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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론 제3권
2. 십대봉불편(十代奉佛篇) ①[3]
[위나라의 황제들]
위(魏)나라 태조(太祖) 도무(道武)황제
[이름은 규(珪)이다.]
운수가 상란(喪亂)함을 맞아 우내(宇內)가 나뉘고 붕괴되어서 생민(生民)들이 조두(俎豆)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백성들이 때때로 융마(戎馬)의 자취만 보아서 예악(禮樂)과 문장이 땅에 떨어져 장차 다하려 할 적에 태조가 영웅 호걸의 깊은 자세로써 큰 임금의 바른 도량(度量)을 가져서 조정과 지방을 평정(平定)하여 문득 중원[中州]을 차지하고 크게 용광(龍光)을 열고 은근히 일용(日用)을 이바지하였다.
천흥(天興) 원년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부처님의 법이 일어남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경읍(京邑)에 있어서 모범을 세워 절의 집을 닦아 정돈하여라’ 하고, 또 우(虞)와 괵(虢)의 땅에 15층의 부도(浮圖)를 조성하고 개태사(開泰寺)와 정국사(定國寺)의 두 절을 일으켰으며, 일체경(一切經)을 베껴쓰고 1천의 황금 불상을 주조하였으며, 3백 명의 승려들을 불러서 매달 법회를 하였다.
위나라 태종(太宗) 명원(明元)황제
[이름은 사(嗣)이다.]
밝고 슬기롭고 바르게 관찰하여서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였다. 4생(生)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삼보를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업도(鄴都)에서 크게 승니를 득도시켰다.
위나라 세조(世祖) 태무(太武)황제
[이름은 도(燾)이다].
이 분의 기상은 당시를 덮고 위엄은 천하에 떨쳐서 사해를 갑독(匣牘)하고 1만 나라를 뇌롱(牢籠)하였다. 일승(一乘)에 회향하여 삼보에 귀의하였으며 다시 가람(伽藍)의 뛰어난 땅에 초제(招提)의 깨끗한 궁전을 창건하였으며 이어서 업성(鄴城)에 종정사(宗正寺)를 지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최호(崔晧)에게 미혹되어 비로소 바른 법을 쇠퇴케 하였다.
위나라 고종(高宗) 문성(文成)황제
[이름은 준(濬)이다.]
총명하고 활달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풍격(風格)이 무리에서 뛰어났었다. 불교를 중흥시키고 사찰을 수복(修復)하였으니, 불교가 널리 퍼진 것은 문성으로부터여서 무릇 승니 3만여의 사람을 득도시켰다.
위나라 현조(顯祖) 헌문(獻文)황제
[이름은 홍(弘)이다.]
도덕은 저 하늘에 짝하고 도는 극성(極聖)에 이웃하였으며 초은사(招隱寺)를 짓고 참선하는 승려들을 불러와 앉게 하였다.
위나라 고조(高祖) 효문(孝文)
[이름은 굉(宏)이다.]
신기한 광명이 집을 비추고 온화한 기운이 뜰에 가득 찼었다.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작작(綽綽)하였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게 현저하였으며 정치의 일을 듣고 보고하면서 착함을 따르기 물 흐르듯 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하고 긍휼히 여겨 항상 구제하여 이익되게 하기를 생각하였다. 태후의 기일(忌日)이면 능의 왼편에서 통곡하였으며 2일 동안 음식물을 끊고서 통곡하였는데 그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어서 업도에 안양사(安養寺)를 지으니 석덕 고승(碩德高僧)들이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였으며 6궁(宮)의 시녀(侍女)들이 다 재를 가져서 매년 3장월(長月)과 6재일(齋日)을 지키게 하였고 정진하여 불경을 외우는 자들은 모두 득도시켜 출가시켰다.
일은 크고 작음이 없이 두루 나누어 주기에 힘썼으며 항상 사관(史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나쁜 일도 숨기지 말고 쓰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고 보는 데로 문득 강을 하였다. 좋은 선비들을 사랑하고 기특하게 여기는 뜻이 굶주린 이가 밥을 찾듯 하고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 하였다.
장자와 노자의 말을 좋아하며 더욱이 불교에 돈독하였다. 재조(才藻:文才)가 부하고 넉넉하여 문장이 백 편(篇)이며, 유연(悠然)하게 멀리가 서 세상의 사무로써 도를 방해하지 않았다.
어려서 대통(大統)을 이었고 일찍이 예성(叡聖)의 풍도를 나타냈으며 때에 문명(文明)으로써 일을 꾸리고 우유(優遊)로써 몸을 공(拱)하여 현묘한 도를 보아 홀로 얻었으나 스스로 신계(神契)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표(標)하는 것이 진실로 명화(冥化)에 부합되었다.
몸소 큰 정사를 총괄하여서 하루에 만 기(機)를 살펴서 10여 년 동안 일찍이 틈이 없지마는 공경하고 밝게 옛날을 상고하여 하늘과 사람에 맞추어서 제왕(帝王)이 지은 것과 조정과 지방의 궤도(軌度)를 짐작하여 쓰고 버리고 하였으며 문장에 밝았다. 그래서 성스러움을 다하고 신명을 궁구하며 하늘을 잇고 책력을 이었다.
선황제(先皇帝)를 받들기 위하여서 대각사(大覺寺)에서 법당과 요사를 수리하는데 임금의 보시가 높고 두터우며 공급함이 풍부하고 화려하였다. 그래서 진영을 모신 탑과 경의 좌대가 찬연(粲然)하게 갖추어졌으며, 위에는 황금 표찰(表刹)로 표하고 아래로는 은의 기둥을 나열하니 기러기의 날개가 구름을 인한 듯하고 용의 머리가 해를 받친 듯하였으며, 이름 있는 스님들이 발꿈치를 잇대고 법의 도반(道伴)들이 어깨를 맞대면서 아침에는 연못에 거닐고 저녁에는 향각(香閣)에 머무니 바람이 지혜의 동산에 흐르고 범종이 참선하는 숲에 울려 퍼졌다. 3백명의 승려를 불러서 6시(時)에 빠지지 아니하였다. 득도한 승니가 1만 4천 인이었다.
위나라 세종(世宗) 선무(宣武)황제
[이름은 각(恪)이다.]
식건전(式乾殿)에서 여러 스님들과 조정의 신하들을 위하여 『유마경』을 강하였다.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하였고 경과 사(史)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불교를 좋아하였고 풍의(風儀)가 훌륭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덕은 음양과 같고 밝기는 해와 달과 같았다. 문교(文敎)를 전파하여 먼 사람들까지 품었고 예악을 고루어서 준걸스럽고 특달한 이들을 표창하였다. 그래서 3하(河)와 6군(郡)의 땅과 경수(涇水)ㆍ위수(渭水)ㆍ패수(覇水)ㆍ산수(滻水)의 구역들에 보통사(普通寺)와 대정사(大定寺) 등의 네 개의 사찰을 지어서 3학(學)을 수행하는 1천 승려에게 공양하였다.
위나라 숙종(肅宗) 효명(孝明)황제
[이름은 후(詡)이다.]
일거(一居)의 정숙함을 얻었고 2린(隣)의 극함을 체달하였으며 3승(乘)을 총괄하여 치빙(馳騁)하고 4구(衢)를 임하여 한가히 걸었다.
이어서 업도에 대각사(大覺寺)를 지으니 그윽한 밀실과 들쭉날쭉한 복전(複殿)이어서 바람이 그의 문에서 나오고 구름과 안개가 서까래와 기둥에서 일어났다.
진기한 나무들이 서로 얽힘을 보았고 꽃다운 풀들이 쌓임과 같음을 보았으니 수달다(須達多)장자가 땅에 금을 깐 것과 서로 비교하겠고 가란타(迦蘭陀) 죽원(竹園)과는 비교도 아니 된다.
위나라 경종(敬宗) 효장황제(孝莊皇帝)
[이름은 유(悠)이다. 어느 책에는 이름이 가(假)라고 되어 있다.]
풍채가 빼어나고 고매하며 자세와 얼굴이 괴위(瑰偉)하였다. 본래 충정(忠貞)을 실천하였기에 일찍이 백성들이 바라는 분이라고 일컬어졌다. 다섯 개의 정사를 지었으며 1만의 석상(石像)을 조각하였다.
[서위의 황제들]
서위(西魏)의 무(武)황제
[이름은 수(修)이다.]
운수와 술수를 잘 궁구하고 무예(武藝)까지도 능하였다. 진위(眞位)에 오르는 요지(要旨)를 찬탈하였지마는 출세(出世)의 현묘한 계책을 흠앙(欽仰)하여서 영희(永熙) 1년에 장안에서 척기사(陟屺寺)를 지었으며 2백 명의 이름 있는 스님들을 공양하였고 4시(時)로 불경을 강하고 외워서 헛되이 버리는 날이 없었다.
서위의 문(文)황제
[이름은 보거(寶炬)이다.]
덕을 세우고 인(仁)을 세웠으며 문(文)을 잘하고 무(武)를 잘하였다. 항상 믿음과 희사(喜捨)를 행하고 매양 자비를 행하였다. 대통(大統) 1년에 반야사(般若寺)를 지었으며 외로운 이와 늙은 이를 구제하였고 병든 승려를 공양하였다. 입으로는 『법화경』을 외우고 몸으로는 청정한 계를 받아 지녔다. 칠각전(七覺殿)을 일으키고 사선실(四禪室)을 만들었으며, 공양을 거두지 아니하고 보시와 인욕이 끝이 없었다.
서위의 효정(孝靖)황제
[이름은 선견(善見)이다.]
위(魏)나라는 임금의 상서에 비로소 응하였고 멀리 명부(冥符)에 맞았으며 수구(壽丘)를 경사스럽게 모아서 신비한 비춤이 물과 같아 9위(圍)에 어짐을 가피하고 사해(四海)에 위엄이 더하였다. 3황(皇)의 무성한 서통(緖統)을 이었으며 5제(帝)의 아름다운 발자국을 이었다.
고조(高祖)께서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천하를 제도하여 서울을 옮기고 임금의 업을 정하였으며, 세종(世宗)이 슬기롭고 밝음으로써 임금의 업을 받들어서 중원의 구역을 넓히고 편히 하였는데 효정황제가 여러 성왕(聖王)의 기초를 이어서 하늘이 주신 왕업을 의뢰하였으며 하늘의 상을 우러러보고 사람들의 꾀를 굽어보아 맞추었으며 옛 방식을 멀리 따르고 때의 일을 깊이 알아서 시구(耆龜)를 상고하고 길한 것을 이어서 장부(漳滏)로 집을 옮겨 보력(寶曆)을 두 번 번창하게 하고 큰 기초를 극히 세웠으니, 성스러운 덕이 거듭 빛나서 아홉 대(代)에 미쳐 마치게 되었다.
서위의 문조(文祖) 운종정제(運鍾靖帝)
위는 위나라가 군림(君臨)하여 17대 황제이고 1백70년이다. 나라의 큰 절이 47개였다.
또한 북쪽에 있으면서도 항상 서쪽을 다스리고 널리 각각 위아래 30여 리에 돌을 조각하고 감실(龕室)을 두어서 두루 부처님의 상호를 나열한 것이 이루 다할 수가 없어서 장엄하고 크게 볼 만하였으니 지금도 현존하여서 비록 법이 멸하는 시기를 만났지만 이 감실은 파괴되지 아니하였다.
그 밖에도 왕공(王公)과 귀실(貴室)과 5등(等)의 제후들의 절이 8백 39개이고 백성들이 지은 절이 3만여 개였다. 득도한 총 승니의 수는 2백만 명이었고 열아홉 사람이 49부(部)의 경을 번역하였다.
[제나라의 황제들]
고(高)씨의 제(齊)나라 고조(高祖) 문선(文宣)황제
[이름은 양(洋)이다.]
날로 나아가는 신령함을 나리고 구름을 바라보는 경사를 드리웠다. 하수의 거북이 그림을 지고 나오니 임금으로 기록되는 정부(禎符)를 징험(懲驗)하겠으며, 바다 밖까지 풍속을 점치니 중국에 성스러운 임금이 있음을 알았다. 아홉 목(牧)들이 와서 조공하고 1백 신들이 다 질서를 지켰다. 도를 귀중하게 여기고 덕을 숭상하며 용(用)을 간직하고 어진 것을 나타내어서 혹은 나가고 혹은 처(處)하니 작은 절개와 지조로써 헤아리지 못할 것이요, 언뜻 슬기로우면서도 언뜻 어리석은 듯하기에 대인(大人)이 알아보는 것이다.
상법(像法)을 크게 통하고 황금의 땅을 장엄함에 이르러서는 기틀[機]로 오는 이가 깊고 얕지마는 모두 열반의 문에 나아가고, 국토는 청정함과 더러움을 따르지만 다 한가지로 유리의 빛이었다.
교만을 꺾어 조복받는 데는 단수(丹水)의 싸움이 다르지만 얽히고 설킴을 싫어서 벗어나는 데는 소화(昭華)의 예가 다르다.
그러기에 불교를 짐작하여서 마왕(魔王) 파순(波旬)의 무리들을 부수고 깨달은 분을 헌장(憲章)하여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높음도 가볍게 여겼으니, 이야말로 큰 방편으로 물건을 응하고 큰 서원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함이라 하겠다.
천보(天保)의 처음에 조선사(稠禪師)를 청하여 보살계(菩薩戒)를 받았으며 이에 또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술을 금하였으며 매와 새매를 놓아 버리고 관(官)에서 그물쳐서 물고기 잡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리고 또 천하에 명을 내려 도살(屠殺)하는 것을 금지시켜서 3장월(長月)과 6재일(齋日)을 지키게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권고하여 재를 가지게 하였으며 모든 관이나 원(園)과 육방(六坊)에서 공사(公私)간에 비린내 나는 나물을 다 제거하게 하고 밖에서 있는 것은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절과 탑을 크게 일으키고 승니를 득도시켜 여러 주(州)에 가득하게 하였으며, 또 소현대통(昭玄大統)과 법상법사(法上法師)로써 계의 스승을 삼고 항상 머리털을 땅에 펴 깔아서 스승으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천보(天保) 2년에 조칙을 내리기를 ‘우러러 자비하고 광명하심을 힘입어서 사해를 편하게 통솔하니 그의 은덕을 갚는 길은 오직 정각(正覺)을 기대야 한다. 그러기에 여러 새들의 삶을 손상하는 무리들을 마땅히 산 숲에 놓아 주며 그리고 이 땅으로써 태황(太皇)과 태후(太后)를 위하여 보배탑을 경영한다’ 하고, 매 기르던 사람과 조(曹)를 폐지하여 보덕사(報德寺)를 만들었으며 득도시킨 승니는 8천여 명이나 되니, 10년 동안에 부처님 법이 크게 성하였다.
제나라 숙종(肅宗) 효소(孝昭)황제
[이름은 연(演)이다.]
추전(樞電)의 징험을 이었고 성홍(星虹)의 경사를 계승하여 광명이 4표(表)를 덮고 맞음이 3진(辰)에 순하였으며 도를 체득하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어진 것을 나타내고 성스러움을 지었다. 불교[至敎]를 받들어 높이고 뜻을 현묘한 문에 의탁하였으니, 바라나시[柰國]의 법륜(法輪)과 니원(尼園)의 자세한 말씀과 4제(諦)와 8건도(揵度)의 종지(宗旨)와 5승(乘)과 10항(行)의 전표(詮表)한 것이 향산(香山)의 큰 힘으로도 이기지 못한다고 하겠거든 속을 싸고 가죽에 쓴 것도 또한 갖추지 못한다 하겠다. 그러나 세간의 행업(行業)을 따르고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큰 맹세에 응하여서 선황(先皇)을 받들어서 일체경(一切經) 12장(藏)을 베껴쓰니 합하여 3만 8천47권이다. 청수(靑首)와 자색 끈과 은으로 줄을 만들고 황금으로 새겼으며 연꽃으로 덮어서 사자의 대(臺)에 바쳤다. 글은 해와 달과 더불어 함께 달리고 공은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넓어졌는데 승니를 득도시킨 것이 무릇 3천여 명이었다.
제나라 세조(世祖) 무성(武成)황제
[이름은 담(湛)이다.]
여러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서 응당 불교의 사찰에 노닐게 하였다. 꽃다운 숲의 동산 안에는 다시 화개(花蓋)의 말을 일으켰고 낙양(洛陽) 고을의 성 곁에는 도리어 새서(璽書)의 송(頌)을 새겨 놓았다. 층층의 대와 별관(別觀)에는 모두 가람(伽藍)을 세우고 벽옥(璧玉)과 주기(珠璣)는 다 공양하는 도구에 충당하였으며 몸소 스스로 정례(頂禮)하고 매양의 일에 경행(經行)하였다.
대녕(大寧) 1년에 보배의 탑을 경영하면서 진어(珍御)의 옷을 벗어 다 보시에 쓰고 『대품경(大品經)』을 굴리시어 다달이 두어 번씩 하였다.
위는 고씨(高氏)의 제나라 여섯 임금으로서 28년 동안이다. 나라에서 세운 절이 43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여섯 명이요, 번역한 부수가 14부였다.
[주나라의 황제들]
주(周)나라 효민(孝愍)황제
[이름은 각(覺)이다.]
밝고 넉넉하여 기틀을 연구하고 소통(疎通)시킴이 크고도 멀었다. 타고난 바탕이 신무(神武)하니 백성들이 옥과 송사를 돌렸었다. 황금 거울을 쥐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옥형(玉衡)을 가지런히 하여서 극(極)을 세웠다. 때는 박상(剝喪)함을 만나고 세상이 운뢰(雲雷)를 막았기에 땅이 절유(絶維)를 농락[絡]하고 해 바퀴가 비춤을 가렸지만 문득 9복(服)을 돌려서 1백 신령들을 놀라게 하였다.
주나라 원년에 상법(像法)의 교화를 크게 펴니 바다 안의 명덕(名德)들이 의리를 사모하고 어진 데 돌아와서 널리 해탈의 문을 열고 환하게 보리(菩提)의 길을 열어 유정천(有頂天)에 다하도록 평등하게 자비한 구름으로 덮었으며 땅이 가이없는 데까지 다하도록 모두 지혜의 해로 덮었다.
주나라 효명(孝明)황제
[이름은 육(毓)이다.]
1만 나라에 임금으로 임하시어 백성들을 평장(平章)하였다. 안으로는 9족(族)을 화친하게 하고 밖으로는 4문(門)이 화목하게 하였다.
개구(介丘)에 옥과 보배들을 쌓아 놓고 도산(塗山)에 옥과 비단들이 있는 것을 보았으며, 나아가 근본과 지말(枝末)이 유한(維翰)이요 벌려 있는 벽(辟)이 여러 관원이라, 5계(戒)와 10행(行)이 함께 귀의하는 도리를 알았고 밖으로 관하고 안으로 깨닫는 것이 한가지로 해탈의 문에 올랐다. 세계는 다함이 있지마는 큰 서원은 다함이 없었다. 2년에 선황(先皇)의 뜻을 받아서 공경스럽게 노사나(盧舍那)부처를 직조(織造)한 불상 한 구와 아울러 두 보살의 상을 만들고, 높이가 2장(丈) 6척(尺) 등신(等身)인 박달나무의 불상 12구와 각각 두 보살과 금강사자(金剛師子) 등을 조성하니 장려(壯麗)함이 하늘이 만든 듯하고 미묘함이 신이 조성한 듯하였다.
주나라 태조(太祖) 문(文)황제
[이름은 태(泰)이다.]
총명하여 지혜를 간직하고 재주가 뛰어나 체통을 이었었다. 그러기에 4문(門)이 화목하였고 1백 가지의 법도가 시절과 차례에 맞으니 위로는 아름다운 보배를 내리고 아래로는 복과 상서가 맞았었다.
서울 장안에 추원사(追遠寺)ㆍ척기사(陟屺寺)ㆍ대승사(大乘寺)ㆍ위국사(魏國寺)ㆍ안정사(安定寺)ㆍ중흥사(中興寺) 등의 여섯 절을 건립하여 승니 1천 명을 득도시켰고 또 천보사(天保寺)를 지어서 위법사(瑋法師)와 제자들 70여 인을 공양하였다.
또 안주(安州)에 수산사(壽山寺)와 범운사(梵雲寺)의 두 절을 지었으며, 또 대복전사(大福田寺)를 지어서 국사인 실선사(實禪師)를 공양하였고, 또 실선사의 묘소에 복전사(福田寺)를 지었다. 또 대가한(大可汗)과 대이니(大伊尼)를 위하여 돌궐사(突厥寺)를 지었다.
주나라 고조(高祖) 무(武)황제
[이름은 옹(邕)이다.]
기회를 응하여 말을 어거하고 거울을 쥐고 하늘에 올랐으니 위에 오르고 아래를 격(格)하는 교훈과 하늘을 경(經)으로 하고 땅을 뜻으로 하는 법칙을 하였다.
5위(緯)의 다른 곳은 하늘의 끌어줌으로써 어거하였고 4유(維)가 근본을 잃자 땅의 축(軸)으로써 끌어주어서 풍속을 옮겨 바꾸고 위를 편히 하고 백성을 다스렸으니 도가 진문(震門)에 미쳐서 소화(昭華)에서 베풀어 순(舜)에게 옥(玉)을 주었으며, 공이 이궐(伊闕)에 열렸기에 소하(疎河)에서 내리어 우(禹)에게 규(珪)를 주었다. 산과 하수가 신령함을 본받음에 중앙과 지방이 복을 이루었다.
무성(武成) 2년에 문황제를 위하여 비단으로 짠 부처님의 상을 조성하니 높이가 한 길 여섯 자였다. 아울러 보살상과 성승(聖僧)의 상과 금강신의 상과 사자들의 상을 조성하여 보배 탑의 주위에 2백20구의 상을 두르니, 구름이 용의 기상을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갑자기 조직(組織)의 공교를 이루었으며, 물이 강의 물결을 씻지 아니함이 없어서 칼을 가지고 제조함을 빌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정토(淨土)의 신광(神光)을 비추고 화불(化佛)의 원만한 진영(眞影)을 열었다. 이어서 서울에 영국사(寧國寺)ㆍ회창사(會昌寺)ㆍ영녕사(永寧寺)의 세 절을 지으니 높은 누각이 중천(中天)의 대에 솟은 듯하고 겹집인 문이 열선(列仙)의 장관을 이루어서 구름 같은 기와와 연꽃 무늬의 서까래와 수놓은 기둥과 문채 있는 망대와 여름 지게문과 가을 창과 연꽃 못과 사과나무 동산 등 곳곳이 정결하고 하나하나가 곱고 화려하여서 보는 자가 돌아가는 것도 잊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릇 1천8백 인의 승니를 득도시켰으며 베껴쓴 불경과 논서는 1천7백여 부였다. 그러나 뒤에 장빈(張賓)을 만났기에 처음으로 착하지 못한 것을 하였다.
주나라 효선황제(孝宣皇帝)
[이름은 하(賀)이다.]
불일(佛日)을 거듭 높인 것이 뒤에 빛나고 앞을 뛰어넘었다. 소상(塑像) 4감(龕) 1만여 구를 조성하였으며 『반야경』 3천여 부를 베껴썼고 6재(齋)일을 바꾸지 아니하였으며, 8계(戒)를 넘지 않아서 긴 밤과 맑은 새벽에 경행하면서 외우고 염(念)하였다. 네 가지 큰 원을 세우고 바른 깨달음에 뜻을 두었다.
위는 주나라 우문씨(宇文氏)의 다섯 임금에 20년이다. 절은 도합 9백31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네 명이고 번역한 부수가 16부였다.
[수나라의 황제들]
수(隋)나라 고조(高祖) 문(文)
[이름은 견(堅)이다.]
1천 해의 운수에 응하여서 1백 임금의 끝에 해당한다. 현묘한 덕은 신명에 통하였으며 지극한 공은 조화(造化)를 에워쌌다. 읍하고 사양하는 처음에 융의(戎衣)를 움직이지 않았으며 추대함을 즐기는 때에 뭇 공적이 다 화하였다. 이에 선기(璿璣)를 쥐고 건상(乾象)을 운반하며 문창(文昌)을 밟고 북두(北斗)와 북극(北極)을 가지런히 하였다.
하늘을 경(經)으로 하고 땅을 위(緯)로 하는 업이 자미성(紫微星)에 거듭 빛나고, 어질고 성하며 성스럽고 밝은 자세는 해와 달에 연하여 빛났다. 지극한 덕은 사람과 귀신에 미치고 신비한 교화는 음과 양에 합하였으며, 위엄은 9위(圍)에 떨쳤고, 은택은 사해를 적시어서 3황(皇)의 무성한 서통(緖統)을 이었고, 5제(帝)의 아름다운 자취를 찬술하였으니, 문경(文景)과 성탕(成湯)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겠다.
그러기에 현묘한 거북과 붉은 참새와 상서로운 사슴과 상서로운 용이 강한(江漢)에 모두 모이고 난포(蘭圃)에 함께 노닐어서 추우(騶虞)를 편하고 즐거운 데 이르고 기린을 부하고 창성한 데 내리게 하였으며, 동쪽의 가자미와 서쪽의 비익조[鶼] 상원(上苑)에 어지러이 많이 있고, 붉은 까마귀와 푸른 봉황새가 화림(華林)에서 밝게 빛났으며, 궁전과 궁궐에서는 신령스러운 지초[芝]가 나고 기둥과 기초는 아름다운 옥으로 이루어졌으며, 돌은 기이한 글자를 열었고 산에서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으며, 단 이슬은 단술을 드리우고 샘에서는 빛나는 별이 솟았으며, 빛나는 물결은 우물에 뜨고 붉은 풀은 무더기로 났으며, 아름다운 싹은 합하여 빼어나고 절름발이가 능히 걸으며 벙어리가 능히 말을 하였다.
자비가 9은(垠)에 흡족하고 은택이 8표(表)에 윤택하여서 밝은 계산은 지나간 일을 변하는 데 합하고, 그윽한 계산은 앞으로 올 것을 안다. 이에 성스럽고 신기하며 능함이 많고 재주가 많으며, 무위(無爲)의 정사는 이(離)와 연(連)을 멀리 여의었고 도가 있는 풍도(風度)는 염제(炎帝)와 소호[昊]에 비긴다.
듣고 생각함에 송사를 쉬게 하니 비옥(比屋)을 가히 봉하겠고, 크게 보호함을 마음에 두니 인재를 등용하는 데 생각을 두어서 삼보에 기둥과 대들보가 되고 4생(生)을 이고 진다.
개황(開皇) 3년에 조명을 내리기를 ‘짐이 성교(聖敎)를 공경하고 숭상하여서 생각이 신우(神宇)에 있으니 그 주(周)나라 왕조 때 폐지되었던 절을 다 수리하여 복구하여라’ 하니, 경조(京兆)의 태수 소위(蘇威)가 칙명을 받들어서 경성의 안에 형상이 뛰어난 땅을 가려서 가람(伽藍)을 안치하였다. 이에 경성의 안에서는 넓고 좁음을 묻지 아니하고 스님들의 행적이 있는 곳에는 다 절을 세우도록 허락하였으며, 아울러 공평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옛날에 고조(高祖)가 후위(後魏) 대통(大統) 7년 6월 계축(癸丑)에 동주(同州)의 반야니사(般若尼寺) 신니(神尼)의 방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에 바른 기운이 명부(冥符)하여서 붉은 빛이 집에 가득하고 뜬 빛이 문에 넘쳤으며 붉은 불꽃이 하늘을 비추었다. 그래서 그를 안에서 보는 자들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서로서로 금지하고 약속하여 외부에 소문이 남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붉은 기운이 사흘 동안 뜰에 찼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들이 다 붉은 빛을 이루었으며 사방의 이웃들이 바라보니, 기운이 마치 도는 일산과 같았고 혹은 높은 누각과 같았다.
다시 경풍(景風)과 감로(甘露)가 있어서 이삭을 합치고 가지를 연하였고, 연못에는 이상한 꽃이 피고 숲에는 기이한 과일이 났으며, 독한 벌레들은 숨고 길한 새들은 날개치며 울었다. 인하여 신니(神尼)가 보호하여 가지고 보양(保養)하였다.
임금의 자리에 오름에 옛날에 살던 곳을 기억하여 개황(開皇) 4년에 태조(太祖) 무원(武元)황제와 원명(元明) 황태후를 위하여 반야의 옛 터에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지었다.
반야사는 지난번에 건덕(建德)을 만나서 안과 밖이 황량하였기에 한 치쯤 되는 평고대[梠]와 한 자쯤 되는 서까래가 땅을 쓴 듯이 다 없어졌는데, 이에 규모를 개척하여 윤환(輪煥)을 갖추고 더하니 일곱 겹이 두루 뻗쳤고 1백 두공[拱]이 서로 지탱하였으며 감실(龕室)은 높고 훤칠하고 난간과 집은 연하여 늘어섰으며 황금 소반은 구름 밖의 이슬을 받았고 보배 방울은 하늘 위의 바람에 흔들리었다.
또 태조께서 전에 수주(隋州)를 맡았었기에 그곳에 또한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지었으며, 경사(京師)에는 대흥선사(大興善寺)를 지어 크게 신령스러운 탑을 열고 널리 천궁(天宮)을 두었으니, 불상의 시설이 허공에 기대어 있고 매화의 들보가 멀리까지 뻗어 있으며 벽당(璧瑭)이 채색을 빛내고 옥으로 만든 편액이 빛남을 머금었다. 그림 두공이 구름을 받들고 붉은 두공[櫨]이 해를 받들었으며 바람은 보배 방울에 어울리고 비는 구슬 깃발을 적시었다. 숲에는 7각(覺)의 꽃이 피었고 연못에는 여덟 공덕의 물이 솟구치었다. 6대덕(大德)과 사해에 이름 있는 스님들을 불러서 항상 3백여 명의 사람이 있었으며 네 가지의 일로 공양하였다.
개황 5년에 대덕 경법사(經法師)를 청하여 보살계를 받으면서 그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이들을 석방하면서 지시를 내리기를
‘짐이 일찍부터 복이 많음을 응하여 공손히 보명(寶命)을 이었다. 이제 일체종지(一切種智)의 깨달은 분에게 귀의하여 뛰어난 과보를 돈독히 높이고자 한다. 그래서 금월 23일에 경법사를 청하여 대흥선전(大興善殿)에서 보살계를 받는다. 그런데 보살의 가르침은 해탈을 우선으로 삼고 계행의 근본은 자비로써 시초를 삼는다. 이제 감옥에 갇힌 이들도 생각하면 가슴 아프니 귀양가는 죄 이하는 다 용서하여 석방하여라’ 하니,
천하의 가벼운 죄수로서 석방받게 된 자는 2만 4천9백여 명이고 사형에서 감형을 받은 자가 3천7백여 명이다. 이빨을 머금고 머리카락을 인 자들이 서로 나아가 춤추고 뛰었으며 문마다 복을 받고 사람마다 경사라고 일컬었으니, 이것은 이 어리석은 마음을 바꾸어 지혜의 해를 밝힘으로써 생(生)을 받은 무리들이 하나같이 착한 데로 옮길 줄 알게 함이었다.
그 해에 칙명을 내리기를
‘부처님은 바른 법으로써 나라의 임금에게 부촉하였다. 짐은 사람 가운데 높은 이로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았으니 지금부터는 짐의 한 세상이 마쳐질 때까지 매달 스물일곱 분의 스님들을 청하여 순서에 따라 경을 읽는 스님 네 명과 대덕 세 사람씩 대흥선전에서 일체경을 읽게 하여라’라고 하여
비록 날마다 1만 기틀을 살피지만 귀로는 법의 맛을 알게 하였으며 매일 밤 도를 행하였다.
그리고 황후와 궁의 사람들이 친히 경 읽음을 들어서 만일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세 분의 대덕에게 묻게 하였다.
또 박주(亳州)에 천거사(天居寺)를 짓고 병주(幷州)에 무덕사(武德寺)를 짓는 등 앞뒤로 각기 12원(院)을 지어서 사방으로 여사(閭舍) 1천여 칸을 두루하게 하고 3백여 명의 스님들을 공양하게 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내신 곳 45주(州)에 전부 대흥국사를 지었으며 인수궁(仁壽宮)에도 삼선사(三善寺)를 짓고 헌(獻)황후를 위하여 동선정사(東禪定寺)를 지으셨다.
또 조명을 내리기를
‘만일 능히 맑고 빈 것을 높이 밟아서 출세간의 도를 부지런히 구하는 이가 있으면 이는 다 장려하고 권고할 것이니 교훈을 주고 모범을 드리워야 한다. 산 골짜기는 한가하고 멀어서 빈 것을 품고 이상한 것을 감추는 곳이다. 숨어사는 이가 좋아하고 신선과 성인이 사는 곳이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나가고 향하는 자가 많다. 돌과 샘에 깃들여 쉬고 바위와 숲에 가고 오는 이는 몸으로 기다리는 것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급해 주어라. 5악(嶽)과 모든 주의 이름난 산 아래에 각기 스님들의 절 하나와 토지, 전장(田莊)을 두어라’고 하였다.
인수(仁壽) 원년에 문제(文帝)와 헌후(獻后)와 궁인(宮人)들이 다 사리가 널리 광명을 놓음을 보고 감동하여서 다듬잇돌과 막대기로 쳐서 시험하여 보았지만 완연히 손상됨이 없었다. 그래서 40주(州)에 각기 보배 탑을 지으니 빛과 밝음이 나타나 발하고 신통 변화가 보통과 달랐다. 이는 모두 왕소(王劭)가 기록한 것과 같다.
개황의 처음으로부터 인수의 말년까지 득도시킨 승니는 23만 사람이고 해내(海內)에 지은 절은 3천7백92개이고 경과 논을 베껴 쓴 것이 46장(藏) 13만 2천86권이고 옛 경전을 수선한 것이 3천8백53부이고 금동(金銅)과 전단향나무와 비단과 상아와 돌로 조성한 크고 작은 불상들이 10만 6천5백80구(軀)이고 옛 불상을 수선한 것이 1백50만 8천9백40여 구이고 궁내(宮內)에서 항상 자수(刺繡)하여 짜서 조성한 불상 및 화상과 오색의 구슬 깃발과 오채(五彩)로 그린 깃발 등은 이루 다 계산할 수가 없다. 24년 동안 영조(營造)한 공덕과 홍양(弘揚)한 것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검은 머리들[隸首]이 이를 알 수가 없다.
수나라 양제(煬帝)
[이름은 광(廣)이다.]
하무(下武)에서 이어 응하여 큰 업을 이었으니 지극한 덕은 억조 창생에게 빛나게 입히고, 신비한 교화는 여원(黎元)에게 크게 흡족하였다. 바람을 점치고 비를 기다리는 시골에서 산을 타고 건너와서 삭(朔)을 청하였고 나무를 서리고 모래가 흐르는 땅에서도 바다를 건너와 보배를 바치었다.
밖으로는 9류(流)를 통달하고 안으로는 3장(藏)을 궁구하여서 진여(眞如)의 묘한 이치를 연구하고 조화(造化)의 그윽한 근원을 다하였으니 물리(物理)에 체달(體達)함이 전대보다 뛰어나고 정(情)을 반연함이 옛날보다 훌륭하였다.
매양 정호(鼎湖)의 거가(車駕)가 너무 멀어서 추모하기 어려우며 장릉(長陵)의 혼이 유유하여 길다. 이에 정업(淨業)을 일으키어 복전(福田)을 심으려 하여 대업(大業) 원년에 문황제를 위하여 서선정사(西禪定寺)를 지으니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준비가 큰 모범이었다. 뜻과 같은 대(臺)를 일으켜서 신통의 집을 벌려 놓으니 인사(仁祠)는 은한(銀漢)을 끊은 듯하고 영찰(靈刹)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보배 나무는 여덟 줄이요 고루 요령은 4각(角)이었다. 가파른 3층의 누각에는 저절로 울리는 종을 달았고 보호하는 1천 잎의 연꽃에는 날아오는 좌석을 받쳤다. 색(色)은 낭야(琅琊)의 궁전을 머금은 듯하고 높이는 노공(魯恭)의 궁전을 넘는다.
온 세상이 보배로 여기는 모든 문물(文物)을 갖추었다. 또 고양(高陽)에 융성사(隆聖寺)를 지었는데, 비문은 비서랑(秘書郞)인 우세남(虞世南)이 지은 것으로서 그렇게 향각(香閣)을 꾸며서 멀리 임하니 화대(花臺)와 상거한 듯 침침하였다. 금물결이 밤에 올라와서 벽당(璧璫)의 옆에서 배회하였고 옥으로 된 끈이 새벽에 구슬 그물의 사이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비고 흰 것을 방의 장막에서 맑히고 바람과 구름이 난간과 창에서 일어나며 신령스러움은 선실(禪室)에 서리고 불상을 화성(化城)에 설치하였으며 솟은 탑과 보배의 대가 극히 신통 변화를 도모하였다.
또 도량에서 무차(無遮)의 큰 모임을 베풀고 청신사와 청신녀 1백 20인을 득도시켰다. 그리고 문황제를 위하여 공경히 금동으로 석가모니불 좌상 1구를 조성하니 배광(背光)에서 가부(跏趺)한 곳까지가 통틀어 일곱 자 두 치였는데 아직 장엄을 아니하였는데도 정수리는 감취(紺翠)의 빛이 얽히어 있고 몸에는 자금색(紫金色)이 빛났으며 큰 광명을 놓으니 당(堂)과 집[宇]이 빛났다. 이미 아름다운 상서로움을 감득(感得)하고서 여러 주와 군에 칙명을 내려 각기 도사(圖寫)하게 하였다.
또 병주(幷州)에 홍선사(弘善寺)를 짓고 그 옆의 용산(龍山)에 아미타불의 좌상을 만드니 높이가 1백30척이었으며 양주(楊州)에 혜일도량(慧日道場)을 짓고 경사(京師)에 청선사(淸禪寺)와 일엄사(日嚴寺)와 향대사(香臺寺)를 지었으며, 또 아홉 궁을 희사(喜捨)하여 9사(寺)를 지었으며 태릉(泰陵)과 장릉(莊陵) 두 곳에도 아울러 각각 절을 지었다.
진(陳)나라를 평정한 뒤에 양주에서 옛 경전을 보수하였으며 아울러 신본(新本)을 베껴쓰니 합쳐서 6백12장(藏), 2만 9천1백73부, 90만 3천5백80권이었다. 그리고 옛 불상을 보수한 것이 10만 1천 구이고 새로운 불상을 주조한 것이 3천8백50구이며, 득도시킨 승니는 1만 6천2백 인이었다.
위에 말한 것은 수의 임금 양씨(楊氏) 두 임금의 37년이며 절은 3천9백85개이고, 득도시킨 승니는 23만 6천2백 인이며,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26인이고, 번역된 부수가 82부였다.
그런데 수나라가 건국되면서 불교가 창성함을 만났으니, 문제는 신령스러운 거둥을 처음 여시어 정서(禎瑞)를 거듭 누리셨고, 양제는 보력(寶曆)을 이어 응한 뒤에 불교를 일으켜 세운 것이 더욱 많았다.
옛날 번저(蕃邸)에 있을 때부터 네 개의 도량을 세우셨고 불교와 도교를 쌍으로 표하시어 안과 밖을 자급(資給)하였으며 등극하신 뒤로 더 넓혀서 드날렸으니 한 재주[藝]로 유생(有生)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세 번 불러 별관(別館)에 살게 하였으며, 네 가지의 일로 공양한 것이 2천여 인이었다.
해마다 여러 휘일(諱日)에는 큰 재를 널리 세웠으며 각기 승니를 득도시켜 길이 충당하는 것이 상식(常式)이 되었다. 대업의 끝에 요사한 도적들이 발생(勃生)하였기에 비록 교루(郊壘)에 근심이 많았고 전쟁이 다투어 일어났지만 그러나 불교를 높여 공경함이 한결같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지러짐이 없어서 부처님의 이치를 크게 찬양하여 여러 명갈(銘碣)에 새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