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고경 하권
[여래장ㆍ불성]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비유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
비유하자면 처음 배우는 이가 다섯 자 글귀와 한계를 이루는 글귀[界成句偈]를 배우려 하는 것과 같다.
먼저 뜻을 알고 나서야 배우려 하면 알 수 있겠는가?
마땅히 먼저 배우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가 잘 배우고 난 뒤에 스승이 한계를 이루는 뜻[界成義]을 가르치고, 비유를 들어 그에게 보이면, 그는 들어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스승을 통해서 한계를 이루는 글귀의 뜻[界成句義]을 아는 까닭에 믿고 즐길 수 있다.
이와 같이 내가 이제 번뇌더미[煩惱藏]에 깔린 중생을 위하여,
‘선남자여, 여래장은 이러이러하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곧 보고자 할 텐데, 볼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저 한계를 이루는 글귀의 뜻을 모르는 이가 스승을 통해 믿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가섭아, 잘 알아두어야 한다. 여래는 성실하게 말하는 사람이니, 성실한 말로써 중생이 있다고 말한다.
너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마치 그의 배움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제 너를 위하여 다시 비유를 말하겠다.
마치 4가지 중생계가 감추어진 비유와 같다.
이른바 살이 돋아서 눈을 가리고, 겹겹이 쌓인 구름이 달을 숨기는 것이니,
사람이 우물을 팔 때 병 속에 등불을 밝히는 것처럼,
마땅히 이 4가지는 불장(佛藏)의 인연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어 무량한 상호가 장엄하고 밝게 빛난다.
그 불성이 있는 까닭에 일체 중생은 열반에 들 수 있다.
마치 저 눈병 난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데 아직 좋은 의사를 만나지 못하여 그 눈이 늘 어두운 것과 같다.
만약 좋은 의사를 만난다면 금방 색(色)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무량한 번뇌의 더미가 여래의 성품을 가리고 있다.
그리고 여러 부처님과 성문ㆍ연각을 아직 만나지 못하여 ‘나’와 ‘나 아님’을 분별하여 ‘아소’를 ‘나’라고 여긴다.
만약 부처님과 성문ㆍ연각을 만난다면 이내 참 나를 알 것이다.
마치 병이 나아서 그 눈이 열려 밝아지는 것과 같다.
가린다는 것은 모든 번뇌를 가리키며, 눈은 여래의 성품을 이른다.
마치 구름이 달을 가려 달이 밝지 못한 것처럼,
모든 번뇌의 더미가 여래의 성품을 가려서 성품이 밝지 못한 것이다.
만일 모든 번뇌의 구름 덮개를 벗게 되면 여래의 성품이 보름달처럼 밝아질 것이다.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마른 흙이 나오면 물이 아직도 먼 줄을 알고, 축축한 흙을 얻으면 물이 점점 가까운 줄을 안다. 만일 물을 얻으면 곧 궁극의 것을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과 성문ㆍ연각을 만나 선행을 닦고 번뇌의 흙을 파내면 물(여래의 성품)을 얻을 것이다.
마치 병 속의 등불이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중생에게 쓸모가 없지만, 병을 깨뜨려버리면 그 빛이 널리 비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의 병과 덮개가 여래장의 등불을 가려 상호와 장엄이 밝지 않으면 중생에게 쓸모가 없지만, 모든 번뇌의 더미를 벗어나면 저 여래의 성품에는 번뇌가 영원히 사라지고 상호가 밝게 빛나며, 불사(佛事)를 이룰 것이다.
마치 병을 깨뜨려 밝게 빛나는 등불을 중생이 받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4가지 비유ㆍ인연처럼, 내가 중생계를 갖는 것처럼,
일체 중생 또한 모두 이와 같아 저 중생계가 가없이 밝고 청정함을 알아야 한다.”
[3승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일체 중생이 여래장의 한 성품과 한 법[乘]을 갖고 있다면,
여래께서는 무엇 때문에 3승, 즉 성문승ㆍ연각승ㆍ대승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비유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
아주 부유한 장자(長者)의 집에 외아들이 있는데 유모를 따라 나갔다가 대중 가운데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자.
장자는 임종할 때가 가까워져,
‘나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다른 자식과 부모와 권속이 없으니 내가 만일 하루아침에 죽으면, 나중에 모든 재산을 왕이 전부 가져가겠지’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각할 무렵에 본래 잃었던 아들이 걸식을 하면서 돌아다니다 그의 본가에 이르렀으나, 자기 아버지의 집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려서 집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보고 알았으나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달아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을 주고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자식이 없으니 나를 위해 아들이 되어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라고 했다.
그 아들이 말하기를,
‘차마 이곳에 머무르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머무르면 항상 괴로워 마치 결박을 당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장자가 다시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으니,
아들이 다시 ‘차라리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치우거나 소를 먹이거나 밭에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장자는 ‘이 아들이 박복하니, 내가 적당한 때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선 그의 뜻을 따르자’라고 생각하여,
곧 똥을 치게 하였다.
그 아들이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장자가 5욕을 마음껏 즐기는 것을 보고 부러운 마음이 생겨,
‘장자가 언젠가 나를 불쌍히 여겨 많은 재물을 주고 나를 아들로 삼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들고나서는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았다.
장자가 이것을 보고,
‘이렇게 되었으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내 아들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에 장자가 그에게,
‘너는 지금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겨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아들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장자가,
‘잘 되었다! 나는 너의 아비요, 너는 나의 아들이란다.
내가 진짜 너의 아비인데 네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가진 재물과 창고를 모두 너에게 줄 것이다.’라고 말하고
대중에게 이와 같이 외쳤다.
‘이는 나의 아들인데 내가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나 스스로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들이 되어 달라 하여도 달가워하지 않더니, 오늘에야 스스로 나에게 아들 되기를 구하였습니다.’
가섭아, 저 장자가 방편으로 못난 아들을 유인(誘引)하여 먼저 똥을 치우게 하고, 나중에 재물을 주며 대중 앞에서 이와 같이 외쳤다.
‘이는 본래 나의 아들인데 잃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스스로 와서 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가섭아, 이와 같이 1승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3승을 말하여 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여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여러 성문들도 모두 나의 아들이니, 저 똥을 치운 사람처럼 이제는 스스로가 알 것이다.“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아, 이상한 일입니다. 이 성문승은 어찌 이렇게 비루합니까? 참으로 불자(佛子)이면서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할 것이다.
만일 네가 꾸짖음과 나무람을 견디지 못한다면 당연히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가 나중에 무르익었을 때 네가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가섭아, 성문과 대승은 항상 서로 어긋난다.
세속과 무루(無漏), 우치(愚痴)와 약삭빠름[黠慧]이 어긋나는 것과 같다.
또 가섭아, 만일 이 경을 비방한다면 마땅히 자비롭게 제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경을 비방했기 때문에 죽으면 당연히 가없는 어둠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불쌍히 여겨서, 마땅히 방편을 베풀어 대승법으로 그를 성숙하게 해야 한다.
만약 다스리지 못한다면 당연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만약 믿음이 있다면 그 스스로 믿을 것이다. 그 나머지 중생은 마땅히 제도하는 일[事]로써 제도하여 해탈하게 해야 한다.
또 가섭아, 만약 어떤 선비가 처음으로 열병(熱病)을 얻었다면 약을 주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치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 적절한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절한 때가 이르기를 기다린 다음에 다스려야 한다.
2처(處)를 알지 못하면 썩은 의원[敗醫]이라 한다.
그러므로 병이 적당히 진행된 다음에 치료해야 한다.
만일 적당히 진행되지 않았다면 적절한 때가 이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와 같이 중생 가운데 이 경을 비방한 사람도 허물이 적당히 익으면 스스로 깊이 후회하며,
‘아, 괴롭다! 내가 한 일을 이제야 비로소 알겠구나’라고 자책할 것이다.
그러한 때에 이르러 마땅히 제도하는 일로써 그를 제도하여 구해주어야 할 것이다.
또 가섭아, 마치 어떤 선비가 넓고 큰 들을 건널 적에 뭇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그때 선비는 새소리를 듣고 생각하기를,
‘도적 떼가 있구나’라고 여기고 딴 길로 갔다.
그리고 빈 연못 속으로 들어가 호랑이가 있는 곳에 이르러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다.
이와 같이 가섭아, 저 오는 세상의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아’가 있다 ‘아’가 없다하는 소리 중에 ‘아’가 있다는 소리를 두려워하여 크게 공(空)한 단견(斷見)에 들어가 무아(無我)를 닦아 익힐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여래장이며, 제불이 상주한 매우 심오한 경전에 대해서는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다.
[여래]
또 가섭아, 네가 나에게 물은 것은 아난을 위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즉 유(有)가 있으면 고락이 있고 ‘유’가 없으면 고락이 없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가섭아, 여래는 ‘유’가 아니며, 중생이 아니며, 또한 무너지지도 않는다.”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설산(雪山) 아래에 청정한 광명을 내는 마니 보배의 성분이 있는데, 마니 보배의 형상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형상을 보고 알아 취하여 가져가는 것과 같다.
마치 금을 연마하는 법처럼 하여 찌꺼기와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때를 여의어 청정히 하면, 닿는 곳마다 본래의 때[本垢]가 더럽히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비유하자면 선비가 등을 잡고 가면 이르는 곳마다 어둠이 모두 사라지고, 등불 빛만 밝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저 마니보배 또한 이와 같다.
진짜 금을 연마하는 것 같이 하면 티끌과 때가 더럽히지 못할 것이다. 별이나 달빛이 비치면 맑은 물이 비처럼 내려오고, 햇빛이 비치면 곧 불이 나올 것이다.
이와 같이 가섭아,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세상에 나타나서 일체 생ㆍ노ㆍ병ㆍ사를 영원히 여의고 번뇌와 습기(習氣)의 때를 모두 없애, 항상 크게 빛나는 것이 저 밝은 구슬 같고 일체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 깨끗한 연꽃 같아, 더러운 물이 묻지 않을 것이다.
또 가섭아, 여래는 이러이러한 때에 이러이러한 형상으로 세간에 나와서 그 마땅함에 따라 범부의 몸으로 나타나되, 그 범부의 무리가 태어나는 곳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며, 또한 세간의 고락을 받지 않는다.
즐거움이란 인천(人天)의 5욕의 공덕이나,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오직 해탈이 있어야 궁극적으로 항상 즐거울 것이다.”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참으로 좋은 말씀이십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스스로 생각하건대, 이제 비로소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구의 분한(分限)을 얻어 아라한을 이룬 듯하니, 마땅히 부처님께 대한 은혜를 알고 은혜를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여래께서는 옛날에 저에게 반 자리[半坐]를 나누어 주시고, 오늘 다시 4중 가운데서 대승법의 물로 저의 정수리에 부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