 세간 출세간의 뛰어나고 묘한 과보는 계율에 의지하여 근본으로 삼느니라.
보살마하살이 계율을 지키면 모든 하늘사람의 큰 복밭이 되며, 시주하는 사람에게 공덕을 만족시켜 주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계율을 지키면 환희심이 생기고 마음이 환희하므로 근심하거나 고뇌하지 않으며,
근심하고 고뇌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매우 기쁘게 되며,
매우 기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기이함을 얻으며,
몸과 마음이 기이하기 때문에 마음이 즐거우며,
마음이 즐겁기 때문에 삼매를 얻으며,
삼매를 얻었기 때문에 진실하게 알며,
진실하게 알기 때문에 보살이 모든 중생에게 큰 자비를 내느니라.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내가 지금 이 진실한 삼매의 법문으로써 진실로 알듯이 모든 중생들도 성취하게 하리라.
이 보살은 큰 자비심으로 훈습하고 닦음으로써 저 큰 자비심에 의지하며 증상계(增上戒)와 증상삼매(增上三昧)와 증상혜(增上慧)를 닦고 유지하여 만족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내가 지금 묘한 계율을 닦아 지니면 동요되지 않고 방일하지도 않으며, 나는 모든 중생을 생각해서 계율을 닦고 지킨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모든 중생을 생각해서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내가 지금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안온한 즐거움을 얻도록 맑고 깨끗한 계율을 지키고 닦아야겠다.’
또 선남자여,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하느니라.
‘보살이 출가하여 맑고 깨끗한 계율을 닦아 지키면 모든 세상의 일을 영원히 여의며,
보살이 가사[染衣]를 입으면 모든 사랑할 물건을 버리고 만족해하며,
보살이 맑고 깨끗한 계율을 받아 지키면 입ㆍ몸ㆍ뜻이 맑고 깨끗한 것을 만족하며,
보살이 계율 지킬 것을 생각하면 여섯 가지 신통을 만족하며,
보살이 편안히 앉아 계율을 지키면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만족하며,
보살이 묘한 법을 듣고 맑고 깨끗한 계율을 닦아 지니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를 만족하며,
보살이 많이 들음을 구하여 지혜롭고 맑고 깨끗한 계율을 닦고 지키면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고 만족하리라.
보살이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맑고 깨끗한 계율을 닦고 지니면 모든 공덕을 만족하며,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닦아 유지하면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만족하며,
보살이 들은 법과 같이 말하고 맑고 깨끗한 계율을 닦아 지키면 만족하게 큰 법사[大法師]가 되며,
보살이 들은 법과 같이 사유하고 계율을 지키면 만족하게 다라니를 얻으며,
보살이 보리심과 보리의 마음을 생각하고 맑고 깨끗한 계율을 닦아 지키면 모든 악을 초월하여 만족한 계율을 얻으며,
보살이 해롭게 할 마음을 내지 않고 맑고 깨끗한 계율을 닦아 지키면 만족하게 보리심을 잃지 않으며,
보살이 보리심을 잃지 않고 맑고 깨끗한 계율을 닦아 지키면 삼보에 대한 마음을 잃지 않으리라.’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만약 능히 계율을 닦아 지키는 이가 있거나 세간에 보호할 수 있는 이가 있으면 모두 보호할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염계라고 하느니라.
[염사]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염사(念捨)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지닌 것 가운데 모든 버릴 수 있는 법은 모두 두 가지 버릴 것 속에 해당한다. 곧 법을 버림과 재물을 버리는 것이다.’
선남자여, 보살이 자생(資生)을 베푸는 것은 모두 32상과 80종호를 만족하여 깨끗한 부처님 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며, 보살이 법을 버리는 것은 또한 능히 열 가지 힘, 네 가지 두려움 없음,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부처님 법을 만족하게 하여 능히 번뇌와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자생함은 아끼는 마음을 버리거나 법을 버리는 인연이니,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느니라.
다시 재물을 버리는 사람은 생신(生身)을 청정하게 하며, 법을 버리는 사람은 법신을 맑고 깨끗하게 하느니라.
다시 재물을 버린 공덕으로 부모가 낳아 주신 몸을 버리느니라.
어떠한 사람에게 이 버리는 힘이 있는가?
오직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을 제외하고는 모든 세간에는 없느니라.
법을 버린 사람은 뜻대로 통하는 힘[意通力]을 성취하느니라.
어떠한 사람에게 이 힘이 있는가?
오직 모든 부처님 여래와 지(地)의 지위에 머무는 보살에게만 있고 모든 세간에는 없느니라.
또 재물을 버리면 중생을 교화하고, 법을 베풀면 해탈을 얻게 되느니라.
또 재물을 버리면 능히 모으는 공덕을 얻고, 법을 베풀면 피안에 도달하게 되느니라.
또 재물을 버리면 이분의 일을 베푼 것이고, 법을 베풀면 모두를 버린 것이니라.
또 재물을 베풀면 번뇌에서 해탈함을 얻고, 법을 베풀면 지장(智障)을 여의고 해탈을 성취하느니라.
또 버리는 이가 만약 허망한 분별까지 버리면 이 버림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제일의 버림이 되느니라.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까지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보살은 허망한 분별을 버리니, 이런 까닭으로 깨끗하다고 하느니라.”
보살이 물었다.
“허망이라고 말한 것은 어떠한 법을 말하는 것인가?”
“선남자여, 허망이란 말은 진실하지 않은 희론(戱論)의 법을 말하느니라.”
“어떠한 것을 진실하지 아니한 희론의 법이라고 말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탐하고, 나는 성내고, 나는 어리석고, 나는 물들었고, 나는 깨끗하고, 나는 깨끗하지 못하고, 나는 세간법을 행하고, 나는 열반에 든다’는 생각을 하면
이와 같은 따위의 모든 것은 다 진실하지 않은 허망하게 분별하는 희론법이니라.
왜냐하면 모든 것은 오직 인연일 뿐, 내가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중생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목숨도 없고 목숨이라 할 것도 없으며, 지을 것도 없고 교화할 대상도 없느니라.
저 모든 인연의 자성은 공적하여 영원히 마음과 심의식(心意識)을 여의느니라.
저 모든 인연은 생각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물들지 않고,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세간법을 행하지 못하며 열반에 들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이와 같이 허망한 법임을 알고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느니라.
‘그것은 진실로 있다.’
이와 같은 마음을 버리는 까닭으로 버림이라고 하며보살이 만약 이와 같은 법을 생각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염사라고 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 세 가지 버림[三種捨]이 있느니라.
버림[捨], 크게 버림[大捨], 강성하게 버림[增上捨]을 말하느니라.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버림인가?
음식ㆍ곡식ㆍ창고ㆍ의복ㆍ타는 것[騎乘]ㆍ등불ㆍ향훈ㆍ꽃다발ㆍ바르는 향ㆍ가루 향ㆍ깃발ㆍ해 가리개ㆍ깃대ㆍ휘장ㆍ수레ㆍ남녀ㆍ영락ㆍ관ㆍ금ㆍ은ㆍ보배 등 중생을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는 기구를 말하느니라. 오직 중생을 해롭게 하는 일만 제외하고 모든 물건은 버리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버림이라고 하느니라.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큰 버림인가?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버림을 성취하고 나서 능히 사랑하는 아내ㆍ아들ㆍ딸ㆍ젊거나 어린 종ㆍ사신ㆍ벼슬아치ㆍ살림집ㆍ공원ㆍ공공건물ㆍ국토ㆍ왕위를 버리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큰 버림이라고 하느니라.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강성하게 버림인가?
선남자여, 보살이 버림과 큰 버림을 성취했으므로 강성한 버림을 성취하느니라.
손ㆍ발ㆍ귀ㆍ코ㆍ머리ㆍ눈ㆍ골수ㆍ뇌ㆍ피ㆍ살ㆍ늑골ㆍ입술ㆍ혀ㆍ이빨ㆍ연한 피부ㆍ손발톱ㆍ털을 버리는 것을 말하느니라.
이와 같이 모두를 모두 버리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강성하게 버림이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보살은 이와 같은 버림과 큰 버림과 강성하게 버리고
‘나는 당연히 마침내 버림과 큰 버림과 강성하게 버림을 성취했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때라야 염사하는 보살이란 이름을 얻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염사라고 하느니라.
[염천]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염천(念天)인가?
선남자여, 보살이 맑고 깨끗한 하늘을 생각함이니, 성문ㆍ벽지불ㆍ보살ㆍ모든 부처님 여래를 생각하는 것을 말하느니라.
어떠한 생각을 말하는가?
수행을 생각하며, 공덕을 생각하며, 태어나지 않음을 생각하며, 받는 경계를 생각하며, 처음 행함을 생각하며, 수행함을 생각하며, 성취함을 생각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보살은 모든 하늘을 생각하느니라.
어떠한 모든 하늘을 생각한다고 말하는가?
좋은 업을 수행하여 뛰어난 과보를 얻음이니라.
무엇이 좋은 업의 행인가?
곧 열 가지 좋은 업의 길을 말하느니라. 영원히 좋지 못한 업의 길을 여의는 것이니, 이 좋은 업의 인연으로써 저 모든 하늘에서 색이 묘하고 즐겁고 청정하며 모든 감관[根]이 뛰어나서 묘한 과보를 얻느니라.
또 보살은 저 뛰어나게 묘한 과보를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켜 대비심을 내며, 저 묘한 즐거움의 과보로써 모든 중생과 함께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느니라.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중생으로 하여금 하늘의 묘한 즐거움을 얻게 하고 싶어서 다시 저 모든 선근을 성취하며, 큰 정진을 발동하여 나쁜 갈래에 태어난 중생이 대비심을 일으키게 하리라.’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나는 마땅히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좋은 업을 수행하여 하늘에 나게 하고 곧 하늘에 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리라.’
보살이 생각을 하고 나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선(善)을 닦아 하늘에 나서 저 하늘의 묘한 과보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며 저 즐거움에서 위가 없는 즐거움을 얻게 하는데, 곧 여래의 적정하고 묘한 즐거움을 말하느니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염천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염처라고 하느니라.”
[무소발 보살의 게송]
이때에 무소발(無所發) 보살마하살이 거듭 이 뜻을 널리 펴려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지 않으면
그렇게 보기 때문에 괴로움이 곧 공해지리라
만약 괴로움을 여의지 못하면
공법(空法)은 얻지 못한다네.
공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괴로움의 뜻을 보라
괴로움이 공한 것은
공엔 생멸이 없기 때문이네.
괴로움은 만드는 이가 없으니
괴로움은 작위(作爲)가 없는 법이네
괴로움을 여의면 만든 이가 누굴까
앞뒤에 만든 이는 전혀 없다네.
실제로 집(集)이란 것은 없거니
만약 실제로 괴로움이 모아지는 것이라면
이 중 어느 곳에 모여 있는가
괴로움은 만든 이가 없다네.
괴로움은 온 곳도 없고
괴로움은 갈 곳도 없네
어떤 법과 함께 합하며
괴로움 여의면 어느 곳에 있는가.
애착을 모음[集]이라 말하지만
만약 괴로움이 모아지는 것이라면
애착도 진실로 애착이라 할 것 없거늘
애착을 여의었거니 어떻게 집이 있겠는가.
괴로움은 온 자취가 없는데
누가 괴로움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는가
멸(滅)을 정(定)이라 말하나니
가고 오는 법을 여의었기 때문일세.
모든 법의 자성이 적멸하여
근본이 깨끗하고 밝아지네
모든 법도 한가지로 적정하면
전제와 후제를 여읜다네.
법이 만약 먼저 생겼다면
뒤에는 마땅히 멸(滅)이 있을 것이네
멸을 여의면 무엇이 생기겠는가
태어남이 없어지면 저 없어짐도 없다네.
이같이 지혜를 구하는 것을
무루(無漏)의 도라 말하네
도를 말하는 것은 뗏목의 비유와 같다고 하네
뗏목은 반드시 버려야 할 물건에 비유함이네.
만약 집은 버려야 할 법이라면
저 법은 무엇에 상응해서 즐기나
도를 버리고 묘한 물가에 머물면
이것을 해탈했다 한다네.
해탈한 상을 말로 한다면
모든 법에 다툼이 없는 것이라 하겠네
모든 법에 대해
진여의 도를 증득했기 때문이네.
털과 손발톱이며
지방ㆍ피부ㆍ피ㆍ살ㆍ뼈와
눈물ㆍ침ㆍ대소변이며
간ㆍ쓸개ㆍ뇌ㆍ막과
심장ㆍ간장ㆍ소장ㆍ대장이며
이것들 모인 것을 몸이라 하고
허망하게 분별하여 집이라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이렇게 관찰한다네.
실제로 만든 이도 없고
받은 이도 여의었기 때문에
텅 빈 취락(聚落:마을) 같거니
이같이 허망한 것 그것이 몸이라네.
수(受)를 말하여 수(受)라고 부르지만
저 수는 어떤 수인가
수가 수를 여의면
차별하여 얻을 수 없을 것이네.
지혜로운 이는 이같이 생각하고
저 지혜로운 이는 수(受)를 꿰뚫어 보네
그 모습은 보리와 같아
적멸하고 맑고 깨끗하여 분명하다네.
몸속에서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마음을 보지 못하니
이 사람은 뜨거운 번뇌를 여의었네
비록 여의었지만 기뻐하지 않네.
법을 보면 오직 마음일 뿐
분별을 영원히 여의었네
진여의 실천을 버리지 않고
번뇌 없는 경지를 얻었다네.
모든 법은 스스로 나지 않고
다른 것도 나지 않는다네
모든 숫자를 여의고 모양을 다하면
평등하여 허공과 같네.
여실하게 이 법을 알면
지혜로운 이가 떠나가는 상이 없으며
법 또한 머물지 않음을 알면
평등에 머물게 되네.
만약 이같이 생각한다면
모든 법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다네
이 사람은 피안에 도달해
모든 부처님처럼 복밭이 되리라.
모든 법을 아는 것을 부처님이라 하고
모든 처소에서 번뇌가 없다네
모아진 집(集)이 깨끗한 백법(白法)이니
모든 중생을 안온하게 하리라.
적정과 묘한 색을 생각하고
또한 모든 공덕을 생각하여
보살의 모든 법이 원만하여서
반드시 위없는 도를 얻으리라.
이 보살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네
법에서 생각이 움직이지 않으면
항상 정(定)의 경계이리라.
견고한 갑옷을 잘 여미고
묘한 법의 경계를 생각한다면
위없는 보리를 얻어
보살행을 견고하게 행하리.
법답게 나도 또한 그러하니
만약 이 같은 생각을 하여
이 염법(念法)을 마땅히 알면
모든 보살이라 말하리.
나라는 것 내 것이라는 것을 여의면
법답게 나도 또한 그러하여
만약 이같이 생각한다면
묘한 법을 닦는 생각이라 한다네.
모든 부처님의 제자인 스님들은
더할 나위없는 복밭이라
반드시 불보리(佛菩提)를 얻을 것이니
항상 이와 같은 분을 생각한다네.
바다 같아서 헤아릴 수 없는
이분들을 나는 생각하네
이 모든 공덕을 회향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성불하게 하리라.
잘 닦아 계율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나는 저 계행을 생각하네
지니고 있는 모든 공덕을
모두 중생에게 주려 하네.
더할 나위없는 도(道)에 회향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마침내 즐거움을 얻게 한다면
이 같은 것을 염계(念戒)라 하니
능히 중생에게 즐거움을 준다네.
재물과 법을 버리고
또한 모든 번뇌를 버려
지닌 복으로 중생을 위해
더할 나위없는 도에 회향하리라.
이와 같이 버리는 생각을 성취하면
두 가지 길에는 머물지 않으리
상(相)을 여의고 자연스레 실천하면
있는 곳은 언제나 해처럼 빛나리라.
모든 범부와 성인
모두 선업(善業)을 따라 얻고서
저 모든 인과로
대비를 일으켜 모두를 베푼다네.
이와 같이 묘한 모든 행은
즐거움을 증가하여 주나니
곧 저 하늘에서
더할 나위없는 정각(正覺)을 성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