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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 제5권
[마원을 항복받는 것](1)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해의여, 만약 보살이 함이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것을 널리 섭수(攝受)한다면 그 보살은 일체의 마원을 항복 받을 것이며,
또 보살이 일체의 그 반연되는 모습에 대해 함이 없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 보살은 곧 일체의 마원을 항복 받으리라.
해의는 알아 두라.
마원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그 넷이란,
첫째가 온(蘊)의 마원이고,
둘째가 번뇌의 마원이고
셋째가 죽음의 마원이고
넷째가 자재천(自在天)의 마원이라.
이 마원을 항복 받기 위해서는 환법(幻法)을 관찰한다면 온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공법(空法)에 편히 머문다면 번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생멸없는 법을 관찰한다면 죽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의지하는 그 일체의 의식의 법을 한꺼번에 지식(止息)시켜 열반의 도에 나아간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다.
또 괴로움〔苦〕를 안다면 온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는다면 번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멸제(滅諦)를 증득한다면 죽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도제(道諦)를 닦는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다.
다시 모든 지어감의 괴로움을 관찰한다면 온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제행(諸行)이 덧없음[無常]을 관찰한다면 번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모든 법〔諸法〕이 무아(無我)임을 관찰한다면 죽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관찰한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다.
다시 보살이 마음속의 더러운 번뇌를 끊고서 큰 보리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면 온의 마원을 섭복(攝伏)할 수 있고,
그 몸을 아끼거나 집착하지 않고서 보시를 행하여 일체의 지혜에 회향한다면 번뇌의 마원을 섭복할 수 있으리라.
재부(財富)가 덧없으므로 나와 다른 사람이 공동 사용해야 할 것을 생각하여 진실히 보시하고, 보시하고 나서 일체의 지혜에 회향한다면 죽음의 마원을 섭복할 수 있고,
일체 중생들에게 대비심을 버리지 않는 동시 해탈의 지혜로써 그 중생들을 널리 포섭하되 보시를 행하고서 일체의 지혜에 회향한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으리라.”
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 제6권
[마원을 항복받는 것](2)
“다시 해의여, 보살이 그 어떠한 갈래에 태어나더라도 희망하는 생각 없이 계행을 잘 수호한다면 온(蘊)의 마원(魔怨)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어디에도 나라는 견해를 의지하는 일 없이 계행을 잘 수호한다면 번뇌의 마원을 항복받을 수 있고,
그 청정한 계행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에 벗어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계행을 수호한다면 죽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이러한 생각으로써 파계하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청정한 계행에 편히 머물게 하기 위해 스스로 계행을 수호한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다.
다시 보살이 자신에게 아무런 소득 없이 인욕을 행한다면 온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중생들에게 아무런 소득 없이 인욕을 수행한다면 번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으며,
생사에 아무런 소득 없이 인욕을 수행한다면 죽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열반에 아무런 소득 없이 인욕을 수행한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다.
다시 보살이 몸이 고요함으로써 정진을 일으킨다면 온의 마원을 초월할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함으로써 정진을 일으킨다면 번뇌의 마원을 초월할 수 있고,
생멸 없음을 요달함으로써 정진을 일으킨다면 죽음의 마원을 초월할 수 있고,
언제나 생사 속에서라도 게으름 없이 중생을 성숙시키고 바른 법을 섭수하기 위해 정진을 일으킨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초월할 수 있다.
다시 보살이 그 어떠한 온에도 의지함이 없이 선정을 닦는다면 온의 마원을 초월할 수 있고,
어떠한 경계에도 의지함이 없이 선정을 닦는다면 번뇌의 마원을 초월할 수 있고,
어떠한 처소에도 의지함이 없이 선정을 닦는다면 죽음의 마원을 초월할 수 있고
어떠한 선정에서라도 그 낱낱의 생각을 다 보리에 회향한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초월할 수 있다.
다시 보살이 그 바른 지혜로써 모든 온을 잘 안다면 온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모든 경계를 잘 안다면 번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으며, 모든 느낌을 잘 안다면 죽음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고,
인연 생기의 법을 잘 알면서도 그 실제(實際)에 취증(取證)하지 않는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항복 받을 수 있다.
다시 보살이 모든 법이 공함을 깨닫는다면 저 온의 마원이 침해할 기회를 노릴 수 없고,
모든 법이 상(相) 없음을 믿어 수순한다면 저 번뇌의 마원이 침해할 기회를 노릴 수 없으며,
모든 법이 원(願)없음을 안다면 저 죽음의 마원이 침해할 기회를 노릴 수 없고,
모든 법이 조작할 바가 없고 의혹할 바도 없음을 알지만 더욱 그 수행함 있어서 만족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저 자재천의 마원이 침해할 기회를 노릴 수 없다.
다시 보살이 그 몸〔身〕에 수순하여 신념처(身念處)를 닦되 몸에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온(蘊)의 마원을 깨뜨릴 수 있고,
그 느낌〔受〕에 수순하여 수념처(受念處)을 닦되 느낌에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번뇌의 마원을 깨뜨릴 수 있으며,
그 마음〔心〕에 수순하여 심념처(心念處)을 닦되 마음에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죽음의 마원을 깨뜨릴 수 있고,
그 법(法)에 수순하여 법념처(法念處)을 닦되 법에 애착을 일으키지 않고 또 보리심에 흔들림이 없다면 자재천의 마원을 깨드릴 수 있으리라.
다시 해의여, 너는 이제 알아 두라.
이러한 모든 마업(魔業)이 다 나를 말미암아 근본이 되나니,
그러므로 보살이 그 근본이 되는 나에 집착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곧 나에 나가 없어지고 그 중에 어떠한 법도 생길 수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곧 현량[現量:비판과 분별을 떠나서 외계(外界)의 사상(事象)을 그대로 깨달아 아는 것]의 지혜로 마업을 알게 되리라.
[대승의 갑옷을 입는다면]
그리고 보살이 또 저 지혜 없는 중생을 위해 대승의 갑옷[鎧]을 입는다면
그 보살로서는 응당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다 의지하지 않기 위해
그 갑옷을 입되 곧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만 이 견고한 갑옷을 파괴되지 않게 할까?
또는, 내가 입고 있는 이 갑옷을 믿기 때문에 도로 내가 파괴되거나 중생을 파괴하지나 않을까?
혹은 수자(壽者)와 사부(士夫), 양육자(養育者)와 그 밖의 유정들을 파괴하지나 않을까?
혹은, 나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중생이라든가 수자라든가 유정이라든가 하는 그러한 견해에 의지하지나 않는가?
이러한 집착이 있기 때문에 나 이제 그 모든 의지함을 다 버리겠노라’고.
그 어떤 것에 의지하는가?
이른바 온(蘊)을 말미암아 모든 대경의 전도됨에 의지함이니,
전도됨이란 바로 중생들이 그 무상(無常)을 상(常)으로 생각하고 괴로움[苦]을 즐거움[樂]으로 생각하고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생각하며, 청정하지 않음을 청정하다고 생각함이라.
그러므로 보살이 그 중생들의 생각을 올바르게 알아야만 응하는 대로 그 법의 요체를 말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생각을 올바르게 앎이란 어떤 것인가?
받는 것이 없으므로 가질 것이 없음을 아는 그것이 바로 올바르게 앎이니,
왜냐 하면 피차가 받지 않으므로 가질 수 없고 가지지 않으므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
이렇게 안다면 곧 어리석음과 어두움을 벗어나 그 중생들의 생각을 올바르게 알 수 있으리라.”
해의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그 어떤 생각을 알아야 합니까?
과거의 생각이옵니까, 미래의 생각이옵니까. 혹은 현재의 생각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ㆍ현재도 아니노라.
왜냐 하면 과거의 생각은 이미 다 되었고 미래의 생각은 아직 이르지 않았고 현재의 생각은 머묾이 없기 때문이라.
이 때문에 알아 두라.
3세에 걸쳐 그 생각은 아무런 소득이 없나니, 이렇게 알아야만 그 생각을 올바르게 알 수 있고
또 생각을 올바르게 알므로 말미암아 보살의 일체 그 소행의 행을 청정케 하는가 하면
다시 일체 중생의 갖가지 행을 분명히 알게 되느니라.
해의여, 만약에 보살이 보살의 행을 청정케 하지 못한다면 중생의 행을 알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중생의 모든 행을 알려면 먼저 보살의 행을 청정케 해야 하리니,
이와 같이 중생의 행을 분명히 앎으로써 곧 중생을 위해 여실하게 응하여 설법할 수 있고
또 중생들의 움직이는 마음에 따라 그 나타내 보여야 할 것을 모두 알게 되느니라.
해의는 알아 두라. 어떤 중생은 탐내는 뜻이 있는 가운데 성내는 일을 행하기도 하고
성내는 뜻이 있는 가운데 탐내는 일을 행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뜻이 있는 가운데 성내는 일을 행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뜻이 있는 가운데 탐내는 일을 행하기도 하고,
탐내는 뜻이 있는 가운데 어리석은 일을 행하기도 한다.
또 성냄과 어리석은 뜻이 있는 가운데 탐내는 일을 행하기도 하고,
어리석음과 탐내는 뜻이 있는 가운데 성내는 일을 행하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겉으론 탐내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성내는 뜻을 갖기도 하고,
겉으론 성내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탐내는 뜻을 갖기도 하고,
겉으론 성내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어리석은 뜻을 갖기도 하고,
겉으론 어리석은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성내는 뜻을 갖기도 하고,
겉으론 어리석은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탐내는 뜻을 갖기도 하고,
겉으론 탐내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어리석은 뜻을 갖기도 한다.
또 겉으론 탐냄과 성내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어리석은 뜻을 갖기도 하고,
겉으론 성냄과 어리석은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탐내는 뜻을 갖기도 하고,
겉으론 어리석음과 탐내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속으론 성내는 뜻을 갖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먼저 탐내고 뒤에 성내거나 먼저 성내고서 뒤에 탐내기도 하고,
먼저 성내고서 뒤에 어리석거나 먼저 어리석고서 뒤에 성내기도 하고,
먼저 어리석고서 뒤에 탐내거나 먼저 탐내고서 뒤에 어리석기도 하고,
먼저 탐내고 또 성내고서 뒤에 어리석거나 먼저 성내고 또 어리석고서 뒤에 탐내기도 하고,
먼저 어리석고 또 탐내고서 뒤에 성내거나 먼저 어리석고 또 성내고서 뒤에 탐내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물질에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소리에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소리에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물질에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냄새에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맛에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맛에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냄새에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접촉에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법에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법에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접촉에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물질을 떠났기 때문에 조복되기는 하여도 소리를 떠나지 못했거나 소리를 떠났기 때문에 조복되기는 하여도 물질을 떠나지 못했기도 하고,
냄새를 떠났기 때문에 조복되기는 하여도 맛을 떠나지 못했거나 맛을 떠났기 때문에 조복되기는 하여도 냄새를 떠나지 못했기도 하고,
접촉을 떠났기 때문에 조복되기는 하여도 법을 떠나지 못했거나 법을 떠났기 때문에 조복되기는 하여도 접촉을 떠나지 못했기도 하다.
또 어떤 중생은 몸을 떠남으로써 조복되기는 하여도 마음을 떠나지 못했거나 마음을 떠남으로써 조복되기는 하여도 몸을 떠나지 못했기도 하고,
몸을 떠나고 마음을 떠남으로써 조복되기도 하려니와 몸을 떠나지 않고 마음을 떠나지 않고서 조복되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무상의 소리를 인하여 조복되기는 하여도 고(苦)ㆍ무아(無我)ㆍ적정(寂靜) 따위의 소리로 인하여 조복되지 않고,
고의 소리를 인하여 조복되기는 하여도 무상ㆍ무아ㆍ적정의 소리로 인하여 조복되지 않고,
무아의 소리로 인하여 조복되기는 하여도 무상ㆍ고ㆍ적정의 소리로 인하여 조복되지 않고,
적정의 소리를 인하여 조복되기는 하여도 무상ㆍ고ㆍ무아의 소리로 인하여 조복되지 않는다.
또 어떤 중생은 설법의 신변(神變)을 인하여 조복되기는 하여도 교계(敎誡)의 신변으로 인하여 조복되지 않고,
교계의 신변을 인하여 조복되기는 하여도 설법의 신변으로 인하여 조복되지 않고,
신통 경계의 신변을 인하여 조복되기는 하여도 설법과 교계의 신변으로 인하여 조복되지 않는다.
또 어떤 중생은 설법의 신변을 인하여 신심을 내기도 하고,
교계의 신변을 인하여 번뇌를 멀리하기도 하고, 신통 경계의 신변을 인하여 해탈하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영리한 근기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우둔한 근기로 해탈하거나 우둔한 근기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영리한 근기로 해탈하기도 하고,
우둔한 근기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우둔한 근기 그대로 해탈하거나 영리한 근기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영리한 근기 그대로 해탈하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인(因)을 말미암아 해탈할 뿐 연(緣)을 말미암아 해탈하지 않고
연을 말미암아 해탈할 뿐 인을 말미암아 해탈하지 않는가 하면
인과 연을 말미암아 해탈하기도 하고 인과 연을 말미암지 않고서 해탈하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바깥으로 과실(過失)을 관찰하지 않아도 안으로 과실을 관찰하기 때문에 해탈하기도 하고,
안으로 관찰하지 않아도 바깥으로 과실을 관찰하기 때문에 해탈하기도 하고,
안팎으로 모든 과실을 관찰하기 때문에 해탈하기도 하고,
안팎으로 모든 과실을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고(苦)를 수행하지 않고 낙(樂)을 수행함으로써 해탈을 증득하기도 하고,
낙을 수행하지 않고 고를 수행함으로써 해탈을 증득하기도 하고,
고와 낙을 모두 수행하거나 고와 낙을 다 수행하지 않고서 해탈을 증득하기도 한다.
또 어떤 중생은 경발(警發)하는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안지(安止)하는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항복하는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잘 포섭하는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착한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착하지 않은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성내는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한다.
3세의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인연 생기의 법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수순하는 행을 인하여 조복되기도 하고,
말없이 잠잠한 행을 인하여 해탈하기도 하고,
차별하는 행을 인하여 해탈하기도 하고,
4념처법(念處法)의 소리와 4정단(正斷)의 소리와 4신족(神足)의 소리와 5근(根)의 소리와 5력(力)의 소리와 7각지(覺支)의 소리와 8정도(正道)의 소리와 사마타(奢摩他)의 소리와 비발사나(毘鉢舍那)의 소리와 4성제(聖諦)의 소리를 인하여 해탈하기도 하느니라.
해의여, 이와 같이 중생들의 소행이 불가사의하고 중생들의 마음이 불가사의하고 중생들의 경계가 불가사의하므로
보살이 또한 그 불가사의한 지혜에 들어가야 하며,
그 지혜에 들고는 곧 일체 중생의 불가사의한 경계에 들어가야 하리라.
해의여,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주위의 사방에 두루 노끈으로 그물을 얽어 두고서 그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홀연히 그 그물 속에 들어갔다 하자.
그 그물을 잘 풀고 나오려면 그 사람이 훌륭한 주문[呪]을 외움으로써 주문의 힘으로 그물이 모두 풀림에 따라 그 사람이 마음대로 아무런 장애 없이 나오게 되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훌륭한 방편을 갖춤으로써 일체 중생들의 마음에 두루 들어갈 수 있고,
또 들어가서는 곧 반야바라밀다의 밝은 주문의 힘으로써 일체 중생들의 그 얽매인 번뇌를 모두 끊을 수 있느니라.
그러나 보살이 그렇다 해서 부처님의 지혜를 증득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만 중생들을 위해 일체의 불사(佛事)를 일으켜 나타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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