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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시스템의 상태
3.1 그들의 열매로
실제적으로 그들은 이른바 오직 고유한 인지(의식), 관찰, 측정이 있다. 만일 자연 법칙에 따라 얻는 것이 가능한 물리적인 물체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지식으로 주어진 순간에 그들을 통하여 구매할 수 있다면, 나는 실제적인 상태에 관하여 더 이상의 질문이 무의미한 것으로 내가 적어도 그것의 지식을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축소 없이 아니라, 연장할 수 있는 더 이상의 관찰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만큼 외면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현재의 상황, 어윈 수뢰딩거,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24, 323-38
이것은 이러한 관측된 사실 뒤에 이른바 존재의 상태함수 또는 상태 벡터를 이처럼 특별한 관측할 만한 관계를 일으키는 물체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파동함수(상태)와 관측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관계로서 표현된다. 우리가 각 반응 관계로부터 성질과 연계되므로 존재의 상태의 개요(요약)에 도달한다. –
? 벡터의 상태 또는 상태 함수(State ket Vector or State Function)
여기서 ( ) 매트릭스의 성분은 가능한 상태이다.
모든 종교에서 신은 그의 특성(고유성)의 조건으로 정의한다. 이슬람교는 알라에게 101 가지의 이름으로 정의한다.
모든 유대 장로(조상)들은 하나님(신)을 그들에게 무엇이었는가라는 조건으로 발견하고 정의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자(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나의 치유자(여호오, 야웨 로페) 등 등이다.
시스템의 상태는 파동함수로서 완전하게 설명한다. 시스템에서 모든 입자의 위의 좌표 시간은 일정하게 주어진 사례에서 시스템의 상태를 정의한다. 물론, 내적 좌표로서 예를 들면, 스핀, 색깔, 매력, 진리, 아름다움 맛 또는 이러한 정의에서 무엇이든지 간에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한번 언급되었으면 시스템은 일정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모든 특성의 모든 상호적인 좌표는 상태 함수가 완전해진다면 정의해야 한다.
3.2 관찰(觀察)할 수 있는 것과 비-관찰과 연금술(鍊金術)
모든 관측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관측할 수 있는 것을 추출하는 상태함수에 대하여 작동하는 연계된 연산자가 있다. 이러한 추출된 수치 값은 시스템의 가능한 수치 값의 하나가 될 것이다.
헤르미티안 연산자(Hermitian operators)라고 부르는 특별한 연산자 등급이 있다. 그들은 양자역학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유값이 실제로 그리고 의미상의 부분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떠한 실험의 측정 출력에 대한 편리성이 실수가 되어야 한다. 비-헤르미티안 연산자가 있으나 그것들은 측정 가능한 특성에 대하여 연결되지 않는다. 모든 관측 가능한 특성은 헤르미티안 연산자에 의하여 표시되지만 헤르미티안 연산자는 관측 가능한 특성에 대하여 연계되지 않는다. 상상의 조건의 표현은 포함된 다른 차원이 있으며 우리가 실제 세상 안에서 상태의 투사(投射)만을 관찰할 수 있는다는 것을 표시 할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모든 차원에서 완전한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들의 이해는 오직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구원론(救援論)에서 오직 측정할 수
있는 양적인 것은 일(직무, 행위)이다. 비록 기독교인이 구원은 선행과 별개이며, 선행은 구원에 달려 있거나 또는 관련된 개인의 상태 함수에 달려 있으며. 이것은 어째서 바울이 주장한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에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야고보는 주장하기를 :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재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던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는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가끔 묘사되는 하나의 거짓 논쟁은 선한 일이 죄의 본질을 자체 유발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잠시 동안은 계략이 될 수 있다. 그런 것들은 이다음 거짓 선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쁜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한 논쟁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에 오로지 반대되는 일이 될 것이다.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구원되었음을 어떻게 아는가? 라는 질문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그런 방식으로서는 대답하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질문은 개인의 상태 함수를 어떻게 아는가? 라는 것이다. 대답은 간단히 그들의 열매로 안다. 라는 것이다. 요한은 같은 규율을 주었는데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다시 이따금 악한 사람이 분명한 선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반박에 대한 증거가 있다. 그는 정말로 숨은 동기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사건의 단순한 측정이 우리들에게 개인의 상태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실제적인 상태는 동기를 배신하며 결과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또한 악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주언진 간격에 따라 여러 차례 반복된 측정에서 결과를 얻어야 한다. 측정 기구의 실수 가 아니라 측정 기구 자체가 시스템 안에서 세워진다. 악한 마음의 결과로서 선한 일을 나타내려는 시도는 분명히 실제적으로 성경적으로나 잘못이다.
(마 12:24) 바리세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블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블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는 구원의 과정으로부터 나온 선한 일의 크기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구원받은 자들은 그들의 생애에서 증가된 선행을 보여야 할 것이다.
비록 우리들이 개성에 대하여 쉬뢰딩거 방정식을 쓰는 것으로부터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입자에 대한 기본적인 양자역학적 접근을 많이 이끌어내었다. 이것이 본 장에서 개발하려는 의도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러한 종류의 첫 번째 시도이며 그래서 내 자신의 제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원론에서 여러 가지 성가신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논리적 접근의 병균을 포함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보이지 아니한 것과 보이는 것이 관련된 분명히 어려운 사건에 직면하여 양자역학, 파동역학, 매트릭스역학, 쉬뢰딩거 형식주의(formalism), 양자필드 이론 그리고 모든 통일장 이론의 시도와 같은 모든 변수를 포함한 양자 이론에서 양자 이론과 과학적 공동체가 사건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따라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기본적인 어려움을 이해하고 나서 피할 수 없는 것이 결론이었다는 것을 수용하게 된다.
근본적인 어려움을 이해하고 나서 피할 수 없는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을 받아 드리게 된다. 신학에서는 반대로 분쟁에 대하여 불신과 무시의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분쟁이 없다는 것을 가정할 요점은 없다. 크게 소리를 질려 말하는 것과 가려진 형태 안에서는 분쟁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주장할 때, 나의 논리적인 능력 조차 의심할 때가 가끔 있다. 곧, “절대적인 예정과 절대적인 자유의지(自由意志)는 두 가지 모두 일관성이 있으며 분쟁 없이 공존할 수 있다. 만일 타락한 창조계(創造界)에서 논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타락 이전 아담 시대에 존재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이해하는데 실패하곤 한다. 사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로 막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스텝은 우리들의 가정의 일부가 관찰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화해를 했는가를 보는 것으로서 그들을 수용하기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과학적인 세계는 우리에게 이러한 신비에 대한 단서를 주고 있다.
바로 하나님의 현존이 그러한 관측할 만한 것을 통하여 나왔다고 할지라도.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啓示) 또는 현시(顯示)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개를 더한 어떤 선지자의 메시지로부터 떠나서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말하며 소개를 한 직접적인 메시지로서 “나는 너희 주 하나님 이다.” 성경의 대부분 특별히 구약 성경은 간략한 세계의 역사이며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국가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 아버지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출애굽기 3:6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다.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것은 야웨를 인식한 세대의 수집된 경험이다.”
모세가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유일한 대답은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역사 안에서 사람들과의 일 처리에 의하여 알려 질 수 있는 존재의 상태를 단순하게 의미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었다. 야훼는 자신을 역사를 통한 행위를 통하여 신(하나님)임을 증명하였다. 예언적인 메시지의 유효성(정당성)은 역사를 통한 증명을 조건으로 한다.
(출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마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하나님은 그의 성실과 개인들의 개인적인 체험과 수집된 경험을 통하여서만 알려진다. 개인적인 체험은 수집된 체험에 대하여 보조적인 것을 조건으로 한다. 왜냐하면 불확정성 원리 때문인데 그것에 대하여 나중에 논의하기로 한다. 그것은 어째서 수집된 경험과 국가적인 기억들이 성경을 통하여 강조되는가의 이유이다.
3.3 본의 통계적인 해석(The statistical interpretation of Born (1926))
양자물리학에서 상태는 관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관측할 수 있는 것과 관측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때로는 관측할 수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관측할 수 없는 것들은 명목상(가상)의 변수로서 참고한다.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여기서 파동 함수는 “확률 밀도 크기(증폭)”으로서 정의한다. 의미는 다음의 파동으로부터 취하여 진 증폭이다. 그래서 면적(곱셈)을 구하면 확률 밀도를 얻게 된다.
P= *
본의 통계적인 해석은 파동 함수의 절대 제곱은 어떤 결과를 관측하기 위한 확률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주어진 공간에서 부피 안에 전자를 발견하기 위한 확률). P는 확률 밀도이다. P dx는 x와 dx 사이의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얻게 되는 것으로서 설명하는 것이 최상이다.
본 규칙을 적용하는 이론으로부터 얻은 예측이 모든 실험을 완전하게 부합 시키는 사실에 관련하여 물리학자들 사이에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가정(전제)을 마찬가지로 특성의 다른 차원에 확장시켰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차원적인 공간 안에서 조차 진리(참)이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적인 물리적인 레벨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차원에서도 포함된다. 나는 서론에서 이러한 전제를 기본으로 논의하였다. 성경은 이러한 전제에 풍성하게
도움을 주고 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래서 측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외견(外見)은 모든 인류에 대하여 사랑의 물리적인 표현 안에서 보여 진다. 신의 상태의 가상적인 변수는 여러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그것은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설명해야 한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았을 때 그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연역(추론)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표현을 떠나서 보이지 않는 파동 함수를 보았다는 것의 기준과 달랐다. 만일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교회가 그 안에서 통계적으로 분명한 선한 일의 증가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교회 상태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정해야 한다. 만일 회심이 새로운 창조를 생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중생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거짓이나 구원의 체험에서의 착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여러 나라에서 교회의 역사 두 가지 모두 역사 안에서 그러한 시기를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이것은 선언하는데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시기 중에 이러한 실제를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상태를 점검하는 최선의 방법은 회원들의 정직성과 선량함을 측정하는 것이며 그것을 일반 대중들과의 통계적으로 비교해 보는 일이다. 소생을 위한 시간이다. 복음주의 교인들의 한 가지 슬픈 경향은 선행을 내려 놓고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 대신 선행으로 대체하기 위한 필요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기본 교리의 손실에 대하여 필요한 레벨 너머로 그것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약 2:18)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세상은 상대성 형성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었던 이전에 로렌츠(Lorenz), 피치거레드(Fitzgerard)와 포인케어(Poincare)의 여러 가지 결과와 공식으로 붙잡혀 있었다. 흑체(黑體) 방사 행동과 광전자(光電子) 효과가 양자(量子) 이론을 이끌어 냈다. 이것은 성장의 정상적인 과정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관찰한 사실로부터 사실 뒤에 있는 실체에 대하여 돌아가고 있다. 만일 다른 길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옳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의 배려로부터 시작한 신학의 플라톤적 형태로부터 보아온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적인 실체 또는 간섭 없이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일치하지 않는다. 콘스탄틴노플의 의회에서 폐기된 오리겐의 단일신론(Monism)은 또한 그러한 접근에 기인하였다. 하나님의 엄격한 단일신 정의는 분명히 창조된 삼위일체를 요구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육신에 대한 이스람적 반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가능한 내적 협조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의 협조에서 가벼운 차이가 다른 출력을 생산할 수 있다. 단순한 관찰은 시스템의 상태를 정의하는데 사용할 수 없다. 이것은 관찰이란 공식의 고유수치의 하나이지 전체의 대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유치(관찰한 사실)의 전체 스펙트럼을 고려할 때 우리는 상태의 정당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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