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다리 근처
‘달셋방, 구옥 두 칸 월 20에 놓습니다’
줄광고에도 끼지 못한 만국기 같은 벽보들
헐렁한 저 흔들림은 절망 속의 희망이죠
뻗으면 손 닿을 듯 나지막한 굴다리
사라진 임항선 타고 샛바람 모여 들면
좌판 위 허둥대던 시간들 물갈 걱정 없어요
열 살에야 겨우, 유치원에 간 우리 찬이
임신중독이 앗아간 엄마 얼굴 모르지만
젖 냄새 그리운 철길에서 혼자서도 잘 놀아요
-황영숙, 「회산다리 근처」전문
이 작품에는 “*회산다리: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전통시장 주변의 다리”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마산 도심을 가로지르는 임항선이 폐선 된 뒤에도 회원구 철길시장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회산철교를 지나는 구간 사이는 정비되지 않은 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굴다리 아래의 철길 위까지 좌판을 펼치고 생계를 이어가는 철길시장 가난한 소시민들의 삶과 꿈의 풍속도를 담화형식을 통하여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담화를 이끌어가는 작품속의 화자는 ‘우리’라는 1인칭을 사용하지만 실제시인과는 전혀 동화되지 않는 인물로서, 회산다리 근처의 전통시장에서 장사하는 좌판 할머니의 목소리와 인격으로 발화하는 극적개성이다. 시인에 의해 창조된 탈(페르소나)인 작중화자의 눈을 통해 소외된 도시기층민의 삶과 그 소박하고 단순한 인간상을 직접화법을 통해 실감으로 제시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접을 택하고 있다. 시적 담화형식은 크게 시인과 독자와의 소통체계와, 작품 속의 화자와 청자 사이의 소통체계라는 이중구조를 가진다. 이 작품은 후자의 소통체계로서 서사양식의 액자(frame)소설과 같이 작품 밖과 작품 내의 세계가 압축된 이야기의 형태로 구분되는 몰개성론의 배역시에 속한다. 첫수는 “달셋방, 구옥 두 칸 월 20에 놓습니다”는 ‘만국기 같은 벽보들’중의 하나를 초장에 그대로 옮겨놓으면서 극심한 가난에 내몰린 절망적 삶의 현실을 환유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 벽보들의 ‘헐렁한 저 흔들림’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긍정적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둘째 수에서는 ‘굴다리’와 ‘좌판’을 통하여 낯익은 전통시장의 허름하고 부산한 풍경을 정감어린 시장상인의 어투로 생생히 그려낸다. 중장 ‘사라진 임항선’은 마산의 향토색을 강하게 반영하여 표제 「회산다리 근처」의 시간적, 공간적 실체감에 탄력을 부여하고 있다. 임항선은 마산항 제1부두선으로 겅전선 마산역에서 마산항역을 잇는 총연장 8.6km인 철도노선으로 1905년 개통하여 석탄과 화물을 실어 나르다 2012년 1월 26일 폐선 되었다. 셋째 수에서는 손자인 ‘우리 찬이’의 열악하고 불행한 처지를 애정 어린 여성화자의 따뜻한 어조와 밝고 화해적인 시선으로 가슴 뭉클하게 조명해내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절망 속의 희망이죠’ ‘물갈 걱정 없어요’ ‘혼자서도 잘 놀아요’라는 허구적 인물의 친숙한 행위와 대화, 전통시장의 먼 전경에서 가까운 전경으로 다시 개인적 삶의 장면들을 제시하는 설화성의 시는 시인의 경험적 자아와 창조된 극적개성 사이에 M. 바흐진이 말하는 ‘내면적 거리’를 양식화함으로써 ‘회산다리 근처’라는 소외계층의 집약된 인간상을 보다 극적으로 환기하는 효과를 노린 작가의 치밀한 의도를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박 권 숙
1991년 중앙일보 중앙시조지상백일장 연말장원
중앙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최계락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
시집<시간의 꽃> <모든 틈은 꽃핀다> <뜨거운 묘비> 외 다수
<서정과 현실> 2017년 하반기호
첫댓글 즐겁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