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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론 하권
6.9. 불법이 한나라에 들어오자 치세에 이로움이 없었다
“불법이 한나라에 들어오자 치세에 이로움이 없었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자는 주나라 영왕(靈王) 때에 태어났고 경왕(敬王) 때에 죽었으니, 세상에 70여 년간이나 있었습니다.
그를 성인이라 하니, 반드시 당시의 임금을 보필하여 바로잡을 수 있었는데도, 어째서 14년 동안 70개 국이나 다니면서, 송나라에서는 앉아 있던 나무가 잘리고 위나라에서는 쫓겨났으며 진채(陳蔡)에서는 양식조자도 떨어진데다 환퇴(桓魋)의 난에 살육을 피했으며, 부끄럽게도 초상집 개와 같다고 불렸겠습니까?
비록 제후(諸侯)가 부를 때마다 달려갔어도 일찍이 등용된 적이 없었으며, 춘추시대의 치세는 문무(文武)의 도(道)가 실추되어, 임금은 암둔하고 신하는 간사스러워서 예악(禮樂)이 붕괴되었습니다.
이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모반과 반란이 이리도 심했으며, 찬탈과 시역(弑逆)은 누구에 의한 것입니까?
공자가 완만하게 시절에 따르다가, 뒷걸음질쳐 난을 피하기에 바빠 처자식마저 보살피기 힘들었습니다. 백 년의 수명을 마치긴 했으나 역시 취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혹 포과(匏瓜)의 말이나 내뱉고, 혹 흘러가는 물을 보고 한숨을 쉬기도 하였으며, 실세인 계씨(季氏)에게 겸손했었고,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수(河水)에 용도(龍圖)가 나오지 않는다고 애석히 여겼습니다.
마침내 노나라 애공이 서쪽에서 수렵하다 기린을 잡았다고 하자 소맷자락을 걷어 얼굴을 닦으면서, “내 도가 다했구나.”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문도들이 3천 명이요 시(詩)를 산삭(刪削)하고 예(禮)를 정했다 하나, 죽은 뒤 이름조차 일컫지 않는다면, 내가 후대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를 염려하고, 도척(盜跖)에게 모욕을 당했고 장인(丈人)의 기롱도 받았습니다. 이를 비교해보아도 논의하는 바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와 노자 두 사람의 성인도 이를 근심하였는데, 어떻게 제가 목석처럼 입 다물고 탄정(彈正)조차 하지 않겠습니까?
6.10. 사찰에 승가 대중이 많아지면 반드시 역모 죄를 짓게 된다
“사찰에 승가 대중이 많아지면 반드시 역모 죄를 짓게 되니, 후조(後趙)의 사문 장광(張光)이나 후연(後燕)의 사문 법장(法長)이나 남량(南涼)의 도밀(道密)이나 위나라 효문제(孝文帝) 때의 법수(法秀)나 태화(太和) 시절의 혜앙(惠仰) 등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최홍(崔鴻)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를 살펴보더라도, 이같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도대체 어떤 사적에서 출전되는 것입니까?
거짓말을 지어내어 임금을 현혹시키니, 이에 나라의 사관(史官)에게 그 망령된 상주문을 조사할 것을 청합니다.
『전한서』와 『후한서』에 따르면, 곤양(昆陽)의 상산(常山)에 청니(靑泥)와 녹림(綠林), 혹산(黑山)에 백마(白馬)와 황건(黃巾) 및 적미(赤眉) 등의 수십여 적당(賊黨)이 있었으나, 모두 속인인지라 스님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습니까?
『후한서』에 따르면, 패주(沛州) 사람 도사 장로(張魯)의 어미가 자색(姿色)이 고우면서 귀도(鬼道)를 따랐는데, 유언(劉焉)의 집에 내왕하였다고 합니다. 유언이 나중에 익주자사(益州刺史)가 되자, 장로를 중용하여 독의사마(督義司馬)를 삼았는데, 장로가 별부사마(別部司馬) 장수(張修)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한중태수(漢中太守)를 포위하여 살해하였습니다. 소고(蘇固)를 단절시키고 사곡(斜谷)에서 한나라 조정의 사신을 죽이고서 장로가 한중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다시 장수마저 죽이고 그 병졸을 가로챘는데, 이때서야 신(神)의 말이라 둘러대어 누런 옷을 입고 왕으로 자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로가 장각(張角) 등과 호응하여 무리를 모으면서 황건(黃巾)을 씌우고 도사의 복장을 차려 입혔는데, 마침내 이들 수십만 인의 적당이 천하에 해를 끼치면서 30여 년간이나 한중(漢中)을 점거하다가, 나중에 조조(曹操)에게 격파되자 황의(黃衣:황건적)도 이에 따라 멸망했다고 했습니다.
이때에도 사문은 한 사람도 없었고, 단지 도사만이 주름잡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한나라와 위나라의 명승(名僧) 가운데 덕화를 이루어 나라를 이롭게 한 이들이 즐비한데도,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단지 나쁘게만 선전하여 남의 허물 잡는 것만 능하니, 어찌 군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위지(魏志)』에서 말하기를,
“장로(張魯)는 자(字)가 공기(公祺)이고, 조부는 능(陵)이다. 도를 배우더니 곡명산(鵠鳴山)에서 촉(蜀)의 학자를 불러다가 도가의 서책을 날조하여 백성을 속였는데, 도록(道籙)을 받는 이에게 다섯 말의 쌀을 받았기에, 세간에서는 쌀 도둑이라 불렀다.
장릉이 죽으면서 그 아들 장형(張衡)에게 업(業)을 전하였고, 장형이 죽으면서 장로에게 다시 전하였는데, 장릉을 천사(天師)라 하고, 장형을 사사(嗣師)라 하고, 장로를 계사(係師)라 하면서 자기들을 삼사(三師)라 불렀다. 장로는 어려서부터 유언과 친했는데, 유언이 죽자 그 아들 유장(劉璋)이 옹립되었으나, 장로가 따르지 않자, 장로의 어미와 그 가실(家室)마저 죽였다.
이에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고, 귀도(鬼道)로써 백성을 다스리되, 부서(符書)와 장금(章禁)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처음 배우는 이를 귀졸(鬼卒)이라 이름하였다. 도록을 받는데 황금이나 비단 같은 물건을 바치면 제주(祭酒)라 부르면서 제각기 무리를 통솔하게 하였으니, 무리가 많아지면 치두(治頭)라 달리 이름하였다. 병이 나면 머리에 대도(大都)를 차게 한 것도 장각과 흡사하다“고 하였습니다.
『후한서』 「황보숭전(皇甫嵩傳)」에 따르면, ”거록(鉅鹿)의 장각(張角)이 대현랑사(大賢郞師)라고 자칭하면서, 황노를 받들며 장릉의 술법을 행하였다” 합니다.
부수(符水)와 주설(呪說)을 써서 병을 치료하였으니, 제자 여덟 명을 사방으로 보내서 그 교화를 펴게 하였는데, 다닌 지 10여 년만에 무리가 수십만에 이르러서, 청주(靑州)ㆍ서주(徐州)ㆍ유주(幽州)ㆍ기주(冀州)ㆍ형주(荊州)ㆍ양주(楊州)ㆍ연주(兗州)ㆍ예주(豫州) 8개 주의 백성으로 호응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에 36방(方)을 설치하고 방마다 ‘장군’의 호를 내렸는데, 대방(大方)은 만여 명이고, 소방(小方)은 6천여 명이었습니다.
“창천(蒼天)이 죽으니 황천(黃天)이 나오리라. 갑자년에 천하가 대길하리라”는 요언(謠言)을 퍼뜨려,
백토로 경읍과 사문(寺門)마다 쓰게 하되, 모두 ‘갑자’란 글자로 새겼습니다.
중평(仲平) 원년 3월 5일에 안팎에서 일제히 도사의 황건(黃巾)과 황갈(黃褐)을 입게 하면서 사람을 죽여 하늘에 제사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에 적당 수십만의 무리가 처음으로 영천(穎川)에서 난리를 일으켰는데, 바로 황보숭에게 토벌되었습니다.
남정(南鄭)의 배반으로 한나라가 촉(蜀)을 잃은 일『위서(魏書)』에 수록, 손은(孫恩)이 선도(仙道)를 익혀 진(晉)나라가 망한 일『진서(晉書)』에 수록, 도육(道育)의 제사로 송나라가 화를 입은 일『송서(宋書)』에 수록, 우길(于吉)의 부금(符禁)으로 오나라가 위태했던 일『오서(吳書)』에 수록, 공기(公旗)가 선도(仙道)를 배웠다가 집안이 멸한 일『화양국지(華陽國志)』에 수록, 진서(陳瑞)가 도법(道法)을 배웠다가 멸족된 일『진양추(晉陽秋)』에 수록, 위화(魏華)가 지아비를 어긴 일『영보경서(靈寶經序)』에 수록, 장릉(張陵)이 조강지처를 버린 일『장릉전(張陵傳)』에 수록, 자등(子登)이 아비를 등지고 위숙(衛叔)이 형을 죽인 일『신선전』에 출전.
이상은 예전부터 도사로써 반역을 일으킨 자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고로 장릉의 3대가 귀도(鬼道)를 행하였으나 부서(符書)와 장초(章醮)는 도가(道家)에서 나왔는데, 요망한 짓을 서슴지 않고 길흉을 함부로 지껄이기에, 간악함이 이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나라와 위나라 이후나 진나라와 송나라 이래로 도속이 요매(妖魅)에 빠진 것이 그 수가 적지 않은데도, 어찌하여 스님들만을 이에 끌어들이고 유교와 도교의 두 교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대업(大業) 말년의 왕세충(王世充)ㆍ이밀(李密)ㆍ두건덕(竇建德)ㆍ유무주(劉武周)ㆍ양사도(梁師都)ㆍ노명월(盧明月)ㆍ이궤(李軌)ㆍ주찬(朱粲)ㆍ당필(唐弼)ㆍ설거(薛擧) 등도 모두 속인이었지 스님이 아닌데도,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일마다 치우치고 도리마다 어긋나면서 악인과 빌붙어 현인을 시기하니, 부혁이야말로 충의롭지 못함이 명백합니다.
6.11. 개벽 이래로 지금의 무덕 4년(621년)까지 2백76만 1천1백8년을 거쳤다
“개벽(開闢) 이래로 지금의 무덕 4년(621년) 신사년(辛巳年)까지 2백76만 1천1백8년을 거쳤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혁 자신도,
“포희씨(庖犠氏)는 대체로 30세 동안 2만 2백97년을 다스렸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호씨(少昊氏)에서 한나라 고조(高祖)까지가 3천2백1년이니, 포희씨에서 한나라 고조까지의 29대를 모두 합산하더라도 2만 3천4백98년에 불과한데, 도대체 어떤 것에 근거해서 처음 개벽한 무렵에서 무덕 4년까지가 갑자기 2백76만여 년으로 늘어났습니까?
제왕(帝王)의 계보(系譜)를 대조해 보면, 천지가 처음 일어났을 때는 마치 병아리 같았기에, 반고씨(槃古氏)가 그 가운데에서 9만여 년을 지나고서야, 그 다음으로 삼황 및 수인씨(燧人氏)가 비로소 2만 2백97년간을 다스렸습니다.
제나라 비서(秘書)인 양분의 『사목』에 따르면, 복희씨(伏犠氏)의 원년은 갑인년(甲寅年)인데, 개황 원년 신축년(辛丑年)까지가 6만 1천6백8년이라 하니, 총괄하면 17만 1천9백5년이나 여기서 말하는 것과 비해 보면 차이가 너무나 벌어집니다. 따라서 연기(年紀)를 다시 교감하여 짧게 고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정사(正史)의 기록을 살펴보면, 복희씨가 처음 팔괘(八卦)를 그리고 갑자(甲子)를 풀어서 서계(書契)를 지었기에, 세년(世年)이 있게 된 것으로, 포희씨 이전에는 기력(紀曆)이란 것이 아예 없었는데,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여 늘리고 줄이게 되었습니까?
6.12. 부처의 삿된 가르침을 서역으로 물리치고 승니를 모두 환속시키라
“오랑캐 나라 부처의 삿된 가르침을 서역으로 물리치고 승니를 모두 환속시키라”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주(莊周)는
“육합(六合)의 안에서는 성인에 대해 대강만 말하고, 육합의 바깥에서는 성인을 그대로 놓아둘뿐 논의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노자는
“역(域) 가운데 사대(四大)가 있으나, 도(道)에 머무는 것이 첫째이다”고 하였습니다.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의 이룸을 살펴보면, 아름다운 인륜을 장구히 하고 충열(忠烈)과 효자(孝慈)를 밝히려면 먼저 마음을 공경(恭敬)에 두고서 임금과 아비를 섬겨야 하는데, 지극한 덕을 칭송 받더라도 오로지 위를 편안케 하고자 백성을 다스리는 것뿐입니다.
그 요도(要道)라는 것이 단지 풍속을 변화시켜 위(衛)나라를 노나라로 되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해탈의 말을 입에 담을 수나 있겠습니까? 끝내 육부(六府)와 구주(九疇)에 구경(究竟)의 이치를 펴지도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생을 두터이 하고 만물을 고르게 한다는 말이나 용도(龍圖)와 봉기(鳳紀)의 이야기조차도, 어진 마음을 지녀서 미더움을 더하여 여향(厲鄕)이나 다스리자는 뜻이고, 경(經)을 산정(刪定)하고 역상(易象)을 찬탄한 것도 궐리(闕里)의 글이나 펴자는 것뿐입니다. 그 다음을 ‘구류(九流)’라 이르고, 마지막을 ‘칠략(七略)’이라 하였습니다.
『전한서』 「예문지(藝文志)」에 실린 서책을 살펴보면. 모두 1만 3천2백69권인데, 작게 보면 일마다 이롭지 않은 책이 없으나, 크게 보면 도(道)를 풀어내는 책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국 모두 한 생 이내에 국한되는 것으로 삼세(三世)를 밝혀 뛰어넘는 것은 없다 하겠습니다. 당세에 드러난 인과의 이치를 새벽에 건너고자 하여도 여전히 어둡고, 길하고 흉한 업보(業報)의 이치는 고개를 넘을 때까지도 훤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요유(逍遙遊)」 한 편도 유유(有有)의 속정(俗情)에 미혹한 것이고, 『도덕경(道德經)』 두 편도 공공(空空)의 경계에 들지 못하기에, 여전히 육합의 껍데기 속이면서 오상(五常)의 속된 꾀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찌 사류(四流)를 면하여 호한(浩汗)해질 수 있겠습니까?
번뇌의 장소에서 육취(六趣)를 시끄럽게 하면서 진로(塵勞)의 업이나 지을 뿐입니다.
원래 실상(實相)은 깊고 아득한지라, 요도지도(要道之道)를 넘어서는 것이며, 법신(法身)은 아예 끊어졌는지라, 현지우현(玄之又玄)을 벗어난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큰 스승만이 이 같은 묘각(妙覺)을 체득해서 이변(二邊)을 담박에 버리고 만덕(萬德)을 모두 거두어 시끄럽지도 적막하지도 않으신데, 어떻게 경계의 지혜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음을 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형체와 이름으로 취할 수 있겠습니까?
작게는 작아서 안이 없고, 크게는 커서 바깥이 없는지라, 법계(法界)를 헤아려 대비(大悲)를 일으키고 허공을 따져서 서원(誓願)을 세우셨으니, 이것이 예토(穢土)에 생을 받아 왕궁에 거룩하게 태어나시어 금색신(金色身)을 보이시고 옥호(玉毫)의 상(相)을 펼치시면서, 자비의 구름을 취령(鷲嶺)에 드리워 화택(火宅)의 불길을 끄시고 계봉(雞峰)에서 지혜의 바람을 드날리자 어두운 길의 안개가 걷히게 된 이유입니다.
걸으실 적마다 금련(金蓮)이 발을 받치고, 앉으실 적마다 보개(寶蓋)가 몸을 덮었습니다.
나가시면 제석천(帝釋天)이 앞장서고 들어오시면 범천(梵天)이 뒤따랐으며, 왼쪽을 보필하는 밀적(密迹:불타를 보위하는 夜叉神의 총칭)은 악을 없애는 것으로 공을 삼고, 오른쪽을 살피는 금강(金剛)은 선(善)을 기르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성문(聲聞)과 보살(菩薩)들이 받들되 신하가 임금 모시듯 하였는데, 팔부(八部)의 만령(萬靈)이 다시 삼엄하게 에워쌌습니다.
열반경을 설하실 때에는 땅이 여섯 종류의 진동을 나타냈고, 반야경을 설하실 때에는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 오듯 내렸습니다.
참으로 백복(百福)이 장엄하여 만월이 창해(蒼海)에 임하듯 하였고, 천 갈래 빛이 휘황하게 빛난 것이 햇빛이 보배산에 비치듯 했던 것입니다.
사자후(獅子吼)를 한 번 발하시면 외도(外道)들의 예봉을 꺾었고, 법고(法鼓)를 한 번 울리시면 천마(天魔)조차도 머리를 숙였습니다. 실로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을 법왕(法王)이라 부르는 것인데, 어찌 망해가는 주나라의 가섭(迦葉:老子)과 그 덕을 비길 수 있겠으며, 말세의 유동(儒童:孔子)과 서로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천상천하에 홀로 조어장부(調御丈夫)라 칭하는 것인데,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 자비의 은종을 우러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치가 심오해서 방편에 의지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니, 교문(敎門)의 선교(善巧) 역시 선지식(善知識)에 의지하여 형통하고 나서야 가르침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8만 4천의 법장(法藏)이 그 도를 갈무리했으니, 이제(二諦)와 십지(十地)의 기틀이고, 기원(祈園)과 녹원(鹿苑)의 말씀이고, 바다 속 용궁의 밀지(密旨)일진대, 옥첩(玉牒)과 금서(金書)의 글자와 칠처(七處)와 팔회(八會)의 말씀 모두가 지극한 도를 백왕(百王)에 드리우지 않음이 없고 현풍(玄風)을 만고(萬古)에 드날리지 않음이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실다운 말씀이 참으로 불가사의해서, 가까이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며, 멀리는 범부를 초월하여 성도(聖道)를 증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형체가 육도(六道)에 두루하고 가르침이 시방에 가득한지라, 참으로 세계의 복전(福田)이고 창생(蒼生)이 돌아갈 곳입니다.
지금 이를 존중하고 믿는 이들은 마치 칠요(七曜:北斗七星)가 북진(北辰:北極星)을 도는 것과 같고, 교화를 받고서 믿는 이들은 만 갈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그 신변(神變)과 공업(功業)이 천도와 인도를 이롭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어라 이름하지도 못하는지라, 항하사(恒河沙) 같은 인(因)이 충만해서 상락(常樂)의 과보를 얻기에, 그 어짊이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단지 시운(時運)이 무르녹지 못해서 호족(胡族)과 한쪽(漢族)이 달리 감응한 것뿐인데, 이 때문에 서방이 먼저 그 말씀과 형상을 받들었고, 동국(東國)에서는 잠깐 보고 듣기만 했습니다.
자비의 구름이 층층이 쌓이고 지혜의 태양이 빛을 발함에 이르자 영평(永平) 연간에 금인을 꿈꾸었고 적오(赤烏)의 세차(歲次)에 사리(舍利)를 보았는데, 마침내 한(漢)ㆍ위(魏)ㆍ제(齊)ㆍ양(梁)의 정치에서 상교(像敎)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연(燕)ㆍ진(秦)ㆍ진(晉)ㆍ송(宋) 이래로 명승이 배출되었으니, 혹 청대(淸臺)의 주변에서 만월(滿月)을 그리기도 하였고, 혹 옹문(雍門)의 바깥에서 상륜(相輪)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하북(河北)에서 그 말을 새기면 한남(漢南)에서 이를 베꼈으니, 도는 삼보(三輔)를 흥하게 하고 믿음은 구주(九州)를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강좌(江左)에서 성행하다가 금행(金行)을 거치면서 점점 풍성해졌는데, 위수(渭水)에서는 소요(逍遙)의 원(苑)이 갖춰졌고 여산(廬山)에서는 반야(般若)의 대(臺)에 인재들이 총집하게 되자 심오한 문장과 뜻을 지닌 이들이 총령을 넘어왔으며 이에 석학과 고승이 줄지어 멀리서 찾아 왔습니다.
마침내 양나라 무제의 치세에 이르러 삼교(三敎)가 연이어 저울질하였고, 수나라 문제(文帝) 초엽에는 삼승(三乘)이 나란히 하였습니다. 비록 몸은 자극(紫極)에 있어도 마음은 분양(汾陽)에 두었으니, 맛난 음식조차 끊고 요리사도 내보냈습니다,
계율의 향기를 맡고 법의 즐거움을 맛보며, 중생을 사류(四流)에서 건져내기 힘들 것을 염려하여 몸소 칠변(七辯)을 다하여 지키면서도, 곤룡포(袞龍袍)를 가벼이 보아 물들인 옷만 입고, 아로새긴 가마를 버리고 부들 방석에만 앉았기에, 지금에 이르도록 혜대(惠臺)의 업(業)을 널리 이룩하였고 표탑(表塔)의 기틀을 널리 열었던 것입니다.
[『양기(梁記)』에는 동대(東臺)와 서부(西府)가 서로 80년간이나 이어졌다고 한다. 도읍의 큰 사찰만 7백여 곳이었고, 승니로서 강의하는 대중이 1만이나 되었다 한다. 내전을 토론하여 성업(聖業)에 함께 따르되,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세간의 영화를 멀리하였다 한다.]
마침내 다섯 도읍의 호족(豪族)이 벼슬도 마다 않고 찾아 들었고, 사해(四海)의 명가(名家)가 영화를 버리고 도에 들어갔습니다. 자고로 삼황(三皇)과 삼왕(三王)이 다스리던 땅은 성교(聲敎)가 미치는 경계였기에, 머리 숙여 회향(回向)하고 오체투지(五體投地)로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미 만물을 이롭게 한 것이 깊고도 오래되었으니, 공자와 노자가 드리웠다는 풍화가 어찌 이보다 클 수가 있습니까?
『십육국춘추』나 『삼십국춘추(三十國春秋)』에서의 고승과 명승 및 모자(牟子) 등의 전기에 따르면, 바야흐로 무한 명제 영평 10년 이래로 불법의 동쪽으로 전해진 것이, 조대(朝代)로는 10대, 횟수로는 6백여 년이 흘렀는데, 명승과 대덕(大德)으로 세상에서 존중받은 이가 대체로 2백57인입니다. 방계(傍系)로 덧붙여 나타난 이나 연나라와 조나라의 왕공(王公) 및 제나라와 양나라의 경상(卿相) 등이 대체로 2백51인으로 도합 5백8인이었습니다.
그 행업(行業)을 표시하고자 크게 10례(例)를 정하였으니,
첫 번째가 역경(譯經)이고, 두 번째가 의해(義解)이고, 세 번째가 신이(神異)이고, 네 번째가 습선(習禪)이고, 다섯 번째가 명률(明律)이고, 여섯 번째가 유신(遺身)이고, 일곱 번째가 송경(誦經)이고, 여덟 번째가 흥복(興福)이고, 아홉 번째가 경사(經師)이고, 열 번째가 창도(唱導)입니다.
이 같은 고승들은 사의(四依)를 본받은 덕이 있고 삼업(三業)을 완비한 공이 있었는데, 법이 진단에 전해진 것도 실로 이들에 의한 것입니다. 이에 삿된 소견을 숨겨서 감히 말도 못하다가, 단지 몇 가지 악한 것만을 들추어 말한 것입니다.
대체로 설산 가운데 감로가 많더라도 독초도 있고, 큰 바다 속에 명주(明珠)가 있더라도 나찰(羅刹)도 있으니, 비유하건대 곤륜산(崑崙山)에 조약돌이 없는 것과 같고, 등나무 숲의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진 것과 같다 하겠는데, 어찌 이를 괴이쩍게 여겨 아예 없애려 드는 것입니까?
역경 사문 제1례[52인] 의해 사문 제2례[99인], 신이 사문 제3례[20인], 습선 사문 제4례[23인], 명률 사문 제5례[13인], 유신 사문 제6례[11인], 송경 사문 제7례[22인], 홍복 사문 제 8례[14인], 경사 사문 제9례[11인], 창도 사문 제10례[10인].
이들 사문들은 혹 험한 사막을 넘어오기도 하였고, 혹은 큰 파도를 타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모두들 목숨을 걸고 경을 홍포(弘布)하고자 몸을 잊고 순교(殉敎)하였는데, 혹 신통력으로 세상을 구하기도 하였고, 혹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고, 혹 지혜로 인도하고자 가슴을 가르기도 하였고, 혹 감득(感得)하는 바에 따라 교화하기도 하였습니다.
깊은 선사(禪思)의 공덕이 숲처럼 무성하면서도, 높고 맑은 계행이 서릿발처럼 엄하고 깨끗하였습니다. 복을 심어 선(善)을 일으켜 구하는 바를 암암리에 이뤄주면서, 법언(法言)을 외워 유계(幽界)과 현계(顯界)를 모두 기쁘게 하여, 마침내 삼장(三藏)과 사아함(四阿含)의 공용(功用)을 넓혔는데, 방등부(方等部)와 반야부(般若部)에서 신심을 얻는 이가 유독 많았습니다.
신령스러운 교화는 넓디넓어서 먼 곳도 마다 않고 반드시 이르는지라, 총하(葱河)도 반 걸음의 거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광(聲光)은 보고 듣는 한계가 있으니, 어찌 때를 맞추지 않았겠습니까?
인연과 운수가 맞아야 상교에 감득하여 통하게 되니, 혹 서역의 대신(大神)이라 이르거나, 혹 염부제의 임금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마등 스님이 서둘러 왕림하시자, 이에 법란이 도를 머금어 덕을 내렸습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은 학문이 크고 깊으며, 신감(神監)이 오묘한 데다 중국 땅을 누비면서 방언을 익혔는데, 배운 이가 3천이고 입실(入室)한 이가 바로 8명의 준재입니다.
도생(道生)ㆍ도융(道融)ㆍ담영(曇影)ㆍ승예(僧叡)ㆍ혜엄(惠嚴)ㆍ혜관(慧觀)ㆍ도항(道恒)ㆍ승조(僧肇)가 언전(言前)에 깨닫고서, 난초와 계수(桂樹)처럼 향기로운 말씀에 붓을 들어 뜻을 이었기에, 실로 사람을 제대로 얻었다 하겠습니다.
진(晉)나라에는 도안(道安)이 있어 당세에 이름을 날렸는데, 불도징(佛圖澄)에게 학문을 늘리고 혜원(惠遠)에게 그 업을 전했습니다. 문인(門人)이 날로 성하여 당세에 현인이 줄지 않았으니, 가히 진군(陳郡)의 사안(謝安)이 그의 신준(神俊)함을 추앙할 만 했고, 양양(襄陽)의 습욱(習郁)도 그의 뜻이 고원(高遠)함에 굴복하였습니다.
진 나라 혜제(惠帝)가 난리를 당해 파천(播遷)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갈호(羯胡)가 독을 뿜어 중주(中州)를 유린하고, 유요(劉曜)가 모반을 일으켜 앞에서 찬탈하고, 석륵(石勒)이 뒤에서 범하여 재앙을 뿌렸는데 이에 화하(華夏)가 나뉘고 무너져 인민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성사(聖師) 불도징이 살상이 거듭되는 것을 가엾이 여기고 고통이 끝나지 않는 것을 불쌍히 여겨 드디어 갈피(羯陂)에서 신령한 교화를 펴시고, 양업(襄鄴)에서 현기(懸記)를 보이면서 비주(袐呪)로써 제도하였으니, 향기를 머금어 위급함을 구했습니다.
경종을 울리고 고달픔을 덮어 주며 길흉을 깨닫게 하면서 마침내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를 발심시켜 사민(四民)이 해를 면하게 하였는데
[『징전(澄傳)』에는, 불도징이 한나라 땅에서 25년간 군(郡)ㆍ(縣)을 다니며 이룩한 사찰이 8백93개소인데 1백17세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석씨(石氏)가 흉악무도하여 살상을 자행했는데, 만약 불도징과 시대가 같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구를 의지해야 했을 것인가?
백성의 명운(命運)이 경각에 달렸었다가 목숨을 보존한 이들을 일일이 적을 수도 없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 칼날을 밟아도 상하지 않게 하였기에, 유법(遺法)이 이로써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뜻을 상분(上分)에 두고서 몸을 환호(圜戶)에 두었기에, 제왕이 더욱 신심을 다했던 것이 여러 사적에 더 자세히 나옵니다.
그 공에 힘입지 않았다면, 장차 영겁토록 등불을 전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논의하는 이마다 모두들,
“스님들이 화하(華夏)의 성종(聖種)을 빛냈다”고 말하니,
부처님이야말로 암암리에 국가를 보살피고 황기(皇基)에 복을 내리시는지라, 반드시 물리쳐 폐지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대당국이 천하를 소유하게 되어서는, 28수(宿)에 감응하여 천자(天子)의 운세를 안정시켰으니, 액운을 막고 세상을 건지는 덕은 탕왕과 무왕을 뛰어넘어 홀로 높다 하겠고, 흉노의 발호를 평정한 공은 한나라와 위나라를 뛰어넘어 고고하게 드러났으니,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지라 찬양하기도 어렵습니다.
한층 더 마음을 불법에 두고 뜻을 현문(玄門)에 굽혀서,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새기며 스님들을 득도(得度)시켜 사찰을 세우면서, 갖가지 공덕과 곳곳의 단나(檀那)로 화하(華夏)와 이융(夷戎)을 이롭게 하여 어진 백성을 물가로 이끌었습니다.
바야흐로 상황(上皇)의 풍화를 일으키고 정각(正覺)의 도(道)를 연다면, 이곳에서 오제(五帝)를 뛰어넘고 저곳에서 삼왕(三王)을 초월하게 되니, 다스림은 태평성세를 이루고 영구히 융성하고 풍화가 두터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삿된 소견에서 나오는 부혁의 더러운 말은, 대체로 천지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인륜(人倫)도 함께 저버릴 것입니다.
이 못난 글을 성상(聖上)이 펴 보시기에는 보잘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홍도(弘道)의 은총을 펴시고, 보육을 지극히 하는 혜택을 내려 주십시오.
청하건대, 역순(逆順)을 살피시고 진위를 의론해 주십시오.
『열반경(涅槃經)』에서도,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법을 국왕께 부촉하셨다 하였는데, 폐하께서도 임금으로 임했으니 부촉하신 바를 바르게 행하십시오.
삼가 원하건대, 사설(邪說)을 막아 상교(像敎)를 부흥시키십시오.
이리하여 박학다식한 군자나 바른 소견의 도인이 이를 듣고서, 다 함께 팔을 걷어 올리고 손뼉을 치며 눈을 크게 부릅뜨면서 논(論)을 짓겠다 할 것입니다.
맹자는
“내가 어찌 변론 좋아하겠느냐. 부득이 해서 그렇게 한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허망함은 참다움보다도 빛나고 진실한 기록은 거짓된 것보다 어지러운데, 세상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깨닫지 못하고 붉은 색과 자주 빛을 가리지 못하여 기와조각과 보옥(寶玉)을 한데 섞어 뭉쳐 놓은 듯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말을 하려니, 어찌 제 마음이 이를 참고만 있겠습니까.
공자도
“시인(詩人)은 가만히 있지 못함을 근심하는데, 나도 숨기지 못함이 근심스럽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논하자면, 대체로 옥이 돌로 인해 혼잡해지면 사람들이 가려내지 못하고 옳은 것을 도리어 그르다 하며 허망함을 돌이켜 실답다 하니, 어찌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자(王者)의 혼령이 내리는 것을 살펴보면, 혹 유성이 달을 꿰뚫거나, 혹 긴 무지개에서 번개가 치거나, 혹 붉은 까마귀가 부서(符書) 물고 오거나, 혹 흰 옷 입은 혼령이 밤에 통곡하면서 운룡(雲龍)의 기운을 띠고 기이한 상(象)을 나투는 것은 모두가 천명(天命)이지 인간에 연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 누군가가
“주나라는 그 조력(祖曆)을 다했는데, 어찌하여 진나라는 대기(大期)에도 미치지 못했는가?” 하고 묻기에,
“명리(冥理)는 헤아리기 어렵고 인정(人情)은 미혹되기 쉽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귀결을 대조해 보면, 대략이나마 자세해 질 것입니다.
예전에 송(宋)의 경공(景公)은 덕을 쌓고 마음을 지키고자 바로 벼슬을 물러났으며, 정란(丁蘭)은 효심이 지극하여 목모(木母)조차도 얼굴을 펴고 웃었습니다.
단지 마음을 정미롭게 한다면 가상(嘉祥)이 저절로 이루어질 터이고, 자신을 깨끗이 하면 재앙이 저절로 수그러질 것이다 했으니, 참으로 미더운 말이라 하겠습니다.
저 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성왕(成王)ㆍ강왕(康王)의 정치가 융성했던 바를 볼 것 같으면, 대체로 선을 쌓은 바탕에서 복이 연이어 무성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조력(祖曆)을 다했던 이유입니다.
진시황이 보위에 있으면서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천하를 혹독하게 다뤘는데, 이세(二世)에 이르러 살육이 더욱 극심해져 생민이 두려움에 떨며 몸 둘 바를 몰랐기에, 마침내 상천(上天)이 화를 내려 대기(大期)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주역』에서
“착하지 못한 집에는 반드시 나중에라도 재앙이 있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흥하고 멸하는 이치는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일체가 예전의 인(因)에서 그리되는 것이고 모두가 행업에 연유하는 것이니, 참으로 증거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근자에 주나라 무제(武帝)가 그릇된 소견으로 사찰을 허물고 스님들을 폐하였는데, 발걸음을 떼는 사이에 후사(後嗣)가 사라졌습니다.
수나라 문 황제가 처음 태어난 것을 한 번 살펴보면, 바로 어떤 신니(神尼)가 이를 양육하였는데, 나중에 보(寶) 선사가 보고 패왕(覇王)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보위에 올라서 불법을 널리 일으켜 승니를 크게 득도시키자, 사부대중이 모여들어 삼학(三學)을 엄숙히 하면서 마음 놓고 도를 닦아 국은에 보답하였습니다. 문제가 등극하자 차츰 전쟁이 끝이 나고 나날이 풍요로워졌으니, 가상(嘉祥)의 신령한 감응은 사서(史書)마다 끊임없이 씌어 있습니다.
사해(四海)에 풍파가 없고 육합(六合)이 함께 기뻐했는데, 나중에 대악(岱岳)에서 봉선(封禪)하였으니, 그 치세야말로 태평스러웠다 하겠습니다.
이어서 양제(煬帝)에 이르러 사찰과 불탑을 봉쇄하고 승니를 내쫓았으니, 온갖 사치를 다하여 만사를 도에 지나치게 하였는데, 천명이 다했는지 해외로 친히 정벌까지 나섰으니 화근은 무고한 백성들에게 미쳤고 재앙은 신세(身世)에 심어졌습니다. 이로 보아 바로 눈앞에서 징험할 수 있는데, 어찌 내생까지 기다리겠습니까?
『논형(論衡)』에서
“속유(俗儒)는 옛 것만을 기리고 지금 것을 탓하니, 말마다 앞의 것은 감싸고 뒤의 것은 내친다.
옛날의 헛된 명예는 그르다 하지 않고, 지금의 실다운 의논은 꾸짖는다.
오래 내려온 거짓말은 믿고 근대와 지금의 진실된 일은 소홀히 한다.
지마(指馬)의 요체는 알지 못하고 유(儒)ㆍ묵(墨)의 이야기로 서로 다투는 것이, 이미 병세가 고황(膏肓)까지 들었기에 치료조차도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위대하구나, 석씨의 가르침이여. 삼세(三世)를 포괄하고 사류(四流)를 망라하니, 만상(萬象)이 태공(太空)에 즐비한 것과 견주어지고, 팔하(八河)가 창해(滄海)로 흐르는 것과 비슷하구나.
자(子)ㆍ사(史)를 널리 찾고 경(經)ㆍ고(誥)를 둘러보면, 육종(六宗)과 칠묘(七廟)의 전모(典謨)가 있고, 오악(五岳)과 사망(四望)의 의식(儀式)이 있고, 단사(丹笥)와 금판(金版)의 글이 있고, 명산(名山)과 석실(石室)의 전기(傳記)가 있고, 옥검(玉檢)과 지니(芝泥)의 책(冊)이 있고, 운대(雲臺)와 인각(麟角)의 서계(書契)가 있습니다.
청탁(淸濁)이 나뉜 이래로, 조모충적(鳥謨蟲跡:새발자국에서 문자를 만듦) 이후로, 혁서(赫胥:상고시대 왕 이름)와 율륙(栗陸:상고시대 왕 이름)의 광대함과 천황(天皇)과 인제(人帝)의 이전과 두표(斗杓:북두칠성 중의 세 별)가 뭇별을 거느리는 것과 해가 임하여 비추는 것과 지여(地與)는 크고 넓은데다 천각(天角)은 멀고 아득함과 보오절주(補鼇折柱)의 신령(神靈)과 산과 바다를 깎아낸 이적(異跡)과 공을 세우고 덕을 세우는 도(道)와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의 말[言]과 벼ㆍ기장ㆍ약석(藥石)이 자리잡은 것과 의상궁실(衣裳宮室)의 시초와 참현사황(參玄祀黃:黃帝께 제사지냄)의 전범(典範)과 제례작악(制禮作樂:禮의 제정과 樂을 지음)의 훈화(訓化)와 훈읍화양(勛揖華讓:堯가 舜에게 揖하고 왕위를 물러줌)의 법칙과 탕무(湯武)가 정벌한 위엄과 금등영우(金縢零雨)의 옹(翁:노자를 지칭)과 읍린상봉(泣麟傷鳳)의 늙은이(공자를 지칭)치고 환내(寰內:天子의 영토)를 지극히 섬기면서 역내(域內)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어찌 상계(上界)에도 생사의 근심이 있고, 하방(下方)에는 삼도(三塗)의 걱정에 싸이고 고통의 바다에 떠돌면서 애욕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비(大悲) 세존께서 세상에 나와 저 눈 뜬 장님들을 인도하시되, 팔정(八正)의 관문을 열고 오승(五乘)의 도를 닦아서, 인복계주(忍服戒珠)의 말씀을 베푸시고 우파목차(優波木叉)의 규율을 보이시고자, 그 몸을 날짐승에게도 베풀었고 들짐승에게도 던졌었습니다.
열국(列國)의 도성(都城)을 짚신같이 여기고 어여쁜 여인네의 미모를 쓰레기같이 버린 것도, 바로 사사(四蛇:地水火風의 四大)를 없애고 8고(苦)를 멈춰서 생로병사를 영원히 끊고자 함입니다.
미운 이를 만나고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을 되풀이하지 않고, 몸 받는 것을 그치기만 하면 독(毒)의 그릇(육신을 뜻함)을 영구히 하직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가깝게는 천화보전(千花寶殿)을 천궁(天宮)이라 부르고, 멀게는 육합진루(六合珍樓)를 정토(淨土)라 이르듯이, 여덟 줄의 옥수(玉樹)와 네 기둥의 황금누각과 백가지 맛의 향기로운 성찬과 삼수(三銖)의 부드러운 의복, 혁혁하고 가벼운 거동과 번거로움이 없는 열자(列子)의 바람(열자는 바람을 부리며 간다 했음)과 오묘한 즐거움에 웃음소리 떠들썩한 것이, 어찌 소사(簫史)의 퉁소 소리에 기인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푸른 수레의 옥 바퀴도 임금의 대궐에서는 빛을 잃고, 검은 서리 붉은 눈[玄霜絳雪]도 옥경(玉京)에서는 그 색깔을 잃을 것입니다.
대체로 석가(釋迦)는 능인(能仁)이라 번연되는데, 덕이 가득하고 도가 갖춰져서 만물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법신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진실(眞實)이라 이르고
둘째는 권응(權應)이라 부릅니다.
진신(眞身)은 ‘지극(至極)의 본체(本體)’라 이르는데, 얽매임을 묘하게 끊었기에 방위나 처소로도 기약하지 못하고 형체나 헤아림으로도 한정하지 못합니다. 감(感)이 있으면 이에 응하되, 바탕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응신(應身)은 몇 겁을 거쳐 행인(行因)을 쌓고 억만 번을 태어나 과(果)를 구하고자, 육도(六度)의 중생들과 화광동진(和光同塵)하여 시절에 따라 생멸하면서 부족함을 보태어 중생을 이롭게 하되, 그 형체가 감(感)에 연유하여 태어나기에 본체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방편의 형체는 비록 물러나더라도 법체(法體)는 바뀐 것이 없습니다. 단지 시절마다 묘감(妙感)이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뵙지를 못하는 것뿐입니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도,
“노나라 사람들이 늘 동쪽 집에 사는 구(丘)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삿된 소견으로 어찌 서방의 부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뿌리가 깊어 뽑지 못하는 것이 슬픕니다.
혹 누군가가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 뜻을 비유로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논자(論者)는
“그대는 듣지도 못했는가? 소경은 문장을 보이더라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는 풍악을 울리더라도 듣지 못한다. 대체로 십악(十惡)의 파도는 심원(心原)을 요동하기 쉽고, 만선(萬善)의 가지를 뻗은 의수(意樹)는 뽑기 힘든 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진실로 범부는 전도(顚倒)되어 갈애(渴愛)에 불타고 말상(妄想)에 반연(攀緣)하여 몸과 마음이 방탕해지니, 오욕(五欲)의 파도에 부대끼면서 이사(二死)의 강물로 빠져듭니다. 언제나 어둠에 갇혀 있으니, 절벽 아래는 무명(無明)이 파도치는데도 긴긴 밤을 꿈속의 집에서 잠만 자며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 잠에 취해 깨어나지도 못하는데, 어찌 색(色)에 미혹되어 영겁토록 어리석게도 근근히 생이나 훔치려 드는 것입니까?
게다가 삿된 스승이나 따르고 나쁜 친구나 사귀는지라, 미친 코끼리처럼 날뛰면서 마음은 원숭이처럼 제멋대로 굽니다. 육십이견(六十二見:62가지의 잘못된 견해)을 산처럼 일으키고 구십팔사(九十八使:98가지의 번뇌)의 바다에 표류하면서, 더러운 곳에 탐닉하고, 그림 속의 떡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팔마(八魔)의 바람이 일어나고 삼독(三毒)의 불길이 부채질하고, 육입(六入)의 도적이 날뛰고 오음(五陰)의 성채를 마음대로 노략질하는데, 두 마리 쥐(밤과 낮의 비유. 세월의 빠름)의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네 마리 독사의 분노만 늘 일으키는지라, 소나 양 같은 안목을 믿고서 효경(梟獍)의 흉폭함을 드러냅니다.
마침내 아만(我慢)의 깃대를 세우고 스스로 큰 북을 울리며, 욕하고 칭찬하는 주둥이만 놀리면서 유(儒)ㆍ묵(墨)의 얘기만 자랑삼더라도, 바깥을 반대로 속이라 하고 거꾸로 속치마를 겉옷이라고 입었습니다.
풍속을 망치고 참다움을 해치면서 친구를 이간질하여 우의(友誼)를 어지럽히니, 삼보를 욕보이고 양친조자도 멸시합니다. 명기(冥祇)를 소홀히 하면서 비바람만 욕하고, 귀신에게 죽었다고 원망하며 골육마저 미워하니, 거만하고 으스대기에 어질지도 못하고 효성스럽지도 못합니다.
구멍 속 같은 소견을 믿고 어리석게 지남(指南:學藝를 지도하고 가르침)이라 이르니, 구더기가 냄새나는 것을 달다고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올빼미가 썩은 쥐를 뜯으면서 독을 맛있다 하니,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장래의 죄는 생각지도 않고 지옥의 보도 겁내지 않으니, 아서라, 말 한마디 놀린 화(禍)가 만겁의 재앙을 부릅니다.
유명(幽明)의 길을 헐어내어 악도로 빠져들고, 구리 개와 구리 뱀의 그물에 빠져서, 팔한(八寒)과 팔열(八熱)의 성에 갇히게 됩니다.
쇠톱으로 썰어 내고 맷돌로 갈아대고 화롯불로 지져대는데, 재를 반찬 삼아 불을 먹고 얼음을 씹다가 물을 마십니다. 곳곳마다 타는 연기 자욱하고 생각마다 고초를 겪는지라, 백해(百骸)의 구규(九竅)가 칼날 끝에 이겨지고 오장(五臟)과 사지(四肢)가 작두날에 조각나게 됩니다.
왜냐 하면, 모두가 인과(因果)를 없다 하여 출세간을 욕하고 화합승(和合僧)을 깨뜨리며, 정법(正法)을 믿지 않고 사견의 뿌리만 깊이 심은 까닭입니다. 하물며 몸을 버리고 다시 몸을 받는 일을 거듭하여 언제나 삼계에 태어나되, 지옥에서 지옥으로 다다라 끝내 삼도(三塗)를 여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성(大聖)께서 이를 보시고 대비심을 일으켜 사람으로 태어나 큰 소리로 우셔서, 선악의 도리를 깨닫게 하신 것이 마치 메아리가 울리듯 하였으니, 보시의 징험은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니, 어찌 근신하지 알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근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13. 출가의 손해와 이익에 대하여
조칙(詔勅)에서,
“부모에게 얻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군신의 복장을 버리는 이로움이 어느 문(門)에 있으며, 정외(情外)에 어떤 이익이 있다는 것인가?
손해와 이익의 두 가지 이치를 묘하게 풀어 주길 바란다”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소승이 듣자 하니, 지극한 도는 말이 끊어졌다는데, 어찌 구류(九流)가 능히 변론하겠습니까?
법신은 상(象)이 없어서 십익(十翼)으로도 풀어 내지 못합니다. 단지 사취(四趣)만이 망망하여 욕해(欲海)에 떠돌면서, 삼계가 번잡해지고 삿된 산에 빠져드는데, 제자(諸子)는 미혹하여 스스로를 불태우고, 범부는 탐닉하여 벗어날 줄 모르기에, 이로 인해 대성(大聖)이 세상에 나오셨고, 지인(至人)이 성령(聖靈)을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해탈의 문을 열고 편안한 길을 드러내셨으니, 찰리왕종(刹利王種)에서 은애(恩愛)를 하직하고 출가하시자, 천축의 귀족들이 영화를 버리고 도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실달(悉達)태자께서 곤룡포를 버리고 복전의 옷을 입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생과 사의 두 가지를 벗어나기를 맹세하고 묘한 열반을 한결같이 구해서, 마침내 도를 넓히어 사은(四恩)에 보답하였고, 덕을 길러 삼유(三有)를 보태었으니, 이것이 그 이익입니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의 「체발출가품(剃髮出家品)」에 따르면, 이같이 게송을 읊고 있습니다.
은혜와 애정으로 한자리에 어울리더라도
때가 되어 목숨 끊어지면 만난 것도 헤어지니
무상(無常)하기가 잠깐인 것을 보았기에
내가 지금 해탈을 구하노라.
이 이후에 그 덕화(德化)를 가리는 이는 악을 끊고 입신(立身)하였고, 그 풍화를 흠모하는 이는 자신을 깨끗이 하여 선을 닦았습니다. 형체를 버리고서야 뜻을 이루기에 수염과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자태를 버린 것뿐이고, 속된 것을 바꾸고서야 도를 만나기에, 군신의 화려한 복장을 벗은 것뿐입니다.
비록 형태로는 부모봉양을 빠뜨렸으나 안으로 효도를 머금은 데다, 예의가 임금을 섬기는 것에 거슬리나 마음으로 은혜에 감사하면서, 친한 이나 원수 맺은 이에게 은혜를 베풀고 대순(大順)을 이루어 유계(幽界)와 현계(顯界)를 복 받게 하는데, 어찌 소소한 거슬림에 구애받겠습니까?
상지(上智)의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이익을 보나, 하지(下智)의 범부는 거룩한 가르침에 어긋나서 손해만 봅니다. 죄악을 징계하여 방자한 이를 저절로 새롭게 만들고, 선행을 권장하여 통달한 이조차 감화시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지극한 덕을 떨치고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기르면서, 이에 다시 마음을 정법에 굽히고 뜻을 출가에 둔다면, 자비의 구름이 드리워지고 부처님의 밝은 해가 다시 떠오를 터이니, 참으로 이익(利益)의 도(道)가 무어라 칭탄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리하면 대당(大唐)의 제업(帝業)은 그 어짊이 백령에 미치고, 성종(聖種)의 홍기(鴻基)는 그 은혜가 천 대의 사직(社稷)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감히 미욱한 소견으로 천심(天心)을 가벼이 따지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삼가 비루한 언사에 맡겨서 좁은 소견을 대충 말씀드렸습니다.
어람(御覽)을 더럽혔으니 엎드려 두려움만 더합니다. 삼가 아뢰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