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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공유영(藝空游泳)03
돌 바람 예술의 섬 <제주>
최이해(崔伊海)
모두 368개의 오름으로 이루어진 화산섬 제주. 세계유산,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네트워크 등 제주에 쏟아지는 세계인의 찬사가 하늘을 찌릅니다. 제주의 구석구석 어딘들 예술적이지 않겠습니까만, 오늘 둘러보는 너댓 군데는 순전히 필자의 취향에 의존해 선택되었음을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생각하는 정원(庭園)
성영범 원장님을 만날 수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하도 유명해진 분이라 여러 매스컴을 대해본 경륜으로 말씀이 조리 있고, 고생을 몸소 겪은 탓인지 몸짓이 너그러웠습니다.
1968년 제주에 정착했답니다.
셔츠 회사 경영자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는데 조금은 어리석은 사람 아닌가 주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네요.
그러나 지금은 산을 옮긴 우공, 우공이산愚公移山의 현대판 설화를 만든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생각하는 정원. 산 옮기기를 일단락하면서 세상에 문을 열던 1988년 당시에는 ‘예술분재원’이었는데, 나중에 ‘생각’이라는 주제가 본래의 발상을 살려준 개명이 되었습니다.
제주도 전 관광지 심사평가 1위, 제주 제일의 국빈방문지, 국가 지정 민간 정원 1호, 중국 의무교육 교과서에 소개.
중국 교과서에서 성범영 우공을 표현한 것을 보면,
개척진취(開拓進就), 견인불발(堅忍不拔), 자강불식(自彊不息) 등으로 신세대 교육 가치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생각하는 정원의 특징은, 분재와 수석 괴석이 어우러져 있고, 농부 한 사람이 퍼나른 흙으로 이루어진 동산이 제주의 오름을 닮았으며, 관람로를 따라 스토리텔링 곧 생각하게 하는 텍스트 입간판이 요소요소에 도열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스토리 중에 이 정원을 찾았던 중국 인민일보 논설위원의 ‘신병매관기’ 컬럼이 있는데요, 분재의 미덕의 진실 공방에 자연미를 일부러 변형 조작한다는 일반론을 완전히 뒤엎는 내용이었거늘, 이 내용이 중국의 정치가들에게 제주 방문 의욕을 돋우웠고, 후진타오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까지 다녀가게 됐다는군요.
분재는 뿌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죽는다. 영양 과잉이 제일의 경계사항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빨리 늙는다. 사람은 금방 꼴까닥 죽지는 않지만 생각을 쟁기질하는 삶이 아주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1만2천여 평 넓이의 정원 어디고 성영범 원장의 손길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하루라도 눈길이 가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정원의 역사와 함께 이곳을 찾은 세계 각국의 명사들의 휘호와 보내온 찬사와 작품들이 넘쳐나고, 1톤 트럭 한 대 분량의 방명록을 전시할 박물관 건립을 계획하고 있답니다.
정원에 뿌리를 잘 내린 소나무 마흔 그루가 한꺼번에 말라죽었던 기억을 되살릴 때마다 진저리를 친답니다. 왜 죽었을까요? 그 답은 건태풍(乾太風). 바람만 몰아치고 비는 내리지 않는 태풍, 그 바람 속에 묻어온 소금기를 해송이 아닌 육송은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이랍니다. 몸으로 배운 진리인지라 그 후로는 육송은 절대 심지 않는답니다. 지금 있는 두 그루 육송은 인공 오름 덕택에 바람이 건너뛰는 자리였던지라 돋보이게 자리하고 있다네요.
“나무는 꽃이 질 때 5월부터 내년 봄의 꽃피울 일을 준비하거늘, 사람들은 제 스스로 한 약속도 하찮게 여기고 어기는 일이 많지요. 전국의 학생들에게 이 곳 정원으로 오게 하여 정직함 근면함을 가르친다면 그 중에 얼마는 어렸을 적에 웅지를 품고 미래의 국가지도자가 될 터인즉 교육 현장으로서의 큰 가치가 있는 세계적인 정원이 될 것입니다.”
울림이 큽니다.
다행인 것은 부자간에 대를 이어 정원을 가꾸고 운영하게 되어 성 원장님은 정말로 넉넉한 표정으로 제주 하르방 생불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지 무릎께를 덧댄 디자인의 누비옷이 딱 하르방입니다.
당초에는 이 정원이 진행하는 힐링 부페 점심식사를 기대했거늘, 관광객 감소로 일단 접고, 일류 단품 갈치조림이나 구이 하나로 축소했답니다. 식사를 예약하면 입장료 면제. 1인당 33천원이니 이유있는 가격이지 싶습니다. 모자를 파는 기념품 가게가 숍인숍으로 운영되고 있고, 3층의 전망대 오름 건물에서는 명품 커피도 마실 수 있는데, 저는 하와이 특산 코나KONA 를 골랐더랍니다.
추사관(秋史館)에서 대정(大靜)향교(鄕校)까지
제주 관광에서 추사관과 적거지는 유관심자에게는 성지와 같으나 요즘 젊은이들 제주 트렌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럴 만한 하나의 징표로는 ‘제주 관광지도’에 도드라져 보이는 여타 정보와는 달리 숨은 듯 작은 글씨여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유관심자이니 찾아갔습니다.
추사 김정희, 호가 너무 많거늘 그 중 하나가 완당인데, 청나라에 가서 만난 대학자 완원 선생을 흠모하여 자호했다는군요. 그는 1786(정조10)년에 태어나서 1856(철종7)년에 돌아갔습니다. 나이 55세인 1840(헌종6)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에 유배되어 9년간 머물렀으니 적지 않은 기간이며, 한 인간의 완숙기에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추사 선생은 병조참의까지 오르고, 생부와 양부 모두 고위직에 있었고 재산도 넉넉하여 모자람이 없는 행운아였던 셈입니다. 청나라 연행길에 만난 옹방강 등 대학자들과의 교류로 이미 이루어진 개인의 학문적 성과에 더하여 해동의 통유(通儒)라 불리던 추사.
북학파, 실학파, 시대를 관통하는 통섭과 융합. 그의 제주 유배는
자칫 분망 번다해질 수 있었던 말년을 학문적 완숙을 위한 겸손과 절제로 문걸어 닫아준 또다른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추사는 또 다른 건으로 북방 변경에 2년 더 유배되었다가 과천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영욕점철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습니다.
저는 추사가 획정했다는 황초령과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 이야기로 금석학의 실사구시, 빼도 박도 못하는 엄정한 진실 그 중요성을 깨달았던 적이 있거니와, 서울의 봉은사 ‘판전(版殿)’ 현판의 늙수구레 굽은 획에서도 필의 힘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일. 제주로 건너기 전 들른 해남 대흥사의
이광사(李匡師) 필 대웅전 현판을 ‘저건 글씨가 아니다’라며 내리게 했다가, 제주 유배 9년의 해배길에 다시 들러 ‘내 생각이 바뀌었네. 다시 걸게.’ 했다는 이야기. 사람은 생각을 쟁기질해야 오래 사는 법, 기나긴 유배로 글씨 추사체가 완성되고, 북학 경학과 동국 실학의 융합을 이뤄낸 추사를 단적으로 표현한 일화려니 여깁니다.
제주 추사관은 전시물이 대부분 모사본 영인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딱 1점, 대정향교에 걸렸던 ‘의문당(疑問堂)’ 이 진품입니다.
밖에서 보는 건축 자체는 봐줄 만 합니다. 우리나라 건축가 승효상의 설계인데, 국보로 애지중지 하는 ‘세한도(歲寒圖)’에 그려진 내용을 구현하여, 뭉툭한 듯 1층만 있고 동그란 창 하나가 상징적으로 동향으로 났으며, 세한도 소나무 세 그루가 적당히 벌려져 조경을 단순 심원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추사 유배길을 거치는 올레길이 세 갈래나 되고, 대정현 읍성이 복원되어 있고, 위리안치(圍籬安置)를 구현한, 집을 둘러싼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상징적인 적거지도 볼 만합니다.
밀납인형으로 추사와 초의 선사가 마주 보고 앉아 있네요. ‘불교학’이라고, 종교에 학문이 붙을 수가 있겠습니까만 나중에 추사를 수식하는 말이 될 정도로 추사는 불교의 선지식(善知識)이 되었다는데, 저는 추사를 위해 바다를 건너 차(茶)를 가져온 정도로만 읽었습니다. 반 년 가까운 시간을 한 방에서 무릎을 밎대고 나눈 이야기가 궁금은 하지요만.
추사의 교육현장이었던 대정향교로 이어집니다
제주의 유교 유적 중 하나인 대정향교를 살피건대, 향교는 조선시대 관학으로, 서울의 성균관 휘하에 각 지방마다 설치한 향교 중의 하나입니다. 제주향교와 정의향교도 각각 존재합니다. 사학으로는 서원이 있었는데 제주목 안에 귤림서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오현단 경내에 귤림서원 터 표지석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주가 중앙 조정으로부터 가장 멀리, 그것도 바다를 건너 지리적으로 변방이었으나 목사 그것도 당상관 급의 대접받는 행정구역이었음은 조세나 특산물의 재정적 필요성에 더하여 국방과 병마 보급 등의 군사적 긴요함을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당연히 유교국가로서의 관학이 조선 초기부터 설치되었고, 유교적 교육과 풍속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대정향교는 현성 북쪽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몇 차례 옮겨졌고, 읍성 남동쪽 단산 아래 현 위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추사의 글씨 진품 현판 ‘의문당’은 이곳 대정향교 명륜당의 동재에 걸린 것으로, 지금은 진품이 추사관 전시실로 옮겨지고 모사품이 걸려 있습니다. 당시 이곳으로 나들이하며 초학(初學)들을 가르쳤던 거유(巨儒) 추사에게 전교는 동재의 현판을 지어서 써주기를 간청했고, 글씨를 받아 당시 학생이었던 이가 새겼다는 기록이 진품 현판 뒤에 적혀 있다는군요.
의문당 (疑問堂). 논어(論語)에 나오는 구사(九思) 중 하나입니다. 의문이 생기거든 물어볼 것을 생각하라. 의와 문은 반드시 붙어다녀야 군자이거늘, 요즘 저는 의문이 생겨도 슬그머니 지워버리는 얄팍한 늙마를 보내고 있는 듯 멋쩍었습니다.
대정향교 명륜당 현판이 안 보인다고 했더니, 남쪽 긴 건물 가운데 문을 열어보랍니다. 거센 바람에 고개를 숙인 듯 나지막한 건물이라 커다란 현액을 걸 수가 없어 안에다 걸었다고 합니다.
전사청은 동편에 널찍하게 한가로이 앉혀졌고, 제사 음식을 차려 진설 직전에 점검하는 찬막단도 보입니다. 제관이 다니는 길은 제주만의 독특한 검정 판석으로 깔았군요. 바굼지 오름 곧 단산이 감싸고 있는 향교 뜰에서 꿈틀거리는 추사 글씨를 연상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넓게 벌려 쓴 뫼 ‘산(山)’ 자를 연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공자와 4성인과 공문10철과 우리나라 18현에게 석전(釋奠)을 지내는 전국의 향교 대성전 앞에 3강5륜을 상징하는 나무가 있거늘, 이제는 거목으로 자란 소나무와 팽나무가 사방을 지킴이처럼 에워싸고 있습니다. 특히 북동쪽 팽나무 거목은 노거수입니다. 밑둥 우람한 자태가 볼 만합니다.
대정향교 사무국장 금당(琴堂) 이정숙 선생님을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15년 전에 대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왔답니다. 성균관 유림 교육도 수료했고, 시조창 사범이기도 하고, 대정향교 장의도 지냈는데, 지금은 사무를 총괄하고 일반 시민을 대상 시조창 강의를 주1회 이곳 의전당에서 진행한답니다. 시조창 한 수 청했더니 기꺼이 ‘나비야 청산 가자’를 사범답게 정숙 청결하게 들려주시더군요. 사위가 빨려들어 크게 고요해졌습니다. 인생은 여행길, 한 마리 나비되니 청산은 곧 제주 일색 풍광이더군요.
이중섭 미술관
중섭(仲燮)이 제주 서귀포에 살아 숨쉰다는 것은 큰 위안입니다. 한라 영봉과 서귀포의 푸른 바다를 누리며 1956년 이 땅을 떠난 한 화가의 영혼이 머무는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1996년 이중섭 기념관을 서귀포시에서 개관하고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고, 1997년 그가 살았던 집을 사들여 복원하고, 2002년 이중섭 전시관을 개관하고, 2003년 2종 미술관으로 등록하고, 2004년 1종 미술관으로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념, 전시, 미술. 용어의 변천은 곧 관련 법규의 내용을 충족시키기 위한 역사일 것입니다. 어엿한 1종 미술관이 되는 데는 가나아트와 현대화랑이라는 굵직한 중앙 미술계 두 거인의 협력에 크게 힘입었습니다. 소장 작품의 명성을 1급 수준으로 끌어올려준 쾌척 기부는 미술관 1층의 상설전시장 이중섭관의 전시 내용을 빛나게 했으며, 아울러 2층의 기획전시가 가능하도록 하여 후속 기증자가 늘어나는 선순환을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의 연보를 읽습니다.
세상에나, 40년만 살고 돌아갔습니다. 1916년부터 56년까지.
그 사이에는 일본 강점기와 광복과 전쟁이 들어 있군요. 1950년 12월 원산에서 부산으로 후송되었고, 피란민 분산정책에 따라 51년 1월에 제주로 왔군요. 3일을 걸어 서귀포로 왔고, 이장네 부엌방 1.4평 좁은 데서 4식구가 근 1년을 지내고 다시 부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미술관에 앞서 들른 그가 살던 집에서 부엌 안쪽의 공간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오글오글 콩나물시루가 자연스레 연상되더군요. 그래도 이장님 송 선생에게 고마움을 담아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반찬에 보태려고 서귀포 바닷가에서 뜯어온 해초와 잡아온 게들과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노는 서귀포의 추억 등등이 작품으로 남았다는 이런 연보를 들여다보며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미술관에 걸린 그의 작품은 유화 소품 3점과 은지화 2점이 전부이고, 아내 마사코 씨에게 보낸 그림이 곁들여진 엽서와 편지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는 1956년에 돌아갔는데, 아내 마사코 씨는 생몰 연대가 비어 있군요. 살아 있다면 100세는 넘었을 것인데, 장수하는 나라 일본인지라 가능성도 있겠다 싶습니다.
남덕(南德) 님. 중섭이 일본 유학시절에 친구의 소개로 만난 마사코 씨는 일본 패전 후 마지막 송환선을 타고 원산으로 건너와 결혼에 이릅니다. 그 때 조선식 이름을 중섭이 지어주는데, ‘남쪽에서 온 덕스러운 분’이라는 의미를 담았답니다. 아들을 셋 낳았는데 첫째는 백일해로 잃어버리고, 두 아들과 함께 1952년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중섭을 시인 구상(具常) 선생님 댁에서 작품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구 선생님이 대학 시창작 강의를 가르쳤는데, 인간 존경의 대상이 되어 수차례 여의도 시범 아파트를 찾아갔었거든요. 두 작품 중 하나는 ‘서귀포의 추억’인가,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타고 짙푸른 바다가 있고 낡은 베니아 합판 몇 올이 뜯겨져 나간 채 허름한 액자에 갇혀 거실의 피아노 위에 걸려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지화로, 천도(天桃)인가 복숭아 하나가 가득 찬 손바닥만한 아크릴 액자에 들어 있었지요.
은지화는 당시 열악한 창작환경에서 등장한 화구일진대, 못이나 딱딱한 필기구로 선묘(線描)를 한 후에 담뱃진으로 선을 살려내는 일종의 상감(象嵌) 기법이 도입된 중섭 만의 독특한 재질입니다.
중섭이 구 시인 자신을 문병오면서, ‘이 보게 상준이, 신선들이 먹는다는 천도를 줄 테니 이 거 먹고 얼른 낫게.’ 했답니다.
중섭의 죽음이 격동의 좌우 대립과 반목이라는 시대상에 가려지고
시간은 한참 흘러갔습니다. 은지화 3점이 미리 대구미문화원 책임자의 감식안(鑑識眼)에 들어 뉴욕 미술관에 기증 소장되어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고, 사후 20년이 넘어 화단의 새삼스러운 집중조명을 받게 됩니다. 전시회가 여러 곳에서 열리고, 서귀포시가 중섭을 껴안게 되었지요.
이중섭 미술관 2층 기획전시관은 ‘이중섭 친구들의 화원(畵園)’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40밖에 못 산 중섭보다는 조금 길게 산 동년배 동시대의 작가들 작품들이 이 미술관 소장품 중심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미술관 3층 옥상은 이중섭 미술관에서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그가 자주 찾았다는 바다가 내려다보입니다. 그의 시선으로 코앞에 떠 있는 문섬이며 섶섬을 끌어당겨 봅니다. 미술관 마당도 거닐어봐야 합니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소의 말’ 조각상도 돌아봅니다. 소가 그의 힘이 되었던 가난한 유년이 우뚝 뒷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듯 조형된 그 자리에 우뚝합니다.
미술관을 나와서 그가 머물다간 초옥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엊그제 활짝 피었던 목련이 황망히 지고 있습니다. 일찍 피고 서둘러 지는 봄꽃은 중섭의 생을 대변하는 듯합니다.저 아래 주차장까지는 이중섭 공원입니다. 들어섰던 민가의 흔적을 그대로 살린 꽃밭과 나무들 사이로 중섭의 좌상과 벤치가 있습니다. 사진 찍기 좋은 곳입니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그곳에 가기 전에 ‘용눈이 오름’에 들렀다 가면 더욱 좋다.
제주 가면 들러야 할 곳을 추천하는 친구의 말을 따라 용눈이 오름에 들렀거늘, 휴식년 보호 중이라 주차장에서 행로를 돌렸습니다. 올려다 보는 오름 한켠이 제법 가파르더군요.
제주도를 사랑한 사진가 김영갑을 눌러앉힌 오름들 중에 그가 가장 사랑했다는 용눈이 오름. 오늘은 작품으로 우선 보고 훗날에 만나리라 미뤄 두었습니다.
김영갑. 사진으로 제주의 너른 자연을 둥그스름한 원과 열린 곡선으로 담아낸 선구자. 그가 1957 년에 나서 2005년에 돌아갔다는 사실에서 잠깐 어지럼증을 느꼈습니다. 아, 내가 너무 오래 살고 있는 건가. 생년도가 같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돌아갔고 나는 그를 작품으로 만납니다. 더 산다는 건 분명 축복일진대 진정성 꽉 채운 그의 작품들 앞에 나는 금방 미안해집니다. 그리고 고맙고 감사합니다.
루게릭병. 사전을 보니,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랍니다. 원인 불명 희귀질환인데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근육이 움직이거나 멈취버리는, 아, 저런 절망감이라니요. 그가 50생애 후반부를 이 병으로 시달렸고, ‘암도 고친다는 세상인데 꼼짝없이 돌아갔구나.’ 전시장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의 생애가 끝나던 해였던 2005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진전이 열렸더군요. 전시나 끝나고 돌아갔을까. 4월과 5월, 전시와 장례일정이 겹치더군요. 2002년에 이 두모악 갤러리가 오픈했으니, 중앙 사단(寫團)에서는 그를 변방인으로 푸대접했던 건 아니었나, 억지 짐작도 해 봅니다.
두모악. 그가 명명한 한라의 옛이름, 제주 사랑의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는 제주에 눌러 앉았고, 그야말로 미친듯이 오름들을 오르내렸답니다. 약초꾼조차 없어 한적해서 오히려 작업하긴 좋았다네요.
그의 많은 작품들이 가로가 훨씬 긴 파노라마 기법입니다. 오름과 그 주변의 너른 풍광을 담아내기에 필요한 구도이긴 해도 당시는 별도의 장비와 후속 작업이 필요한 고난도 일이었을 겝니다.
디지털 카메라도 나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만 필름 사진의 색감이 좋아 바꾸지 않았겠지요.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1996년 나온 그의 작품집 제목에서 그 힌트를 얻습니다.
‘삽시간에 붙잡힌 한라산의 황홀’ 1997년 나온 또다른 작품집 제목에서는 제주 어디에서건 숨을 곳 없게시리 따라다니는 한라영봉을 직접 렌즈로 들이민 작가의 명민함도 읽어내 봅니다.
어쨌거나 김영갑, 그는 제주에서 폐교를 얻어 작업실로 삼을 수 있었고, 실내에 자기 작품들을 걸어 놓을 수가 있었고, 학교 운동장과 샅바를 맞잡듯 나무를 심고 돌담을 쌓고 요망진 정원 하나를 완성합니다.
잔디광장을 건너가서 한 작품 설치미술 같은 두 길 높이의 담장을 봅니다. 햇살 좋고 맑은 바람결, 올려다보는 봄하늘이 비단결같습니다.
그리고 무인 카페를 지나 장독대를 돌아 뒷동산 같은 산책로를 올라가 봅니다. 다시 앞마당. 마당 정원 자체에 떨어졌을 김영갑 님의 땀방울 냄새가 나는 듯하고, 중간담 돌 위로 마삭줄 덩굴이 겨울을 이긴 다갈색으로 봄볕에 꿈틀댑니다. 김순자 도예가 조각가의 토우(土偶)들, 작거나 크거나 도란도란하거나 다정하거나 불쑥 혼자이거나, 방문객을 반기고 말을 건넵니다.
저는 결국 김영갑, 그를 만납니다. 그의 뼛가루를 뿌린 곳. 화단 한 구석, 국기 게양대가 있었을 법한 자리. 거기 돌 하나를 껴안고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그 앞은 붉은 ‘송이’ 양탄자가 깔려 있어서 표가 납니다. 경건한 침묵과 응시. 감나무는 과연 김영갑 님의 고통을 편안하게 안아주고 있으려니, 삼가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기를 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