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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제자도에 관한 연구 성경과 성령
- 마 19:13∼15을 중심으로 -
홍한기
1. 들어가는 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마지막 지상 명령은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데 있다. 즉 제자가 아니라면 주 예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목회를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명령처럼 먼저 제자를 삼는 일이 이루어질 때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며, 예수의 지상 명령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글에서는 제자 사역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제자도에 관하여 연구하고,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경 본문을 근거로 하여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제자도의 특성을 논하고자 한다. 필자는 ‘19, 20세기에 일어난 평신도의 발견이야 말로 제2의 종교개혁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른 진리를 다시 찾는 운동이었다면, 평신도운동은 바른 신자 상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
이처럼 20세기부터 제기되어 왔던 평신도 사역에 있어서의 초점이 되는 것은 제자사역이요,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은 제자 사역을 통한 교회 성장을 위하여 성경적인 제자도를 배우고자 많은 노력과 연구를 하여왔다. 그 문제는 현재 21세기를 살고 있는 교회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하며 관심을 모으고 있는 문제다.
예수는 공생애 동안 그의 모든 힘과 열정을 12명의 제자를 훈련시키는 사역에 쏟아 부었다. 예수의 사역의 핵심이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는 사람이다. 그리고 제자를 선택하기 위해서 예수는 어린이들을 세우고, 그들을 통하여 제자도의 출발점을 말씀하고 있으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 관문으로서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마태복음 19장 13∼15절에 나와 있는 본문 내용을 통해 어린이들과 제자도, 천국에 연결되는 연관성을 살펴보고, 어린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제자도의 기본 자질을 제자 사역 가운데 적용할 수 있는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시한 제자 양육이란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를 양육해 내서 성숙한 양육자가 되게 하고, 그를 통해 열심 있는 사역자를 얻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려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라고 하겠다.2)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제자도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만 제자란 말이 250회 나타나 있다고 보기도 하나3) 버질 게버(Vergil Gerber)는 자세히 연구하여 얻은 결론으로 영어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는 234회 사도행전에는 30회로 도합 264회 나타나 있다고 조사했다.4) 그러나 웨일론 무어(Waylon B. Moore)는 “신약성경 중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제자란 말이 269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배우는 사람, 훈련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5) 보았다. 이렇게 많이 나타나는 제자란 말의 형태는 5회만 헬라어의 동사인 ‘마데테오’로 나타나고(마 27:57, 요 19:38, 마 13:52, 행 14:21, 마 28:19) 다른 모든 부분은 명사형태로 나타나 있다. 특별히 마태는 28장 19, 20절에서 제자란 말을 동사형태로 쓰되 명령법 시제인 ‘마데튜사테’로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 제자 양육을 얼마나 중요시하였나를 보여준다.6)
제자란 말의 명사 형태인 헬라어 ‘마데테스’의 의미는 단순히 배우는 사람(to leaner)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동사 형태인 ‘마데튜오’는 배우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선생을 따라 자기의 삶의 방향까지를 바꾸는 사람을 이르는 것이다.7) 그래서 제자란 선생과 학생간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마침내는 명령과 순종하는 관계까지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제자는 그들의 선생이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속적 관계를 유지 보존하는 학생을 의미하였으며, 그 관계가 만약 제자의 실수나 죄로 인하여 파기되었을 때는 곧바로 재출발하면서 자기의 전 인생을 예수께 완전히 위임하는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8)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제자란 예수에 의하여 배타적으로 압류 당하는 자를 의미했으며, 이러한 의미로 예수를 추종했을 때 제자를 위한 정규적인 직업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9)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제자란 예수의 인격과 삶에 전적으로 얽매이는 것이었으며, 단순히 어떤 과정을 통과하여 끝나는 관계가 아니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동질 구성적인 관계였으며, 인격적 결속의 전체성으로서 이룩된 생명 공동체였다.10) 이와 같은 생명 공동체는 구약에서 발견되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처럼 생활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이 생활 공동체로서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위하여 수종드는 종의 사명뿐만 아니라, 예수의 업무를 수행하는 일도 감당해야 했다.11)
3. 어린이 축복 기사
지금까지 일반적인 제자도와 신약성경에 나타난 제자도에 관한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제 그러한 내용이 마태복음 19장 13∼15절을 중심으로 어린이와 제자도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논의하고 본문에서 나타나는 제자도의 신학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3.1. 본문 개괄
본문은 결혼, 이혼과 재혼에 관한 내용 다음에 연결하여 천국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지면서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이 ‘천국을 소유하는’(마 19:13∼15) 자들로 나타내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왜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자들로서 자격을 주셨는가? 당시 어린이들은 사회적인 계층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왜 어린이들을 안수하시면서 축복하셨는가? 어린이들의 어떤 특성 때문에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용납하고 환영하셨는가? 다음 내용은 가족구조와 관계된 당시 사람들의 문화적 정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 사건은 두 가지를 확인하게 한다. 문자적 측면에서, 그것은 천국의 소유에 있어서 아이들의 중요성을 말한다. 또 비유적 측면에서, 그것은 어린이들을 모델로 제자들과 제자도를 위한 모형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12) 왜냐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린이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3)는 마가복음의 언급은 이 본문이 단지 문자로서만이 아니라, 비유로서의 두 가지 측면에서 깨닫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린이들과 가족구조에서 그들의 위치에 대한 문화적 상황은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환영하는 것과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거부하는 것 사이에 대조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제자도를 위해 하나의 비유로서 ‘어린이들’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문화적 상황에서 어린이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어떤 위치로써 존재하고 있으며, 제자로서의 정체성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논쟁에서 성인들의 사회적인 위치는 높고, 힘이 있고, 완성된 상태인 것에 반하여 어린이들은 그 이미지가 열등한 상태, 주변적인 상태, 변화되어 가는 상태, 그리고 평등주의의 구조를 연상하게 한다. 이 논쟁은 이같은 특징들이 마태의 이야기 세계에서 어린이들(그리고 제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제자들의 신분적인 위치와 생활 형태에 대하여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1) 어린이들로서 제자들은 사회적 계층의 최하위에 있는 어린이들과 동일하게 주변성과 연약함의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주변성은 사회적 계층의 가치들에 반대되는 반구조적인 존재로서의 표준이 된다. (2) 어린이들로서 제자들은 계층적인 존재가 아니라 평등주의적인 생활 형태에 속한다. (3) 제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의존하여 영속적으로 성장해가는 자들로 존재하게 된다.
3.2. 본문 주석
본문 13절은 수동태 과거 시제인 ‘데려오다’(were brought)를 통해 행동을 수행하는 자들을 동일시하고, ‘어린이들’(파이디아)이란 주격을 명백하게 사용함으로서, 사람들이 어린이들에 관해 주의를 집중하도록 한다. 비록 이런 행동을 하는 자들의 신분을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의 동기는 ‘데려오다’(were brought) 라는 동사에 의해 알게 한다. 이 동사는 앞에서 12번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능력, 축복과 호희를 얻고자 사람들이 예수께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14) 이전에 사용된 동사와 앞서의 구절은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데려오도록 하시는 자로 여기게 하고 있다.
마태는 마가의 ‘그가(예수) 그들을(어린이들) 만지시기 위해’라는 표현 대신에 예수의 손(‘그가 그들을 안수하기 위해’)에 대해 명백한 언급을 함으로 적극적인 기대를 확신하게 한다. 당시 사람들의 성경적 전통에 대한 상식으로 보면 ‘손’과 ‘축복’의 연관성을 잘 알고 있었다.15)
안수는 축복을 내릴 때도 행해졌다. 따라서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창 48:14)와 예수가 어린이들을 축복할 때(마 19:15, 막 10:13; 16)도 머리 위에 안수했다. 이는 제사장의 축복이나(레 9:22) 예수가 승천할 때 그의 제자들에게 내린 마지막 축복에서처럼(눅 24:50), 무리에게 축복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것과도 관련이 있다. 아마도 환자를 치료할 때 안수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축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막 5:23; 6:5; 16:18, 눅 4:40; 13:13). 여기서 가장 기초가 되는 이념은 정신적 완전함과 육체적 생명력을 자신에게서 상대방으로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나니아는 시력을 잃은 바울에게 안수하여 그가 다시 볼 수 있게 했으며(행 9:12; 17), 바울 또한 멜리데에서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안수로써 낫게 했다(행 28:8). 사도행전 5장 12절에서는 사도들의 손이 표적과 이적을 많이 행했는데, 특히 병 고치는 데 그러했다.16)
더 나가서 복음에 대한 지식은 그들에게 더 넓은 영역을 볼 수 있게 한다. 예수의 안수하는 행동은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를 의미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침례 요한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의 손은 심판의 기능과 연결되고 그의 권위는 인간의 운명과 삶을 지배하는 표현으로 연결된다(3:12).17) 그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또한 어린이들을 포함하여(9:25) 긍휼함으로 치료하시는(8:3)18) 예수의 손의 사용을 통해 나타난다. 만지시는 것은 예수의 치료의 말씀과 그의 안에 보여지는 믿음을 따라 수행된다.19) 예수의 손은 또한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표현된다(12:49). 그는 손을 펼쳐 물에 빠져 가는 베드로를 구원하신다(14:29∼31).20) 예수의 손은 믿음을 의심하는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지탱하시고, 그의 존재를 알게 하시고, 긍휼과 위험과 두려움의 상황에서 제자들을 위해 실제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안수하시기 위해 아이들을 그에게 데려오게 하시고 사람들이 그 사건을 통해 부유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의미는 ‘아주 좋고, 아주 강하고, 아주 용감하고 아주 순전하신’21) 예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으로서 예수의 권세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축복에서 암시하는 의미는 또한 그의 도움을 바라는 자들에게 호의와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데려오는 이야기는 어린이들이 천국의 가족 안에서 예수의 자비와 긍휼을 받는 자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의 긍정적인 동기는 ‘그들을 꾸짖는’(19:13, 14) 제자들과 대조된다. 제자들의 반응은 어떤 점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의 성품을 본다면 여전히 완전하지 않기(19:10) 때문에 대개 예수와 늘 함께 동행하였다. 제자들이 꾸짖는 이유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아마 제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데 지체되지 않도록, 또는 그들이 예수의 복음전파를 오해했거나, 예수께서 지치셨던 것과 연관되거나 본문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지지기반은 빈약하지만, 어린이들에게 주는 관심에 질투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는 어린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향한 제자들의 꾸짖음은 아마도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앞두고 계신다는 그들의 생각에 근거했거나22) 이혼문제로 말미암은 변론으로 피곤하실 거라는 생각에서 제자들은 아이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제자들의 반대는 그들의 거부 행위와 예수의 환영하는 반응 사이에 분명한 대조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19:14).
예수는 하나님이 축복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제자들을 꾸짖으신다(19:13후). 14절에서 예수의 말씀(19:14)과 행동들(19:15)이 그러한 사실을 나타낸다. 그의 어린이들에 대한 환대는 강하게 들렸다. 그리고 “허락하라”(allow)/용납하라(permit)라는 대조적인 명령으로(19:14전), 그리고 “금하지 말라”(do not forbid)/방해치 말라(hinder)(19:14후)는 부정명령으로, 그리고 (‘내게’) 라는 개인적인 접촉을 강조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마 19장 14절 후반절의 천국은 ‘이러므로 그런 자들에게 속한다’고 행동을 용납하는 이유를 소개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천국을 소유하는 어린이들을 천국으로부터 배척하려고 할 권리가 없다.
15절에서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안수하신다. 그의 긍정적인 반응과 그들의 요구에 대한 승낙(19:13)은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데려왔던 자들과 함께 동의를 표하고 그들을 거부하는 제자들을 반대하여 세우신다. 천국 안에 있는 어린이들의 위치와 천국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자인 예수에 의해 확정된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19:14)’는 구절에서 ‘이런’의 용어는 중요하다. 만일 그 선언이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고 읽는다면, 그 본문은 단지 천국과 천국의 가족에서 아이들이 포함되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의 용어는 어린이들이 천국에 속한 모든 자들의 본보기 또는 대표자들(‘이런 자들’)이라는 더욱 큰 차원을 덧붙인다. 즉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어린이들처럼 순수하며 순종하는 자들이어야만 한다.23)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들의 것”이 아니라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며, 또한 그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기질과 성품임을 알려 준 이유이다.24) 그러기에 ‘어린이들’은 모든 제자들의 표준에 대한 한 비유가 된다.
또한 이 구절은 ‘거기에 있는 아이들의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뜻으로, 천국은 아이들처럼 온유함과 신뢰, 겸손함과 순결, 소박함을 가진 자의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는 어린이들을 귀찮게 생각하는 대신 그들의 천진함(벧전 2:2)과 겸손한 특성(벧전 5:5)을 설명하신 후 맞아들여 축복하셨다(막 10:13∼16, 눅 18:15∼17).
예수의 사역 가운데 그리고 그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여명과 관련된 모든 심각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어린이들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진실로 어린이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친화력을 갖고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다. 더욱 놀랄 만한 사실은 어린이들이 제자들의 행동을 위한 모범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성인으로 구성된 제자들의 공동체인 ‘어린이들’에게 예를 들어 가르칠 수 있는 어린이들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어린이들과 또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을 축복하신다.25)
제기된 문제는 어린이들이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어린이들이 제자들의 특성으로서 나타나도록 이해하는데, 마태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태도, 특성 또는 행동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답변을 찾는 데에 좋은 실마리가 되기 때문에 그 이야기로부터 얻었던 아이들에 대한 태도들 검토해야 하고, 그 다음에 마태 당시의 사람들의 문화적인 정황에서 어린이들에 대한 신분적인 위치를 살피도록 해야 한다.
3.3. 유대 사회의 배경
마태의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에 대한 언급은 주로 2장과 18장 1∼6절, 두 장에서 주로 밀집되어 있다.26) 2장은 그 용어가 8번 사용된다(2:8, 9, 11, 13(2번), 14, 20, 21).27) 그 장에서 예수의 수태와 탄생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동방박사들의 반응과 헤롯왕의 반응 사이에 대비가 나타난다.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기쁨(2:1, 2, 11)에 대조하여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2:2, 3)이 태어난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다(2:3). 경배하기를 바라는 체 하면서(2:8) 그 아이의 태어난 위치에 관해 물으나 헤롯의 진정한 의도는 죽이기 위한 것으로 확실하게 드러난다(2:13, 16). 그 아이는 매우 중요한 아이지만의지해야 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조그마한 아이며, 그 아이는 세상의 위험과 위협을 당할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능력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사람들보다는 차라리 한계에 부딪히고 무능력한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그 아이가 생존을 위해 두 가지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1장 18∼25절에 잉태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은 연약하고 약한 아이를 경고하여 피하게 하고, 안내하고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주의 천사’는 요셉의 꿈에 세 번 나타난다(2:13, 19, 20, 22).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의도에 대하여 꿈으로 지시를 받고(2:12), 헤롯에게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2:15, 18, 23),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은 그 아이의 생존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지시에 믿음으로 받고 순종하는 자로서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2:14, 15). ‘아이와 그의 어머니’(2:13, 14, 20, 21; 2:11)의 반복된 구절은 그 아이의 의존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청중들은, 예수 이름의 부재(1:21)와 ‘어린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사용됨으로서 그 말은 연약함, 약함과 위험의 경험을 연상하게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연상하게 한다. 위험과 위협의 가운데, 그 어린이는 하나님의 보호, 전지전능하심으로 안전하게 보존된다.
두 번째로 ‘어린이’에 대하여 밀집되어 나타난 곳은 마태복음 18장 1∼6절에 있는데, 그곳에서는 그 말은 4번 사용된다. 천국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관한 반응에서(‘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니이까?’), 예수는 한 어린이를 천국에서의 가치에 관해 가르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자로서 그들 가운데에 앉혔다.
세상 나라에서는 세도와 권세를 과시하는 자들을 ‘큰 자’로 여긴다(20:25). 또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의 일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는 어린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셨으며, 예수 자신이 우리에게 낮아짐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예수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 8).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종의 위치에서 그 백성들을 섬기시다가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다. 천국의 왕인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낮아지셨듯이, 천국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것을 예수는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즉 본문의 ‘큰 자’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부족함을 알아 하나님께 의지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그러한 어린이의 모습이야말로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가져야 할 모습인 것이다’. 한편으로 이 본문이 어린이가 제자도를 위한 비유로서 강조되지만,28) 어린이들에 대한 그것의 문자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은 청중들이 예수께서 한 어린이를 그에게 부르실 때 시작된다. ‘부르다’라는 동사는 12제자를 부르는데 마태복음 10장 1절에 사용된다(또한 15:32; 20:25). 부르심에 대한 전후관계(천국에서 가장 큰 자에 관한 질문)는 명백하게 어린이, 제자도와 천국에 연결된다. 예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어린이는 모든 제자도의 출발점으로 나타난다. 즉 제자란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름 받은 자’들이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라는 예수의 선언는 18:3∼5에 명시되어 있다.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에 대한 중심적인 차원은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마 18:4에 여기고 있다.29) 이 동사가 전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마 11:29에서 그 논지를 만날 수 있고, 거기에서 마태의 예수는 ‘겸손한 자’로서 여기고 있다.
예수는 끊임없이 복종하고 순종하는(3:13∼4:11),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가르침 받는(11:27) 아들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맥에서 그는 하나님의 요구를 모르거나 무지한 자들을 부르사 하나님을 의지하는 유사한 관계 안으로 이끄신다(11:28, 29; 18:1∼6).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인식한 자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11:27, 29). 단지 구원에 관하여 그들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자들은 어린이 같이 겸손하게 되고 예수의 은혜를 받게 된다. 이러한 겸손은 예수를 믿는 것과 같고(18:6), 제자도의 출발점이고, 최후의 심판(23:33)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삶은 자신과 같이 의지해야 하고 한계에 부딪히는 자들인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18:5)을 의미한다. 예수는 마치 그가 어린이들을 치료하시는 데 관심과 긍휼을 보여주신 것처럼(9:2; 17:14∼20)30),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을 공급하시는 것처럼, 이런 자들을 동일하게 여기고 있다(18:5).31)
그러므로 마 19:13∼15에서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환대하는 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 데, 그것은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영접하고, 보호받고 긍휼을 받아들이는 자들로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정결하거나 순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주변성, 하찮음과 연약함 때문에 예수께서 만지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그들을 위해 기꺼이 맞아주실 만한 가치의 대상인 것이다(19:13). 예수께서 제자도를 위한 모델로서 나타내신 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다. 어린이들이 되는 것, 그들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것에서 그들이 예수께 의존해야 하고 의탁해야 하는 것을 인식할 때, 제자들 또한 천국에 들어갈 자로서 예수의 축복을 받는다.
예수와 제자들에 의해 어린이들에게 보여지는 대조적인 태도들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려는 더 폭넓은 전후관계의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1세기 세상의 문화적 정황으로부터 가질 것으로 추측하는 당시 사람들은 어린이들에 관한 어떤 상식을 가지고 있는가?32)
3.4. 신학적 의미
마태 당시의 가족과 사회 속에서 어린이들의 신분적 위치에 관한 이와 같은 인식을 통해, 우리는 이제 본문에서 그것의 상호관계를 평가할 수 있다.마 19:3에서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쫓아버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의 1세기 사람들에게서 어린이들에 대한 지배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당시의 사회적 위치에서 살펴본다면 어린이들은 일반적으로 별로 중요치 않고 주변적 존재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별로 중요치 않은 어린이들로 인해 예수의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러한 거부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환대하고 축복하는 예수의 행동에서, 사람들은 주요한 가치적 태도와 반대되는 태도, 그리고 그에 따르는 행동을 봄으로써 어린이의 변화된 개념을 재발견한다. 천국에서 어린이의 위치에 관하여 마 19:10∼12에 의해 일어난 문제들에 반응하여, 그리고 제자들의 행동에 대비하여, 예수는 천국의 가족의 모든 일원들은 (성인/어린이) 또는 (젊은/성숙한) 상태에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제자도(18:3, 4)와 천국에 속한 자들(19:13∼15)에 대한 비유로서 어린이들을 이용한 것은 제자들의 신분과 생활 형태에 관해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해를 전달하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경험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비유는 어린이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문화적 정황이 적어도 제자들의 신분과 생활 형태의 4가지 이상의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그 비유는 제자도의 입문의 측면으로서 변화하는 과정 단계를 나타낸다. 초기 단계의 과도기적인 성질은, 한편으로 어린이들은 성숙한 성인들과 시민들이 되어야 하므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영속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모습으로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르심으로부터 그가 다시 돌아와서 심판할 때까지 제자도의 목표를 이행하는 중에 있다라는 것을 이전의 복음서의 장들로부터 알 수 있다(참고, 7:24∼27). 그러므로 제자도를 위한 비유로서 ‘어린이들’은 당시 사회적 계층에서의 성인시민권을 위한 변화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목표인 재림을 위해 영속적으로 변화하는 영속적인 제자도의 특징을 나타낸다.
두 번째로, 이 비유는 의존관계를 보여준다. 어린이들이 그들의 의존성과 연약함을 떨쳐버리고 독립적이고 강한 성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인 측면에서 강조하는 데 반하여, 의존성은 ‘제자들을 위한 표준이다’라는 반 구조적인 존재를 낳게 한다. 제자들은 하늘의 아버지에 의존하게 된다. 제자들은, 단지 그 다음에 제자들의 정당성이 입증되기 때문에, 재림 전에 성인의 상태(독립상태)가 되지 못한다. 영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태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로서 살고, 하나님 아버지께 의존하고 순종하도록 부름 받는다.
세 번째로, 예수는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 제자도는 일상의 계층적인 사회 형태의 가장자리에서 사는 사회적으로는 무시당하는 생활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자들은 사회계층의 형태에서 성인의 존재로서 가지는 연관된 능력과 안전성을 포기하도록 하는 결단을 선택해야 했다. 어린이들이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주변성과 연약함은 제자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비유는 제자도는 평등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제자들은 어린이들이다. 당시 유대의 가족 관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대조적으로, 부모들의 의무에 관한 언급은 없다. 보통의 가족 조직체에서 부모의 지위는 다른 사람들 위에 있는 힘을 나타내며, 이것은 제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린이들로서, 제자들은 한 아버지, 곧 하나님을 가진다(23:9). 제자들 사이의 평등성과 계층이 없는 것은 천국의 가족으로 합당한 것이다. 제자들은 계층적인 구별들이 제거되며, 모든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평등주의적 생활 형태인, 반 구조적인 존재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변화성, 의존성, 주변성과 평등성의 네 가지는 주변적인 신분과 반 구조적인 생활 형태가 본문과 당시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서 당시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적 측면에서 어린이들은 환영받고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구성된 천국 가족의 일원으로서 확정된다. 제자도의 한 비유로서 ‘이런 자들’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변성(연약함), 변화성(과도기), 의존성과 평등성을 나타내는 주변적인 신분적 존재와 생활 형태를 의미한다.
4. 나가는 글
상기에서 제자의 의미와 마태복음 19장 13∼15절에서 나타난 어린이와 제자도, 그리고 천국에 관한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본문 내용을 통해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인 제자도의 특성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본문 말씀에서 어린이들의 특성을 통하여 제자도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부른 것처럼 제자들을 불렀다. 또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고 말한 것처럼 섬기는 자로서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천국에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 20:26∼28)고 말하고 있다.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로서 겸손(벧전 5:5)과 천진함(벧전 2:2)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 제자들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이니라(마 23:8)”고 말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할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로서 나타나는 제자는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으로 의지하여 순종, 복종해야 하며, 끊임없이 변화되고 성숙해가는 평등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제자로서 예수를 따를 때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인 본 논문의 제자도를 통하여 성경적인 제자의 특성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바람직하다.
각주)
1) 빌리 행크스, 윌리암 A. 셀, 『제자도』 주상지 역 (서울: 나침반사, 1994), 7.
2) Francis M. Cosgrove, Essentials of Discipleship (Springfield: NAV Press, 1980), 27-28.
3) Gerhard Kittel, ed. TDNT vol. Ⅳ Grand Rapids: WM. B. Eerdmands Publishing Co., 1967. s.v. “마데테스” 441.
4) Vergil Gerber, ed., Discipling through 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Chicago: Moody Press, 1980), 37.
5) Waylon B. Moore, Multiplying Discipling (Springfield: NAV Press, 1981), 21.
6) Gerber, op. cit., 37.
7) Ibid., 37.
8) Colin Brown, op. cit., 480.
9) 칼 홀, 『신약의 교회개념』(서울: 한신대학출판부, 1983),110.
10) Ibid., 112.
11) Ibid., 106.
12) Warren Carter, ed., Households and Discipleship a Study of Mattew 19, 20 (Sheffield: JSOT Press, 1994), 90.
13) 막 10:15과 마 19:14,15를 참조하라.
14) 일곱 가지 예들에서 (4:24; 8:16; 9:2, 33; 12:22; 14:35; 17:16), ‘데려오다’는 귀신들로부터 치료받거나 구원받기 위해 예수께 데려오는 사람들을 말한다; 네 가지 예들에서 (2:11; 5:23, 24; 8:4), 그것은 하나님 또는 예수께 선물을 헌납하는 것을 언급하며, 한편으로 18:24에서 그것은 심판자인 예수께 접근하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로 사용된다(cf. 25:20). 그것은 예수의 권세가 인정되고, 사람들이 그에게 진지한 태도로 접근하는 문맥들에서 사용된다.
15) 창 48:14, 15를 참조하라.
16) 성경백과대사전편찬위원회 편, 『성경백과대사전』 제10권(서울: 성경교재간행사, 1989), “안수” 항목.
17) 고대에 이것의 사용에 대하여, 로제(E. Lohse)는 “케이르”TDNT, IX, 424-34, 특히, 425에서 찾아 볼수 있다.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냄으로 70인역(시 135:12)에 있는 하나님의 손의 이미지를 알고 있다.
18) 마 8:15; 9:8를 참조하라.
19) 안수하는 것은 이적의 사건들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G. Theissen, The Miracle Story of the Early Christian Tradi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62, 63.
20) 이 본문에서 제자도의 범위는 증명이 잘 되어 있다: 베드로의 핵심 역할, 주님의 사용(14:28, 30), 소리침은 나를 구원하며(14:30), 예수는 네가 왜 의심하였느냐?며 베드로가 믿음이 적은 자로서 말한다(14:31), 예배의(14:33) 제자들의 반응(cf. 14:26)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14:33)라는 그리스도론적 고백이 동반된다.
21) B. Matthews, A Life of Jesus (New York: Harper & Brothers, 1931), 314.
22) 도날드 헤그너, 『마태복음(하)』 WBC성경주석 33B, 채천석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0), 875.
23) 마 18:3과 비교해 보라.
24) A. Lukyn. Williams, 『마태복음(중)』 풀핏성경주석, 이병철·장부영 역 (대구: 보문출판사, 1981), 717.
25) 도날드 헤그너, op. cit., 876.
26) ‘파이디온’이라는 용어는 18번 사용된다. 거의 모든 용어는 두 장 18:1∼4와 19:13∼14에 나타난다. 또 다른 세 개의 모양은 마 11:16(시장에서)과 마 14:21과 마 15:38 (예수가 먹이신 무리들에서)를 포함한다. 문자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의 두 가지에서 어린이들에 대해 사용된 다른 용어들은 ‘테크논’(14번)과 ‘파이스’(8번)를 포함한다. 테크논은 가족관계의 부분으로서 어린이들을 지배하며(2:18; 7:11; 10:21; 18:25; 19:29; 21:28; 22:24; 27:25), 한편으로 파이스는 일반적인 어린이를 위해 사용되거나 치료받는 종으로 사용된다(8:6, 8, 13; 14:2; 17:18), 왜냐하면 예수 그 자신(12:18)과 예루살렘에서(21:15) 예수에게 문안하는 어린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27) 어린이들에 대한 두개의 다른 용어가 또한 나타난다.
28) Thompson, Mattew's Advise, p. 76. 막 10:15을 마 18:3으로 번역함으로, 어린이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비유이며, 마태는 본문의 비유적인 성질을 강조한다.
29) Thompson, op. cit., 79, 84.
30) 마 8:6, 8, 13을 참조하라.
31) 마 25:31∼46을 참조하라.
32) Oepke, ‘파이스’, 639∼45를 찾아보라; G. Bertram, '파이듀오', TDNT, V. pp. 597∼603; H.R. Weber, Jesus and Children (Atlanta: John Knox, 1979), 5-8, 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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