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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의 揷畫
“또 전쟁이 터졌다는구나. 러시아가 옆에 있는 우크라이나라는 나라를 침공했다는데 이토록 살기좋은 세상에 무슨 영화를 더 누리겠다고 전쟁질이냐 전쟁질이. 전쟁해서 좋을 일이 무엇인지나 알고들 전쟁질을 하는지 참……, 아니할 말로 잘해야 목숨 하나 살고 잘 못하면 하나뿐인 생명들이 원통하고 억울하게 죽는 일 뿐인데 열심히 노력해서 먹고살 생각들은 하지않고 오로지 약한 나라를 빼앗아서 저희들만 배불 리 먹겠다는 짐승 같은 놈들……. 겪고 보니 특히 공산당 놈들은 정말 전쟁에 미친 놈들 같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북한이 그랬고 베트남도 그랬는데 이제는 러시아가 그렇잖으냐? 옛날에는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나라로 쳐들어 가더니 그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아니할 말로 높은 놈들은 지들이 죽을 일이 없으니까 전쟁을 일으키는 거란다. 세상에 전쟁질 해서 죽은 놈 중에 높은 놈들이 몇 놈이나 된다더냐? 예나 지금이나 그저 불쌍한 것이 가진 것 없고 벼슬 못 가진 놈이란다. 너도 자라면 다른 걸 할 생각 하지말고 오로지 벼슬 길을 찾거라. 벼슬이 제일이란다, 벼슬을 가지면 돈은 지가 알아서 스스로 굴러들어 온단다.”
할머니는 예날 얘기를 풀어놓기 위해 며칠 전에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서두로 깔고 있었다. 휴일 낮잠을 접고 할머니의 옛날얘기를 접수하려는 소설가 지망생 손자에게 푼 얘기의 서두로는 무게감이 너무 큰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타산에 쌓인 잔설들이 시선에 잡혀 옷깃을 여미게 하는 무렵에 할머니는 바늘과 색색의 실 등이 담긴 바느질 바구니를 무릎 앞으로 당기시며 혼잣소리로 말씀 하신다. 아마도 전쟁에 대한 끔직했던 실상을 잠시라도 잊으시고자 바느질에 정신을 쏟으실려는 게 아니신지? 비록 어리고 철없던 시절이었지만 직간접으로 듣고 겪어셨을 한국전쟁 얘기는 할머니로서는 몸서리쳐질 일이었을 터. 한 해만 지나면 팔순이신 할머니의 전쟁에 대한 참상은 소문으로 접한 내용이 더 많았겠지만 오히려 옛날얘기로 듣게 되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실상이었다. 철이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나이 때부터 할머니의 말씀으로 전해 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구체성은 상상이나 추측에 의존할 뿐이었지만 내가 철이 든 이후에는 선배나 친구들의 맹호부대나 청룡부대 대원으로 월남전쟁에 참전했던 그들의 무용담으로 개괄적인 내용들을 알고 있는 터였다.
월남이라는 국호의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베트남의 국호가 월남이 된 것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편의성에 기인한 국호였다는 걸 내가 알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서 였다. 한마디로 남쪽에 있는 나라! 그렇다면 남쪽의 기준은 어디인가? 물론 대한민국이리라. 월남전쟁에 대한민국도 군인들을 보낸다는 뉴스를 들어시고 할머니는 그때도 전쟁에 대한 소회를 혼잣소리로 언급하셨던 것이다.
‘누구를 돕는다고? 그길 왜 간다니?……’
베트남전쟁 역시 남북전쟁이었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은 1954년 독립을 쟁취하고 제네바협정에 의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분할된 국가인데 1955년 경, 내전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전쟁참여로 전면전으로 확대된 전쟁이었다. 그렇게 약 20년을 끌어오던 남북베트남은 1973년 1월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남베트남에서 미군들이 철수를 시작하자 북베트남의 휴전협정을 무시한 남베트남 침범을 일삼다가 1975년 봄, 북베트남의 대대적인 공세로 남베트남을 함락하여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된 국가인 것이다. 베트남의 전쟁역사를 돌아본다면 어찌보면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의 판박이가 아닐는지. 다만 한국전쟁 휴전 2년 뒤에 발발한 베트남전쟁이 남북한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되었지만 대한민국은 휴전 70년을 지난 현재까지도 분단국가라는 사실이다. 이는 남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를 시작한 것이 원인이었을 터이나 북베트남의 휴전협정 무시와 대대적인 남베트남 침공은 결국 휴전협정 위반이라는 신뢰의 기반을 파괴한 원인이 더 큰 것이라고 나는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곧 대한민국의 남과 북의 미래를 예단할 수 있는, 참고해야될 가치가 아닐까하는 셍각을 머금기도 했다.
그 해 여름에 안개가 참 많이 꼈었니라. 마을 안에 몇 그루 있지도 않은 아카시아나무에서 아카시아꽃이 만발했다가 모두 떨어지고 난 얼마 후였는데 뭔 세상이 안개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더니라. 기우만은 아니었는지 마을 어른들이 무슨 큰 변고라도 생길 조짐 같다는 말을 심심찮게 했었단다. 그런데 며칠 째 앞이 안 보이도록 안개가 자욱한 세상을 만들던 어느 날 새벽에 사람들이 사변이 터졌다고, 난리가 터졌다며 온통 난리가 났었더니라. 그때 삼척 읍내는 조용했었는데 마을사람들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공산군들이 육지는 물론 배를 타고 대대적으로 바다로도 쳐들어와서는 임원항 바깥에서 처음보는 배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총과 포를 마구잡이로 쏴서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더구나. 한국동란은 삼척에서 그렇게 시작된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단다. 그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동란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이북의 김일성 군대가 우리 이남 땅을 뺐을려고 어느 평온한 일요일 새벽에 남한땅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더니라. 때마침 농번기라 나라에서는 젊은 군인들에게 집에 가서 잠깐이나마 농촌 일손을 돕고오라고 휴가를 보냈다는데 할머니 나이가 예닐곱 살 무렵이었으니 아는 게 있었겠나? 얼마 후에 들은 소문으로는 북쪽의 공산군들이 강릉 위에 있는 주문진 부근에 그어진 삼팔선을 넘고 일부는 바닷쪽으로 군함을 타고 넘어와서 시작된 전쟁이라는데 영동지역에서는 정동진으로 공산군들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더구나. 그놈들은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쳐들어 와서는 총이나 대포로 건물을 부수고 사람들을 죽이곤 했단다. 그때 우리집은 죽서루가 보이는 오십천 건너편 성내리에 있었는데 우리 마을은 사변이 터지고 한참 있다가 공산군들이 들이 닥쳤다고 알고 있단다. 다행이었지 죽서루 쪽에서 우리 동내로 들어오려면 외나무다리 같은 긴 다리를 건너와야 했는데 어쩐 일이었는지 공산군들이 빨리 쳐들어오지는 않았단다. 그 시절에는 바깥소식을 마음대로 들을 수 없었단다. 듣고 볼 수 있는 물건들이 귀해서 무엇이든 눈에 보여야만 어떤 일이, 또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있는 때였단다. 참말로 먹고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다행히 동내마다 한두 집 부자들은 있어 더러는 그 부잣집 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과 함께 마을에서 부자라고 소문난 집과 그 집에 붙어 사는 사람들 모두가 아무도 몰래 짐을 싸들고 피난을 갔더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가난한 동내라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에도 집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 보다는 그대로 집을 지키고 마을을 지킨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 때 너희 외갓집은 오분리 한치재 가는 도로 밑자락에 있었는데 멀리서도 보이는 집이었다. 또 오분리 바닷가에서 마을로 오는 곳에 언덕 같지도 않은 작은 언덕에 길이 하나 있는데 그 언덕길을 넘으면 큰 신작로가 나오고 얼마 안 가서 너희 외갓집이 있었다. 그 도로는 거진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는 큰 신작로인데 그 신작로 바로 밑에 니 외갓집이 있다보니 누가 봐도 위험한 집이었다. 비록 공산군들이 임원항으로 먼저 쳐들어왔지만 육지로 쳐들어온 공산군들도 있었기에 니 외갓집은 그대로 앉아서 지내지 못할 형편이었단다. 그때만 해도 피난 떠나는 집들이 많지 않았다만 니 외갓집도 피난 떠날 생각을 안 하더구나. 그때 니 증조부님이 하신 말씀으로는 아마 정라진에 묶어둔 작은 어선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하시더구나.
그런데 전쟁이 터졌으니 고기잡는 배들이 바다로 나갈 수가 있었겠나. 배가 크든 작든 배라는 배는 모두 선창에 밭줄로 묶어놨는데 그 배를 관리하는 일도 큰 문제였다. 나도 들은 소리다만 니 외삼촌이 전쟁이 터졌다는 소리를 듣고도 선창에 묶여 있는 그 배를 돌아보겠다고 정라진부두로 안 갔겠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니 외삼촌이 공산군들 한테 붙잡혀 갔는지 어땠는지 아무도 몰랐으니 그냥 기다릴밖에. 다음 날 해가 중천에 올랐지만 선창에 간다고 나간 아들이 안 들어오니 걱정이 된 니 외할머니가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어디 있는 지를 알 수 있었겠나?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사흘나흘이 지나자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아들을 찾겠다고 몇 달 동안을 사방팔방을 찾아 헤맸는데 결국 못 찾고 말았단다. 다행인지 어땠는지 니 외삼촌이 공산군들 한테 끌려 가는 걸 누가 숨어서 봤단다. 그 얘기를 빨갱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에 너그 외할머니가 어디서 듣고 오셔서 니 외갓집은 초상이 났더랬니라.
할머니네는 형편이 어려워 멀리 피난을 갈 수가 없다보니 두타산줄기 밑자락에 있는 마을로 피난을 갔더랬니라. 때마침 니 증조할아버지가 교분을 나누고 있던 친구가 있는 마을로 피난을 갔는데 그 마을이 바로 미로 고천이었단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전쟁으로 식솔들 생명에 사단이 생길 수도 있는 심각한 사태라 집에 가만이 있다가는 길을 따라 움직이는 공산군들 총에 맞아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생각하셨겠지. 그렇게 삼 년인가? 세월이 흘러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과 마을 어른들이 이제 다들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씀에 얼마 되지도 않은 보따리를 꾸려서 니 증조할아버지는 지게에 지고, 증조할머니는 머리에 이고 성내리 집으로 돌아왔는데 니 증조할머니가 궁금해서 니 외갓집까지 걸어서 갔다 오시더구나.
“아버지와 엄마는 그 때 아무것도 안 하셨나요?”
“니 아버지와 엄마는 태어나기 전이었단다.”
휴전 70여 년 세월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첫울음도 미치지 못하는 한참이나 저쪽의 시간이었다.
“니 외삼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휴전인지 뭔지해서 전쟁이 끝나고 십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흐른 후에도 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자나깨나 니 외삼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끝내 돌아오지 않았단다. 하기사 전쟁통에 공산군한테 붙잡혀서 끌려간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겠느냐?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엄청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더구나. 난리통에는 그저 숨어지내는 게 상책인데……. 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끝내 니 외삼촌 소식을 더 이상 못 듣고 운명하셨단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인데 또 전쟁이 났으니…….
전쟁이 끝나고 할머니가 철이 든 다음에 생각해보니 우리가 피난갔던 미로 고천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순박하고 인심이 너무 좋아서 더 편하게 지낸 것 같더구나. 니 증조할머니도 좋은 사람들 만난 덕분에 피난살이도 고생을 덜하며 지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단다. 할머니는 지금도 기억난단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우리한테 귀한 감자나 보리쌀 등을 조금씩 가져다 주면서 할머니에게 ‘어떻게해서라도 살아서 돌아가시라’고 하시던 말씀들이. 그 마을로 피난온 집들이 몇 집 더 있었는데 아무도 패악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듣게 된 얘기지만 어떤 사람들은 미로 고천보다 더 깊은 대방골이나 천은사가 있는 절마을까지 피난을 갔다더구나. 우리가 미로 고천 산속으로 피난을 가서 조금 지내다 보니 그때서야 멀지않은 곳에서 싸우는지 따발총소리 대포소리가 들렸단다. 네 할아버지는 대포소리를 듣더니 함포소리라 하시더라. 지금은 할머니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할머니가 어렸는데 어린 것이 함포가 뭔지나 알았겠나? 그래서 네 증조할아버지한테 물었니라, ‘함포가 뭐냐고?’ 함포는 큰 군함에서 쏘는 대포라는데 군함은 또 뭔지 알아야지. 다만 어린 마음에 총소리, 대포소리, 함포소리 때문에 얼마나 겁나고 무섭든지. 금방이라도 공산당들이 총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 같아서 내하고 오빠는 낮만 되면 집에 숨어서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요즘 세상은 산이든 들이든 심지어 동내 마을 안까지도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울창해서 아무 나무든 나무숲에 숨어도 되는데 그때는 산에 나무라고는 하나도 없었단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민대가리 산이었다. 다만 마을 부근 야산에 아카시아나무들이 가끔 있었고 신작로 옆으로는 미루나무하고 포플라나무들이 가로수라 하며 어쩌다가 한그루씩 있었는데 왜놈들이 그 나무들마저 왜 모두 베어가지 않았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단다. 니 증조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소나무는 송진이 많이 채취되는 나무라서 소나무에서 송진을 뽑아 왜놈들이 전쟁에 필요한 기름을 뽑아 쓸려고 우리나라 산에 있는 소나무라는 소나무는 보이는 대로 베어갔다고 하시더라.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중에 사방공사라고 해서 나라에서 나무 심기를 했는데 뿌리를 빨리 내리고 금방 자라는 아카시아를 많은 심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조금 자랐을 때는 아카시아꽃 향기를 많이 맡고 클 수 있었단다. 니 증조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왜정 시대 때, 왜놈들이 대동아전쟁 군수물자를 조달한다고 우리나라에 있는 나무라는 나무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베어서 가져갔다는데 나무를 가져가도 어떻게 그렇게 싹쓸어 갈 수 있는지? 전쟁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산들이 참말로 나무 한 그루 볼 수 없는 벌거숭이 산이었다. 생각하믄 그 시절 왜놈들은 정말 인간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겠나? 농민들이 일년내내 구슬땀을 흘리며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놓으면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공출이라는 명분으로 몽땅 뺏아갔으며 우리나라에 얼마 있지도 않는 지하자원이란 자원들은 몽땅 도굴해서 훔쳐갔다는데 그게 어디 훔쳐간 것이겠나? 아예 지들 것인 양 당당하게 일본으로 빼돌린 것이지. 그 때 왜놈 군대들이 아무리 힘이 쌘 나라였다지만 어찌 그렇게 인정머리 없이 몽땅 뺏아갔으며 우리나라 군대들은 뭘 했기에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는지?
조선시대에 이율곡 할아버지는 군인 십만 명을 양성해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임금한테 상소를 올렸다는데 간신 같은 조정대신들이 당파싸움 때문에 반대를 해서 군인을 양성하지 못하는 바람에 임진왜란이 일어 난 것이라더라. 니 증조할아버지는 생존해 계실 때 같은 민족끼리 화합하지 못하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나라가 망했다고 돌아가실 때까지 정치하는 종자들은 인간 종자가 아니고 짐승의 종자로 만들어진 종자들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심지어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독립을 했는데 지도에 있는 38도선 이남과 이북이 갈라서기는 또 왜 갈라섰겠나? 유식한 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전쟁으로 일본을 패망하게 한 미국과 쏘련이 힘없는 우리나라를 서로 관리하겠다고 욕심을 부려 유엔에서 북위 38도선을 기준하여 반으로 갈라놓았다고 하는데 갈라졌으면 갈라진 대로 서로가 잘 먹고 잘 살면 되는데 왜 또 총으로 대포로 서로가 맞싸우나 맞싸우길? 아니할 말로 우리가 남이나? 우리도 김 씨, 이 씨, 박 씨라는 성씨를 쓰고 이북 사람들도 김 씨, 이 씨, 박 씨 성을 쓰는 같은 민족인데 전쟁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전쟁을 일으켜서는……. 그렇다고 우리가 말이 다르나 글이 다르나. 세종대왕 할아버지가 지은 한글을 사용하는 똑같은 민족인데 누구 좋으라고 총과 대포를 앞세우고 싸우나 싸우기를? 총들고 대포 앞세우고 싸우는 게 그렇게 좋으면 그 총과 대포를 왜 왜놈들에게는 쏘지 못했겠나? 총이든 대포든 왜놈들을 향해서 쏠 일이지 무슨 죽을 원수가 졌다고 같은 민족끼리 싸우나 싸우기를? 그게 다 완장을 차고 있는 놈들이 지 가진 것 감춰놓고 한 푼도 안 되는 남이 가진 것을 뺏을려고 싸우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네 할아버지는 네 아버지가 완장 차는 일을 절대로 못하게 했단다. 천지신명님이 도왔는지 빨갱이들은 우리가 피난 가서 살고 있는 미로 고천 산속까지는 오지않았니라. 동란이 끝나고 들은 얘기지만 그 동란으로 참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하더라. 심지어는 다른 나라 젊은이들도 우리나라를 도와 줄려고 왔다가 생목숨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산에, 강에, 들판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있었다는데 요즘에는 라디오나 텔레비로 한국동란의 상세한 피해상황을 가끔 들어서 알 수 있지만 동란이 끝난 그 때만 해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한동안 눈에 안 보이면 죽었다고 단정했다. 그 때 그 동란은 한 삼년 싸우다가 휴전을 했는데 같은 민족끼리 왜 그 난리를 쳤는지 지금 생각해도 끔직스럽다. 아니할 말로 한국동란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지 알 방도도 없고. 니 증조할아버지는 그것마저도 왜놈들을 탓하셨다. 왜놈들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지 않았다면 과연 남한과 북한이 38선이라는 금 하나로 갈라설 일이 있었겠나 하는 것이 니 증조할아버지가 동내 사람들과 종종 나누신 말씀이셨다. 그런 것이 모두 정치를 잘 못해서 그런 거였다.
할머니는 정치하는 사람들을 혐오한단다. 정치라는 것이 백성들 배고프지 않게 하고 헐벗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일 텐데 정치꾼 누구 한 사람 진정으로 백성들 위하는 사람을 못 봤단다. 그리고 또 분통한 것은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왜 그리도 힘을 기르지 못했는지?
김일성 군대가 삼팔선을 넘어 남한으로 쳐들어와서 삼년동안을 전쟁을 했으니 아마도 전쟁 터지고 아카시아꽃이 두 번은 더 피었을 때일 게다. 미로 고천에도 아카시아나무가 여기저기 몇 그루 있었는데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어느 날 니 증조할머니가 할머니를 데리고 가까운 개울 옆에 있는 아카시아나무에 가서 아카시아꽃을 한줄한줄 따서는 들고 갔던 바구니를 채워서 돌아왔단다. 그날 니 증조할머니께서는 손수 따온 아카시아꽃을 며칠 전 이웃집 할머니가 새로 짜서 내려받은 귀한 것이라고 맛보라며 선물로 주신 콩기름을 아껴 두었다가 아껴서 먹던 보리쌀을 절구에 빻아 가루를 내고 보릿가루를 튀김옷으로 뭍혀서 아카시아꽃 튀금을 만들어 주셨었는데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그 아카시아꽃 튀김이 정말로 별미였단다. 특히 미로 고천은 콩농사가 잘 되는 곳이라서 미로 고천 콩으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도 맛이 있었다. 그날 입 안에서 바싹바싹 십히던 그 식감은 지금 생각해도 침샘이 열릴 만큼 입맛을 부추기더구나. 그리고도 니 증조할머니는 이웃집 할머니에게서 받은 콩기름으로 아카시아꽃이 지기 전까지 몇 번을 더 튀김을 만들어 주셨단다.
할머니의 얘기는 한국전쟁에서 아카시아꽃 튀김으로 내용이 변경돼 있었다. 할머니는 양식은 물론이고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에 아카시아꽃도 식재료가 됐었다는 말씀을 덧붙이시고 계셨다.
마을에 꽃들이 피어나면 할머니는 꽃냄새를 아주 잘 맡았단다. 할머니는 꽃향기가 그렇게나 좋더구나. 논밭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꽃씨 심을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어릴 때 동내에 피어 있는 꽃을 찾아다니며 누가 볼까봐 눈치를 살피다가 꽃을 따다가 손톱에 분홍색 물을 들이곤 했단다. 그 꽃이 봉선화란 꽃인데 할머니는 지금도 봉선화를 보면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 싶더구나. 그런데 어떤 꽃이든 필 때는 예쁘고 아름답지만 그 꽃이 질 때 가만히 살펴보면 나이 많은 사람들 피부에 검버섯 돋듯 먼저 검은 점들이 생기더구나. 꽃들도 그렇게 검은 점이 생기고 시들면서 결국 땅에 떨어지더구나. 생각해 보면 사람이나 꽃이나 생이라는 게 참으로 허무한 것인데 누구나 아등바등하며 지내니……. 옛날에 봄이 되면 할머니는 참꽃을 참 많이 먹었단다. 요새는 참꽃을 진달래라고 하지만 할머니 어렸을 때는 참꽃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할머니오빠하고 산과 들에 놀러다니면서 새알을 찾아서 집에 가져와 삶아먹고 그랬는데 가끔씩은 그 때가 생각나고 그리울 때도 있단다. 그리고 이른 봄에 참꽃이 다 질 무렵이면 또 개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말 그대로 개꽃은 독이 있다고 해서 먹지를 않았다. 문둥이들이 개꽃에 문둥이 병균을 묻혀놓았다는 소문도 있었단다. 아마 그런 소문 때문에 개꽃을 못 먹는 꽃이라 했을 게다. 지금은 그 개꽃을 철쭉이라고 한다만 이름도 철쭉이 얼마나 예쁘냐? 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산소에 심은 꽃도 철쭉인데 그 나무들은 할머니가 니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구해다가 심은 거란다. 어쩌다 한번씩 성묘를 가 보면 개나리, 철쭉, 연산홍, 아리랑꽃 등이 봄에서 여름내내 꽃을 피워 할머니는 부모님 산소가 그렇게나 좋더구나.
재덕아! 어제보니까 아카시아꽃들이 모두 떨어져 바람에 휩쓸리고 있더구나. 요즘도 아카시아꽃이 폈다가 질 무렵이면 종종 안개 끼는 날을 볼 수가 있는데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어렸던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 많이 생각나더구나. 어제도 옛날 생각이 나서 운동삼아 한참동안 산책을 했는데 아카시아꽃들이 모두 떨어져서 한 곳에 소복하게 쌓여있기에 찬찬이 살펴보았더니 맨땅 위에 하얗거나 노란 민들레가 꽃 몇 송이를 피우고 있더구나. 그 꽃들을 한참이나 내려다 보면서 든 생각은 민들레 뿌리가 간 나쁜 환자들에게 특효라는 소리가 있는 터라 저 어린 꽃들도 오래지 않아서 종적이 사라질 것이란 생각이 들더구나. 민들레 뿌리가 간 나쁜 환자들에게 특효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람들은 술을 덜 마시고 간 보호할 생각을 하지않고 민들레뿌리를 캐어다가 간 회복약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너는 어른이 되어서라도 술을 많이 마시지 말거라. 할머니는 네 아버지도 걱정이란다. 쓸데없이 왠 술을 그렇게나 마셔대는지 원.
바람결에 쏠려 포도를 뒹굴던 아카시아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바다로부터 건너온 안개가 천지간을 가득 메우며 서너 발짝 앞을 볼 수 없는 날이 며칠동안 지속되자 할머니는 손자를 앞에 앉혀놓고 혼잣 소리처럼 또다시 지난 세월 한자락을 풀어헤치셨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퍼지고 한참동안 남쪽으로 남쪽으로만 밀리던 한국군의 대열이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던 즈음에 일본땅에서 일본을 관리하던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미군들을 인솔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일으키자 전쟁의 판세가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으로 북으로 밀고 올라가게 되었단다. 그 무렵,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군을 지원하고자 중공군이 참전해서 또 전세가 역전됐는데 전쟁이 발발한 우리나라를 돕고자 참전한 유엔군들과 한국군들이 후퇴하게 됐고 남쪽이든 북쪽이든 민간인들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북한땅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려고 함경도 흥남항으로 모여들었단다. 때마침 빅토리아호라는 미국의 큰 아가리배가 함흥시에 위치한 흥남부두에 정박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흥남부두로 모여들었단다. 그리고 하늘의 축복인지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빅트리아호를 타고 남한으로 피난을 갔더란다. 학자들은 흥남부두 철수를 두고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작전이었다고 한다더구나.
1·4후퇴라는 말도 하는데 미국의 빅토리아호가 피난민과 후퇴하는 군인들은 가득 싣고 남쪽으로 떠난 후에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가 있었단다. 결국 그 대공세에 밀려 유엔군들과 한국군, 피난민들이 뒤썪여 1951년 1월 4일을 기해 대대적으로 남쪽으로 피난 떠났던 날을 1‧4후퇴라 한단다. 전쟁은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고 부수고 병신이 되고 하는 일만 발생하는 아주 못된 싸움이란다. 어느 나라든 전쟁이란 천추의 한만 남기게 되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도 러시아는 또 전쟁을 일으키는구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이 되면 방송국들은 해마다 앞다투어 잔혹했던 참상들을 방영하고 있는 바, 나는 할머니의 얘기로 듣게 되는 지난 세월과 특히 6.25에 관한 얘기들이 더 재미있어 할머니의 무릎 앞으로 바짝 다가가 앉는 버릇이 있었다.
할머니는 바느질 하시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얘기를 잇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왜놈들 정치에서 해방되고 얼마 되지도 않은 때라 살기가 참으로 곤궁했었는데 뭘 뺏어 먹을 게 있다고 김일성 군대가 대포와 총을 앞세우고 전쟁을 일으켰는지. 남쪽에서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눈만 뜨면 서로가 지 잘났다고 마주하고 어르렁거렸는데 어떤 사람은 남한 정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북으로 넘어가서 소식도 모르게 되고 그랬다. 나는 겪어보지 못 했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때 서울은 빨갱이들이 마구잡이로 터트린 폭탄 때문에 불바다가 됐다고 하더라. 니 외할머니 말로는 니 막내외삼촌이 그때 서울에서 무슨 사업인가를 하고 있었다는데 니 막내외삼촌도 전쟁통에 포탄에 맞아서 돌아 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시더라. 옛말에 부모는 죽으믄 땅에 묻지만 자식은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 했는데 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놓고 웃음 한번 못 웃고 돌아 가셨을 게다. 할머니가 지금까지 살면서 스스로 배운 것이 있다면 생명은 자신이 어떻게 돌보느냐에 따라서 죽음도 오고가는 것 같더라. 너도 항상 조심하면서 살아야 된다. 요즘에는 자동차가 많아서 그 자동차 때문에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옛날에는 사람의 생명은 하늘의 뜻에 따라서 살아진다고 해서 인명재천이라 했는데 요즘에는 자동차에 의해서 죽고사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다 보니까 인명차천이라는 말도 하더구나. 특히 자종차를 조심하는 것도 중요하단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머리맡에 앉히고 어쩌면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혹독했을 과거사들을 몇 번 째 풀어놓으셨다. 더러는 수십번을 들은 얘기도 있어 어쩌면 어린 손자가 할머니의 얘기를 대신할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할머니의 얘기는 항상 재미를 전제했던 것이다.
두타산을 덮고 있던 잔설이 모두 녹아내리자 대지는 또 자신의 본분을 잊지않고 갖가지 꽃들을 피워내고 있었다. 근원지간에 개화한 꽃들을 모두 볼 수는 없었지만 창문을 열자 아카시아꽃이 향기로 진동했다. 아카시아꽃은 내게 있어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매개였다. 나는 한동안 잊고 지내던 할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손자에게 헤일 수 없이 많은 얘기꽃을 듬뿍듬뿍 나누어 주시던 할머니는 당신의 생애에서 손자를 처음 만났을 때가 가장 행복하셨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아카시아꽃 향기가 천지간을 진동하는 무렵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나는 이십여 년 저쪽 세월에 남겨진 작은 일화 하나를 회억했다. 그날 할머니는 며느리인 내 어머니를 그냥 쉬게 하시고는 할머니가 손수 따서 튀김가루를 입히고 기름에 튀겨서 바삭바삭한 식감이 살아있을 때 며느리와 손자의 입에 넣어주시려 얘쓰시던 모습이었다.
“어멈아! 언젠가 니가 얘기했제? 네 친정엄마에게 꽃튀김 몇 송이 드린 걸 니가 다 먹었다고?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참에 재덕이도 먹이고 싶어 겸사겸사 튀겨보았다.”
아카시아꽃 튀김의 진한 냄새와 그 식감은 할머니가 환생하시는 듯 내 가슴에 깊이 들어와 오래도록 스멀거리고 있었다.
“재덕아!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카시아꽃이 보이면 그 꽃을 좀 따오면 좋겠구나. 아카시아꽃 향기를 맡으니 네 할머님 생각이 나는구나.”
휴일을 기하여 동료들과 등산을 나서는 아들을 향해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산에서 자라는 아카시아꽃 몇 잎만 따 오라고 어머니는 심부름 아닌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나 나는 등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카시아꽃 향을 맡으면서도 어머님의 부탁을 외면했다. 어머니는 높은 산에 있는 아카시아꽃은 향기도 좋지만 읍내에 핀 아카시아꽃들 보다 꽃잎에 붙어있는 미세먼지들이 많지 않아서 깨끗할 것이라는 소리를 덧붙이셨던 것이다. 그날 등산로를 조금 벗어난 자리께에 훌쩍 키를 키운 아카시아나무가 있었고 하얀 꽃들이 거부할 수 없는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나는 동료들과의 얘기꽃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더하여서 마음만 먹는다면 집에서 조금만 나서면 아카시아꽃잎을 마음껏 딸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카시아꽃으로 무엇을 하려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나는 우정 어머니의 부탁을 외면했다.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지청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카시아꽃 튀김 얘기를 하시면 고생은 차치하고라도 특히 펄펄끓는 기름으로 인한 위험한 일을 왜 사서 하려느냐고 어머니에게 지청구를 하신적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카시아꽃은 튀김을 해도 향기가 진하게 남아 있어 당신이 즐겨 마시는 소주안주로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며칠 후 나만의 일이 기다리고 있어 퇴근 길을 서둘러 귀가했을 때 나는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집안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를 맡고 있었다. 내 밑으로 하나 뿐인 동생은 어머니가 아카시아꽃 튀김을 만들고 계신다며 어머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나를 낳고 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에 태어난 귀한 동생이었다. 군 입대를 위해 영장을 받아놓은 상태라 입대전에 막내에게 좀 더 색다른 음식이나 맛있는 것을 먹여보려는 어머님의 애쓰심인 듯했다.
주방에 서서 짧은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지만 오로지 튀김에만 열심이신 어머니의 뒷머리 끝이 희끗희끗해 보였다. 어머님의 늙음의 흔적을 볼 때마다 며느리를 기다리실 연세가 되셨음을 생각했지만 나에 대한 인연도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원인이 터였지만 고쳐쓸 수 없는 것이 천성이라 나 역시 고민중에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아버지는 친구 따라서 친구의 고향으로 출타하신 날의 오후였다.
“엄마가 아카시아꽃 튀김을 하시니까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네요.”
“너도 그렇냐? 사실 아카시아꽃 향기를 맡으니 네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더구나. 언젠가 할머니가 외할머니에게 맛 보라며 주신 아카시아꽃 튀김을 그 때 내가 몽땅 먹다시피 안 했겠니. 할머니 생존해 계실 때 한번 그 말씀을 드렸더니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니가 그렇게 맛나게 먹은 줄을 몰랐다시며 아카시아꽃이 피면 꼭 한번 꽃튀김을 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할머니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시고…….”
어머니의 음성에 물기가 담겨 있었다. 손자로서 아들로서 고부간의 갈등을 한번도 목격한 적이 없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인간애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었다.
아버지도 할머니의 아카시아꽃 튀김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시기에 그야말로 끼니로 떼우기 위해 몇차례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라 아버지는 아카시아꽃 튀김에 대한 기억이 불편했다. 생각의 차이든 관점의 차이든 할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의 의사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한 약속을 잊으신 듯 지내신 것은 며느리와의 약속보다 당신의 아들에 대한, 안으로만 굽어드는 일방적인 팔의 개념 같은 것은 아니었는지.
“시장에 나갔더니 마침 어떤 할머니가 이걸 바구니에 담아서 팔길레…….”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지만 어머니는 아카시아꽃 튀김을 하시게 된 동기를 부연했다. 아버지가 계신 자리라면 필요한 설명이었겠지만 나와 동생에게는 불필요한 설명이었다.
할머니의 얘기 속에 등장하는 아카시아꽃이 피는 시기와 한국전쟁의 발발시기에 대하여 톱니바퀴가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할머니의 얘기에는 절대 퀘션이나 의아성을 붙이지 않았다. 다만 할머니의 얘기에도 추임새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맞아요 란다거나 그래서요 따위로 할머니의 얘기에 신바람을 불어넣고자 했는데 그러한 요소들이 할머니의 신바람을 부추긴 것은 사실일 터였다. 그리고 할머니 입장에서 시간성의 연상작용으로 어떤 사건에 무엇을 맞추어서 얘기하시다 보니 가장 비근한 시간감이 아카시아꽃 튀김과 안개와 한국전쟁, 그리고 피난살이 정도였으리라. 그러했기에 아카시아꽃이 만발했을 무렵에 항상 안개가 자욱했었다는 회억과 그에 더하여 한국동란이 터졌고 그로인한 피난살이 등등, 때문에 할머니에게 있어 아카시아꽃이나 안개는 반가움의 대상은 아니었으리라는 추측이 내 안에 존재했다. 반면에 할머니에겐 아카시아꽃 향기와 안개는 오히려 혼란의 대상은 아니었을지. 안개 자욱한 천지간에 흘러들던 달착지근한 아카시아꽃 향기는 어쩌면 대한민국에 포성이 울릴, 즉 한국동란 발발의 신호탄은 아니었는지. 칠십 년 저쪽 시간을 실타래 풀 듯 손자에게 여러갈래로 들려주시던 어느 여름날의 삽화들은 이제 대한민국의 천지간에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박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하며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나만의 업무를 정리하기 위해 나는 엉덩이를 일으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