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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출신 산업디자이너 폴 콕세지(36·사진)는
어느 날 첨단 디지털 음향 장치의 홍수에 밀려 길거리에 버려진 낡은 스피커를 봤다.
"저 스피커도 한때는 첨단 기술의 산물이었겠지. 왜 우린 새걸 만들려고만 할까?
기술의 유산(遺産)을 되살려보는 거야!"
모든 종류의 스피커와도 연결할 수 있는 블루투스 오디오 장치 'Vamp'가 그렇게 탄생했다.
재활용 센터와 손잡고 기기를 사는 고객에겐 버려진 스피커를 하나씩 무상으로 지급했다.
이름하여 '스피커 구하기(Save a Speaker)' 프로젝트였다.
"요즘 IT업체들을 보면 첨단 기술로 늘 새로운 제품 만들기에만 신경 써요.
폐기된 배터리, 어댑터 같은 장치는 나 몰라라 하지요. 이젠 'IT 쓰레기'에도 관심 돌릴 때입니다."
최근 '서울디자인위크 2014'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폴 콕세지가 말했다.
그는 근래 론 아라드, 제임스 다이슨 등이 써 내려온 '영국 디자인'의 계보를 잇는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는 디자이너다.
RCA(영국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잉고 마우러와의 협업 등으로 명성을 쌓았고,
올해 런던 PAD 전시에서 베스트 디자인상을 타기도 했다.
꽃을 전도체로 이용해 꽃을 꽂으면 불이 들어오는 조명 '라이프01',
남녀가 입을 맞추면 불이 들어오는 천장 조명 '키스(Kiss)' 등 그의 작품엔 '기술'과 '이야기'의 결합이 중요한 축을 이룬다.
"기술은 쉽게 늙어버려요. 기술만 담은 작품은 몇 달만 되면 구문이 돼버리더군요.
이야기를 담으면 생명력이 지속돼요." 그가 '따뜻한 기술'을 신봉하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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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스피커 위에 둔 블루투스 오디오 장치 ‘Vamp’. (사진 오른쪽)스티로폼 일회용 컵으로 만든 조명 ‘스티렌’. 패션 디자이너 도나 카렌이 소장했다. /폴 콕세지 제공
폴 콕세지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군중조달) 덕에 디자인의 유통 경로가 획기적으로 바뀌고 있다"며
"좋은 아이디어를 대중의 힘으로 키울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Vamp'의 경우 지난해 시제품을 만들어 동영상을 만들고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 올렸다.
이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 하는 2262명이 10만1743파운드(약 1억7679만원)를 모금해 제품을 상용화할 수 있었다.
자전거용 조명도 이 방식으로 제품화했다.
디자이너로 살아남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 아니냐고 하자 대답 대신 일화를 들려줬다.
"2003년 대학 졸업할 때 무일푼이었어요. 원룸에서 뒹구는데 스티로폼으로 만든 일회용 컵이 눈에 들어왔죠.
오븐에 넣어 살짝 열을 가해봤더니 팽창하면서 딱딱하게 굳더군요. 그걸 이어 붙여 조명을 만들어 졸업 전시에 내놓았죠."
이 작품을 유명 패션 디자이너 도나 카렌이 2000파운드(약348만원)에 사가며 일약 스타가 됐다.
"기회가 없다고, 돈이 없다고 투덜대지 마세요. 당신의 아이디어를 지지해줄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을 테니."