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던 도시 레닌그라드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과거의 이름을 되찾았다. 바로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St.Petersburg)다.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표트르 대제가 유럽과의 교류를 위해 발트해 연안에 1703년부터 건설한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네덜란드인들이 설계하고, 이탈리아 건축양식으로 지었으며 이름은 독일식이다. 14~16세기 르네상스의 세례를 받지 못했던 주변국으로서, 서구 유럽을 향한 동경이 묻어난다. 옛 도시의 영화를 간직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오늘날 성장하는 러시아 고급차 시장의 단면을 보여주는 곳으로도 의미가 크다.
이는 BMW가 신형 7시리즈의 글로벌 론칭 무대로 이곳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전통과 현대의 도시이며, 이것은 BMW 7시리즈와 같은 맥락”이라고 BMW 관계자는 말했다. 올 상반기 BMW는 러시아 시장에서 30%의 성장세를 이루었다. 세계에서 2곳밖에 없는 M 파크는 싱가포르와 이곳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러시아는 매년 5~10% 성장하는 자동차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BMW 7시리즈만 보면 7번째로 큰 시장이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4번째로 큰 시장이라는 게 더 놀랍기도 하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다. 박력 있고 세련된 도시라는 점에서 7시리즈의 독창적이고 세련된 면모와 일치한다” BMW는 유난히 이 유서 깊은 도시와 7시리즈의 공통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풀 모델 체인지도 아닌데, 론칭 행사는 매우 규모가 크고 호화로운 느낌이다. “럭셔리 세단으로서 7시리즈가 가진 위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홍보담당자는 말했다. 그래서 테스트 드라이브는 여느 때와 다르게 색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럭셔리란 무엇인가?
오늘 만나는 뉴 7시리즈는 2008년 등장한 5세대 7시리즈의 페이스리프트 모델. 외관의 변화는 LED 헤드라이트 등으로 미미하지만 내부적인 개선은 어느 때보다 많은 부분이 이루어졌다. BMW가 말하는 럭셔리의 정의는 최대의 안락함, 편의성, 안전 그리고 미학적으로 뛰어남을 의미한다. 이번 뉴 7시리즈는 이러한 정의에 보다 충실했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앞좌석 편의성에도 신경을 썼고 소음도 줄였다. 뒷좌석에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강화했고 리어 액슬 셀프 레벨링 에어 서스펜션으로 승차감도 향상시켰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가치가 바로 운전의 즐거움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날 하루는 예르미타쉐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어로 ‘은둔지’를 뜻하는 그 이름처럼 독일인인 카테리나 2세가 시집와서 혼자 미술품을 감상하던 것에서 기원한다. 18세기 겨울궁전의 면모는 화려한 금장식으로 드러난다. 실내장식 대부분이 나무 위에 금을 칠한 것이다. 이곳이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것은 엄청난 전시품 규모 때문이다. 5개 건물에 걸쳐 보유하고 있는 미술품과 조각품 개수가 300만 개에 달하는데, 작품마다 1분씩만 봐도 6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르노아르, 모네, 세잔느, 마티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등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 왕족과 귀족들의 수집품은 10월 혁명 이후 국가소유가 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도시 골목골목 사이로 운하가 흐른다. 처음 도시를 설계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금은 작은 배들이 관광객들을 실어 나른다. 예르미타쉐 미술관을 빠져나온 곳에서 보트를 타고 도착한 곳은 M 파크. BMW M 시리즈만을 전용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전시장과 함께 정비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다. M 모델 외의 BMW 차들도 수리를 해준다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개조하는 것을 좋아해 조금만 사고가 나도, 전체 개조를 원한다고 한다. 인디비주얼 시장의 잠재성이 크다는 얘기다.
뉴 7시리즈의 시승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750Li의 키를 건네받았다. 첫인상은 익숙함 그대로다. 라디에이터 그릴 한쪽의 세로 바가 12개에서 9개로 줄었다거나 LED 헤드라이트(코로나 링을 내장한)를 쓰고 에이프런 디자인이 살짝 달라진 변화를 한눈에 눈치 채기는 어렵다. 눈여겨보면 이러한 변화가 앞모습을 한층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점진적인 변화인 셈이다.
“한눈에 BMW임을 알 수 있는” BMW의 디자인 언어는 개성이 너무 강하다보니 웬만한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실내에서의 첫인상 역시 익숙함 그대로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느끼는 변화는 좀 더 화려하다는 것이다. 라디오를 켜면 센터페시아 위쪽 인스트루먼트 패널에서 은빛 스피커가 스르르 솟아오른다. 새로 적용된 뱅앤올룹슨 하이엔드 서라운드 시스템은 실내를 멋진 음악감상실로 변모시킨다. 달리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 강화된 실내 방음은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는 한편 실내에서의 음향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롱 휠베이스 모델인 만큼 안락함은 뒷좌석에 보다 집중된다. 새로 추가된 9.2인치 모니터는 얇고 가벼운 평면 디자인으로 세련된 이미지다. 손쉬운 컨트롤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즐길 수 있다. 사실 롱 휠베이스 모델은 실질적으로 아시아시장이 주요 타깃이다. 독일에서의 판매는 75% 이상이 직접 운전하는 숏 휠베이스 모델이다. CEO나 정치인 등은 운전기사를 두기도 하지만 이들도 주말에는 직접 운전한다고 한다.
시승 코스는 짧은 거리와 먼 거리 두 가지인데, 먼 거리를 선택했다. 200km 남짓 거리로 3시간 정도를 예상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외곽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코스. 그런데 도로는 공사구간이 많고 정체가 심했다. 도심을 빠져나가는 데도 한참 걸렸지만 외곽도로에서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길은 좁은 숲으로만 이어졌다. 사위로 넓은 평야가 펼쳐지는 유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새로 아스팔트가 깔린 길은 도로 구분선을 아직 그리지 못한 곳이 많았다. 신흥 자동차시장으로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재 러시아의 모습이다. 도로에는 낡은 라다와 BMW, 벤츠 등의 고급차들이 뒤섞여 달렸다. 현대, 기아차의 광고판과 더불어 솔라리스(쏘나타), 쏘렌토 등의 모델도 자주 눈에 뛰었다.
컨트롤 스위치 하나로 에코 프로, 컴포트, 스포트, 스포트 플러스 등의 주행 모드를 바꾼다. 에코프로에서는 액셀러레이터를 똑같이 밟아도 표준 모드보다 적은 출력이 전달된다. 이를 통해 연료소모를 20% 가까이 줄일 수 있다. 스포트 플러스에서는 다이내믹 스태빌리티 컨트롤(DSC)의 개입이 늦게 이루어진다. 하나의 차에서 다양한 성격의 운전을 즐길 수 있는데, 그 성격 차이는 분명하다. 그리고 주행 모드를 바꾸는 것에 따라 계기판 디스플레이가 변하는 것도 신선하다.
V8 4.4L 트윈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450마력, 2,000~4,500rpm 사이에서 66.25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한다. 과급 사이클의 손실을 줄여 출력은 10%, 효율성은 약 25% 향상된 수치다. 넉넉한 파워는 편안함을 동반한다. 저속에서부터 뒷받침하는 강력한 토크, 덩치를 의식하지 않는 민첩한 핸들링, 정교한 자동 8단 기어는 상황에 따른 변속 특성으로 운전자의 의도에 즉각적인 응답성을 보여준다.
거칠고 낯선 도로지만 편안하게 달린다. 셀프 레벨링 에어 서스펜션이 달린 인테그럴 V 리어 액슬과 더불어 각 바퀴의 댐퍼를 개별 조정해주는 다이내믹 댐퍼 컨트롤 시스템은 노면의 변화에 따른 차체의 움직임을 최소화시킨다. 안락한 승차감을 위한 세팅이다. 기본적으로 단단한 섀시가 듬직하다. 목적지인 러시안 피싱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시간을 다소 오버했다. 다음 목적지는 예카트리나 궁전. 여기서는 숏 휠베이스 모델을 탔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고급 대형차지만 롱 힐베이스 모델과 비교해서는 소박한 느낌이 들었다. 우드가 빠진 인테리어가 그런 느낌을 더해준다. 물론 충분히 넓지만 왠지 좁은 느낌을 주는 뒷좌석도 마찬가지. 그런데 운전하는 기분의 편안함은 떨어지지 않는다. 드라이버즈카이기 때문이다.
우리 차에 러시아인 가이드가 동승한 것은 행운이었다. 도로는 여전히 복잡하고 정체구간이 많았지만 그녀의 안내에 따라 샛길로 빠져 달렸다. 바다 위를 지나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긴 다리는 하염없이 길었다. 차들의 통행이 뜸한 틈을 타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실었다. 러시아에서 아마 가장 빠르게 달린 구간일 것이다. 그 순간 다리 위에 있는 모든 차들을 압도하는 가속성능을 보이면서도 실내에서 대화가 가능할 만큼 조용했다. 무엇보다 안정감이 돋보였다.
그녀는 최근 러시아의 경제성장을 고무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재집권에 성공한 푸틴 대통령에 대해서는 외부에서의 평가와 상관없이 그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페레스토로이카 이전이 좋았던 점은 인간관계와 교육 부문이었다고. 이 말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조용한 실내는 잠시 심연처럼 조용했다. 그러는 사이 풍경들은 빠르게 뒤로 후퇴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남쪽 교외의 푸시킨에 있는 에카트리나 궁전에 도착했다.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많은 차들을 제쳤다. 아침에 본 예르미타쉐 미술관이 겨울궁전이라면 이곳은 여름궁전. 표트르 대제의 황후인 에카테리나 1세의 이름을 그대로 딴 바로크식 건축물. 프랑스식 정원에 둘러싸인 궁전은 길이가 306m에 이르며 55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호박방이라 불리는 곳. 원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표트르 대제에게 선물한 것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를 침공한 독일군이 6톤에 달하는 호박을 약탈해갔다. 이후 복원작업을 거쳐 2003년 6월 호박방이 재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서 여름궁전으로 이어진 긴 하루의 여정은 BMW 뉴 7시리즈와 함께했다. 오늘의 주제는 럭셔리란 무엇인가? 뉴 7시리즈를 타고 에카트리나 궁전의 마당에 들어섰을 때 이미 럭셔리는 완성되었다. 럭셔리에서 중요한 것은 품격과 더불어 경험이라는 것. 그 경험이란 바로 전통에서 만들어진다는 게 BMW의 메시지. 7시리즈가 세계 럭셔리카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BMW의 철학 때문일 것이다.
글ㆍ 최주식 <오토카 코리아> 편집장
www.iautocar.co.krBMW NEW 750Li크기(길이×너비×높이) 5219×1902×1461mm
휠베이스 3210mm
엔진 V8 4395cc
최고출력 450마력/5500rpm
최대토크 66.25kg․m/20000~4500rpm
0→시속 100km 가속 4.8초
CO2 배출량 199g/km
변속기 자동 8단(수동 기능)
서스펜션(앞/뒤) 더블 위시본/멀티링크
브레이크(앞/뒤) 모두 V디스크
타이어(앞/뒤) 모두 245/50 R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