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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와 결혼]
루이 13세와 스페인 출신 왕비 안 도트리슈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 14세는 1643년 5월 14일에 부왕의 왕위를 계승했다. 왕국의 법에 따라, 5세가 채 안 된 나이에 1,900만 백성의 인신(人身)과 재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되었으며 '눈에 보이는 신(visible divinity)'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하인들에게 내맡겨진 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연못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주의로 비난을 받았던 모후(母后) 안 도트리슈는 그에게 "신을 거역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늘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어주었다. 루이가 9세가 되던 1648년, 총리인 추기경 쥘 마자랭의 미움을 받아오던 귀족들과 파리 고등법원(Parlement)이 왕에 대항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는 프롱드의 난으로 알려진 기나긴 내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루이는 가난함과 불운함, 두려움과 굴욕감, 추위와 배고픔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시련들은 어린 왕이 앞으로 보여줄 성격과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을 형성시켜 주었다. 그는 파리 및 귀족들과 평민들 그 어느 쪽도 결코 용서하지 않으려 했다.
1653년 마자랭은 반란을 진압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는 루이와 더불어 특별한 행정기구를 만들어 나갔다. 어린 왕은 또한 예술과 우아함 그리고 과시하기를 특히 좋아하는 마자랭의 성향을 몸에 익혔다. 왕은 성년이 되었지만 추기경의 절대적인 권한을 문제삼으려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1635년에 벌어졌던 스페인과의 전쟁이 그무렵에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프랑스의 왕은 군인이 되어야만 했으므로 루이는 싸움터에서 수련을 쌓았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럽의 패권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부르봉 왕가로 넘어갔다. 1658년 루이는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심하게 했는데 이런 일은 이 시기의 군주들에겐 흔한 일이었다. 그는 마자랭의 조카딸 마리 만치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2년 동안이나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마침내 절박한 정치상황 앞에 무릎을 꿇었고 1660년 스페인과의 평화를 위해 스페인 왕의 딸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다. 루이 14세가 성년이 되었을 때는 어느 누구도 그가 권력의 고삐를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젊은 왕]
1661년 3월 9일 마자랭이 죽자 3월 10일 왕은 몸소 왕국을 다스릴 모든 책임을 떠맡겠다는 뜻을 밝혀 신하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일은 앙리 4세 이후로는 없던 일이었고, 루이 14세의 행동은 결코 전통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었다. 루이는 신이 내린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해 지상에서 신을 대신하는 인물로 자처했고 모든 불충과 반란을 죄악시했다. 이러한 확신 가운데에서 자신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위험한 생각이 나왔으며 동시에 침착하고 절제하는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장 바티스트 콜베르, 루부아 후작, 위그 드 리온 같은 뛰어난 신하들의 보필을 받았는데 점차 그들과 불화를 쌓아가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들 만큼 능력을 갖추지도 못한 인물들을 등용했다. 루이는 54년 동안 매일 8시간씩이나 정무(政務)에 열중했으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궁정예절부터 군대이동까지 그리고 길을 닦는 일부터 신학적인 논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주관하려 했다. 그는 젊음과 정열이 넘쳐 흐르고 장엄함에 매료되는 프랑스다운 분위기를 충실히 나타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왕은 귀족들에게 연금을 하사하기도 하고 처벌을 내리기도 했지만 40년에 걸쳐 11차례나 내란을 시도했던 그들을 무릎꿇게 할 수는 없었다. 루이는 그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끌어들여 도박에 빠져들게 하고 방탕한 생활에 흠뻑 젖어들도록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운명이 왕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도록 했으며 예절이 통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귀족은 프랑스 정치에서 더이상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했으며 이는 나라를 나약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예술에 대한 후원]
루이의 커다란 재산은 신하들 가운데 온갖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몰리에르와 장 라신을 비롯한 작가들을 후원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고 아름다움과 자연을 바라보는 자기의 시각을 예술가들에게 강요했다. 프랑스의 모습과 삶의 방식이 바뀌어 거대한 도시들의 형태가 변했고 풍경은 달라졌으며 기념비들이 여기저기에 세워졌다. 왕은 정력적으로 새로운 주거지를 세우는 데 열을 쏟았다. 생제르맹과 마를리에 있던 눈부신 궁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것은 세워지고 있던 도중에는 낭비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으며 나라를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비난받았으나 세워진 뒤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감탄을 자아냈으며 프랑스의 위신을 드높여 주었다. 정부의 모든 권력이 베르사유 궁전을 짓는 데 투입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주장해왔듯이, 루이 14세가 건전하지도 않고 말썽만 많던 파리를 스스로 벗어났다는 데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전통을 끊었다는 데 잘못이 있었다. 왕은 점차 국민들에게서 멀어져 갔고 그리하여 신비로운 대상으로 변해갔다.
한편 베르사유 궁전건설을 감독해온 콜베르는 수출을 극대화하면서 프랑스의 경제적 자급자족을 겨냥하는 경제혁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루이에게서 얻어냈다. 제조업자들, 해군과 상선(商船), 근대적인 경찰조직, 도로, 항만, 운하, 이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루이는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와 떠들썩한 연애사건을 벌이면서도 매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1667년에 그는 왕비의 상속지로 여기고 있던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침입함으로써 그의 통치기간 중 상당 기간 지속된 일련의 전쟁을 시작했다(→ 상속전쟁). 루이가 임종을 앞둔 자리에서 "짐이 전쟁을 지나치게 좋아했다"고 말했는데, 그의 신하들은 루이가 너무 신중하고 온건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만약 루이가 프랑스의 국경을 튼튼히 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이는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의 압력에 부딪혀 후퇴해야만 했다(1668). 그는 결코 네덜란드인들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상업공화국인 그 나라를 무너뜨리겠다고 다짐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촌인 영국의 찰스 2세와 동맹을 맺고서 1672년에 네덜란드로 쳐들어갔다. 그뒤 일어난 기나긴 전쟁은 1678년 루이가 의기양양해 하며 체결한 제1차 네이메헨 조약으로 끝났다.
[전성기와 쇠퇴기]
전성기로 접어든 루이는 거의 혼자서 만만찮은 동맹세력(루이에 맞서 네덜란드를 편들었던 스페인과 신성 로마 황제)을 무찔렀고 적에게 자신의 조건을 강요했다. 그는 북쪽에서 플랑드르 일부를 합병했고 동쪽에서는 로렌과 프랑슈콩테를 장악함으로써 프랑스 영토를 늘렸다. 그의 함대는 영국·네덜란드 함대와 비견할 만큼 수준이 향상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그를 '대왕'(大王)이라고 불렀고 궁정에서는 경모의 대상이 되었다. 40세에 다다랐을 때 그는 스스로도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여겼다.
같은 시기에 그의 사생활에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667년에 루이의 애첩으로서 라 발리에르 부인을 대신하게 된 몽테스팡 부인이 1680년 '독물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이 사건을 둘러싸고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마법과 살해 혐의로 고발당했다. 루이는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될까 우려하여 몽테스팡 부인을 멀리했고 측근들에게 경건하게 살도록 강요했다. 겉치장과 노름과 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예법을 겉으로 내보여야 했던 궁정은 따분한 곳으로 변했고 위선이 지배하게 되었다. 루이는 쾌락적인 생활과의 결별을 선언했는데 그것을 포기하는 고통을 새로이 그의 총애를 받게 된 매우 경건한 맹트농 부인 덕분에 덜게 되었다. 그녀는 풍자시인 폴 스카롱의 미망인이었고 한때 왕의 서자(庶子)들을 가르치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1682년 왕실은 베르사유로 옮겨갔으며 그 이듬해는 루이 14세의 삶과 치세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왕비가 죽은 뒤 그는 맹트농 부인과 남몰래 결혼했고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커져갔다. 루이는 그녀를 끝까지 사랑했으며, 현존하는 편지에 따르면 그녀는 70세가 되어서조차도 자신의 고해신부에게서 부부로서의 의무를 꾸준히 다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콜베르도 호전적인 루부아가 마음대로 정치를 하도록 내버려 둔 채 세상을 떠나버렸다. 신성 로마 황제는 자신의 오스트리아 영지로 쳐들어온 투르크족을 쫓아버림으로써 서부에서 프랑스에 대항할 여유를 얻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1688~89년 스튜어트 왕조가 몰락하고 오라녜의 빌렘이 윌리엄 3세로 영국 왕위에 오름으로써 상황은 프랑스에게 한층 불리하게 바뀌었다.
[낭트 칙령의 철회]
루이는 프로테스탄트 세계 전체를 자신의 적으로 여겼다. 어머니가 그에게 편협하고도 지나치게 단순한 종교관을 심어 준 탓에 그는 종교개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그들을 무력으로 개종시키려 애쓴 다음 프로테스탄트에게 예배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낭트 칙령을 1685년에 철회했다. 칙령이 철회되고 무자비한 박해가 뒤따르자 수많은 수공업자들이 프랑스를 등지고 떠나야 했으며 역경이 끝없이 닥쳐왔다. 이리하여 루이 14세 치세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신성 로마 황제는 루이의 팽창주의에 맞서기 위해 대동맹(Grand Alliance)을 맺었고 결국엔 대동맹 전쟁(1689~97)이 벌어졌다. 루이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레이스웨이크 조약으로 정복지 일부를 포기했고 그 때문에 그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또한 루이는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신성한 왕권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지만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오라녜 공 빌렘을 영국 왕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3년이 지난 1700년 스페인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인 카를로스 2세가 루이의 손자인 앙주의 필리프(후에 스페인의 펠리페 5세)에게 왕국을 남겨주고 죽었다. 이제 평화 이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루이는 망설였으나 마침내는 그 상속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결정으로 큰 비난을 받아오긴 했지만 달리 택할 길이 없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통합으로 인해, 유럽의 세력균형이 깨질 것을 두려워한 영국과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는 루이 14세에 맞서 대동맹을 결성했다.
[만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피해로 프랑스는 그전에 얻었던 모든 이득을 대부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1709). 게다가 루이는 개인적인 슬픈 일들을 잇따라 당했다. 그는 아들인 왕세자, 손자인 부르고뉴 공과 베리 공, 증손자인 브르타뉴 공, 부르고뉴 공작부인을 잃었다. 궁정 안에서는 아첨이 넘쳐흐르고 밖에서는 악담이 빗발쳐 왕의 모습은 불운이 닥쳐오면 무너져버릴 우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승승장구하는 나라의 화신(化身)이던 루이는 그 자신의 아픔과 자기 백성의 아픔을 끊임없는 결단으로 견뎌냄으로써 평소의 자기가 해내는 것 이상으로 성과를 이루어냈다.
런던에서는 궁정혁명이 일어나 화평을 주장하는 토리당이 권력을 잡았고, 게다가 프랑스가 드냉 전투에서 신성 로마 황제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전쟁이 끝을 맺게 되었다. 1713~14년에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와 바덴 조약으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내놓긴 했지만 영토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와 라인 지방에서 최근에 정복했던 영토를 그대로 지니게 되었는데 프랑스는 뒷날 어떠한 패배나 혁명으로도 그 지역을 잃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대중의 비웃음을 받는 가운데 생드니 바실리카에 묻혔다. 부르고뉴 공의 막내 아들이 그의 뒤를 이었으나 5세의 어린아이였으며 몹시 병약했다. 조카인 오를레앙 공을 못미더워한 루이는 실권을 몽테스팡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멘 공에게 넘겨주고 싶어했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그 유언장은 결과적으로 왕정이 몰락하도록 재촉한 셈이었다. 즉 그가 죽고 난 뒤 유언장을 무효화하기 위해 소집된 파리 고등법원(Parlement)은 권력을 되찾아 모든 개혁을 저지하는 데 이용했고,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대혁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평가]
생전에 루이는 외국의 잡지들이 그를 피에 굶주린 호랑이에다 견준 반면, 신하들로부터는 끊임없이 아첨을 받아왔다. 볼테르는 자기가 쓴 〈루이 14세 시대 Age of Louis XIV〉에서 그를 위엄있게 그려냈다. 문학적 재질과 위선을 나란히 담고 있는 〈비망록 Memoires〉의 저자이며 루이의 궁정에서 살았던 생 시몽 공은 루이에 대한 자신의 찬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매우 가혹하게 평가했다. 루이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작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랐다.
루이 14세는 역대 왕들 가운데 프랑스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도록 한 가장 으뜸가는 왕이었다. 그러나 그가 취한 종교정책과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장, 그리고 국민과 동떨어져 궁정에서 살았다는 점 때문에 왕정의 무덤을 팠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실책들은 바로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국가기구를 자신의 한몸에다 집중시킴으로써 군주정(君主政)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짐으로 만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 볼테르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견주었던 그의 치세는 강점과 약점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이룩한 승리와 정복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그가 다스리는 동안 패권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치세를 가득 메운 화려함은 군사정책으로 인한 손실을 메꾸어 주었다. 유럽의 귀족은 오랫동안 불쾌한 마음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태양왕 루이 14세가 전성기를 누릴 당시의 프랑스 언어와 관습을 받아들였다.
루이는 스스로를 '왕'이라는 직책에 너무 짜맞추는 바람에 한 개인으로서의 참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보여준 무정함과 용감함, 전제주의와 금욕주의, 어마어마한 자만과 질서에 대한 열정, 과대망상과 신앙심,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과 편협함 따위는 오로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 그는 프랑스를 강력하고 부유하며 훌륭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프랑스 국민의 복지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군대가 잔학행위를 저지르긴 했으나 오늘날에 벌어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일들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아무도 그의 치세 아래서 모든 국민들이 노예상태에 빠져든다거나 대량으로 국외추방을 당하거나 대량학살을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어떤 화학자가 그에게 최초의 세균무기를 바쳤을 때 그는 그 학자가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 결코 누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연금을 주었다(→ 생물학전). 루이는 때때로 독재자였다. 그러나 볼테르의 말대로 "그의 이름은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입에 올릴 수가 없다."
루이 14세[Louis XIV]. 인물설명 네이버
첫댓글 솔직히 프랑스는 지금 루이 14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당시에는 베르사유 궁전 짓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프랑스의 관광 명물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