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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Asan UBF 주일메세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말씀 / 이사야 7:1~25
요절 / 이사야 7:14
2017년 성탄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올해도 성탄에 많은 사람들이 산타클로스를 생각할 것입니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생각하고, 트리에 선물 달아 놓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시내 교통이 마비 됩니다. 들뜨고 쏘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기초로 성탄을 기다리고 성탄을 맞이 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성탄의 큰 기쁨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요. 때는 유다왕 아하스 때였습니다. 아하스의 할아버지 웃시야는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나라의 힘을 키워 주변 나라들을 이기고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웃시야 왕 재위시절 남유다는 힘없이 이웃나라에게 침략 당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기는 나라였습니다. 지도자는 공이 있으면 과가 있는데, 웃시야는 제사장직을 침해하였다가 말년에 문둥병에 걸리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 왕인 요담, 아하스의 아버지는 선대의 좋은 점은 계승하고 나쁜 것은 버렸습니다. 아마샤, 웃시야, 요담 3대에 이르는 왕들의 재임기간 동안 남유다는 강한 나라였습니다.
아하스가 재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달리 그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우상숭배자였습니다.
당시 국제정세 상황을 보며 두려워하고 해결책을 우상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나라는 쇠퇴하고 힘을 잃었습니다.
동시대의 북이스라엘 왕은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였습니다. 아람(지금의 시리아) 왕은 르신이었습니다. 4절을 보면 이 두 나라의 왕들이 심히 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유는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말 잘 듣고 큰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와 터키 남부, 이집트에 이르는 큰 제국을 이룩한 나라입니다. 앗수르의 군사력이 왜 강력했는지 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데, 전차의 개량, 기병의 운영 등을 꼽는 연구자도 있지만 전쟁사에서 의미 있게 보는 것은 역사상 최초의 병참지원 부대 개념을 도입하여 운영하였기 때문에 전쟁수행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근거로 대단히 오만하고 잔인하였습니다. 여러나라, 많은 민족들을 힘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나라는 온 국민들을 몰살시키고 그 머리로 해골탑을 쌓았습니다. 순순히 항복한다해도 왕과 귀족들의 코나 턱에 구멍을 뚫고 짐승처럼 고리를 달아 끌고와서는 처형하였습니다. 항복한 나라 백성들은 이곳 저곳에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러한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서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남유다도 함께 반 앗수르 동맹에 동참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남유다 아하스가 앗수르의 속국이 되겠다고 하자, 크게 화가 난 것입니다. 그들은 앗수르에 대항하기 전에 남유다부터 없애야겠다고 하며 쳐들어왔었습니다. 그것이 1절에 기록한 사건입니다. 1절 말씀에는 아람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가 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했지만, 사실은 예루살렘성만 정복지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 남유다 전국토가 점령 당했습니다. 이때 남유다 12만명이 전사 하였고, 20만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또 동맹을 맺고 남유다 침공 준비를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소식을 들은 남유다 아하스와 백성들은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처럼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이제는 진짜 망하겠다’고 하며 두려움과 부정적인 말을 마구 떠들어댔습니다. 공동체내에 두려움을 더 크게 전파하고 절망과 낙심을 더 깊이 파고들게 하였습니다.
아하스의 할아버지 웃시야는 주변의 강한 나라, 블레셋, 모압, 암몬들을 모두 무릎꿇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요담은 웃시야 때보다 더 강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런 나라를 물려받은 아하스는 왜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까? 선대에는 강한 나라였던 남유다가 왜 이렇게 나약한 나라가 된 것입니까?
아하스는 믿음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상황을 중심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대세는 앗수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앗수르에 가서 속국으로 살겠다고 정치적으로만 머리를 조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앗수르 황제 디글랏 빌레셀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앗수르의 우상을 가져와 예루살렘에 앗수르 우상의 단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의 귀한 기물들을 앗수르 우상 신전의 기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을 버리고 앗수르 중심, 앗수르를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내면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므로 무엇을 한들 두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뭔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만, 근본 하나님이 없는 그와 그의 나라에는 어떤 것을 하여도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종이 된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종 이사야를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아하스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앗수르의 우상을 세운 사람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한 나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를 도우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아하스를 두려움과 공포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그가 내면의 두려움을 몰아내도록 도우십니다. 아하스는 고생을 더 해야 합니다. 아하스는 마음이 완전히 녹아야 합니다. 아하스는 자기가 뿌린 죄의 열매를 거두고 그 쓴 맛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하스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ubf 5~9절을 보십시오.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하스가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아하스를 향한 위험을 구체적으로 해결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먼저,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지금 도모하고 있는 침공계획을 무력화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최대 지파로써 인구가 가장 많고 강성한 군사력을 가졌습니다. 아람은 세계 최강 앗수르와 맞서서 버티고 있을 만큼 군대가 강합니다. 이 두 나라가 지금 유다를 침략하여 아하스를 몰아내고자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이 성사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세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두려움의 팩트를 정확하게 짚어 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남유다를 위협하는 저들 나라와 오만한 왕들을 없애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이 말씀은 다른 성경을 보면 ‘시리아의 수도는 언제나 다마스커스의 국한될 뿐 르신이 그 영토를 더 이상 넓히지 못할 것이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이 말씀도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에 국한되고 베가의 왕권도 더 이상 신장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스는 지난번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공 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다 남자 12만 명이 단 하루만에 전사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은 20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피해를 준 나라와 그 왕들을 하나님께서 원수 갚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저들이 유다의 아하스를 폐하겠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람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를 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하스와 유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하스가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아하스와 유다 백성이 앗수르의 우상에 절하는 것을 빨리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 유다의 회복을 원하십니다.
9절 후반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만일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으면 너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하스와 유다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무시하면 유다도 북이스라엘의 전철을 밝을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니” “만일 네가 내 말을 확인하고 싶으면 표적을 구하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무엇이든지 좋다”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와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불신의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말씀하신대로 행하신다는 표적, 사인을 구해도 좋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하스와 유다에 대하여 긍휼과 은혜를 주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아하스의 머리 속에는 딱 하나 ‘앗수르’만 들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위협에 대한 답은 ‘앗수르’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 버렸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공손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나는 하나님을 찾지 않겠다’ ‘내 살길은 내가 마련하겠다’는 불신과 고집과 오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하스는 불신과 우상숭배로 패망의 길을 걷는 북이스라엘 왕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믿음의 발자취를 전혀 배우지도 따르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보다 상황이 중요하고 믿음보다 이성적 판단을 중시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멸시하고 내 살길은 내가 궁리하여야 한다는 저주받고 타락한 자의 생각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아하스의 불신을 책망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하나님을 괴롭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작년에 여러 학생들이 실업자로 살지언정 예수님께 인도하는 목자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4년제 국립대를 졸업한 청년들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지언정 목자의 도움은 안받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추천해준 회사에 집단 사표를 내고 도서관과 독서실에서 암담하게 지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을 불렀더니 “제가 그걸 받을 자격이 되나요?” 하였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죄를 사랑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기독교를 싫어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젊은이들은 반기독교 정서에 빠져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비리를 기독교 전체의 문제로 단정합니다. 일부 기독교 사학의 비리를 전체 기독교인의 비리로 단정합니다. 부분을 전체로 덧씌우는 프레임이 제대로 먹혀 들어서 우리나라 10대들의 크리스천 비율은 5%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통계가 맞다면 우리나라 10대들은 미전도종족으로 분류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하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 우리 사회의 모습, 우리 시대의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아하스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기보다 자기를 더 의지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을 마다하고 돈이 자기를 구원해준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믿음은 믿음이고 현실은 돈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의 후배 한 사람은 복 주는 분이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센터에서는 목자 보기에만 좋은 모습 보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에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가 대학원에 가더니 교수님을 더 잘 모셨습니다. 교수님이 하나님보다 더 우선입니다. 그는 30년 동안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14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아서 징조 구하는 것 조차 하지 않겠다고 하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징조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하스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안타깝고 너무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제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타는 심정입니다. 집앞에 앉아 아들이 이제 오나 언제 오나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그러면 아하스에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시며 구체적인 징조를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무엘상 4장 19~21절에는 엘리의 며느리이며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고 ‘이가봇’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이 나옵니다. 이가봇은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엘리의 며느리가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이스라엘의 사사인 시아버지와 남편과 시동생이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방식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주시는 징조와 표적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유다와 아하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적은 아이를 낳고 그 이름을 ‘유다는 배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유다는 앗수르의 똘마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이렇게 하여야 그 시대를 올바로 평가하고 그 시대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아이는 직접적으로는 마할살렐하스바스라는 아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봅니다.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의 뜻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하스와 유다 백성과 함께 해주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아하스와 같은 자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을까요?
저는 최근,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장소가 속한 학교에 외부 기금을 따서 주었습니다. 이 학교는 그것을 끝내 무산시켰습니다. 여러 교수들의 책임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본부 보직 교수 한 사람은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이중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는 여기 저기 다니며 다른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본심 따로 말 따로 우유부단하면서도 이중적이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사업 무산의 결말을 그 교수가 지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이 앉아 있는 것조차 화가 났습니다. 저는 그를 생각만 해도 구토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과 같이 밥을 먹게 한 사람까지 미워졌습니다. 도대체 왜 나를 그 인간과 함께 밥 먹는 자리에 불렀는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하스는 얼마나 중한 죄인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예루살렘에 우상의 단을 세워 십계명을 심각하게 어긴 죄인입니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강한 나라를 망쳤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과 싸워서 패하였고 아람과 싸워서 졌습니다. 그가 나라를 얼마나 망쳤는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때에 모두 굴복시켰던 암몬, 블레셋 심지어 에돔까지 유다에 쳐들어와서 유다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가고 노략질 해 갔습니다. 나라를 이렇게 망치고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스는 구제불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왕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다 백성들과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하스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립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어떻게 유다와 아하스는 이렇게 죄악될 수 있을까?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임마누엘’의 진정한 실현으로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23절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죄악 가득한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아하스와 같고 아하스보다 더 악한 죄인들인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죄의 깊은 잠에 빠져서 하나님을 알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그몸으로 우리의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죄로 가득한 아하스에게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시는 사랑, 그 지극하신 사랑과 은혜가 가장 분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하스보다 나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하스가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하스와 같고 아하스보다 더한 우리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15,16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이라 이름한 아기 마헬살랄 하스바스가 철들만큼 자라나기 전에 아람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가 폐위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17~25절을 보십시오. 아하스가 그렇게도 목을 매고 오매불망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던 앗수르가 장차 유다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만 오면 북이스라엘과 아람으로부터 구원받을 줄 알았습니다. 아하스는 제발 앗수르 황제가 와서 유다를 구원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요청대로 온 앗수르는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국제정세는 지금이나 그 시대나 냉혹하고 오직 자기의 유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앗수르는 오히려 유다까지 공격하였습니다. 아하스는 궁전과 성전의 모든 금을 바치는 것도 부족하여서 성전 기둥의 금박까지 벗기고 왕국내 귀족들이 가진 금까지 다 모아서 바칩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멸망시킬 뿐만 아니라 유다까지도 탈탈 털어갑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앗수르나 이집트나 유다의 구원과 행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긍휼도 없고 의리도 없습니다. 이방 강대국을 의지한 결과는 비참한 패배와 궁핍과 곤란 뿐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는 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다윗을 닮은 훌륭한 왕도 있었지만,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저버린 왕도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왕들도 대부분 우상을 섬기다가 큰 환난을 만나면 뒤늦게라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아하스 만큼은 곤란을 겪고 환난을 당하여도 오히려 더 우상에게 매달렸습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우상숭배로 풀고자 하는 대단히 어리석고 죄악이 가득한 자였습니다.
이렇게 죄악가득한 아하스 왕 때에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징조와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일부 대형교회의 물량주의, 세속주의는 악영향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세상권력을 획득하고자 싸우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기득권 세력의 중요한 축으로 보고 반기독교 정서를 이 나라에 정착시켰습니다. 교회는 이런 도전에 대처하지 못하였습니다. 내부의 문제와 외부의 문제가 심각성을 더하는 가운데 각 교회들은 외적 성장과 물량적 확장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틈에 교회내에도 개혁을 표방하다가 반기독교 세력들과 손을 잡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한 이단세력에 넘어가는 성도들도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우리 시대는 세상의 문제보다 더 깊은 교회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문제를 안고도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문제를 유발시킨 죄가 드러나도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들의 한계로 인하여 교회는 시대의 문제를 풀어내는 역할을 능동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수많은 아하스들이 세상을 망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어렵게 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답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2017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잘 아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문제, 우리의 어려움,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2017년 성탄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 우리 교회의 문제, 우리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나의 죄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나의 죄 문제 해결이 먼저 입니다. 나를 사로잡은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그 어떤 문제가 해결된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죄악 가득한 나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죄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나아가 나의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이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 답이 있습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은혜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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