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제10회 수상자 함기석 시인
수상작: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외 4편
수상일:
작가약력 및 수상작 소개
함기석 약력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1998년 첫 시집
수상작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외 4편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새를 위한 목적어 침대
새가 난다
쉴 곳을 찾아 도시 상공의 <1연>을 난다
다음 문장의 공원으로 날아간다
도착해보니 도축장이다
다음 문장의 놀이터로 날아간다
도착해보니 사격장이다
포수가 총을 들고 서 있다
새는 놀라 도망친다
새가 운다
날개 아픈 새가 쉴 곳이 없어 운다
병원 창가 <2연>에서 휠체어 탄 아이가 바라본다
외로운 새에게 말한다
외톨이 새야 울지 마! 새가 날면 주어가 날아
얼룩말이 날고 주전자가 날아
우체통도 날고 집도 나무도 젖소들도 함께 날아
새가 웃는다
지친 새가 구름 옆의 <3연>에서 웃는다
아이는 새를 위해 선물을 놓는다
까마득한 공중에 살며시 목적어 침대를 놓는다
침대 곁에 풍금을 놓고 나팔꽃 화분을 놓는다
새가 환하게 웃는다
아이에게 고맙다고 윙크하고는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달콤한 잠에 빠진다
새가 잠든 사이
나팔꽃 속에서 하얀 손이 나와 풍금을 연주한다
음악에 맞춰 핑 퐁 핑 퐁
젖소들이 나무들이 바람과 춤추고
침대 끝에서 새의 꿈이 하얗게 흘러내린다
새장 같은 아이의 병실 창밖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5연>의 연못으로
방울방울 파문을 그리며 떨어진다
망막에 작도되는 피의 음계
구의 심장일까
밤하늘을 떠가는 저 피아노
건반에 붙어 달빛 소나타를 연주하는
두 개의 손
꽃이 제 입으로 빨간 발을 내밀 때
심장을 중심으로
지름 25시간인 원을 그리며
나는 새
두 발의 보폭이 무한인
낱말 컴퍼스
우주에 누가 작도한 핏방울 점일까
지구는
떠도는 악보들 행성들
꽃이 항문으로 하얀 혀를 내밀 때
음표 밑에 붙어 끝끝내 떨어지지 않는
까만 눈동자
장기놀이
장기판에 미친 시계들이 놓여 있었다
히틀러는 시계로 장기를 두며 콧수염을 길렀다
그의 권총도 콧수염을 길렀다
그는 늘 권총을 사타구니에 달고 꽃사슴처럼 걸었는데
장기놀이 파트너 아이히만과 요제프 멩겔레는
그를 루돌프 히틀러라 불렀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였다
루돌프는 눈썰매에 아이들을 가득 태워
과자와 사탕이 산더미처럼 쌓인 꿈의 동화마을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신나게 캐럴송을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새 옷을 선물받기 위해
알몸으로 줄을 서서 흰 건물로 들어갔다
포장을 뜯을 수 없는 기이한 선물을 하나씩 받고
아이들은 모두 검은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나왔다
하늘에서 하얀 손이 하늘하늘 내려오는
이상한 동화마을 아우슈비츠였다
천국을 가리키는 예수의 손가락 같은 굴뚝에서
살타는 냄새와 비명이 밤을 새워 흘러나왔다
배꼽 없는 밤이었다
죽은 물고기들이 밤하늘을 하얗게 떠다니고
상어잠수함과 폭격기들이 하늘을 자르며 날아갔다
장기판엔 장기가 놓여 있었다
소년의 눈도 간도 소녀의 접시꽃 가슴도 놓여 있었다
하늘의 갈라진 복부에서 죽은 시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뒤집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수상 소감
전위정신과 언어모험이 필요하다
함기석
며칠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 비는 처마 끝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내 마음 속으로 떨어진다. 지금 나는 빗물이 가득 고인 웅덩이다. 거기엔 깨진 유리병도 있고 금붕어도 있고 죽은 자들도 있다. 지붕에서 빗물과 함께 흘러내린 생의 녹물이 내 마음 바닥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며 사람들을 생각하고 시를 생각한다. 통증을 몸속에 숙주처럼 품고 살아야만 하는 자들, 그들에게 삶은 늪이다. 아니 인간은 누구나 늪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가혹한 수렁이다.
시라는 늪의 수면에 뜬 달, 그 달빛에 홀려 여기까지 왔다. 그 사이 고통과 굴욕, 그 어휘들이 품고 있는 빛깔과 아픔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시도 세계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늪이고 죽음은 그 늪가에서 자라는 물푸레나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태양을 배후로 나의 발등에 검은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혈관과 뼈가 훤히 다 보이는 투명한 나무, 죽음과 언어는 샴쌍둥이 나무다. 언어를 통해 세계로 진입해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죽음 앞에 놓여 있는 인간과 사물들의 실존, 그 부재하는 그림자를 찾아가는 싸움이고 자신을 자신의 언어로 처단하는 형벌, 그것이 창작인지도 모른다. 제로(0)와 무한(∞) 사이에서 녹고 있는 눈사람(8), 자신의 부재를 자신의 몸 전체로 목격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동자부터 녹아내리는 물질, 그게 삶이고 시간이고 시인지도 모른다.
유희의 산물이든, 고통의 산물이든, 꿈의 산물이든 모든 시는 시인 자신의 피고 숨결이고 맥박이다. 그러나 그 핏방울들이 차디찬 웃음소리를 내며 증발하는 사태를 목격할 때조차도 시인은 백지를 응시하고 맞설 수 있어야 한다. 그 백지는 시인 자신이 직면한 현실이고 삶의 공포고 현기증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단 한 번뿐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형식이다. 나는 형식을 내용으로 적당히 빗겨가려는 자들을 혐오한다. 형식을 포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포즈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이나 전율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것은 형식 그 순수자체일 뿐이다. 시에 대한 도전은 결국 삶의 내적 형식에 대한 도전이고, 루트와 방법의 변혁을 통해 언어의 변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삶의 권태와 모멸, 죽은 미학과 모럴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행위다. 그러기에 첨예한 전위정신과 태도, 통념의 파괴, 죽어버린 미적 가치들을 처단하는 눈, 미래를 향한 불가능한 언어모험이 필요하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미지를 향해 야간행군을 강행할 것이다. 그 여정에 잠시 쉬었다 가라며 찬물 한 잔 건네주신 심사위원분들께 마음 깊이 고맙다는 인사 올린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