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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론 하권
9. 상주함을 타파하는 장[破常品]
[외도] 모든 법들이 존재하네. 원인이 없는 상주하는 법이 타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투로]
그대가 원인이 있는 법을 타파하긴 했지만 원인이 없는 상주하는 법은 타파하지 않았다.
가령 공간[虛空]ㆍ시간[時]ㆍ방향[方]ㆍ극미[微塵]ㆍ열반과 같은 이 원인이 없는 법은 타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존재한다.
[불자] 만약 이유 없이[强]상주한다고 한다면
그대는 원인이 있기에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원인이 없기에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만약 상주하는 법이 원인이 있다면 원인이 있기에 무상한 것이 된다.
만약 원인이 없기에 상주한다고 말한다면 무상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외도] 인식함의 원인이기에 과실이 없네. [수투로]
두 종류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만듦의 원인[作因]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함의 원인[了因]이다.
만약 만듦의 원인으로 본다면 이것은 무상한 것이다. 우리의 공간[虛空]등의 상주하는 법은 인식함의 원인이기에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원인이 없기에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원인이 있기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强]상주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자] 이 원인은 타당하지 않네. [수투로]
그대가 비록 상주하는 법이 원인이 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이 원인은 타당하지 않다.
‘나[神]’는 이미 타파되었다.
다른 상주하는 법은 후에 타파될 것이다.
[외도] 상주하는 법은 존재하네. 만들어진 법[作法]은 무상하기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無作法]이 상주하네. [수투로]
물단지 등의 사물들이 무상하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만약 이 법과 다르다면 상주할 것이다.
[불자] 존재하네. 또한 함께 존재하지 않네. [수투로]
그대는 만들어진 법[作法]과 상반되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不作法]이라고 한다.
이제 만들어진 법 속에 존재성[有相]이 보이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대는
“만들어진 법과 상반되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을 상주한다”고 한다면,
이제 만들어진 법과 상반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무상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들어지지 않은 법과 만들어진 법은 동일하게 감각되는 것[觸]이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은 무상할 것이다.
이와 같이 편재하는 상주법(常住法)과 편재하지 않는 상주법을 모두 이미 합쳐서 타파했다.
이제 하나하나 타파할 것이다.
[외도] 공간[虛空法]이 실제로 존재하네. 상주하고 편재하며 부분이 없네. 모든 곳에, 모든 때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네. [수투로]
세상 사람들은 모든 곳에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편재한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때에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상주한다.
[불자] 부분 속에서 부분과 합하기에 부분과 다르지 않네. [수투로]
물단지에 내부[向中]공간이 있을 때 이 내부 공간에 전체[都]가 존재하는가, 부분이 존재하는가? 만약 전체가 존재한다면 편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편재한다고 한다면 물단지도 편재할 것이다.
만약 부분이 존재한다면 공간은 단지 부분일 뿐이므로 전체[有分]를 공간이라고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편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외도] 공간이 실제로 존재한다. 편재하고 또 상주하네. 행동[作]이 있기 때문에. [수투로]
만약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드는 일[擧]이 없고 내리는 일[下]이 없으며 가거나 오는 일 등이 없다.
왜 그러한가? 수용하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실제로 행동[所作]이 있다. 그러므로 공간이 존재한다. 편재하고 상주한다.
[불자] 그렇지 않네. 공간이 공간에 거처하게 되네. [수투로]
만약 공간이 존재한다면 거주하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만약 거주하는 장소가 없다면 비존재[無法]이다.
만약 공간이 빈 곳[孔穴]속에 거주한다면 그렇다면 공간은 공간 속에 거주하는 것이다. 수용하는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공간은 빈 곳 속에 거주하지 않는다. 또 충실한 곳[實]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충실하다면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투로]
충실하다면 공간이라 하지 않는다.
만약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주하는 장소가 없다. 수용하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행동의 장소[作處]를 공간이라고 말한다면 충실한 곳에는 행동의 장소가 없기 때문에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간은 편재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또 성질[相]이 없기 때문에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법은 각각의 성질이 있다. 성질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지(地)의 단단한 성질, 수(水)의 축축한 성질, 불(火)의 뜨거운 성질, 풍(風)의 움직이는 성질, 식(識)의 인식하는 성질이 그러하다.
그러나 공간은 성질[相]이 없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공간은 성질[相]이 있다. 그대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없을 뿐이다. 색 없음[無色]이 공간의 성질이다.
[불자] 그렇지 않다. 색 없음은 색이 파괴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나무를 절단했을 때 다시 법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공간의 성질은 없다. 또 공간은 성질이 없다. 왜 그러한가?
그대가
“색 없음이 공간의 성질이다”고 말한다면,
만약 색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때는 공간의 성질이 없다.
또 색은 무상한 법이고 공간은 상주하는[有常]법이다.
색이 아직 있지 않을 때에도 이미 공간은 존재할 것이다.
만약 아직 색이 있지 않다면 소멸하는 바가 없으니 공간은 성질이 없는 것이다.
만약 성질이 없다면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색 없음이 공간의 성질인 것이 아니다.
오직 이름이 있을 뿐 실질이 없다. 모든 편재하고 상주하는 것도 합쳐서 이와 같이 타파할 수 있다.
[외도] 시간[時法]이 존재하네. 상주함의 상(相)이 있기 때문에. [수투로]
어떤 법은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 표상[共相]에 의지해서 추리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와 같이 시간은 미세해서 비록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절기ㆍ꽃ㆍ열매 등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이것은 결과를 보고서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 동시, 동시 아님, 멀고 가까움 등의 성질[相]에 의해서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상주한다.
[불자] 과거는 미래 속에 없네. 그러니 미래는 없네. [수투로]
가령 진흙덩어리일 때는 현재, 진흙일 때는 과거, 물단지일 때는 미래인데, 이것이 시간의 상(相)이다. 상주하기 때문에 과거 시간[過去時]은 미래 시간[未來時]이 되지 않는다.
그대의 경전에
“시간은 단일한 법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 시간은 결코 미래 시간이 되지 않는다. 또한 현재 시간[現在時]도 되지 않는다. 만약 과거가 미래가 된다면 뒤섞이는 과실이 있다. 또 과거 속에 미래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미래가 있지 않다. 현재도 이와 같이 타파된다.
[외도] 과거를 인정하기에 시간이 존재하네. [수투로]
그대가 과거 시간을 인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미래 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실제로 존재한다.
[불자] 미래의 상(相)은 과거가 아니네. [수투로]
그대는 내가 앞에서 과거의 진흙은 미래의 물단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듣지 않았는가?
만약 미래의 상 속에 떨어졌다면 이것을 미래의 상(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과거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시간이 존재하네. 자상(自相)이 구별되기 때문에. [수투로]
만약 현재라면 현재의 상이 있고, 만약 과거라면 과거의 상이 있고, 만약 미래라면 미래의 상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존재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은 현재이네. [수투로]
만약 3시(時)에 자상이 있다면 이제 모두 현재일 것이다.
만약 미래라면 이것은 무(無)이다.
만약 유(有)라면 미래(未來)라고 해서는 안 되고 이래(已來)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외도] 과거와 미래는 자기의 상을 행하기에 과오가 없네. [수투로]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은 현재의 상을 행하지 않는다.
과거 시간은 과거의 상을 행하고 미래 시간은 미래상을 행한다.
이것들이 각각 자기의 상을 행하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불자] 지나갔다면 과거가 아니네. [수투로]
만약 과거가 지나갔다면[過去]과거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자기의 상(相)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불이 뜨거움을 버렸다면 불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자기의 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이제 과거 시간이 과거의 상을 행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래도 또한 이와 같이 타파한다.
그러므로 시간[時法]은 실질이 없고 다만 언설이 있을 뿐이다.
[외도] 방향[方]이 실제로 존재하네. 상주함의 상이 있기 때문에. [수투로]
‘태양과 합하는 장소’가 방향의 상이다.
우리의 경전에서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태양과 최초로 합하는 장소를 동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다른 방향도 태양을 좇아서 이름을 짓는다”고 말하고 있다.
[불자] 그렇지 않네. 동쪽은 최초일 때가 없기 때문에. [수투로]
태양은 네 천하를 지나가고 수미산을 돈다.
울단월(鬱單越)의 한낮은 불우체(弗于逮)의 해뜰 때이어서 불우체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불우체의 한낮은 염부제(閻浮提)의 해뜰 때이어서 염부제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염부제의 한낮은 구야니(拘耶尼)의 해뜰 때이서 구야니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구야니의 한낮은 울단월의 해뜰 때이어서 울단월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동쪽이고 남쪽이고 서쪽이고 북쪽이다.
또 태양과 합하지 않는 장소 이것에는 방향이 없다.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또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쪽을 동쪽이라고 하고 저쪽을 서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그렇지 않네. 이 방향의 상(相)은 한 천하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투로]
이 방향의 상은 한 천하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기에 전체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쪽은 최초일 때가 없다는 과실이 없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한계가 있는 것이네. [수투로]
만약 태양과 최초에 합하는 곳을 동쪽이라고 한다면 모든 방향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부분이 있다. 부분이 있기 때문에 무상하다.
그러므로 언어로 표현할 때 방향이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방향이 있지 않은 것이 된다.
[외도] 편재하는 상주하는 것은 없지만 편재하지 않는 상주하는 극미는 존재하네. [수투로]
세상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거나 원인을 보고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싹 등을 보고서 씨 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세계의 법인, 모든 발생하는 사물들을 볼 때 전에는 미세하고 후에는 조대하다.
그러므로 두 극미를 최초의 결과로 하고 한 극미를 원인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극미가 존재한다. 둥글며 상주한다. 원인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자] 두 극미가 몸 전체와 합하는 것이 아니네. 결과는 둥글지 않기 때문에. [수투로]
극미들의 결과가 발생할 때 몸 전체와 합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두 극미 등의 결과는 눈에 보일 때 둥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극미가 몸 전체와 합한다면 두 극미 등의 결과도 둥글 것이다.
만약 몸 전체와 합한다면 둘도 동일하게 괴멸하네. [수투로]
또 만약 극미가 거듭 합한다면 결과는 높고, 만약 많이 합한다면 결과는 크다.
부분으로써 합하기 때문에 극미는 ‘부분을 갖는 것[有分]’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극미는 무상하네. 공간에 의해 나누어지기 때문에. [수투로]
또 만약 극미가 존재한다면 허공과 함께 나누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극미는 ‘부분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색과 미(味) 등에 의해 나누어지기 때문에. [수투로]
또 만약 극미가 존재한다면 색과 미(味) 등의 부분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극미는 ‘부분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형태가 있는 법은 상(相)이 있기 때문에. [수투로]
또 만약 극미가 형태가 있다면 장형ㆍ단형ㆍ사각형ㆍ원형 등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극미는 부분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극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열반[涅槃法]이 존재하네. 번뇌 없음과 열반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수투로]
애(愛) 등의 번뇌들을 영원히 멸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번뇌가 있다면 태어남과 죽음[生死]이 있다.
번뇌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다시 태어나고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반이 상주한다고 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열반은 지어진 법[作法]이기 때문에. [수투로]
수도(修道)에 의지하기 때문에 번뇌들이 없다.
만약 번뇌 없음이 열반이라면 열반은 지어진 법이다. 지어진 법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만약 번뇌 없음이라면 이것을 ‘존재하지 않음[無所有]’이라 한다.
만약 열반이 번뇌 없음과 다르지 않다면 열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능작인[作因]이기 때문에. [수투로]
열반은 번뇌 없음의 능작인이 된다.
[불자] 그렇지 않네. 타파하는 것[能破]은 타파되는 것[破]이 아니네. [수투로]
만약 열반이 해탈을 위한 것이라면 해탈이 아니다.
또 아직 번뇌를 멸진하지 않았을 때 열반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없기 때문에 원인이 없다.
[외도] 번뇌 없음의 결과이네. [수투로]
이 열반은 번뇌 없음이 아니다. 또한 번뇌 없음의 원인도 아니다. 이것은 번뇌 없음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열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불자] 계박하는 것과 계박되는 것과 방편이 다르다면 이것은 쓸모가 없네. [수투로]
계박하는 것이란 번뇌와 업(業)을 말하고,
계박되는 것이란 중생을 말하고,
방편이란 8성도(聖道)를 말한다.
도(道)에 의해서 계박을 해탈하기 때문에 중생은 해탈을 얻는다.
만약 열반이 존재하는데 이 세 법이 다르다면 쓸모가 없다.
또 번뇌가 없다면 이것을 ‘존재하지 않음[無所有]’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음은 원인이 되지 않는다.
[외도] 열반이 존재하네. 이것은 없음[無]과 같네. [수투로]
만약 계박하는 것과 계박되는 것과 방편의 셋에 처소가 없다면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불자] 두려운 곳이 어떻게 물들 수 있는가?. [수투로]
무상의 과환(過患)이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자는 유위법을 버려서 탐욕을 벗어난다.
만약 열반에 근(根)들과 탐욕하는 것이 없다면 열반은 유위법보다 심대히 두려운 곳[畏處]이다.
그대는 왜 마음이 물드는가?
열반이란 모든 집착을 버리고 모든 그릇된 기억과 표상을 소멸시키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존재[物]도 아니고 비존재[非物]도 아닌 것을 말한다.
등불이 소멸하는 것과 같기에 논설(論說)할 수가 없다.
[외도] 누가 열반을 얻는가? [수투로]
이 열반은 어떤 사람이 얻는가?
[불자] 열반을 얻는 일이 없네. [수투로]
나는 앞에서
“등불이 소멸한다면 동쪽으로 가는 것도 동ㆍ서ㆍ남ㆍ북ㆍ4유(維)ㆍ상하(上下)로 가는 것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열반도 이와 같다”고 말했다.
모든 언설이 소멸해서 논설할 수가 없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음’이다.
누가 얻는 자이겠는가?
설사 열반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얻는 자가 없다.
만약 ‘나[神]’가 열반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상주하고 편재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지 못할 것이다.
5온(蘊)도 열반을 얻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5온은 무상하기 때문이고 5온은 생멸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데 열반이 누구에게 속하겠는가? 만약 열반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세간의 언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