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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타고 M시 공증 청사로 운전면허증 공증하러 찾아갔다. 건물의 1층 로비에 들어서니 8명 쯤 되는 장정들이 휴게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흡연을 하거나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관공서에 의뢰한 공증 서류가 조속히 완성되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운전면허증 공증실은 3층이라 하여 그리로 올라갔다. 그 곳 역시 서류를 의뢰하고 나서 완료되기를 기다리는 대기 중 인원이 10여명 넘었다. 휴대폰 게임하는 이, 쪽잠 자는 이, 한담하는 이, 타인의 서류절차 진행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이…… 그들 역시 1층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시간아 좀 빨리 가거라를 하나같이 복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공증을 의뢰한 후의 즉석 결과를 원하겠지만 가운데 걸려있는 시간이 보통 3시간이 되는지라 여기서는 기다림의 왕좌에서 시간을 반죽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기다림의 자세는 도시 문명과 개개인의 교양 차원에 따라 다르다. 짧은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그것을 길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긴 시간이더라도 한담이나 담배연기로 줄이는 사람이 있다. 언젠가 북경 지하철을 탔을 때였는데 그때 입석마저 콩나물통속 같은데서도 가끔 기분을 밝게 해주는 신문지 번지는 소리가 들려와 좋았던 기억이 있다. 상해, 소주, 천진에서도 가끔 눈에 즐겁고 귀가 환해지는 독서 장면이 안겨왔었다. 그런데 청도나 위해나 연대나 대련 같은 곳에서는 열차석이나 장거리 버스 안에서 이런 장면들과 거의 마주하지 못했던 기억이고 지금도 그러하다. 시간은 이러한 모습을 두고 말없이 공정하게 생명의 한 토막에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해 줄 뿐이다.
4년 전으로 기억이 된다. 내가 위챗을 2014년 6월부터 사용하였으니 아마도 그때 시골에서는 아직도 위챗과 위챗 모멘트에 대해 별로 요해가 없었던 것이라 기억이 된다. 바로 그 시점에 나는 작은 수술을 한 남편의 병간호를 위해 입원실에서 일주일쯤 보내게 되었다. 정작 긴 시간 같이 있어보니 시간 보내기가 지루하다는 말의 깊이를 알 듯도 하였다. 다행히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어 그런대로 하루하루를 넘겼다. 처음에는 다른 환자와 병간호를 온 가족들 보기에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신문과 책장 번지는 소리를 죽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당당한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본인까지 합하면 네 명의 간호인원이 한 병실에 있었는데 그들은 타인의 정숙한 공간 파괴에 대해 불안 의식 같은 건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왈패스럽게 침 튕기며 세상만사 주고받고 해바라기씨 까고 또 몇 명씩 문병을 와서는 높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무리 신문지 번지는 소리가 높다한들 그들 소리의 당당함과는 견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들도 내가 내는 소리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독서를 좋아하는 것이 한 사람의 교양이라면 소리 높여 말하는 것도 그 사람에게는 굳어진 습관일 것이다. 누군가가 이것이 우아하고 그것이 예의적이고 저것이 고상한 것이라고 가르려 해도 삶의 환경, 토양에 따라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니 그쯤에서 눈앞의 현실에 적응됨이 도리일 것이다.
다원화된 삶의 양상을 원하는 오늘날, 서민의 분위기 속에 책 읽는 즐거움이 엄청 삭감되어 있다는 것을 나름대로 짚어본다. 인간 삶의 이데올로기에서 한시도 멀리하지 않고 늘 동참해야 할 서정과 슬기의 발원지가 차츰 고갈되고 있다고 말하면 과분할지. 인터넷 읽기 시대에 살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기의 옆을 떠나 사는 여유 시간들에 독서의 제로상태만으로 생활을 채울 수는 없지 않은가. 다 알다시피 표준 미달의 건물에 사는 경우, 윗층 물이 아랫집으로 이사를 하여 작은 강을 만들거나, 또는 여름 빗물에 벽이 젖어들거나 폴싹부실 흘러내리는 일을 체험하는 여염집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처음에는 핫이슈로 뜨다가 어느 순간 그냥 지나치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다면 사람이 책보다 마작이나 윗챗이나 술좌석에 더 익숙해 있을 때 이러한 표준 미달의 건물과 무엇이 다를까. 공부해라, 책 보라가 먹히지 않는 자식을 원망하는 사람을 누드화 시킨다면, 다만 연장자 혹자는 부모라는 외의가 고작일 것이다. 다들 유족한 사람이 되고 부자가 되고 있지만 동시에 모두들 가난뱅이가 되고 있기도 하다. 세계에서 독서를 가장 많이 한다는 일본인의 책읽기 풍속은 바라보지 않아도 좋다. 다만 생명을 맡아 주는 삶이라는 어머니의 얼굴에 여드름 몇 개 생겼고 유방에 생긴 종양의 성질은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지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외국 공부시절에 나에게 과외를 받던 3학년 여학생에게서 받은 충격에 가까운 감동이 아직도 살아있다. 아직 애티가 진하게 묻어있는 그 꼬마의 공부방 벽 높은 곳에는 많은 수상장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 중에 “다독상[多讀]”이란 상장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알고 보니 책 많이 읽은 학생에게 주는 상장인 것이었다. 어떠한 책을 읽었냐고 하니까 책장을 가리켜 보이는데 500여 권의 종류 다양한 독물[讀物]이 있었다. 그중 읽은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였을 때 정말 놀람과 감동과 함께 부끄러움도 감출 수가 없었다.
책을 읽음에 있어 한 글자씩, 한 줄씩, 한 페이지씩, 한 권씩 읽는 흐름은 다를 바 없겠으나 결과는 천양지별을 이루어낼 수 있다. 그것은 정신력과 의지력, 말하자면 사랑과 열심과 항심이 베푸는 기적의 집을 지속하여 경영할 수 있냐 없냐가 시금석이 되어준다. 누구나가 다 이 기적의 집안 식구가 되었으면 하는 꿈과, 그것을 초월한 꿈 넘어 꿈을 가지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균일 요구에 가까운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자고 일어나면 무용지물에 가까운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게 아니냐 싶다. 무엇이나 끊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 읽기는 더욱 그러하다. 공무원 시험을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것, 대학 진학을 위해 책을 읽는 것, 상사에 잘 보이기 위해 책을 읽는 것, 가르치기 위해 책을 읽는 것,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것, 교양 향상을 위해 책을 읽는 것, 글쓰기 위해 책을 읽는 것, 술상 친구들에게 스스로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책을 읽는 것,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책을 읽는 것…… 어떠한 방식으로든 책을 읽는 목표를 향해 앞으로 가기만 한다면 조건부 달지 말고 미소를 보내야 한다. 그만큼 스스로 읽는 책이 쌓이고 쌓여 인간 모두에게 교양대학의 영원한 자격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인간나무는 과정을 속성으로 하고 자란다. 그 나무가 얼마나 높고 얼마나 곧으며 또 얼마나 푸르른가에 상관없이 공부는 영원히 성장의 여정 속에 산다. 성장 완료 상태의 인간은 우주 나라로 삶의 터전을 이전하는 날이 와도 가능하지 않다. 배움의 최고 정상에 올랐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한참은 잘못 된 오해의 옥 속에 갇혀버린 거나 다름이 없다. 금전을 인간 신상의 지방이라고 이른다면 장소와 때에 상관없이 다독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단백질과 비타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운동이 건강위생의 사우나라고 한다면 책 읽기는 정신때밀이를 위한 찜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삶의 미래공간을 살찌우는데 배움을 따를 자는 없다. 배움은 인간의 다른 한 이름이다.
욕심을 멀리하는 길은 어디에 있나?
무릇 정상인이라면 가난한 날에 살아가기가 막막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러한 설법에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다. 가난한 날을 밥 먹듯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주는 확고한 신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때는 밥상에 반찬 있는 날이 많지 않았는데, 거의 끼마다 노랑 조밥에 간장을 비벼먹었던 기억이다. 조밥이 까칠해서 잘 넘어 가지 않으면 물독 바가지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단지 배를 불리기 위한 목적으로 좀 편해진 식도 안에 다시 밥을 떠 넣곤 했었던 지난 시절의 모습도 삼삼하다. 그리고 통옥수수에 팥알을 넣고 삶아먹는 통옥수수밥에 비하면 조밥은 또 열배의 사치라는 것도 잊히지 않는다. 조밥과는 달리 통옥수수밥은 목에 걸리진 않는다. 그러나 밥알이 너무 굵어 배 불릴 때까지 씹다 나면 양 볼이 무감각해지고 맛 감이 무뎌지게 된다. 별 수 있나, 세상만물 속에 얹혀살려면 조건 없이 먹어야 했던 시절에 양식이 되어준 옥수수밥의 추억에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 그밖에 감자알로 하루를 살기도 했었는데 감자알은 윤활하고 달큼한 맛이 있어 먹기가 괜찮았었다. 찐 감자가 주식이었고 엄마가 손이 돌아가실 때 가끔 감자떡도 만들어주셔서 그래도 괜찮은 기억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 때 그 맛에 질려버렸는지 지금도 감자요리는 내 식단에 적혀있지 않다. 먹는 것도 변변치 않았으니 입는 것은 말해 뭘 하랴. 한 겨울동안 내복 없이 팬티 위에 솜바지를 입었을 때 칼바람이 그 채로 몸을 토막 쳐 먹던 추운 기억이나, 갈아입을 옷이 없어 빌려 입던 슬픈 기억이 지금도 파랗게 살아있다. 그러한 아픈 기억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이유는 그런 극한을 이겨내고 좋은 생활을 마련하는 오늘이 있어서 그럴까!
옷 가난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으나 배 가난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낮에는 그럭저럭 집일이나 장난 속에 시간을 쉽게 보냈지만 잠자리 이불 속에 누웠을 때 찾아오는 고픔의 고통을 달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밤이 어쩌면 그렇게도 길었는지! 설이나 부모님 생일을 내놓고 고기 구경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쩌다가 육붙이를 먹는 경우에는 가난에 길들여진 배가 기름진 부자음식에 체해서 설사만 하는 때가 거의였다. 아마도 성장기에 든 마을의 청년들도 그러한 고기의 고픔을 참지 못해 그랬는지 여염집 닭을 훔쳐다 밤도와 같이 고와 먹기도 하는 일도 여기저기서 생겼었다. 지금도 환한데, 어느 하루 밤에는 우리 집에도 닭 도적이 들었었다. 한밤중인데 닭장에 뱀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닭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아빠 엄마는 손전지를 들고 속옷 바람으로 번개같이 뛰어 나갔으나 날렵한 총각들의 꼬리를 잡지 못하였다. 엄마는 날이 희붐히 밝기 바쁘게 닭들을 집합시켜놓고 열 번도 넘게 헤아렸지만 끝내 씨암탉 세 마리가 없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말았다. 그때 아픈 가슴을 두드리며 푸념 반, 저주 반을 반죽하시던 엄마의 목소리와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영화를 돌린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오빠도 또래들 몇몇과 함께 남의 집 닭장을 털어 궁증을 뗐다고 한다. 그러니 가난 앞에서 군자와 소인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그런 지지리 가난한 날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가난한 사람이 곧은 절개를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가난한 날에 밥은 하늘이고 땅이라는 설법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생활은 옛날에 비하면 지주가 되고 자본가가 된 듯이 호사스러운데도 잘 살지 못하고 있다는 설법에 시장이 크다. 나는 이에 대해 일찍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 느낌을 따르게 되는 것은 나를 포함한 인간들이 무엇이 잘 사는 것인 지에 분별이 서지 않았기 때문일까.
알다시피 오늘날은 배불리는 일에 걱정이 필요 없을 뿐 더러 마음만 먹는다면 산해진미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 속에는 남이 먹을 수 있는 산해진미를 자기가 먹을 수 없음으로 하여 자기의 생활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길들어진 자들도 있다. 그리고 자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저쪽에 별장이 일어서면 금방 못사는 사람으로 전락되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될까! A라는 사람이 붐비는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가 B라는 사람이 자가용에 앉아 오가는 걸 보면 그 역시 금방 못산다는 느낌 속으로 빠져버린다. 월급이 대폭 인상되기는 했지만 자기보다 많이 또는 곱으로 버는 사람들만 눈에 담는 사람도 천만 억만으로 늘 판이다. 그래서 요즘 들어 보통 우리들의 귀를 배불리는 요인은 ‘젠장, 요즘 세월은 참 살기가 쉽지 않다니까’라는 맥 빠진 소리들이다.
모르긴 몰라도 잘 산다는 것은 스프링 성격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숨 쉬는 시대에는 생활을 윤택하는 물질이 유족하고 치부의 정보가 넘쳐나고 있는 배면에 빛나는 유혹과 어두운 함정도 심심찮다. 그런 이유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족함을 느끼는가 보다. 또한 그런 연고로 개인 의지에 따른 당당한 선택 사항이 가난한 날에 비해 엄청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대신 만물이 충분한 오늘에 무엇을 갖고 싶다면 금방 무엇이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어제로 되돌아가 보면, 가난했던 나날들에 진정 마음 심처로부터 우러나온 최선의 요구라면 단순히 배불리 먹는 것뿐이다. 어느 신문에서 얻어 읽은 것인데, 귀주성의 어느 궁벽한 산골에는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밥만 배부르게 먹으면 한가히 모여 햇볕을 쬐면서 자연도 누리고, 밤이 되면 달콤하고 행복한 잠을 잔다고 한다. 그들은 만사에 마음을 긁지 않기에 눈길이 갓 태어난 새끼양처럼 부드럽다고 한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을 잘 들여다보면 가난이란 살기 어려운 나쁜 면을 갖고 있지만 만족하기 쉬운 좋은 면도 갖고 있음이 해명된다. 인간은 만족하면 행복해진다. 만족이란 것은 마음의 상태에 대한 정의다. 지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가난한 날에 힘든 것은 배고픔이고 유족한 날에 힘든 것은 마음의 고픔이고 즐거움의 고갈이다. 그런데 마음에 여지가 없고 기분이 상쾌하지 않으면 무엇을 먹은들 맛을 느낄 수 없으니 행복의 그림자는 자연 멀리멀리로 사라져 버린다.
알고 보면 잘 산다는 것은 물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것이고 마음의 것이고 영혼의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흔히 인간의 삶의 본원을 좌우하는 영혼은 어디서 우리 곁으로 오는 건가? 영혼은 독서에서 오고 자기 가꿈에서 오고 지혜에서 오고 안정된 마음의 샘에서 솟는다. 영혼은 거지같은 허영을 멀리했을 때 오고 걸레 같은 욕심을 접었을 때 온다. 영혼은 또 시간을 아낄 때 오고, 타자를 존경할 줄 아는 사람에게 왕림하며, 건강관리를 잘 할 때 찾아든다. 그러니 사실 잘 사는 것은 개개인의 마음이 그려진 손안에 담겨있는 법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기 손안에 있는 이 운명을 보좌하는 기교 다듬기에 게을리 하고는 “내가 어디가 부족해” 하는 불평의 뿌리만 키우는데 신경을 세운다.
그러니 잘 사는 게 뭔지 모르게 되는 것에는 다른 정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음의 자락을 펴내는 마당
요즘은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잔치들이 많아져 살맛이 난다. 약간 시간만 내면 즐거운 만남과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심심치 않다. 모임의 장에서 자연의 애무를 받으며, 찬란한 네온의 빛을 입으며, 달콤한 와인잔 기울이며, 한가로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어 마음은 자못 넉넉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잔치를 가리켜 ‘축제’라고 이름 한다.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의 대오가 늘면서 요즘은 ‘축제’라는 우리말이 페스티벌(festival)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그래서 이에서도 그렇게 지칭하기로 한다.
페스티벌은 삶의 화장품이나 다름없는 불가결의 자격으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꾸며준다. 어떠한 성격의 페스티벌이든 그에 경사의 의미가 담겨있어서 일단 정신적 고양을 한 번 시켜주는 역할을 하기에 자기의 시간과 금전과 여가시간을 할애하여 참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걱정스러운 일면도 생기는 것을 묘파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페스티벌들은 어떠한 화제에 포커스를 맞추어 놓고 미소를 지으며 ‘꾼’들마냥 모여서 한잔씩 나누고 헤어지는 모임의 한가지로 도장이 찍히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하여 ‘얼마나 아름다웠던 시간이냐’ 라든가 ‘너무 좋은 만남이었어’와 같은 고운 느낌의 색상들은 빛이 바라기 시작하였다. 스트레스 해소제나 다름없는 만남의 시간들이 소중함을 몰라서라기보다 새로운 변화들에 눈 팔린 사람들의 내심세계가 요술을 맞이한 것이다. 세상에 낡지 않는 물건 없듯이 편안하게 풀어보면 그것도 별 나쁜 것은 아닌 셈이다. 잔치를 매일같이 치르는 집주인에게 번마다 색다르게 꾸며내길 바란다는 것은 너무도 피곤하게 하는 성가신 요구가 될 수도 있다. 자주 만나는 이유로 페스티벌 행사가 이젠 싱거워졌다고 생각하는 행렬이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재한 중국인 문화 축제와 같은 국제 잔치일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 공식시스템을 면치 못하는 까닭을 알만도 하다. 어떤 페스티벌에 꼬박 세 번만 참석해보면 잔치의 원색이 바래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파고들게 된다. 차량의 무료 왕복 운행, 휴게소에서의 도시락 점심, 행사장에서의 도시락 저녁식사, 노래자랑, 그에 따른 상주기, 주최담당 측의 축사, 끝날 무렵의 기념품 선물하기로 경직된 듯한 그 순서감이 양고기꼬치마냥 흐름선에 쭉 꿰어져 있다. 국제 금산인삼페스티벌도 별다른 기대를 품고 가긴 했으나 역시 인삼을 캐고, 캔 인삼을 들고 사진을 찍고, 인삼 삼계탕을 대접 받고, 인삼 제품 구경하고, 귀가하는 공식화된 코스 그대로를 따랐을 뿐이었다. 좀 다른 것이 있었다면 피부색이 더 다양해진 것뿐이다. 국제Food페스티벌도 별로 옛 맛의 패러디였다. 세계 각국 인사들이 자국의 음식을 만들어놓고, 오가는 손님을 불러들여 무료 체험을 하게 하고 무기명 투표 후 등급에 따른 수상식을 행하고 제구들을 청소 운반하는 것으로 끝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말하자면 페스티벌 대부분은 너무도 담백한 맛에만 정박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만사에는 다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다. 축제라는 행사는 이러한 따분함을 떠나 일차적으로 먼저 세상에 사는 가족들의 가슴의 빈 구석을 얼마만이라도 채워주고 수식해주고 있어 감사해야 할 일이긴 하다. 물을 탄 술이라고 할 만큼 맛의 원조가 심심해져가고 있긴 해도 늘 마음을 끄는 데가 있는 것이야말로 페스티벌의 경지인 때문인가 한다. 이것이 다원화 세상에 페스티벌이 살아남는 이유 같은 것일 것이다.
어찌하여 어마어마한 돈을 축내며 행사잔치를 할까 하는 의혹도 가끔 마음을 찾는다. 모든 참석자들에게 주는 선물의 값을 묶으면 눈앞에 보이는 빈자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 같고, 보잘 것 없는 4년 삼이긴 해도 체험에 온 사람마다에게 한 뿌리씩 선물하는 그것으로 수해나 흑사태 한번이면 빈털터리로 전락되는 마을들을 존엄으로 세워낼 수도 있을 것 같고, 오가는 길거리 모든 사람 분별없이 무료로 체험케 하는 그 다량의 음식들을 화폐로 바꾸면 국제 의미를 갖춘 근사한 레스토랑쯤은 넉넉하니 만들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행사장의 책임자분들과 도우미들이 봉사하는 몸과 마음 담아 모으면 또 얼마나 많은 가치의 산을 높일 수 있을까. 정말 한참씩 넋 놓고 생각해 보아도 심산 요지경이다.
페스티벌은 어쩌면 요즘 인들이 사치를 위해 만들어낸 미궁을 닮은 특허품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야릇한 건 이러한 생각에 시각을 새롭게 해보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 봐야 할 것 같다는 느낌도 선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풍요로운 이름자 밑에 헤아릴 수 없는 자본이 낭비의 강을 이루고 흘러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낭비 부분을 전혀 감안도 않은 것 같은 환한 모습으로 단순한 의미의 실현을 위한 그런 시라소니의 금자탑을 쌓는 일이 아닐 것이라는 그것이다. 그렇다면 페스티벌이란 시대동전의 배면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까.
눈 한번 크게 뜨고 세심을 기울여 살펴보니 축제의 뒷마당에는 정말 화려한 무늬가 있는 그림들이 걸려있다. 무엇이든 받아 안을 수 있는 따스한 장을 소박하게 꾸며놓고 미소와 나눔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어떤 거대한 물체를 자랑의 대안으로 운행해 가고 있는 듯 한 그림, 열두 폭 치마의 손으로 나누어 흥성흥성해진 작은 마당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보이는가 싶더니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그려진 그림, 포장이 잘 된 예쁜 선물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는 아줌마가 그려진 그림, 체험장을 올리 뛰고 내리 뛰며 신이 나있는 어린이들의 귀여운 모습이 담긴 그림……
정말 이 그림을 보고 끌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 있으랴는 자신감이 묻어있는 작은 설명글들을 읽고 있노라니 욕망으로 사는 인류 본성의 좌판에 집짓고 있을 소유욕의 금고를 허물어 가져가는 느낌을 하게 된다. 페스티벌이란 존재는 이렇게 스스로의 미모를 한껏 사람들의 시야와 마음에 심어주고 그것을 매체로 하여 얼굴을 익히고 숨소리 나누고 가슴 뛰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어쩌면 페스티벌이란 자신이 굴리는 굴렁쇠를 따라 착착 열리는 수단과 찬스와 인포메이션을 개척의 신화 콜럼버스의 학문 속에 융합시킨 산물일지도 모른다. 나는 페스티벌에 갈 때마다 그것이 인정의 룰에 있는 눈금을 마음으로 헤아리고 정을 먹으며 사는 인간들에게 고독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태어난 것 같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잔뜩 붙은 양의 몸뚱이를 뜯는 독수리에게 박수만 보내는 고전의 신 같기도 하고, 잠시 무료공급자로 둔갑하여 출렁이는 경제의 바다를 만들고 있는 듯도 하고, 쾌활하고 즐거운 축하잔치의 덫을 만장같이 쳐놓고 스스로를 만드는 음모가인 듯도 하고, 참가자들의 몸과 눈과 마음을 불러가 경영의 족보 속에 기입시키는 홍보의 문명한 그물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쩜 페스티벌이란 이름은 이러한 삶의 노래가 점철된 집합체들에서 모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이름의 내용을 채우려면 필시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융합할 때만이 가능하여 잔치가 행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축제의 원조는 즐거움의 에너지를 무한 극대화하는 데까지 가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야말로 마음의 풍경과 삶의 낙원이 합일된 교류의 새 얼굴이 성형되기까지에서 생긴 휴게소 같은 쉼터일 것이다.
축제라는 것은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고 자기 몸의 털을 뽑아 잔칫상을 차려 많은 사람들에게 새 기회의 사립문들을 열어주는 낭비와 즐거움이 믹스된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삶의 새 질서가 다양한 페스티벌의 땅에 자리를 펴고 인간의 좁은 경비실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페스티벌이 나름대로 우리 곁에 사는 것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마음자락을 자유롭게 펴내게 하는 미덕을 키워주기 위함이 아니냐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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