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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입문 하권
제24장 팔배사八背捨
배사背捨 이하 여섯 법문은 모두 불괴법不壞法에 속한다.
불괴법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관찰하는 선이고,
둘째는 단련하는 선이고,
셋째는 훈숙하는 선이고,
넷째는 정교하게 가다듬는 선이다.
배사ㆍ승처ㆍ일체처의 세 가지 문은 모두 관찰하는 선(觀禪)에 속하고,
구차제정은 단련하는 선(鍊禪)이며,
사자분신삼매는 훈숙하는 선(熏禪)이고,
초월삼매는 정교하게 가다듬는 선(修禪)이다.
팔배사八背捨란
내유색상외관색內有色相外觀色ㆍ내무색상외관색內無色相外觀色ㆍ정배사신작증淨背捨身作證ㆍ허공처배사虛空處背捨ㆍ식처배사識處背捨ㆍ불용처배사不用處背捨ㆍ비유상비무상배사非有想非無想背捨ㆍ멸수상배사滅受想背捨이다.
배사란 정결한 오욕(淨潔五欲)마저 등지고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사를 이루면 해탈을 얻는다.
욕계의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은 거칠고 피곤하게 하는 법인데, 이 법에 탐착하여 삼악도에 빠지는 것을 더러운 오욕(不淨五欲)이라 한다.
욕계정ㆍ사선ㆍ사공정에 맛 들여 집착을 일으키는 것을 정결한 오욕이라 한다.
이 법은 능히 정결한 오욕마저 등지고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첫 번째 배사]
첫 번째 배사를 설명하겠다.
안팎의 색을 무너뜨리지 않고, 안팎으로 색의 모습을 소멸시키지도 않은 채 더럽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색을 관찰한다.
이것을 초배사初背捨라고 한다.
왜 그런가?
중생에게는 애행愛行과 견행見行의 두 가지 결박하고 부리는 번뇌가 있다.
애착이 많은 사람은 즐거움의 집착에 묶이는 경우가 많아 밖의 번뇌에 속박되므로 바깥 몸을 더럽다고 관함을 닦아야 한다.
소견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내 몸이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여 안의 번뇌에 속박되므로 자신의 몸을 더럽다고 관함을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배사관背捨觀을 닦는 것이다.
수행자의 번뇌는 대부분 안에서 먼저 일어나므로 안의 관찰이 이루어진 뒤에 더럽다는 마음으로 밖을 관찰한다.
어떻게 안을 관찰하는가?
수행자가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엄지발가락을 잘 관찰해 보면 마치 크고 통통한 검은 콩처럼 생각되고, 또 누에와 같은 모양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양이 되는 것을 보고 나서는 다시 불어나 배콩만큼 커지고 또 계란만큼 커지는 것을 생각한다. 이어서 모든 발가락과 발바닥까지 보고, 다음엔 오른쪽 다리도 이와 같이 관찰한다.
이어서 차례로 온몸을 두루 보는데 사지와 배와 등과 모든 마디와 모든 구멍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불어나는 것을 본다.
머리에서부터 발에 이르고 발에서부터 머리에 이르며 온몸을 돌아가며 관찰하는데, 부르터서 불어나는 것만 보며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다음에는 무너지는 모습을 관찰한다.
썩어 문드러지고 피로 더럽혀지며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배가 터져 모든 내장이 드러난다. 이와 함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은 냄새나고 문드러지고 더럽다.
(이와 같이 관찰하면) 혐오하는 마음이 생겨 자기 몸이 길가에 죽어 쓰러진 개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관찰하게 된다.
밖으로 사랑하는 남녀의 몸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면 사랑할 수도 즐거워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이 구상九想의 방법과 같으나 다만 산상散想과 소상燒想 두 가지가 없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 관을 닦을 때에 욕계의 번뇌가 아직 그치지 않았다면 이 관에 오래 머물러 싫어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완전히 성숙시켜 탐욕과 애착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 뒤에 더 나아가 백골관白骨觀을 닦는다.
한마음으로 고요히 선정에 들어 미간을 잘 관찰하면서 피부와 살이 찢어져 벌어지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면 백골이 드러나는데 손톱 크기만 한 것까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차차 마음을 위로 향하면서 피부와 살을 벗겨 내면 이마뼈가 보이고 머리카락과 이마 경계 지점의 뼈가 보인다. 나아가 정수리뼈의 피부와 살까지 벗겨지면 해골이 완전히 드러난다.
다시 생각을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피부와 살을 모두 마음을 따라 벗겨 내면서 차츰 발에 이른다. 그러면 뼈만 남은 사람이 마디와 마디가 서로를 지탱하며 단정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만 보게 된다.
수행자는 이때 선정에 든 마음으로 이 뼈가 인연으로부터 생긴 것임을 관찰한다.
발가락뼈로 인하여 발뼈가 지탱되고 있고, 발뼈로 인하여 복사뼈가 지탱되며, 복사뼈로 인하여 정강이뼈가 지탱되고, 차례로 서로 의지하여 무릎뼈ㆍ넓적다리뼈ㆍ엉덩이뼈ㆍ허리뼈ㆍ등뼈ㆍ갈비뼈에 이른다.
또한 등뼈로 인하여 위로는 목뼈가 지탱되고, 목뼈로 인하여 턱뼈가 지탱되며, 턱뼈로 인하여 치아가 지탱되고, 그 위에 해골이 있게 된다.
또한 목뼈로 인하여 어깨뼈가 지탱되고, 어깨뼈로 인하여 위팔뼈ㆍ아래팔뼈ㆍ손바닥뼈ㆍ손가락뼈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서로 의지하면서 360개의 뼈마디가 있다.
그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해 큰 것과 작은 것,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을 안다.
이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인연에 의지한 것이고 거짓된 것이므로 이 가운데는 주체도 없고 나도 없다.
어떻게 자신의 몸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은 바람 기운이지 몸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고 나아가 법을 관찰해 보면 모두 거짓된 것으로서 주체도 없고 자아도 없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면 아견을 타파하게 되고 오욕이 없어지게 된다.
이때 다시 머리에서 발까지 발에서 머리까지 온몸을 돌아가며 자세히 관찰하면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백골관을 깊이 연마해야 한다. 그러면 힘줄과 뼈가 모두 없어지고 뼈 색깔이 흰 마노나 조가비와 같아진다.
이렇게 깊이 관찰하기를 쉬지 않으면 뼈에서 흰 광채가 번쩍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나서 미간을 자세히 관찰하면 또 빛나는 흰 광채가 모두 마음으로 모이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이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마음을 미간에 고정시키기만 한다.
그러면 그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저절로 머물게 되고, 선근이 개발되어 미간에서 여덟 가지 색의 빛이 빙글빙글 돌면서 나와 시방을 두루 비춰 모두 밝고 깨끗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여덟 가지 색이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파랑(靑)ㆍ노랑(黃)ㆍ빨강(赤)ㆍ하양(白)인데, 이런 색의 빛은 세간에는 없는 것이다. 이때는 마음이 안온하게 안정되고 기쁨과 즐거움이 한량없다.
다시 마음을 거두어 이마를 자세히 관찰하면서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면 또 여덟 색깔의 빛이 빙글빙글 돌면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선정에 든 마음으로 이마 끝단과 정수리ㆍ두 귓구멍ㆍ눈썹뼈ㆍ눈뼈ㆍ코뼈ㆍ입뼈ㆍ이빨ㆍ턱뼈ㆍ목앞뼈ㆍ목뒤뼈 등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차례로 관찰하면 360개의 모든 골절에서 빛이 빙글빙글 돌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고, 온몸에서 빛을 발하여 일체를 비춰 밝고 깨끗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수행자는 선정의 마음에서 희지喜支와 낙지樂支 등 다섯 가지 지支를 모두 갖추게 되니,
이것을 초배사를 증득한 모습이라고 한다.
안으로는 뼈만 남은 사람의 모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안에 색의 모습이 있다(內有色相)’고 하고,
밖으로 여덟 가지 빛과 욕계의 더러운 경계를 보므로 ‘더럽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깥 색을 관찰한다(以不淨心觀外色)’고 한다.
수행자는 안팎의 더러운 색을 보기 때문에 욕계를 등지고 버리며 마음으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게 된다.
여덟 가지 깨끗한 색을 보므로 초선初禪을 알게 되어 무명의 경계 중 거칠고 열등한 것들을 버리고 마음으로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정결한 오욕마저 등지고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배사]
두 번째 배사는 자기 몸 안의 색상을 무너뜨려 없애고 바깥의 색상은 없애지 않은 채 더럽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깥 색을 관찰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첫 번째 배사에서 뼈만 남은 사람이 빛을 뿜어 두루 퍼지고 나면, 수행자는 제2선의 내정지에 들어가려고 자기 몸 안의 뼈만 남은 사람을 무너뜨려 없앤다. 그러나 여전히 바깥 백골의 더러운 모습을 관찰한다.
수행자는 첫 번째 배사를 성취한 다음 각과 관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몸 안의 뼈만 남은 사람은 비고 거짓되어 알맹이가 없으며 안팎이 뻥 뚫려 있음을 자세히 관찰한다. 그리하여 오로지 무너져 흩어지고 닳아 없어지는 모습만 취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그 뼈대가 썩고 문드러지고 부서지며 먼지처럼 흩어져 허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차례대로 보게 되고, 자기 몸 안의 색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때 다만 마음을 거두어 선정에 들어가 바깥의 광명과 더러운 대상을 반연하고, 한마음으로 대상에 집중하고 각과 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곧 안의 마음이 활연히 밝고 깨끗해지며 삼매에 바로 들어가 큰 기쁨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여덟 가지 빛이 안의 깨끗함(內淨)으로부터 나와 시방을 밝게 비추는데, 전보다 곱절로 뛰어나다.
이미 이 법을 증득했다면 곧 제2선을 알게 되어 헛되고 거짓되며 거칠고 열등한 것들을 혐오하고 물리쳐서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배사라고 하며, 또 무루의 제2선이라고 한다.
[세 번째, 정 배사]
세 번째는 정배사淨背捨이고 몸으로 증득하는 것(身作證)이다.
깨끗함을 반연하기 때문에 ‘정淨’이라고 하고,
온몸으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신작증身作證’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수행자가
두 번째 배사를 성취한 다음 바깥의 더러움을 관찰하는 것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고 남김없이 모두 무너뜨리며, 또한 큰 기쁨이 용솟음치는 것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마음을 거두어 여덟 색의 찬란한 빛을 자세히 관찰하여 깊은 삼매에 들어간다.
이 여덟 가지 색을 단련하여 지극히 밝고 깨끗하게 해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면 곧 사라지듯 선정에 들어가며 즐거움이 함께 생겨난다.
여덟 가지 색의 빛은 맑고 밝고 깨끗하여 묘한 보배의 광명처럼 온 세계에 가득 차고, 마음을 밝고 깨끗하게 비춘다. 그러면 즐거움이 점점 늘어나 몸에 두루 가득하고 온몸으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 법을 증득하고 나면 근본선根本禪을 버리고 마음으로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므로 정배사淨背捨라고 한다.
또 무루의 제3선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허공 배사]
네 번째는 허공배사이다.
수행자는 욕계정을 성취한 뒤에는 자기 몸의 피부와 살 등 더러운 색을 이미 없애고,
첫 번째 배사를 성취한 다음에는 자신의 백골 등의 색을 이미 없애며,
두 번째 배사를 성취한 다음에는 바깥의 온갖 더러운 색을 이미 물리치게 되어 오직 여덟 가지 깨끗한 색만 남게 된다.
제4선에 이르러 “이 색은 모두 마음을 의지하여 머무르니, 비유하면 허깨비의 색이 허깨비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과 같다.”고 관찰한다.
만일 마음이 색을 버리면 색은 곧 물러나 사라지고, 일심으로 공空을 반연하여 공과 상응하면 곧 가없는 허공처虛空處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색을 사라지게 하는 방편이다.
수행자가 허공배사에 들어가려면 마땅히 먼저 공처정에 들어가 색色을 등져서 버리고 무색無色을 반연하여야 한다.
여기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관법(八聖種觀)을 닦으면 무색법 역시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공처정에 머무르지만 허공정虛空定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허공배사라 한다.
[다섯 번째 식처배사, 여섯 번째 무소유처배사, 일곱 번째 비유상비무상처배사]
다섯 번째 식처배사, 여섯 번째 무소유처배사, 일곱 번째 비유상비무상처배사는 모두 위의 법과 같으니, 앞의 예로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멸수상]
여덟 번째 멸수상배사는 수受와 상想 등 온갖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心所法)을 등지고 없애는 것이다.
왜 그런가?
비상非想(非有想非無想處)에는 거친 번뇌가 없긴 하지만 사음四陰(受ㆍ想ㆍ行ㆍ識)과 이입二入(意入處ㆍ法入處)과 삼계三界(意根界ㆍ法境界ㆍ意識界)의 열 가지 미세한 심수법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 수受, 둘째 상想, 셋째 행行, 넷째 촉觸, 다섯째 사思, 여섯째 욕欲, 일곱째 해解, 여덟째 염念, 아홉째 정定, 열째 혜慧 등이다.
수受란 무엇인가? 식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상想이란 무엇인가? 식으로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행行이란 무엇인가? 법法의 작용이다.
촉觸이란 무엇인가? 의근의 접촉이다.
사思란 무엇인가? 법을 사유하는 것이다.
욕欲이란 무엇인가? 선정에 들어가고 나옴을 말한다.
해解란 무엇인가? 법을 이해함이다.
염念이란 무엇인가? 삼매를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정定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여법하게 머무름을 말한다.
혜慧란 무엇인가? 혜근慧根과 혜신慧身을 말한다.
수행자는 비상배사非想背捨(非有想非無想背捨)에서 비록 비상非想(非有想非無想處)을 집착하지는 않으나 모든 심수법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멸수상滅受想(滅受想定)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한마음으로 진제만 반연해 음陰ㆍ입入ㆍ계界를 끊으면 온갖 행의 인연이 다 사라진다.
수受가 사라짐으로부터 시작해 혜慧가 사라지며, 온갖 심수법이 다 사라지고 심수법이 아닌 것 또한 사라진다.
지금 등지고 버리고자 한다면 다시 모름지기 진제를 관찰하는 수受와 상想 역시 궁극의 고요함이 아님을 깊이 알아서, 관찰하는 주체인 정의 수(定受)와 혜의 상(慧想)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진제를 반연하는 정定과 혜慧의 두 가지 마음을 버리기 때문에 ‘수와 상 등 온갖 심수법을 등지고 없앤다’고 하였다.
제25장 팔승처八勝處
팔승처八勝處를 설명하겠다.
첫째 안으로 색의 상相이 있고 밖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약간의 색을 관찰하는 것을 ‘뛰어나게 알고 뛰어나게 보는 첫 번째 승처’라고 한다.
둘째 안으로 색의 상이 있고 밖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을 ‘뛰어나게 알고 보는 두 번째 승처’라고 한다.
안으로 색의 상이 없고 밖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약간의 색을 관찰하는 것을 ‘뛰어나게 알고 보는 세 번째 승처’라고 한다.
안으로 색의 상이 없고 밖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많은 색이 나타나는 것을 ‘뛰어나게 알고 보는 네 번째 승처’라고 한다.
다섯째는 청승처靑勝處, 여섯째는 황승처黃勝處, 일곱째는 적승처赤勝處, 여덟째는 백승처白勝處이다.
관찰하는 마음을 잘 조절하여 깨끗하건 깨끗하지 않건 뜻대로 타파할 수 있기 때문에 승처勝處라고 한다.
만약 승처로 인해 번뇌가 끊어지면 곧 허망한 음陰과 입入이 모두 없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승처를 이름을 바꿔 팔제입八除入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승처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스스로 자기 몸을 관찰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관찰하며 부정관인 구상九想을 닦을 때, 반연하는 대상이 적기 때문에 ‘바깥으로 약간의 색을 관찰한다’고 한다.
바깥의 여러 색을 관찰하면서 좋은 모습이 나타날 때는 ‘아름답다’고 하고, 나쁜 모습이 나타날 때는 ‘추하다’고 한다.
혐오스러운 더러운 색을 볼 때는 ‘추하다’고 하고, 희열을 느낄 만한 빛나는 색을 볼 때는 ‘아름답다’고 한다.
수행자는 추한 것을 볼 때 그것이 헛되고 거짓임을 알아 성내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을 볼 때도 그것이 인연 따라 생긴 것임을 알아 애착하거나 물들지 않는다.
이렇게 뜻대로 색을 관찰하여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것을 ‘뛰어나게 알고 보는 것’이라 한다.
두 번째 승처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는 관찰하는 마음이 조화로워진 뒤에 안으로 뼈만 있는 사람의 모습을 없애지 않은 채, 다시 선정 가운데서 널리 바깥의 색을 관찰한다.
한 구의 시신으로부터 십 백 천 만 구의 시신을 관찰하고, 나아가 한 마을, 한 나라, 한 세계에 온통 가득 찬 시신이 불룩하게 부풀고 문드러져 내리는 것을 본다. 이렇게 구상에 의지하여 매우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 다음 백골관을 닦는데, 뼈만 있는 사람이 한 명으로부터 열 명, 백 명에 이르고 나아가 한 세계에 가득 찬 것을 본다.
밖의 사람들을 백골로 관찰하고 나서는 다시 선정의 마음으로 자신의 백골을 자세히 관찰하여 흰 마노나 조가비처럼 밝고 깨끗해질 때까지 단련한다.
이때 밖의 뼈만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 서로 마주하며 줄지어 오는 것을 보게 된다.
수행자는 삼매 가운데서, 이 뼈만 있는 사람들은 다 생각을 따라서 나타난 것이지 참된 실체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뼈만 남은 사람이 다시 모두 땅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자기 몸 안의 뼈를 깊이 관찰하면 광명이 널리 비춰 뼈만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에 비춰지고 또한 모두 밝고 맑아진다. 이 백골관이 이루어질 때 모든 원수와 친구, 모든 아름답고 추한 것에 대해 그 마음이 평등해져 좋아하거나 성내는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을 아름답거나 추한 것을 뛰어나게 알고 보는 것이라고 한다.
또 이 관에 머물러 뼈만 있는 한 사람이 사천하에 두루한 것을 보므로 ‘많다(多)’고 하고,
다시 생각을 거두어 뼈만 남은 한 사람을 관찰하기 때문에 ‘뛰어나게 알고 본다(勝知見)’고 한다.
또 관찰하는 마음이 익숙해져서 비록 능히 관찰하는 마음에 성품이 없음을 알면서도 대상 가운데서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승처勝處’라고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을 관찰하여 더러운 흰 뼈라고만 보면 ‘적다(少)’라고 한다.
만일 대부정관大不淨觀을 행하면 이것을 ‘많다(多)’라고 한다.
대부정관은 모든 곳의 탐욕과 애착을 깨뜨리는 것이니, 날거나 달리는 짐승의 무리들까지 모두 관찰하여 구상관九想觀을 행하는 것이다.
또 음식은 벌레나 똥과 같고, 옷과 비단은 썩은 가죽이나 썩은 살덩이와 같으며, 돈과 재물, 금은보화는 독사나 도마뱀과 같다고 관찰한다.
이것은 반드시 죽어서 변하는 것들이며, 냄새나고 썩는 더러운 것들이다. 곡식은 죽은 벌레와 같고, 밭과 집, 마을은 모두 다 썩고 무너지는 것이다. 나아가 백골이 어지러이 흩어져 모든 세간이 다 더럽다고 보아 매우 혐오하게 된다.
수행자는 삼매 가운데서 관찰하는 대로 곧 보고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세간의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증오, 탐욕과 근심 등의 번뇌를 깨뜨린다. 그러므로 ‘뛰어나게 알고 본다’고 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승처는 앞의 두 가지와 대체로 같으나 안으로 색의 상이 없어진 것으로서, 두 번째 배사와 비슷하다.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 파랑ㆍ노랑ㆍ빨강ㆍ하얀색의 네 가지 승처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제3선의 몸으로 증득하는 즐거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4선에 들어가면, 그때 염念과 혜慧가 깨끗해져 네 가지 색이 더욱 밝게 빛나게 된다. 마치 묘한 보배의 광명과 같은 것이 이전의 색보다 훨씬 뛰어난 것과 같다.
또 동요하지 않는 지혜로 이 네 가지 색을 단련하여 적은 것을 많게 하고, 많은 것을 적게 하는 등 바꾸기를 자유자재로 하며, 보고 싶으면 바로 보고, 없애고 싶으면 곧 없어지므로 ‘승처’라고 한다.
또 수행자가 이 뛰어난 색을 보고 번뇌를 아직 끊지 못하면 법을 아끼는 마음이 생겨난다.
지금 법을 아끼는 마음을 끊으면, 곧 이 색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알아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는데, 이때 ‘배사背捨’를 바꾸어 ‘승처’라고 부른다.
제26장 일체처一切處
일체처一切處란
첫째는 파랑(靑), 둘째는 노랑(黃), 셋째는 빨강(赤), 넷째는 하양(白), 다섯째는 지地, 여섯째는 수水, 일곱째는 화火, 여덟째는 풍風, 아홉째는 공空, 열째는 식識이다.
이 열 가지를 통틀어 일체변처一切徧處라고 한다.
배사와 승처에도 여덟 가지 색이 있긴 하지만 비춰지는 대상이 좁아서 보편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지금 이 선정에서는 낱낱의 색이 두루 시방에 가득하며 서로 스며들어도 방해됨이 없다.
따라서 ‘일체입一切入’이라고도 한다.
공이 두루하고 식이 두루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덟 가지 색의 일체처는 그 단계가 사선四禪에 해당하고, 공일체처의 단계는 공처정空處定에 해당하고, 식일체처의 단계는 식처정識處定에 해당한다.
제27장 구차제정九次第定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설명하겠다.
온갖 욕망을 여의고 모든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면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으며, 번뇌를 떠나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면서 초선에 들어간다.
이어 제2선에 들어가고 차례로 제3선, 제4선, 사공정四空定에 들어가며 멸수상정까지 이른다.
이것을 구차제정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여러 선정을 닦을 때 관하는 행법이 아직 성숙되지 않으면, 그 마음에 간격이 있게 되기 때문에 차제정次第定이라 하지 않는다.
지금은 선정에서 관하는 법을 이미 성취하고 나서 더욱 단련하여 익숙해졌기 때문에, 하나의 선정에서 마음을 일으켜 다음 하나의 선정으로 들어갈 때 마음과 마음 사이에 틈이 없어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못한다.
이와 같이 하여 멸수상정에 이르는 것을 구차제정이라고 하며, 또 단련하는 선(鍊禪)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