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
가희의 일기장
윤일호
아이들이 북적북적 노는 모습을 보다 보면 이만큼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풍경이 있을까 싶다. 물론 놀다가 가끔씩 사고도 치고, 싸우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어떤 생명도 흉내 낼 수 없는 생기와 발랄함이 넘실거린다. 가끔은 힘들기도 하지만 선생으로 그 속에 아이들과 있기만 해도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해마다 새로운 학급 담임을 맡는 것은 선생으로서 기쁨이자 내가 살아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저마다 다른 아이들마다의 사연과 이야기를 알고 마음으로 나누다 보면 그 기쁨과 감동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가희, 지금도 기억 속에 또렷한 아이다. 워낙 순하고 맑은 아이였다. 처음 29명 아이들의 담임이 되었을 때만 해도 가희는 잘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다만 거의 날마다 학교가 끝나고 나에게 무언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하는 아이였다. 생각해 보니 별로 궁금한 것도 없는데 참 전화를 자주 하곤 했다.
친절하게도 나에게 미리 우리 반 형편을 알려 준다며 여러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이들 대부분이 시장통에 살아서 말이 거칠다느니, 싸움질도 자주 한다느니, 부모들 성향도 좀 드세다느니,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한 학부모가 학교에 와서 난리를 쳤다느니,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결손가정이 많다느니, 참 여러 이야기를 귀띔해 주었다. 대체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어서 차라리 듣지 않는 것이 낫겠다 싶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더욱 자극이 되기도 하고, 내가 할 일이 많아서 아이들이나 학부모들과 지낼 한 해가 흥미롭기도 했다.
3월을 시작하고 세 주 정도 흘렀을까? 학년 초, 학부모 총회 때 몇 분이 오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사는 모습과 부모님들이 궁금해서 다른 반과는 별도로 다음 주부터 한 달 동안 가정방문을 한다는 안내장을 나누어 주었다.
“샘, 우리 집에 와 봤자 아무도 없어요.”
“왜?”
“엄마, 아빠 일 나가서 늦게 들어와요.”
아이들은 설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안 간다고 할 줄 알았을까?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한 손으로 내가 안심을 시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밤늦게 부모님 오실 시간에 맞춰서 갈 테니까.”
그렇게 3월 말부터 시작된 가정방문은 4월이 다 지나서야 끝이 났다. 하루에 한 집밖에 못가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많이 가 봐야 두 집 정도였다. 어떤 집에는 아버지가 좋아하신다는 막걸리를 사서 들고 가기도 하고, 어떤 집은 아버지가 소주를 좋아하신다기에 소주 몇 병, 어떤 집은 엄마와 아이 둘만 사시는데 맥주만 드신다기에 맥주를 사서 가정방문을 했다.
사실 시골 분들이 숫기가 없어서 그렇지 어울려 보면 참 좋은 분들이 많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그랬고, 시골 마을 아저씨들도 모두 그러셨다. 도시에서 자란 선생 처지로 시골 분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래도 먼저 다가가기만 해도 금세 마음을 여는 분들이 바로 시골 분들이기도 하다.
“아이고, 먼 여기까지 또 찾아왔대요~잉.”
말만 들어도 반가운 가희 할머니가 나를 맞아 주셨고, 가희 아버지와 어머니도 환하게 반겨 주셨다. 가희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농사를 수십 마지기를 짓는데 보기만 해도 부지런하고 수더분한 시골 아저씨였다. 저녁 식사에 아버지와 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몇 시간이 흘렀다. 다음에 읍내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가희 집을 나섰다.
가정방문을 다녀오고 며칠 후, 하도 아이들이 욕을 많이 한다고 해서 욕 공부를 하는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자기들끼리 잘 놀다가 뭐가 꼬였는지 현빈이가 수현이한테 “야, 니네 엄마 이혼했지?” 했다. 수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나도 수현이를 달래 준다는 것이 현빈이를 불러 아이들 앞에서 “너도 아빠 없다고 하면 좋냐?” 하고 혼을 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다음 날 가희가 나 보란 듯이 일기장에 글을 써왔다.
엄마
- 이가희
욕 공부를 하는데 김현빈이 임수현한테 말을 함부로 해서 선생님이 김현빈을 혼낼 때 “너도 아빠 없다고 하면 좋냐?”라고 할 때 진짜 울 뻔했다. 그러면 나도 엄마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빠랑 엄마는 내가 여섯, 일곱 살쯤에 이혼했다. 내가 솔직히 쓰고 싶은 이야기다. 담아 왔던 건데 애들은 거의 알고 있다.
우리 엄마 이름은 〇〇〇다.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나이는 모르지만 나갈 때 느낌은 생생하다. 엄마가 왜 집에 없나 싶었다. 내일이면 오겠지 싶었다. 그래도 오지 않았다. 내가 유치원 갔다 왔을 때 집에 있어야 할 엄마가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다섯 살 때 군산으로 갔다가 6개월이 넘어서 오기도 했다. 지금까지 두 번이나 헤어졌다. 다섯 살 땐 만났지만 지금은 만날 수도 없다. 그리고 생일이나 잔치, 혼날 때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가 있으면 나를 이렇게 혼낼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빠가 대학 졸업하면 엄마를 내가 찾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선생님이 본 엄마는 새엄마다. 일 학년 때 중국에서 왔다. 난 그래도 새엄마가 돈 많이 써서 싫고, 애기 보라면 별로다. 나는 돈도 안 주고 용돈도 안 주고 할머니도 안 주고 맨날 애기 보라고 한다. 그리고 새엄마가 비교하는 게 싫다.
“너는 혼자 커서 동생하고 잘 지내지도 않지만 영승이랑은 같이 커서 이렇게 잘 지내는 거 봐라”라고 할 때 제일 싫다. 지금 기분이 내가 아빠 돈 쓰는 것을 너무 싫어하는 것 같다. 지금 친엄마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 정말 궁금하고 나는 정말 언제 만날까? 내가 만나러 갔을 때 엄마가 돌아가신다면 어떻게 하지? 정말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만나면 좋겠다.
그랬구나. 새엄마였구나.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가희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어서 난 가희 엄마가 새엄마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가희가 이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집안 분위기 어떤 것에서도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밝히기 어려운 이야기인데도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 준 가희가 무척 고마웠다. 난 이때까지만 해도 가희가 그저 나에게 비밀을 솔직히 고백하는 순하고 착한 아이로만 생각을 했다. 대체로 선생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면 아이들도 가정 이야기나 사는 이야기를 스스로 솔직하게 밝히는 편이니까. 그런데 가희는 생각보다 똘방지고 당당한 아이였다. 그것은 5월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는 가정의 달이다. 스승의 날 전날에는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더니 스승의 날에 꽃이며 편지를 준비했다.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교탁 한쪽에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한참 후에 평소처럼 아이들 일기장을 펼쳐 보다 나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바로 아래 가희 일기 때문이었다.
스승의 날 특집 방송
- 이가희
밤 열 시부터 교사가 무엇을 하는지 나왔다. 교감이 되려고 교장의 취미를 알아서 같이 하러 다니고 공문인가 해결하러 다닌다. 학생을 잘 가르쳐서 교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장에게 잘 보여서 교감이 된다. 또 교감이 되려고 가산점을 얻는다. 뭔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대충은 알겠다.
선생이 학생을 잘 가르쳐야지 공문 해결하려고 학생 자습 내 주고 공문을 해결한다. 차라리 나 같으면 교감 안 하겠다. 그리고 선생이나 계속하겠다. 학생들 피해 가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까닭이 뭘까?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선생을 기다리는 학생도 불쌍하다. 똑같이 돈 내는데 수업은 안 해 주고 원. 차라리 전학을 가지.
EBS에서 스승의 날 특집으로 방송된 것을 가희가 보고 일기로 쓴 것이다. ‘아, 아이들도 이런 내용을 보고 이해할 수 있구나’, ‘아이들이 마냥 어린 게 아니구나’, ‘6학년 정도 되면 이런 내용을 비판할 수도 있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모든 선생님에게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못된 승진 문화의 숨기고 싶은 치부이기도 했다.
나는 애써 태연스럽게 물었다.
“가희야, 어제 EBS에서 본 내용 일기로 쓴 거야?”
“예, 교감 선생님 되는 이야기 나오더라고요.”
가희는 별일 아니라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네. 아이들이 다 알고 있네. 정말 아이들 생각을 무시하면 안 되겠네’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한 열흘이 흘렀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는 큰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가희의 일기장에는 어른 못지않게 깊은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 이가희
노무현 대통령이 가루로 변해 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나도 뉴스나 사진들을 보고 많이 울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했던 손녀는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그랬다. 어쩌면 그 손녀도 내가 그랬듯이 겉으로 안 울고 속으로 울지 모른다. 지금도 그러니까 왜 누가 노무현 대통령을 죽게 했나 싶다. ‘서거’ 검정 리본을 잃어버렸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싶다. 그 리본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다 그걸 잃어버려서. 하지만 리본은 잃어버렸지만 추모하는 것으로 계속 앞으로도 좋아할 거라는 뜻으로 노무현 대통령 저금통에 돈을 계속 넣을 거다.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사람이 슬퍼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도 수사가 끝나 다시 좋은 생활을 할 거다. 노무현 대통령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았다.
어른들도 쉽게 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일기장에 쭉쭉 써 내려가는 가희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오히려 보통 어른들보다 훨씬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힘들고 고되다가도 가희 일기장을 보면 얼굴이 펴지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가희는 벌써 고2가 되었다. 진안읍 내 고등학교를 다녀서 가끔씩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가희야~” 하고 부르면 또래 아이들 속에서 부끄러워 안 그럴 법도 한데 손을 번쩍 들어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공부도 제법 잘한다고도 하고, 밝고 바르게 커 간다고도 하니 기쁘고 자랑스럽다. 힘든 처지에도 늘 마음만은 당당했던 가희, 힘든 세상 가운데에서 더욱 생각나는 아이다.
윤일호 전북 진안에서 작은 학교 아이들과 흙, 땀, 정을 소중히 하며 살려고 애쓰며, 2009년 〈어린이문학〉으로 등단했다. 어린이 글모음 〈힘들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고〉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