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문인.
[가계]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고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을 1세조(世祖)로 하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후손이며, 18세(世) 김을초(金乙軺)를 파조(派祖)로 하는 규정공파(糾正公派)이며, 김을초의 장남 호연당(浩然堂) 김자양(金自養)이 영천 입향조이니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청풍부사(淸風府使) 김계돈(金季敦), 조부는 직장(直長) 김장미(金長美)이다.
아버지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영릉참봉(英陵參奉) 김준(金濬)이며,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 趙氏)로 참봉(參奉) 조문경(趙文瓊)이다.
공은 중종(中宗) 병자년(丙子年 : 1516)에 태어났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오천 정씨(烏川 鄭氏)로 정중호(鄭仲護)의 따님이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참봉(參奉) 김척(金滌)과 도사(都事) 김한(金澣), 해동소무(海東蘇武) 김완(金浣)이며, 사위는 오천인(烏川人) 정용(鄭容)과 부림인(缶林人) 홍거원(洪巨源)이다.
[활동 사항]
공의 자는 덕수(德秀), 호는 명산(明山)이며, 1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애통해하며 상례를 어른과 같이 행하고 3년간 시묘(侍墓)를 행하였다. 이어 어머니를 효성을 다해 모시다가 상을 당하자 전과 같이 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종유하였고, 명종(明宗) 기유년(己酉年 : 154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을 구하지 않고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노수(盧遂),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琚)와 더불어 임고서원(臨皐書院)을 부래산(浮來山)에다 세웠으며, 또한 후진 양성을 위해 자양서당(紫陽書堂)을 건축하니 황준량(黃俊良)이 기문을 지었다. 아들 김완(金浣)의 임진왜란 때 공훈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추증되었다.
공은 선조(宣祖) 을해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석판본인 2권 1책의 『명산실기(明山實記)』가 있다.
[묘소]
묘소는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성곡리(聖谷里) 중대산(中大山)에 있으며, 이중직(李中稙)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 아래 묘재인 원모재(遠慕齋)가 있으며, 임고면(臨皐面) 삼매리(三梅里)에 자양서당(紫陽書堂)이 남아있다.
[참고 문헌]
『영천금석록(永川金石錄)』(2001)
『영양지(永陽誌)』
『경주김씨문선공파세보(慶州金氏文宣公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