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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평가와 정치운동 전망]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들어가며
2012년 겨울,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국가적 행사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부르주아 대선이 끝났다. 지금은 한 편의 대형 정치쇼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통치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준비에는 늘 수많은 잡음과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슈들이 생산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부르주아 권력 재편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선거에서 패배한 쪽에는 정비 기간을 주어 부르주아 민주주의(선거)에 대한 환상을 지속하게 한다.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 정치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나? 노동자 독자후보에서 비판적 지지까지 늘 반복되는 선거전술의 재탕과 이합집산 속에서 두 명의 노동자후보, 민주노총의 무능, 저조한 득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등 최악의 선거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부르주아 선거 국면을 노동자정치로 돌파하기는커녕, 노동자운동 전체의 쇠락을 가속하는 역할을 했다.
선거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부르주아 선거의 기억은 오래가지 못한다. 문재인은 1,400만 표 이상을 획득했음에도 승자만이 살아남는 정치쇼에서 어느새 잊힌 사람이 되었고, 이번 대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안철수의 화려한 복귀의 그 빛 역시 바래고 있다. 노동자 투쟁의 기억은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어 계급투쟁에 도움이 되지만,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한 노동자 후보의 흔적은 금새 지워진다. 이미 부르주아 정치 시스템에 편입된 부르주아 정치 세력들은 자체 정비 기간을 거쳐 의회 활동, 보궐선거, 각종 사회적 이슈 등을 통해 자연스레 정치무대에 등장하겠지만, 노동자정치는 더욱 잊혀 가거나 부르주아 정치세력에 계급 고유의 과제마저 넘겨줄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총 상층 관료 상당수는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고, 조합원들은 압도적으로 부르주아 정치인을 지지했다. 이것이 2013년 한국 노동자계급의 현실이며, 노동자정치의 출발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진영 내부는 어떠한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은 있었는가, 내부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투쟁은 벌어지고 있는가? 이제야말로 낡은 운동과 과감히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모색할 때가 되지 않았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반성하지 않는 세력들의 기득권은 여전히 방어되고 있다.
노동자민중 운동 진영 안에서 아래로부터의 내부혁명이 가능하게 하려면 기존세력이 기득권을 내려놓던가, 전면적인 내부투쟁으로 기득권을 몰수해야 한다. 비정규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모든 단위에서 동등하게 의사결정기구 참여를 보장받아야 한다. 소수 혁명적 정치세력은 모든 대중조직에서 완전한 정치활동을 보장받아야 한다. 막강한 부르주아 정치권력에 맞서 주요 생산수단의 사회화(국유화)와 노동자통제를 주장하던 세력들이 왜 노동계급 내부의 문제에는 소극적이거나 부르주아 방식에 머물고 있는가.
이에 우리는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의 창출을 위해, 부르주아 정치제도(선거) 자체에 적대하는 입장에서 대선을 평가하고 현실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려 한다. 아직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역량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정답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므로 실천 속에서 모든 것을 열어 놓고 토론하고 검증받으면서 새로운 운동 원칙과 조건을 창출해 나갈 것이다.
1. 부르주아 선거 평가에 대한 코뮤니스트 관점
우리는 작년 부르주아 대선을 맞이하여 '사회주의의 정치의 실종'과 ' 부르주아 선거 자체에 대한 거부'를 주장했었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과 투쟁하며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함께 내세우고 있는가? 부르주아 정치판에 ‘진보’ 정당이라는 이름으로 끼어들어 노동계급을 배신하고 부르주아의 한 분파로 행세했음을 반성하고 있는가? 일부에서 ‘노동자 민중후보’를 내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 후보전술을 쓸 때인가? 제발 좀 반성하자.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지 말자.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맞서자.
노동자 대중의 열망과 사회주의 정치의 무능력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 파시즘이다.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정치의 진정한 복원만이 파시즘을 이기는 길이다."
(오세철,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11쪽)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은 지배계급의 위기를 평화롭게 넘기는 것이며, 격화되는 대중 투쟁을 잠재우고 대중의 불만표출을 잠시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선거에 휩쓸리지 말고 투쟁의 동력을 유지해 선거 이후 더욱 강력한 투쟁으로 지배계급에 맞서야 한다.
선거는 짧다. 두 개의 노선은 대립하고 있다. 사민주의와 동거, 선거정치 몰입이냐, 계급적 대중행동 투쟁 촉구냐?
이제라도 부르주아 잔치판에서 뛰쳐나와 노동계급의 자리에서 자본주의가 인류 참상의 원인이고, 이를 넘어서는 코뮤니스트 사회만이 대안이라고 대중적・공개적으로 말하고 싸워야 한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과 함께 투쟁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내세워야 한다.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11월)
이 주장은 단순히 후보전술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선거를 판단하고, 노동계급 고유의 영역에서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정치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코뮤니스트 관점의 선거 평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기존의 선거평가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의 모든 선거 평가는 표 분석(계층, 계급, 나이, 성별, 지역 등)과 표를 얻기 위한 선거운동 전반(후보자와 정책 포함)에 대한 사회학적, 통계적 분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 자체가 부르주아 선거제도에 포함된 선거 메커니즘의 일부기 때문에, 계급의식 측면에서 노동자 정치의식에 대한 분석은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정치의 선택지 안에서의 투표행위는 계급의식을 왜곡해서 반영하기 때문에 득표수를 근거로 노동자 정치의식을 판단할 수는 없다. 또한, 계급의 불만을 체제 내로 흡수하고 지배 권력을 재편하는 것이 본질인 부르주아 선거를 지배계급 대 피지배계급의 계급투쟁 관점에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부르주아 선거가 모든 대립 구도를 흡수하는 시스템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한 표 분석이 아닌 장기적으로 선거 이전과 선거 이후 계급의식 변화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선거 국면에서 정치세력들이 계급의식에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부르주아 선거제도가 일반화되어, 체제 위기 극복의 필수 요소가 된 지금이 바로 부르주아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관점에서 선거 평가를 해야 할 시점이다.
그렇다면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선거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선거 시기 부르주아 민주주의(선거) 환상에 대한 계급의식 수준을 분석해야 한다.
둘째, 선거 시기 노동자 대중의 열망이 어떻게 선거에 흡수되는지, 사회주의 정치 세력을 포함한 선거 참여가 대중투쟁과 정치운동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평가해야 한다.
셋째, 선거 이후 선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과 새로운 계급투쟁 창출을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아쉽게도 이번 대선평가에서는 계급의식 분석에 대한 사전준비가 부족하여. 문제 제기 수준에서 머물렀다. 앞으로 계급의식에 관한 조사와 연구는 장기적인 계획으로 진행될 것이며, 혁명 주체 문제를 푸는 단서를 제공할 것을 기대한다.
2.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정치 노선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첫째, 부르주아 정치에 이미 편입되어 있거나 전문적인 선거(의회)주의 세력을 우리는 '부르주아 정치의 좌파'라 부른다. 과거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에 뿌리를 둔 진보정당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그들과 연합했던 다함께와 같은 정파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의 일부는 특별히 선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정파와 연합하거나 비판적 지지를 보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부르주아 정치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둘째, 의회주의, 수권주의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강령을 내걸고도 선거 시기에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했던 사노위와 같은 세력을 사회주의 정치에서 후퇴한 기회주의 정치로 판단한다. 이들은 선거(연합)를 통해 대중투쟁 확산과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지만, 결국 계급투쟁과 무관하게 선거운동만 한 셈이 되었다.
셋째, 노동자(사회주의) 후보를 세워 선거에 참여하려 했으나 현실 조건이 되지 않아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들이다. 이들은 본질에서 후보전술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둘째 세력과 유사하다. 다만 현실에서는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전술에 대해 제한적인지, 적극적인지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넷째, 부르주아 정치와 단절하거나 선거전술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사회주의/코뮤니스트 그룹과 혁명적 사회주의자 개인들인데, 이번 선거에서 모두 후보전술 자체를 반대했다.
3. 정치 노선별 대선 참여와 거부의 이유
위의 정치세력들이 이번 대선에 참여하거나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부르주아 정치인 문재인을 지지하거나 비판적 지지한 세력은 제외한다.)
첫째, 변혁모임, 사노위 등은 대선 시기 정세개입(야권연대 반대)을 통해 대중투쟁을 촉진하고 이후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기조하에 후보전술을 구사했다.
“‘대선기획단’의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 야권연대 반대, 완주하는 노동자민중 독자후보, 당 건설 및 대선 대응 분리”라는 정치적 기조와 ‘변혁모임’의 “야권연대가 아닌 노동자 대통령 독자 후보 출마와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통해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이러한 정치적 기조에 동의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를 결성했다. 선투본은 논의를 거쳐 2012년 대선투쟁의 기조를 ‘투쟁하는 노동자 대통령 / 탐욕의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대선투쟁 / 야권연대가 아닌 노동자 계급정치 강화’로 결정하여 2012년 대선투쟁에 임했다.”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보고 및 평가(안), 2013년 1월 25일)
하지만 이러한 정세적인 당위성과는 다르게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 노선의 후퇴와 변경, 그리고 변혁모임으로 표현되는 전투적 노조운동의 위기 상황에서 정세개입과 당 건설 당위의 압박이 작용한 결과 무리한 선거전술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주체역량의 문제를 계급투쟁의 성과로 해결 하려 하지 않고, 통진당 사태 이후 공백이 생긴 진보정당 영역을 선거의 매개로 차지하려 했던 것이 오류의 핵심이다.
둘째, 노건투, 해방연대, 사회주의 유기적 지식인 등은 역량 부족, 후보전술 절차와 선거 강령상의 문제, 그리고 진보신당 참여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며 노동자후보 캠프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변혁모임의 선거논의 과정에서 독자후보투쟁에 대한 반대 이유를 밝혔고 김소연 후보 선거투쟁에 함께 하지 않았다. 변혁모임은 아직 후보투쟁을 감당할 수 있는 정치적·조직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정치적으로 정돈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정돈하지도 않고, 조직의 실력을 냉정히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선거에 뛰어드는 것은 선거주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며 정치적 투기라고 판단했다.”
(이용덕, 노건투, 정세초점, [2012년 대선/ 노동자후보투쟁이 남긴 것], 2012년 12월)
“노동자 후보를 내세워 대선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역시 선거로는 안 된다는 식의 반응, 대중운동이 바로서야 한다는 진지하지만 상투적인 반응 등 여러 이야기가 떠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확인한 것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량부족 자체였고 그것 이상의 한계는 없다. 선거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선거투쟁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후보가 필요했고, 대중운동이 바로 서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제대로 서지 못해 대중운동이 지리멸렬한 탓이다.”
(김광수, 해방연대, 해방 75호, [낡은 것, 뒤쳐진 것과 단절하고 사회주의 정당 건설하자])
이들의 후보전술에 대한 비판은 일면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아쉽게도 부르주아 선거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부르주아 선거참여를 전술의 하나로 판단하는 낡은 사고를 보여주었다. 또한, 강령에 입각한 당 건설이라는 원칙과 낮은 차원의 공동전선 형태인 변혁모임 참여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후퇴하거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거전술' 문제는 일찍이 코민테른 시절부터 볼셰비키와 코뮤니스트 좌파 사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레닌과 호르터의 논쟁, 트로츠키와 보르디가의 '혁명적 의회전술' 과 '보이콧 전술' 등으로 알려진 선거전술 문제는, 흔히 알려진 대로 ‘부르주아 의회를 통한 혁명 전략의 부정’이나 ‘부르주아 의회(선거)의 이용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본질이 아니다.
이것의 본질은 러시아의 후진적 정치상황에 적합한 볼셰비키의 의회전술을 일반화하여 유럽 국가들에도 적용하려는 코민테른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 수준에 오르고 노동자평의회가 현실화되어 의회의 이용 자체가 혁명운동에 걸림돌이 된 유럽의 혁명적 코뮤니스트들의 반(反)의회적 혁명 전략이 대립한 결과이다. 당시의 유럽은 이미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부르주아계급 일부가 되어 버렸고, 이들이 진출한 의회가 오히려 노동계급을 학살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혁명적 코뮤니스트들은 의회를 이용하기보다는 의회를 타도할 목적으로 반의회적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현재에도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혁명) 조직들은 반의회주의와 선거 거부에 대한 원칙을 강령에 정확히 명시하고, 그에 복무하는 전술을 펼치고 있다. 즉, 부르주아 선거는 전략의 문제이고, 현실적으로는 '부르주아 정치 참여(선거전술)'와 '부르주아 정치 전복(선거거부)'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혁명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조직은 '선거전술' 문제를 강령으로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 일반적인 정세에서 선거전술을 사용하면서 아주 특별한 경우에 선거거부(보이콧)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거부와 부르주아 정치/국가 전복을 기본 목표로 하면서 아주 특별한 경우에도 선거개입은 제한적으로만 검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셋째,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은 부르주아 선거와 후보전술 자체를 반대하였다. 즉,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원칙을 강령 수준으로 판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계급은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는 투쟁으로만 계급 간의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 수 있다.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의 방식으로 직접정치를 실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형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코뮤니스트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44쪽)
마지막으로 대선에 참여한 70%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선거제도를 자신의 삶으로 완전히 받아들였는가! 이다. 한국에도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25년간 부르주아 선거제도가 확실히 정착되었다. 즉, 모든 정치가 선거를 통해서만 결실을 보며, 선거 메커니즘 자체가 삶의 일부가 되었고, 대중들을 자연스럽게 투표소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번 선거에 투표율이 높은 것은 계급의식 측면에서 계급적 열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면적으로 흡수된 결과이기도 하다.
4. 후보전술의 실패와 계급의식의 왜곡
지난 대선에서 노동자 후보를 내세운 세력은 왜 실패하였는가?
한마디로 기획단계에서부터 모든 과정이 총체적으로 실패한 결과였다. 노동자 민주주의와 상관없는 자신들만의 후보선출과정에서부터 선거운동 기간 동안 선거투쟁이라는 목적에 맞는 전술은 부재했다. 특히 짧은 준비 기간은 후보등록 자체를 목표로 만들었고, 선거운동을 치를 역량조차 부족하여 처음부터 (선거 전문) 진보신당의 직간접적 도움이 필요했다. 말로는 ‘구속되는 후보’, ‘투쟁하는 노동자 집단후보군’을 내세웠지만, 현실에서는 철저히 선거법의 테두리 안에 갇힌 채 선거 유세에 전념해야 했다. 대중 집회, 광장 점거, 자본의 상징 타격 등과 같은 투쟁은 벌이지 못했고, 이들이 공격적으로 타격해야 했던 선거법은 오히려 삼성, 현대차 등 자본가들이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며 이들의 선거 유세를 방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후보를 내세워 노동자 투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환상과 조급성이 후보중심의 전술을 강제하고, 위로부터의 공동전선, 심지어 사민주의 세력과의 선거연합을 허용하고, 나아가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게 되어, 결국 선거 개입은 항상 대리주의와 선거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더욱이 국가보안법의 탄압에도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10여 년 전으로 후퇴하여, 사민주의자들도 상당수 수용하는 경제 요구를 노동계급의 행동강령이라고 내걸고, 사민주의 세력과도 기꺼이 연합하면서, 대중투쟁과 직접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부르주아 정치 공간에서 벌이는 선거 개입이야말로, 사회주의운동을 급격하게 퇴보시키는 정치적 타락행위이다.”
(이형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코뮤니스트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43쪽)
이런 정치적 퇴행의 근본 원인은 사실은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이라는 당면과제가 난관에 봉착하자 이에 대한 해결책을 선거 개입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로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 검증에 따른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세력의 재구성을 통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들과 코뮤니스트 운동이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계급 안에서 혁명적 주체를 세우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을 통한 당 건설을 해나가는 원칙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주체의 조건이 아닌 진보 정당류와 노동조합과 같은 주변 변수에 흔들리는 당 건설 노선일 수밖에 없다.
김소연 선본은 선거 이후 다음과 같이 자체적인 선거 평가를 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하여 독자적 노동정치 자체를 포기해 버리려 한 현실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얼마 안 되는 좌파 정치 역량으로 2012년 대선을 치러낼 수 있을까 회의하고 우려하는 현실에서!
그래서 노동조합의 일부 상층 지도자들이 문재인과 안철수 등 자유주의진영에 투항해 버리고, 현장 활동가들이 좌절하여 노동조합‘만’으로 후퇴해 버리거나, 좌파 정치 활동가들이 역량 부재를 탓하며 서클정치에 안주해 버린 척박한 노동정치의 현실에서!
그 얼마 안 되는 역량을 가지고, 노동자대통령 선투본은 2012년 대선투쟁을 역동적으로 완주함으로써, 독자적 노동자계급정치의 가능성을, 그 꺼져 가는 불꽃을 다시 살려냈다.”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 보고 및 평가(안), 2013년 1월 25일)
이러한 평가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왜곡과 자기만족형 평가다. 김소연 선본 평가서에서 주장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하여 독자적 노동정치 자체를 포기해 버리려 한 현실”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민노당 시절부터 노동자 직접정치와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종된 대리주의 정치무대를 떠난 상태였다. 과거 노동자들이 민노당을 지지한 것도 노동자정치 환상과 의회주의 환상이 결합하였기 때문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졌으나 ‘독자적 노동정치’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민노당은 처음부터 독자정치가 아닌 민족주의와 연합하여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는 의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김소연 선본을 주도한 사노위 또한 8차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97년 이후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관련해 노동자·진보정치진영 내에서 형성된 양자택일적이고 왜곡된 대립구도인 ‘선거냐-대중투쟁이냐’의 논쟁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노위 8차 총회 결과, 2013년 1월 12일)
사노위에서 말하는 선거냐-대중투쟁이냐의 논쟁은 왜곡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논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운동진영의 미숙함. 즉 그 동안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근본적인 노선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한편, 현장 투쟁, 현장 복원 등을 주장하고 있는 사회주의 세력은, 여전히 전투적 조합주의와 낡은 정치노선(공동전선, 행동강령)을 버리지 못해 계속된 운동의 축소와 한정된 현장을 둘러싼 쟁탈전이 예상된다.
“이러한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후보들의 선거투쟁은 자본가정당들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조직과 투쟁이 필요하다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의지와 희망을 대변했다. 이 의지와 희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소중한 거름이다.”
(이용덕, 노건투, 정세초점, [2012년 대선] 노동자후보투쟁이 남긴 것, 2012년 12월)
특별히 대선을 지나면서 옛사노련 주축 세력이 혁명당 건설 시기 상조론을, 일부는 노동자계급정당 흐름(변혁모임) 참여 결정으로 당 건설 운동 흐름을 사노련 이전으로 후퇴시킨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사회주의당 건설을 폐기한 세력에 파산을 선고하고 새로운 틀에서 혁명당 건설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노동자 후보전술과 무관하게 부르주아 정치인에게 투표한 70%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계급의식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우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앞서 말한 대로 부르주아 선거 메커니즘에 의해 각자의 정치의식에 따라 유리한 후보에게 투표하였다. 부르주아 선거공간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반정부 의식, 반자본주의 열망은 대중행동이나 선거 거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사람들을 투표소로 향하게 하였다. 선거 국면에서는 모든 열망이 정치적 요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투표행위라는 제한된 여과장치 속에서 모든 것은 가장 큰 이슈나 정권교체라는 목표로 흡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중의 열망을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야권연대로 왜곡시켰다면, 노자후보는 선거에 제한당한 노동자정치로 왜곡시켰다. 노동자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는 세력들은 노동자정치를 노동계급 고유의 영역인 투쟁의 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공간에서 할 수 있다면서 부르주아 서커스 쇼에서 선전선동과 조직화를 꿈꾸며 선거운동을 선거투쟁으로 미화시켰다. 하지만 선출된 사람에 대한 통제권과 소환권을 갖지 않는 모든 선거는 부르주아 정치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선거는 정치와 일상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투쟁의 공간에서 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고 자기 조직화를 통해 투쟁을 발전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실패 속에서 계급이 단련되어 스스로 전망을 가질 때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 투쟁에서의 자기 조직화와 직접정치는 더욱더 어렵다. 따라서 정치조직은 정세에 따라 원칙을 바꾸면서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 자체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 자체에 장기적으로 개입하여 계급 고유의 공간에서 직접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5.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거부 입장
그렇다면 부르주아 선거 자체를 거부한 국제코뮤니스트전망과 같은 세력은 왜 보이콧에 대한 행동을 기획, 실현하지 못했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선거 유세용 집회나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대중총회를 건설하자. 아래로부터의 파업/투쟁위원회, 대중집회를 통해 노동자들이 정치적 의사 표현과 투쟁 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 직접정치’의 토대를 만들자!
선거 시기에는 더욱더 모든 것에서 소외되었던 비정규/중소 영세 사업장 노동자, 장기투쟁 사업장, 장애인, 소수자, 빈민, 실업자, 이주노동자 등 미조직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에 집중하자. 노동자투쟁과 미조직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직접행동이 결합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연대’을 실현하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11월)
단순한 정책반대, 인물 반대를 위한 보이콧이 아닌 계급투쟁과 연관된 선거 거부는 대중의 불만과 욕구가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표출되었을 때 가능하다. 여기에는 선거 거부 투쟁의 경험과 장기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장기적 계급의식 관점에서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중행동을 준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의 입장이 행동을 전제로 할 수 없었다. 대선에 대한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량이 실제 부르주아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고, 선거 거부라는 행동 자체가 아직 대중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선거 거부 행동을 위해서는 선거 환상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 노동자 직접정치에 대한 열망, 노동자 민주주의의 수많은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선거 거부를 구호로만 외치는 것은 정치에 대한 기권이 아니라 장기적인 개입조건 창출을 위한 선전활동, 정치원칙 정립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부르주아 선거 환상에 대한 전면적인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중행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만, 다음의 선거 국면에서 진정한 노동자 정치의 공간을 아주 작게라도 열릴 것이다.
6. 선거 환상의 지속과 ‘노동중심’ 진보정당 건설의 허구성
앞서 우리가 부르주아 정치의 좌파라고 부르는 전문적인 선거(의회)주의 세력은 선거 이후 왜 이합집산하고, 어떻게 선거 환상을 지속시키는가?
이들은 본질에서 ‘선거’가 모든 정치의 중심이기 때문에, 선거 주기에 따라 발 빠르게 재편되는 속성이 있다. 더욱이 의회에 진출하지 못한 정당이거나 소수 의석의 정당은 경쟁력 확보와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 선거를 염두에 둔 이합집산이 필수적이다. 이들 모두는 선거에 지든 이기든 즉시 다음 선거를 위해 선거 환상을 지속시켜야 한다. 2012~13년 이른바 ‘노동중심 정치’가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은 본질에서 노동자정치 고유의 계급성과 전투력을 복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통진당 사태 이후 혼란에 빠진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지지를 다시 한번 끌어내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상층부 중심의 지지세력 확장으로 이어지던 아래로부터의 정치세력화로 이어지던 결국 의회주의와 조합주의의 결합이기 때문에 낡은 운동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
한편, 지난해 11월 구성된 ‘노동정치연석회의’는 넉 달에 걸친 논의 끝에 노동포럼, 노동자정당추진회의, 노동자연대다함께, 혁신네트워크가 새로운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구체적 노력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기존 노동자 정당들의 분열ㆍ분화로 말미암아 조직 노동계급 내에서 정치적 공백이 생겨나고 있다. 노동계급의 여러 정치 경향들이 연합해 이 공백을 메우자는 것이 ‘노동정치연석회의’의 취지였다.”
“새로운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이라는 구상은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발생한 스탈린주의와 개혁주의의 분화에서 개혁주의의 정치 공간을 메우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양당이 제도권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한국 정치 맥락에서 이런 프로젝트는 여전히 필요하다.(그렇더라도 통합진보당이 노동자 정당이므로 특정 쟁점을 놓고 사안별 연대를 해야 한다.)”
(김인식, <레프트21> 99호, 2013년 3월 4일, [분열을 넘어설 진보정치 재편,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 또한 부르주아 정치의 좌파인 이른바 개혁주의 정치의 공간을 메우려는 사고만 있을 뿐, 파산한 낡은 진보정치와 단절하고 새로운 계급정치를 실현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만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는 개혁주의자들의 본질은 노동계급의 주변에서 현 자본주의 위기 상황을 일시적이거나 주기적 현상으로 이해하면서 자본주의 개혁과 보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노동정치, 진보정치로 포장되어 계급에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자본주의에 포섭된 세력이다.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법 제도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고칠 수 있다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에게 조금 더 고통을 견뎌 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본주의 회생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혁명을 통해 낡은 체제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접 사회를 운영하는 것만이 기나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진실을 감추고 오히려 자본주의 회생의 가능성과 환상을 그럴듯하게 유포시키는 이들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수호자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반드시 배신할 거라며 추상적이고 종파적으로 비난하는 자세는 틀렸을 뿐 아니라, 변화하는 노동계급의 의식과 운동에 전혀 개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좌파적 개혁주의 운동과 그것의 성공적 활동을 지지해야 한다.”
(김인식, <레프트21> 99호, 2013년 3월 4일, [분열을 넘어설 진보정치 재편, 어떻게 할 것인가])
자본주의 수호자인 개혁주의자들을 노동계급의 주변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빈자리에 조합주의와 선거주의를 결합한 낡은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앉히려는 행위야말로 기회주의의 전형이라 하겠다. 우리는 1920년대 제3 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에 맞섰던 호르터의 경고를 오늘날 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른바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주장하는 모든 세력에게 오늘날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은,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황폐화하고 노동계급을 오염시키는 기회주의야말로 우리가 급진적으로 되는 것보다 수만 배 나쁘다는 경고를!
“다시 코뮤니스트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의회로 들어갈 것입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은 선거에서의 투표를 위해 옹호될 것입니다. 코뮤니즘을 위해 건설하는 당 대신, 관성적으로 정당들을 조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애국주의자들 및 부르주아 분자들과의 의회주의적 타협이 다시금 등장할 것이며, 그로 인해 결국 서유럽에서 모든 혁명은 점진적인 과정이 될 것입니다. 연설의 자유는 억압당할 것이고, 훌륭한 코뮤니스트들은 모두 추방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2 인터내셔널에서 발생했던 모든 관행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기회주의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 대열 외부에서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과 힘을 황폐화하는 기회주의가 다시 섞여 들어오는 것은 좌익이 너무 급진적으로 되는 것보다 수천 배 더 나쁠 것입니다.”
(헤르만 호르터,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1920년)
결론
이상과 같은 대선평가는 참담한 결과만을 보여주었다. 낡은 것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낡은 것뿐 아니라 운동을 과거로 돌리려는 세력도 있다.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것과의 단절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시켜야 한다. 내부모순의 극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 사상투쟁의 전면화
계급의식의 발전은 노동자의식을 파괴하는 조건들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혁명은 오직 노동계급의 절대다수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사회에서의 노동계급의 조건에 반대하여, 즉 그들의 역사적 혁명적 과업을 생각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방해하고 끊임없이 파괴하는 조건에 반대하여 이루어진다.”
(‘당의 본질과 기능에 대하여’,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e) 38권, 1948년)
낡은 운동과의 단절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사상투쟁이다.
그 이유는
첫째, 노동자 운동이 전체적으로 퇴조하는 현상은 낡은 운동의 몰락과정이지만,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운동 내부까지 침식시켰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전면화된 시기에 노동자 계급의식을 방어할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낡은 운동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사회주의 운동의 유산을 극복하고 과거 운동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면전인 사상투쟁을 위해서는 계급투쟁의 열쇠인 계급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기적이고 총체적인 계급의식 발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모든 대중투쟁 공간에서 자유롭고 제한 없는 정치토론을 보장받고 확장시켜야 하며, 새로운 노동자 토론문화와 토론 능력 발전을 위한 혁명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둘,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 창출
“미국 즉 노동력의 88%가 노동조합에 속해 있지 않고, 20%가 실직상태이거나 혹은 할 일이 충분치 않아 매일매일 점점 더 많은 집 없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으며, 거의 노동조합원에 맞먹을 정도의 많은 프롤레타리아 혹은 후보 프롤레타리아가 감옥에 있는 국가에서, “노동조합을 혁명 전략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발상 즉 혁명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차지한다”는 식의 오늘날 아직도 다양한 그리고 잡다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선전하는 발상들은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로렌 골드너.「Andy Stern 종말과 현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조합 문제」, <반란자노트> 2호, 2010년 10월)
로렌 골드너가 말한 미국의 상황이 한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기나긴 계급투쟁의 침체기를 지나 아큐파이 운동으로 대중투쟁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낡은 운동은 저물었고 새로운 운동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낡은 노동조합, 진보정치를 붙잡고 새로운 운동 창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상투쟁과 함께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계급 스스로 창출해야 하지만, 낡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창조적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과거 투쟁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정세에서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노동조합 자체를 넘어서려는 의식적인 투쟁만이 조합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인식하고, 노조 집행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실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노동자 투쟁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해야 한다. 세계적인 계급투쟁은 다시 한번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분출되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 보여준 용기와 결단, 그리고 깊은 연대 의식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경험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는 비공인파업, 점령 운동 등 새로운 노동자연대의 전형을 창출해야 한다. 지역, 국경을 넘어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실현하는 국제적 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모든 조직 형식은 노동자 민주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수평적인 계급 연대에 기반을 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지역 투쟁평의회와 같은 평의회 형식이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 대중조직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위계질서 없고 선출자를 즉시 소환할 수 있는 수평적 자기 조직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
셋,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면화
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적인 파산이 명백해졌고, 코뮤니즘의 전망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점점 더 필요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코뮤니즘은 인류의 단순한 희망과 꿈이 아니라 역사발전의 물질적 필요성이며, 노동계급이 스스로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첫째, 사회주의 당 건설 노선의 파산선언과 새로운 조건에서의 코뮤니스트당 건설 노선 제시할 것이다. 새롭게 건설될 코뮤니스트당은 세계혁명당 건설에 복무하는 국제적 혁명조직이어야 한다.
둘째, 중단되었던 강령투쟁을 심화 시켜 국제적 수준의 강령원칙을 정립하고, 국제적 차원에서 혁명세력을 재조직화할 것이다.
셋째, 코뮤니스트 좌파의 전통과 교훈을 계승한 세계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과 교류 연대를 활성화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하고, 국제주의 행동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신의 운동 속에서 그동안 투쟁을 패배로 이끈 낡은 것들과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금은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 분출과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의 집합적 존재 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거주의, 민족주의, 조합주의 등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 코뮤니스트 정치와 노동자 투쟁이 직접 만나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세우자! 모든 것은 노동계급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만 하며, 그 목표에 이르는 것은 코뮤니스트와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투쟁에 달렸다.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 길이 먼 것이다!
코뮤니즘은 실현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투쟁과 코뮤니스트 전망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
2013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이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