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님 여러분들에게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손님 여려분들에게 글 제목에 대하여 의논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동네 사름들에게 "장림 오부자 이야기"를 들어서 제목도 그렇게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니 글은 괜찮은데 대화로는 "장림"을 "장님"으로 오해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림 오부자 이야기"를 "임당 오부자 이야기"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사실성과 역사성을 중시하면 "장림 오부자 이야기"가 낫고, 어감이나 지명 인식도에서는 "임당 오부자 이야기"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손님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아래에 산소 소공원 조성건도 포함하여 의견 주시길).
1. 봉암골에서 장림(임당)의 오부자를 소개하며
수성구 욱수동 봉암골 들머리에 도래솔 숲(새터마을에서 200m 지점, 산14번지 일대)은 장림 오부자 형제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 부자가 된 오형제의 일화가 있고, 그 방법도 독특하기 때문에 소개를 하고자 한다. 1900 년대 초반에 경산 장림, 곧 고분 유적지로 잘 알려진 경산시 임당동에는 “장림 오부자” 형제가 살았고, 지금도 그 후손(3대손)들의 일부는 "오부자 오주택"을 그대로 보존하여 지키며, 살고 있다. 오부자집 형제들은 서로의 우애와 협동심이 남달리 두터웠고, 이런 형제 우애와 독특한 재산 형성 방식으로 뒷날 부자가 되었다.
<봉암골 오부자 산소> 봉암골(욱수골) 공영주차장 150m 지점, 봉암길 붙도랑 건너 도래솔 숲
<사진>부자가 되기까지 귀감이 될 일화를 가진 “장림(현재 임당) 오부자집” 문중의 조상 산소이다. 주위에 숲이 울창하고 비교적 넓은 지역이라 고산초등학교와 경산여중학교에서 소풍을 자주 오던 곳이다.
2. 독특한 재상형성, 형제애를 현실경제에 실천하여 성공한 농업가
오형제 우애는 한 예로 이러하다. 가을 논에 나락(벼)을 베어 마르게 두고, 거두지 못한 채 비가 올 것 같으면 오형제들은 먼저 협동작업부터 시작한다. 다섯 형제들은 각자 자기 논으로 가기보다 형님 논으로 가서 형님 논의 벼를 먼저 거두어 들이기를 하고, 다른 형제들의 벼를 번갈아가며 거두어 준다. 이 경우 아우들은 자기 벼를 거두기 전에 비가 와서 벼를 적셔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맏형은 이것이 미안하여 "다음에는 동생 논에 먼저 가자"고 하면, 아우들은 "형님부터 먼저 해야지요"하며 사양을 곧잘 하곤 해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란 말은 이래서 나오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그후 이들 오형제 중 어느 한 형제가 남의 빚 보증을 잘못 써서 재산을 잃고, 큰 빚까지 짊어지게 되자 다른 형제들은 각자 자기 재산을 추렴하여 빚을 갚아 주고 형제가 재기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오형제는 재산을 형성하는 방법도 형제들이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생활에 실천하여 뒷날 성공한 부자가 되었다. 한해의 농사를 다 지으면 오형제들은 수확한 곡식을 각자 형편대로 출연하여 그 곡식을 오형제 중 어느 한 형제에게 모두 주고, 이 곡식을 받은 형제는 받은 곡식 전량을 그대로 저축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늘려갔다. 먼저 맏형부터 시작하여 막내까지 5년 주기로 이런 방법을 되풀이 했다. 이렇게 하다보니 오형제들은 남들보다 먼저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뒷날 오형제 모두가 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들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후손 한 분은 같은 마을에 우리보다 더 큰 부자도 있었으므로 "큰 부자"는 아니라고 겸손한 말씀을 하시지만, 남들이 그렇게 "큰 부자"라고 불러서 소문이 난지 오래이기 때문에 필자도 "큰 부자"라고 부르고 싶다.)
오형제들은 생활방식도 검소하고 성실하였으며, 특히 농사를 지은 곡식 한톨한톨을 소중하게 여김에도 남달랐으며, 이렇게 아낀 곡식으로 이웃에게는 베풀기도 잘 하였다. 한 예로 오형제 중 한 분은 길을 가다가도 수확한 논밭에 이삭이 떨어져 있으면 모두 주워서 주운 이삭을 이웃의 곡식 더미나 가마에 던져 주기를 잘 하였다. 하루는 누가 실수로 곡식 한 가마를 못(남매지)에 빠트렸는데 형제들은 그 곡식 가마를 건져내어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때 한 가마의 곡식을 건지기 위해 두 가마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보기에 따라 낭비 같고, 잘못인 것 같다. 그러나 양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에 버리게 될 곡식을 건져내면, 그만큼 배고픈 시대에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더 채워 줄 수가 있고, 이웃을 구제하는데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부자의 이런 정신은 이름 난 소리꾼이 소리 한 소절에도 자기 혼을 불어 넣듯이 농사꾼으로서 곡식 한 톨의 생산과 소비에도 열정이 있었고, 장인 정신이 깃들여 있다. 곧 오부자 형제들은 곡식 한 톨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에도 남들과는 다른 소신과 철학이 녹아있음을 감지할 수가 있다.
오부자의 이런 판단과 실천은 지금도 특이하며, 한 시대의 정서를 뛰어넘은 탁월한 판단이었다.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면 형제 간에 우애가 있고, 그래서 서로 협동하며 사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부자 형제들은 이러한 형제애와 협동정신을 단순하게 실천한 것이 아니라 이를 미래를 위한 투자와 재상형성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고, 또 그 방식으로 성공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물에 빠진 곡식을 건져 주인에게 돌려 주는 경제행위 또한 특이하다. 특히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버려질 곡식을 건져 다시 쓰게 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이것은 사적 활동이 아니고, 사회적 배려에 속한다. 이것은 오부자 형제들이 평소에 이웃을 생각하며 살아왔고, 또 이보다 더 큰 사회 공익적 차원(비용의 과다 투입은 개인적으로는 손해지만, 사회적으로는 사회 총이익이 커지는 현상)까지 염두에 두고, 생각이 돌아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모두 감안하면, 오부자 형제들은 일찍부터 한 시대의 보편적 정서를 뛰어넘어 탁월한 경세사상을 가진 분들이었다. 그리고 오부자 형제들은 이렇게 탁월한 경세사상을 현실에 적용하여 성공을 거둔 실천적 경제인이요, 농업가들이었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구제에도 남달은 면이 있었고...
3. 봉암골 오부자 산소와 후손들의 덕담
봉암골에서 오부자 형제와 조상들의 산소가 있는 도래솔(공영주차장 바로 위)은 숲이 울창하고, 너지가 많다. 그래서 봄이 오면 인근 학교에서 아이들이 해마다 소풍을 왔었고, 동네 사람들도 여기서 봄놀이(화전놀이)와 마을 행사(씨름대회)를 하던 곳이다. 봄철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산소를 밟고 다니기 때문에 조상 산소가 훼손되고, 풀(잔디)과 나무도 죽어가기 때문에 관리자(갓지기)는 출입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부자의 후손들은 “조상 산소에 사람이 많이 오면 복이 온다”고 하면서 출입을 허용하여 주었다. 그래서 봉암골 사람들과 동네 주민들은 이 길을 오갈 때면 "오부자 이야기"와 후손들에 대한 덕담을 자주 하여 오던 곳이다. 또한 오부자 이야기는 이곳 뿌 아니라 지역사회에 넓게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까지 우리의 귀감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이 오부자 이야기는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좋은 사례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지역에서 오부자 이야기를 알고 있는 봉암골 어른들이 세월이 흘러 세상을 떠나고 있고, 그나마 남아있는 일부 지역 주민들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을 떠나버린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 "장림 오부자 이야기"를 보존하고, 길손들에게 알려서 세상의 귀감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한 오부자는 산소 앞에 너지와 솔숲, 그리고 개울이 있어서 소공원 부지로도 좋은 위치다. 지금까지 오부자 산소는 학생들 소풍과 동네 행사장으로 사용해 왔지만, 이제는 관리를 위해 제한을 하고(접근은 통제, 관람은 가능하게), 도래솔숲과 너지에 소공원을 만들어 등산객과 시민들에게 개방을 하면 좋을 것 같다. 특히 어린이용 놀이터(시설물이 거의 없는 어린이용 자연 공터)가 좋을 것 같다. 이곳은 아파트 지구로 유치원이 많은데 유치원 아이들이 야외 놀이를 할 곳이 없어 교사들이 봉암골 여기저기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을 보면 안타가운데 이곳이 그 적지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4. 장림(임당)과 "오부자 오주택", 소개와 감회
여기서 5km 떨어진 경산시 임당동에는 지금도 오부자 오형제의 집들(오부자 오주택)이 모두 마을 중심부 한곳에 자리(316~328번지)를 잡고 있다. 주택의 자리 배열은 들머리 중앙 지점에 오부자 가족들의 친교 모임 행사장 같은 공터를 두고 말굽자석형 또는 ㄷ자형의 주택이 둥그스럼하게 둘러붙어 있어서 집들마저 의좋은 형제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임당동 오부자 오주택은 주택의 규모와 대지의 넓이(총 1,500여 평)로 보아 그 당시 농촌 마을에서 "큰 부자"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을 것 같고, 주택의 구조로 보아도 소슬 대문집, 전통 기와집 등으로 오부자가 살았던 원형을 후손들이 그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경산에서 향토 문화재로 바로 지정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장림(임당) "오부자 오주택"의 일부>
<사진> 정면 집은 맏형집, 오부자 오주택은 이 집부터 ㄷ형으로 모두 한 곳에 붙어있고, 원형이 보존되고 있다.
제가 오부자 이야기를 쓰면서 사실 확인을 위해 여기 저기 알아 본 결과 하나의 의문이 새로 생겼다. 요즈음은 매스컴이 발달하여 농어촌의 작은 마을에 있는 소박한 가족 미담이라도 이야기 거리만 되면, TV에 나오고, 마을이 야단 법썩이다 그런데 한편의 다큐멘타리 드라마 소재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장림 오부자 이야기"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지역사회 일부에서 입소문으로만 남아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오부자 형제들이 후손들에게 "너희들은 남에게 우리가 부자라고 자랑하지 말고, 벼슬을 해도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지켜온 후손들의 지나친 겸손(?) 때문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역 주민, 특히 경산시 당국에 대한 아쉬움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남의 흉은 감추어도 미덕은 드러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찍부터 지역사회에서 널리 소문이 난 아름다운 이야기를 관련 당국이 홍보는커녕 오늘날 덮어두고 있다는 점이다.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한 지역의 독특한 부자 이야기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서도 이렇게 놀리고(방치하고), 사장시키고(잊어버리도록)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부자 후손들도 이제는 "오부자 이야기"와 "오부자 오주택"이 후손들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지역의 주민과 사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관심을 갖고, 지키며 가꾸어야 할 공동의 가치이자, 소중한 자원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5. 봉암골에서 또 다른 오부자의 흔적들
여기서 봉암골로 4km 더 올라가면 새짚골(샛짚골, 새작골)에도 오부자 형제 윗대 조상들의 산소가 있다. 오부자 형제들의 산소가 봉암골(붙도랑과 새작골)에 있는 이유는 윗대 조상들이 장림(임당)에 살은 것이 아니라 원래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부자 형제 윗대 조상 산소가 있는 새짚골 도래솔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름들이 왕솔이 하늘을 치솟아 장관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산소에 벌초를 봉암골 주민이 했었는데 우리가 그 벌초를 했었다. 우리는 수년간 한가위가 다가오면 오부자 산소에 형들과 함께 도시락을 사가지고 가서 벌초를 수년간 해 온 경험이 있다. 현재 봉암마을 주택지(562번지)와 벌을 치고 있는 허리밭(553번지)에 오부자 형제들의 전답이 있다.
우리 가족 3형제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오부자 이야기를 듣고, 또 아버지의 바람도 있고 해서 우리도 삼형제 협동작업으로 산에 소깝(솔개비)을 해서 팔아 이런 방식으로 부자가 되어보자고 예비 계획(대보름날 이후 며칠간 공동작업, 공동저축, 개별배분)을 세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형님들이 군대에 가고, 취업 등으로 봉암골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실천해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 혼자라도 이 방법을 실천해 보려고 용돈 아껴 저축하기를 몇 번 시도했고, 조금 모을 수 있었는데 외부 요인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그때 형제의 계획을 실천했다면, 지금은 우리 형제도 오부자 이야기처럼 "봉암골 삼부자"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인데...
2013년 12월
봉암골 사람들(010-9909-2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