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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보편개념(Universale, universalia; universel, univeraux)
A. de Libéra.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1803-1804(P.3299)
- 리베라(Alain de Libéra, 1948-), 철학 교수자격, 중세철학 및 크리스트교 신학 전문
일반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편자 논쟁에 관하여 정리했다는, 즉 실재론은 사물에 앞서(ante rem), 개념론은 사물 속에(in re), 유명론은 사물 다음에(post rem)이라는 도식적 설명은, 리베라가 설명하는 보편 논쟁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철학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를 통해서 설명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 의해 강조되었으리라. 그 누군가는 그대로 플라톤의 실재론과 아리스토텔레스 개념론을 더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명론은 학문적 또는 인식론적 체계가 갖추어지기 이전이라, 또는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의 실증적 탐구가 아직 제기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리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여기서 리베라는 위의 세 가지 구분 방식도 – 사물에 앞서, 사물 속에, 사물 다음에(ante rem, in re, post rem) -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이 아니라 알베르투스(Albertus, 1193-1280)의 것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는 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은 생애 서술들에서 보면 아퀴나스는 한 때 알베르투스에게 배웠다고 한다. 아퀴나스가 세 가지 분류 방식도 스승에게 배웠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생몰 연도를 비교해 보면 알베르투스가 30년 선배인데, 아퀴나스가 쉰 살에 몰하여, 알베르투스가 아퀴나스보다 오래 살았다. 그런데도 아퀴나스 파리대학에서 두 번이나 강의한 적도 있고, 죽기 전에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수도원에서 지냈다.
보편자 논쟁에서 우선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용어를 사물과 개체에게 쓰여지는 방식을 논의하게 되면, 종과 류의 분류가 필수적이다. 이런 분류에서 상위지위를 류 개념은 실재하는 지에 논의가 생기면 당연히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이데아의 실재성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면서, 실재론이 개입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론과 실재론의 논의를 거쳐서, 아퀴나스나 알베르투스가 몰한 이후, 그리고 개별자의 문제의 특이성을 보았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5-1308)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14세기로 넘어가서 오캄(Ockham, 1270/85경-1349)에 이르러서야 종교의 색채를 벗어나 실증적인 탐색이 개입하게 되는 유명론에 들어설 것이다.
11세기에서 12세기에는 아직도 개념 또는 용어가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어떤 지위를 갖는지 분명하지 않다가, 13세기에 신의 현존(l’existence)의 논의는 존재(l’être)와 달리 다양한 모습(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현존은 구체적으로 다양한 모습이 아닐까? 14세기에 유명론은 존재와 현존에서보다 자연에서 사물들과 인성들에 대한 구체적 탐구의 길을 열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나서 15세기의 르네상스에서 자연에서 사물들에 대한 이해가 열릴 것이다. 브루노(Bruno, 1548-1600)가 신의 세계로서 존재, 신의 현실화와 구체화로서 현존을 넘어서, 신과 무관한 자연의 사물에 대한 논의에 들어설 것이다. 자연자체가 무한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 브루노이며, 존재가 현존으로 내려올 때 사물들의 실체를 주장한 것은 갈릴레이로부터 일 것이다. 그리고 50여년 이후에 사물들의 각각에도 현존과 구체성을 설명하게 되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아닐까 한다. 그러면 다른 길을 보았던 스피노자는 자연이 인격들의 현존을 생성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사는 것이 먼저라, 인성이 살아가는 권능을 내재하고 있다고 본 이는 스피노자이고, 자연에 대한 지식의 확장과 문장(명제)로 설명을 같은 계열에 두고서 인식론으로 사물 쪽의 개별성과 특이성을 찾아간 것은 라이프니츠였을 것이다. 그 다음의 새로운 생성의 길을 보는 것은 생명체 또는 유기체의 논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는 아직도 신체와 영혼에서 분리발생 또는 분리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830년 이후에야 생명은 자기 생성이라는 다른 측면을 제기할 것이다. 신은 존재에서 현존으로 내려오면서 자기 권능을 다변화를 가져왔고, 현존의 내부의 운동(자기운동)에서 신은 손을 놓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에서 나온 인간이 자연을 안다는 오만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 일 것이다. 지식을 거의 무한하게 확장했다고 여기는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의 반성은 자연, 생명, 우주에 대해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무한한 사실들, 사건들에서 매우 작고(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니르바나에 이른다). 그 숙명을 사랑해야만 한다. 아무 것도 영원히 개인의 이기심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각이 숙명을 사랑하게 하리라. (53S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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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자(Universale, universalia; universel, univeraux) ***
[개요]
보편들(universels) 또는 보편자들(univeraux, lat. universalia)이라는 항목의 지에 대한 중세의 문제는, 로스켈리누스(Roscelin, Roscellinus, 1050경-1121경)에게 부여된 “목소리의 학설”(sententia vocum) 속에서, 11세기에 특수한 모습(sa configuration, 외형)을 띤다. 로스켈리누스는 단순한 목소리들(les voix, voces) 또는 숨결(les souffles)(flatus vocis)을 가지고 류와 종을 만들었다. 이 학설은 다섯 목소리(cinq voix, quinque voces)가 변증법의 특별한 해석을 제공한다. 그 해석의 대상은 사물 속에(in re)에 있지 않고 단지 목소리 속에(in voce)에 있다. 동시대와 다음 시대의 실재론자의 학설들은 우리에게 아벨라르(Abélard, 1079-1142)의 증언에 의해 알려졌다. 아벨라르는 “초기 보편 논쟁”의 주역이었다.
[본문] [본문 전체는 한 문단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가 문단을 잘라서 구성했다.]
소위 말해지는 [첫째] “물질적 본질”의 이론은, 개별적 사물들에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이자 동일한 실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개별적 사물들은 우발성들(les accidents)에 의해서만 다르다. 그 우발성들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그러한 대로 구성한다. 둘째 이론은 소위 “무차별(l’indifférence)의 이론”이며, 이 이론은 그자체가 두 가지 변형들로 나누어진다. [1] 몇몇 저자들은 보편적 사물들(res universalis)는 수집(une collection, 집단 collectio)이리라 라고, 즉 보편적 인간은 집합(ensemble)으로 취급된 모든 인간들이다. [2] 다른 저자들에서는, 똑같은 사물(la même res)이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류와 종일 것이라 한다.
아벨라르Abélard, 1079-1142)는 이 모든 학설들을 거부하고서, 비-실재론의 관점을 주장한다. 보편자(un universel)는 우선 목소리(une voix, vox)이며 또는 여러 술어들을 가질 수 있는 단어(un mot, sermo)이다. 그가 지시한ㄴ 실재성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사물도 아니고 수집도 아니다. 사람들은 “인간들이란 인간성의 본성에서 차이가 없다”라고 단순히 말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인간들이란 인간 그 자체에서 동일하다(idem sunt in homine)고도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들은 어떤 지위(un certain statut, status)에서, 즉 인간도 인간성도 아닌 인간 존재(l’être-homme)(in esse hominem)에서 서로 일치하고나 또는 서로 만난다고 말할 수 있다.
12세기에는 다른 이론들이 제기되었다. 그 이론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론들 중에서 두 이론은. 아벨라르 자신에 이미 현재해 있었던 의미에서, 비-실재론과 플라톤주의의 기묘한 혼합으로 향하여 다양한 정도들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뽀레주의자의 전통에서 프와티에(Gilbert de Poitiers, Gilbert de la Porrée, 1076-1154) 주교와 신학자 알랭 드 릴(Allain de Lille, 1114-1202), 이들은 적합성(la conformité, conformitas) 이론을 주장한다. 즉 인간들 각각은 자신들의 고유한 형태를 갖는다. 말하자면 플라톤은 “플라톤성”(la Plationité)을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성”(Socratité)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또한 그들 사이에서 인간들인 한에서, 어떤 통합(une union, 연결, unio) 또는 적합(une conformation, conformatio)을 갖는다. 개별적 인간들의 일률성(l’uniformitas)은 삼원적인 인격성(Personnes)을 특성지우는 진실한 단일성(일률성 l’uniformité, uniformitas)과 구별된다.
다른 학파들에서 앙글로 노르만 스콜라 학자인 발샴(Adam de Balsam/Balsham, lat. Adam Balsamiensis or Adam Parvipontanus, 1100/1102–1157/1169)의 학파들(les Pavipontani)과 영국 웨일즈 주교인 믈랑(Robert de Melun 1095경-1167)의 학파들(les Meludinenses)은 방식(la manière, maneries)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 이론은 수집(une collection, 집단 collectio)의 학설의 어떤 측면을 다시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 같다.
13세기에는 실재론의 분명한 회복을 보게 된다. 삐에르 데스빠뉴(Pierre d’Espagne / Peter of Spain, s.d. 13세기 활동)에 의해 분명하게 주장되었던 술어적인 것과 보편[개념] 사이에 구별은 철학과 논리학의 공통 자리를 재빨리 차지하게 된다. “술어화할 수 있는 것은, 여럿으로 술어화된 것에 자연적으로 알맞다 것이다. 보편자는 여럿으로 현존하기에 자연적으로 알맞은 것이다.”(Pierre d’Espagne, Tractatus, 1, éd. De Rijk, p. 17.)
보편자들에 대한 질문은, “이차 의도들”(intentions secondes, intentiones secudae)의 존재론적 지위의 문제 밀접하게 상관관계가 있어서, 아랍의 노에시스(la noétique arabe)의 연관들에 의해, 깊이 있게 새롭게 되었다. 알베르투스(Albert le Grand, Albertus Magnus, 1193-1280)에서, 보편자들의 학설은 “본질의 무차별자(l’indifference de l’essence)”의 아비세나(Avicnna, ar. Ibn Sinu, 980-1037)의 이론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보편자를 고려하는 데에는 세 가지 방식들이 있다; [1] 사물에 앞서(ante rem), 보편적 원인은 그 원인의 결과들의 총체를 미리(d’avance) 소유한다(praehabens)는 점에서 그러하다; [2] 사물 속에서(in re), “개별적인 것들 속에 받아들여진” 공통적 본성이 있다는 한에서 그러하다; [3] 사물 다음에(post rem), 정신의 “형식적 의도”와 “단순 개념”인 한에서 – 이 둘(의도와 개념)은 “추상화에 의해서 개별자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서 - 그러하다. “앞선(나은) 모습(la précontenance”(proêchein: 특별한, 탁월한)에 대한 위-디오니소스의 주제와 사물에 앞선(ante rem) 보편자에 대한 아비세나의 주제를 결합한 알베르투스의 연합이론은(Super Dionysium de divinis nominibus, 2, 84, éd. Simon, p. 97) 신플라톤주의의 종별화 학설에 토대를 이룬다. 이 종별화 학설은 도미니크파인 띠에리 드 프라이베르크(Thierry de Freiberg, 1250경-1310)에서 신학적 보편자(universel théologique, universale theoloicum)와 분리의 보편성(universalité de “séparation”, univeralitas separationis), 한편으로 논리적 보편자(universale logicum) 와 다른 한편으로 술어적 보편성(universalité de “predication”, univeralitas praedicationis) 사이의 구별에 이른다. 다른 곳에서 알베르투스는 보편성들의 삼분화법(la tripartition)을 이분화(bipartite)의 구별로 환원 했다. 이분화 구별이란 생산적 보편(unversel productif, universale effectivum rei)과 추상적 보편(unversel abstrait, universale abstractum a re) c 사이를 구별하는 것으로, 이 구별은 본질적 원인(cause essentielle, causa essentialis)으로서 보편자 이론의 실마리를 구성한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회복은 14세기에 영국의 고띠에 벌리(Gauthier Burley/Walter Burley, 1275–1344)와 스코틀랜드의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 Duns Scotus, 1265-1308)에서 추구된다. 벌리에게서는 개별자들[부분자들]와 보편자들에 대한 “실재적 차이(différence réelle, differentia realis)”가 있다. 보편자들은 숫적으로 구별된 개별자들 속에 현재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편자들은 개별자들에서 “전적으로 다자화(multipliés en entier, secundum se totum)”로 있지는 않는다. 스코투스에게서 보편자들은 동등하게 사물들 속에 현재하는데, 그러나 이들은 “형태적 구별(distinction formelle, distinctio formalis)”에 의해 보편자들 자체로부터 다르다(차이가 있다). 스코투스의 실재론이 소위 말하는 “유명론”의 초기 등장들을 불러오는 반작용을 끌어 낸다. 즉 2차 “보편자들 논쟁”을 규정하는 반작용을 끌어낸다.
이제 두 이론이 주의를 끄는데, 하나는 하클리(Henri de Harclsy, Henry (of) Harclay, c. 1270경–1317)이고 다른 하나는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Guillaume d'Ockham, 1270/85경-1349)이다. 이 두 이론은 실재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단일자(singulier)이며, 따라서 이들은 숫적으로 구별된 다른 사물들의 다수성에 대해 마치 실재를 구성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고 말하는 데는 일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클리가 보편자와 개별자[부분자]는 단순한 “이유있는 구별(distinction de raison, distinctio rationis)”에 의해 구별되어 있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성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여기에서 오캄은 보편자들은 오로지 “항들(des termes, 용어들)”이고, 이 항들은 “명제 속에서 사물들의 자리를 지닌다(tenir la place, supponunt pro rebus)”고 주장하게 된다: 즉 보편자는 영혼의 바깥에 현존하는(existant extra animam) 사물(chose, res) 또는 실체(une substance)가 아니고. 그것은 다수(여러 가지)로 서술할 수 있는 “영혼의 의도(intention de l’âme, intentio animae)”이다. 그런데 실재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소크라테스와 구별되는 소크라테의 “인간적 자연/본성(nature humaine)”은 없다. 즉 소크라테스에서 “실체적인 것(le substantiel)”은 “그의 개별적[부분적] 물질[질료]이든지, 그의 개별적 형상이든지, 둘의 복합체이든지” 이다(Guillaume d'Ockham, Summa logicae, I, 18, éd. Boehner, p. 57.).
오캄과는 다른 전망에서, 뷔리당(Jean Buridan 1300-1358)의 유명론은 보편의 두 종류를 구별한다: 하나는 아래로 향한 보편(l’univerale pro subiecto), 즉 “사물들을 향해 파악된” 보편이 있고, 다른 하나는 형상을 향한 보편(l’univerale pro forma), 개념의 개념 또는 2차 의도가 있는데, 이것은(후자 보편은) 사물들 자체를 기호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manière)이다. 뷔리당에게는 다른 구별들이 있는데, 이것은 원인의 의미를 지닌 보편을 오캄주의적 전형의 논리적 보편과 대립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산적” 보편과 “추상적” 보편 사이의 알베르투스적 구별의 분명한 적응이 뷔리당의 체계의 일부를 실재적으로 이루고 있는 지를, 자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적응이 거기에서 이론적 역할보다 훨씬 더 이론사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알베르투스식 시타일의 실재론의 영속성에 의해서(장 드 메조뇌브, Jean de Maisonneuve, 13??-1418), 또 단일자 속에서 보편자의 “실재적 현전(참석)”을 주장하는 고전적 주제의 집요함에 의해서(위클리프, John Wyclif, v.1330경-1384)에 주목받았는데, 이 주목받은 다음의 시기는 보편자들을 “신적 관념들”에 동일시함에 의해서 지배되었던(제롬 드 프라하 Jérôme de Prague, 1379–1416), 실재론의 개별적 형식(파라그 학파의 실재론)의 전개를 같이(동일하게) 본다.
두 세기 동안[13세기와 14세기]에, 이처럼 보편 논쟁은 근대의 길(via moderna, 오캄주의자들)과 고대의 길(via antiqua, 스코투스주의자들, 알베르투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의 형식을 취한다. 본질에 대한 알베르투스의 이론과 장 드 메종뇌브에 의해 다시 진술되었던 “흐름”(flux, fluxus)에 대한 알베르투스의 이론, 이 이론들은 끝장을 내기 위해서, 캄포의 에이메릭(Aymeric de Campo, ?-?)의 “반(反)플라톤주의”의 실재론과 “반(反)유명론의” 실재론에 동시에 이른다. (A. de Libé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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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469(470)-399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에 아티카(Attique) 지방의 알로페케(Alopèce, Ἀλωπεκή, Alōpekē) 데모스에서 태어나서, 399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que Σωφρονίσκος)는 조각가, 어머니 파이나레테(Phénarète, Φαιναρέτη)는 조산원이다. 부인 크산티페(Xanthippe, Ξανθίππη)와 세 자식이 있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Ariston) 가계는 불확실하며, 어머니( Périctionè)는 솔론과 친척인 드로피데스(Dropidès) 후손이며, 30인 참주체 속했던 크리티아스와 사촌이며 카르메니데스의 누이이다.
O
490 위 드니(Le Pseudo-Denys l'Areopagite, 490년 경활동) 신비적 신학의 크리스트교 논설 작가. 프로클로스의 영향을 받았다. Commentarium in Dionysium Areopagitam 'De mystica theologica'. Opera éd. Borgnet 1890 t. XIV p. 811-865. Sur le Pseudo-Denys l'Aréopagite (Théologie mystique).
980 아비세나(Avicenne, ou Ibn Sīnā, Avicenna, ar. Ibn Sinu, 980-1037). 철학자, 의사. 후세의 이슬람 철학자로부터 '현자의 본보기'로 존칭되었다. 죽기 직전에는 이란에서 활약하였으며,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철학, 의학, 자연학 등 다방면에 방대한 저작활동을 보여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근본을 둔 그이 체계적 사상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지대한 자극을 주었다. 치유(治癒)의 서(書), 의학전범(醫學典範).
1050 로스켈레누스(Jean Roscelin, Roscellinus, 1050경-1121경), 프랑스 스콜라 철학자, 유명론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1076 뽀레(Gilbert de la Porrée, Gilbertus Poretta, 1076-1154) (Gilbert de Poitiers) 프랑스 스콜라 신학자, 철학자. 프와띠에 주교(1142년). 샤르트르 학파에 속한다. 그의 제자로는 Jourdain Fantosme(-1174), Yves de Chartres(1040경-1116) et Jean Beleth(-1185).
1079 아벨라르(Pierre Abélard, (Petrus Abaelardus), 1079-1142) 프랑스 철학자, 변증론자, 신학자. 개념주의 발명자(inventeur du conceptualisme). Epistolae duorum amantium (Lettres des deux amants), 1115 La romance d'Héloïse (1113-1115). 긍정과 부정(Sic et non, 1122), 불행한 이야기(Historia calamitatum 1132), L'Histoire de mes Malheurs), 편지 「Historia calamitatum. Epistola I) (« Histoire de mes malheurs. Lettre I », vers 1132)」
1095 믈랑(Robert de Melun 1095경-1167) 영국 태생 프랑스에 활동, 크리스트교 스콜라 신학자. 영국 웨일즈 지방의 히어포드(Hereford)의 주교.
1100 발샴(Adam de Balsam/Adam of Balsham, lat. Adam Balsamiensis or Adam Parvipontanus, 1100/1102–1157/1169) 앙글로 노르만 스콜라학자. 교회인물.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고, 가르쳤다.
1114 알랭 드 릴(Allain de Lille, 1114-1202), 프랑스 신학자, 시인. 자연의 한탄(La plainte de la Nature. De planctu naturae)(vers 1167-1173)
1190?? 삐에르 에스빠뉴(Pierre d’Espagne/Peter of Spain (Latin: Petrus Hispanus; Portuguese and Spanish: Pedro Hispano; fl. 13th century)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다룬 Tractatus를 썼다.
1193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 독일 신학자, 철학자. 자연과학자. 일 스콜라 철학자로 도미니크(Dominique) 교단(敎團)의 수도사(修道士)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전파하였다.
1250 띠에리 드 프라이베르크(Thierry de Freiberg, en latin Theodoricus Teutonicus ou Saxonicus, en allemand Dietrich von Freiberg, 1250경-1310), 신학자, 철학자, 도미니크 수도원 소속.
[1255 John of Paris, fr. Jean de Paris, Jean Quidort and Johannes de Soardis, c. 1255경–1306), 프랑스 철학자, 신학자, 도미니크 수도자. ]
1265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 Duns Scotus, 1265-1308)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속하였으며, 변증법을 미묘하게 잘 다루었기 때문에 "정밀한(subtile) 박사"라 불린다. 토마스주의에 반대. [들뢰즈가 주목한다.]
1270 하클리(Henry (of) Harclay, lat. Henricus Harcleius, also Harcla or Harcley; c. 1270경–1317) 영국 중세 철학자. 대학 학장을 지냄. 둔스 스코투스에게 신학을 배웠다.
1275 고띠에 벌리(Gauthier Burley/Walter Burley, 1275–1344), 영국 스콜라 철학자, 대학교수 신학자. 역사가, 문법학자 및 논리학자.
1285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Guillaume d'Ockham, 1270/85경-1349) 영국 태생 프랑스에서 활동, 유명론자. 프란체스코파,
1300 뷔리당(Jean Buridan 1300-1358) (라)Joannes Buridanus. 파리대학에서 공부한 프랑스 철학자, 열렬한 오캄주의자. 광학, 역학 분야의 과학이론가. 1340년경 임페투스 이론(théorie de l'impetus, 충격론)을 재발견.
1330 위클리프(John Wyclif, ou Wycliff, Wycliffe, Jean de Wiclef, v.1330경-1384) 영국 신학자. 영국 종교(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선구자. 별명 개혁의 새벽별(« l'étoile du matin de la Réforme »)
135? 장 드 메조뇌브(Jean de Maisonneuve, John of Nova Domo, Johannes de Nova Domo, John de Nova Domo, 13??-1418) 철학자, 초기 르네상스 철학자. 알베르투스 주의자이다.
[캄포의 에이메릭(Aymeric de Campo, ?-?) 유명론 반대주의자이다. 장 드 메조뇌프와 비슷한 시기 활동? - 에이메릭은 이 글을 쓴 리베라의 논문에 등장한다고 되어 있다.]
1379 제롬 드 프라하(Jérôme de Prague (Jeroným Pražský en tchèque), 1379 –1416), 체코 신학자. 얀 후스(Jean Hus, 1372-1415)의 동조자. 얀 후스가 죽고 일 년도 안되어 산채로 타죽었다. [* 얀센니즘의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
1901 뵈너(Philotheus Boehner, Heinrich Boehner; 1901–1955) 프란치스코파 수도자. 중세 전문가. The History of the Franciscan School, I. Alexander of Hales; II. John of Rupella - Saint Bonaventure; III. Duns Scotus; Pt. IV. William Ockham, St. Bonaventure, N.Y.: St. Bonaventure University, 1943-1946.
1918 메조뇌브(Jean Maisonneuve, 1918-2017) 프랑스 심리학자. 사회 심리학 전공. 파리 10대학 교수
1924 리직(Lambertus Marie de Rijk (L.M. de Rijk), 1924-2012) 네델란드 중세학자. 라이덴 대학 중세학 교수.
1948 리베라(Alain de Libera, 1948-) 프랑스 철학사가, 중세 전문가. La Philosophie médiévale, Paris, PUF, coll. "Que sais-je ?", 1989. La Querelle des universaux, de Platon à la fin du Moyen Âge, Paris, Le Seuil, 1996. L’archéologie philosophique, Paris, Vrin, 2016.
* 시몬(P. Simon, P.P.A. Simon, s.d.) 알베르투스 작품들 편집자이며, 알베르투스 연구소에 관여자 인 것 같은데, 다른 내용을 찾을 수 없음. (1970-80년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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