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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4권
변본사품 ④
5.6. 대종과 소조, 극미 적집(積集)과 비적집 분별
이와 같이 유집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대종성(大種性)이고, 몇 가지가 소조성(所造性)인가?
또한 몇 가지가 적집될 수 있는 것[可積集]이고, 몇 가지가 적집되지 않는 것[非積集]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촉계 중에는 두 가지가 모두 있고
나머지 아홉 가지 색은 소조성이며
법계의 일부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열 가지 색은 적집될 수 있는 것이다.
1) 대종성(大種性)ㆍ소조성(所造性) 분별
논하여 말하겠다.
촉계는 두 가지와 통하니, 첫째는 대종(大種)이고, 둘째는 소조(所造)로서, 이 두 가지는 앞서 11촉으로 해석한 바와 같다.61)
(1)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이라는 상좌설 비판
그런데 배움이 부족한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촉처 중에는 소조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소조색은] 바로 온갖 대종이 배열된 형태[形色]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종이 금ㆍ은ㆍ파지가(頗胝迦, 수정을 말함)ㆍ보배ㆍ운모ㆍ금강석ㆍ파초ㆍ연 등의 온갖 화합취(和合聚) 중에서 차례로 배열되어 있을 때를 설하여 ‘미끄러운 촉[滑觸]’이라 하고, 이와 반대되는 화합취 중에 배열되어 있을 때를 설하여 ‘껄끄러운 촉[澁觸]’이라 하며, 그 밖의 경우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르니, [소조촉은] 모두 대종이 배열된 형태의 차별이다. 또한 안근(眼根)으로도 역시 그것(미끄러움이나 껄끄러움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안근이 대종의 형태나 양 등의 상(相)을 취함에 따라 역시 능히 미끄럽거나 껄끄러운 등의 물건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미끄러움 등은 대종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62)
그러나 이러한 설은 옳지 않으니, 성교(聖敎)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필추(苾芻)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촉’이란, 말하자면 외처(外處)로서 4대종과 4대종 소조(所造)이며, 유색(有色)ㆍ무견(無見)ㆍ유대(有對)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63) 그가 이와 같은 계경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결집(結集)에 포함된 것이라는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또한 다른 여러 계경에 위배되거나 그것을 손상시키는 것도 아니며, 이치상으로도 역시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소조촉이 실재한다는 사실의] 근거[量]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이 경은 결집에 포함된 것이 아니니, 전체적인 게송[總頌]과 어긋나기 때문으로, 예컨대 ‘『순별처경(順別處經)』을 제작하여 그것을 이품(異品)으로 설정하였다’고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자신들의 부파에서 주장하는 것과 어긋나는 일체의 성교와 계경을 버려야 할 것으로, 예컨대 ‘두 종류의 『공경(空經)』을 제작하여 그것을 이품으로 설정하였으니,64) 역시 전체적인 게송과 어긋나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즉 이와 같은 따위의 논의는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이 경은 성자가 설한 것이 아니니, 그 밖의 다른 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즉 법처를 무색(無色)이라는 말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65) 예컨대 사리자(舍利子)는 『증십경(增十經)』에서 오로지 ‘열 가지 색처가 있다’고만 설하고 있는 것이다.66)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이니, 이 경은 결집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무표색을 애호하는 대법(對法, 아비달마)의 여러 논사들이 이를 제작하여 『아급마(阿笈摩)』(즉 『아함경』) 중에 안치하였던 것이다”고 말한다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대법의 여러 논사들 역시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말하지 않겠는가?
“비유부(譬喩部)의 논사들은 무표색을 싫어하여 [‘열 가지 색처가 있다’는 말을] 제작하여 『증십경』 중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계속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고 부정하게 되면 결국은 일체의 계경을 허물어뜨리고 어지럽히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증십경』은 열 가지 종류의 ‘마땅히 두루 알아야 할 법[應遍知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만 ‘열 가지 색처가 있다’고 설한 것으로,67) 이 열 가지는 한결같이 고제(苦諦)에 포섭되기 때문이다.68) 즉 고제는 오로지 ‘마땅히 두루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열 가지에는] 어떠한 상위(相違)함도 없지만,69) 무표색은 유루이자 무루이기 때문에 의처(意處)와 마찬가지로 역시 또한 ‘마땅히 닦아야 하는 것(즉 도제)’이다.70) 그렇기 때문에 『증십경』 중에서는 오로지 한결같이 ‘마땅히 두루 알아야 할 법’에 대해서만 설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역시 ‘마땅히 영원히 끊어야 하는 것(즉 집제)’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제(諦)를 설정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리자는 그 경(『증십경』) 가운데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법처(즉 무표색)를 포함시키지 않고 말한 것이다. 즉 그 경 중에서는 다시 열 가지 종류의 ‘마땅히 영원히 끊어야 할 법[應永斷法]’을 설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다섯 가지의 내적이고 외적인 온갖 개(蓋)에 따르는 법이 바로 그것으로,71) 그 밖에 영원히 끊어야 할 또 다른 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72) 그렇기 때문에 이 경(‘촉’을 4대종과 4대소조로 규정한 경)이 그 밖의 다른 경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좌(上座)는 촉처 중에 소조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는 결정코 이러한 『순별처경(順別處經)』에 위배되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지자(智者)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소조촉은] 바로 온갖 대종이 배열된 형태의 차별이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논거가 되지 못한다.73)
어떻게 그러함을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인가?
온갖 대종의 형태나 양의 차별을 일컬어 ‘미끄러움’ 등이라고 한다면 대종과는 다른 미끄러움 등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온갖 대종의 안포(安布, 배열) 차별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온갖 대종으로, 온갖 대종은 안근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안근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말하자면 색깔[顯色]과 형태[形色]인데, 어떻게 “[소조촉은] 바로 온갖 대종이 배열된 형태의 차별이기 때문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74)
어둠 속에서는 신근도 역시 형태와 양의 차별을 능히 취할 수 있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대종은 마땅히 두 근에 의해 파악된다고 해야 할 것으로, 형태와 양이 바로 대종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두 번째 논거도 비판하였으니, “안근도 역시 능히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안근이 대종의 형태나 양 등의 상(相)을 취함에 따라 역시 능히 미끄러움이나 껄끄러움 등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만약 안근이 대종의 형태나 양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이미 형태와 양은 대종과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 것으로, 안근이 능히 대종을 취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안근은 능히 색상을 취하며, 대종의 형태와 양은 이에 따라 추리되어 알려지는 것[比知]이라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어떻게 미끄러움 등이 대종과 다르다는 사실을 부정할 것인가? 색상을 본 것에 근거하여 미끄러움 등을 추리하여 알고서 그것이 바로 대종이라고 말하니, 어떠한 근거에서 미끄러움 따위가 대종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는 다만 거짓된 말일 뿐 어떠한 진실된 뜻도 없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견고성은 바로 그 밖의 다른 세 대종이 안포 차별된 것으로, 미끄러움이나 껄끄러움 등과 같다고 말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 밖의 다른 성질(습윤성 등)도 역시 ‘그 밖의 다른 세 대종이 안포 차별된 것을 바로 견고성이라 이름한다’는 식으로 헤아려 세 대종과는 달리 인식될 수 있는 견고성이 별도로 존재하는 일은 없으니, [그것을 증명할 만한] 근거가 달리 없기 때문에 마땅히 별도로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75) 또한 향을 냄새맡고도 쓰다거나 시다는 인식이 생겨나니, 쓰거나 신맛의 본질은 마땅히 향과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미끄러움 등의 특성은 온갖 대종과는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대종과는 다른 별도의 자성을 가져야 한다. 이를테면 미끄러운 성질이 바로 견고성은 아니니, 견고한 모든 곳이 다 미끄러움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대(地大)는 바로 견고성이지만, 일찍이 미끄러운 성질을 떠난 적이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견고성도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76) 또한 역시 미끄러운 성질이 바로 습윤성(즉 水大의 자성)은 아니니, 축축한 모든 곳이 다 미끄러움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미끄러운 성질이 바로 온난성(즉 火大의 자성)은 아니니, 따뜻한 모든 곳이 다 미끄러움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미끄러운 성질이 바로 운동성(즉 風大의 자성)은 아니니, 숨[息] 등이 존재하는 곳에서 미끄러움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알아야 할 것이니, 미끄러움이 대종은 아니다.
그렇다고 역시 또한 [미끄러움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이를테면 실유의 법은 바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며, 능히 [인식의] 조건이 되어 영상(影像, 이미지)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미끄러움 등이] 오로지 [4대종의] 안포 차별로서만 존재할 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안포 차별은 반드시 근거[所依]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러한 근거 자체가 바로 미끄러움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럴 경우] 마땅히 오로지 안포 차별만이 인식되고, 여기에 미끄러움은 역시 요별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계경 중에서도 이 같은 미끄러움이 존재한다고 방편으로 설하고 있으니,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여래의 피부는 지극히 섬세하고 매끄러우니
어떠한 먼지 티끌도 몸에 달라붙지 않는다.
또한 미끄러움이 경에서 설해지고 있든 설해지고 있지 않든 일찍이 그것의 존재를 부정한 경은 없기 때문에, 또한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미끄러움이 실재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미끄러움이 4대종과는 달리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마땅히 가유(假有)이지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신식(身識)은 마땅히 그것을 알지 못해야 할 것이니, 신식은 오로지 승의의 경계만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77)
또한 [미끄러움이 만약 가유라면] 분별을 떠날 경우 미끄러움의 지각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78) 그러나 분별을 떠나서도 온갖 대종 하나하나에 대한 개별적인 지각은 모두 존재하듯이―즉 [앞에서] 신식은 실유[實物]의 온갖 대종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뿐 가설적 존재[假法]를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는다고 설하였다.―미끄러움도 역시 그러하니, 이미 신식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는 바로 가유이지 실유가 아니다’고는 설할 수 없으며, 또한 각각의 대종 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종과는 다른 미끄러움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같은 도리에 따라 4대종과는 다른 껄끄러움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모두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소조촉의 세부적인] 차별에 대해 마땅히 다시 나타내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79)
저 상좌(上座)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벼움이나 무거움으로 일컬어지는 별도의 소조촉은 존재하지 않으니, 온갖 대종이 적거나 혹은 많은 것을 ‘가벼움’ 혹은 ‘무거움’이라고 설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벼움과 무거움은 서로에 근거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실유의 실체가 아니니, 이를테면 어떤 사물은 이것에 근거하여 ‘가볍다’고 말하고, 저것에 근거하여 ‘무겁다’고 말하는 것이다.80) 그렇지만 견고성 등(즉 4대종)은 서로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풍계(風界)에 대해서도 가벼움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4대종과는 다른 별도의 소조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가벼움이란 바로 풍계로서, 본론(本論)에서 “무엇을 풍계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가벼움 등으로 운동성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81) 세존께서도 역시 설하시기를, “온갖 가벼움 등의 운동성을 내외의 풍계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옳지 않다. 앞서 대종과 이것(가벼움)은 서로 다르다고 설하였으니, 이것은 [풍계의]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다.82) 혹은 경론(經論)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만약 가벼움이 바로 풍계라고 한다면 마땅히 어떤 대종을 ‘무거운 것’이라고 설해야 할 것인가? 만약 이들의 종의에서는 어떤 대종이 증가하여 생겨나는 것[增生]을 무거움이라고 하므로 무거움이란 바로 이러한 대종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무거움과 지(地)ㆍ수(水)의 상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83)
또한 [그럴 경우 가벼움이나 무거움 등은] 일체의 화합취(和合聚) 중에 모두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마땅히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한다. 만약 “[대종의] 적고 많음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이 없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무거움이 바로 견고성이나 습윤성은 아닌 것이다. 또한 ‘[온갖 대종의] 화합을 가벼움이나 무거움이라 한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신식은 마땅히 그것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수도 없을 것이다.84) 또한 ‘다수의 극미 대종의 화합취를 무거움이라 한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일체의 화합취 중에는 모두 무거움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무거움과 가벼움을 차별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대종 화집(和集)의 차별을 능히 인연으로 삼아 이와는 다른 별도의 무거움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같은 허물이 없을 것이니, 이는 세간에서 바로 관찰되는 바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벼움과 무거움은 서로에 근거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다”고 말하였지만, 이는 좋은 학설[善說]이 아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인과 관계와 같은 것으로,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즉 어떤 존재를 이것에 근거하여 원인이라 이름하였으면 이것에 근거하여 다시 결과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그것에 근거하여 결과라고 이름하였으면 그것에 근거하여 다시 원인이라고 이름하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존재를 이것에 근거하여 가벼움이라 이름하였으면 이것에 근거하여 다시 무거움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그것에 근거하여 무거움이라고 이름하였으면 그것에 근거하여 다시 가벼움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85) 원인과 결과가 이미 [개별적 존재로서] 실유인데, 이것이 어찌 가유이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드러난 형태[能詮]상으로는 관계[待]가 일정하지 않지만, 드러내어지는 것[所詮] 자체는 바뀌지 않는 것이다.86)
또한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즉 저편의 존재에 대해 피안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지만, [그것을] 차안이라 설하여도 그 자체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혹은 이편의 존재에 대해 차안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지만, [그것을] 피안이라 설하여도 그 자체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87) 즉 어떤 존재가 상속하여 일어날 때 이편과 저편에 근거하여 피안 차안이라 이름한 것으로,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결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검은색과 흰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즉 어떤 존재를 이것에 근거하여 검은 것이라 이름하고, 저것에 근거하여 흰 것이라 이름하지만, 현색의 차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근거한다[相待]’는 사실은 실유가 아니라는 주장의 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마치 항아리나 숲 등의 경우처럼 다수의 부분[多]에 근거하여 하나의 존재[一性]를 전체적으로 설한 것은 바로 가유이지 실유가 아니다. 이 경우(가벼움과 무거움) 역시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지 마땅히 그 근거를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바야흐로 [올바른] 논거가 아니니,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견고성 등(즉 4대종)은 서로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것(즉 소조색)은 서로에 근거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다”고 말한다면, 견고성 등의 언설도 역시 서로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이니, 견고하지 않은 존재에 근거하여 견고성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고성은 [서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 일찍이 서로에 근거하여 견고성을 습윤성이라고 설한 일이 없으니, [대종과 소조촉의 경우는]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니, 그것(견고성과 비견고성)의 근거가 되는 원인은 한결같이 결정되어 있으며, 그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밖의 또 다른 존재에 근거하여 견고성을 습윤성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그것의] 근거가 되는 별도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견고하지 않은 존재에 근거하여 이것을 견고성이라고 설하였을지라도 일찍이 그것(견고성)에 근거하여 ‘견고하지 않은 존재’라고 말한 일은 없다.88)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양자(대종과 소조촉)는] 그 뜻이 서로 유사한 것이다. [따라서 견고성은 서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소조촉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가벼운 것에 대해 혹 어느 때 ‘무겁다’고 말하였을지라도 이에 따라 그러한 가벼움 자체를 버렸다고 설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인연으로 말미암아 다르게 표현[能詮]한 것일 뿐 그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니,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근거한다[相待]’는 사실은 실유가 아니라는 주장의 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온갖 견고한 물건도 역시 서로에 근거하여 다른 품류가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에는 ‘견고하다[堅]’고 말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더욱 견고하다[堅勝]’고 말하며, 혹 어떤 경우에는 ‘매우 견고하다[堅極]’고 말한다. 여기서 ‘견고하다’는 [‘매우 견고하다’에 비하면] ‘견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도리(내용)는 이미 같은 것이었다. [이 말에] 그대는 마땅히 기뻐하겠지만 능히 기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니, 가벼움과 무거움의 두 가지도 견고함과 견고하지 않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며,89) 또한 가벼움과 무거움은 온갖 대종과는 다른 것으로, 바야흐로 실유의 의미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로에 근거하는 것은 [그 자성이] 결정된 것이 아니어서 동일한 존재를 성취하게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90) 이를테면 검은 것과 흰 것이 비록 서로에 근거하는 것일지라도 그 품류가 동일하지 않으며 단일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검은 것과 흰 것이 비록 그 품류가 다르다 할지라도 일찍이 어떤 이도 흰 것을 검은 것이라 하고,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설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지금 바로 세간을 관찰해 보더라도 이렇게 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명칭은 비록 결정된 것이 아니어서 [바뀔 수 있지만] 그 본질은 바뀌지 않으니, 이미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따라서 [가벼움과 무거움] 자체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대(상좌)가 미약한 따뜻함[微煖]을 ‘차가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미약한 따뜻함은 이것에 근거하여서는 차가움이라 하고, 저것에 근거하여서는 따뜻함이라 한다. 이렇듯 명칭은 비록 결정적이지 않을지라도 [따뜻함이나 차가움] 자체는 실유이니, 이것(가벼움과 무거움)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온갖 색취(色聚) 중에 가벼움의 극미가 많고 무거움의 극미가 적을 경우, 이러한 색취를 ‘가벼움’이라 이름하고, 이와 반대되는 그러한 색취를 ‘무거움’이라 이름한다. 이렇듯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두 가지 존재가 드러나는 색취는 동일하지만 그 자체의 본질은 다르다. 그 이치가 이토록 분명 그러한데, 어떠한 까닭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경론(經論)에서] 풍계(風界)에 대해 가벼움이라 설하였기 때문에 가벼움이란 바로 풍계이다”고 말하는 것,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대종을 분별하면서 이미 이러한 뜻에 대해 해석하였다.91) 즉 견고성 등의 세 대종에 비해 운동성(즉 풍계)은 가장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벼움’이라는 결과를 언급하여 그것으로써 풍계라는 원인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비록 4대종은 모두 ‘가벼움’의 원인이 될지라도 보다 강성한 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그같이 설한 것으로, 화계(火界)도 [가벼움에 있어] 보다 강성한 것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92)
또한 가벼움과 운동성은 서로에 따르는 것이며,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경(經)이나 논(論)에서 “[풍계란] 가벼움 등의 운동성이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오로지 말한 대로의 뜻만을 취하는 자라면 그 경에서 “머리카락ㆍ터럭ㆍ손톱 등을 내적인 지계(地界)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다고 하겠지만, 어찌 머리카락과 터럭 따위만이 오로지 지계일 것인가?93) 그렇기 때문에 그 경에서의 말에는 별도의 뜻이 있으니, 마땅히 그 같은 말에만 집착하여 가벼움의 소조색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아급마(阿笈摩)』에도 이와 같은 게송이 있다.
견고하고 무거운 것이 몸 가운데 떨어지니
마치 무거운 배가 바다에 가라앉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무거움은 견고성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실유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가벼움은 무거움의 부재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옳지 않으니, 허공에는 이미 무거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가벼움이 존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땔감 등에는 무거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벼움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가벼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물 속에 던져 넣을 경우 마땅히 뜨지 않아야 할 것이며, 존재[有]와 비존재[非有]가 마땅히 함께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94) 또한 역시 광대(廣大)하기 때문에 뜨는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될 것이니, 광대함이란 형태로서 촉(觸)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럴 경우 광대한 돌 따위도 역시 마땅히 떠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가벼움[輕性]은 바로 경안(輕安)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자체 비존재가 아니다.95) 즉 선정을 닦는 이는 경안으로 말미암아 몸이 가뿐한 감촉[輕觸]을 느끼게 되니, 마땅히 비존재를 경안의 결과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오로지 몸이 무거운 감촉[重觸,무기력함, 즉 혼침]을 떠나게 될 때 그러한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가벼움은 바로 몸을 장양(長養)시키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존재(즉 무거움의 비존재) 역시 능히 몸을 장양시킬 수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그럴 경우] 경안을 떠나서도 몸은 장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경안이란 능히 무거움의 감촉을 제거하는 것이며, 오로지 대종이 낳아지는 것을 장양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경안이 다른 대종(즉 무거움의 대종)을 멸하고 그 밖의 다른 대종을 낳는 것을 바로 ‘장양’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다.
“어찌 무거움을 멸한다고 하는 것인가? 무거움은 가벼움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할 경우, 이는 상좌의 주장과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치에는 맞지 않으니, 가벼움과 무거움의 두 상(相)은 다 어떠한 대종 중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가벼움이 온갖 대종의 일부를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경안은 현재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일부의 대종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경안과 온갖 대종은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면 일부의 대종 역시 마땅히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 다수의 대종을 장애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인가? 따라서 가벼움을 경안의 결과라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가벼움은 무거움의 부재를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니, 품류가 다르기 때문으로 무거움의 경우와 같다.
또한 『아급마(阿笈摩)』에서도 가벼움과 무거움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를테면 거기서 설하기를, “예컨대 온갖 쇳덩어리나 쇳조각이 혹 어느 때 불 속에서 지극히 뜨거워지면 그 때는 지극히 무르고, 지극히 가벼우며, 지극히 부드럽고 고른 작용을 갖지만, 이와 반대되는 경우 지극히 견고하고, 지극히 무거우며, 지극히 날카로운 작용을 갖는 것처럼 우리의 신체도 역시 그러하다. 만약 경안이 존재하면 가벼움(경쾌함)이 있고, 유연함의 작용을 지니게 되어 닦고 끊음[修斷]을 감당할 수 있지만, 이와 반대되는 경우라면 무거움이 있고, 유연함의 작용이 없어 닦고 끊음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5권
변본사품 ⑤
(1)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이라는 상좌설 비판(續)
다시 상좌(上座)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1)
“화계(火界)가 적거나 혹은 강성하지 않은 것을 일컬어 ‘차가움’이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거기에 해[日]가 없든지 혹은 해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면 바로 차가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극히 큰 뜨거움이 일어날 때에는 별도로 존재하는 일부의 소조촉이 일어나는 일 없이 오로지 화대(火大)가 증대한 것일 뿐이라고 다 같이 인정하고 있듯이, 뜨거움이 감소할 때도 역시 그러하여 별도로 존재하는 일부의 소조촉이 생겨나는 일 없이 오로지 화대가 감소하는 것일 뿐이라고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2) 만약 차가움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따뜻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음[非煖非冷]’이라는 소조촉도 별도로 존재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차가움’이라는 소조촉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
화계가 적거나 혹은 강성하지 않은 것을 일컬어 ‘차가움’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관찰해 보더라도 차가운 감촉에 의해 손상되고 핍박받는 자는 화계가 증가하게 되면 능히 유익해지기 때문이다. 손상의 원인(즉 차가움)이 증대되면 될수록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니,3) 그 어떤 지자(智者)가 이와 같이 주장할 것인가?
“적은 불(즉 차가움)에 손상을 입었기에 큰 불(즉 따뜻함)에 뛰어들리라.”
만약 그가 결핍된 화계(火界)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었다고 말한다면, 이치는 필시 그렇지 않을 것이니, 결정코 그 밖의 또 다른 원인(즉 차가움)이 있어 능히 손해를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화계가 적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차가움이 증대되어 능히 손해를 끼치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때 손해는] 화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좌의 주장에 따라 차가움의 이익에 준하여 설하면 이것도 적은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으니, 이익되는 것(즉 따뜻함)은 이러한 원인이 증가하면 할수록 더욱더 이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4) 그렇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가 설한 바에 따르면, ‘뜨거움(화계)이 점차 감소할 때 [차가움이라는] 소조촉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화계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지금 바로 관찰하더라도 두 가지 존재는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서 어떤 하나의 존재가 증가할 때 다른 존재는 감소하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능히 번뇌를 끊는 도[能斷道]와 끊어지는 번뇌[所斷惑]의 관계와 같다. 즉 [그가 설한 바는] 도가 증가할 때에도 별도의 번뇌가 일어나는 일이 없지 않으며, 도에서 물러나는 상태에서도 별도의 번뇌가 생겨나는 일이 없다는 말에 견줄 수 있는 것이다.5)
또한 차가움이 생겨날 때 [대종의] 화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차가움은 수계(水界)와 풍계(風界)가 증대한 색취 중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화계에 의한 것이 아니니, 마땅히 [차가움을 논의하면서] 화계의 증대에 대해 논란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화계(火界)가 적은 것을 차가움이라 한다”고 주장할 경우, ‘눈 더미 중에는 화계의 극미[火微]가 지극히 적다’고 해야지, ‘여기에는 차가움의 극미[冷微]가 지극히 많다’고 해서는 안 된다. 즉 지자(智者)라면 마땅히 ‘그러그러하게 화계가 점점 적어지고, 이러이러하게 화계가 점차 많아졌다’는 사실이 이치에 맞는 논의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그(상좌)는 차가움과 화계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6) 금이 적다고 하여 금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대종과는 다른 별도의 실체[別法]가 존재하며, 화계가 감소함에 따라 그 같은 실체가 증대하니, 이러한 소조촉을 일컬어 ‘차가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러한 종의를 주장하고 있다.
“어떤 대종(즉 水大와 風大)이 증가할 때 차가움의 감촉이 생겨나니, 차가움의 감촉은 바로 이러한 대종이다.”7)
그러나 이는 이치상 역시 옳지 않으니, 차가움과 수ㆍ풍의 특성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두 가지 존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자체 마땅히 가유(假有)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신식의 소연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지만, 차가움과 따뜻함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無別體]이 아니기 때문에 [신식에 의해 요별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차가움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이치로서도 역시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차가움 등에 관한 하등의 품류로서, 분위(分位, 상태)의 차별을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차가움 등은 오로지 따뜻함의 부재(비존재)를 본질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옳지 않으니, 품류가 다르기 때문으로, 따뜻함 등이 그러한 것과 같다.8) 즉 비존재[無法]에 [차별적인] 다른 품류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혹은 마땅히 지계 등도 비존재를 본질로 삼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오로지 수계 등의 부재를 지계 등이라 이름한다’고도 역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차가움의 감촉은 바로 소조색이다’는 사실을 논파하는 논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차가움은 능히 지각을 낳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따뜻함의 부재를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니], 화계 등이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 즉 따뜻함이 부재한다면 [차가움의 지각을 낳는] 유색취에는 화계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존재[有]와 비존재[非有]가 함께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9) 또한 그럴 경우 온갖 색취 중에는 반드시 화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차가움의 촉은 필경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온갖 색취 중에서는 차가움도 지각되며,] 따라서 화계를 떠나 차가움의 촉이 별도로 존재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온갖 차가움의 촉은 그 자체 실유이니, 형상이 분명하고 바로 지각될 수 있기 때문으로, 마치 따뜻함 등이 그러한 것과 같다. 또한 계경에서 “따뜻함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필시 마땅히 실체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나는 차가움과 따뜻함 모두에 대해 능히 참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차가움과 따뜻함이 골고루 적당하였기에 능히 성숙하여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니, 그 때 지극히 차갑거나 지극히 뜨겁지 않았다. 만약 지극히 차가웠거나 지극히 뜨거웠다면 능히 도업을 닦을 수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차가움의 소조색이 실유라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상좌(上座)는 말하기를, “허기짐과 목마름의 두 종류는 소조색이 아니니, 희구성(希求性)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이 두 가지는 원인에 대해 결과의 명칭을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10) 즉 촉의 차별이 그의 소의신을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먹기를 바라고 마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는 바로 허기짐(먹기를 바라는 것)과 목마름(마시기를 바라는 것)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허기짐’과 ‘목마름’이라 이름하였다. 이는 마치 경안(輕安)을 설하여 육신의 경쾌함[身輕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경안(즉 경쾌 안적하게 하는 의식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경안’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같은 원인은 마땅히 따뜻함(즉 火界)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화계의 따뜻함이 능히 성숙시키고 능히 소화시킴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기를 바라는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먹고 마시기를 바라는 두 가지 욕망(즉 허기짐과 목마름)은 마땅히 소조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화계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계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욕망의 원인은 아니니, 그럴 경우 모든 때에 두 가지 욕망이 생겨나야 하기 때문이다.11) 그러나 두 가지 욕망을 지금 바로 관찰해 보건대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먹기를 바라고 마시기를 바라는] 욕망의 원인인 소조촉의 근거가 되는 대종은 비록 항상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이러한 소조촉 자체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찌 이 같은 사실을 스스로의 종의로 삼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예증은 옳지 않으니, 욕망의 원인인 소조촉은 풍계와 화계가 증강한 것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만약 ‘두 가지 욕망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앞에서 이미 설한 것처럼 두 가지 욕망은 바로 소조색의 성질이기 때문이다.12)
만약 ‘접촉되는 대종에 의해 신식(身識)이 발생하지만 이때 신식은 소조색이 아닌 것처럼 욕망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서로 유사한 경우가 아니다. 즉 인식은 요컨대 대종의 증성(增盛, 증강)에 의하지 않고서도 바야흐로 생겨날 수 있지만 [먹거나 마시기를 바라는] 욕망은 그렇지 않으니, [풍ㆍ화의 대종이] 증성할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신식은 대종의 균등이나 혹은 증성의 차별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대종의]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소의에 따르는 것으로 신근과 촉경을 조건으로 하여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욕망은 그렇지 않으니, 소조색과 마찬가지로 요컨대 대종의 증성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다.13)
[허기짐과 목마름은] 이렇듯 대종의 차별에 따라 생겨나는 것인데, 어떠한 연유에서 이를 부정하여 소조색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만약 풍ㆍ화의 대종이 증성하면 두 가지 욕망은 바로 증가하게 되지만, 만약 이러한 대종이 미약해지면 두 가지 욕망은 바로 감소한다. 이렇듯 이미 대종이 증성하거나 미약해짐에 따라 동일하지 않게 되는데, 두 가지 욕망(즉 허기짐과 목마름)을 어떠한 연유에서 소조색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만약 ‘두 가지 욕망은 비록 대종을 원인으로 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에 근거[依]하지 않기 때문에 소조색이 아니다. 즉 욕망은 마음에 근거하는 것으로, 대종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소조색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논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욕망(마음에 근거하는 욕망)은 요컨대 대종의 증성을 원인으로 삼지 않더라도 바야흐로 생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종에 근거하지 않은 신식(身識)은 보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온갖 대종의 차별에 따라 생겨난다. 즉 신식은 균등한 것이든 혹은 증성한 것이든 대종을 조건[緣]으로 삼는 것이어서 단지 ‘촉’만을 일으킬 뿐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기를 바라는] 두 가지 욕망(허기짐과 목마름)도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언제든 대종의 증성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원인(대종)이 있으므로 바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럴 경우 앞에서 설한 것처럼 모든 때 두 가지 욕망을 일으켜야 한다는 논란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14)
또한 풍계와 화계가 어느 때 비록 증성하였을지라도 먹기를 바라고 마시기를 바라는 두 가지 욕망이 바로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욕망의 원인(허기짐과 목마름)이 지금 바로 생겨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때 그러한 원인은 어떠한 까닭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소의신에 허물이 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 밖의 인연에 의해 장애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두 가지 욕망이 생겨나지 않는 것인데, 무슨 필요가 있어 욕망의 원인으로서 [‘허기짐’과 ‘목마름’이라는] 소조촉이 존재한다고 다시 별도로 분별하는 것인가?
이는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욕망은 신식과 동시에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어떤 장애가 있을지라도 식은 생겨날 수 있지만 [두 가지] 욕망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이치가 있는 것인가?
심소법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의와 소연과 의식이 화합하여 이와 관계해야 하는데, 그 세 가지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15) 또한 그러한 희구(즉 욕망)는 대지법(大地法)에 포섭되기 때문에 일체의 마음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다.16) 그런데 그 때 욕망을 낳는 뛰어난 원인(즉 소의와 소연과 의식 세 가지)이 모두 존재함에도 [욕망이] 생겨나지 않는 것은 필시 그 밖의 또 다른 생기의 조건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니, 여기서 그 밖의 또 다른 조건이란 바로 소조촉을 말한다. 따라서 대종을 떠나 소조색(所造色)을 본질로 하는 허기짐과 목마름이 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소조촉의 생기를 장애하는 것이 바로 심ㆍ심소법의 생기를 장애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며, 심 등의 생기를 장애하는 것이 바로 소조촉의 생기를 장애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달리 [그것을 논증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바야흐로 널리 논쟁하기를 그만두고 소조촉을 본질로 하는 허기짐과 목마름이라는 두 가지 실체가 존재함을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온갖 대종이 색취 중에서 증강(增强, 혹은 增盛)하였다면, [이때 증강된 것은] 대종 자체[體]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작용[用]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이 생각해 보기를 권유하는 것인가?
진실하지 못한 허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니, 경주(經主)는 자신의 논서 어떤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바로 그들의 종의가 범하고 있는 과실이니, 여기서 그들의 종의란 저들 비바사사(毘婆沙師)를 말한다. 곧 그들은 말하기를, ‘온갖 색취 중에 존재하는 일체의 대종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균등하게 존재하지만 혹 어떤 색취 중에서 그 작용이 치우치게 증강[偏增]하였으니, 심ㆍ심소의 경우와 같으며, 또한 지각되는 물질덩어리 중의 소금의 맛과도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경주의 뜻을 아직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였는데, 누구를 일컬어 비바사사라고 말한 것인가? 만약 아비달마를 훌륭하게 해석하는 여러 위대한 논사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 같은 사실을 설한 일이 없다. 즉 그들은 대종은 그 자체로서 증강한다고 설하였으니, 돌ㆍ물ㆍ화염ㆍ바람의 여러 색취 중에는 견고성(地)ㆍ습윤성(水)ㆍ온난성(火)ㆍ운동성(風) 자체가 치우치게 증강한 것으로, 그러한 각각의 색취 중에서는 각기 한 가지만이 요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온갖 색취 중에 대종 자체가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 중에서 각기 한 가지만이 요별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온갖 색취는 형태[形色]와 색채[顯色]로서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세속의 관념에 따라 ‘땅[地]’ 등의 명칭을 설정하였다고 한 것도 어떠한 근거도 없는 공허한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니, 만약 견고성 등이 그 자체 균등하게 존재하여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주장한다면 무엇에 의해 ‘땅’ 등의 개별적인 관념을 낳게 된 것인가?17) 또한 만약 작용이 [증강된 것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작용과 자체(즉 本體)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곧 작용이 만약 실유라면 자체가 증강하였다는 사실이 성립하니,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대종] 자체이기 때문이다. 혹은 작용이 실유가 아니라고 하는 경우에도 역시 자체가 증강한다는 사실이 성립하니, [작용은] 자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실유가 아닌 작용이 [대종] 자체와는 관계없이 증강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심ㆍ심소와 [지각되는] 물질덩어리 중의 소금 맛의 비유로 그것을 해석해 보자. 즉 소금의 맛이나 ‘수(受)’ 등은 작용이 바로 자체이기 때문에18) 자체와 작용이 증강하는 것으로, 전체적으로 설하면 이와 같다. 그렇지만 차별되는 점도 있으니, 이를테면 모든 대종은 대애(對礙, 점유성)를 갖기 때문에, 집적할 수 있기 때문에 방처(方處)의 차별을 분명하게 요별할 수 있다. 그러나 ‘수’ 등은 무대(無對)이며 집적할 수 없으며, 다만 작용의 차별에 의해 증강의 미세한 차이를 요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종 자체는 집적할 수 있는 것이어서 자체가 증강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심ㆍ심소법은 작용의 차별에 근거하여 증강의 미세한 차이를 설하는 것이다.
어찌 색법의 경우에도 역시 작용이 증강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초(酢)와 물이 화합하고, 양약이 독과 화합하고, 소금이 물과 화합한 것과 같으니, 비록 두 가지의 수량은 동일할지라도 작용에 다름이 있는 것인데,19) 어떻게 색의 경우 ‘자체가 증강하는 것이라고 설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경우와도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즉 초와 물의 촉(觸)의 극미는 비록 동등할지라도 미(味)의 극미는 동일하지 않아 신맛의 극미가 많고 물맛의 극미가 적기 때문에 신맛이 두드러지게 된 것으로, 이 또한 자체의 증강에 의한 것이다. 즉 모든 색취 중에는 ‘미’ 등의 실체[物]가 존재하여 그 자체가 증강하였기 때문인데, [경주는] 이를 작용이 증강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양약과 독 등은 연기(緣起)의 이치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존재 유형이 된 것으로, 이에 따라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많은 것을 조복(調伏)시킬 수 있으니, 다른 존재와 차별되는 작용을 갖고 생겨난 것이 아니다.20) 따라서 작용이 증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 해야 한다. 혹은 존재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품류가 다른 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오로지 심(心) 등에 대해서는 작용에 근거하여 증강을 설하지만, 모든 색법의 경우는 [대종] 자체에 근거하여 증강을 설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다수에 의지하고 하나에 의지하여 성립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대종은 자체에 근거하여 증강한다’고 설한 것은 지금 바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교법이기 때문이며, 이치상으로도 올바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종이 증강하면 바로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지만 작용은 그렇지 않으니, [대종은] 화집(和集)하여 애성(礙性)을 갖기 때문이다.
교법이라 함은, 이를테면 『종유경(種喩經)』에서 “만약 지계(地界)가 존재하고 수계(水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취집(聚集)되지 않을 것이니, 능히 끌어당겨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하나 하나에 대해 널리 설하면 경에서와 같으니, 이 경의 뜻은 어떠한 색취에도 수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화합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능히 다른 색취를 포섭하여 화합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그 자체의 양이 적기 때문이다.21) 그 밖의 다른 온갖 계의 경우에도 이러한 해석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치라고 함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대종은 다만 작용이 증강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 적취되는 것이 아니어서 [작용이] 증강하는 것이라고 설하였다면, 마땅히 어떤 대종이나 혹은 소조색의 하나의 극미상에도 역시 작용이 증강하는 경우가 있다 해야 할 것이니, 마치 수(受) 등의 하나의 법체상에 어느 때 작용이 증강하여 그것만이 능히 경계가 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극미는 각기 개별적으로 머무는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능히 경계가 되어 5식신을 낳지 못하는 것인가? 또한 온갖 극미로서 작용이 증강한 것은 그 상이 거칠고 분명하여 마땅히 극미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색법은 적취될 수 있는 것으로 그 자체 대애(對礙)를 갖기 때문에 자체가 증강하는 것이라고 설하지만, 온갖 무색법은 적취될 수 없으며 그 자체 대애를 갖지 않기 때문에 작용에 근거하여 증강을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이미 성립하였으니,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주(經主)는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말하기를, ‘온갖 색취 중에 존재하는 일체의 대종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균등하게 존재하지만 혹 어떤 색취 중에서 그 작용이 치우치게 증강한다’고 하였다”고 설하고 있는데, 아직 [유부의] 종의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견고성 등(즉 지계 등의 4대종)은 무엇의 근거인가?
이는 바로 색의 소의(所依)이지만 그 밖의 색 등(즉 색ㆍ향ㆍ미ㆍ촉의 소조색)은 그렇지 않으니, 이것은 일체의 유색처(有色處)에 두루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즉 온갖 [색]취 중에는 모두 지(地) 등의 네 가지 특성이 두루 존재하지만 그 밖의 색 등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에 따라 ‘지’ 등에는 세 가지 뜻이 성립하니, 첫째는 소의(所依)의 뜻이며, 둘째는 능히 낳는다[能生]는 뜻이며, 셋째는 광대(廣大)하다는 뜻이다.22)
또한 이것은 바로 색 등이 따라 쫓는 것[隨逐]이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세간의 항아리나 그릇 등의 사물을 보더라도 화계(火界)에 의해 성숙(成熟)하여 색 등에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두드리고 치고 퉁기고 어루만지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소리에도 변화가 생겨나지만, 그 밖의 다른 색 등에는 이와 같이 일(색 등으로 하여금 변화를 낳게 하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견고성 등은 색 등이 따르는 바로서, 이는 바로 색의 소의이지만 그 밖의 색 등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것은 능히 그 밖의 다른 색의 존재를 손괴(損壞)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 등은 ‘지(地)’에 의지하는 것으로, 능히 [다른 색의 존재를] 파괴하는 작용이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눈[雪]이 빛나는 색[盛色]을 오랫동안 바라보더라도 근(根)은 마땅히 파괴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는 않으니, 그러한 색의 소의(즉 대종)가 능히 근의 소의(즉 대종)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래서 어두움 속에서도 그것을 지각함으로써 괴로움을 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야 할 것이니, 오로지 [근의 소의인] 대종만을 파괴할 뿐 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근을 파괴한다면 마땅히 그것을 지각하여 신식을 발생시키지 못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색은 능히 대종을 손괴하지 못하니, [대종은] 접촉되는 것[所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종만이 능히 그 밖의 다른 색을 손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바로 색의 소의가 되지만 그 밖의 색 등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견고성 등은 접촉되는 성질[所觸性]이기 때문에 능히 소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23) 그러나 이러한 설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럴 경우] ‘차가움’ 등도 마땅히 대종성(大種性)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차가움 등의 촉은 [일체의 유색처에] 두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따뜻함 중에 차가움의 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차가움의 촉 중에도 역시 따뜻함이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그럴 경우 따뜻함(즉 火界)도 마땅히 차가움과 마찬가지로 역시 대종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차가움에는 따뜻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차가움에 덮여 있어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차가움의 촉도 마땅히 따뜻함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유색처에] 두루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차가움의 작용은 따뜻함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가움 중에서는 따뜻함의 작용이 인식될 수 있지만 따뜻함 중에서 차가움의 작용은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차가움은 따뜻함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유색처에] 두루 존재해야 한다’고 하는 이러한 힐난은 마땅히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따뜻함의 작용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사물을] 능히 성숙(成熟)시키는 것이다.
차가움 역시 능히 성숙시키는 것을 어찌 보지 않았던가? 예컨대 따뜻함(즉 불)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은 문드러져 허물어지지 않는데, 문드러져 허물어지지 않게 하는 근거를 일컬어 ‘능히 성숙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차가움도 역시 이와 같으니, 마땅히 따뜻함과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 역시 그렇지 않으니, 수계와 풍계가 증성(증강)하면 잠시 동안 응결하는 것일 뿐으로, 여기서의 성숙은 바로 따뜻함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견고성 등은 접촉되는 성질이기 때문에 능히 소의가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럴 경우 ‘차가움’ 등도 마땅히 대종성(大種性)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같은 차가움의 촉은 수대와 풍계가 증성한 4대종의 결과이기 때문에 바로 소조색이다.
또한 그 같은 차가움의 촉에서는 보지(保持)ㆍ인섭(引攝)ㆍ성숙(成熟)ㆍ증장(增長)이라는 네 가지 결정적인 작용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 대종이 아니다.24)
차가운 눈 등이 응결하는 것으로 볼 때, 어찌 거기에 뛰어난 작용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말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수계와 풍계가 증강될 때 소조색인 차가움의 촉이 그러한 결과(응결)를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따뜻함에 의해서도 사탕수수의 즙 등은 응결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차가움이 바로 대종의 결과라고 한다면, 차가움과 따뜻함은 서로 모순되어 마땅히 화합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따뜻함으로부터 차가움이 낳아질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견고성과 습윤성을 동일한 것[事]이라고 하는 경우와 같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25) 수(水)ㆍ화(火)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이미 ‘동일한 것’이면 이치상 어떠한 모순도 없다. 예컨대 차가운 물을 석회에 부으면 차가움으로부터 뜨거움이 일어나듯이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모든 대종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그 자체의 성상(性相)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항상 화합하는 것이다. 곧 차가움은 수계와 풍계 가까이서 생겨난 결과이지만 지계는 그것과 아무런 모순도 없으며, 화계의 자성과는 비록 소원(疏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손상되지 않으니, 동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26) 그러니 무엇이 [대종의] 화합을 방해하겠는가?
또한 그러한 온갖 ‘계’의 증강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온갖 색취 중에 다른 대종을 설정하였으니, 바로 그러한 온갖 ‘계’는 바로 온갖 소조색을 능히 생장시키는 근거이기 때문에 ‘대종’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차가움이 증대되었다고 해서 온갖 색취 중에 다른 대종을 설정하는 것은 아니니, 그래서 그것은 대종이 아니다. 즉 따뜻함이 증대된 경우 온갖 색취 중에 다른 대종의 관념이 소멸하고 또 다른 대종의 관념이 생겨나지만, 차가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움과 따뜻함은 능의(能依)와 소의(所依)라는 두 가지 성질로 차별되는 것이다.27)
지금 바로 관찰해 보건대 차가움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수계가 응결하며, 세간에서는 이에 대해 얼음 눈 우박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명칭을 설정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논란에 대해서는 앞서 ‘수계와 풍계가 증강될 때 소조색인 차가움의 촉이 그러한 결과(응결)를 낳는다’고 해석한 바와 같다. 혹은 얼음 눈 우박은 물[水界]의 다른 명칭으로, [그것이 불에 탄다고 해서] 풀이나 나무 등의 명칭을 불[火界]의 다른 명칭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가 논란한 이치는 결코 정연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움의 촉은 오로지 소조성이다.
이에 따라 촉계에는 두 가지 뜻(대종성과 소조성)이 있다는 사실이 성립하였다.
그 밖의 나머지 아홉 가지 색계는 오로지 소조성이니, 이를테면 5색근(色根)과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가 그러하다. 그리고 법계 중 일부도 역시 오로지 소조성이다.
이것(법계 중 일부)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표업(無表業)을 말하니, 이는 대종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소조성’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본송에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은 [18계 중의] 어떠한 계(界)도 오로지 대종성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 밖의 7심계와 무표색을 제외한 법계 일부는 두 가지 종류 모두가 아니라는 것은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이미 성취된 셈이다.
(2) 비유논사의 소조색 무별체설(無別體說) 비판
그런데 비유논사(譬喩論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모든 소조색은 대종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무엇을 내적인 지계(地界)라고 하는가? 안근(眼根)의 살덩이[肉團] 중에 존재하는 내적이고, 각기 다르며, 견고성[堅性]의 견고한 종류[堅類]로서 직접적으로 집수(執受)하는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28) 그런데 만약 대종과는 다른 별도의 온갖 근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근을 대종성이라고 설하지 말았어야 한다. 또한 다른 경에서도 설하기를,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존재하는 모든 사부(士夫, puruṣa, 즉 유정)는 6계(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식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이렇듯 이미 결정적으로 6계를 설하여 가유(假有)인 유정이 근거하는 실유의 실체[實事]라고 하였으니, 안 등(5색근)과 색 등(색ㆍ성ㆍ향ㆍ미)의 소조색은 대종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소조색이 온갖 대종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무슨 뜻에서 이 경에서 ‘그러한 말(즉 6계설)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고 설하지 않았을 것인가?”29)
이는 계경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앞에 인용한 경은 세간의 언어적 관념[名想]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를테면 모든 세간에서는 안근의 살덩이 중에서 ‘눈’이라고 하는 언어적 관념을 일으키니, 이러한 ‘눈’이라고 하는 언어적 관념은 안근의 소의인 대종 등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즉 여기서 안근의 살덩이란 안근을 떠나지 않은 일체의 대종과 소조색을 전체적으로 설한 것이다.30)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 경에서는 마땅히 “안근에 존재하는 내적이고, 각기 다르며, 견고성의……”라고만 설했어야 할 것이니, 이미 [승의근과 부진근을 분별하는] 혜안(慧眼)이 막혔으므로 ‘살덩이 중에’라는 말을 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안근에’라는 말은 바로 원인[因]을 나타내는 처격[第七]이며, ‘살덩이 중에’라는 말은 바로 근거[依]를 나타내는 처격이다.31) 이에 따라 안근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것으로서 안근을 떠나지 않은 일체의 대종소조를 모두 포섭하니, 안근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살덩이 중에 존재하는 내적이고, 각기 다른 것 등을 내적인 지계라고 이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바로 안근 등의 생인(生因)과 의인(依因) 등이 되는 지계(地界)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앞의 계경에서는] 처격의 말을 두 번 거듭 설하여 일체의 안근과 아울러 살덩이의 소의가 되는 대종을 모두 포섭하였던 것이다.
뒤에 인용한 경에서 오로지 6계만을 설하고 그 밖의 다른 계를 말하지 않은 데에는 별도의 뜻이 있으니, 이를테면 생을 상속[續生]할 때에는 안근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상태에서도 역시 신근은 존재하지만 능히 차가움 등의 촉을 느낄 수가 없으니, 비록 법 자체가 존재할지라도 아직 작용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작용을 갖는 품류 중에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오로지 6계만이 모든 유정의 근본실체[本事, mūla sattva dravya]로서 작용을 가지니, 생을 상속할 때의 마음으로부터 명종(命終)할 때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항상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멸진정(滅盡定)에 머무는 자의 식(識)은 무슨 작용을 갖는 것인가?32)
그의 과거의 식은 능히 미래의 식에 대해 능히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니, 이에 따라 당래(當來)의 결과는 결정코 지금 바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러한 식의 작용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근도 역시 마땅히 작용을 가져야 할 것이니, 동류인(同類因)의 작용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33)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선정이 아닌 상태에서의 성취와 선정에서의 성취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근은 비록 성취되지 않았을지라도 결과를 낳는[與果] 동류인의 작용을 갖지만 선정에서는 그러한 식 자체가 성취되지 않아 능히 당래의 결과를 낳는 등무간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식(識)과 신근은 그 뜻이 한결같지 않은 것이다. 또한 신근의 작용은 동류인 뿐만 아니라 식을 낳는 근거가 되니, 이것이 바로 신근의 작용이다. 그러나 멸진정에 든 자가 당래 출정(出定) 후에 낳을 식의 근거는 결정코 전 찰나의 식의 작용이니, 따라서 오로지 6계만이 모든 유정의 근본실체로서 작용을 갖는다는 이치는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혹은 공계를 언급하여 온갖 소조색을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이 경을 인용하여 소조색을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공계가 실유이고 바로 소조색이라는 사실은 앞(제3권)에서 이미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조색은 대종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마땅히 색 등(즉 색ㆍ향ㆍ미ㆍ촉의 소조색)은 모두 동일한 상(相), 이를테면 견고성 등의 상을 지녀야 할 것이고, 만약 그렇다고 하는 경우 안 등 5근의 작용[所行]에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할 것이니, 이는 경에서 설한 바에 어긋나는 것이다. 안 등의 작용은 각기 다르거늘 어찌 색 등의 경계가 모두 동일한 상, 이를테면 견고성 등의 상을 지닌 것이라고 주장하겠는가? 그렇지만 [동일한 상을 지닌] 일체의 경계가 [동일한 상을 지닌] 일체의 근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니, 이는 정녕코 지자(智者)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색 등의 5경도 비록 동일한 상, 이를테면 소조색의 상을 지녔지만 이러한 과실은 없다고 말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대종과 소조색이 비록 동일한 상, 이를테면 견고성 등의 상을 지녔다고 해도 아무런 과실이 없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으니, 소조색의 존재가 개별적인 법체(法體)로서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34) 또한 안 등의 근은 색 등의 경계에 대해 결정코 개별적인 상[別相]을 취하지 전체적인 상[總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35)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들(비유논사)의 종의에서는 소조색의 존재를 견고성(즉 地界) 등의 상처럼 개별적인 법체로서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색 등이 비록 다 같이 소조색이라는 동일한 법을 자성으로 삼을지라도 안근 등의 경계로서 차별될 수 있다는 뜻이 성립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색 등이 비록 다 같이 견고성 등의 동일한 법을 자상으로 삼을지라도 안근 등의 경계로서 차별될 수 있다는 뜻도 성립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안 등의 근은 색 등의 경계에 대해 결정코 개별적인 상을 취하지 전체적인 상을 취하지 않으니, 안 등의 근과 색 등의 경계는 전체적인 상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안 등의 5근에 의해 파악된다는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36) 또한 수(受) 등의 법도 역시 색 등의 경계와 동일한 상, 이른바 행상(行相)을 지니므로 ‘수’ 등도 역시 마땅히 안근 등에 의해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색 등에는 서로 공통되지 않는 상(相)을 지닌 여러 종류의 법들이 차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안 등의 각각의 근이 비록 다수의 상을 취할지라도 5근의 경계가 뒤섞이는 허물이 없으니,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러한 안 등의 5근도 비록 동일한 상, 이를테면 징정(澄淨)의 상을 지녔지만 능히 각기 다른 경계를 취할 수 있듯이,37) 이와 마찬가지로 색 등이 비록 동일한 상, 이를테면 견고성 등의 상을 지녔을지라도 안근 등이 작용하는 바는 각기 다르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으니, 그 밖의 다른 법도 역시 징정의 상을 갖기 때문이다.38) 만약 징정의 상은 바로 안근 등의 차별상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안 등의 근만이 갖는 특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실도 마땅히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 밖의 다른 법도 역시 이러한 상을 갖기 때문이다. 곧 신(信)에도 역시 징정의 상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징정은 안근 등의 차별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견고성이나 습윤성 등은 바로 [안근 등의] 차별상이다.
만약 색 등은 이러한 상으로서 모두 동일하다고 주장하면서 안근은 오로지 색처만을 취하고 촉처는 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차별의 논거가 결여된 논증이다.
혹은 또한 안 등의 근은 비록 징정의 상으로서 동일할지라도 그 공능(功能)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경계를 취하는 것으로, 공능이 다른 것은 그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안 등이 비록 다 같이 4대종의 결과일지라도 온갖 대종의 증감은 동일하지 않다. 원인이 이미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의 공능도 다르니, 이에 따라 [안 등의 근이] 경계를 차별하여 취하게 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색 등의 차별 역시 ‘대종의 증감으로 말미암아 동일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극미에 불성(不成)의 허물(미확정의 오류)이 있게 된다. 따라서 그대의 이 같은 구난(救難)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저 구수(具壽, 비구의 통칭으로 上座를 말함)는 경계[境]와 경계를 갖는 법[有境]의 차이를 어떻게 설정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 신체 일부분과 접촉하고서 ‘신근(身根)과 촉경(觸境)은 모두 동일한 상으로 동일 찰나 중에 [존재하며], 상호 간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주장하였다면, 무엇을 경계라 하고 무엇을 경계를 갖는 법이라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상호 간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경계와 경계를 갖는 법이] 다르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즉 견고성 등의 상(相)으로서 접촉되어지는 것을 ‘경계’라 이름하고, 이와 반대되는 신체를 ‘경계를 갖는 법’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신근과 촉경의 차별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상호 간에] 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경계와 경계를 갖는 법의 차이를 설정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이치에도 교설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의근(意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록 동일한 상일지라도 동일 찰나에 경계와 경계를 갖는 법으로 설정된 것이어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다. 의근의 경우 비록 경계가 될지라도 언제나 경계를 갖는 법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그러한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근의 경계인 견고성 등의 대종이 ‘경계를 갖는 법’으로 설정되었던 때는 일찍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구난(救難)의 예증은 극히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신근의 경계인 견고성 등의 대종도 역시 ‘경계를 갖는 법’으로 인정한들 여기에 또한 무슨 과실이 있을 것인가?
그럴 경우 의근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마땅히 1처로 설정해야 할 것이며, 그런즉 ‘이것은 신처(身處)이고 이것은 촉처(觸處)이다’고 결정적으로 설정할 수 없게 될 것인데, 여기에 무슨 결정적 이치가 있어 ‘이것은 오로지 경계이고 이것은 오로지 경계를 갖는 법이다’고 판별하여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가 종의로 삼는 바는 잡란(雜亂)되어 분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만약 색 등(즉 소조색)이 바로 온갖 대종이라면, 그는 ‘낱낱의 청색 극미는 바로 4대종이거나 혹은 오로지 1대종이다’고 설해야 하지만 두 가지 모두에 허물이 있다.39) 즉 색처 등은 비록 ‘색’(즉 색온의 색)이라는 명칭으로서는 동일할지라도 푸르거나(色) 웅장하거나(聲) 향기롭거나(香) 달거나(味) 차갑거나(觸) 하는 등의 성상(性相)의 차별이 있다. 이렇듯 5경은 생겨나는 것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안 등의 5근이 경계 대상을 공유하게 되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대종의 성상은 각기 다르지만 청색 극미와는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1대종이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4대종은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청색 극미가 오로지 1대종이라고 한다면, 4대종은 마땅히 서로를 떠나 [개별적으로] 존재해야 할 것이니, 하나의 색취(예컨대 청색)는 오로지 1대종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종유경(種喩經)』 등에 어긋나는 사실로서 마땅히 서로 다른 성상의 대종이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40) 또한 만약 하나의 푸른 색취는 [4대종] 중의 하나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 중의 어떠한 계(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푸른색이 된 것인가? 만약 지계(地界)라고 한다면 못이나 강 바다에는 마땅히 청색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수계(水界)라고 한다면 옥(玉)이나 청석(靑石) 등은 지극히 푸르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화계(火界)라고 한다면 세간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지극히 붉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풍계(風界)라고 한다면 바람 중에서는 마땅히 어떠한 색도 인식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청색이 온갖 대종과는 다른 실유하는 하나의 실체라고 설한다면, [4계 중의] 1계가 증대됨에 따라 다수의 4대종이 각기 청색을 낳아 하나의 색취를 합성(合成)하는 것이 되어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따라서 대종과는 다른 소조색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지교(至敎, 즉 聖敎)에서도 분명히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존재하는 모든 색은 다 4대종과 아울러 4대종의 소조색에 포섭된다”고 말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치에서 ‘소조색’이라고 하는 말이 온갖 대종과는 다른 별도의 근거를 갖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설하기를, “모든 어리석은 이들은 6촉처(觸處)에 의해 촉대(觸對, 접촉)한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느끼기도 하고, 괴로움으로 느끼기도 하며, 혹은 그 중 하나에 의해 지어진 것[所造]을 느끼기도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같이 ‘지어진 것’, 즉 ‘소조’라는 말이 있다고 하여 [6촉처 이외] 별도로 실재하는 일곱 번째 촉처가 획득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결정적인 경증이 아니니, 전혀 다른 존재[體]에 근거하여서도 역시 이와 같은 ‘소조’라는 말을 설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구수(具壽)가 아난타(阿難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지어진[所造] 아견(我見)은 누구에 의해 지어진 것인가? 말하자면 색에 의해 지어진 것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다.41) 그 밖의 다른 경을 찾아보더라도 ‘소조’라는 말이 별도의 근거 없이 설해지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앞서 인용한 비유논사의 경증)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색이 아견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색 이외 별도의 근거가 없다고 한다면] 유신견(有身見)은 마땅히 색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스스로 종의로 삼는 바를 어기게 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42)
또한 그 밖의 다른 경에서 설하고 있는 ‘소조’라는 말도 그것이 근거로 하는 존재[法體]와 다르기도 하고 혹은 다르지 않기도 하므로, 이에 따라 이 경에서 설하고 있는 ‘대종소조’라는 말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43) 그 밖의 다른 계경에서의 설은 결정적인 경증(經證)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즉 [결정적인 경증이 되는]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필추(苾芻)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근은 이를테면 내처(內處)로서 4대종소조(大種所造)의 정색(淨色)이며, 유색(有色)ㆍ무견(無見)ㆍ유대(有對)이다. 나아가 신처에 대해 널리 설할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색(色)은 이를테면 외처(外處)로서 4대종소조이며, 유색ㆍ유견(有見)ㆍ유대이다. 성(聲)은 이를테면 외처로서 4대종소조이며, 유색ㆍ무견ㆍ유대이며, 향(香)ㆍ미(味)의 2처에 대해 널리 설할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다. 촉(觸)은 이를테면 외처로서 4대종과 아울러 4대종소조이며, 유색ㆍ무견ㆍ유대이다.”44)
여기서 온갖 대종은 오로지 촉처의 일부에만 포섭되고, 그 밖의 유색처는 모두 대종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결정코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아울러 4대종소조’라고 하는 말은, 예컨대 『아견경(我見經)』의 ‘지어진[所造] 아견’이 별도의 근거를 갖는다고 하는 경우와는 같지만,45) 『육촉처경(六觸處經)』의 ‘그 중 하나에 의해 지어진 것[所造]’이 별도의 근거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와는 결코 같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촉처를 제외한] 아홉 가지 색과 법계 일부는 4대종과는 다른 소조성이라는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2) 적집(積集)ㆍ비적집 분별
이와 같이 [18계의] 대종성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5근과 5경의 열 가지 유색계(有色界)는 적집될 수 있는 것[可積集]이니, 이는 바로 극미를 본질로 하는 것이어서 취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8계는 적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본질이 극미가 아니어서 취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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