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梅花)에 그리움 싣고, 이매창(李梅窓)
이 남 천
천재는 외롭다. 그리고 미인은 더욱 외롭다. 그러기에 천재는 그리고 미인은 언제나 슬프고 괴롭다. 조선 중기 부안(扶安)의 명기(名妓)였던 매창(梅窓) 이향금(李香今), 그녀는 천재이며 미인이었다. 때문에 38년의 짧은 생애를 외로움과 슬픔의 몸부림으로 마감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심(詩心)과 시혼(詩魂)은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면서 별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남존여비와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엄격한 유교사상의 지배를 받던 조선시대, 기생은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매창의 주변에도 언제나 남정네들의 유혹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매창은 점잖은 시 한 수로써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곤 하였다.
平生不學東家食(평생불학동가식)
只愛梅窓月影斜(지애매창월영사)
詞人未識幽閑意(사인미식유한의)
指點行雲枉自多(지점행운왕자다)
평생을 두고 동가식은 배우지 못했으니
다만 매화 핀 창가에 비낀 달빛을 사랑할 뿐
선비들은 나의 그윽한 마음 모르고서
한 점 떠도는 구름 가리키며 스스로 취하는 굽은 마음.
과연 매창에게 흑심을 품은 어떤 선비가 있어서, 이 한 수의 시 앞에 다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입에 담으면서 추근거릴 수 있었을까? 설중매(雪中梅)는 냉담한 아름다움을 갖는다. 그러기에 매화가 사군자의 필두에 놓인 것은 아니었을까? 설중매처럼 냉담한 이성의 소유자 매창, 그러나 그녀가 언제나 이지적인 모습을 보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도 결국은 여자였다. 나비를 그리워하는 한 송이 봄꽃이었다. 그러기에 그도 한 사내에게 연정(戀情)을 갖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촌은(村隱) 유희경(柳希慶)이다.
유희경, 그는 예론(禮論)과 상례(喪禮)에 밝은 사람으로서 주로 야인(野人)의 삶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92년이라는 평생을 두고 엄격히 살아온 선비요, 유명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촌은이 매창을 만난 이후 결국엔 파계(破戒)를 하고 만 것이다. 더구나 그는 매창보다 28년이나 연상(年上)이었으니, 우주선이 우주 공간을 나는 세상도 아닌, 조선 중기의 일이기에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면이 바로 매창의 기인(奇人)다운 면모가 아닐까? 노래와 거문고에 능했고, 한시와 시조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여인 매창, 그녀가 이인(異人)의 풍모를 보이는 촌은에게 마음을 주고, 또 시공을 초월한 애정을 간직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매창과 촌은의 사귐은 긴 것이 결코 아니었다. 촌은은 남도 여행 중에 우연히 매창과 상봉한다. 천재는 천재끼리 통하는 것인가? 매창의 절조와 촌은의 정열적 정의감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평생을 두고 꺼지지 않는 뜨거운 불꽃으로 남게 되었다. 길지 않은 사귐이 있은 뒤 촌은은 귀경한다. 그런 이후 둘 사이에는 소식마저 두절되었다. 이때부터 매창은 수절로써 사랑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더욱 깊어만 갔다.
하룻밤 봄비에 버들과 낙화는 봄을 다투는데,
술잔 놓고 이별을 아끼는 안타까움 참기 어려워라.
-自恨-
동풍 건 듯 부는 삼월 낙화는
여기 저기 흩날리고
가인(佳人)의 상사곡(相思曲)은 애절하기만 한데
강남의 님은 돌아오지 않어라
-春思-
촌은과의 이별 후 매창의 정한(情恨)을 짐작하게 하는 산문시들이다. 이러한 매창의 시는 당대에도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 매창의 노래를 듣고 열광하던 사람들이 어찌 매창의 내면세계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노래의 내용만으로도 열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매창의 촌은을 향한 그리움은 갈수록 그 농도를 더해 간다.
남은 다 자는 밤에 내 어이 홀로 깨어
옥장(玉帳) 깊은 곳에 잠든 님을 생각는고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사랑하는 임과 이별한 후 어떤 위로도 받을 수 없는 상황, 얼마나 외로웠으며 또 얼마나 원망스러웠을 줄을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외로움의 크기와 비례하여 그리고 갈등의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속에서 잉태하고 출산되는 노래는 아름다움의 크기를 더하여 영롱한 빛을 발하기 마련인가 보다. 이제 매창의 외로움은 그리고 그 그리움은 극을 향하여 치닫는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별의 슬픔과 외로움을 이에서 더 표현할 수 있을까? 여조(麗朝)를 풍미했던 정지상의 ‘송인(送人)’과 함께 가히 이별가의 백미(白眉)라 이를 만한 노래이다. 부슬거리는 봄비 속에 이화는 만발하였다. 그러나 떠난 임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한숨으로 날과 밤을 이어가는 긴 세월, 그 동안 봄꽃은 몇 번이나 피고 졌던가? 어느새 또 다시 추풍낙엽의 계절 가을이다. 가을은 우수(憂愁)와 감상(感傷)의 계절, 그런데도 시인은 지나친 감정의 노출을 억제하고 있으니, 이것이 이 시로 하여금 더욱 절창의 성격을 배가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촌은 유희경이 부안 땅을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이로 미루어서도 촌은의 됨됨이를 짐작할 만한 일이다.
하루는 선비 이형(李亨)이 그 송덕비 곁을 지날 일이 있었다.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밤이다. 어디선가 애간장을 녹이는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촌은의 송덕비 곁에서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 부르는 여인, 그녀는 바로 매창이 아닌가? 이형은 그 자리에서 감동의 노래 한 수를 읊는다.
아름다운 거문고는 비석에서 오열하고
말없는 둥근 달은 산 속에서 외롭구나.
떠나 간 태수님은 비석 다시 서겠지만
미인의 우는 눈물 다시 있기 어려워라
세상에 영원한 것이 존재하기 어려울진대 유한한 인생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매창 이향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뭇 사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그녀 또한 떠나갔으니, 그녀의 나이 38세 때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은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눈물로 시를 남긴 바 있다. 선구적 지식인 허균의 눈에 비친 매창, 그녀는 바로 선녀였다.
신묘한 글 솜씨는 비단 움킨 듯
청아한 노래 소린 구름도 잡네.
천도(天桃) 훔쳐 속세로 귀양왔더니
선약(仙藥) 훔쳐 이 세상 떠나갔구나.
부용꽃 장막 속엔 등불 어둡고
비취색 치마에는 향기 남았네.
내년쯤 복사꽃이 피어날 제에
그 누가 설운 무덤 찾을 것인가?
매창 이향금, 이제 그녀가 떠난 지 4백 년, 그녀의 무덤은 부안읍의 남쪽 봉덕리에 현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매창이뜸’이라고 일컫는 한편,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추도시회 등의 기념사업이 해마다 진행되고 있다.
과연 여류(女流)란 무엇이며 풍류(風流)란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그 동안 풍류를 남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류’란 말을 접두어 정도의 의미로 폄하하여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남존여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일 게다. 때문에 필자는 풍류세계를 거론하면서 ‘여류(女流)’를 ‘여인의 풍류(風流)’란 말로 재해석하여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매창(梅窓)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서의 ‘여류’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녀의 삶의 모습이야말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풍류객의 삶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이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국장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찾아 주심에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다 보면,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고운 저녁시간 되소서.
어찌하여 조선시대 妓女의 삶은 한결같이 비극으로 끝났는지 안타깝습니다. 선인들의 퓽류를 찾아 떠다니는 이 선생님의 모습에서 촌은 유희경을 떠올려봅니다. 지나친 비약일까요? ㅎ
강선생님!
여전히 편안하시지요?
비록 妓女들의 현실적인 삶은 비극적이었을지라도 그들의 영혼만은
그 시대에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뒷산에 올랐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막 피어나는 연록의 이파리들이 열여섯 소녀의 웃음으로 저를 맞아 주더군요.
어쩌면 풍류란 저런 색깔과 저런 웃음에서 잉태되고 여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언제나 저 이파리들의 고운 웃음 닮은 날들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