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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2권
5. 법문품[3]
[식]
이때 무정상보살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여쭈었다.
“어떻게 설식(舌識)의 언교(言敎)가 한량없는 근본 슬기와 선정의 뜻을 펼 수 있습니까?
설식은 식(識)이 아니며 또한 평등하지도 않나이다.
온갖 소리[聲]는 이식의 경계요,
밖의 온갖 색상(色像)은 안식의 경계요,
뭇 향기의 좋고 나쁨은 비식의 경계이온데,
입으로 설하는 말은 소리는 있으되 형상은 없어서 밖의 법은 알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하나이다.
어째서 설식은 이식의 모습을 받나이까?”
부처님께서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냐? 족성자여, 소리가 귀에서 나오느냐, 밖으로부터 오느냐?”
“밖의 식은 안의 식을 좇지 못하나이다.”
“입으로 언교(言敎)를 내는데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데, 입을 말미암아 이식이 듣느냐, 입을 말미암지 않고 이식이 듣느냐?”
“입을 말미암아 듣기도 하고, 혹은 입을 말미암지 않고 듣나이다.”
“어째서 입을 말미암아 듣고, 입을 말미암지 않고 듣느냐?”
“입에서 소리가 나왔으면 이것은 입을 말미암아 들음이요,
땅ㆍ물ㆍ불ㆍ바람ㆍ산하ㆍ돌ㆍ석벽(石壁)의 소리는 입을 말미암지 않고 듣는 것이나이다.”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은 식(識)이 된다고 칭할 수 있지만, 땅ㆍ물ㆍ불ㆍ바람은 식이 없다 할 수 있느냐?”
“땅ㆍ물ㆍ불ㆍ바람은 입의 식이 아니나이다.”
“무엇이 입의 식을 성취하느냐?”
“4대(大)입니다.”
“입은 4대(大)가 아닌데 어찌 4대(大)라고 말하느냐?”
“식이 있는 4대(大)이지, 식이 없는 4대(大)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식이 있는 4대(大)를 말하고, 식이 없는 4대(大)는 말하지 않는가?”
“식이 있는 4대(大)는 입의 식이 해당되며, 식이 없는 4대(大)란 땅ㆍ물ㆍ불ㆍ바람이나이다.”
“식이 있는 4대(大)는 어찌 땅ㆍ물ㆍ불ㆍ바람이 아니겠는가?”
“그러하나이다.”
“식이 없는 4대(大)는 어떤 것이냐?”
“땅이 물을 여의면 식이 없고, 물이 불을 여의면 식이 없고, 바람이 허공(空)을 여의면 식이 없고, 허공이 식을 여의면 식이 없는데,
이것을 4대(大)가 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옵나이다.”
“식이 있는 4대(大)가 내는 소리는 땅이냐, 물이냐, 불이냐, 바람이냐, 허공이냐, 식이냐?”
“모두 합해진 것입니다.”
“4대(大)를 제하면 식은 어디에 존재하게 되느냐?”
“식은 의지할 바가 없나이다.”
“땅ㆍ물ㆍ불ㆍ바람은 똑같은 소리, 똑같은 음향이니, 식을 말하지 않느냐?”
“식은 짝이 없는 홀로라서 식이 없나이다.”
“식 혼자뿐이면 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느냐?”
“식이 혼자면 식이 아니나이다.”
“식이 혼자여서 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땅ㆍ물ㆍ불ㆍ바람에 의지하는가? 유위(有爲)냐, 무위냐?”
“그와 같나이다.”
“식이 죽은 태를 여의면 다시 처함이 있느냐?”
“있나이다.”
“무엇이 고통의 근본을 다함인가?”
“다함없는 식이옵나이다.”
“요소[大]가 식을 성취하나이까? 식이 요소[大]를 성취하나이까?”
“요소가 식을 성취하느니라.”
“식이 어디에 의지하나이까?”
“여러 가지 요소[大]이니라.”
“땅[地]ㆍ물[火]ㆍ불[水]ㆍ바람[風]ㆍ허공[空]이 땅ㆍ물ㆍ불ㆍ바람ㆍ허공을 여의면 식의 소재가 되나이까?”
“식은 소재가 없느니라.”
“멸진하나이까?”
“아니니라.”
“멸하지 않나이까?”
“아니니라.”
“식이 취(趣)도 아니고 취 아님도 아니면, 이 법은 열반이 아닙니까?”
“아니니라.”
“식과 열반이 다르나이까?”
“다르지 않느니라.”
“열반에 4대(大)가 있나이까?”
“열반에 4대(大)는 없느니라.”
“열반에 식(識)이 있나이까?”
“열반에 식은 있느니라.”
“땅ㆍ물ㆍ불ㆍ바람의 식과 열반의 식에 어떤 차별(差別)이 있나이까?”
“땅ㆍ물ㆍ불ㆍ바람의 식은 돌고[轉], 열반의 식은 돌지 않나니, 이것을 차별이 있다고 말하느니라.”
“땅ㆍ물ㆍ불ㆍ바람이 식을 여읜 것과 열반이 식을 여읜 것에 어떤 차별이 있나이까?”
“4대(大)는 식을 여의지만 지나간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을 여의지 못하고, 열반은 식을 여의고 지나간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을 영원히 여의느니라.”
“4대(大)를 여의는 식과 열반을 여의는 식, 이 식이 4대(大)에 있지 않는 것과 열반에 있지 않는 것이 다시 다르나이까?”
“아니니라.”
“4대(大)가 식을 여의는 것과 열반이 식을 여의는 것이 다르지 않나이까?”
“다르지 않느니라.”
“식은 열반에 처해서 무위법(無爲法)을 이루고, 식은 4대(大)에 처하여 유위법을 이루니 구별되지 않습니까?”
“구별되지 않느니라.”
“만일 구별되지 않는다면, 이 유위식과 이 무위식이 어떻게 다르나이까?”
“유위(有爲)의 식은 4대(大)를 성취하고 무위(無爲)의 식은 4대(大)를 성취하지 않나니, 이런 까닭에 차이가 있느니라.”
이때에 무정상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4대(大)를 여읜 식과 열반을 여읜 식은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나이다.
왜냐하면 식이 4대(大)에 있으면 문득 지나간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이 있고, 식이 열반에 있으면 문득 지나간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이 없나이다.
이 식과 저 식이 다시 차이가 있나이까?”
“다르지 않느니라.”
“무든 까닭으로 4대(大)의 식과 이 열반의 식을 말씀하시었나이까?”
“이름을 빌려 말했을 뿐이지 진리의 가르침은 아니니라.”
그때 무정상보살은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지금 질문한 바는 4대(大)가 식을 여의어서 과보의 행이 있다는 것인데,
이제 과보의 행이 없음으로써 나에게 갚음이 장차 없다면, 나의 질문이 잘못된 것인가, 나에게 갚음이 잘못된 것인가?’
부처님께서 저 무정상보살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문득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유위의 4대(大)의 식은 무위의 4대(大)의 식이 아니고, 무위의 4대(大)의 식은 유위의 4대(大)의 식이 아니다.
어떠한가? 4대(大)의 식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가?”
“아닙니다.”
“4대(大)의 식도 아니요 열반의 식도 아니라면 무식(無識)이 아니냐?”
“식은 멸하면서도 식은 멸하지 않나이다.”
“어째서 식이 멸하느냐?”
“나타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나이다.”
“어째서 식은 멸하지 않느냐?”
“나타나 존재하기 때문이나이다.”
“식이 멸하는 일이 있느냐?”
“나타나 존재하면 있습니다.”
“무위의 법[無爲法]은 다시 나타나 존재하는가?”
“아니옵나이다.”
“유위의 법(有爲法)도 다시 나타나 존재하는가?”
“아니옵나이다.”
“유위와 무위의 모습[有爲無爲相]이 나타남도 아니고 나타나지 않음도 아니면, 무엇에 의지하고 있느냐?”
“의지할 바 없음에 의지하나이다.”
“좋다. 식은 의지함이 있느냐?”
“식은 의지함이 없나이다.”
“어떻게 식은 유계(有界)에 의지하고 있느냐?”
“삼계가 있나이다. 신계(身界)ㆍ법계(法界)ㆍ공계(空界)를 삼계라고 이르나이다.”
[염오가 있는/없는 식]
그때 무정상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여쭈었다.
“염오(染汚)가 있는 식과 염오가 없는 식이 있나니, 어째서 염오 없는 식이 염오의 식을 이루었나이까?”
부처님께서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염오의 식이 움직이면 염오 없는 식이 되지만, 염오 없는 식은 염오의 식이 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식의 성품은 항상 머물고 또한 변역(變易)하지 않으며, 생겨나고 멸하고 집착하고 끊음이 없는 까닭이니라.
이런 까닭에 움직이는 식은 머무는 식이 되지만 머무는 식은 움직이는 식이 되지 않느니라.”
[머무는 식과 움직이는 식]
이때 부처님은 다시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부처를 이루어서 삼계에서 특히 존귀하다.
뭇 상호를 갖추었고, 4무외(無畏)와 18불공법(不共法)의 여러 가지 덕을 널리 갖추었다.
지금 머무는 식은 얻었지만 움직이는 식은 아직 못 얻었다.”
무정상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어째서 머무는 식은 얻으셨으나 움직이는 식은 얻지 못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른바 움직이는 식은 유위의 법계요 머무는 식은 무위의 법계이니, 무위의 식이 유위의 식을 이루지는 않느니라.
이 까닭으로 움직이는 식은 머무는 식을 이루지만 머무는 식은 움직이는 식을 이루지 않느니라.”
이때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정상보살 및 백천의 하늘과 인간들이 모두 무상입주식행(無上立住識行)을 발하였고,
수없는 중생들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모두 발하였다.
그때 무정상보살이 곧 부처님 앞에서 게송을 지어 읊었다.
뭇 상호를 갖추어서
여래의 몸 이루시고
삼계(界)에 집착하지 않으시니
텅 빈[空] 것처럼 나[我]가 없으시네.
마음의 때[心垢] 모두 없애시고
신통이 자재하시지만,
움직이는 식에 미침을 말미암아
머무는 식엔 미치지 못하시네.
법계는 비고 공하여
또한 변하며 바뀌지 않으니,
여래는 오래도록 그대로라서
마땅히 머무는 식에 미치셨네.
지나간 세상의 부처님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으신데
머무는 식을 얻기 위해서
모조리 움직이시는 식인가?
제가 지금 의심이 있사와
법계에 통달하지 못하오니
오직 원하오니, 불쌍히 여겨서
망령된 상념을 없게 하소서.
중생의 뜻[志趣]과
성행(性行)은 똑같지 않아서
묘한 공(空)을 설하심을 듣고도
근원을 캐어 연구하지 않나이다.
허공은 모습이 없어서
행이 한결같고 평등한데
어째서 머무는 식이
곧 청정이라 말할까?
지금처럼 때가 이르렀으니
마땅히 연설하고 창달할지니,
본제(本際)의 신통과 슬기는
매우 기특하여 드무네.
네 가지 무리가 무외(無畏)해서
머무는 식과 움직이는 식,
그 성품을 분별해서
다 들어 알고자 하네.
지나간 세상의 부처님도 늘 그러해서
법계는 평등하고,
오는 세상 여러 성현들의
법성(法性)도 또한 그러하리.
지금의 중생처럼
고요함에 들어가 어지럽지 않다면,
다시 어느 식(識)으로부터
정의 뜻[定意]을 얻으랴?
지금의 이 정의 뜻은
영원히 적멸해서 메아리 없나니,
이것이 머무는 식이 되는가?
이것이 움직이는 식이 되는가?
원하나이다. 낱낱이
법계의 근본을 설하여서
얽힌 의심 영영 끊어주시고
망설임을 품지 않게 하소서.
그때에 부처님께서 다시 게송으로써 무정상보살에게 답하시었다.
지나간 세상의 여러 부처님
신령스런 지혜가 다함없었으니.
몸은 비록 멸도(滅度)를 취했지만
머무는 식은 변하거나 바뀌지 않도다.
움직이는 식에 두 가지[二品] 있으니
머무는 식과 머물지 않는 식이라네.
설사 무위의 경계에 들어가더라도
두 이름은 보지 못하리.
여래는 집착한 바 없어
편하고 밝음이 산처럼 부동이고
그 행의 초월이 더불어 견줄 이가 없지만
열등한 이들을 불쌍히 여겨 제도하시네.
나라 안의 여러 촌락은
뭇 도움[祐]이 경과하지만,
식(識)이 아니면 이를 말미암지 못하니,
움직이고 머무는 식[動住識]을 의심하게 되네.
수없는 겁으로부터
온갖 부처님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부처님 식(識)의 움직이는 머묾과
움직이지 않는 머묾을 세고자 하네.
부처님 지혜는 끝없고
식(識)은 한량없는 법을 두루하며
몸의 상(相)에는 큰 서원 갖추었어도
무상(無相)이라서 볼 수 없어라.
내가 처음 태어난 때에
천지가 환하게 밝아
마음을 잡아서 큰 서원 굳힘은
형상 없는 무위의 식(識)이라네.
복과 지혜가 족해서 사람 중의 존자이니
마치 코끼리가 갈고리와 사슬을 여읜 듯
좋은 음악 소리 저절로 그러하게
허공 속에 충만하였노라.
수없는 여러 하늘과 인간
각기 예경(禮敬)을 하고
저마다 몇 마디 게송으로
여래의 덕을 노래하고 찬탄했네.
등정각(等正覺)에 이르자
눈으로 보아도 싫은 것 없어
위없는 법륜을 굴려서
비할 수없는 법 연설했네.
온갖 중생의 무리는
존귀한 성현의 가르침 받드나니,
지난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을 세지 않고
부처님[世雄]은 사자와 같아라.
무수한 겁 동안 공을 쌓아서
총지(摠持)의 행 잃지 않으셨고
4무소외(無所畏)으로
뭇 사람을 윤택하게 이익 주셨네.
도의 열매[道果]로 스스로 장엄하시고
수명을 나의 수명으로 세지도 않으며
상이 없어서[無相] 응당 정각을 이루니.
마치 허공이 걸림 없는 것과 같네.
오늘 다섯 가지 눈[五眼]을 얻었지만
부주처(不住處)에는 아직 머무르지 못해,
뒤바뀜 없음[不顚倒]을 품고 와서
머묾이 없어서 식(識)을 보지 못하여라.
여래의 수특(殊特)한 지혜는
무상법(無相法)으로 이루니
행이 다해도 이지러진 바 없으며,
돈도 아니고 세간의 영화도 아니니라.
한결같은 행의(行意)이고 한 생각[一念]이라서
보살의 관(觀)은 어지러움 없나니,
움직이는 식은 온갖 식이 묘하므로
머무는 식만이 으뜸은 아니어라.
생각하니, 지나간 세상의 부처님과
바야흐로 오는 세상의 부처님,
그리고 내가 지금 현재 있음은
머묾을 말미암아 증명해 이루지 않았네.
여래의 세 가지 통달한 지혜[三達智]는
짝도 없고 또한 동반자도 없으니,
행의 지나감은 멸할 수 없고
식의 소재도 보지 못하네.
[몸이 없는 몸의 식과 몸이면서 몸이 없는 식의 여섯 가지]
이때 부처님께서 다시 거듭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몸이 없는 몸의 식(識)과 몸이면서 몸이 없는 식, 이 법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몸으로 들어오는 열여섯 가지 밖의 번뇌를 받더라도 몸의 식을 낱낱이 분별해서 청정한 경지에 이르면,
이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法淸淨瓔珞)이라 말하느니라.
몸 없는 식으로 몸의 식을 일으키더라도 그 가운데 분별함은 모조리 다시 즐겨함을 말미암음이니,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 말하느니라.
내가 옛적에 소원이 있었으니, 그 몸의 상호를 닦는 데 행이 백 다섯이 있었다.
그래서 몸의 상호에 다시 백 다섯이 있어서 몸의 상호를 이루었다고 말했으니,
이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지나간 세상 아주 먼 때에 중생은 이미 멸하였다.
그에게 몸을 받으매 유위와 무위, 행의 있음과 행의 없음, 좋음과 추악함, 고통과 즐거움이 있었고, 하나하나 법계와 비법계를 분별해서 이것은 법계의 신식(身識)이고 이것은 법계의 신식이 아니라 하니,
이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신식(身識)이 색(色)을 짓는데, 다시 열 가지 일[十事]이 있다. 진신화체(眞身化體)는 또한 단서(端緖)가 없으니, 저 신식(身識)이 취향해도 향할 바 없음을 아니, 이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신식의 근본을 요달하는 데는 세월이 똑같지 않으니, 본래의 몸과 지금의 몸이 변하고 바뀌어서 머물러 있지 않다. 본래 받은 형태가 지금 변하였음을 알지라도 문득 그 가운데에서 능히 신식을 잃지 않나니,
이것을 여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 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다시 여섯 가지 일이 있으니,
어떤 것들이 여섯 가지인가?
몸의 행이 청정하여 뭇 악한 행을 짓지 않고,
입도 또한 청정하여 삿된 업[邪業]을 말하지 않고,
뜻으로 청정함을 닦아서 뭇 번뇌를 짓지 않으니,
이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허물의 몸은 이미 멸할지라도, 선도 있고 죄도 있으며,
착한 몸과 착한 복은 선의 식(識)을 분별하고 악한 몸과 악한 업은 악의 식을 분별해서 선악의 신식을 하나하나 사유하니,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6신상(身相)의 법은 선을 여의고 악을 여의어서 다시 능히 생각[念]을 일으키어 신식을 버리지 않으며,
또 때로 중생은 몸이 청정하면 청정한 식이 있음을 계교하고, 몸이 청정치 못하면 청정치 못한 식이 있음을 계교하는데,
그 가운데서 청정한 신식과 청정하지 못한 신식을 분별하나니, 이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생각건대, 본래 지은 유위의 몸과 무위의 몸, 지나간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의 몸을 모조리 능히 분별하여 신식을 잃지 않나니,
이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마음에 염(念)하는 법은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니, 똑똑히 기억하고 잊지 않아서 식이 일어나는 바를 아나니,
이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형상이 없는 식의 몸에 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 하는가?
물들어 집착함이 있는 몸과 물들어 집착함이 없는 몸,
형상이 있는 몸과 형상이 없는 몸,
식이 있는 몸과 식이 없는 몸,
속(俗)이 있는 몸과 도(道)가 있는 몸,
하나의 몸과 하나가 아닌 몸이니라.
이들 가운데서 모조리 다 분별하나니,
이것을 여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법 청정영락 여섯 가지]
부처님께서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여섯 가지 일이 있나니, 어떤 것들이 여섯이 되는가?
다함이 없는 법신과 다함이 있는 법신에서 있음[有]과 없음[無]을 분별하여 법식(法識)이 청정하나니,
이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무위의 법성에는 그 행에 더하고 덜함이 없으니,
법에 선이 있음을 알고 법에 선이 없음을 알며,
생겨나는 법이 있음을 알고 멸하는 법이 있음을 알며,
법의 식을 깨달아서 법의 성품을 잃지 않나니,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항상 머물러 있는 몸, 항상 머물지 않는 몸, 법이 항상 머물러 있지 않아서 항상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알고,
여러 가지 법이 항상 머물러 있어서 또한 항상 머물러 있음을 알고, 여러 가지 법의 머무는 식과 머묾이 없는 식을 사유하니,
이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여러 가지 법이 고요하니 여러 가지 법의 색(色)도 마찬가지로 고요하다.
유위의 비식(非識)으로 유위의 식을 알고, 무위의 비식으로 무위의 식을 알아서 법계를 잃지 않음을 사유하나니,
이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법신은 수가 없고 형상이 없어서 볼 수가 없으니, 눈의 경계로 거두어 잡을 바가 아니다.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두 상념을 일으키지 않은 채 여러 가지 법을 분별하여 법신을 잃지 않나니,
이것을 여섯 째 법의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