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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예언과 성령
'문서 예언서'에 나타난
'예언'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
차 준 희
(한세대)
Ⅰ. 들어가는 말
구약학 분야에서 성령에 관한 학문적 논의가 거의 방치되어 있는 현상은 신약학에서 성령론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대조적이다. 마치 성서신학의 성령론은 구약학과는 무관한 신약학의 전유물로 간주되어 온 경향이 짙은 것 같다. 그래서 성령론이 없는 신약신학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성령론이 담겨진 구약신학은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성령론에 관한 구약학의 무관심은 구약의 영(성령)을 다루고 있는 학술도서가 그 동안 양적으로 미미하였음에서도 잘 드러난다. 독일의 구약학자 폴츠(P. Volz)의 『하나님의 영과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나타난 유사한 현상들』이라는 단행본이 1910년에 출간된 이후 거의 50년의 침묵기가 지난 다음 리스(D. Lys)의 『루아흐: 구약의 영』이 프랑스에서 1962년에 출판되었다. 1970년대 니브(L. Neve)의 『구약의 하나님의 영』과 우드(L. J. Wood)의 『구약의 성령』이라는 책이 각각 일본과 미국에서 선을 보였다. 이후 90년대에 와서 5권에 이르는 단행본이 출판되기에 이른다. 1990년에 드라이챠(M. Dreytza)의 박사학위 논문『구약에 나타난 '루아흐'의 신학적 이해: 단어의미론과 문장의미론적 연구』와 레(J. Rea)의 『성서에 나타난 성령: 영에 대한 모든 주요 본문들』, 1991년 코흐(R. T. Koch)의 『구약의 하나님의 영』, 1992년 슁엘-슈트라우만(H. Sch ngel-Straumann)의 『영이 세계를 움직인다: 포로기의 위기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적인 생명력』 그리고 1995년 힐데브란트(W. Hildebrandt)의 『하나님의 영에 관한 구약신학』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출간도서의 목록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구약의 성령론 연구는 세계적으로 1990년대 들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국 구약학계에서도 세계 구약학계의 연구방향과 호흡을 같이하여 1990년대에 들어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논문이 계속해서 발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여기에서 문서 예언서에 나타난 예언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에 관하여 분석하려 한다. 우리나라 구약학자들의 글 가운데 이 주제에 대하여 약간 언급한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보다 집중적인 연구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필자의 이전 논문 "구약의 영"에서도 이 부분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지만 이번 기회에 보다 더 자세하게 다루려고 한다.
이 주제에 대하여 가장 최근에 글을 발표한 와츠(J. D. W. Watts)는 "영(루아흐)이 예언자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각 예언자들의 시대별 차이성을 무시한 위험한 표현이다. 이러한 주장은 최소한 주전 8세기에 활동한 아모스, 호세아, 미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는 '예언'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를 각 시대별로 나누어 분석하도록 하겠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영( 루아흐)의 사전적인 의미와 그 분포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Ⅱ. 영(루아흐)의 사전적 의미와 분포
히브리 낱말 가운데 루아흐( )만큼 번역하기가 곤란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 의미의 폭이 대단히 넓고 또한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온 『구약의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전』에 의하면 히브리어 '루아흐'의 의미는 대략 15종류로 분류된다:
① 숨, ② 덧없는 호흡, ③ 바람, ④ 방위, ⑤ 하나님과 관계된 바람, ⑥ (동물과 사람의)숨,
생명을 가진 것(Lebenstr ger), ⑦ 마음, 성향, 기질과 같은 사람의 본성적인 정신,
⑧ 야웨의 영, ⑨ 하나님의 영, ⑩ 거룩한 영(성령), ⑪ 하나님에 대하여 독자성을 가진 영,
⑫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Geistverleihung), ⑬ 특별한 종류의 영, ⑭ 육체( )와 대조되는 루아흐,
⑮ 그외
우리말 개역성서는 이 단어를 무려 30여가지 낱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루아흐는 본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또한 상당히 많은 낱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의미를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첫째, 바람/폭풍으로서의 루아흐, 둘째, 사람의 루아흐(숨, 영, 생명력, 정신), 셋째, 하나님의 루아흐(영, 생명력, 의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Spirit)을 의미하는 낱말 루아흐는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어로는 378회 등장하고, 아람어로는 다니엘서에서만 나타나는데 여기서 11회 언급된다. 이 가운데서 본 논문은 루아흐가 하나님의 영으로 사용된 경우로 연구범위를 한정한다. 루아흐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용법으로는 모두 122회 쓰였으며, 이러한 용례와 더불어 히브리어 루아흐가 구약성서 전체에서 사용된 본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본 논문의 관심영역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 배치도에서 문서 예언서부분 가운데 루아흐가 하나님의 영의 의미로 쓰인 본문(총 55회)을 시대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위의 도표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첫째, 주전 8세기 예언자 가운데 이사야를 제외하면 하나님의 영에 관한 언급이 놀라울 정도로 적다. 둘째, 국가멸망을 앞둔 주전 7세기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셋째, 국가가 멸망한 이후 포로기 동안 바벨론 포로지에서 활동한 예언자들, 특히 에스겔에 와서는 하나님의 영이 상당히 많이 선포되고 있다. 넷째, 포로기 이후 본토에서 활동한 예언자들도 포로기의 예언자들과 같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 적지 않게 언급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은 역사의 위기 순간인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두드러지게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문서예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을 이해하기 위하여 예언자의 활동 연대순을 따라 살펴보면서 그 개념이 신학적으로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문서예언서에 들어가기 전에 문서예언 이전의 예언을 왕정 초기 시대와 주전 9세기로 세분하여 예언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를 먼저 검토해 보기로 하자.
Ⅲ. 왕정 초기 시대의 예언과 하나님의 영
초기 이스라엘에 관한 문헌을 보면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내리곤 하셨다. 이런 현상은 주로 사사시대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소위 대사사)과 왕정 초기 시대의 황홀경예언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논문의 성격상 황홀경예언의 경우만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왕정 초기 시대의 본문에서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황홀경의 상태(ecstatic state)에 몰입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사무엘상 10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 후에 네가(사울)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 , 헤벨 느비임)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 미트나베임)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5절).
네게는 야웨의 루아흐( , 루아흐 야웨)가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 웨히트나비타)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6절).
………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 - , 헤벨-느바임)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루아흐( , 루아흐 엘로힘)가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 서 예언을 하니( , 와이트나베)(10절).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울과 사울이 만난 선지자 무리의 예언 현상을 묘사하고 있는 동사이다.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예언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동사가 여기에서는 세 번 모두 나바( )의 히트파엘형(Hitpael, 강제재귀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동사의 히트파엘형은 주로 "미친 것 같이 행동하다(rasen)"라는 뜻이며, 후대의 본문에서는 간간히 "예언자로서 말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이는 황홀상태에서 행동하며 외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자 일시적으로 황홀상태, 즉 황홀예언 상태에 빠진 것이다(참조. 삼상 19:23-24). 민 24:2과 삼하 23:2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하는 이런 종류의 황홀경예언에는 일반적으로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그들의 특징은 외치는 말보다는 움직이는 행동에 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힌 상태임을 보여주는 표적(Sign)이었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하나님의 영의 활동은 계시(revelation)를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demonstration)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왕정초기시대의(황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힘을 통해 이스라엘과 그들의 적들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 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Ⅳ. 주전 9세기의 예언과 하나님의 영
1. 엘리사
위에서 보았듯이 문서예언 이전 예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말씀의 매개보다는 그들의 예언직과 영감(Geistinspiration)의 밀접한 결합이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엘리야-엘리사 전승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점이 나타난다. 주전 9세기에도 예언자로서의 권위가 하나님의 영에 의한 영감에 의해서 보증되고 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 여기서 예언자적 권위는 주로 이적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점에 있어서 엘리야와 엘리사는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예언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권능을 행사하는 카리스마적인 이적사역자(charistmatic miracle worker)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아무튼 영감에 의한 예언적 보증은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예언직이 계승되는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엘리사의 제자들은 엘리사의 권능적인 행위를 보고(왕하 2:14)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영이 임하였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그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로 그의 예언직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이 경우 엘리야의 영은 물론 야웨께서 엘리야 위에 내려앉게 하신 야웨의 영을 말한다: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루아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고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며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왕하 2:15).
그런데 엘리야-엘리사 전승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점이 나타난다. 왕정 초기 시대의 예언의 변화의 조짐은 열왕기하 3장 15-16절에서 구체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한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야웨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직역: 야웨의 손이 엘리사에게 임하시니) 저가 가로되
야웨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기서 "야웨의 손"은 야웨의 능력을 의미하며 엘리사가 야웨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한다. 또한 악기가 동원된 것은 황홀경예언 현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이다(삼상 10:5등). 특이한 점은 왕정 초기의 황홀 예언에서는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반면, 엘리사는 황홀상태에서 동시에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사실은 황홀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이전에 황홀상태를 유발했던 '야웨의 영 혹은 하나님의 영'대신 '야웨의 손'이라는 표현이 쓰인 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예언자로서의 권위가 특히 왕정 초기시대에 강조되었던 하나님의 영이 약화되고 문서예언시기에 가서야 부각되는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2. 엘리야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는 이미 엘리야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열왕기상 19장 11-12절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이다:
야웨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야웨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야웨께서 지나가시는데
야웨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루아흐)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루아흐) 가운 데 야웨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야웨께서 계시 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야웨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는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처음으로 드러내 보여주셨던 곳인 호렙산에 이른다. 엘리야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새롭게 깨닫는다. 이를 통하여 그는 예언자적 사명을 갱신하게 된다. 하나님은 강한 바람(루아흐)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현현(Theophanie)하실 때 동반되는 현상이었다. 여기에서 바람, 지진, 불 가운데 하나님이 현현하신다는 점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야웨의 본질이 그것보다는 '세미한 소리'와도 같은 '말씀'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 본문의 의도는 야웨종교가 주변의 이방종교와 혼합되는 것을 경계하는데 있다. 신현현 묘사의 모티브인 바람, 지진, 불 등은 신(神)적인 이적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암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 가운데 계시지 않고 말씀 가운데 오신다. 예언자적 사명을 새롭게 하는 자리에서 예언자로서의 권위가 강력한 능력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보다는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부되기 시작한다.
3. 미가야
예언자의 권위와 하나님의 영을 결합시키는 것에 대한 반성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아합의 400명의 선지자와의 대결을 다루는 본문에서도 발견된다. 열왕기상 22장 21-23절은 하나님이 속이기 위해 속이는 영을 보내시기도 하심을 보여준다:
한 영(루아흐)이 나아와 야웨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야웨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루아흐)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야웨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 라 하셨은즉 이제 야웨께서 거짓말하는 영(루아흐)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 셨고 또 야웨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이 본문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영의 감동을 받으면서 동시에 어떻게 속임을 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소한 이곳의 400명의 예언자들이 의도적으로 거짓 예언자가 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말을 통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합을 유혹하여 길르앗에 있는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되도록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키 위하여 선택된 도구이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거짓말하는 영의 영향으로 본의 아니게 거짓예언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미가야는 하나님의 영에 호소하지 않지만, 아합의 400명 예언자들의 대표자인 시드기야는 야웨의 영에 호소하고 있는 점은 특이할 만하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야웨의 영(루아흐)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왕상 22:24). 이와는 달리 미가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한다: "미가야가 가로되 야웨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야웨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은 내가 말하리라"(왕상 22:14). 여기에서는 예언자의 참권위가 거짓 영이 될 수도 있는 하나님의 영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부각된다.
Ⅴ. 주전 8-7세기의 예언과 하나님의 영
문서예언 이전 왕정 초기 예언자 집단을 황홀경의 상태로 몰입시켰던 하나님의 영의 이러한 활동은 포로기 이전 주전 8세기와 7세기 소위 문서 예언자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때 활동했던 문서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과 하나님의 영을 연관시키지 않았다. 포로기 이전의 그 어떤 문서예언자도 스스로 하나님의 영으로 영감 받았다고 언급한 경우는 없다.
1. 호세아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론도 만만치 않게 등장한다. 얼마 전 슝크(K. -D. Schunck)는 호세아 9장 7절을 근거로 "문서 예언자들은 그들 자신의 예언 활동의 원천으로 영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문서 예언자들에게 영이 그들의 예언 활동의 근본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호세아서에서 이 본문이 루아흐가 하나님의 영으로 쓰인 유일한 본문이다. 그는 이 본문의 내용에서 호세아가 당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음에 주목한다. 루돌프(W. Rudolph)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는 호 9:7의 주석에서 "루아흐는 예언자에게 영감을 주는 하나님의 영을 의미하며, (루아흐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표현에 대해서 호세아는 결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또한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에 의한 계시를 주장하고 있다.
물론 호 9:7 "이 예언자는 어리석은 자요 영감(루아흐)을 받은 이 자는 미친 자다"에서 호세아는 '루아흐의 사람'이라고 호칭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호세아 자신의 말이 아니라 백성들이 호세아를 비난하는 말이다.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자 동족들이 그를 어리석고 미친자로 조롱하는 말이다(왕하 9:11; 렘 29:26). 여기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자란 결코 선지자를 가리키는 명예로운 타이틀이 아니다. 이 본문을 근거로 호세아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영감 받은 예언자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2. 이사야
다음은 주전 8세기 문서 예언자 중에서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는 이사야서를 검토해 보자. 위의 배치도에서 본 것 같이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루아흐가 13번 등장한다. 그런데 13번의 경우 가운데 유독 한 본문이 예언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본문은 이사야 30장 1-2절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거역하는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가 계획( , 에짜)을 추진하지만,
그것은 나에게서( , 밋니)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 , 루아흐)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
너희가 내 입에( , 피) 물어 보지도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바로의 보호를 받아 피신하려 하고,
이집트의 그늘에 숨으려 하는구나'(표준새번역).
쾰러(L. K hler)는 이 본문에 근거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의 예언자이다"라고 단정짓는다. 둠(B. Duhm)은 1892년에 그의 기념비적 저술인 『이사야서』 주석에서 1절을 주석함에 있어 "나의 루아흐를 따라 한 것이 아니다( , 웨로 루아히)"를 "'내 예언자의 진단(Zuziehung meines Propheten)'을 따르지 않다"로 해석한다. 이에 근거하여 그는 "이사야 또한 메시야적 왕(사 11:1이하)과 같이 야웨의 영에 의해 영감 받은 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원석은 1996년에 통과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둠의 논지를 수용하여 "야웨의 루아흐가 예언자적 권고의 근원(the source of prophetic counsel)"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근거하여 그는 포로기 이전 문서예언자들이 자신의 예언과 하나님의 영을 관련시키지 않았다는 논지(These)에 대한 수정을 과감히 요구하기도 한다. 그는 그의 논문 결론에 가서도 이 점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다: "이사야서 본문에서 포로기 이전의 것으로 간주되는 본문들은 거의 예언적 영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으나 이사야 30장 1절은 예외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가장 큰 문제는 이사야서 어느 본문에서도 이와 같이 야웨의 영이 그의 예언 메시지의 근원이었다는 점이 더 이상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본문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 본문은 유다의 애굽과의 동맹정책을 질타하는 내용이다. 이사야는 이 계획이 야웨에 의해 수립된 것도 아니고, 그 동맹도 야웨의 뜻에 의한 것도 아니라고 강력하게 힐난한다. 여기에서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 로 밋니)", "나의 루아흐를 따라 한 것이 아니다( , 로 루아히)" 그리고 "나의 입에 물어보지도 않다( , 피 로 샤알)"는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야웨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1절의 '나의 루아흐'는 여기에서 예언자적 영이라기보다는 예언자를 통한 야웨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토대로 하여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에 의한 예언자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3. 미가
이제 주전 8세기 문서예언자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한 미가서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기로 한다. 미가서에서는 루아흐가 모두 3번(미 2:7,11; 3:8) 쓰였는데, 그 가운데 2번(미 2:7; 3:8)이 '하나님의 영'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캐펄루드(A. S. Kapelrud)는 미가서의 이 두 본문에 의존하여 포로기 이전 문서예언자에게는 영에 의한 영감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논지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미가서 3장 8절과 2장 7절에 언급된 루아흐(하나님의 영)에 주목한다. 그는 미가가 3장 8절에서 헛된 평화를 외치는 거짓 예언자와는 달리 그 자신은 "권능과 야웨의 영( , 루아흐 야웨)과 공의와 재능으로 충만해 있다"고 고백한 부분을 결정적인 예로 제시한다. 여기서 표현된 "야웨의 영"이란 낱말은 미가서 2장 7절에 다시 한번 언급되므로 미가에서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 두 본문을 근거로 "미가가 하나님의 영을 그의 영감의 원천으로 보고 있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포로기 이전의 문서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특이한 현상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영이 예언자의 말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는 사상은 이미 모두가 인식하고 있기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성이 없을 만큼 확고히 굳어진 사상이었는가? 아마도 그렇게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예언과 하나님의 영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새삼 재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알렌(L. C. Allen)도 그의 주석에서 캐펄루드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미 3:8의 '야웨의 영'을 주석 하면서 야웨의 영이 하나님의 뜻을 예언자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던 사 30:1을 여기에 끌어들였다. 그는 예언자로 하여금 그의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고, 그를 움직이고 그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그의 메시지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사 30:1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영이었다고 본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을 미가가 소유하고 있다고 혹은 그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미가 스스로 주장하는 것으로 미3:8을 해석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미가의 예언을 유발시키는 힘(the motivating force)"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하면 미가서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예언을 유발시키는 원동력으로 예언과 하나님의 영이 서로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해 보기로 하자. 먼저 캐펄루드 논지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미가서 2장 7절을 보자. 그는 미가가 여기에서 야웨의 영을 언급하고 있음을 중요시하고 있다. 사실 이 본문은 번역부터 문제가 되는 어려운 본문이라 할 수 있다. 이 본문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키 위해 앞의 절과 함께 사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말한다:
"예언하지 말아라
그렇게 예언하지 말아라
이 치욕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으리라
야곱의 족속이 저주를 보겠는가?
야웨의 루아흐가 참을성이 없으시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는가?"
(그러나) 나(미가)의 말이
행위가 정직한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느냐?
여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미가는 청중의 반응으로 보이는 세 가지 부정문(Nein: '언하지 말아라'/'그렇게 예언하지 말아라'/'우리에게 미치지 않으리라')과 세 가지 의문문(Frage: '저주를 보겠는가?'/'참을성이 없으시나?'/'그렇게 하시겠는가?')을 인용하고 있다. 이 인용문의 내용은 "그러므로 야웨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미 2:4)는 미가의 준엄한 심판선포에 대한 청중의 반응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미가의 말이 아니다. 7절에 단순히 '야웨의 루아흐'가 언급되었다고 이것을 근거로 미가를 영의 예언자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미3:8의 '야웨의 영'이라는 부분이다.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자 :
그러나 나는
권능, 야웨의 루아흐와 함께( - , 에트 루아흐 야웨)
그리고 공의와 용기로 채워져 있어서
야곱에게 그의 허물을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그의 죄를
꾸짖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야웨의 루아흐와 함께"라는 표현의 진정성 문제이다. 만약 소수의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표현의 진정성을 인정한다면 이 구절이 주전 8세기 문서 예언자 가운데 유일하게 예언과 하나님의 영의 결합을 보여주는 본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몇 가지 점에서 그런 입장을 수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첫째, 미 3:5-8이 시문의 형식으로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는데, 8절의 "야웨의 루아흐와 함께"라는 표현의 출현으로 그 부분만이 산문의 형식이 되어버렸다. 즉 이 낱말 때문에 운율이 깨져버리게 되었다. 이 표현이 삭제되면 운율은 자연스럽게 되살아난다. 둘째, 현재의 본문은 구문상 문제가 있다. 이러한 구문은 구약성서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전치사 (에트) 때문에 생긴 문제다. 여기서 이 전치사는 불필요하다. 이 전치사 대신 접속사 (와우)로 대치되어야 구문이 자연스럽다. 셋째, 야웨의 루아흐가 그 외의 권능, 공의, 용기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세 가지들은 야웨의 루아흐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으로 야웨의 루아흐가 이들보다 우위의 개념이다. 이외의 몇 가지 근거에 준하여 대다수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것과 같이 "야웨의 루아흐와 함께"라는 개념은 후대의 삽입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주전 8세기 문서예언자에게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예언활동을 하고 있다는 진술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매개없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통하여 예언자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야웨의 말씀이 계시의 매개로 작용한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야웨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 참조. 암 7:15).
이와 더불어 사 6장; 렘 1장; 겔 1-3장의 예언자 소명기사는 그들의 예언직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 주전 7세기에 활동한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지자들( 핫느비임)은 바람(루아흐)이다
그들 속에는 말씀( 핫디베르)이 없다(렘 5:13).
여기에서 루아흐는 '바람, 헛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루아흐(헛된 것)'만 있다는 지적은 루아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미 전제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지 않을까(참고. 미 2:11)?
아무튼 주전 8-7세기 문서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 계시를 체험한다. 이러한 말씀의 중요성이 그들의 예언을 문서로 남기게 하는 동인(動因)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Ⅵ. 주전 6세기의 예언과 하나님의 영
여기에서 주전 6세기의 예언이라 함은 포로기 기간에 활동한 에스겔과 제 2이사야의 예언과 포로기 이후에 속하는 학개, 스가랴, 제 3이사야와 요엘의 예언을 가리킨다. 주전 587년은 이스라엘 역사상 잊을 수 없는 국가 멸망의 해이다. 이 사건으로 국가의 독립성이 상실되었고 국가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성과 시온성전은 초토화되었고, 고위층을 비롯한 지도층에 속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유배되어 갔다. 국가 멸망을 앞둔 주전 8-7세기 문서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한 것과 대조적으로 주전 6세기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부터 강조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영을 예언과 관련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1. 에스겔
포로기 초기 바벨론 포로지에서 맨 처음 등장한 에스겔 예언자는 흔히 "영의 사람 (l'homme de l'Esprit)"으로 불리운다. 이것은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쓰인 루아흐가 무려 22회나 언급되고, 황홀경현상, 열광상태에서의 투시 그리고 다른 장소로의 이동이라는 문서예언 이전 예언의 특징들이 그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에스겔에게 와서는 루아흐가 중요한 개념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미 소명장면에서 루아흐가 그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일으켜 세워, 그를 파송하시려는 말씀을 듣게 한다(겔 2:2). 그 밖의 3:12,14,24; 8:3; 11:1,5,24; 37:1; 43:5의 아홉 번에 걸쳐서 루아흐가 예언자의 체험, 환상(Visionen)과 환청(Auditionen)사건과 결부되어 언급된다. 이러한 현상에 근거하여 적지 않은 주석가들이 에스겔을 기점으로 하나님의 영을 계시의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시작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입장의 대표자격인 모빙켈(S. Mowinckel)은 "우리는 에스겔에 와서 분명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겔 11:5) 하나님의 영이 예언적 영감의 매개로서 한 번 언급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예언자를 사로잡고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그를 들어올려 장소를 이동시키는 놀라운 능력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예언선포 자체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라는 명확한 언급이 에스겔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위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겔 11:5에서도 우리는 예언적 영감을 찾을 수 없다:
야웨의 루아흐가 내게 임하여서 그가 내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야웨께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내가 아노라'
여기에서 야웨의 루아흐는 여성형 단수명사이고 "임하다"( 와틱폴)라는 동사도 3인칭 여성 단수로 성(性)과 수(數)가 일치한다. 그런데 "내게 말씀하셨다"( 와잇요메르 엘라이)에서 "말씀하다"동사는 3인칭 남성단수로 쓰였다. 이는 이 동사의 주어가 야웨의 루아흐가 아니고 야웨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한다. 여기서 말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루아흐가 아니다. 즉 여기에서 루아흐가 계시의 매개로 쓰인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예언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기능만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겔 2:2과 3:24도 이렇게 준비시키는 기능으로 쓰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나에게 말씀하실 때 루아흐가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2:2).
에스겔의 경우 하나님의 영이 지금까지의 이전 문서예언자들의 기록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점이 선배 문서예언자들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에스겔 때부터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기피했던 현상이 누그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예언이 아직은 하나님의 영에 의한 은사로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포로기 이전 문서예언자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2. 제 2이사야
둠(B. Duhm)은 그의 『이사야서 주석』에서 "영(Geist)은 제 3이사야와 같이 후대에 가서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제 2이사야에게서는 '예언의 영(Prophetengeist)'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모빙켈(S. Mowinckel)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제 2이사야는 야웨의 영을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영들은 (생명의 호흡이나 권능과 같은: 필자 첨가) 전통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어느 경우도 '예언적' (영)이라는 의미로 쓰인 바는 없다… 이러한 것은 제 3이사야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취급해 버릴 수많은 없다. 좀더 논의가 필요하다. 제 2이사야에게서 예언적 영감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이사야 48장 16절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다. 문제가 되는 48:16b 부분만 사역해 보자:
이제 주 야웨께서
나를 보내셨다.
그리고 그의 루아흐…(동사가 없다).
마지막 단어인 '그의 루아흐' 다음에 동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주어인지 목적어인지가 불분명하기에 번역조차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튼 이 부분은 "전후문맥에 비추어 전혀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모든 주석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어떤 학자는 이 구문이 이사야 61장 1절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 3이사야 내지는 그와 가까운 생각을 같고 있는 후대 편집자의 첨가로 돌리기도 한다. 또한 이 구절의 화자(話者)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나'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제 2이사야 자신이 아니면 고레스일 수도, 혹은 예언자나 야웨의 종으로서의 이스라엘 혹은 인격화된 야웨의 말씀 등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베스터만(C. Westermann)도 옳게 지적한 것과 같이 사 61:1과 비슷하다고 해서 반드시 후대의 첨가로 간주해야할 필요는 없다. 또한 이 구절은 "야웨 그리고 그의 루아흐가 나를 보내셨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번역이 옳다면, 즉 제 2이사야는 여기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로 인식하고 있다. 야웨와 그의 루아흐가 예언자로 하여금 예언 선포를 하도록 야기시킨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 2이사야에게서 예언적 영감을 증거하는 최초의 본문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로서 예언과 하나님의 영과의 밀접한 관련성이 포로기 이후가 아니라 이미 포로기 말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제 3이사야
포로기 이후에 와서는 예언과 하나님의 영은 서로 나뉠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되어 버렸다. 다음의 구절은 사 48:16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한 예언자에게 임하였음을 증거해 준다:
주 야웨의 루아흐가 내 위에 (임하셨다)
야웨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그가 나를 보내셨도다.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도록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갇힌 자들에게 풀려남을 외치도록(사 61:1).
이사야 59장 21절에서도 야웨의 루아흐와 예언자의 입에 주어진 말씀이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네 위에 있는 나의 루아흐와
내가 네 입에 넣어둔 나의 말씀들이( , 우데바라이)
네 입과
네 자손들의 입과
네 자손들의 자손들의 입에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리라
야웨가 말한다
4. 스가랴
제 3이사야와 같이 포로기 이후에 활동한 스가랴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계시의 수단으로 간주된다. 스가랴 7장 12절은 이를 입증해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 본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마음을 금강석 같게 만들어 그 율법(토라)과
야웨 체바오트께서 자기 루아흐로 이전 예언자들을 통하여
보내신 그 말씀들( 핫데바림)을 듣지 않아서
큰 노여움이 야웨 체바오트로부터 생겨났도다.
여기에서 예언선포가 하나님의 영의 활동으로 표현되고 예언자는 영에 의하여 영감 받은자로 간주된다. 이점은 이스라엘의 전(全)역사를 개괄하고 있는, 포로기 이후의 문헌으로 보이는 느헤미야의 참회기도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에서 예언자와 하나님의 루아흐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그러나 당신(하나님)은 여러 해 동안 그들에 대하여 참으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루아흐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들을 여러나라 백성에게 넘기셨습니다(느 9:30)
특히 역대기의 저자는 열왕기의 본문이 야웨의 영으로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지 않는 사건들을 영의 감화를 받은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대하 15:1 "하나님의 루아흐가 오뎃의 아들 아사랴(아마도 예언자)에게 임하시매"의 평행본문인 왕상 15장에는 루아흐나 아사랴가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대하 20:14 "야웨의 루아흐가 회중 가운데서 레위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의 평행본문인 왕상 22장에는 야웨의 루아흐의 강림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대하 24:20 "이에 하나님의 루아흐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의 평행본문인 왕하 12장에는 스가랴도 야웨의 영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로 보아 포로기 이후 하나님의 영과 예언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은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예언자에게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레위사람 혹은 제사장과도 관계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5. 요엘
요엘 2:28-32(마소라본문 3:1-5)의 종말론적 기대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이 예언자나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후에
내가 나의 루아흐를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겠다.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을 하고( 웨닛베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또한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그날들에 내가 나의 루아흐를 부어주겠다(욜 2:28-29)
민 11:29 "야웨께서 그의 루아흐를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모두가 예언자들( 느비임)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의 모세의 소원이 요엘의 종말론적 구원예언에서 성취된다. 과거에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예언자집단, 왕들과 같이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임하던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과거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루아흐의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만 앞으로는 일체의 불균형과 차별(아들과 딸-성차별/노인과 젊은이-세대간의 갈등/남종과 여종-사회적 신분차별)이 제거되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실 때 가능하다.
Ⅶ. 나가는 말
필자는 위에서 예언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를 주로 문서예언서에 집중하여 역사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에 대하여 간략하게 정리해 보기로 한다. 왕정 초기 시대의 예언은 삼하 23:2을 제외하면 대부분 하나님의 영에 의한 황홀경의 체험에 집중되었다(삼상 10:5-10). 그러나 주전 9세기에 이르러 영적 경험에 대한 지나친 편중성에 대한 반성(왕상 19:11-12; 왕상 22:21-24)과 더불어, 예언의 현상 가운데 영적인 황홀경 체험과 함께 야웨의 말씀이 동시에 계시되기도 하였다(왕하 2:15). 이같은 과도기를 지나 주전 8-7세기의 문서 예언시기에는 오로지 야웨의 말씀만이 예언자의 권위를 입증하는 유일한 토대가 되었으며, 예언적 영감은 더 이상 예언의 요소로 인정되지 못했다(암 3:8; 렘 5:13 등).
6세기 초반 국가적인 대재난의 참상 속에서 바벨론 포로지에서 활동한 에스겔 시대부터 하나님의 루아흐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가 예언의 운동 가운데 되살아 났고(겔 2:2; 3:24; 11:5 등등), 그 직후 포로기 말기 포로귀환을 눈앞에 둔 제 2이사야 시대에는 직접적으로 예언을 루아흐와 관련시키고 있다(사 48:16). 이 같은 흐름 속에 포로기 이후 제 3이사야(사 59:21; 61:1)와 스가랴(슥 7:12)는 영과 예언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마지막 단계로서 요엘(욜 2:28-32)은 하나님의 루아흐가 더 이상 예언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은,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영적 임재의 보편화적 현상을 보여주었다.
구약에 나타난 루아흐의 연구에 있어서, 지혜와 루아흐와의 관계(지혜문학에 나타난 루아흐 이해), 루아흐의 인격성 문제, 여성 신학적 입장에서의 루아흐에 대한 이해(문법상 여성형인 루아흐)는 앞으로도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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