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보시 Mahādāna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Ashin Nandamālābhivaṁsa
-----------------------------------------------------------------
1. 보시하는 물질과 보시하는 의도
붓다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 있는 「아비산다 숫따abhisanda-sutta(A8.39)」에서 ‘마하다나mahā-dāna’란 ‘위대한 보시, 고귀한 보시, 무궁한 보시’라고 설하셨습니다. 또 붓다께서는 누구나 지켜야 할 5계, 즉 자신이 습관 들여야 할 계율 중의 하나인 5계도 ‘마하다나’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다른 경전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마하다나’에 대한 새로운 의미입니다. 붓다께서는 선업을 설명하실 때 보시 선업, 지키고 실천해야 할 지계 선업, 증장시켜야 할 수행 선업,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하셨습니다. 이 때 각 선업이 하는 역할이 다릅니다. ‘다나(보시)’란 자신에게 속한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바침 또는 버림을 말합니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자기 물건을 타인에게 주는 것을 뜻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보시의 원인이 되는 의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왓투다나vatthu-dāna’는 ‘보시할 물질(재물)’ 혹은 ‘물질 보시’ 를 말합니다. ‘쩨따나다나cetanā-dāna’는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 혹은 ‘의도 보시’를 말합니다. 보시와 관련한 빠알리pāli 두 문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 ‘다낭 데띠dānaṁ deti’는 ‘보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장에서의 보시는 물질을 주는 것이지 의도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낭 : 보시거리인 물질을, 데띠 : 주다’라고 번역합니다.
2) ‘다네나 보가dānena bhoga’는 ‘다네나 : 보시로 인해, 보가 : 재물이 풍족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장에 서의 보시는 물질인 재산이 아니라 ‘쩨따나cetanā(의도)’ 가 됩니다.
우리는 보시를 할 때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서 보시할 거리인 물질을 보시하게 됩니다. 이때 보시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의도(쩨따나)이지 물질이 아닙니다. 하지만 또 물질 없이 의도만으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보시할 거리인 물질에 의지하여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시의 가치, 즉 보시의 결과가 있게 됩니다. 보시 의도(다나 쩨따나)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보시할 거리인 물질에 의지해서 보시하고 싶은 의도도 더불어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가 왕성할수록 보시 선업의 결과인 부유함 역시 크게 돌아옵니다. 그러니 만약 재물과 의도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두 가지 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을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쩨따나(의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웰라마 숫따velāma-sutta(A9.20)」에서는 ‘물건이 좋은 것인지 천한 것인지 중요하지 않다. 보시물이 많든 적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의도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법을 사랑하는 여기 모이신 청중들은 무언가 를 줄 때마다 이 보시 선업을 짓는 의도가 풍성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의도가 무엇으로 풍요 로워질 수 있는가?
첫째, 보시하는 재물로 인해서 그 의도가 풍성해집니다. 보시할 재물이 고귀해지면 의도 역시 더 강력해집니다.
둘째, 보시 받는 존재로 인해서도 의도가 풍요로워집니다. 보시 받는 존재가 지계와 사마디로 채워진 분 또는 상가 대중이면 보시자 마음의 존경심으로 인해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더욱 왕성해집니다.
보시할 물질과 보시 받을 존재, 이 두 가지를 원인으로 의도가 풍성해지고 활력을 띕니다. 즉 의도의 풍요로움 과 강력함을 위해서는 보시할 물건도 중요하고, 보시 받을 존재 역시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의도(쩨따나)입니다. 보시하는 물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의도가 천하면 결과가 볼품없습니다. 그러니 결과를 만드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의도이지, 보시한 재물이 아닙니다. 선업을 지을 때 마음씀씀이가 정말 중요한 핵심입니다. ‘마음 쓸 줄 알면 고귀하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보시하는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받으려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선업을 지으려고 보시하지만 거기에 ‘얻고자 함’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보시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시를 받는 존재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깨끗한 의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보시 받는 존재만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간 대부분의 보시는 보시하는 존재를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십시다. 불사를 한다면 절 보시자로 대우받고 싶어합니다. 대중 안에서 돋보이고 싶은 마음도 범부라면 있을 법합니다. 무언가 하나 보시하면서, 보시자로서 유명세를 얻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하는 보시는 ‘사고 파는’ 장사꾼의 심산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시자는 ‘이 절에서 지내는 모든 존재들, 또는 상가들이 행복하기를’ 하고 마음을 써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보시 받는 존재의 이로움을 위해 하는 보시가 매우 고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보시하면서 자신의 서원을 세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보시 받는 존재의 이로움을 위해 보시한 뒤에 자신의 서원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시하면 그 선업이 저절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 선업으로 어떤 결과를 얻고 싶은지 자신의 서원을 상기하는 것, 이것을 ‘기원한다’고 합니다. 보시한다면 대중을 위해 해야 합니다. 보시 받는 존재의 이로움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보시 받는 존재에게 자애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 의도가 있어야 하고,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존재들에게 보시를 한다면 ‘오, 그에게 먹을거리가 없으니, 먹게 되기를’이라고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오늘 내가 그에게 줬으니 언젠가는 그가 내게 무언가를 해주겠지’라고 기대한다면 계산이 되어 버립니다. 보시란 주고 받고가 되어선 안 됩니다. 보시에는 ‘예경 올린다’는 것과 ‘나눈다’는 것,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예경 올린다는 것은 자신보다 고귀한 분, 지계와 사마디가 있는 존재들을 위해서 절을 하며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자에게는 나눕니다. 무엇으로 나눕니까?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이 없으면 입을 것을 줍니다. 이것이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나눔은 보시하는 자기 자신을 위해 행해져서는 안되고 오직 받는 존재들을 위해 이루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